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현실의 추()와 문학적 미() - 태평천하의 세계

                                                                                                                                                                이주형

 

 

 채만식(채만식(蔡萬植, 1902~1950)은 일제 침략기인 1902년에 나서 일제 강점 시대와 해방기를 거쳐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611일까지 살았다. 한국인으로서는 아마도 가장 운 나쁜 사람의 하나일 것이다. 이 시기는 민족적 수난과 고통, 사회적 혼란이 이어지던 때이니, 일생을 이런 나쁜 세상만 보고 좋은 세상은 보지 못한 채 보낸 한국인이 역사를 통틀어 얼마나 될 것인가? 그가 맞은 개인적 운도 나쁜 편이었다. 농읍(農邑, 전북 옥구군) 소지주의 아들도 나서 자랐다는 점과 교육받기가 어려웠던 시절에 서울에서 고보(高普-고등 보통학교)를 다니고 동경 유학까지 했다는 점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20대 초반 이후부터는 행운과 거리가 멀었으니, 본인의 뜻과 다른 시골 처녀와의 조혼과 집안의 경제적 침몰이 있고, 그에 이어 레디메이드 인생에서의 표현처럼 갈 곳 없는 초상집의 개가 된 식민지 지식인의 일생이 시작된 것이다. 경영이 어려웠던 신문사들을 전전하며 고초를 겪은 데다가, 성질마저 스스로 말한 것처럼 신경질’)(작가 단편 자서전)에다 결벽증까지 있었다. 거기에다 그는 시대와 타협하며 적당히 살기는커녕 반대로 그를 거부하며 피곤하게 살았다. 그는 나쁘고도 절실한 체험을 많이 했기에 할 이야기도 많았고, 그 이야기 거의가 나쁜 데 관한 것이었다. 그는 중·장편소설 15, 단편소설 70여 편, 희곡·촌극·시나리오· ‘대화소설’ 30여 편, 문학평론 40여 편, 수필·잡문 140여 편을 썼으니, 남긴 양으로도 한국 근대 소설가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작가로서 채만식이 택한 것은 현실과의 불화가 작을 수 있는 예술주의의 길이 아니었다. 그는 예쁜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예술가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민족·사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길을 더 중시했다.

 

 채만식은 자작 안내(自作案內)에서, 임화(林和, 1908~1953)나 김남천(金南天, 1911~1953)이 자신의 장편소설 탁류에 박태원(朴泰遠, 1909~1986)천변풍경과 꼭같은 유형의 세태소설이라는 레테르(사업자가 자신의 상품을 다른 상품과 구별하거나 그 고유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드러내는 기호나 문자, 도형 따위의 표지.)를 붙이고 있다면서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세상이 용인하는 대로 천변풍경이 좋은 예술품인 데야 틀림없겠지만 탁류가 그보다 못한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양자를 같이 값 치는 데는 단연 불복이라고 했다. 이유는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곱다고 하는 그런 심사때문이 아니라, 탁류에는 적극적인 작가의 의욕이 깔려 있는 데다가, 근본적으로 양 작품은 다른 문학 정신의 산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학 정신의 차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채만식의 그것은 무엇인가?

 

 하필 박태원 씨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구든지 문학을 고려자기나 사군자(四君子)와 같이 치는 사람이면 몰라도(미상불(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게) 그러한 문학이 없는 게 아니요, 따라서 그네는 그걸로 자족할 것이지만) 문학이 적으나마 인류 역사를 밀고 나가는 한 개의 힘일진대 한인(閑人)의 소장(消長-쇠하여 줄어가거나 성하여 늘어가다)거리나 아녀자의 완롱물(玩弄物-아이들이 가지고 놀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물건)에 그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목이 부러져도 주장을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저작 안내)

 

