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 여정 - 이상

 

[미래엔 수록 부분]

 

 등잔 심지를 돋우고 불을 켠 다음 비망록에 철필로 군청빛 모를 심어갑니다. 불행한 인구(人口)가 그 위에 하나하나 탄생합니다. 조밀한 인구가.

 내일은 진종일 화초만 보고 탈지면(脫脂棉)에다 알코올을 묻혀서 온갖 근심을 문지르리라, 이런 생각을 먹습니다. 너무나 꿈자리가 뒤숭숭하여서 그리는 것입니다. 화초가 피어 만발하는 꿈, 그라비아(사진 재판에 사용되는 인쇄법) 원색판 꿈, 그림책을 보듯이 즐겁게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리면 간단한 설명을 위하여 상쾌한 시를 지어서 7포인트 활자로 배치하는 것도 좋습니다.

 도회에 화려한 고향이 있습니다. 활엽수만으로 된 산이 고향의 시각을 가려 버린 이 산촌에 팔봉산 허리를 넘는 철골 전신주가 소식의 제목만을 부호로 전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볕에 시달려서 마당이 부스럭거리면 그 소리에 잠을 깨입니다. 하루라는 짐이 마당에 가득한 가운데 새빨간 잠자리가 병균처럼 활동입니다. 끄지 않고 잔 석유 등잔에 불이 그저 켜진 채 소실된 밤의 흔적이 낡은 조끼 단추처럼 남아 있습니다. 작야(昨夜-어젯밤)를 방문할 수 있는 요비링(초인종)입니다. 지난밤의 체온을 방 안에 내어 던진 채 마당에 나서면 마당 한 모퉁이에는 화단이 있습니다. 불타오르는 듯한 맨드라미꽃 그리고 봉선화.

 지하에서 빨아올리는 이 화초들의 정열에 호흡이 더워 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 처녀 손톱끝에 물들을 봉선화 중에는 흰 것도 섞였습니다. 흰 봉선화도 붉게 물들까ㅡ 조금 이상스러울 것 없이 흰 봉선화는 꼭두서니(붉은 빛. ‘꼭두서니는 꼭두서닛과의 여러해살이 덩굴풀로, 뿌리는 물감의 원료로 씀.) 빛으로 곱게 물듭니다.

 수수깡 울타리에 오렌지빛 여주(박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풀로, 관상용으로 기름.)가 열렸습니다. 당콩(강낭콩) 넝쿨과 어우러져서 세피아(검은색에 가까운 흑갈색) 빛을 배경으로 하는 일폭의 병풍입니다. 이 끝으로는 호박넝쿨 그 소박하면서도 대담한 호박꽃에 스파르타식 꿀벌이 한 마리 앉아 있습니다. 농황색에 반영되어 세실.B.데밀(미국의 영화 제작자. <십계>, <삼손과 데릴라> 등을 만듦.)의 영화처럼 화려하며 황금색으로 치사합니다. 귀를 기울이면 르네상스 응접실에서 들리는 선풍기 소리가 납니다.

 야채 사라다(‘샐러드의 일본어)에 놓이는 아스파라거스 잎사귀 같은 또 무슨 화초가 있습니다. 객줏집 아이에게 물어봅니다. ‘기상꽃ㅡ기생화(妓生花)란 말입니다. 무슨 꽃이 피나ㅡ진홍 비단꽃이 핀답니다.

 선조(先朝)가 지정하지 아니한 조젯(여름 옷감의 한 가지) 치마에 웨스트민스터 궐련(영국제 고급 담배. ‘궐련은 얇은 종이로 가늘고 길게 말아 놓은 담배를 뜻함.)을 감아놓은 것 같은 도회의 기생의 아름다움을 연상하여 봅니다. 박하보다도 훈훈한 리그레추잉껌(미국제 껌이름) 내음새 두꺼운 장부를 넘기는 듯한 그 입맛 다시는 소리, 그러나 아마 여기 필 기생꽃은 분명히 혜원(蕙園) 그림에서 보는 것 같은, 혹은 우리가 소년 시대에 보던 떨떨 인력거에서 홍일산(紅日傘-의장으로 쓰던 붉은 빛깔의 큰 양산) 받은 지금은 지난날의 삽화인 기생일 것 같습니다.

 청둥호박(늙어서 겉이 굳고 씨가 잘 여문 호박)이 열렸습니다. 호박고자리(‘호박고지의 방언. 애호박을 얇게 썰어 말린 반찬거리)에 무 시루떡, 그 훅훅 끼치는 구수한 김에 좇아서 증조할아버지의 시골뜨기 망령들은 정월초하룻날 한식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국가 백 년의 기반을 생각하게 하는 넓적하고도 묵직한 안정감과 침착한 색채는 럭비구를 안고 뛰는 이 제너레이션의 젊은 용사의 굵직한 팔뚝을 기다리는 것도 같습니다.

