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대에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라는 두 승려는 우애가 있어 밤낮으로 이렇게 약속했다.

 "먼저 서방(西方-서방정토, 즉 극락 세계로서 동거토(同居土)라고도 하는데 부처와 중생이 동거한다는 뜻)으로 가는 사람은 반드시 서로 알리자."

 그 후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어떤 사람은 황룡사의 서거방(西去房)이라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에 숨어 신발 만드는 일을 하면서 처자식을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베어 태우며 [화전] 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해 그림자가 붉게 물들고 소나무 그늘에 어둠이 깔릴 무렵, 엄장의 집 창 밖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벌써 서방으로 가네. 자네는 잘 있다가 빨리 나를 따라오게."

 엄장이 문을 밀치고 나가 바라보니, 구름 위에서 하늘의 음악 소리가 들려 오고 밝은 빛이 땅까지 뻗쳐 있었다.

 

 이튿날 그가 광덕이 살던 곳으로 찾아가 보니 광덕은 과연 죽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함께 장사를 지냈다. 일을 마치자 엄장이 광덕의 부인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소?"

 광덕의 아내는 이를 허락하고 엄장의 집에 머물렀다. 밤이 되어 엄장이 정을 통하려고 하니, 부인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했다.

 "대사가 극락정토를 구하는 것은 물고기를 잡으려고 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이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광덕도 이미 그러했는데 나라고 해서 어찌 안 되겠소?"

 부인이 말했다.

 "남편과 나는 10여 년 동안 함께 살았지만 일찍이 하룻밤도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는데, 하물며 몸을 더럽혔겠습니까? 그분은 다만 매일 밤 단정하게 앉아서 한결같이 아미타불을 외면서 16관(十六觀-'관'이란 보는 것, 염관(念觀)하는 것을 뜻하며 석가모니가 극락정토를 염원하던 수행법이다)을 짓고 관이 다 되어 미혹을 깨치고 달관하여, 밝은 달이 창으로 들어오면 때때로 그 위에 올라 가부좌를 했습니다. 이처럼 정성을 다했으니, 극락으로 가려고 하지 않아도 극락에 가지 않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천 리를 가고자 하는 사람은 첫 발자국부터 알 수 있는 것인데, 지금 대사가 하는 일은 동방으로 가는 것이지 서방(극락)으로 간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엄장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는 무럴 나와 바로 원효법사에게 가서 도 닦는 묘법을 간곡하게 물었다. 원요가 정관법(淨觀法-사고의 더러움을 없애고 번뇌의 유혹을 없애는 것을 말한다)을 지어 그를 지도하자, 엄장은 그제야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쳐 자신을 꾸짖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도를 닦아 역시 극락으로 가게 되었다.

 정관법은 원효법사 본전(本傳)과 「해동고승전」에 실려 있다. 그 부인은 바로 분황사의 계집종ㅇ으로 아마 부처님의 열아홉 응신(十九應身-중생의 제도와 교화를 위한 관음보살의 19종의 모습인데 「법화경」 보문품의 19설법에서 취한 것이다. 응신이란 삼신[法身, 報身, 應身]의 하나다.) 가운데 하나였다.

 일찍이 광덕은 이런 노래를 지었다.

 

 

   달님이시여,

   이제 또 서방으로 가셔서

   무량수불 앞에

   말씀을 가져다 전해 주십시오.

   다짐 깊으신 부처님을 우러르며

   두 손 모아 비옵나니

   원왕생(願往生-'원왕생 극락'의 준말로 죽어서 극락 세계에서 태어나고 싶다는 뜻), 원왕생을 바칩니다.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아뢰십시오.

   아아, 이 몸 버리시고

   마흔여덟 가지 소원(아미타불이 법장 비구였을 때 세운 마흔여덟 가지 큰 소원을 말한다)이

   모두 이루어질까요?

 

 

* 핵심 정리

 

1. 작자 - 광덕

2. 연대 - 문무왕(재위 661-681)

3. 갈래 - 향가(10구체)

4. 성격 - 기원가(祈願歌), 불교 신앙의 노래

5. 의의 - 기원가의 한 전형을 보이는 작품

6. 주제 - 극락왕생(極樂往生)에 대한 간절한 염원(아미타불에 귀의할 것을 서원함)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 참고 자료

정경섭 엮음, 고전 문학의 이해와 감상1, 문원각, 2003.

