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알기

윤선도

최고봉 국어 2023. 2. 2. 10:59

.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조선 중기 시조문학의 최고작가로 시조를 문학작품으로 인식하여 작품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여 창작하고 손수 필사하며 한 권의 책으로 간직하는 등 시조에 대한 애정이 강한 작가이다. 더욱이 그는 높은 학식과 충효를 겸비한 학자이자 정치가로서 어려운 시대를 살다간 인물이다.

 

. 고산의 생애

 

 윤선도의 본관은 해남(海南)이고, 자는 약이(約而)이며,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그가 출생한 곳은 서울의 연화방(蓮花坊)으로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 대학로 부근이다.

 

 고산은 6세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특별히 스승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명문가 출신인데다가 재능이 비범했다. 8세 때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의 남부에 있는 명례방(明禮坊) 종현(鍾峴)의 종가(宗家)에서 살았다. 지금의 명동성당 부근으로 지금은 윤선도 선생 집터라는 기념비만 남아 있다.

그가 양자로 입양되던 해에 부친 유기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 그는 부친이 외직에 나갈 때면 그 임지를 따라다녔다. 13세 때는 부친이 안변도호부사에 임명되자 안변 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17세에 남원 윤씨 돈()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 해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2년 뒤에는 소과(小科)의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승보시(陞補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21세에는 장남 인미를 낳았다. 그러나 양모(養母)인 구씨(具氏)를 여의고 또 다음해에는 지신의 생모(生母)를 잃었다.

25세가 되던 10월 모친의 상복을 벗은 윤선도는 비로소 11월에 종가의 선산이 있는 해남에 내려갔다. 이때의 감정을 남귀기행이라는 122구의 장편 기행시로 남겼다.

26세 봄에는 진사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어 9월에는 차남 의미를 얻었다. 그러나 12월에 자신을 낳아준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30세 대인 161612월에는 유생의 신분으로 병진상소를 올렸다. 이이첨(李爾瞻), 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조정의 집권세력이 권력을 남용하여 국사를 그르친다는 내용의 상소인데, 당시로서는 30세밖에 안 된 백의(白衣)신분인 그가 이이첨의 비리를 공박(攻駁-남의 잘못을 몹시 따지고 공격함)하고 나선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이이첨 무리의 미움을 사서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43수의 한시와 견회요(遣懷謠)5, 우후요(雨後謠)1수 등의 시조를 처음으로 지었다.

1년 뒤 다시 경상도 기장(機長)으로 옮겨졌다. 33(1619)에 유배지에서 부친 유기의 부음을 접했다. 부친은 고산이 병진상소를 올린 탓에 63세 때 삭탈관직되었다가 69세로 죽었던 것이다.

1623(37) 3월에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그는 유배에 풀려났다. 64개월 동안의 귀양살이였다. 그리고 이 해 4월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7월에는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조정에서는 다시 의금부도사, 안기찰방(安奇察訪- 찰방은 조선 시대, 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의 외직 문관 벼슬)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안았다.

42세인 1628(인조 6) 봄에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는 장유의 추천으로 봉림대군(10)과 인평대군(7)의 사부가 되었다.

43세에 공조좌랑을 시작으로 하여 공조정랑(44), 호조정랑한성부윤(46), 예조정랑세자 시강원문학(47)을 거쳤다.

47(1633)에는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4월에 시행된 증광복시에서는 대책(對策)에서 일등으로 뽑혔다.

인조의 고산에 대한 두터운 신임은 반대파의 시비를 불러일으켰는데, 48세에는 그의 승진을 못마땅하게 여긴 재상 강석기가 그의 벼슬길을 막으려고 모함한 탓에 종6품직인 성산현감에 좌천되었다. 치욕적인 강등이었지만 그는 그곳에서 목민관으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그러나 조정에 상달되지 못하고 오히려 상관인 경상도 감사 유백증이 모략의 글을 임금에게 올렸다. 임금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고산은 그해 겨울에 병을 핑계로 사직한 뒤 귀향했다.

