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기다리는 불안한 마음
<정읍사>에 대한 기록들
<정읍사>는 가사가 문헌으로 전해지는 유일한 백제의 노래이다. 《고려사》 <악지>의 ‘속악’ 조에 <선운산>, <무등산>, <방등산>, <지리사> 등과 함께 백제의 노래로 분류되어 그 유래와 내용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고, 이 노래를 창사(唱詞)로 하는 궁중악 무고정재의 연행 방식이 나타나 있다. 《고려사》<악지>는 우리말로 된 속악의 가사들을 적지 않는 나름의 원칙이 있어 한글로 가사를 수록하지는 않았는데, 다행히 무고정재의 연행 방식과 함께 가사 전편을 수록한 《악학궤범》을 통해 작품의 온전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들은 이 노래가 고려와 조선 시대의 궁중악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도 말해준다.
가사가 온전히 수록된 것은 《악학궤범》뿐이지만, 이 작품에 대한 크고 작은 기록들이 여러 문헌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조선황조실록》에는 중종, 숙종, 정조 등 여러 시기에 걸쳐 이 작품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허균의 《성소부부고》에 이 작품의 연행 모습이 소개되어 있는가 하면, 《성호전집》에는 이익이 <정읍사>를 내용으로 하여 지은 악부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동국여지승람》,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 이 작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듯 작품에 대한 기록이 적지는 않지만, 특히 다음 두 자료는 지금까지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고려사》<악지>에 소개된 이 작품의 유래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이 작품이 행상을 나간 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그 아내가 산 위에 올라 기다리는 내용을 담은 것이라 설명하였다. 남편이 밤길을 가다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흙탕물의 더러움을 빌어 노래했는데,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던 돌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도 하였다. 사실 <정읍사>의 전승 기간을 생각하면 이 기록의 사실 여부를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전국의 도처에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어버린 아내의 이야기, 혹은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던 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애초에는 서로 따로 전해지던 노래와 이야기가 어느때부터 결합되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고려사》<악지>의 편찬자들은 이 작품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이 담긴 것으로 해석하였고, 이와 같은 해석에 따라 이 작품을 <악지>에 수록할 만한 작품으로 판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많은 연구자들도 이 자료를 작품의 해석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둘째로는 《조선왕조실록》의 중종 때 기록이다. 중종 13년의 기록에 이 노래가 <동동>가 함께 ‘남녀 간 음사(淫詞)’로 지목되어 무고정재의 창사로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한 논의가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정읍사>는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담고 있는 <오관산(五冠山)>으로 교체되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은 바로 앞에 소개한 《고려사》<악지>의 내용을 볼 때 서로 충돌하는 면이 있어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이 작품에 대한 《고려사》<악지>의 소개 내용으로 보아 이 작품은 유교적 예악관(禮樂觀)에 부합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고려사》의 편찬과 중종 때 작품의 산개(刪改, 잘못된 글귀를 지우고 고쳐서 바로잡음)가 논의된 시기 사이에 작품의 수용 태도에 서로 대립되는 수준의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인데, 여러 연구자들은 이 작품의 어떤 면이 ‘음사’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지에 천착하며 작품에 등장하는 어휘들의 상징성을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와 같은 수용 태도의 변화를 확실히 말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다만 《고려사》<악지>에서 이 작품을 수록한 것이 텍스트 외적인 정보, 특히 망부석으로 상징되는 여성의 정절을 근거로 했으리라 짐작해 볼 때, 중종 때에 있었던 작품에 대한 상반된 판단은 텍스트 외적인 정보보다 텍스트 자체에 주목한 새로운 해석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리라 추론해 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이 두 개의 자료는 <정읍사>의 내용과 주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쟁점의 근원이 되고 있으며, 오늘날의 작품 해석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의 여러 주장은 “조선 전기와 후기에 걸쳐 나타난 <정읍사>에 대한 비평 태도의 변주”라고 평가할 수 있는데, 이는 작품 이해의 난점이라기볻는 오히려 작품의 해석을 흥미롭고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정읍사>의 가사가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현재로서는 조선 시대의 악서인 《악학궤범》뿐이다. 