 

 [당나라에서] 「덕경(德經)-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말함)」을 보내오자 대왕은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디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이 되던 해에 오악삼산(五岳三山-오악은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남악 지리산,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이며, 삼산은 경주 남산, 영천 금강산, 청도 부산이다)의 산신이 때대로 나타나 궁전 뜰에서 대왕을 모셨다.

 3월 3일 왕은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올라가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길거리에서 대덕(大德-중에게 부여하는 직위 명칭인데 덕망이나 풍모가 높은 중을 일컫는다.) 한 명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

 이때 마침 위엄과 풍모가 깨끗한 고승이 배회하며 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리고 와 뵙게 하니 왕이 말했다.

 "내가 말한 위엄과 풍모가 있는 승려가 아니다."

 그리고 돌려보냈다.

 

 다시 한 승려가 가사를 걸치고 앵통(櫻筒-삼태기를 메고 있어다고 한 곳도 있다)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그를 보보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통 안을 살펴보니 다구(茶具)가 가득 들어 있었다. 왕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승려가 아뢰었다.

 "소승은 충담(忠談)이라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승려가 아뢰었다.

 "소승은 매년 중삼일(重三日-셋 풍속에서 액을 막는 제의(祭儀)가 있는 날로 3월 3일이다), 중구일(重九日-중양일이라고도하며 액을 막는 제의가 있는 날로 9월 9일이다)에 차를 끓여 남산 삼화령(三花嶺- 경주 남산에 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데, 이 위에 연꽃 모양의 불상 대좌가 있다고 한다) 미륵세존(彌勒世尊- 나타날 부처)께 올리는데, 지금도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이 말했다.

 "나에게도 차 한 잔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승려는 이에 차를 끓여 바쳤는데, 찻잔 속에서 향내가 풍겼다. 왕이 말했다.

 "짐은 일찍이 대사가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의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짐을 위해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보라."

 왕이 말했다.

 충담은 곧바로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 왕의 불교 수행을 돕는 승려를 말한다)로 봉했으나, 그는 삼가 재배하며 간곡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경덕왕 말년에 지은 것으로 '찬기파랑가'보다 후대의 작품이며 호국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 조지훈 교수는 충담사의 신분이 단순한 승려가 아니고 화랑도의 양면을 띤 인물로 보았다)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라.

   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로 여기면,

   모든 백성들이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중생,

   이들을 먹여 다스려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라고 하면

   이 나라가 보전될 줄 알리라.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나라는 태평을 지속하리.

 

 

 찬기파랑가는 다음과 같다.

 

   열어젖히자 벗어나는 달이

   흰구름 좇아 떠간 언저리

   백사장 펼친 물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잠겼어라.

   일오천(逸烏川) 자갈벌에서

   낭의 지니신 마음 좇으려 하네.

   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이여!

 

 

 왕은 옥경(玉莖)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는데, 자식이 없어 왕비(「왕력」에는 삼모부인(三毛夫人)으로 되어 있다)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했다. 후비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각간 의충(依忠)의 딸이었다.

 왕이 하루는 표훈대사(表訓大師)를 불러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했으니 원하건대 대사께서 하느님에게 청하여 사내아이를 점지하게 해 주시오."

 표훈대사가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말하고 돌아와 아뢰었다.

 "천제께서는 '딸을 구하는 것은 되지만 사내아이는 마땅치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말했다.

 "딸을 아들로 바꿔 주시오."

 표훈 대사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청했다.

 천제가 말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표훈대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했다.

 "하늘과 인간 사이를 어지럽혀서는 안 되는데 지금 대사는 이웃 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고 있으니 지금 이후로는 오는 것을 금하노라."

 표훈대사가 와서 천제의 말을 전하니 왕이 말했다.

 "나라가 비록 위태롭게 되더라도 아들을 얻어 후사를 삼고 싶소."

 달이 차서 왕후가 태자를 낳으니(「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7년 7월 23일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왕은 매우 기뻐했다.