 

이러한 당쟁으로 인한 벼슬살이의 좌절과 환멸은 그에게 세상을 멀리하고 은둔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에 깊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501636(인조14)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의 침략 소식을 접한 고산은 의병을 모집하여 배를 타고 바닷길로 서해를 거슬러 강화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129일 강화도에 이르렀을 때 왕자과 빈궁이 있는 그곳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고, 고산은 배에게 통곡을 하며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해남에 이르러 왕이 청나라에 굴욕적으로 항복했다는 사실을 안 그는 통분해하며, 배에서 내리지 않고 아예 제주도에서 살겠다고 남으로 내려갔다. 그러다가 보길도의 산봉우리와 골짜기의 수려함을 보고 배에서 내렸다. 격자봉에 올라가 본 빼어난 산 기운과 수석의 기이함에 이끌려 이곳에 머물기로 하였다. 이때가 1637년 윤선도 나이 51세였다.

보길도에 들어온 지 1(52) 봄에 고산에게 대동찰방과 사도시정의 벼슬이 내려졌지만, 그는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반대파의 모함이 심해졌고,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게까지 당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금을 뵙지 않고 돌아갔다는 것과, 피난온 차자들을 붙잡아 섬으로 데려가 함께 살면서 벼슬에 나오지 않는 죄목으로 모함받아 16386월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유배 기간은 오래되지 않았으니 그는 이듬해(53) 2월에 풀려나 고향 해남으로 돌아갔다.

 

유배에서 풀려나 영덕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고산은 8세 된 아들 미아의 죽음을 전해들었다. 미아는 비록 천출로 태어났지만 고산이 늦은 나이에 얻어 상당히 해지중지했던 아들이었다. 일찍이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무렵에 둘째 아들 의미를 잃었다. 고산은 이때의 슬픔을 도미아, 견회등의 장편 한시를 통해 읊었다.

고산은 고향에 돌아온 뒤 집안일을 전부 첫째 아들 인미에게 맡기고 자연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는 귀양지에서 돌아와 백련동(지금의 연동)에 머무르지 않고 그곳과 가까운 수정동에 살 터를 찾아 집을 지었다. 그곳은 해남군 현산면에 있다. 그는 이곳에서 인소정을 짓고 못을 만들어 인공 원림을 조성하였다. 그는 수정동이 있는 이곳을 수정산으로 불렀으며, 경치가 뛰어난 곳곳에 이름을 붙였다. 고산은 이러한 경관을 관조하면서 뛰어난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다. 또한 수정동 근처에 있는 문소동을 찾아가 정사(精舍)를 두었다.

54세 봄에 꿈에서 본 곳을 찾아가 새롭게 금쇄동을 발견하였다. 그는 수정동과 문소동, 그리고 금쇄동을 왕래하면 산중에서 살았다. 이처럼 그는 이들 세 속을 오가는 산중 생활을 10년 정도 계속하게 된다. 고산은 이 세 곳을 오가며 56세에 이르기까지 시조 19수를 지었는데 이들 모두를 산중신곡이라 불렀고, 56세에 자신이 만든 책자인 금쇄동기에 이들 작품을 수록하였다. 산중신곡가운에 만흥6수가 있다.

 

63(1649) 5월에 이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였다. 1651(65)에 고산은 보길동의 부용동에 들어가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효종은 즉위 3(1652, 66)에 고산에게 성균관 사예(司藝)를 특별히 제수하여 불렀다. 그러나 반대파 서인(西人)의 모함이 계속되자 그는 거듭 상소를 올려 벼슬을 그만두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효종은 다시 동부승지에 그를 제수하였으나 정언(正言) 이만웅이 고산을 비난하고 나서자 임금은 노하여 이만웅을 관직에서 내쫓았다.