 바로 예술주의와 현실주의(혹은 리얼리즘)라는 차이인 것이며, 채만식은 후자에 목숨을 걸 정도였던 것이다. 채만식의 문학은 실제로 철저하게 현실주의의 길을 걸었다. 그는 다른 글(사이비 농민소설)에서 생활을 통하여 인간의 세계하며 이데아를 표출시키는 리얼리즘의 도()”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가 쓴 거의 대부분의 작품의 제재는 당대의 민족·사회 현실 혹은 역사와 관련된 문제였다. ‘리얼리즘의 도를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그는 변변찮은 못난이 자식으로서, “만인이 그것을 추앙한댔자 추호도 기쁘지 않다고 했다. 이런 제재들을 다룰 때 채만식이 주로 취한 것은 부정적 현상의 전경화(前景化-언어라는 매개체를 비일상적으로 사용하여 두드러져 보이게 하는 일. 곧 상투적 표현을 깨뜨림으로써 새로운 지각을 일으키는 것으로, 프라하학파의 언어학과 시학에서 쓰인 개념이다.)였다. 부정적 현상들로 가득 찬 시대에만 산 그로서는 현실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작가로서도 부정적인 것을 그려내는 데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작품 전체로 볼 때 기본적인 구도는 부정면의 전경화에서 시작하여 긍정면의 모색으로 끝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개별 작품들 내에서 이런 구도가 보인다. 탁류, 태평천하, 패배자의 무덤, 도야지, 낙조, 소년은 자란다등 그의 대표작 반열에 드는 주요 작품들이 그런 구도를 갖는다. 시기적으로 볼 때에도, 첫 작품 과도기는 부정적 면으로 일관하는 작품이고, 1930년대 초기의 대부분 작품들 역시 그러하다. 30년대 말 작품인 패배자의 무덤이나 최후작인 소년은 자란다는 긍정적 전망을 보이는 것으로 끝난다. 30년대 후기 이후 더욱 암울한 시대에 와서 이런 구도가 분명해진다.

 

채만식이 체험한 시대는 탁류의 시대, 비극의 시대였으며, 그의 현실 인식 역시 탁류적 · 비극적이었으며, 자신이 말한 것처럼 니힐리즘의 독한 호흡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 탁류가 씻겨나가야 하고,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은 가지고 있었다. 미래의 청류에 대한 희망이다.

 

부정면의 전경화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 나는 그 길을 평생 두고 가려고는 않고, 그 길 부정면만 골라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또한 우리네 스승이 경계한 바이라 잊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런 부정면을 통하여 기실 긍정면을 주장하기 위해서의 부정면은 결단코 유독하지는 않은 것이다.(자작 안내)

 

 그가 그린 많은 부정면의 반대적 양상이 곧 긍정면이 되는 것이다. 부정면의 소멸을 통해 긍정면들이 생성되고 마침내 청류의 사회, 청류의 역사가 도래하리라는 것이 그의 작품 구조가 가지는 논리다.

 

 그의 작품들에서 부정의 대상이 된 것은 당대의 여러 현상이나 인물 등 다양하며, 대부분 사회적·민족적 의미를 지니는 것들이다. 부정의 소설적 기법도 다양했다. 1930년대 전기까지는 주로 장면적 묘사에 의존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기에 오면 우회적 기법, 즉 풍자·역설·반어·희화·과장 등 다양한 기법이 활용되었다. 한편 대화소설’·촌극·희곡 같은 장르의 활용 역시 많은 작품을 통해 시도되었다. 이런 기법들을 통해 예술적 효과, 흥미 유발, 검열 통과 등 여러 가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채만식은 잘못된 역사, 잘못된 사회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졌으며, 그것의 변혁을 갈망하고 있었던 작가였다. 그러나 변혁의 방법에 대한 그의 구상이 구체화되어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데올로기로 보면 사회주의가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되지만 그 자신 사회주의 신봉자는 아닌 것으로 작품이나 실제 행동에서 나타난다. 작품에서 그는 카프의 작가들처럼 사회주의자 혹은 무산 계급의 힘과 투쟁의 현장이나, 그에 의한 변혁의 전망(믿음)을 분명하게 형상화하지 않았다. 또한 카프에도 가입하지 않고 동반자 작가로 남아 있었으며, 그 때문에 방랑적 작가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염상섭이 그의 작품들을 통해 보여준 것과 같은 심퍼사이저(동조자, 지지가)와는 달랐다. 또한 해방 후에도 채만식은 어떤 정치· 문화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는 진보적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념적 경사도, 어떠한 속박도 싫어하고 독자적으로 신경질적인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간 자유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채만식 소설의 전개 과정은 기준에 따라 여러 단계로 구분해볼 수 있지만, 작품 내의 골간적 요소인 부정의 양상이 변화하는 것을 기준으로 다섯 단계로 나누어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작품 내적 변화는 시대 상황 및 문단 상황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채만식이 등단을 한 것은 1924세 길로를 통해서이지만 처음 쓴 작품은 1923년의 중편 과도기이다. 이때부터 1927년까지의 작품은 발표작 2, 유작 2편이지만 기법이나 작가의식이 정제되지 못한, 습작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도기에서 이미 현실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부정의식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채만식이 본격적으로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8년부터인데 이때부터 1933년까지를 한 시기로 본다. 카프의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였는데, 채만식은 동반자 작가로서 주로 노동자· 농민, 실직 인텔리 등 빈자들의 궁핍한 현실의 모습을 짧은 형식의 단편이나 대화소설이나 촌극을 통해 묘사했다. 앞 시기가 부정 의식의 출발기라면 이 시기는 부정적 현실의 사생(寫生)기 정도로 말할 수 있다.

