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역사 속 문학

경덕왕 - 삼국사기 권 제9

최고봉 국어 2020. 7. 15. 11:35

신라본기 제9

 

경덕왕(景德王)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헌영(憲英)이고 효성왕의 친동생이다.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헌영을 태자로 세웠던지라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비는 이찬 순정(順貞)의 딸이다.

 

 원년(742) 겨울 10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2년 봄 3월에 주력공(主力公)의 집 소가 한꺼번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당 현종이 찬선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를 보내와 조상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고, 아울러 왕을 신라 왕으로 책립했으며, 선왕의 관작을 승습하게 하였다.

 현종의 조서에 이르기를 "작고한 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영해군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指節寧海軍使新羅王) 김승경(金承慶)의 아우 헌영(憲英)은 대를 이어 어진 생각을 품고 떳떳한 예의를 마음에 쏟아 대현(大賢)이 베푸신 풍속과 교화는 조리가 더욱 밝아졌으며, 중국 법제의 의관을 성심으로 본받고 있도다. 바닷가 보배를 사신을 보내 나르고, 구름과 짝하는 머나먼 길을 따라 조정에 왕래하며, 대대로 충순한 신하가 되어 거듭 충절을 드러냈도다. 지난번 형이 나라를 계승하더니 세상을 뜨고 뒤이을 아들이 없으매 아우가 이를 받아 그 뒤를 이었으니, 이 또한 떳떳한 법도라. 이에 제후를 품어들이는 예의로 우대해 책명하노니, 마땅히 옛 전통을 지켜 번방(蕃邦)의 어른된 명망을 계승할 일이다. 아울러 특별한 예우를 더해 중국 관작의 칭호를 내려주나니, 형의 관작인 신라왕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충지절영해군사(新羅王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充持節寧海軍使)를 이어받으라"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황제하 주해한 『효경』 한 부를 보내주었다.

 여름 4월 서불한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맞이해 왕비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지진이 있었다. 겨울 12월에 왕의 아우를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했더니, 황제가 좌청도솔부원외장사(左淸道率府員外長史)의 관위를 수여하고 녹색 도포와 은제 디를 내려주어 돌려보냈다.

 

 3년 봄 정월에 이찬 유정(惟正)을 중시로 삼았다. 윤 2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여름 4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말을 바쳤다. 겨울에 요사스러운 별이 중천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닷 말들이 그릇만하였으며 열흘 만에야 없어졌다.

 

 4년 봄 정월에 이찬 김사인(金思仁)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에 수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5월에 가물었다. 중시 유정이 물러나고, 이찬 대정(大正)이 중시가 되었다. 가을 7월에 동궁을 수리하였다. 또 사정부(司正府)와 소년감전(少年監典)과 예궁전(穢宮典)을 설치하였다.

 

 5년 봄 2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여름 4월에 죄수를 크게 사면하고 큰 술잔치를 베풀었으며, 승려 1백 50명에게 도첩(度牒)을 주었다.

 

 6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를 시중(侍中)으로 고쳤다. 국학의 여러 전공 과정에 박사(博士)와 조교를 두었다.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3월에 진평왕릉에 벼락이 쳤다. 가을에 가물더니,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전염병이 돌자, 사신을 열 개 방면으로 내보내 안정시키고 위무하였다.

 

 7년 봄 정월에 천구성이 땅에 떨어졌다. 가을 8월에 태후가 새로 지은 영명궁(永明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처음으로 정찰(貞察) 1명을 두어서 백관을 규찰해 바로잡게 하였다. 아찬 정절(貞節) 등을 보내 북쪽 변경을 감찰하게 하였다. 처음으로 대곡성(大哭城)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8년 봄 3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에 천문박사(天文博士) 1명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명을 두었다.

 

 9년 봄 정월에 시중 대정이 면직하고, 이찬 조량(朝良)이 시중이 되었다. 2월에 어룡성(御龍省) 봉어(奉御) 2명을 두었다.

 

 11년 봄 3월에 급찬 원신(原神)과 용방(龍方)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동궁아관(東宮衙官)을 두었다. 겨울 10월에 창부(倉部)에 사(史) 3명을 더 두었다.

 

 12년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접견하지 않자 그냥 돌아갔다. 무진주에서 흰 꿩을 바쳤다.

 

 13년 여름 4월에 수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5월에 성덕왕의 비(碑)를 세웠다. 우두주에서 상서로운 지초(芝草)를 바쳤다. 가을 7월에 왕이 관리에게 명해 영흥사(永興寺)와 원연사(元延寺)를 수리하였다. 8월에 가물고 누리가 있었다. 시중 조량이 물러났다.

