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1879~1944)

 

 만해(萬海) 한용운 (1879~1944)은 충남 홍성군 결성에서 태어났으며, 소년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896년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에 은거하여 수년간 머무르며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인 교양 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이 무렵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과 세계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연해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를 거쳐 돌아왔다. 190114세 때 결혼했던 고향의 처가에 돌아와 약 2년간 은신, 그 후 다시 집을 나와 방황하다 1905년 강원도 백담사에서 수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1908년경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조동종대학림에서 6개월간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1911년 교포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만주를 여행하다가 교포로부터 밀정으로 의심을 받아 총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 무렵 친일 승려 이회광 일파가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동종과 연합 맹약을 체결하자, 이에 분개하여 1911년 박한영 등과 승려 대회를 개최, 친일 불교의 획책을 폭로하여 그 흉계를 분쇄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그는 당시 조선 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비판한 저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1913)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는 학구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해설한 이론서가 아니라 조선 불교의 현상을 타개하여 불교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실천적 의도에서 집필한 것이다. 여기 제시된 그의 사상은 자아의 발견, 평등주의, 불교의 구세주의, 진보주의 등으로서 이후 그의 모든 행동적·사상적 발전은 이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졌다. 1917년경부터 항일 투사로서의 행동을 시작했고,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惟心)》』을 창간·주재했다.

 

 19193·1운동 때는 독립선언 준비 과정에서 최린과 더불어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3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검사의 취조에 대한 답변서로서 세칭 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 그의 독립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표현된 그의 독립사상은 대체로 자유사상, 평등사상, 민족사상, 민중사상, 진보사상, 평화사상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922년에 출옥한 한용운은 각지로 전전하며 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1924년 불교청년회의 총재에 취임했다. 1926년에는 내설악 백담사에서 1925년에 쓴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문단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는 이미 1918년에 창조(創造)동인들보다 앞서 유심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한 일이 있고 후일에도 흑풍(1935), 후회(1936), 박명(1938) 등 장편소설과 상당수의 한시, 시조를 남겼으나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님의 침묵한 권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27신간회의 발기인이 되어 경성지부장을 역임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는 민중대회를 열고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성북동 심우장으로 거처를 옮긴 후 조선불교동맹만당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약했다. 1931년에는 불교(佛敎)를 인수·간행하여 불교청년운동 및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이는 한편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하면서 많은 불교 관련 논설을 집필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친일 활동에 적극 가담했을 때에도 끝까지 민족의 지조를 지켜 서릿발 같은 절개와 칼날 같은 의기를 보여 주었다. 그 후 1944629일 중풍으로 사망하자, 그 유해를 화장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한용운은 당대 문단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한국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섰던 승려였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저항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 가운데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남아 있는 부분의 하나가 시작 활동이라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는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고 많은 한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시정신의 그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만해 한용운의 위대성을 말해 주는 중요한 일면이 되고 있다.

시집 님의 침묵이전에 시인으로서 만해 한용운의 이름은 문단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용운 자신이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내세워 작품을 발표한 적도 별로 없다. 그는 초기 문단 형성기에 서구 문학에 심취해 있던 문인들과 문학적 교류를 가졌던 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님의 침묵의 시인 한용운의 등장은 당대 문단에서는 의외의 경우에 속하는 일이다. 당시 동아일보님의 침묵을 읽은 소감을 발표했던 주요한도 적막하던 시단에 홀연히 출연한 한용운을 한 사람의 불도(佛徒)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였다. 한용운은 이 시집을 내면서 이렇게 자신의 소감을 피력했다.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용운이 시 님의 침묵의 후기에서 밝힌 망설임과 부끄러움의 진정한 뜻을 당대의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시집 님의 침묵이 당시 문단에 파문을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문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시에 대한 논의는 해방 이후 196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화되었다.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만해의 뜻과는 달리, 님의 침묵이 간행된 후 한 세대가 지난 다음에야 새롭게 읽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시대의 독자들에게는 당연히 매서운 서릿발 아래 피어 있는 국화꽃으로 보였어야 할 만해의 시는 오히려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 고결한 정신이 조금씩이나마 이해되고 있다.