 

 태자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했으니,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태후가 섭정에 나섰으나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았고(그는 16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반란이 다섯 번이나 일어났다)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도 막지 못했으니, 표훈대사의 말이 사실이었다. 태자는 원래 여자였다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돌 때부터 즉위하기까지 하상 부녀자들의 놀이를 일삼고 주머니 차는 것을 좋아하며 도사(道士)들과 희롱했다. 그래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결국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 김양상은 선덕왕의 이름이다. 김경신(金敬信)의 오기라는 설도 일리가 있다)에게 시해되었다. 표훈대사 이후로 신라에 성인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 찬기파랑가 핵심정리

 

1. 작품 구조

 제1 -3구 하늘의 달 - 높이 우러러 보는 존재                    문사

 제4- 5구 냇물에 비친 달 - 냇물처럼 맑고 깨끗한 모습        답사

 제6 - 8구 조약돌 -원만, 강직한 인품을 따르고자 함

 제9 - 10구 잣나무 -고결한 절개와 굳은 의지에 감동           결

 

2. 작자 - 충담사

3. 연대 - 신라 경덕왕 때(8세기)

4. 갈래 - 향가(10구체), 서정시

5. 성격 - 대상에 대한 예찬(禮讚)의 노래

6. 표현 - 은유법, 상징법, 문답법

7. 의의 - '제망매가'와 함께 서정성이 돋보이는 향가의 백미

8. 기파랑의 고매한 인품을 예찬함.

 

 

* 안민가 핵심정리

 

 

1. 제1 - 4구  군(君), 신(臣), 민(民)을 가족 관계에 비유 ▶ 가족주의

   제5 -8구  백성을 풍족하게 해 주는 정치의 중요성  ▶ 수직적 질서와 민본주의

   제9 - 10구  군, 신, 민이 각각 자신의 도리를 지킴  ▶ 명분과 실제의 일치

 

 

2. 작자 - 충담사

3. 연대 - 신라 경덕왕 24년(765)

4. 갈래 - 향가(10구체)

5. 사상 - 유교적 충의(忠義)와 애민(愛民) 정신

6. 의의 - 향가로서는 유일하게 유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

7. 주제 - 나라를 다스리는 올바른 방향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 참고 자료

정경섭 엮음, 고전 문학의 이해와 감상1, 문원각, 2003.

 

 제 49대 헌강대왕 대에는 서울에서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담장이 서로 맞닿았는데,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길에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때 대왕이 개운포(開雲浦- 학성(鶴城) 서남쪽에 위치하므로 지금의 울주다)로 놀러 갔다 돌아오려 했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고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었다.

 "이는 동해에 있는 용의 변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유사(有司-벼슬아치, 즉 담당하는 관리)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내리자마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 때문에 그곳의 이름을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의] 개운포라고 한 것이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들어와 왕의 정사를 보필했는데, 이름을 처용(處容-양주동 박사는 '처용'의 원뜻에 대해 "한자의가 아닌 제융 혹은 치융이란 말에서 그 원뜻을 찾아야 한다."라고 했다)이라 했다. 왕은 미녀를 주어 아내로 삼아 그의 마음을 잡아 머물도록 하면서 급간(級干)이란 직책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밤이 되면 사람으로 변해 그 집에 와 몰래 자곤 했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물러났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돌아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이때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 처용 앞에 꿇어앉아 말했다.

 "제가 공의 처를 탐내어 범했는데도 공이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탄스럽고 아름답게 생각됩니다. 맹세코 오늘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함을 물리치고(이러한 미신은 불교 최전성기인 고려에 와서 궁중 의식으로서 처용무와 처용회로 발전되었다- 이동환 설)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려고 했다.

 

 왕은 돌아오자 곧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 경남 울주군 문수산에 있던 절로 지금은 소실되어 터와 주춧돌만 남아 있다)라 했다. 망해사를 또 신방사(新房寺)라고도 했는데, 이는 처용을 위해 세운 절이다. 또 왕이 포석정(鮑石亭-경주시 배동에 있는 임금의 별궁으로 지금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웠다는 석구만 남아 있다)으로 행차하니, 남산의 신(神)이 나타나 어전에서 춤을 추었는데(『삼국사기』 「신라본기」제 11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御駕) 앞에서 가무를 하였는데"라고 했다) 옆에 있는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다. 그래서 왕이 몸소 춤을 추어 형상을 보였다. 그 신의 이름은 혹 상심(祥審)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한다. 어떤 이는 이미 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므로 그 모습을 살펴 왕이 공장(工匠)에게 본떠 새기도록 하여 후대에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이라고 했다고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형상을 일컫는 말이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춤을 추자 이름을 옥도금(玉刀鈐)이라 했고, 동례전(同禮殿)에서 연회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어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 불렀다.

 

「어법집(語法集)」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산신이 춤을 추고 노래 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고 했다. '도파'란 말은 아마도 지혜(智)로써 나라를 다스리는(理)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아채고 모두(多) 달아나(逃) 도읍이(都)이 곧 파괴된다(破)는 뜻이다."