여기에 소개된 작품의 전편은 다음과 같다.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全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ᄅᆞᆯ 드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기야 내 가논 졈그ᄅᆞᆯ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작품은 비교적 단형이라 할 수 있는데, 반복되는 후렴구를 기준으로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단락은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두 번째 단락은 ‘어긔야 어강됴리’, 세 번째 단락은 다시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의 후렴구로 마무리된다. 둘째와 셋째 단락 사이의 후렴구가 다른 것들에 비해 짧은 것으로 보아 이 두 단락의 사이가 더욱 긴밀해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세 단락으로 구성된 작품의 형태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시가의 형식을 연상시키고 있어 작품의 내용을 살피기 전에 간단히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은 뜻이 없는 부부인 감탄사나 여음구 등을 제외한 뒤 나머지 부분들만으로 보면 네 토막씩 세 번이 반복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우선 첫 단락에서 의미가 없는 여음구라 볼 수 있는 ‘어긔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를 제외하고,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머리곰/ 비취오시라’라 읽어보면 이 부분이 4음보로 구성되어 있음을 할 수 있다. 나머지도 이런 식으로 바꾸어 보면, 작품 전체는 4음보가 세 번 반복된 구조를 띠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시조와 매우 유사하다. 시조의 형식이 이를 계승한 것인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으나 시조 이전에 이러한 구성을 지닌 시가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이제 작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읽어보자. 편의상 각각의 단락을 연으로 지칭하기로 한다. 1연은 달을 두고 소원을 비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냥 달이라 하지 않고, 존칭의 대상에게 붙이는 호격인 ‘하’를 붙임으로써 간절한 태도가 두드러진다. ‘머리’는 오늘날 ‘멀리’로 변한 말인데, 거기에 강종의 의미를 더해주는 ‘곰’을 붙여 ‘멀리 멀리’ 또는 ‘저 멀리’ 정도의 의미를 나타내게 하였다. 떠오르는 달이 더 높이 솟아 그 빛을 저 먼 곳까지 바춰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에서, 화자가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의 사정을 궁금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화자는 무엇을 알기 위해 달빛이 저 멀리까지 비춰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이제 2연으로 이어지며 그 이유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져재’가 저자, 즉 시장을 의미하고, ‘녀러신고요’는 ‘지나고 계신가요’, ‘가 계신가요’ 정도로 풀이를 할 수 있으므로, 일단 임이 시장 어딘가를 헤매고 있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고려사》<악지>에서 화자를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화자가 시장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화자는 임이 시장 어딘가를 헤매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이어 임이 혹시 ‘즌 ’에 들어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즌 ’는 ‘진 데’, 즉 질퍽한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인데, 아무래도 비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악지>의 기록 중 “남편이 밤길을 가다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흙탕물의 더러움을 빌려서”라고 한 설명을 고려한다면, 흙탕물처럼 위험하고 더러운 곳을 ‘즌 ’로 은유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임이 돌아오는 길에 혹시 위험한 곳을 지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화자의 마음이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1연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다소 어색하게 느껴진다. 우선 화자가 임이 시장에 있지 않을까 하고 궁금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아 보인다. 이미 달이 떠오를 정도의 늦은 시간에 화자가 임이 아직도 시장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임은 이미 예상했던 기일을 훌쩍 넘긴 상황일 것이고, 화자는 오늘 밤에는 혹여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면, 이슥한 밤에 고개에 올라 아직 임이 시장에 있지 않을까 궁금해하는 화자의 모습은 다소 어색하게 느껴진다.
