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永平-후한 명제(明帝) 유장(劉莊)의 연호) 3년 경신년(60년) 8월 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지나다 시림(始林-『삼국사기』 「잡지」에 의하면 탈해왕 9년(65년)에 시리에 닭의 신이한 변화가 있어 계림(鷄林)이라 고쳤다 한다. 지금의 경주시 교동 첨성대와 반월성 사이에 있다.) 속에서 커다란 빛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하늘에서 땅까지 자줏빛 구름이 드리워지고 구름 속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 황금 상자가 걸려 있었다. 상자 안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고 나무 밑에는 흰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 했다. 왕(탈해왕)이 숲으로 가 상자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났는데,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기 때문에 알지(閼智)라는 이름을 붙였다. 알지는 향언(鄕言)으로 어린 아이라는 뜻이다. 왕이 알지를 수레에 싣고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이 서로 뒤따르면서 춤을 추었다.

 

왕이 길일을 가려 태자로 책봉했으나 나중에 파사왕(婆娑王)ㅏ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로 했다. 알지가 세한(勢漢-이병도는 '알지'와 동일 인물로 보았다.)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都)를 낳고, 욱부가 구도(俱道)를 낳고, 구도가 미추(未鄒)를 낳았다.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김알지(탈해왕 대)>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탤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은 남해왕 때에 (고본(古本)에 임인년에 왔다고 했으나 잘돗된 것이다. 가까운 임인년이면 노례왕이 즉위한 뒤일 것이므로 서로 왕위를 양보하려고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앞의 임인년이라면 혁거세의 시대다. 때문에 임인년이라 한 것은 틀렸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駕洛國) 바다 한가운데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북을 시끄럽게 두드리며 맞이하여 그들을 머물레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배는 나는 듯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지금도 상서지촌과 하서지촌이란 이름이 있다.)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포구 가에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노파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있었다.

 [노파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는 원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일로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가?"

 배를 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 있었고 배 안에는 길이가 스무 자에 너비가 열세 자나 되는 상자가 하나 있었다. 아진의선이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아래 매어 두고는 길흉을 알 수가 없어 하늘을 향해 고했다. 잠시 후에 열어 보니 반듯한 모습의 남자 아이가 있었고, 칠보(七寶-불가의 일곱 가지 보물로서 금, 은, 유리, 마노(瑪瑙), 호박(琥珀), 산호(珊瑚), 차거(거)인 듯하다)와 노비가 가득 차 있었다.

 

 이레 동안 잘 대접하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또는 정명국(正明國)사람이라고도 하고 완하국(玩夏國)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완하는 화하국(花夏國)이라고도 한다. 용성국은 왜(倭)의 동북쪽 1000리 지점에 있다.)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 일찍이 스물여덟 용왕이 있는데, 사람의 태(胎)에서 출생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온 백성을 가르치고 성명(性命)을 바르게 닦았습니다. 8품의 성골(姓骨)이 있으나 간택을 받지 않고 모두 큰 자리(大位-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자 아들 구하기를 빌어 7년 만에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군신을 모아 묻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으니 길상(吉祥)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고,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고 또한 칠보와 노비까지 배에 싣고 띄워 보내면서, '아무 곳이나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루어라.'라고 축원했습니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말을 끝내자 아이는 지팡이를 짚고 노비 두 명을 데리고 토함산으로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곳에] 이레 동안 머물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을 살펴보니 초승달 보양의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오래도록 살 만했다. 그래서 내려가 살펴보니 바로 호공(瓠公-『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그의 혈족과 성씨가 자세하지 않고 박을 허리에 매고 있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보았다.) 의 집이었다. 이에 곧 계책을 써서 몰래 그 옆에 숫돌과 숯을 묻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그 집에 가서 말했다.

 "여기는 우리 조상이 대대로 살던 집이오."

 호공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이들의 다툼이 결판이 나지 않아 관청에 고발했다. 관청에서 물었다.

 "무슨 근거로 너의 집이라고 하느냐?"

 아이가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깐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가 빼앗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십시오."