 유자(여주의 열매)가 익으면 껍질이 벌어지면서 속이 비져 나온답니다. 하나를 따서 실 끝에 매어서 방에다가 걸어둡니다. 물방울져 떨어지는 풍염(豊艶-생김새가 살지고 아름다운, 풍성하고 아름다운)한 미각 밑에서 연필같이 수척하여 가는 이 몸에 조금씩 조금씩 살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야채도 과실도 아닌 유머러스한 용적(물건을 담을 수 있는 부피)에 향기가 없읍니다. 다만 세숫비누에 한 겹씩 한 겹씩 해소되는 내 도회의 육향(肉香)이 방 안에 배회할 뿐입니다.

 

핵심 정리

 

1. 갈래 현대 수필, 서간체 수필

2. 성격 서정적, 감각적

3. 제재 산촌에서의 생활

4. 주제 도시적 감수성으로 바라본 산촌의 풍경

5. 특징

       - 작가의 서구적 취향이 다양한 외래어와 외국어 사용을 통해 드러남.

       - 시선의 이동에 따라 글을 전개함.

6. 해제

 이 작품은 산촌에 가서 머물고 있는 작가가 도시에 있는 정 형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 글이다. 작가는 산촌의 객주방에서 밤을 새는 동안 일어나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서술하고, 자연과 풍광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도시적 이미지와 연결하여 표현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인 발상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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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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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멧돼지가 있답니다. 그리고 기우제 지내던 개골창까지 내려와서 가재를 잡아먹는 곰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사로잡아다가 동물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 놓아준 것만 같은 착각을 자꾸만 느낍니다. 밤이 되면 달도 없는 그믐 칠야에 팔봉산도 사람이 침소로 들어가듯이 어둠 속으로 아주 없어져 버립니다.

[A] 그러나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 별빛만으로라도 넉넉히 좋아하는「「누가복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참 별이 도회에서보다 갑절이나 더 많이 나옵니다. 하도 조용한 것이 처음으로 별들의 운행하는 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B]객줏집 방에는 석유 등잔을 켜 놓습니다. 그 도회지의 석간(夕刊)과 같은 그윽한 내음새가 소년 시대의 꿈을 부릅니다. () ! 그런 석유 등잔 밑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호까-연초갑지(煙草匣紙) 붙이던 생각이 납니다. 베짱이가 한 마리 등잔에 올라앉아서 그 연두빛 색채로 혼곤한 내 꿈에 마치 영어 티(T) 자를 쓰고 건너긋듯이 유()다른 기억에다는 군데군데 언더라인을 하여 놓습니다. 슬퍼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도회의 여차장이 차표 찍는 소리 같은 그 성악(聲樂)을 가만히 듣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또 이발소 가위 소리와도 같아집니다. 나는 눈까지 감고 가만히 또 자세히 들어봅니다.

 

그리고 비망록(備忘錄)을 꺼내어 머룻빛 잉크로 산촌의 시정(詩情)을 기초(글의 초안을 잡음.)합니다.

 

그저께 신문을 찢어버린/ 때 묻은 흰 나비

봉선화는 아름다운 애인의 귀처럼 생기고

귀에 보이는 지난날의 기사

 

얼마 있으면 목이 마릅니다. 자리물ㅡ 심해(深海)처럼 가라앉은 냉수를 마십니다. 석영질 광석 내음새가 나면서 폐부에 한난계(寒暖計) 같은 길을 느낍니다. 나는 백지 위에 싸늘한 곡선을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청석(靑石) 얹은 지붕에 별빛이 내리쪼이면 한겨울에 장독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벌레 소리가 요란합니다. 가을이 이런 시간에 엽서 한 장에 적을 만큼씩 오는 까닭입니다. 이런 때 참 무슨 재조(才操)로 광음(光陰)을 헤아리겠습니까? 맥박 소리가 이 방안을 방째 시계로 만들어버리고 장침과 단침의 나사못이 돌아가느라고 양짝 눈이 번갈아 간질간질합니다. 코로 기계기름 냄새가 드나듭니다. 석유 등잔 밑에서 졸음이 오는 기분입니다.

[C] 파라마운트 회사 상표처럼 생긴 도회 소녀가 나오는 꿈을 조곰 꿉니다. 그러다가 어느 도회에 남겨 두고 온 가난한 식구들을 꿈에 봅니다. 그들은 포로들의 사진처럼 나란히 늘어섭니다. 그리고 내게 걱정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만 잠이 깨어 버립니다.

죽어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여 봅니다. 벽 못에 걸린 다 해어진 내 저고리를 쳐다봅니다. 서도천리(西道千里)를 나를 따라 여기 와 있습니다그려!