 

 1934년에서 1938년 사이는 일제 강점 시대 채만식 문학의 성취도가 최고에 달한 시기였다. 현실 인식, 부정의 논리도 심화되고 기법도 다양하고 세련되었다. 짧은 길이의 작품은 사라졌다. 카프가 해체된 시기이기도 한데, 카프 해체에 뒤따른 문학, 특히 소설의 위기의식과 함께 소설의 다양한 모색이 이루어지던 때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이 전환적 작품이거니와 채만식의 대표작들인 탁류, 태평천하, 치숙등이 나왔다. 부정 논리의 확대· 심화기쯤으로 말할 수 있다.

 

 1939년 초 채만식은 관재(官災, 투옥)’을 당하게 되는데, 이 해의 작품 패배자의 무덤에서부터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부정의식을 작품 외면에서 내보이지 않다가 마침내는 대일 굴종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도 억압이 극대화된 암흑기의 현실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죽거나 의식이 식물화된 인물, 신변잡사 등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해방 직전에는 계속되는 구복(口腹)의 전령의 급함”(자작 안내)과 억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여인전기같은 임전보국(臨戰保國)’의 소설도 썼다. 그러나 그를 지배해왔던 부정의식은 결코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고 작품의 밑에서 잠행하는 상태였다가 해방 후 다시 전면으로 나오게 된다.

 

 해방 후 그는 부정의식을 다시 전면화하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부정의식이 그에게서 사라졌다면 그는 더 이상 작가일 수 없었다. 해방기에 그는 해방 직전의 굴종을 자기비판함으로써 작품 활동 재개의 논리적 입지를 찾는 한편, 완숙한 의식과 기법으로 해방 공간의 부정적 양상들을 날카롭게 적출, 묘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민족의 죄인은 해방 후 문인들의 대표적 자기비판 소설로서, 여기서 채만식은 과거의 과오를 절대적· 상대적 맥락으로 해명 · 비판하면서 앞으로의 방향을 간접적으로 표출했다. 이 시기에 그는 진보적 중간파로 남아 과거의 부정의식을 복원, 심화하여 주로 풍자적 기법에 기대면서 당대의 낮도깨비출몰 모습(단편 맹순사, 미스터 방에 각각 畵出魍魎之圖其一(화출망량지도기일)’ 其二라는 부제를 붙였다)을 그려냈다. 그는 이때 당대 현상만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늙은 극동선수등을 써서 우리 근·현대사의 맥락을 짚어보려는 데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낙조에서는 동족상잔의 가능성을 경계하기도 했다. 소년은 자란다는 그의 마지막 작품(미발표 유작)으로 해방 전후의 민중 수난사와 함께 새로운 세대와 시대에 대한 기대를 표출했다.

 

 『태평천하1938조광(朝光)1월호에서 9월호까지 천하태평춘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고, 1940년과 1948년에 각각 초판(명성사[明星社] 발행)과 재판(동지사[同志社] 발행) 단행본이 나왔는데, 재판에서는 주인공의 직함을 장의(掌儀-조선 시대, 세자궁에 속해 있던 종구품 궁인직의 하나)’에서 직원(直員-일제 강점기, 형식적으로만 남아 있던 향교나 경학원에서 하던 직임의 하나)’으로, 제목도 천하태평춘에서 태평천하로 바꾸고 약간의 교정을 보았다. 초판을 그대로 찍어서 제목만 황금광시대(黃金狂時代), 애정의 봄이라 붙인 해적판이 각각 1949년과 1958년에 나왔다. 작품 내의 현재 시간은 19379월 어느 날의 석양 무렵부터 다음 날 점심때까지이다. 중일전쟁(1937727)이 내려진 직후인, 살벌한 시기이다. 작중에서, 일본군의 진격과 승리를 기원하는 윤직원과 올챙이(석서방)의 대화 속에 중일전쟁의 상황이 나온다.

