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고려 제11대 왕-조 대강(大康-요나라 도종(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의 연호이며 1075년에서 1084년까지 사용하였다.)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이 땅에 아직 나라의 칭호가 없었고,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 추장들이 백성을 아울러 다스렸으니, 모두 100호(戶는 하나의 고을과 비슷한 규모로, 마을이나 씨족 집단을 뜻한다)에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 저마다 산가 들에 모여 살았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년(42년) 3월 계욕일(浴日- 액땜을 하는 날로 물에서 목욕하고 술을 마신다. 대부분 3월 상사일(上巳日)에 한다. 이 시기는 파종기로 풍요를 기원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있었다)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봉(龜旨峯- 지금의 경남 김해시로, 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마치 十朋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므로 이렇게 부른다)에서 사람들을 부르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래서 무리 이삼백 명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사람의 소리 같았지만 형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렸다.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구간들이 말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구간들이 다시 대답했다.

 "구지봉입니다."

또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나에게 이곳에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온 것이다. 너희들이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내면서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어 먹겠다.'라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 대왕을 맞이하여기뻐 춤추게 되리라."

 구간들은 그 말대로 하면서 모두 기쁘게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후 하늘을 우러러 보니 자줏빛 새끼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 끝을 살펴보니 붉은색 보자기로 싼 금합(金盒-생산한 곡식을 다음 수확기까지 보관하는 상자다)이 있었다. 그것을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6개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서 허리를 굽혀 백 번 절하고, 얼마 후 다시 금합을 싸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와 탑 위에 두고 제각기 흩어졌다.

 12일(12간지를 말한다)이 지나고 이튿날 새벽에 여려 사람들이 다시 모여 합을 열어 보니 6개의 알은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빼어났다. 그들을 펴앙에 앉혀 절하며 축하하고 지극히 공경했다. 그들은 나날이 자라서 열흘 남짓 되자 키가 아홉 자나 되어 은(殷)나라의 탕왕(湯王) 같았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의 고조(高祖)와 같았고, 눈썹의 여덟 색채가 요(堯)임금 같았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이 순(舜)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에 즉위했는데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 혹은 수릉(首陵- 죽은 후의 시호)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도는 가야국(伽倻國)이라 부르니, 바로 여섯 가야 중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黃酸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伽倻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그는 임시로 궁궐을 짓게 하고 들어가 다스렸는데, 질박하고 검소하여 지붕의 이엉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석 자를 넘지 않았다.

 즉위 2년 계묘년(43년) 봄 정월에 왕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읍을 정하고자 한다."

 이에 임시로 지은 궁궐 남쪽 신답평(新畓坪-이곳은 옛날부터 閑田이었는데 새로 경작한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답(沓)이란 글자는 속자(俗字)다)에 행차하여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다가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곳은 마치 여뀌잎처럼 좁지만, 빼어나게 아르다워 열여섯 나한(羅漢-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소승 불교에서 교법을 수행하는 성문(聲聞) 사위(四位) 가운데 학문과 덕행이 높았던 성자(聖者)를 말한다)이 머물 만하다. 더군다나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 일곱 성(七聖-'성'이란 정지(正智)로써 진리를 조견(照見)한 사람으로, '칠성'이란 수신생(隨身行), 수법행(隨法行), 신해(信解), 견지(見至), 신증(身證), 혜해탈(慧解脫), 구해탈(俱解脫)을 말한다) 이 머물 만하여, 정말로 알맞은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하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1500보 둘레의 외성(外城)과 궁궐,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 창고, 곡식 창고 지을 곳을 두루 정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국내의 장정과 공장(工匠)을 두루 불러 모아 그달 20일[2년 봄 정월]에 튼튼한 성곽을 쌓기 시작하여 3월 10에 역사(役事)를 마쳤다. 궁궐과 옥사(屋舍)는 농한기를 기다려 그해 10월 안에 짓기 시작하여 갑진년(44년) 2월에 이르러 완성했다. 좋은 날을 가려 새 궁궐로 옮겨 가서 모든 정치의 큰 기틀을 살피고 여러 가지 일을 신속히 처리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는데,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니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했다. 탈해는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는데, 키가 석 작고 머리 둘레가 한 자나 되었다. 탈해는 기뻐하며 궁궐로 들어가 수로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위를 빼앗으려고 왔소."