 

 한용운의 그의 시를 통해 님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적 관심은 모두 님이라는 존재에 집중되고 있으며, 시를 통해 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형상화시켜 놓고 있다. 그는 기룬 것은 모두 님이며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존재가 바로 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님은 시적 자아와 함께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님은 이미 현실을 떠나가 버렸기 때문에, 시인은 떠나 버린 님, 지금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님을 노래하고 있다. 한용운은 님이 가 버린 상태를 사랑의 이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라는 역설의 표현을 통해 님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강조하기도 하다. 특히 이별은 미()의 창조라고 말함으로써, 사랑의 아름다움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운데에서 더욱 진실하게 드러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용운이 노래하고 있는 이와 같은 님의 존재 방식은 당대의 상황과 연관되어 식민지 시대의 비극적인 역사와 빗대어지기도 하며,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 의미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한용운의 시에서 님의 존재는 침묵이라는 말을 통해 역설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는 님이 떠난 현실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객관적인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님은 떠나갔고, 그렇기 때문에 님이 부재하는 현실은 비극적인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용운은 대상으로서의 님의 존재를 비극적 공간에서 끌어내고, 오히려 그 존재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시적 진술에서처럼, 시적 자아는 대상으로서의 님을 떠나지 않고 있다. 님과 시적 자아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시적 주체로서의 나와 시적 대상으로서의 님의 분리와 통합이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한용운의 시는 비탄과 정한의 노래는 아니다. 한용운은 님이 떠나 버린 슬픔은 말하면서도, 그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님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신념을 강조하고 있다. 비극의 현실 속에 빠져 있는 개인의 정서적 파탄을 그리지 않고, 오히려 존재의 본질과 새로운 삶의 전망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용운의 시는 의지적이며 강렬한 어조가 돋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한용운 자신의 혁명적 기질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지만, 역사의식의 투철성을 말해 주는 것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한용운의 시는 가 버린 님을 노래하고 있으나,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초조함을 노래한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간절한 기원이 그 속에 깃들어 있다.

 

 한용운의 시의 정신은 역사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가 삶에 대한 정직성을 지키고, 악에 항거하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투쟁했던 행동적 실천가였음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의지를 시적으로 구현하면서 가장 서정적인 어조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한용운의 시적 언어가 획득하고 이는 일상적 경험의 진실성은 저항적 시정신의 형상을 위해서도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한용운 문학의 위대성이 그의 인간적인 삶과 그 행적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 자체에서 비로소디는 것이라는 점이다. 한용운의 생애를 조심스럽게 검토해 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문학 수업이 어느 때쯤에 이루어진 것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 오랫동안 한학 수업을 받았을 뿐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통한 신학문에의 접근이 전혀 불가능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님의 침묵과 같은 한용운의 업적은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특히 님의 침묵이전에 발표한 한용운의 논설들이 국한문을 혼용한 문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점을 견주어 볼 때, 님의 침묵이 거두고 있는 시적 성과는 한국어의 시적 성취라는 점에서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다.

 

 한용운의 시는 일상적인 생활에 뿌리박고 있는 고유한 우리말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살려 내고 있다. 그만큼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의미의 단조로움이나 시정신의 소박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감정에 충실함을 의미한다. 생활 감정에 충실하기 때문에, 시적 정서의 공감대를 더욱 확대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 모국어를 순화하는 것이 시인이 맡은 궁극적인 사명 중의 하나라면, 한용운은 초창기의 시단에서 바로 그러한 일을 수행했던 시인임에 틀림없다. 시인으로서 한용운의 업적은 바로 이러한 언어와 문체에서부터 더욱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권영민 교수의 문학 콘서트, 권영민, 해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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