소산은 임금의 뜻을 알고 고향에 내려갈 수가 없어서 일단 경기도 양주의 고산(孤山)에 머물렀다. 그의 시조 몽천요(夢天謠)3수는 이 무렵에 지어졌다. 이 해 8월 예조참의에 제수되자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고산은 10월에 왕에게 시무팔조의 소를 올리면서 재차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공신 원두표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일로 그는 오히려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 해에 고산은 해남으로 돌아왔다.

 

67세에 고산은 부용동에 들어지만 2년이 지난 69세에 효종이 다시 그를 부르자 서울에 올라가 잠시 벼슬을 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내려가 부용동에 들어갔다. 71세에도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았으나, 역시 사직을 청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왕은 72세의 그를 공조참의에 제수하였다.

 

이 무렵 을사사화 때 죽은 남인 출신 정개청의 서원이 송준길 무리에 의해 헐리자, 고산은 이의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반대파인 송시열과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사직소를 올려 기어이 허락을 받았다. 효종은 해남으로 내려가려 하는 그를 만류하며, 사부(師傅)를 위하여 수원에 집을 지어주고 그곳에 머무르게 하였다. 고산은 그가 머물렀던 이 집을 훗날 81세에 유배에서 풀려난 뒤 해체하여, 수원에서 남양으로, 다시 남양에서 뱃길로 띄워 해남까지 옮겼다. 그집이 바로 녹우당(綠雨堂) 안의 사랑채이다. 지금은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녹우당이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이 사랑채가 녹우당이었다. 이런 연유로 건축양식이 ㄷ자형인 일반적인 호남지방의 양반가옥과는 달리 서울의 양반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ㅁ자형으로 되어 있다.

 

73(1659) 효종이 즉위 10년 만에 돌연 승하하였다. 이 때 조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문제가 터졌다. 소위 유명한 예송논쟁으로 조대비가 3년복을 입느냐 1년복을 입느냐 하는 것인데 송시열, 송준길 등의 서인측은 후자를, 윤휴, 허목, 윤선도 등의 남인측은 전자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예송에서 남인측은 패하였고, 이에 관은 1660(74) 6월에 함경도 삼수(三水)로 귀양을 갔다. 세 번째 귀양인 셈인데 삼순는 험준한 땅이라 원래 북청으로 이배(移配)될 수 있었으나 송시열의 반대로 오히려 위리안치(圍籬安置)가 되었다. 고희를 넘긴 나이인데다가 국경 끝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귀양살이의 고생은 무척 심했다. 더욱이 중죄인의 누명을 쓴 탓에 아전들의 구박이 심했다고 한다. 그는 함경도 생활 5년간 20여 편의 시를 지었는데 대개는 힘든 귀양살이에 대해 읊고 있다.

79(1665) 3월이 되어서야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되었고, 그곳에서 14개월을 더 보낸 뒤 81세가 되던 해 7월 왕의 특명으로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났다. 8월에 해남에 돌아왔다가 9월에 다시 보길도의 부용동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5년 동안 유유자적하며 살다가, 낙서재에서 16716월에 8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고산 문학의 특징

 

고산 시가문학의 특징으로, 그가 시조를 본격적으로 문학 차원에서 창작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작품에 반드시 제목을 붙였으며, 그 작품들을 직접 써서 책자로 만들어 보관하였다.

 

당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활용하였다. 고산은 일상적인 언어를 감칠맛나게 노래 속에 조합하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다. 그 결과 그의 작품들은 익숙한 우리말이 많아 쉽게 대할 수 있으며 노래로 부를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자연에 대한 통찰력과 심미안이 잘 반영되어 있다. 실생활에 밀착된 감흥이 드러나는가 하면, 어떠한 과념을 표상하기 위하여 자연을 활용하기도 한다. 또는 그 자연이 유교적인 윤리세계와 관련되어 윤리적인 이상을 상징하기도 한다.

 

고산이 추구하는 자연은 직접적인 대립상이나 생활현장의 생동하는 모습은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생활의 어려움이나 시련을 겪지 않고 풍족한 삶을 영위한 데서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