 

 14년 봄에 곡식이 귀해 백성들이 굶주렸다. 웅천주의 향덕(向德)은 가난하여 봉양할 것이 없자, 다리의 살을 베어 그의 아버지에게 먹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에게 물자를 자못 후하게 내려주고, 아울러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망덕사으 탑이 흔들렸다[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에는 "그 나라에서 당을 위해 이 절을 세웠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두 탑이 서로 마주하여 높이는 13층이었는데, 갑자기 흔들리면서 붙었다 떨어졌다 하여 며칠 동안이나 마치 쓰러지려는 듯하였다. 이해에 안녹산(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났으니, 아마 그 감응인 듯싶다"라고 하였다.

 여름 4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가을 7월에 죄수를 사면했으며 늙은이, 병자,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늙은이들을 찾아 위문하고 곡식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이찬 김기(金耆)를 시중으로 삼았다.

 

 15년 봄 2월에 상대등 김사인(金思仁)이 근년에 재이(災異)가 자주 나타나는 까닭에 상소하여 시국 정치의 잘잘못을 극론했더니, 왕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왕은 현종이 촉(蜀) 지방에 있다는 마을 듣고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成都)에 이르러서 조공하게 하였다. 이에 현종이 친히 5언 10운시를 써서 왕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신라 왕이 해마다 조공을 닦고 예악과 대의명분을 잃지 아니함을 가상히 여겨 시 한 수를 내려주노라"라고 하였다. 그 시는 이러하다.

 

   천지사방은 명암과 동서로 나뉘어 있어도

   세상 만물은 중심자리를 마음에 머금도다

   조공해오는 구슬과 비단은 천하를 두루 돌아

   산 넘고 물 건너 상도(上都) 향해 찾아든다

   아득한 회포야 머나먼 동방에 막혔어도

   오랜 세월 천자의 교화 부지런히 받들었다

   가없이 드넓은 땅 끝 닿은 그곳은

   깊고 푸른 바다 건너 귀퉁이에 있거니와

   사람마다 명분과 의리의 나라라고 일컫나니

   어찌 산 다르고 물 다른 이방이라 할 것인가

   사신은 다녀가면 풍속 교화 전해 받고

   사람마다 찾아와서 법전 제도 익혀간다

   의관 차림새는 예의범절 받들 줄 알고

   충성과 신의는 유풍(儒風)을 높힐 줄 안다

   성실도 하여라, 하늘이 굽어보리니

   어질기도 하여라, 그 덕행이 외로우랴

   깃발 아래 서로 도와 백성을 다스릴새

   보내준 후한 선물 애틋한 정성 깃들었다.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매운 풍상에도 늘 변하지 말지라

 

 

 현종이 촉(蜀) 지방에 갔을 때 신라가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황제 있는 곳까지 찾아가서 조빙했으므로, 그 지극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시를 준것이다. 그 시 가운데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매운 풍상에도 늘 변하지 말지라"라고 한 것은 아마 옛 시에 "모진 바람이 있은 후에 굳센 풀을 알 수 있고, 난시에야 비로소 곧은 신하를 알게 된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선화(宣和) 연간에 송에 사신으로 갔던 김부의(金富儀-김부식의 아우)가 이 시의 각본(刻本)을 지니고 변경(汴京)에 들어가 관반학사(館伴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였더니, 이병이 황제에게 올렸다. 황제는 양부(兩府) 및 여러 학사들에게 돌려보인 후, 조칙을 전해 이르기를 "진봉시랑(進奉侍郞)이 바친 시는 참으로 명황(明皇)의 글씨로구나"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여름 4월 큰 우박이 내렸다. 대영랑(大永郞)이 흰 여우를 바쳤으므로 남변제일(南邊第一)의 관위를 수여하였다.

 

 16년 봄 정월에 상대등 사인이 병으로 면직하자, 이찬 신충(信忠)이 상대등이 되었다. 3월에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월봉(月俸)을 없애고 다시 녹읍(祿邑)을 내려주었다. 가을 7월에 영창궁(永昌宮)을 중수하였다. 8월에 조부(調府)에 사(史) 2명을 더 두었다. 겨울 12월에 사벌주를 상주(尙州)로 고치고 1주· 10군 · 30현을 소속시켰다. 삽량주는 양주(良州)라 하고 1주· 1소경 · 12군 · 34현을 소속시켰다. 청주는 강주(康州)라 하고 1주· 11군 · 27현을 소속시켰다.  한산주는 한주(漢州)라 하고 1주· 1소경 · 27군 · 46현을 소속시켰다. 수약주는 삭주(朔州)라 하고 1주· 1소경 · 11군 · 27현을 소속시켰다. 웅천주는 웅주(熊州)라 하고 1주· 1소경 · 13군 · 29현을 소속시켰다. 하서주는 명주(溟州) 하고 1주· 9· 25현을 소속시켰다. 완산주는 전주(全州)라 하고 1주· 1소경 · 10군 · 31현을 소속시켰다. 무진주는 무주(武州)라 하고 1주·  14군 · 44현을 소속시켰다.

