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봉 국어 2023. 2. 3. 23:15

수오재기(守吾齋記)(정약용)

 

수오재(守吾齋), 즉 ‘나를 지키는 집’은 큰형님이 자신의 서재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 그 이름을 보고 의아하게 여기며, “나와 단단히 맺어져 서로 떠날 수 없기로는 ‘나’보다 더한 게 없다. 비록 지키지 않는다 한들 ‘나’가 어디로 갈 것인가. 이상한 이름이다.”라고 생각했다.

기 - ‘수오재’라는 이름에 대한 의문

 

장기로 귀양 온 이후 나는 홀로 지내며 생각이 깊어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환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 만물 중에 지켜야 할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내 밭을 지고 도망갈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 집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동산의 꽃나무와 과실나무들을 뽑아 갈 수 있겠는가? 나무뿌리는 땅속 깊이 박혀 있다. 내 책을 훔쳐 가서 없애 버릴 수 있겠는가? 성현(聖賢)의 경전은 세상에 널리 퍼져 물과 불처럼 흔한데 누가 능히 없앨 수 있겠는가. 내 옷과 양식을 도둑질하여 나를 궁색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천하의 실이 모두 내 옷이 될 수 있고, 천하의 곡식이 모두 내 양식이 될 수 있다. 도둑이 비록 훔쳐 간다 한들 하나둘에 불과할 터, 천하의 모든 옷과 곡식을 다 없앨 수는 없다. 따라서 천하 만물 중에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유독 이 ‘나’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며 출입이 무상하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지만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유혹하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앙으로 겁을 주면 떠나가며, 질탕한 음악 소리만 들어도 떠나가고, 미인의 예쁜 얼굴과 요염한 자태만 보아도 떠나간다. 그런데 한번 떠나가면 돌아올 줄 몰라 붙잡아 만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천하 만물 중에 잃어버리기 쉬운 것으로는 ‘나’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니 꽁꽁 묶고 자물쇠로 잠가 ‘나’를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승 - ‘나’를 지켜야 하는 까닭

 

나는 ‘나’를 허투루 간수했다가 ‘나’를 잃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는 과거 시험을 좋게 여겨 그 공부에 빠져 있었던 것이 10년이다. 마침내 조정의 벼슬아치가 되어 사모관대에 비단 도포를 입고 백주 도로를 미친 듯 바쁘게 돌아다니며 12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친척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한강을 건너고 문경 새재를 넘어 아득한 바닷가 대나무 숲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야 멈추게 되었다. 이때 ‘나’도 땀을 흘리고 숨을 몰아쉬며 허둥지둥 내 발뒤꿈치를 쫓아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에게 홀려서 왔는가? 바다의 신이 불러서 왔는가? 너의 가족과 이웃이 소내에 있는데, 어째서 그 본고장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멍하니 꼼짝도 않고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안색을 보니 마치 얽매인 게 있어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는 듯했다. 그래서 ‘나’를 붙잡아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전 - ‘나’를 잃어버렸던 과거에 대한 반성

이 무렵, 내 둘째 형님 또한 그 ‘나’를 잃고 남해의 섬으로 가셨는데, 역시 ‘나’를 붙잡아 함께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유독 내 큰형님만이 ‘나를 잃지 않고 편안하게 수오재에 단정히 앉아 계신다. 본디부터 지키는 바가 있어 ‘나’를 잃지 않으신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큰형님이 자신의 서재 이름을 ‘수오’라고 붙이신 까닭일 것이다. 일찍이 큰형님이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의 자(字)를 태현(太玄)이라고 하셨다. 나는 홀로 나의 태현을 지키려고 서재 이름을 ‘수오’라고 하였다.”

이는 그 이름 지은 뜻을 말씀하신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지키는 것이 큰일인가? 자신을 지키는 것이 큰일이다.”라고 하셨는데, 참되도다, 그 말씀이여!

드디어 내 생각을 써서 큰형님께 보여 드리고 수오재의 기문(記文)으로 삼는다.