수로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에게 왕위에 올라 나라와 백성을 편안하게 하도록 명했으니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기고 너에게 왕위를 넘겨줄 수 없고, 또 감히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했다.

 "그대는 나와 술법을 겨룰 수가 있겠소?"

수로왕이 말했다.

 "좋다."

 그래서 잠깐 사이에 탈해가 매로 변하자 왕은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참새로 변하니 왕은 새매로 변했는데, 그사이에 아주 짧은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탈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니 왕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탈해가 이에 항복하여 말했다.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서 제가 매가 되자 독수리가 되었고, 참새가 되자 새매가 되었는데도 죽임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인께서 저의 죽음을 원치 않은 인(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왕과 왕위를 다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탈해는 곧 절을 하고 나갔다. 그러고는 서울 변두리의 나루터로 가서 중국 배가 오가는 물길을 따라 떠났다. 왕은 탈해가 머물면서 모반을 꾸밀까 걱정하여 급히 수군 500척을 내어 추격했으나, 탈해가 계림 땅 경계로 도망쳐 들어갔으므로 수군이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이 일에 관한 기록은 신라의 기록과 많은 차이가 있다.

 

 

  건무 24년 무신년(48년) 7월 27일에 구간들이 조회(朝會)때 왕께 아뢰었다.

 "대왕께서 내려오신 이래로 아직도 좋은 짝을 얻지 못했으니, 신들의 딸들 중에서 제일 훌륭한 처자를 뽑아 궁궐로 들여 배필로 삼으십시오."

 왕이 말했다.

 "짐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왕후를 맞는 것 역시 하늘의 명이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마라."

 그리고 유천간에게 가벼운 배와 날랜 말을 주어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도록 명하고, 또 신귀간에게는 승점(乘岾- 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며, 승점은 연하(輦下)의 나라다)으로 가도록 명했다.

그때 갑자기 바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북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 위에서 횃불을 들자 배는 재빨리 육지 쪽으로 달려왔다. 신귀간 등이 이를 보고는 대궐로 달려들어와 아뢰었다. 수로왕은 이 말을 듣고서 기뻐했다. 얼마 후 구간들을 보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좋은 계수나무로 만든 아름다운 노를 저으며 그들을 맞이하여 대궐 안으로 모셔오게 했다.

 왕후가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평소에 잘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가겠는가?"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아뢰니, 왕은 그녀의 말이 옳다고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했다. 그리고 대궐 아래 서남쪽 60보쯤 되는 곳의 산언저리에 장막을 치고 기다렸다. 이에 왕후가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 입구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면서 입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때 모시던 잉신(臣-왕비를 따론 신하들이다. 시집 갈 때 따라가는 侍臣인데 이들은 중국계 이름으로 보인다) 두 명이 있었는데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은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었으며, 노비까지 합치면 모두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수놓은 비단과 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 의상, 필로 된 비단, 금은, 구슬과 옥, 아름다운 옥, 장신구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왕후가 수로왕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자 왕이 나가 맞이하여 장막 궁전으로 함께 들어았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계단 아래서 왕을 뵙고 즉시 물러갔다. 임금은 유사에게 잉신 부부를 데려오도록 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노비들은 각기 한 방에 대여섯 명씩 들게 하라."

 그리고 좋은 음료와 향이 좋은 술을 주고 무늬 있는 자리에서 재웠다. 또 의복과 비단과 보화를 주었고, 많은 수의 군사에게 지키게 했다.

