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서(前漢書)「조선전(朝鮮傳)」에 이렇게 말했다.

 "처음 연(燕)나라 때부터 항상 진번조선(眞蕃朝鮮)을 침략해 차지하여 관리를 두고 성을 쌓았다. 진(秦)나라는 연나라를 멸망시켜 요동의 변방에 예속시켰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고쳐 짓고 패수(浿水)를 경계 삼아 연나라에 예속시켰다.

 연나라의 왕 노관(盧綰- 한나라 고조 유방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유방을 도와 연나라 왕이 되었다.)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돌아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면서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나와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옛 빈터인 상하장(上下障)의 변방 요새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는 차츰 진번조선의 만이(蠻夷), 연나라와 제(齊)나라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 - 이기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은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다."라고 했다)에 도읍을 정했다. 위만은 군사의 힘으로 주변의 작은 고을들을 침략하여 항복시켰는데 이에 진번, 임둔이 모두 복속해 와 땅이 수천 리나 되었다.

 위만은 왕위를 아들에게 전했고 이후 손자 우거(右渠- 안사고는 손자의 이름이 우거라고 했다)에 이르렀다. 진번과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한나라 천자를 알연하려 했으나, 우거가 길을 막아 전하지 못했다.(안사고는 진(辰)은 진한(辰韓)을 말한다고 했다)

 원봉(元封-한나라 무제의 연호로 기원전 110년에서 기원전 105까지 사용했다)2년(기원전 109년)에 한나라 사신 섭하(涉何)가 우거를 타일렀지만 끝내 천자의 명령을 받들지 않았다. 섭하는 국경까지 가서 패수에 이르렀을 때 수레를 몰던 자를 시켜 자기를 호송하던 조선의 비왕(碑王) 장을 죽였다. 그러고는 즉시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들어가 자기 나라로 돌아간 뒤 이 사실을 보고했다.

 천자는 섭하를 요동의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임명했다. 그러나 섭하를 원망하던 조선은 불시에 습격하여 섭하를 죽였다. 천자가 누선장군 양복(楊僕)을 보내 제나라에서 발해(渤海)로 가도록 했는데 군사가 5만 명이었다. 좌장군 순체(荀)는 요동으로 나와 우거를 토벌하러 갔다. 우거는 군사를 보내어 험한 곳에서 이를 막았다.

 누선장군이 군사 7000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에 도착했다. 성을 지키던 우거는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는 즉시 나가 공격했다. 누선은 패배해서 달아났다. 양복은 군사를 잃고 산속으로 숨어 죽음만은 면했고, 좌장군은 조선 패수의 서군을 공격했지만 격파하지 못했다. 천자는 두 장수가 불리하게 되자 위산(衛山)을 시켜 군사의 위엄으로 우거를 타이르도록 했다. 우거는 투항을 받아 주기를 청하면서 태자를 보내 말을 바치겠노라고 했다. 태자의 군사 1만여 명이 무기를 지니고 패수를 막 건너려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태자에게 말했다.

 '태자는 이미 항복했으니 무기를 지닐 수 없다.'

 태자는 사자가 자신을 속인다고 의심하여 패수를 건너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위산이 이 일을 보고하자 천자는 위산을 죽였다. 좌장군이 패수의 상군을 격파하고 전진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하자, 누선장군 역시 성남쪽에 주둔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조선을 항복시키지 못했다. 천자는 오랜 시간이 지나고 항복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제남태수(濟南太守)를 지낸 공손수(公孫遂)를 시켜 정버하게 하면서 모든 일을 편의대로 처리하도록 했다. 공손수가 와서 누와 함께 급히 조선을 쳤다. 조선의 상(相) 노인(路人)과 한도(韓陶), 이계(尼谿- 안사고는 이계는 지명이며 모두 네 명이라 했다)의 재상 삼(參), 장군 왕겹(王唊)이 서로 의논하여 항복하려고 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한도와 왕겹과 노인이 모두 달아나 한나라에 항복했는데, 노인은 길에서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0년) 여름 이계의 재상 삼이 살마을 시켜 왕 우거를 ㅈ구이고 와서 항복했다. 그러나 왕검성이 함락되지 않았으므로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또 반란을 일으켰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백성들을 달래고 성기를 죽였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네 군을 두었다. "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공무도하(公無渡河)        님이여 그 을 건너지 마오

공경도하(公竟渡河)        님은 결국 을 건너셨네

타하이사(墮河而死)        에 빠져 돌아가시니

당내공하(當奈公何)        가신 임을 어이할꼬

 

 

 

1. 배경 설화 - 중국 진(晉)나라 때 최표가 쓴 「고금주(古今注)」에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노래와 설화가 조선 정조 때 한치윤이 엮은 「해동역사」 동서 제22 악가(樂歌) 악무(樂舞)조에 기록됨