 

 전체 15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마다 내용을 요약 혹은 상징(비유)하여 재미있게 표현한 제목들이 붙어 있다. 이 작품은 이제 한국 근대 소설사를 대표하는 몇 개의 장편소설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되고 있는데, 그럴 이유가 충분히 있다. 일제 강점 시대에는 장편소설 자체가 적었거니와 그중 다수가 대중 오락물로서의 통속소설이었다. 이때 태평천하는 풍자로 일관한 유일한 장편소설로서, 다른 어느 작품과도 유사하지 않은 독특한 문체를 가진 개성 있는 작품으로, 식민지 사회의 어두운 한 모습을 잘 그려내었던 것이다.

 

 1935년 카프가 정식 해산한 후 문단에는 문학 위기론이 팽배했는데 그 타개책의 하나로 풍자문학이 제시되었다. 최재서(崔載瑞, 1908~1964, 문학평론가)가 처음으로 풍자문학론을 통해 풍자문학을 부각시켰는데, 그는 자기 풍자를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서 안함광(安含光, 1910~?, 문학평론가)풍자문학론비판에서 사회 풍자가 문단 위기의 진정한 타개책이라 주장했다. 이어 19362월 한식(韓植)풍자문학에 대하여에서 풍자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을 폈는데, 그는 풍자문학이 현실이 가지고 있는 모순과 불합리를 정면으로 공격할 수 없는 때에 간접적으로 배후 혹은 측면으로부터 그를 적발하여 그에 저항하며 그와 격투하는 문학상의 한 방법인데, 이는 진정한 리얼리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또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직설적인 말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표면상 웃으면서 대상에게 달려드는 것이며, 비유· 암시 ·기지· 캐리커처 · 조소 등의 표현 수법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풍자의 의도와 방법을 한마디로 소살(笑殺)’이라고 표현했다. 다음 해에는 이운곡(李雲谷)이 또한 풍자문학의 길을 써서 풍자문학이야말로 확고한 이데올로기와 비판 정신을 가진 프로 작가나 진보적 자유주의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가장 총명하고 영리한문학적 방법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작품 전체가 풍자로 침투되고 풍자로써 통일되어야올바른 풍자소설이라는 점을 덧붙여 말했다.

 

 채만식을 한마디로 말할 때 흔히 풍자작가라고 하지만 정작 풍자소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주 많은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 전체를 두고 볼 때 정면에서 웃음없이 그린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성취도가 높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힐 만한 작품들 가운데는 풍자 수법을 기초한 것이 많다. 태평천하도 그중 하나다. 위에서 말한 풍자문학론은 이 작품이 연재되기 1,2년 전에 나온 것으로, 이 작품 구상의 큰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이미 레디메이드 인생으로 풍자와 요설(전하려는 내용보다 많은 어휘를 사용하여 내용 전체를 남김없이 표현하는 문체. 대개 접속어, 동의어, 유사어를 많이 쓰며 문장이 길어진다.)의 수법을 써서 평판작을 내본 채만식으로서는 좋은 자극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태평천하는 안함광 이후 논자들의 풍자문학론과 맞아떨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태평천하에서 채만식은 명백히 부정면을 그리고자 했고, 그것을 욕하고자 했다. 그는 김남천이 이 작품에 대해 신문학 30년에 전례가 없을 정도로 부정적 인물만이 등장했으며, 부정적 인물만의 등장은 아무래도 문학의 본도가 아니라는 입장을 보인 것을 두고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그렇게밖에는 붓을 댈 수 없는 사정이나 부정면을 통해서야만 그 긍정면이 도리어 박력 있어 보여질 수법상의 경우가 또한 없는 게 아니다.

아무튼지 나는 눈치는 먹더라도 한동안 천하태평춘의 방향도 버릴 수는 없다. 그러한 부정면의 대() 긍정면의 관계를 알아볼 줄 모르고 문학적으로 표현된 현실의 ()’를 문학적 ()’로 보지를 못하고서 문학적 추로 여기는 성자(聖子)’들이 있으나, 그런 분들이 독자의 한 사람인 것을 나는 대단히 폐로워하는(성가시고 귀찮다) 동시에, 그들에게는 손쉽게 기꾸찌깡이나 한평생 읽고 있으리라 권면을 해둔다.(자작 안내)

 

 이 구절은 채만식 문학의 본질을 가장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다. 자기 작품에 그려진 현실의 추는 다름 아닌 문학적  미라는 것이다. 부정적인 현실을 문학적 기법을 통해 훌륭하게 그려냄으로써 긍정적 현실을 알려준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긍정적 현실의 지향도 문학적 기법과 함께 문학적 미에 포함된다는 뜻이 내포된다. 평생 기쿠치 간(1888~1948, 일본의 소설가· 극작가)이나 읽으라는 것은 통속소설이나 읽으라는 욕이다.