둘째, 1연에서 화자가 달에게 ‘밝게’가 아니라 ‘멀리’ 비춰 달라고 소망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2연의 임이 지금 돌아오는 길이라 화자가 확신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도 생각해 볼 일이다. 만일 화자가 임이 위험한 곳을 딛지 않고 무사히 귀환하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멀리보다는 밝게 비추는 것을 바라야 옳지 않을까. 그러나 화자는 달이 밝게 비춰 임이 오는 길이 안전하게 되는 것을 기원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화자는 현재 임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임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길인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하며, 《고려사》<악지>의 소개대로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고려사》<악지>의 내용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이제까지 작품의 본문에 포함되는지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던 ‘全(온)’을 해석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 조금 더 자연스러운 해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작품의 해석에서 두 번째 단락의 시작을 ‘져재’로 볼 것인지, ‘全 져재’로 볼 것인지의 문제는 오랫동안 쟁점이 되어왔다. 이 작품이 수록된 《악학궤범》의 특성상 가사와 함께 ‘전강(前腔)’, ‘소엽(小葉)’ 등 해당 악절의 이름이 함께 표시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마침 ‘後腔全져재’라 기록되어 있어 해석이 분분하였다. ‘後腔全’을 악절의 명칭으로 볼 경우 ‘져재’부터가 이 부분의 가사가 되겠지만, ‘後腔’만을 악절의 명칭으로 본다면 ‘全 져재’가 단락의 시작이 된다. 이럴 경우 작품의 배경을 고려하여 ‘全’이 전주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 ‘全’의 뜻 그대로 ‘모두(온)’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 등이 있었다.) 행상을 다니는 임은 온 시장을 다 돌아다니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온 사방을 돌아다니느라 아직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기에 혹시 엉뚱한 곳까지도 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수 있다. ‘온 시장을 다 돌아다니고 계신가요, 혹시 그러다 엉뚱한 곳에 들어설지 걱정입니다.’ 하는 것이 화자의 마음이 아닐까. 작품의 내용만으로 볼 때 임은 반드시 남편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떠나간 임이 화자에게 돌아올 것을 다짐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유보해 둘 필요가 있다.
이제 마지막 3연으로 넘어가 보자. ‘노코시라’는 놓아두라는 의미로 풀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을 놓으라는 것인지,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하는 것이 쟁점이 된다. (연구의 초기 이례로 ‘어느 것이든 모두’ 정도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가 근대 이전에는 사물이나 장소, 사람 등 여러 가지 의미로 두루 사용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이’가 사람을, 구체적으로 화자의 임을 지칭한다고 본 김완진은 이 구절의 의미를 ‘아무개 좀 다 놓아주시구려’라고 풀이하였다.) 물론 어느 것이든 모두 내려놓으라고 할 때 무언가를 내려놓는 주체로 얼른 떠올릴 수 있는 이는 바로 임이다. 무언가를 내려놓는 주체로 임을 가정할 때 임이 내려놓을 수 있는 것, 혹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임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다. 진 곳의 유혹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만일 임이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면 진 곳을 찾아 들어가는 것이 임의 의지일 수도 있다. 임의 의지이든 아니든 간에 만일 임이 그 모든 방해 요소를 뿌리치지 못할 때 임과의 재회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하여 ‘내 가는 길’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은 화자의 바람과 달리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 임에 대한 기다림과 걱정, 그리고 임이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막막하게 될 화자 자신의 앞날에 대한 근심을 담고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달빛은 ‘즌 ’를 디딜지 모르는 임의 상황을 알고자 하는 화자의 근심을 담아 저 멀리까지 비춰줘야 하는 빛이고, 장차 어두워지려 하는 화자의 미래를 지켜주는 빛이기도 하다.