 그래서 왕과 왕후가 함께 침전에 들게 되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國-중인도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 해석해 왔으나 중국이나 태국이라는 의견도 있다)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許氏)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본국에 있던 금년 5월에 부왕과 오아후가 저를 보고 말하기를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똑같이 꿈속에서 상제(上帝)를 보았다. 상제께서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 왕이 되게 한 신성한 사람으로,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짝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가락국으로 보내 수로왕의 짝이 되게 하라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런데 꿈에서 깨고 난 후에도 상제의 말이 귀에 남아 있으니 너는 여기서 빨리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향해 가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신선이 먹는 대추를 구하고, 하늘로 가서 선계(仙界)의 복숭아(신선들이 먹는 대추와 3000년에 한 번씩  열리다는 선도(仙桃)를 좇았다는 것은 수로왕을 찾아왔다는 의미)를 좇으며 반듯한 이마를 갖추어 이제야 감히 임금의 얼굴을 뵙게 된 것입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 곳에서 올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왕비를 맞이하자는 신하들의 간청을 구태여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당신이 몸소 내게 오셨으니, 못난 나에게는 다행이오."

 드디어 혼인을 하고 이틀 밤을 지낸 뒤 또 하루 낮을 지냈다. 그러고는 마침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기 양식으로 쌀 열 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부부도 모두 수레를 나란히 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외국의 갖가지 진기한 물건을 모두 싣고 천천히 돌아오니 시간은 정오에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게 하고, 잉신 부부와 노비에게는 빈 집 두 채를 주어 나누어 살게 했으며, 나머지 따라온 자들은 20여 칸의 빈관(賓館) 한 채에 사람 수를 정하여 나누어 살게 하고 일용품을 넉넉히 주었다. 또한 싣고 온 진기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저장하여 왕후가 사철 쓰도록 했다.

 

 

  어느 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들은 모두 여러 벼슬아치의 우두머리인데, 그 지위와 이름이 모두 소인이나 농부의 호칭이지 결코 고관 직위의 호칭이라고는 할 수 없소. 혹시라도 나라 밖 사람들이 들으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마침내 아도(我刀)를 아궁(我躬)으로 고치고, 여도(汝刀)를 여해(汝諧)로, 피도(被刀)를 피장(彼藏)으로,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으로 고쳤으며,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이란 명칭은 윗글자는 고치지 않고 아랫글자만 고쳐 유공(留公)과 유덕(留德)으로 했다. 또 신천(神天)은 신도(神道)로 고치고 오천(五天)은 오능(五能)으로 고쳤으며, 신귀(神鬼)는 음을 고치지 않고 훈만 고쳐 신귀(臣貴)로 했다. 계림의 직위(職位)를 취해 각각(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 관료는 주(周) 제도와 한(漢)의 제도를 나누어 정했으니, 이는 옛것을 고쳐 새것을 취하여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에 수로왕은 국가를 다스리는 집을 정돈하여, 백성들을 아들처럼 사랑했다.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사는 엄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비유할 수 있었다. 그 공(功)은 도산씨(道山氏)가 하(夏)나라를 보필하고(도산씨의 딸로 하나라 우 임금에게 시집가 도왔다. 도산은 우 임금이 제후들과 맹세한 땅이다), 요 임금의 딸들(요 임금의 딸 아황과 여영으로 순임금에게 시집 가 교씨의 시조가 되었다)이 요씨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해에 곰 얻는 꿈을 꾸어 징조가 있더니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후한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년(189년) 3월 1일에 왕후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듯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왕후가 가락국에 처음 와서 닿은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부르고, 비단 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했으며, 붉은 깃발이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다.