 

 이 작품에서 채만식이 부정하려 한 것은 우선 잘못된 역사의 현장인 한말과 일제강점시대 그 자체이다. 한말에 대한 혐오는 윤직원 부자가 탐관오리와 화적패에 의해 수탈당하고 살해당하는 장면의 묘사에서 잘 나타난다. 이런 부패와 무법천지의 사회가 바로 민중으로 하여금 나만 빼고 다 망해버리라는 저주(염원)를 낳게 했으며, 또한 일제 식민지 시대는 그들로 하여금 윤직원처럼 반역사적 · 반사회적 · 반민중적 인물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아전을 지켜주는 것이 최선의 권력이요 국가인 것이며, 그것이 곧 일제라는 믿음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이 장면에 깔린 채만식의 생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감정시대는 무엇보다 이러한 인물들을 끌어들여 조선인 사회를 썩어가게 한다는 점에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윤직원 같은 부정적 인물이 좋아하는, ‘태평천하라고 하는 식민지 현실이 바로 부정의 대상이다.

 

 작중에서 가장 초점적으로 부정되는 것, 즉 중심적 현실의 추는 바로 윤직원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시대가 되면서 일제 권력에서 보호처를 찾고, 철저히 일제에 굴종하면서 자산가로 성장한다. 서울에 거주하는 부재 지주로서 호남에 있는 내 땅가지고 내 맘대로하면서 소작인들을 착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체계(일수) 돈놀이, 수형(手形, 어음) 할인 등의 고리 사금융업으로 도시민들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한다. 그가 가장 증오한 것은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저항적 · 진보적 이념이나 인물 즉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등이다. 철저히 반사회적 · 반민족적 · 반민중적· 반역사적 인물이다.

 

 돈만으로는 식민지 사회에서의 안녕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본 윤직원은 족보에 도금칠하기, 스스로 직함 갖기, 양반 혼인, 권력자 배출 등 ‘4대 사업을 실천해 나간다. 이러한 인물을 부정하기 위해 작자가 활용한 것이 풍자 수법이다. 윤직원으로 하여금 무임승차 기술(奇術), 인력거 삯 깎기, 오래 살기 위해 오줌 먹기, 춘심이와의 유희 등등 우습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스스로를 큰 체격 및 많은 재산에 역비례하여 왜소하게 비하함으로써 독자에게 소살당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족들에게도 배척· 배신당하는, 고립무원의 인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더욱더 초라한 인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작품의 대부분의 분량은 윤직원의 부정적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또 많은 부분에서는 천민 자산가 윤직원가()를 구성하는 인물들, 즉 윤직원 직계 가족과 주변 인물 전체를 부정의 대상, ‘현실의 추로 그린다. 이 작품에는 한 가족 5대가 등장한다. 1세대 윤용규는 한말의 요호부민(살림이 부유하고 넉넉한 백성)으로, 화적패와 부패 관리에 맞서다 죽는다. 2세대가 윤직원이고 제3세대가 윤창식, 4세대는 윤종수·종학, 5세대는 윤경손이다. 염상섭의 삼대와 비할 때 윤직원은 조의관, 윤창식은 조상훈, 윤종학은 조덕기에 대응되는 세대라고 할 수 있는데, 앞의 두 세대 인물들은 상호 유사성이 많다. 윤창식은 개화기에 성장한 세대로서, 일정한 가치관과 삶의 지표 없이 노름, 계집질 등으로 세월을 보내는 타락한 유산층 자제다. 윤직원만큼 악을 행하지는 않지만 사회 · 민족 현실은 철저히 외면하고 향락만을 찾는 쓰잘 데 없는 인물이다. 윤종수 역시 식민지 시대의 쓰레기 같은 인물로서, 조부의 4대 사업 중 군수 배출 계획의 대상 인물이지만 무능하고 향락에 빠져 있을 뿐이다. 종수의 15살짜리 아들 경손이는 학생이지만 공부와는 거리가 멀고, 증조부의 애인15살짜리 동기(童妓) 춘심이와 연애를 한다. 이 집안 여인들은 윤직원의 딸, 며느리, 손부(孫婦)들은 모두 생과부들로서, 못난이들이다.