 

  「공후인(箜篌引)」이란 노래는 조선 땅의 뱃사공 곽리자고의 처 여옥(麗玉)이란 여자가 지은 것이다. 자고가 새벽 일찍이 일어나 나루터에 가서 배를 수리하고 있었다. 그때에 난데없이 머리가 새하얗게 센 미치광이 한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술병을 끼고 비틀비틀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 늙은 미치광이의 아내가 쫓아오면서, 목이 찢어지도록 남편을 부르면서, 한사코 남편을 물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애절한 정성도 보람 없이, 그 늙은이는 깊은 물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 기어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죽을 힘을 다하여 쫓아오던 아내는 남편의 그런 죽음을 당하자, 들고 오던 공후를 끌어 잡고 튀기면서 공무도하(公無渡河)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녀의 노랫소리는 말할 수 없이 구슬펐다. 노래를 마치자, 그 아내 또한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죽어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뜻밖의 일을 당한 자고라는 그 뱃사공은 제 눈을 의심하는 듯 집으로 돌아가, 여옥이라는 자기 아내에게 처름부터 끝까지 본대로 그 일을 이야기하고, 또한 그 노래의 사설과 소리를 아내에게 들려 주었다. 남편의 이야기와 노랫소리를 다 듣고 난 여옥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며, 벽에 걸린 공후를 끌어 안고 남편이 일어주는 대로 그 노래를 다시 한 번 불러 보았다. 그리하여 이 노래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눈물을 막을 수 없었고, 울음을 터뜨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여옥은 옆집에 살고 있는 친구 여용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 주고, 또한 노래 이름을 공후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2 노래가 제의의 거룩한 공간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의 경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인간적 삶의 문제에까지 내려앉기 시작하는, 생성기 시가의 또 다른 국면

 

3. 기록과 전승이 중국 중심으로 이어지고 자료 또한 중국의 고악부 형태로 중국노래로 의심 받기도 함. 그러나 고조선 말기 대동강 유역에서 발생한 우리 민요가 한사군 때 중국으로 건너가 악부화된 것.

 

4. 핵심 정리

① 갈래 - 고대 가요, 한역시가

② 성격 - 서정적, 애상적, 체념적

③ 제재 - 물을 건너는 임

④ 주제 - 임을 여읜 슬픔

고조선의 노래로, 문헌상 가장 오래된 서정 가요

 

5. '물'의 이미지 변화

사랑 → 이별 → 죽음

 

더 알아보기

 

 * 위만 조선 후기 철기 문화의 경험과 더불어 세계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의 흔들림이 마침내 죽음의 문제에까지 확산되어 나가는, 노래 형성층의 이중적인 전환기 의식을 단적으로 반영

* 죽음을 철저히 경험적 현실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아내의 비극적 의식을 표출한 극적 독백체 형태의 민요.

* 구지가의 거룩한 제의 공간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면서 한국 서정시의 발생이라는 생성기 시가의 또 따른 국면을 엿볼 수 있음.

* 남편의 죽음과 등식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세계의 상실은 곧 남편과의 화해로운 삶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자아의 동일성을 상실하는 것 그 자체. 그러므로 서정민요로서의 공무도하가에 표출된 동일성의 상실은, 세계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의 상실에서 비롯된 한국 서정시의 출현 문제와 잇닿아 있음.

 

 

참고문헌

 

정병욱, 「증보판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2003.

성기옥 외, 「한국문학개론」, 새문사, 1995.

 

 

 

 『위서』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불렀으니, 바로 ()임금과 같은 시기다."

 

 『고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는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 보니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하여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 즉시 내려보내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지금의 묘향산)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황이라고 한다.  환웅 천왕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생,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다스리고 교화했다.

 그 당시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 살고 있었는데,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항상 기원했다.

 이 때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가 이것을 먹되,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

 곰과 호랑이는 쑥가 마늘을 받아먹으면서 삼칠일동안 금기했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금기를 지키지 못한 호랑이는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어 매일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단군왕검이라고 불렀다.

 단군 왕검은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백악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무왕이 즉위하던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했다. 그래서 단군은 장당경(황해도 구월산 기슭과 만악산에 있던 땅이름이다.)으로 옮겼다가 그 후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살면서 산신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당나라 『배구전』에는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지금의 해주)이었는데, 주나라에서 기자를 봉하면서 조선이라 했다. 한(漢)나라가 세 군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이것이 곧 현도, 낙랑,대방이다."

  『통전』에도 역시 이 말과 같다.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 단군 신화 시사점
- 환웅 부족이 주변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고조선 성립하였고, 그 과정에서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은 환웅 부족과 연합하였으나,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은 배제되었음을 시사. 