 잉신이던 천부경(泉府卿) 신보와 종정감(宗正監) 조광 등은 가락국에 도착한 지 30년 만에 각자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부부는 12년 뒤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밖의 하인들은 온 지 칠팔 년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오직 고국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지닌 채 고향을 향하고 죽으니, 살던 빈관이 텅 빙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매일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여 슬픔에 젖곤 하다가 25년이 지난 [건안] 헌제(獻帝) 입안(立安-후한 말엽 유협의 연호인 건안이 옳다) 4년 기묘년(199년) 3월 23일에 죽었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가 죽은 것처럼 비통해했는데, 왕후가 죽던 땝다 더욱 심했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는 한 발이고, 둘레는 300보로 하여 장사를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불렀다. 대를 이은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9대손 구형(仇衡)까지 이 묘에 배향하고, 매년 맹춘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정결한 제사를 지냈는데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용삭(龍朔- 당나라 고종의 연호로 661년에서 663년까지 사용했다) 원년 신유년(661년) 3월 어느 날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왕의 9대손 구형왕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아마도 奴宗인 듯하다)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 아들 잡간 서운(庶云)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가 나를 낳았기 때문에 원군은 나에게 바로 15대 시조다. 그 나라는 이미 망했으나 장례를 지내는 묘는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해라."

 이에 사자를 옛터로 보내 사당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을 공양 밑천으로 삼아 왕위전(王位田)이라 불렀으며 본토에 귀속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인 급간 갱세(世)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제전(祭田)을 관리하며 해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과 밥, 다과 등 여러 가지 음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삿날도 거등왕이 정한 연중 다섯 날을 그대로 지켜 정성어린 제사가 지금 우리에게 있게 된 것이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년)에 편방(便房-임시로 제사 지내는 방)을 설치한 후부터 구형왕 말까지 330년 동안에 종묘의 제사는 항상 변함이 없었는데,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뒤부터 용삭 원년 신유년(661년)까지의 60(구형왕 항복부터 문무왕 즉위년까지는 120년의 차이가 있으니, 아마도 시가가 잘못된 듯하다)년 사이에는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간혹 거르기도 했다. 아! 아름답구나, 문무왕(文武王- 법민왕의 시호)이여! 선조를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효로써 이어 다시 지내게 되다니.......

 

 신라 말년에 잡간 충지(忠至)란 사람이 있었는데, 금관성을 공격하여 빼앗아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또 아간 영규(英規)라는 사람이 장군의 위엄을 빌려 종묘의 제사를 빼앗고 함부로 제사를 지냈다. 그가 단오날을 맞아 제사를 지내는데 사당의 대들보가 까닭없이 무너져 깔려 죽고 말았다.

 이에 성주장군이 혼잣말을 했다.

 "다행이 전세의 인연으로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그러니 마땅히 내가 영정(影幀)을 그리고 향과 등을 바쳐 신하 된 은혜를 갚겠다."

 그리고 석 자 크기의 교견(鮫絹-남해에서 생산되는 비단이다)에 진영(眞影)을 그려 벽에 모셔 두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경건하게 받들었다. 이렇게 한 지 사흘도 채 못 되어 영정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땅바닥에 거의 한 말이나 흥건히 괴었다. 이에 장군은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받ㄷㄹ어 사당으로 가서 불태운 다음 즉시 수로왕의 직계 자손 규림(圭林)을 불러 말했다.

 "어제 불상사가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거듭 일어나는가? 이는 정녕 내가 영정을 그려서 공양하는 것이 공손치 못하여 사당의 위령(威靈)이 진노한 것이다. 영규가 이미 죽었고 나도 매우 두려워 영정을 불태웠으니, 반드시 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직계 자손이니 옛날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겠다."

 이리하여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는데 여든여덟 살이 되어 죽은 뒤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이어서 제사를 지냈다. 사당을 배알하는 단오일 제사에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미친 증세로 인해 사당에 와 간원이 차려 놓은 제수를 치우고 자기의 제수를 차려 제사 지냈다. 준필은 술잔을 세 번 올리는 일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서 죽고 말았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이 말했다.

 "분수 넘게 지내는 제사는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을 낳는다."