 

 가족 구성원들 대부분이 사이가 나빠 집안은 싸움을 근저당(根抵當) 해놓고쓰고 있다. 가족 외 인물들(대복이, 삼남이, 올챙이)은 모두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옥화는 창식의 첩이면서도 종수에게 (모르고) 매음을 하러 가기까지 하는 인물이다. 이들 모두 인간이 혐오스럽고 경멸스러운 존재들이다. 한마디로, 작중인물 모두가, 한 명만 빼고, 윤직원의 욕설을 빌려 표현하면 짝 찢을 년잡아 뽑을 놈이거나 그에 준한다. 여기서는 식민지 시대 사회에 대한 탁류의식에서 인간 혐오 의식에까지 나아간 작자의 모습이 느껴질 수 있다.

 

 이 시대는 이렇게 부정적 인물만이 있는 구제 불능의 시대인가? 작자는 그렇게만 보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 인물로 한 사람, 종학이 있다. 그는 공부도 잘하고 동경 유학까지 하고 있는 지식인이며, 조부 윤직원이 경찰서장 배출 대상으로 계획한 인물이다. 작중의 부정적 인물, 부정적 상황들을 쏟아 내버리고 뒤집어 버려야 한다는 작자의 생각이 살아 있고, 그런 생각을 소설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돌파구 혹은 도구로서 종학이 설정된 것이다. 종학은 윤직원의 기대와는 반대로 윤직원이 가장 싫어하는 사회주의자가 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이로써 윤직원은 죽음을 만난 못난 패군지장(敗軍之將)의 꼴이 된다.

 

 결국 이 집안은, 아니 식민지 일제 강점 사회는 작품의 제14장 제목처럼 해 저무는 만리장성을 지나 무너지는 만리장성과 함께 파멸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 암시된다. 실제로 작품의 연재가 끝나고 정확히 7년 뒤에 그것은 현실화되었다. 만리장성을 무너뜨리는 주체는 누구인가? 작가는 호야(胡也, 胡亥)라고 했다. 구체적 인물은 종학인데, 그는 바로 이 집안 중심부에 있는 인물로서,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황의 아들 호해인 셈이다.

 

 채만식 소설 세계에서 문학적 미를 완결시켜줄 수 있는 주체적 인물로 설정된 것은 바로 작중 부정의 대상이 된 집단 속에서 자생하는 새로운 세대이다. 종학뿐 아니라 탁류에서는 계봉, 패배자의 무덤에서는 종택의 어린 아들, 도야지에서는 문태석, 낙조에서는 박영춘, 소년은 자란다에서는 영호 등이 있다. 채만식은 기성세대에의 불신과 신세대에의 신뢰를 분명히 드러내지만, 그러나 부정면의 극복에 관한 논리는 아무래도 허약하다. 신세대가 어떤 논리적 바탕 위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그의 작품들은 보여주지 못했다. 종학의 경우에는 사회주의자로만 되어 있으며, 전보상의 체포 소식만 있을 뿐, 그의 말이나 행동이 직접적으로 그려진 것은 없다. 계봉 이하 다른 인물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닐뿐더러 다른 어떤 이념이나 방법도 구체화되어 있지 않다.

 