 탈해의 말대로 땅을 파 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그는]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고 맏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니, 이 사람이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탈해의 오기로 보아야 함)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인(白衣)에게 마실 물을 떠오게 했다. 그런데 하인이 물을 길어 오면서 도중에 먼저 맛보려 하자 입에 잔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하인이 맹세했다.

 "이후로는 가깝든 멀든 감히 먼저 물을 맛보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입에서 잔이 떨어졌다. 그 뒤로 하인은 두려워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에 세속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 부르는 우물이 바로 그곳이다.

 노례왕이 죽자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 정사년(57년) 6월 탈해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옛날 내 집이었다고 하여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에 성을 석씨(昔氏)라 했다.

 어떤 사람은 까치로 인해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작(鵲)자에서 조(鳥)를 버리고 성을 석(昔)씨로 했으며, 상자 속에서 알을 깨고 출생했기 때문에 탈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째인 건초(建初-후한 장제(章帝) 유달(劉炟)의 연호) 4년 기묘년(79년)에 죽은 뒤 소천구(疏川丘)에 장사 지냈다. 그 이후에 신(神)이 말했다.

 "내 뼈를 조심해서 묻으라."

 두개골의 둘레가 세 자 두 치, 몸통뼈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에 치아는 하나로 엉켜 있었으며, 뼈마디는 사슬처럼이어져 있어 이른바 천하에 둘도 없는 장사의 골격이었다.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하니, 신이 또 말했다.

 "내 뼈를 동악에 두라."(탈해왕릉은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의 길가에 큰 소나무를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받을어 모셨다.(이런 말도 있다. [탈해왕이] 죽은 뒤 27대 문무왕대 조로(調露) 2년 경신년(680년) 3월 15일 신유일(辛酉日)밤, 태종(문무왕의 오기)의 꿈에 매우 위엄 있고 사나워 보이는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탈해왕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라고 했다. 왕이 그의 말대로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국사(國祀)가 끊이지 않았으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도 한다.)

 

 

 

 

권 제1 기이 제1 제4대 탈해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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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이사금'이라고도 하며 윗사람, 우두머리라는 뜻. 나중에 임금이라는 의미로 확장)이 처음에 매부 탈해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탈해가 말했다.

 "무릇 덕이 있는 자는 치아가 많다고 하니, 마땅히 잇금으로 시험해 봅시다."

 이에 떡을 깨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잇금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즉위했다. 이런 연유로 왕을 잇금이라고 했다. 이질금이란 칭호는 노례왕에서 시작되었다. 유성공(劉聖公-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족형 유현(劉玄)이다.) 경시(更始) 원년 계미년(癸未年-23년)에 즉위하여 (연표에는 갑신년에 즉위했다고 했다) 여섯 부의 호를 고쳐 정하고 여섯 성(姓-李氏, 崔氏, 孫氏, 鄭氏, 裵氏, 薛氏다)을 하사했다.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는데, 차사(嗟辭-슬퍼하는 말이라는 뜻인데 가사에 자주 나오는 '아으'와 유사하며 향가의 기원과 관련된다.)와 사뇌격(詞腦格-향가 중에서 감탄사를 가진 19체를 말한다)이 있었다. 그때 처음 쟁기와 보습과 얼음 저장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무(建武) 18년(42년)에는 이서국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해에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노례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자충(慈充)과 동음어이며 '스승'의 옛말 혹은 존장에 관한 칭호)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을 일컫는 말인데 오직 이 왕만을 차차웅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다.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지금의 영일현(迎日顯)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응험이 있다고 한다.)이다.

 전한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년(4년)에 즉위하여 21년 동안 다스리고 지황(地皇-한나라 효원황후의 조카로 평제를 죽이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의 연호이다.) 4년에 갑신년(24년)에 죽으니, 이 왕이 바로 삼황(三皇-혁거세왕, 노례왕, 남해왕)의 첫째라고 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 불렀는데, 진한의 말로 왕을 뜻한다. 어떤 이는 귀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한다. 또한 차차웅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시대의 명문장가로 『화랑세기』를 지었다.)