 이런 일은 이전에는 영규가 있었고 후에는 준필이 있었으니, 이들 부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또 사당 가운데 금옥이 많으니 도적들이 언젠가 와서 훔쳐가려 했다. 도적들이 사당에 처음 왔을 때,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는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와 사면으로 비 오듯 활을 쏘아 도적 칠팔 명을 맞히자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 후 도적들이 다시 왔을 때는 길이가 30여자나 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팔구 명을 물어 죽였다. 이때 겨우 죽음을 면한 도적들은 모두 엎어지고 흩어졌다. 때문에 능원(陵園)의 안팎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지켜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언 4년 기묘년(199년)에 처음으로 이 사당을 세운 이후로 지금 임금이 즉위한 31년인 대강(大康-요나라 도종(道宗) 야휼홍기의 연호이며 1075년에서 1084년까지 사용하였다) 2년 병진년(1076)까지 모두 878년이 되었으나, 쌓아 올린 깨끗한 흙은 허물어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싣ㄹ거나 죽지 않았으며 배열해 놓은 여러 옥 조각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면, [당나라 사람] 신체부(辛否)가 "예부터 지금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으며, 허물어지지 않은 무덤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오직 이 가락국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신체부의 말이 영험이 있는 것이지만, 수로왕의 사당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신체부의 말이 다 믿을 만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또 수로왕을 사모하여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 29일이 되면 향토의 백성과 관리와 병사들이 승점(昇岾)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들은 동서쪽으로 바라보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누어 망산도로부터 용맹한 말을 타고 육지로 다투어 달리고, 뱃머리를 둥실 띄워 서로 물에서 밀며 북쪽의 고포(古浦)를 향해 내달린다. 이는 대개 옛날 유천간, 신귀간 등이 허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다가 급히 임금께 알렸던 유적이다.

 가락국이 멸망한 후 대대로 이곳에 대한 칭호가 같지 않았다. 신라 제 31대 정명왕(政明王- 신문왕)이 즉위한 개요(開耀-당나라 고종의 연호로 681년에서 682년까지 사용했다) 원년 신사년(681년)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부르고 태수를 두었다. 그 후 259년이 지나 우리 태조가 통합한 후로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설치하여 48년을 지냈다. 다음에는 임해군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하여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27년을 지냈고 또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64년을 지냈다.

 순화(淳化-북송 태조의 연호이며 고려 성종 2년이다) 2년(991년)에 김해부의 양전사(量田使-전답의 측량을 조사하는 관리)인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이 조사하여 보고했다.

 "수로왕릉에 딸려 있는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옛 제도대로 15결로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부역을 맡은 장정)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담당한 관서에게 그 장계를 전하니 조정에서 명을 내렸다.

 "하늘에서 알을 내려 변해 성스러운 임금이 된 후, 수명이 길어 158세에 이르렀으니, 저 삼황(三皇) 이후 비견될 만한 사람이 없다. 죽은 후 선대로부터 능묘에 딸려 있던 전답을 지금 줄여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가 또 아뢰니, 조정엣도 그렇게 여겨 절반은 능묘에 두어 옮기지 않고 절반은 향리의 역정에게 주도록 했다. 절사(節使-양전사의 호칭)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 이에 반은 능원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에서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도록 해다. 어느 날 저녁 꿈속에서 갑자기 칠팔 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쥐고 칼을 잡고 와서 말했다.

 "네가 큰 죄를 지었으므로 베어 죽이겠다."

 양전사는 형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깨어났는데 이내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쳤는데, 병이 조금도 낫지 않아 관문을 지나다가 죽었다. 그래서 양전사는 토지측량대장에 도장을 찍지 못했다.

 이후에 봉사(奉使)하는 사람이 와서 그 전답을 조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일 뿐이고 3결 87부 1속이 부족했다. (이것을 결부제라 하며, 신라 이래 토지 면적에 따른 수확량 산출에 독특한 계량법이다. 대체로 농부의 손에 쥔 벼 한 줌이 기준인데, 열 줌을 1파(把), 10파를 1속, 10속을 1부, 100부를 1결로 한다) 그래서 가로챈 것을 추적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서에 보고하고 왕명으로 다시 넉넉히 지급했으니 고금에 탄식할 일이다.