 김남천은 긍정적 인물이란 역사를 추진시키는 적극적인 성격적 전형인데 태평천하에 이르기까지 채만식 소설에서는 그런 인물이 설정되지 않았다는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현대 조선 소설의 이념) 그리고 종학은 이 집안이 망조가 들어가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잠시 빌려온 것이며, “그림자만 비친인물로, “엄연한 의미에서 작중인물이 아니었다고 단정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육체나 두뇌를 구비하고 행동을 하면서 작품 속에 들어오는인물이야말로 올바른 작중인물이요, ‘성격적 전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일정한 정당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유례가 없는 독특한 형식, 문체를 지닌다. 기본적으로 풍자의 수법으로 일관했지만, 세부적으로 극적 장면 구성, 판소리적 표현 방식, 경어체 등을 쓰고 있다. “무대는 이 집의 ……”, “다시, 오늘 밤으로 돌아와서 실골목의 장면인데……”, “이 장면은 그대로 커트가 됩니다.”, “관중이 없어서 웃어주질 않으니 좀 섭섭한 장면입니다.” 식의 지문도 직접 나타나지만, 극적 장면들의 집적(集積) 형태를 취한다. 각 장은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한 사건의 현장, 즉 하나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면, 1장은 윤직원이 외출했다 귀가하는 장면, 12장은 이날 밤 아홉 시가 한 오 분가량 지나서부터 몇 시간 동안 시내 유곽에서 종수가 오입질하는 장면, 마지막 장은 전보 내용이 윤직원에게 통보되는 장면 등이다. 4장만 과거사를 파노라마장면을 섞어 묘사해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작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논평을 가한다. 장면 구성 형태 때문에 독자는 영화나 연극을 볼 때처럼 강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화자는 입니다식의 경어체를 써서 독자를 높여줌으로써 호감을 얻는 한편 직접 대화를 하는 듯한 느낌을 주어 자신과 그들의 거리를 가깝게 하면서 작중의 부정적 현상들에 대한 비판 의식을 공유하고자 한다. 그런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 작자는 또한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당자 역시 전라도 태생이기는 하지만, 그 전라도 말이라는 게 좀 경망스럽습니다로 자신을 낮추기도 한다.

 

 적극적 논평과 대상 묘사 방식은 조선 시대 판소리 사설의 수법을 계승했다. 판소리 사설에서 쓰였던 반어 · 자기 폭로 · 비유 · 과장 · 희화화 등의 표현법에다가 전라()도의 사투리의 어감까지 엮인 요설이 계속되어, 이 작품의 독자는 판소리 창자들의 아니라와 창을 들을 때와 유사한 느낌과 재미를 맛볼 수 있게 된다. 경어체로 된 화자의 해설(지문)은 또한 일제강점시대 독자들에게는 무성영화(활동사진) 변사의 설명을 듣는 느낌도 준다.

 

 자 부아라, 거리거리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으응? …… 제 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허게 살 태평세상, 이걸 태평천하라구 허는 것이여, 태평천하! ……

 

 이것은 부정적 인물인 윤직원을 통해 부정적 현실을 예찬하는 부분이다. 치숙에서 일관되게 이용된 이중 반어의 수법이다. 이를 통해 작자는 일제 현실을 비꼬면서, 윤직원과 일제 강점 하의 세상을 동시에 부정하는 것이다.

 

 초리가 길게 째져 올라간 봉의 눈, 준수하니 복이 들어 보이는 코, 뿌리가 추욱 처진 귀와 큼직한 입모, 다아 수부귀다남자의 상입니다.

나이? …… 올해 일흔두 살입니다. 그러나 시삐 여기진 마시오. 심장비대증으로 천식기가 좀 있어 망정이지, 정정한 품이 서른 살 먹은 장정 여대친답니다. 무얼 가지고 겨루든지 말이지요.

그 차림새가 또한 혼란스럽습니다. 옷은 안팎으로 윤이 지르르 흐르는 진솔 것이요, 머리에는 탕건에 받쳐 죽영(竹纓-매우 가는 댓가지를 마디마디 잘라서 실에 꿰고 그 사이에 구슬로 격자를 쳐서 만든 갓끈) 달린 통영갓(統營笠-경상남도 통영에서 생산되는 갓)이 날아갈 듯 올라앉았습니다.

[……]

이 풍신이야말로 아까울사, 옛날 세상이었더면 일도의 방백(一道方伯, 관찰사)일시 분명합니다. 그런 것을 간혹 입이 비뚤어진 친구는 광대로 인식 착오를 일으키고, 동경 · 대판의 사탕장수들은 캐러멜 대장감으로 침을 삼키니 통탄(몹시 안타깝고 한스러운 마음으로 탄식하다)할 일입니다.

