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역사 속 문학

처용가 배경 설화 - 삼국유사 권 제2 기이 제2 - 처용량과 망해사

최고봉 국어 2020. 8. 25. 19:40

 

 제 49대 헌강대왕 대에는 서울에서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담장이 서로 맞닿았는데,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길에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때 대왕이 개운포(開雲浦- 학성(鶴城) 서남쪽에 위치하므로 지금의 울주다)로 놀러 갔다 돌아오려 했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고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었다.

 "이는 동해에 있는 용의 변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유사(有司-벼슬아치, 즉 담당하는 관리)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내리자마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 때문에 그곳의 이름을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의] 개운포라고 한 것이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들어와 왕의 정사를 보필했는데, 이름을 처용(處容-양주동 박사는 '처용'의 원뜻에 대해 "한자의가 아닌 제융 혹은 치융이란 말에서 그 원뜻을 찾아야 한다."라고 했다)이라 했다. 왕은 미녀를 주어 아내로 삼아 그의 마음을 잡아 머물도록 하면서 급간(級干)이란 직책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밤이 되면 사람으로 변해 그 집에 와 몰래 자곤 했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물러났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돌아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이때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 처용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제가 공의 처를 탐내어 범했는데도 공이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탄스럽고 아름답게 생각됩니다. 맹세코 오늘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함을 물리치고(이러한 미신은 불교 최전성기인 고려에 와서 궁중 의식으로서 처용무와 처용회로 발전되었다- 이동환 설)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려고 했다.

 

 왕은 돌아오자 곧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 경남 울주군 문수산에 있던 절로 지금은 소실되어 터와 주춧돌만 남아 있다)라 했다. 망해사를 또 신방사(新房寺)라고도 했는데, 이는 처용을 위해 세운 절이다. 또 왕이 포석정(鮑石亭-경주시 배동에 있는 임금의 별궁으로 지금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웠다는 석구만 남아 있다)으로 행차하니, 남산의 신(神)이 나타나 어전에서 춤을 추었는데(『삼국사기』 「신라본기」제 11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御駕) 앞에서 가무를 하였는데"라고 했다) 옆에 있는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다. 그래서 왕이 몸소 춤을 추어 형상을 보였다. 그 신의 이름은 혹 상심(祥審)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한다. 어떤 이는 이미 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므로 그 모습을 살펴 왕이 공장(工匠)에게 본떠 새기도록 하여 후대에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이라고 했다고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형상을 일컫는 말이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춤을 추자 이름을 옥도금(玉刀鈐)이라 했고, 동례전(同禮殿)에서 연회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어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 불렀다.

 

「어법집(語法集)」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산신이 춤을 추고 노래 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고 했다. '도파'란 말은 아마도 지혜(智)로써 나라를 다스리는(理)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아채고 모두(多) 달아나(逃) 도읍이(都)이 곧 파괴된다(破)는 뜻이다."

 이는 바로 지과 산신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어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 나라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면서 즐거움에만 점점 더 탐닉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만 것이다.

 

 

* 처용가 핵심 정리

 

1. 작자 - 처용

2. 연대 - 신라 49대 헌강와 때(9세기 경)

3. 갈래 - 향가(8구체), 무가(巫歌)

4. 성격 - 주술적

5. 의의 - 벽사진경(僻邪進慶)의 민요적 무가

          - 의식무(儀式舞), 또는 연희(演戱)의 형태로 고려, 조선 시대까지 계승됨

6. 주제 - 관용과 극기의 위풍(역신을 쫓아냄)

7. 처용의 정체

① 역사적 관점 - 용의 아들 처용이 서라벌에서 벼슬한 것은 지방 통제의 수단으로 지방 호족의 아들을 서라벌에 인질로 잡아두었던 역사적 사실과 관련지을 수 있다. 그리고 처용의 아내를 범한 역신은 타락한 중앙 귀족의 자제로 파악한다. 그렇다면, '처용가'는 지방 호족과 중앙 귀족의 갈등을 표현한 것이다.

② 신라 시대 서역(西域)과의 교역 사실과 관련한 관점 - 처용은 신라에 왔던 이슬람 상인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

③ 종교적 관점 - 처용을 축사(逐邪)와 벽사진경(僻邪進慶)의 주력(呪力)을 가진 무속적 ·신적 존재로 파악

 

 

❀ 고려 시대의 '처용가(處容歌)'

 

신라 성대(新羅聖代) 밝은 성대

천하 태평은 나후(羅侯-해와 다을 기리는 신으로 처용의 위용을 비김)의 덕

처용 아비여

이로써 사람들이 별말이 없게 되니

이로써 사람들이 별말이 없게 되니

모든 재앙(災殃)이

일시에 소멸하도다.

 

아아, 아비의 모습이여

처용 아비의 모습이여

머리 가득 꽂은 꽃이 무거워

기울어진 머리

아아, 수명(壽命)이 장수(長壽)할

넓은신 이마

산(山) 모양 비슷한

긴 눈썹

애인을 바라보듯

너그러운 눈

바람이 잔뜩 불어

우글어진 귀

복사꽃간치

붉은 얼굴

오향(五香) 맡으시어

우묵해진 코

아아, 천금을 머금으시어 넓으신 입에

백옥 유리같이 흰 이에

사람들이 기리고 복이 성하시어 앞으로 나온 턱에

칠보를 못 이기어 숙이신 어깨에

길경(처용무의 소품)에 겨워서 늘이신 소매에

지혜 모이어 덕이 있으신 가슴에

복과 지혜가 모두 넉넉하시어 부르신 배에

붉은 패옥에 겨워서 굽어지신 허리에

함께 즐겨 크게 평안하시어 기신 다리에

아아, 계면조에 맞추어 춤추며 도는 넓으신 발에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바늘도 실도 없이

바늘도 실도 없이

처용 아비를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많이 많이 세워 놓았구나.

12제국이 모두 만들어

아아, 처용 아비를 많이도 세워 놓았구나.

 

버찌야, 오얏아, 녹리(鹿梨)야

빨리 나와 내 신코를 매어라.

아니 곧 맨다면

궂은 말 떨어지리라.

서라벌 밝은 달 아래

밤새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내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아아,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이뇨.

이럴 적에

처용 아비만 본다면

열병신(熱病神)이야

횟감이로다.

천금(千金)을 주랴

처용 아비야

칠보(七寶)를 주랴 처용 아비야.

천금 칠보도 말고

열병신 잡아 날 주소서.

산이나 들이나

천 리 밖으로

처용 아비를

비켜 갈지어다.

아아, 열병대신(熱病大神)의

발원(發願)이로다.

 

<악학궤범>

 

1. 주제 - 역신을 몰아 내는 처용의 위용과 기상

2. 구조 - 서사(序詞)로서 처용의 힘을 설명

          - 처용의 위압적인 모습을 그림

          - 처용 가면을 제작하는 과정을 이야기함

          - 역신을 물리치는 처용의 위용을 말함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 참고 자료

정경섭 엮음, 고전 문학의 이해와 감상1, 문원각,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