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후와 질박함에 대하여 공선옥

 

 이따금씩, 아주 가끔 내가 살고 있는 공간이, 나의 삶이, 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내가 먹고 있는 음식, 내가 입고 있는 옷들이 싫어지고 거추장스럽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청소하는 것도 빨래하는 것도 설거지하는 것도 귀찮아지고 의미 없어지고 오직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게 된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라면 적어도 내가 이러고 살지는 않을 텐데, 하는 막연한 꿈. 그럴 때면 나는 하던 청소도 일시 중단하고, 설거지, 빨래도 미뤄둔 채 무작정 집을 나선다. 집을 나서면 어디로 가나. 막상 대문 밖을 나서면 갈 데가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하지만 이왕 나섰으니 가 볼 수밖에. 왜냐하면 갈 데는 없다 해도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집 밖으로 나서는 것보다 더 좋을 리는 없으므로. 갈 곳 없다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선다면 나는 필시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마음도 생활도.

 

 정녕 갈 곳이 없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갈 곳이 없다는 말을 역으로 해석하면 갈 곳이 너무 많다는 말과 같다.(부정적 상황을 역으로 생각하여 긍정적으로 인식함.) 갈 곳이 정해져 있다면 우리는 오직 그 한 곳만을 가야 하지만 그렇지 않으니 천지 사방이 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이제 세 살 난 아들 녀석을 고물차에 부착한 유아용 시트에 단단히 비끄러매(줄이나 끈 따위로 서로 떨어지지 못하게 붙잡아 매다) 놓고 나는 운전대를 잡는다. 시골길은 한가하다. 군데군데 참깨나 고추를 말리는 농부들이 보인다. 그 옆을 지날 때면 좀 천천히 달린다. 내가 집을 나서서 주로 달리는 길은 보성 강변길이다. 햇빛은 투명하고 길 가녘(가장자리)에 이제 피어나기 시작한 코스모스가 앙증맞다. 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강 마을이다. 나는 마을 입구 정자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차만 타면 잠이 드는 아들을 포대기에 업고 마을 안으로 들어선다. 뉘 집에 온 손님인가, 하고 말음 사람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스스럼없이 다가간다.

 “고추를 참 많이 따셨네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거개가(거의 대부분) 나이 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낯선 사람이 하나도 낯설어하지 않으며 말을 붙이면 그들은 하나도 낯설어하지 않으며 대답한다. 참으로 순박한 음성으로, 거기에 덤으로 미소까지 얹어서 예에, 한다. 그러고 나서 뉘 집에 오셨느냐, 묻는다. 나는 또 스스럼없이 대답한다.

 “마을 구경 왔어요.”

 그러면 그들은 또 어김없이 말한다.

 “이런 촌에 뭐 볼 게 있다고.”

 나는 그러면 또,

 “촌이니까 볼 게 많지요.”

 한다.

 고추를 말리는 할머니 옆에 아이를 돌려 안고 나는 가만히 앉는다.

 “할머니 집은 어디세요?”

 “저기여.”

 “할머니 집 구경해도 돼요?”

 “구경이야 해도 되지만, 심란해서 원.”

 나는 할머니를 자박자박(가볍게 발소리를 내면서 자꾸 가만가만 걷는 소리. 또는 그 모양.) 따라간다. 사립문 옆에 감나무가 있고 마당 한 귀퉁이에 샘이 있고 안 가꾼 듯 가꾸어진 화단에는 붉은 맨드라미와 분홍 족두리꽃과 노란 분꽃이 화사하다.

 “할머니는 누구랑 사세요?”

 마루에 걸터앉아 내가 누구랑 사느냐고 묻는 사이에 할머니는 어느 틈에 냉수 사발을 건네준다. 나는 맛난 물을 단숨에 들이켠다. 그러고 나서 빼놓지 않고 인사를 차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막걸리라도 받아 오는 건데.”

 “막걸리는 무슨, 집에 술 있는데 한잔 마실라요?”

 “아이고, 아닙니다.”

 나는 기쁘게 사양한다. 우린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들처럼, 어머니와 딸 사이인 것처럼 다정해진다.

이렇듯 낯선 사람을 보고도 하나도 낯설어하지 않는 시골 사람들이 나는 좋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하나도 낯설지 않은 시골 사람들, 정확히 말해 시골 할머니들에게서 나는 늘 위안을 얻는다. 돈이 많은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육체가 너무 건강한 사람, 아는 것이 너무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무형의 저항감을 느낀다. 가진 것 없고 그 생애 자체가 희생으로만 점철된 시골 할머니들의 순후(온순하고 인정이 두터운)한 인정이, 그것이 비록 냉수 한 사발의 인정이라 할지라도 나는 사람을 반기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사람을 섬기는 그 선한 눈빛이 좋아 어찌할 줄 모르겠다.(인본주의적 태도) 이제 이 한 시대가 또 정처 없이 흘러가 버리면 그들은 가고 그들의 인정도 끊기고 그 순후와 질박함(꾸민 데가 없이 순수함) 또한 영영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끊어져 버리는 것이 두렵고 사라져 버리는 것이 두렵다. 이제 세상은 온통 아는 것 많은 사람들만의 세상이 될 것이고 돈 많은 사람들만의 세상이 될 것이고 사람을 경계하는 사람들만의 세상이 될 것이고, 그럴 것이고……. 나는 절망한다.(순후와 질박함이 사라질까 두려움.) 그러면, 내 지친 영혼은 어디 가서 위안을 얻나, 잃어버린 고향을, 어머니를 어디가서 찾나.

 내가 왜 이렇게 지치나,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는가, 늘 모르고 지내 오다가 그 할머니들을 보고 나서 나는 내가 결국은 고향을 잃어버려서, 어떤 정신적 유토피아를 잃어버려서 그렇다는 걸 알게 된다. 아이를 업고 마을을 돌아 나오며 내 아이들에게 내가 바로 그런 어머니, 고향 같은 어머니가 되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정성 들여서 청소를 하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푸성귀를 가꾼다. 그러면서 나는 어떻게 늙어 갈 것인가를 생각한다.(시골 할머니처럼 순후와 질박함을 잃지 않는 노년을 생각함.) 늙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나는 오래된 마을을 생각할 때 그런 것처럼 아주 아주 포근해진다.

 

 

 

핵심 정리

 

1. 갈래 수필

2. 성격 체험적, 서정적, 감상적

3. 제제 시골 사람들의 순박한 생활 태도

4. 주제 순후하고 질박한 시골 사람들이 태도에서 받는 위로와 깨달음.

5. 특징

       - ‘글쓴이의 경험 경험을 통한 깨달음의 구조가 나타남.

       - 대화를 직접적으로 인용하여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함.

6. 해제

 이 작품은 글쓴이가 일상 생활의 무의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아간 시골 마을에서 한 할머니를 만나 소박한 인정을 체험하고 얻은 깨달음을 서술한 수필이다. 현대 사회는 물질 중심주의적이며 낯선 사람에게 따뜻한 인심을 베푸는 대신 경계심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렇나 가운데 글쓴이는 시골 마을에서 발견한 순후와 질박함을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 더불어 순후와 질박함의 가치가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출처 : 미래엔 문학 교과서 + 미래엔 문학 자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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