 시조 수로왕(元君)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부지런하게 다스리고 정성스럽게 도를 숭상했는데, 시조의 어머니 허 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가(元嘉) 29년 임진년(452)에 원군과 황후가 합혼하던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 했으며, 사신을 보내 그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측량하여 삼보(三寶-불보, 법보, 승보)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했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이 지나자 장유사(長遊寺-김해시 장유면 용지봉 정상에 있었던 절인데 얼마 전에 새로 지어졌다)를 지었는데, 이 절에 바친 전시(田柴)가 모두 300결이었다. 그러자 장유사의 삼강(三剛-三綱이 옳다. 사찰의 세 가지 직책, 즉, 상좌, 사주, 유나를 말한다)은 왕후사가 장유사 시지(柴地)의 동남쪽 지경 안에 있다고 하여 왕후사를 없애 전장(田莊)으로 만듥, 추수한 것을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술픈 일이다. 세조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를 아래에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렇다.

 

  태초가 열리니 해와 달이 비로소 밝았고,

  인륜은 비록 있었으나 임금의 자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방의 나라들은 서울을 나누었다.(신라가 가야를 병합하기 이전의 상황을 말한다)

  신라가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은 뒤에 세워졌다.

  세상을 다스릴 사람이 없으니 누가 백성을 돌보랴.

  드디어 상제께서 저 창생을 돌보아 주셨다.

  이에 부명(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을 보냈다.

  산속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 속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안은 아득한 듯하고 바깥도 컴컴했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것 같은데, 들으니 소리가 났다.

  여러 사람이 노래를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쳤다.

  이레가 지난 후에야 한때 고요해졌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에서 여섯 개의 둥근 알이 내려오며 자색 끈 하나를 드리웠다.

  다른 지방 낯선 땅에 집들은 잇달아 있었다.

  구경꾼이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이 우글거렸다.

  다섯 분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다.

  같은 시각 같은 모습은 형제 같았다.

  참으로 하늘이 덕인(德人)을 내어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

  왕위에 처음 오르니 천하가 맑아지려 했다.

  화려한 제도는 옛 제도를 모방하고, 흙 계단은 오히려 평평했다.

  온갖 정사에 힘쓰니 모든 정치가 시행되고,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정일(精一)했다.

  길가는 사람은 길을 양보하고, 농부는 밭갈이를 서로 양보했다.

  사방에 사건이 없어 베개를 편히 받치고, 만백성이 태평을 맞이했다.

  갑자기 햇볕에 드러난 풀잎 위의 이슬처럼 문득 대춘(大椿-1만 6000년을 사는 나무인데 오래 사는 것을 비유)을

  보전하지 못했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통곡했다.

  금 같은 그 자취 빛나고 옥같은 소리를 울렸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제사는 향기롭기만 했다.

  세월은 비록 흘러 갔으나 규범은 기울어지지 않았다.

 

 

* 거등왕(居登王) : 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느 허황후다. 건안 4년 기묘년(199년) 3월 3일에 즉위하여 39년을 다스리고, 가평(嘉平-삼국 위(魏)나라 제왕 조방(曺芳)의 연호로 249년에서 254년까지 사용했다)5년 계유년(253년)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으로 태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 이렇게 말했다.

 "성은 김씨라고 하니, 아마도 가야국의 세조가 금빛 알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으로 성을 삼았을 뿐이다."

 

* 마품왕(麻品王) :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가평 5년 계유년(253년)에 즉위해 29년을 다스리고 영평(永平) 원년 신해년(291년) 1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로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 거질미왕(居叱彌王) :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영평 원년에 즉위하여 56년을 다스리고, 영화(永和) 2년 병오년(346년) 7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아간 아궁(阿躬)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 이시품(伊尸品)을 낳았다.