등잔 심지를 돋우고 불을 켠 다음 비망록에 철필(펜촉에 펜대를 끼워 글씨를 쓰는 도구)로 군청빛 모를 심어갑니다. 불행한 인구(人口)가 그 위에 하나하나 탄생합니다. 조밀한 인구가.

[D] 내일은 진종일 화초만 보고 탈지면(脫脂棉)에다 알콜을 묻혀서 온갖 근심을 문지르리라, 이런 생각을 먹습니다. 너무나 꿈자리가 뒤숭숭하여서 그리는 것입니다. 화초가 피어 만발하는 꿈, 그라비아 원색판 꿈, 그림 책을 보듯이 즐겁게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리면 간단한 설명을 위하여 상쾌한 시를 지어서 7포인트 활자로 배치하는 것도 좋습니다.

도회에 화려한 고향이 있습니다. 활엽수만으로 된 산이 고향의 시각을 가려 버린 이 산촌에 팔봉산 허리를 넘는 철골 전신주가 소식의 제목만을 부호로 전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볕에 시달려서 마당이 부스럭거리면 그 소리에 잠을 깨입니다. 하루라는 짐이 마당에 가득한 가운데 새빨간 잠자리가 병균처럼 활동입니다. 끄지 않고 잔 석유 등잔에 불이 그저 켜진 채 소실된 밤의 흔적이 낡은 조끼 단추처럼 남아 있습니다. 작야(昨夜)를 방문할 수 있는 요비링(초인종)입니다. 지난밤의 체온을 방 안에 내어 던진 채 마당에 나서면 마당 한 모퉁이에는 화단이 있습니다. 불타오르는 듯한 맨드라미꽃 그리고 봉선화.

[E] 지하에서 빨아 올리는 이 화초들의 정열에 호흡이 더워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 처녀 손톱끝에 물들을 봉선화 중에는 흰 것도 섞였읍니다. 흰 봉선화도 붉게 물들까ㅡ 조금 이상스러울 것 없이 흰 봉선화는 꼭두서니 빛으로 곱게 물듭니다.

 

수수깡 울타리에 오렌지 빛 여주가 열렸습니다. 당콩 넝쿨과 어우러져서 세피아 빛을 배경으로 하는 일폭의 병풍입니다. 이 끝으로는 호박넝쿨 그 소박하면서도 대담한 호박꽃에 스파르타식 꿀벌이 한 마리 앉아 있습니다. 농황색에 반영되어 세실.B.데밀의 영화처럼 화려하며 황금색으로 치사합니다. 귀를 기울이면 르네상스 응접실에서 들리는 선풍기 소리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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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 [E]의 중심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A] : 별이 빛나는 고요한 산촌의 밤에 대한 느낌

[B] : 석유 등잔과 관련된 추억과 베짱이 울음소리에 대한 감상

[C] : 꿈속에서 본 가족의 모습과 가족에 대한 걱정

[D] : 뒤숭숭한 마음을 달래며 즐겁게 꿈을 꾸고 싶은 마음

[E] : 화단의 식물들을 보며 떠올린 자신의 과거와 그에 대한 그리움

 

2. 윗글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정 형! 그런 석유 등잔 밑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호까‘-연초 갑지- 붙이던 생각이 납니다.’를 통해 특정 인물을 지칭하며 과거의 일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회의 여차장이 차표 찍는 소리’, ‘군청 빛 모등을 통해 비유적인 표현을 활용하여 대상의 일부로써 전체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라마운트 회사 상표’ ‘세실, (B). 데밀의 영화등을 통해 이국적 느낌을 주는 이미지를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루라는 짐이 마당에 가득한 가운데를 통해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렌지 빛’, ‘세피아 빛등을 통해 외래어와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혼용을 만들어 냈음을 알 수 있다.

 

3. <보기>를 바탕으로 윗글을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산촌 여정은 이상이 폐결핵 치료를 위해 고향인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성천으로 요양을 갔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수필이다. 요양을 떠날 당시 이상은 질병, 경제적 궁핍 등으로 삶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현실 도피를 갈망하였다. 그런 그에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성천은 병마로 지친 육신의 휴식뿐만 아니라 정신적 치유도 가능하게 한 곳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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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봉산은 낯선 곳으로, 글쓴이에게 또 다른 불안을 야기하는 공간으로 해석할 수 있겠군.

별빛은 글쓴이가 성천에서 느낄 수 있는 평안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군.

흰 나비를 글쓴이로 볼 때, 때가 묻었다는 것은 성천의 자연과는 달리 순수하지 못한 자신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군.

서도(西道) 천 리는 글쓴이가 느끼는 도회와 성천 사이의 거리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군.

화려한 고향은 글쓴이가 살았던 도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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