결 -<수오재기>를 쓰게 된 내력

 

 

핵심 정리

[이 작품은] 글쓴이가 큰형 정약현이 집에 붙인 당호(堂號) ‘수오재’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쓴 고전 수필로, 의문으로 시작해서 반성과 사색의 결과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갈래 : 한문 수필, 기(記)
*성격 : 반성적, 회고적, 교훈적, 자경적(自警的)
*제재 : ‘수오재’라는 집의 이름
*주제 : 본질적 자아를 지키는 것의 중요함.
*특징
① 자문자답을 통해 사물의 의미를 도출함.
② 의문에서 출발하여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유도함.
*출전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어휘 풀이

*장기(長鬐) :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 정약용은 신유박해로 인해 그해 3월에서 10월까지 장기에서 유배 생활을 했음.
*사모관대(紗帽冠帶) : 예전에, 벼슬아치가 입던 옷과 모자.
*도포(道袍) : 예전에, 통상 예복으로 입던 남자의 겉옷.
*새재 : 문경(聞慶)새재. 경상북도 문경시와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에 있는 고개.

 

이해와 감상

‘수오재기’는 ‘나를 지키는 집’이라는 당호(堂號)에 의문을 제기하여 글쓴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담아낸 글이다.
글쓴이는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나’와 ‘또 하나의 나’를 구분하여 현상적 자아에 대비되는 본질적 자아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 본질적 자아라고 할 수 있는 ‘나’는 간직하고 지켜 내야 할 자아의 내면이고, 내가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고 미혹에 빠지려고 할 때 중심을 잡아 줄 수 있는 든든한 기둥과 같은 것이다. 글쓴이는 본질적 자아, 즉 내면적 자아를 유지할 때 비로소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거나 유혹당하지 않게 된다는 깨달음을 통해 큰형님이 ‘수오재’라는 이름을 지은 속뜻을 알게 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글쓴이가 귀양지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고 ‘나’의 모습을 살펴본다는 내용은 반성과 성찰의 행위를 보여 주는 이 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연구실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본 ‘수오재기’의 구성

 

‘수오(守吾)’의 의미

글쓴이는 과거 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른 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미친 듯이’ 다니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본질적인 ‘나’는 사라지고 귀양을 가는 처지에 이르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과거는 결국 현상적인 자아에 매몰되어 본질적인 자아를 잃어버린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를 지킨다.’ 라는 말은 나의 본성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함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오재기’의 주제 형상화 방식

‘수오재기’는 ‘나를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러한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글쓴이는 ‘나를 지킨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는 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독자와 자신이 유사한 상황에 있음을 제시하는 공감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의문 제기 뒤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를 지킨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음을 밝히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주제를 드러내어 독자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다.

 

‘수오재기’의 양식적 특징

‘수오재기’는 전통적인 한문 문학 양식의 하나인 ‘기(記)’에 해당한다. 기(記)란 어떤 사건이나 경험을 하게 된 과정을 기록하는 것으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교훈이나 깨달음을 제시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글 역시 ‘수오재’라는 이름에 대한 사연을 적고, 그에 따른 자신의 깨달음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記)’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소개 -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

조선 후기의 학자로 호는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이다.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여 발전시켰고, 민족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 낸 작품을 남겼다. 한국의 역사 · 지리 등에도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했다. 주요 저서로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이 있다.

 
출처 : 천재교육
 

 (記)

기(記) - 사물을 객관적인 관찰과 동시에 기록하여 영구히 잊지 않고 기념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두는 글이다. 

설(說) - 이치에 따라서 사물을 해석하고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는 한문문체. 설체는 ‘설’의 자의(글자의 뜻)가 말하듯이 해석과 서술을 주로 하는 문체이다. 다시 말하여 설체는 의리(뜻과 이치)를 해설하는 자기의 의사를 가지고, 종횡억양(縱橫抑揚: 자유스럽고 분망하게 글을 짓는 것을 이름.)을 가하여 좀더 상세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