 

 

1. 청동기 시대

도구 - 청동기 : 비파형 동검, 거친 무늬 거울 등

          - 간석기 : 반달돌칼(청동기 시대에 널리 사용된 농기구로, 곡식을 수확할 때 이용되었다. 구멍을 뚫어 끊을 꿰고

                        그 끈을 손에 걸어 사용된 것으로 짐작) 등의 농기구

          - 토기 : 민무늬 토기, 미송리식 토기

경제 - 농경과 목축 확대, 일부 저습지에서 벼농사 실시

주거 - 움집의 지상 가옥화, 들판을 끼고 있는 구릉이나 강가에 취락 형성

⓸ 무덤 - 고인돌, 돌널무덤 등

사회 - 사유재산과 계급 발생, 정복 전쟁의 활발한 전개, 군장(족장) 출현(제사와 정치 주관, 스스로를 하늘의 자손으로여김)

 

2. 고조선

 

형성 지역 -한반도의 서북부와 남만주의 요동, 요서 일대

형성 시기 기원전 8세기 경

기본 주민 예족과 맥족 ( 예족, 맥족, 한족은 우리 민족의 조상이 된 종족 집단의 이름. 이들은 만주와 발해 연안, 한반도의 넓은 지역에 오랜 기간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각기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언어와 문화, 풍습이 같은 동일 기원의 종족 들로서 흔히 동이(東夷)족이라고 불렀다.)

 

고조선의 사회

순장이 보편적으로 행해짐 노예제 사회(‘고조선 8조법’)

.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한다.

. 도둑질한 자는 그 집의 노비로 삼는다. 만약 죄를 씻고자 할 때는 50만 전을 내야 한다. 그러나 죄를 씻고 평민이 되어도 이를 천하게 여겨 결혼할 때 짝을 구할 수 없다.

 

관료 기구를 통하여 민중 통제 - 비왕, , , 대신, 장군, 박사 등.

 

철기 사용 농업과 수공업 발전

. 농업 철제 농기구 사용 : 땅을 더 깊이 갈고, 농토도 더 많이 개간.

. 수공업 생산도구의 제작, 무기 제작, 직조업, 가죽 가공, 금은 세공, 구슬 가공 등

. 상업과 무역 발달 제나라와 이후 연나라, 한나라와도 무역. (명도전, 일화전 등의 화폐)

 

고조선의 멸망

 

연나라와 대립

한나라 건국 고조선의 정치적 변동 (기원전 194년 위만의 정변으로 단군 왕조가 끝나고 위만 왕조 들어섬)

우거왕 중계 무역에 다른 이익 독점, 한 무제가 설치한 창해군 몰아내는 등 자주적 입장 취함.

고조선의 내부 약점 지배층의 분열과 대립( 기원전 128년 예군 남려가 위만 왕조에 반 대하여 28만 명의 주민을 이끌고 한나라로 넘어감)

고조선과 한의 긴장 기원전 109년 가을 한무제 고조선 대규모 침공 실패 한 무제 고조선의 지배층 회유 매수 기원전 108년 투항 변절한 니계상 삼이 자객 보내 우거왕 살해 왕검성 군민들 성기의 지휘하에 끝까지 저항 왕자 장과 노인의 아들 최 등 투항 변절한 반역자들 성기마저 살해 기원전 108년 고조선 멸망.

 

* 참고 문헌

EBS, 수능특강 한국사영역 한국사, 2020.

조성오, 「우리 역사 이야기1」, 돌베개, 2008.

 

기출문제로 풀어보기 -2020,  46회 중급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지

 

2. 밑줄 그은 '이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2016년 카자흐스탄 정부는 자국 내 여러 민족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다양한 기념 주화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그 중에서 고려인을 위해 발행된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기념주화에는 이 나라의 건국 이야기에 등장하는 단군과 곰, 호랑이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①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열었다.

②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③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④ 범금 8조를 만들어 사회 질서를 유지하였다.

⑤ 화백 회의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정답 : 4

 

 

2019, 44회 고급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지

 

2. 밑줄 그은 '이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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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선 장군 양복이 병사 7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에 이르렀다. 이 나라의 우거왕이 성을 지키고 있다가 양복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성을 나와 공격하자, 양복의 군사가 패배하여 흩어져 달아났다. 한편 좌장군 순체는 패수서군을 공격하였지만 이를 깨뜨리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한 무제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위산으로 하여금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가서 우거왕을 회유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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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정사암에 모여 재상을 선출하였다.

②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③ 읍락간의 경계를 중시하는 책화가 있었다.

④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있었다.

⑤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범금 8조를 두었다.

 

 

정답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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