 

* 이시품왕(伊尸品王) : 김씨다. 영화 2년에 즉위하여 62년을 다스리고, 의희(義熙-동진(東晉) 안제(安帝) 사마덕종의 연호이며 419년에서 420년까지 사용하였다) 3년 정미년(407년) 4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의 딸인 정신(貞信)이며, 왕자 좌지(座知)를 낳았다.

 

* 좌지왕(坐知王) :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 3년(407년)에 즉위하여 용녀(傭女)와 결혼한 후 외척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여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계림이 꾀를 써서 [가락국을] 정벌하고자 했다. 가락국의 신하 박원도(朴原道)가 좌지왕에게 간했다.

 "유초(遺草)를 깎고 깎아도 또한 털이 나는 법이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인들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또 복사(卜士)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괘사에 '소인을 없애면 군자인 벗이 와서 도울 것이다.'라고 했으니, 임금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펴보십시오."

 왕이 "옳다."라고 사례하고는 용녀를 내쳐 하산도(荷山島)로 귀양 보내고 정치를 고쳐 오랬동안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  15년 동안 다스리고 영초(永初-송나라 무제(武帝) 유유(劉裕)의 연호로 420년에서 422년까지 사용했다) 2년 신유년(421년) 5월 12일에 죽었다. 왕비는 대아간 도령(道寧)의 딸 복수(福壽)이며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 취희왕(吹希王) : 질가(叱嘉)라고도 하며 김씨다. 영초 2년에 즉위하여 31년동안 다스리고 원가(元嘉-송나라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연호로 424년에서 453년까지 사용했다) 28년 신묘년(451년) 2월 3일에 죽었다. 왕비는 각간 진사(進思)의 딸 인덕(仁德)으로 왕자 질지(知)를 낳았다.

 

* 질지왕(知王) :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 28년에 즉위했으며 이듬해 세조와 허황옥 왕후를 위해 복을 빌고자 처음 세조와 왕후가 결혼하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라 하고, 전답 10결을 내어 보탰다. 42년 동안 다스리고 영명(永明-남조 제(齊)나라 무제 소적의 연호로 483년에서 493년까지 사용했다) 10년 임신년(492년) 10월 4일에 죽었다. 왕비는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딸 방원(邦媛)이며, 왕자 겸지(鎌知)를 낳았다.

 

* 겸지왕(鎌知王) :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 10년에 즉위하여 30년을 다스리고 정광(正光- 북위(北魏) 효명제 원후(元詡)의 연호로 520년에서 525년까지 사용했다) 2년 신축년(521년) 4월 7일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의 딸 숙(淑)이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 구형왕(仇衡王- 그의 능은 경남 산청군 하서면에 있는데 겉으로 보면 돌무더기 같다) : 김씨다. 정광 2년에 즉위하여 42년을 다스렸다. 보정(保定-북조(北朝) 북주(北周)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의 연호로 561년에서 534까지 사용했다) 2년 임오년(562년)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자 왕이 직접 군졸을 거느리고 싸웠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대항하여 싸울 수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 (脫知爾叱今)을 보내 국내에 머물게 하고, 왕자 및 상손(上孫) 졸지공(卒知公) 등은 신라에 들어가 항복했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각각(世宗角干)이고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이며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말했다.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 양(梁)나라 무제 소연의 연호로 529년에서 534년까지 사용했다)4년 임자년(532년)에 신라에 항복했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이 글을 쓴 이가 일연인지 아니면 가락국이에 붙여진 글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연이 쓴 것 같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 4년 임자년에 땅을 신라에 바치고 항복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 18년 임인년(42년)에서 구형왕말 임자년(532년)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땅을 바친 것이 위(魏)나라 보정(保定) 2년 임오년(562년)이 되므로 30년이 더 있게 되니 모두 520년이 되는데, 지금 두 가지 설을 다 기록한다."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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