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졸본부여(卒本扶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화주(和州)라고도 하고 성주(成州)라고도 하나 모두 잘못된 것이다. 졸본주는 요동 경계에 있는데,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시조 동명(부여 제족의 공동신을 나타내는 보통명사로 이해된다-서대석 설)성제(東明聖帝)는 성이 고씨(高氏)고 이름은 주몽(朱蒙-추모, 추몽, 중모라고도 썼다)이다. 이에 앞서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피해 가 살았는데, 부루가 죽자 금와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금와는 그때 태백산('고조선 조'에서는 묘향산이지만 여기서는 백두산을 말한다)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하백(河伯-물의 신)의 딸 유화(柳花)입니다. 동생들과 놀러 나왔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웅신산(熊神山-백두산으로 추정) 앙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혹하여 사통(私通)하고는 저를 버리고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단군기』에서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가까이 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부루(夫婁)라 했다'라고 했다. 지금 이 기록을 살펴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정을 통하여 낳은 아들의 이름이 주몽이라고 했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했다.'하니 부루와 주몽은 이복 형제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 간 것을 꾸짖어 이곳으로 귀양을 보내 살도록 했습니다.'

 금와는 괴이하게 여겨 유화를 방 안으로 남몰래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었다. 그녀가 피하자 햇빛이 따라와 또 비추었다. 이로 인해 임신하여 알을 하나 낳았는데(태양숭배) 크기가 다덧되쯤 되었다. 왕이 알을 개와 돼지에게 던져 주었지만 모두 먹지 않았고, 길에다 버렸으나 말과 소가 피해 갔으며, 들판에 버리니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후직(后稷)의 탄생설화와 유사) 왕은 알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깨지지 않았으므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유화가 천으로 알을 부드럽게 감싸 따뜻한 곳에 두자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겉모습이 영특하고 기이했다.

 겨우 일곱 살에 용모와 재략이 비범했으며,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 번 쏘아 백 번 맞추었다. (주몽의 활쏘기 실력은 주몽집단의 유목 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 나라의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했으므로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

 금와에게는 아들이 일곱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다. 그러나 그들의 기예가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자 맏아들 대소가 말했다.

 '주몽은 사람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니 일찍이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왕은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도록 했다. 주몽은 준마를 알아보고 먹이를 조금씩 주어 마르게 하고, 늙고 병든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다. 왕은 살찐 말을 타고 주몽에게 마른 말을 주었다. 왕이 아들들과 여러 신하들이 함께 주몽을 해치려하자, 그 사실을 알게 된 주몽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나라 사람들이 곧 너를 해치려고 하는데, 너의 재략(才略)이라면 어디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빨리 떠나거라.'

 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과 벗을 삼아 떠나 엄수(淹水-지금의 어느 곳인지 자세하지 않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제1에서는 '엄호수(掩호수)'라고 하면서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했다)에 이르러 물(水)에게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자 하백의 손자다. 오늘 도망치는데 뒤쫓는 자들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건너게 했다. 그러고는 다리를 풀었으므로 뒤쫓던 기병은 건너지 못했다. 졸본주(卒本州-현도군의 경계)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을 정했으나, 미처 궁궐을 짓지 못하고 비류수(沸流水-『고려사』에 의하면 평양 동북쪽에 있다고 한다)가에 초가집을 지어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고 했다. 이로 인해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본래의 성은 해씨였는데, 지금 스스로 천제의 아들로 햇빛을 받아 출생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고씨를 성으로 삼은 것이다) 주몽의 나이 열두 살(『삼국사기』에는 스물두 살로 나와 있다)이었는데,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년에 즉위하여 왕이라고 일컬었다. 고구려는 전성기에 21만 508호였다."

 『주림전(珠琳傳)-당나라 도제가 지은 불교책』 제21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옛날 영품리왕(寧稟離王)의 계집종이 아이를 가졌는데, 관상쟁이가 점을 쳐 보더니 '휘하므로 왕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말했다. '내 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 계집종이 '기운이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제가 아이를 밴 것입니다.'라고 했다. 계집종이 아들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구간에 버리니 말이 젖을 주어 죽지 않았다.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바로 동명제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한다. 졸본부여 역시 북부여의 다른 도읍이기 때문에 부여 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란 바로 부루왕의 다른 명칭이다.)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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