년 봄 정월에 시중 김기(金耆)가 죽었으므로, 이찬 염상(廉相)이 시중이 되었다. 2월에 왕이 교서를 내려 중앙과 지방 관리들 가운데 유가를 청해 만 60일이 된 이는 해직하도록 결단하였다. 여름 4월에 의술을 정교하게 궁구한 의관을 뽑아 궐내의 공봉의사(供奉醫師)에 충당하였다. 율령박사(律令博士) 2명을 두었다. 가을 7월 23일에 왕자가 태어났다. 우레와 번개가 심하더니 절 열여섯 곳에 벼락이 쳤다. 8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18년 봄 정월에  병부(兵部)와 창부(倉部)의 경(卿)과 감(監)을 시랑(侍郞)으로 고치고, 대사(大舍)는 낭중(郎中)으로 고쳤으며, 집사사지(執事舍知)는 집사원외랑(執事員外郞)으로, 집사사(執事史)는 집사랑(執事郞)으로 고쳤다. 조부(調府) · 예부(禮部)· 승부(乘府) · 선부(船府) · 영객부(領客府)·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 사정부(司正府)· 위화부(位和府)· 예작전(例作典)· 대학감(大學監) · 대도서(大道署) · 영창궁(永昌宮) 등의 대사(大舍)를 주부(主簿)로 고치고, 상사서(賞賜署) · 전사서(典祀署) · 음성서(音聲署) · 공장부(工匠府) · 채전(彩典) 등의 대사는 주서(主書)라 하였다. 2월에 예부의 사지(舍知)를 사례(司禮)로 고치고, 조부의 사지를 사고(司庫), 선부의 사지를 사주(司舟),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司例), 병부의 노사지(弩舍知)를 사병(司兵), 창부의 조사지(租舍知)를 사창(司倉)으로 고쳤다. 3월에 혜성이 나타나더니, 가을이 되어서야 없어졌다.

 

 19년 봄 정월에 도성 동북쪽에서 북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사람들이 귀신의 북소리라고들 하였다. 2월에 궁궐 안에 큰 못을 파고, 또 궁구러 남쪽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를 놓았다. 여름 4월에 시중 염상이 물러나고, 이찬 김옹(金邕)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 7월에 왕자 건운(乾運)을 왕태자로 봉하였다.

 

 20년 봄 정월 초하루에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해에 햇무리가 끼었다. 여름 4월에 혜성이 나타났다.

 

 21년 여름 5월에 오곡(五谷)· 휴암(鵂巖) · 한성(漢城) · 장새(獐塞) · 지성(池城) · 덕곡(德谷)의 여섯 성을 쌓고 각각 태수를 두었다. 가을 9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2년 여름 4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수도에 바람이 크게 불어 기와가 날아가고 나무가 뽑혔다. 8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두번째 꽃이 피었다.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이 면직하였다.

 대나마 이순(李純)은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세속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버려 왕이 여러 차례 불러도 나오지 않더니,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어 왕을 위해 단속사(斷俗寺)를 창건해 세우고, 그곳에서 살았다. 그 뒤 왕이 풍악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궁궐 문에 찾아와 왕에게 간하여 아뢰기를, "듣자오니 옛날 걸(桀)과 주(紬)가 주색을 탐닉해 음탕한 쾌락을 그치지 않더니, 이로 말미암아 정치가 문란해지고 국가가 패망했다 합니다. 이처럼 엎어진 수레바퀴 자국이 앞에 있으니, 뒤따르는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거듭나시어 나라의 수명을 길이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감탄하여 곧 풍악을 그치게 하고, 다시 그를 내실로 이끌어 그가 말하는 오묘한 도리를 들었는데, 이야기가 세상을 다스리는 방책에까지 미치니 며칠이 되어서야 그쳤다.

 

 23년 봄 정월에 이찬 만종(萬宗)이 상대등이 되고, 아찬 양상(良相)이 시중이 되었다. 3월에 혜성이 동남방에 나타나고, 용이 양산(楊山) 아래 나타나더니 조금 있다가 날아가버렸다. 겨울 12월 11에 크고 작은 유성들이 나타났는데, 보는 이들이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24년 여름 4월에 지진이 있었따.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황제가 사신에게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를 수여하였다. 6월에 유성이 심성(心星)을 침범하였다.

 이 달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덕이라 하고, 모지사(毛祗寺) 서쪽 산에 장사지냈다.(『고기』에는 이르기를 "영태(永泰) 원년 을사(765)에 죽었다"라고 했는데, 『구당서』 및 『자치통감』에는 모두 "대력(大曆) 2년(767)에 신라 왕 헌영(憲英)이 죽었다"라고 했으니 아마 잘못이 아닐까 한다.)

 

 

 

 

참고 문헌

 

김부식 지음, 이강래 옮김, 삼국사기1, 한길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