 

 이것은 윤직원을 묘사하는 지문의 한 부분이다. 이 작품 속의 모든 지문들이 이와 유사하다. 이 인용문에는 앞에서 열거한 여러 판소리 사설적 표현 방식들이 섞여 있다. 우선, 예를 들면 봉의 눈”, “시삐 여기진 마시오”, “입이 비뚤어진 친구는”, “인식 착오”, “통탄할 일등등 언어적 반어로 가득 차 있다. 이 부분 전체가 겉으로는 추어올리지만 실제로는 크게 비하하는 반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광대”, “일도의 방백”, “캐러멜 대장등으로 과거와 현재의 사물을 동원해가며 비유법을 쓴다. 여기에 그려진 윤직원의 모습은 재미있는 하나의 희화(戲畫)이다. 또한 여대치다같은 사투리나 수부귀다남자같은 문자 쓰기도 한다. 다른 지문에서 작중인물인 삼남이를 묘사하면서 눈은 사팔이어서 얼굴을 모로 돌려야 똑바로 보이고, 코는 비가 오면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고 하거나 고씨를 묘사하면서 이통이 세어 한 번 코를 휘어붙이면 지렛대로 떠곤질러도 꿈쩍을 않고라고 하는 것 등은 재미있는 과장의 한 예다.

 

 이처럼 태평천하는 정면적 · 객관적 묘사를 기본으로 하는 근대 리얼리즘 소설과는 매우 다르다. 투철한 역사 · 사회의식을 소설 창작의 기본 조건으로 생각했던 채만식이 이런 기법을 창안한 것은, 작중의 지문(윤직원과 고씨의 싸움 장면)에서 쓴 말을 빌리면, ‘총퇴각아니면 게릴라 전술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후자를 택한 결과이다. 총퇴각이란 역사 · 사회의식을 버린 예술주의 문학, 통속 문학 등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는 판소리 사설에서 이용되었던 문학적 표현법들을 계승 · 발전시켜 잘못된 역사, 악한 현실, 추한 인물들 등 부정적 대상들을 겉으로 웃으면서 추어올리면서 바로 그 마각이 드러나게 해나가다가,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는 이러한 것들이 몰락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암시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만식은 부정적 현상들이 난무하는 시대 현실을 독자적인 문학적 기법과 비판의식으로 그려냄으로써 문학적 미를 추구하려 했는데, 태평천하는 그 대표적 성과물이다. 그가 추구한 문학적 미현실의 추를 그리는 것 자체가 아니라 긍정적 진실의 미를 찾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다.

 

작가 연보

 

1902(1)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서 부친 채규섭, 모친 조우섭 사이에서 9남매 중 5남으로 태어남.

1910(9) 임피보통학교 입학.

1914(13) 임피보통학교 졸업. 이후 향리에서 서당을 다니며 한문 수학

1918(17) 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

1920(19) 은선홍과 혼인.

1922(21) 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 4,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제일 와세다 고등학원 문 과 입학.

1923(22) 여름 방학에 귀향한 뒤 복교하지 않아 이후 학업 중단. 최초 중편 과도기탈 고.

1924(23) 강화의 사립학교 교원으로 취직. 조선문단세 길로발표.

1925(24) 동아일보사에서 기자로 근무.

1926(25) 동아일보사 사직. 실업 상태로 향리에서 암중모색. 크로포트킨 등의 무정부주의 와 사회주의 이론에 심취하며, 문학에의 길을 닦음.

1929(28) 이해 말부터 개벽사에 입사. 별건곤, 1, 혜성등의 편집에 종사함.

1932(31) 1년여에 걸쳐 현인 이갑기와 동반자 작가 논쟁을 벌임.

1933(32) 조선일보에 장편 인형의 집을 나와서발표. 이후 단편 레디메이드 인생(신 동아, 1934)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문예 활동을 펼침. 이후 카프 2차 사건의 발생과 함께 일시적으로 작품 활동 중지.

1936(35) 개성으로 옮겨가 새로운 생활 환경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생활에 돌 입. 명일(1936)을 필두로 탁류(1937), 태평천하(1937) 등을 써내면서 당 대 문단의 중진 작가의 자리를 굳힘.

1940(39) 개성에서 안양으로 이거.

1941(40) 서울 근교 광장리로 이거.

1945(44) 일제 말기에 서울 근교를 떠나 고향으로 낙향하였다가 해방이 된 후 서울로 다 시 거처를 옮김.

1946(45) 다시 재낙향(옥구 익산)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집필활동에 전념하여 주 옥같은 해방기의 명편들을 남김. 논 이야기, 미스터 방등을 발표.

1948(47) 낙조, 민족의 죄인등을 발표.

1950(49) 예견하였던 민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지병 악화로 타 계. 전북 옥구의 선영에 안장됨.

 

 

 

 

 

 

출처 : 채만식 장편소설 태평천하, 이주형 책임 편집, 문학과 지성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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