 이는 바로 지과 산신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어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 나라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면서 즐거움에만 점점 더 탐닉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만 것이다.

 

 

* 처용가 핵심 정리

 

1. 작자 - 처용

2. 연대 - 신라 49대 헌강와 때(9세기 경)

3. 갈래 - 향가(8구체), 무가(巫歌)

4. 성격 - 주술적

5. 의의 - 벽사진경(僻邪進慶)의 민요적 무가

          - 의식무(儀式舞), 또는 연희(演戱)의 형태로 고려, 조선 시대까지 계승됨

6. 주제 - 관용과 극기의 위풍(역신을 쫓아냄)

7. 처용의 정체

① 역사적 관점 - 용의 아들 처용이 서라벌에서 벼슬한 것은 지방 통제의 수단으로 지방 호족의 아들을 서라벌에 인질로 잡아두었던 역사적 사실과 관련지을 수 있다. 그리고 처용의 아내를 범한 역신은 타락한 중앙 귀족의 자제로 파악한다. 그렇다면, '처용가'는 지방 호족과 중앙 귀족의 갈등을 표현한 것이다.

② 신라 시대 서역(西域)과의 교역 사실과 관련한 관점 - 처용은 신라에 왔던 이슬람 상인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

③ 종교적 관점 - 처용을 축사(逐邪)와 벽사진경(僻邪進慶)의 주력(呪力)을 가진 무속적 ·신적 존재로 파악

 

 

❀ 고려 시대의 '처용가(處容歌)'

 

신라 성대(新羅聖代) 밝은 성대

천하 태평은 나후(羅侯-해와 다을 기리는 신으로 처용의 위용을 비김)의 덕

처용 아비여

이로써 사람들이 별말이 없게 되니

이로써 사람들이 별말이 없게 되니

모든 재앙(災殃)이

일시에 소멸하도다.

 

아아, 아비의 모습이여

처용 아비의 모습이여

머리 가득 꽂은 꽃이 무거워

기울어진 머리

아아, 수명(壽命)이 장수(長壽)할

넓은신 이마

산(山) 모양 비슷한

긴 눈썹

애인을 바라보듯

너그러운 눈

바람이 잔뜩 불어

우글어진 귀

복사꽃간치

붉은 얼굴

오향(五香) 맡으시어

우묵해진 코

아아, 천금을 머금으시어 넓으신 입에

백옥 유리같이 흰 이에

사람들이 기리고 복이 성하시어 앞으로 나온 턱에

칠보를 못 이기어 숙이신 어깨에

길경(처용무의 소품)에 겨워서 늘이신 소매에

지혜 모이어 덕이 있으신 가슴에

복과 지혜가 모두 넉넉하시어 부르신 배에

붉은 패옥에 겨워서 굽어지신 허리에

함께 즐겨 크게 평안하시어 기신 다리에

아아, 계면조에 맞추어 춤추며 도는 넓으신 발에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바늘도 실도 없이

바늘도 실도 없이

처용 아비를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많이 많이 세워 놓았구나.

12제국이 모두 만들어

아아, 처용 아비를 많이도 세워 놓았구나.

 

버찌야, 오얏아, 녹리(鹿梨)야

빨리 나와 내 신코를 매어라.

아니 곧 맨다면

궂은 말 떨어지리라.

서라벌 밝은 달 아래

밤새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내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아아,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이뇨.

이럴 적에

처용 아비만 본다면

열병신(熱病神)이야

횟감이로다.

천금(千金)을 주랴

처용 아비야

칠보(七寶)를 주랴 처용 아비야.

천금 칠보도 말고

열병신 잡아 날 주소서.

산이나 들이나

천 리 밖으로

처용 아비를

비켜 갈지어다.

아아, 열병대신(熱病大神)의

발원(發願)이로다.

 

<악학궤범>

 

1. 주제 - 역신을 몰아 내는 처용의 위용과 기상

2. 구조 - 서사(序詞)로서 처용의 힘을 설명

          - 처용의 위압적인 모습을 그림

          - 처용 가면을 제작하는 과정을 이야기함

          - 역신을 물리치는 처용의 위용을 말함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 참고 자료

정경섭 엮음, 고전 문학의 이해와 감상1, 문원각, 2003.

 

 

 

 

 제 32대 효소왕 대에 죽만랑(竹曼郞)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혹은 득곡(得谷)이라고도 한다) 급간이 있었는데, 화랑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날마다 나오다가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물었다.

