신라 역사 속 문학

신라 시조 혁거세왕

최고봉 국어 2020. 7. 9. 12:18

 진한 땅에는 예부터 여섯 마을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으로,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며, 촌장은 알평(閼平)이라고 한다.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경주시 동천동의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 그 아래에 석탈해왕릉이 보임)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 조상이 되었다.(노래왕 9년에 部를 설치하고 급량부라 했는데 고려 태조 天福 5년 경자년에 중흥부(中興部)로 고쳤다.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며,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回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

 

 셋째는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으로, 촌장은 구례마(俱禮馬)라고 한다. 처음에 이산(伊山-혹은 개비산(皆比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山珍支村)으로,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라고 한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와서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으며,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터가 있는데 여기가 최치원의 옛 집이라는 설이 거의 확실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지금의 금강산(경주 북쪽에 있는 산) 백률사 북쪽산)으로 촌장은 지타(祗沱)라고 한다. 처음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한기부(韓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활아(活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양촌(明活山高耶村)으로, 촌장은 호진(虎珍)이라고 한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彌村), 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여섯 부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다. 노래왕 9년(132년)에 처음으로 여섯 부의 명칭을 고쳤고, 또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서한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연호) 원년(기원전 69년) 임자년(고본(古本)에는 건무(建武) 원년이라고도 하고 또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남쪽 언덕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군주가 없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덕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고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지금은 신라정이락 하는데 경주의 탑정동 솔밭에 있다.) 옆에 번갯불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을 뒤덮었고 백마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자주색 알(혹은 푸른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려 사내 아이를 얻었는데, 모습과 거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동천(東泉-동천사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아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 이 말은 향언(鄕言)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이라 이름하고 위호(位號)는 거슬한(居瑟邯-또는 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스스로 "알지 거서간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일컬은 것인데, 이후부터 왕의 존칭이 되었다.)이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축하하며 말했다.

 "이제 천자가 이미 내려왔으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짝을 맺어 드려야 한다."

 그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아리영정이라고도 한다.)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혹은 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갈라 얻었다고도 한다.) 여자 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닭은 새로운 태양의 도래를 알리는 새다. 이러한 닭 토템은 신성 관념의 반영이며 신라 전체의 토템으로 확장된다.) 아이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했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남자 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향인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 했기 때문에 성을 박씨로 했다. 여자 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이 열세 살이 되는 오봉(五鳳) 원년 갑자에 남자 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여자 아이를 왕후로 세웠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의 풍속에 경(京)자를 서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후세에 이르러 국호가 신라로 정해졌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후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왕후는경주의 오릉(五陵)에 혁거세와 같이 묻혀 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한곳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쫓아 다니며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五體)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