《고려사》<악지>에 수록된 속요는 민요, 무가, 불가, 개인 창작 등 다양한 근원을 가지고 있다. (‘속요’는 대개 “민속가요를 궁중의 속악가사로 전용하는 과정에서 생성, 발전된 고려 시대 국문 서정시가”로 규정된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여러 속요의 자료들을 토대로 그 면면을 살펴보면 작품마다 그 출발이 다양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속요를 감상할 때에는 궁중악으로 전해지는 모습뿐만 아니라 궁중악으로 전용되기 이전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유용한 일이다.) <정읍사>가 백제 시대부터 궁중악으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출발을 고려할 때 이 작품은 정읍을 배경으로 한 민요가 어느 시점에 궁중악으로 편입된 것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그리고 백제 시대에 민요로서 탄생한 <정읍사>가 조선 후기의 문헌들에도 소개될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전승되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이 작품의 어디엔가 자리 잡고 있을 보편적 공감의 요소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의 가치에 대해, 공감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전승의 유구함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정읍사>에 대해 누구나 자연히 공감하게 되는 요소가 무엇인가를 좀 더 생각해 보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다. 백제의 한 여인의 목소리에 고려 시대의 사람들이, 조선 시대의 사람들이,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먼저 이 작품이 기다림의 노래라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기다림은 함께 있어야 하는 이가 부재한 상황적 결핍에서 비롯된다. <정읍사>의 화자는 이러한 결핍이 해소되지 못하고 오히려 영원히 지속될 것을 염려한다. 아마도 불안에 사로잡힌 인간은 일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임이 고개에 올라 찾아본다고 보일 리 없다. 그렇다고 집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릴 수만도 없다. 이 작품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은 화자의 깊은 불안이고, 이 작품은 이러한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한 불안이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더욱 짙어진다는 점이 이 작품의 묘미이다. 화자가 자신의 앞날이 어두워질 것을 염려하는 것은 임의 귀환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임을 둘러싼 상황의 탓일 수도 있으나 임과 화자의 관계가 불확실한 데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혹시 임은 애초에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사실 《고려사》<악지>의 기록을 잠시 내려두고 작품의 내용만으로 보자면, 화자가 기다리는 누군가를 남편이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없다. 상대적으로 분명한 것은 그가 시장을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것, 화자의 불안한 상상 속에서 부정적인 공간을 다닐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화자의 불안에는 임에 대한 믿음과 의심이 교차하고 있다. 프로이트가 지적한 대로,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고통은 인간의 숙명과도 같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면서 결핍을 경험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불안· 믿음 · 회의를 겪을 수밖에 없다. <정읍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심적 갈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 공감의 요소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보편적 불안을 담고 있다는 점만으로 이 작품이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향유되었다는 것이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이 불안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주제로 하되 그러한 불안을 그대로 노출시키기보다는 최대한 절제된 표현으로 그 불안이 더욱 애절하게 드러나도록 한다는 점도 아울러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의 시작은 달빛이고, 작품의 마지막은 ‘내 가는 길’을 덮으려 하는 어둠이다. 어둠에서 벗어나 밝음의 상태로 나아가려는 소망의 구조를 띠고 있다. 화자의 갈등은 어둠처럼 다음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서 비롯되고, 달을 불러들여 어둠과 불확실성을 몰아내려는 욕망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밝음이 태양의 광명이 아니라 은은한 달빛이라는 것은, 작품에서 소망하는 밝음이 소박한 일상의 지속을 지향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별하고 특이한 고민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을 지속하기 위하여 필요한 안정을 희구하는 소박한 소망을, 분리에서 합일을 지향하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밝음과 어둠이라는 원형 상징의 대립을 통해 담담하지만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함께 고려할 때 이 작품이 지닌 보편적 공감의 자질이 더욱 잘 이해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정읍사>에 공감하게 되는 요소가 이에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특별한 수식 없이 남편의 무사 귀환을 소망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주는 호소력은 어느 때나 보편적인 공감력을 지닌 요소이다. 또한 ‘어긔야’라는 감탄사의 반복, ‘어강됴리’, ‘다롱디리’ 등의 매력적인 후렴구도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요소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이 작품이 인간의 보편적인 심정을 빛과 어둠의 대립을 통해 간결하게 담다내고 있다는 점이라 하겠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지만 <정읍사>는 백제 시대부터 불리던 오래된 노래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정읍사>가 원래의 모습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의 고전시가 중에서 <정읍사>와 같이 오랜 시간 동안 전승되면서 가사가 제대로 전해지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중에도 끊이지 않고 향유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기에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특히 그 유구한 전승의 이유, 즉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공감의 요소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용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노래가 계속해서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시의 본질을 논할 때 흔히 언급되는 것으로 《시경》의 “시로써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진정한 시라면 그것을 노래하는 이의 진실한 마음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시를 읽고 듣는 사람의 마음도 함께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않고 <정읍사>처럼 오랜 시간을 이어온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제까지 언급한 여러 가지 면모를 고려할 때 <정읍사>가 진실한 마음으로 세상을 감동시킨다는 시가의 본질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조하연>
출처 : <한국고전문학 작품론> 03 고전시가,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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