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1917~1945)

 

 윤동주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 만주 북간도의 용정시 명동촌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북간도는 항일 운동의 거점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해 살던 지역이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도 1900년에 명동촌으로 이주했다. 항일의 근거지라는 간도의 특성은 어린 윤동주의 마음에 조국에 대한 애정이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게 했고, 집안의 독실한 기독교 문화 또한 유년기 내내 그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시에 굴욕적인 시대의 아픔과 기독교적 주제가 많이 다뤄지는 것은 이런 성장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명동소학교 시절부터 윤동주는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친구들과 등사판으로 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기도 하고, 멀리 서울에서 발행되는 소년 소녀 잡지를 구독해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열여섯 살이 되던 1932년 용정 시내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절 윤동주는 축구 선수로 뛰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는데,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그는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 자신이 시를 쓴 날짜를 일일이 적어 두었는데,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 이때 탄생했다. ‘19341224로 기록된 세 편의 작품, 초한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가 윤동주 문학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 후 윤동주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려고 시험을 보았으나, 낙제 통보를 받는 좌절을 겪기도 했다. 학교 측에서는 친구들보다 한 학년 아래인 3학년으로의 편입 자격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옛학교를 다니는 것도, 한 학년 아래로 편입하는 것도 모두 그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당시 윤동주의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증언과 가족들의 기억에 따르면, 이 일로 그는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가까스로 편입한 숭실중학교에서의 생활은 윤동주의 문학 활동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실패를 겪은 십 대 후반의 예민한 감수성과 객지 생활의 외로움이 창작열을 자극했는지, 그는 여러 편의 시를 쓴다. 숭실중학교 학우회지 숭실활천에 실린 시 공상은 그의 최초 발표작이다. 그는 독서량도 상당했는데, 중학생 윤동주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은 정지용 시집, 님의 침묵, 국경의 밤, 윤석중 동요집, 영랑 시집, 사슴등의 시집이었다. 그중 100부 한정판으로 나온 백석의 사슴은 구할 수가 없어서 도서관에서 빌린 뒤 노트에 모조리 베껴서 필사본을 만들어 가졌다.

 

 하지만 윤동주는 숭실중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못한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바람에 학교는 무기 휴교되었고, 윤동주는 7개월여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에 편입했다. 이 무렵 그는 신문 스크랩을 하거나 습작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36년 한 해에 40편에 이를 정도의 작품을 쓰며 카톨릭소년지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습니다. 병아리, 오줌싸개 지도, 빗자루, 비행기, 거짓부리등의 동시는 그가 바라본 순수한 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처럼 윤동주는 문학에 대한 열망이 컸고 확실했지만, 부모님의 기대는 조금 달랐다. 의과대학을 원했던 아버지와 진로 문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윤동주가 단식투쟁까지 벌였다고 한다. 결국 할아버지가 윤동주 편에 서서 중재하면서, 그의 뜻대로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침내 윤동주는 간도의 고향을 떠나, 1938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연희전문학교의 입학은 그에게 자유와 희망을 꿈꾸게 했던 것 같다. 입학하고 처음 쓴 시에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새로운 길)이라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를 들뜬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둡고 비참해져 갔다. 당시 총독부가 추진한 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학교에서는 조선어 수업이 폐지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시절을 지나면서 윤동주는 거의 일 년 넘게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한 채 보내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1941년에 자신이 쓴 작품 가운데 19편의 시를 골라서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고 했다. 그때 제목으로 생각해 두었던 것이 우리가 잘 아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윤동주는 서시를 비롯한 19편의 작품을 준비해 놓고 77부 한정판으로 시집을 출간하고자 했다. 그러고는 원고를 직접 베껴서 3부의 똑같은 필사본을 만들었는데, 완성된 시 묶음 가운데 1부는 자신이 갖고 스승과 후배에게 각각 1부씩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이 시를 받아 본 스승은 윤동주에게 시집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했다.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과 같은 작품들이 일본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일본 유학을 계획하는 윤동주의 신변에 위험이 따를까 봐 걱정해서였다. 때를 더 기다리라는 스승의 말에 윤동주는 뜻을 접고 또 다른 시를 쓰며 마음을 달래야 했다. 그래도 정말 다행스러운 일은 그중 후배에게 전한 1부가 남아서 오늘날 우리가 그의 아름다운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엔 출간의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윤동주가 죽은 지 3년 뒤인 1948년에 비로소 원고가 묶여 유고 시집으로나마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윤동주는 19424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표의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식민지의 굴욕을 안고 지배국인 일본에 건너가 학문을 해야 하는 일은 그에게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뼛속까지 안겨주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3년간을 일본에서 지냈지만 겨우 5편의 시만 남겼다. 3년 중 절반은 감옥에 있기도 했지만, 그의 유학 생활이 그만큼 고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5편의 시도 자책하는 심정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복잡한 마음을 아프게 표현하고 있다.

 

 향수와 고독 속에서 릿쿄대학의 한 학기를 마친 윤동주는 다시 정지용이 다녔던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로 옮겼다. 그곳에서의 생활도 도쿄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독서에 너무 열중해서 얼굴이 파리해질 지경이었고, 추운 다다미방에서 새벽까지 시를 읽고 쓰고 구상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안타까운 것은 이 시기에 쓴 그의 작품이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1943년 여름 일본 경찰에게 사상범으로 체포되면서 사라진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윤동주는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이라는 죄목으로 붙잡혔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중심인물은 윤동주의 고종 사촌 송몽규이고, 윤동주는 동조한 것으로 일본 경찰의 취조 문서에 남아 있다고 한다. 윤동주는 그렇게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윤동주가 마지막을 보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는 가족들 간에 소식을 주고받는 것도 한 달에 겨우 한 번, 그것도 일본어로 쓴 엽서만 허락되었다고 한다. 편지 쓸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어느 날, 그의 동생이 귀뚜라미 소리에 가을을 느낀다는 글을 써 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윤동주는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 준다. 고마운 일이다.”라는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그는 동생이 마음을 담아 보낸 귀뚜라미 소리를 귀담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것을 사랑하겠다던 그의 정신은 고통도 이렇게 맑은 모습으로 견디게 했구나 싶다. 마지막까지 시에서나 삶에서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순수한 청년. 그러나 윤동주는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눈앞에 두고 1945216일 새벽 일제의 형무소 안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 아홉에.

 

 윤동주가 사망하고 난 뒤, 그의 3주기에 맞춰 유고 시집이 윤동주의 첫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시집은 윤동주의 친구들이 보관하고있던 유작 31편에 정지용이 쓴 서문을 같이 싣고 있다. 정지용은 서문에서 ()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이라고 말하며 윤동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시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긴 시인이라고.

 

 그의 시는 이제 우리나라뿐 아니라 그를 죽음으로 이끈 일본에서도 읽히고 있다.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이 있다. 1995년에 시작된 이 모임은 매월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참혹한 시대 속에서도 깨끗함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마음은 이제 국경을 넘어 사랑받고 있다.

 

 

출처

시인을 만나다, 이운진, 북트리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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