 "당신 아들은 지금 어디 있소?"

 득오의 어머니가 말했다.

 "당전(幢典)인 모량부(牟梁部)의 아간(阿干) 익선(益宣)이 제 아들을 부산성(富山城- 富山의 꼭대기에 있는 널따란 구릉)의 창고지기로 보냈는데, 급히 가느라 낭께 말씀을 드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낭이 말했다.

 "네 아들이 만약 사사로운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겠지만 공적인 일로 갔으니 내가 가서 대접해야겠다."

 그리고 나서 떡 한 합과 술 한 동이를 갖고 좌인(左人-향언에서 모두갯지라고 하니, 노복을 말한다)들을 거느리고 떠나는데, 낭의 무리 137명 역시 의장을 갖추어 따라갔다.

 

 부산성에 도착하여 문지기에게 득오실(得烏失- 여시서 실은 골짜기나 고을을 뜻하는 향언 '실'의 음차라고 본다)의 행방을 물어보자 그가 말했다.

 "지금 익선의 밭에서 관례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낭은 밭으로 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으로 득오를 대접했다. 그리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득오와 함께 돌아오려고 했으나, 익선이 완강히 반대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의 세금 30석을 거두어 성안으로 수송하다가 선비를 귀중히 여기는 낭의 풍모를 아름답게 여기고 융통성 없는 익선을 야비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지(舍知-신라 시대 17관등 중 제13위 관등) 진절(珍節)이 기마와 말 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花主-화랑을 관할하는 관직)가 그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의 더럽고 추잡함을 씻어 주려 했는데, 익선이 달아나 숨었으므로 그의 맏아들을 잡아갔다. 이때는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성안에 있는 못 가운데서 익선의 아들을 목욕시키니 그대로 얼어 죽고 말았다.

 

 대왕은 그 말을 듣고는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 내쫓아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검은색 옷[승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된 자라면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枰定戶孫)으로 삼아 표창했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받지 못했다.

 

 이전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삼한에 전쟁이 있어 기병 3000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했다. 가다가 죽지령(竹旨領)에 도착하니, 한 거사가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은 그것을 보고 감탄하고 칭찬했다. 거사 역시 공의 위세가 매우 큰 것을 좋게 보고 서로 마음 속으로 감동하게 되었다.

 

 술종공이 삭주에 부임하여 다스린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거사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여 매우 놀라고 괴상하게 여겼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사람들이 말했다.

 "거사는 죽은 지 며칠 되었습니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 보고하니, 거사가 죽은 날이 꿈을 꾼 날과 같은 날이었다. 공이 말했다.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 같소."

 다시 군사를 보내 고갯마루 북쪽 봉우리에 거사를 장사 지내게 하고 돌로 미륵 한 구(軀)를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웠다.

 

 아내가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자 이름을 죽지(竹旨)라 했다. 그는 장성하여 벼슬길에 올라 김유신 공과 함께 부수(副帥)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문 등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나간 봄 그리매

   모든 것이 시름이로다.

   아름다운 모습에 주름이 니니

   눈 돌릴 사이에 만나 보게 되리.

   낭이여! 그리운 마음에 가는 길에

   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

 

 

* 모죽지랑가 핵심정리

 

1. 작품의 구조

 제1· 2구 - 좋았던 젊은 날을 그리워함

 제3· 4구 - 낭의 늙은 모습이 안타까움

 제5· 6구 - 낭에 대한 충동적 그리움

 제7· 8구 - 재회할 수 없음에 대한 탄식

 

2. 작자 - 득오(득오곡)

3. 연대 - 효소왕(629 ~702때)

4. 성격 - 찬양과 추모의 노래

5. 의의 - 주술성이나 종교적 색채가 없는 순수한 개인적 서정시

6. 주제 - 죽지랑에 대한 추모, 또는 사모(思慕)의 정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 참고 자료

정경섭 엮음, 고전 문학의 이해와 감상1, 문원각, 2003.

1. 작자 - 견우 노인(牽牛 老人)

2. 연대 - 신라 성덕왕 때(8세기 전반)

3. 갈래 - 향가(4구체), 서정시, 민요

4. 성격 - 민요적 단순성과 소박성

5. 의의 - 신라인의 미의식(美意識)을 보여 주는 서정시

6. 주제 - 꽃을 바치는 심정

7. 출전 - 「삼국유사」권2 수로 부인

 

 

* 참고 자료

정경섭 엮음, 고전 문학의 이해와 감상1, 문원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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