 "차차웅은 무당을 말하는 방언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존장인 자를 자충이라 한 것이다."

 혹은 이사금(尼師今)이라고도 했는데, 잇금(齒理-잇자국)을 말한다. 처음에 남해왕이 승하하자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자 탈해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 성스럽고 지혜가 많은 사람은 치아가 많다고 합니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했다. 옛날부터 이렇게 전해 왔다.

 혹은 왕을 마립간(麻立干- 립(立)을 수(袖)로 쓰기고 한다.)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은 이렇게 말했다.

 "마립이란 궐(橛-서열을 말한다)을 말하는 방언이다. 궐표(標)는 자리에 따라 두었는데, 왕궐(王)이 주가 되고 신궐(臣)은 아래에 두게 되어 있어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삼국사론(三國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거서간과 차차웅이라 부른 임금이 각각 한 명씩 있고, 이사금이라 부른 임금이 열여섯 명이고, 마립간이라 부른 임금이 넷 있다."

 신라 말의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을 지으면서 모두 무슨 왕(某王)이라 칭하고 거서간이나 마립간 등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 말이 비루하고 거칠어서 일컬을 만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면서 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 또한 옳은 일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를 갈문왕(葛文王-신라시대 임금의 존족(尊族)과 임금에 준하는 자에게 주던 칭호)이라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 시대에 낙랑국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고, 또 천봉(千鳳) 5년 무인년(18년)에 고구려의 속국 일곱 나라가 투항해 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남해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진한 땅에는 예부터 여섯 마을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으로,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며, 촌장은 알평(閼平)이라고 한다.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경주시 동천동의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 그 아래에 석탈해왕릉이 보임)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 조상이 되었다.(노래왕 9년에 部를 설치하고 급량부라 했는데 고려 태조 天福 5년 경자년에 중흥부(中興部)로 고쳤다.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며,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回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

 

 셋째는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으로, 촌장은 구례마(俱禮馬)라고 한다. 처음에 이산(伊山-혹은 개비산(皆比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山珍支村)으로,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라고 한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와서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으며,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터가 있는데 여기가 최치원의 옛 집이라는 설이 거의 확실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지금의 금강산(경주 북쪽에 있는 산) 백률사 북쪽산)으로 촌장은 지타(祗沱)라고 한다. 처음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한기부(韓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활아(活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양촌(明活山高耶村)으로, 촌장은 호진(虎珍)이라고 한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彌村), 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여섯 부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다. 노래왕 9년(132년)에 처음으로 여섯 부의 명칭을 고쳤고, 또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서한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연호) 원년(기원전 69년) 임자년(고본(古本)에는 건무(建武) 원년이라고도 하고 또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남쪽 언덕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군주가 없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덕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고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지금은 신라정이락 하는데 경주의 탑정동 솔밭에 있다.) 옆에 번갯불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을 뒤덮었고 백마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자주색 알(혹은 푸른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려 사내 아이를 얻었는데, 모습과 거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동천(東泉-동천사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아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 이 말은 향언(鄕言)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이라 이름하고 위호(位號)는 거슬한(居瑟邯-또는 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스스로 "알지 거서간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일컬은 것인데, 이후부터 왕의 존칭이 되었다.)이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축하하며 말했다.

 "이제 천자가 이미 내려왔으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짝을 맺어 드려야 한다."

 그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아리영정이라고도 한다.)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혹은 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갈라 얻었다고도 한다.) 여자 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닭은 새로운 태양의 도래를 알리는 새다. 이러한 닭 토템은 신성 관념의 반영이며 신라 전체의 토템으로 확장된다.) 아이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했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남자 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향인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 했기 때문에 성을 박씨로 했다. 여자 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이 열세 살이 되는 오봉(五鳳) 원년 갑자에 남자 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여자 아이를 왕후로 세웠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의 풍속에 경(京)자를 서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후세에 이르러 국호가 신라로 정해졌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후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왕후는경주의 오릉(五陵)에 혁거세와 같이 묻혀 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한곳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쫓아 다니며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五體)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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