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 -을지문덕

 

신기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고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묘한 계산은 지리에 통달했네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싸움에 이겨 공 이미 높으니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족함을 알고 그만두길 바라겠소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1. 해제

   국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한시로 오언 고시에 해당하며, 『삼국사기』에 실려 전한다. 612년 수나라가 30만 대군으로 침공하여 왔을 때, 살수까지 진격해 온 적장 우중문으로 희롱하기 위하여 지어 보냈다고 한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 대첩에서 수나라 대군에 맞서 승리하는 과정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다.

 

2. 주제 : 족함을 알고 싸움을 그만둘 것을 권함.

 

3. 구성    

         1행 – 신기한 계책을 칭찬함.    

         2행 – 묘한 계산을 칭찬함.    

         3행 – 전에서 이미 공을 세웠음을 인정함.   

         4행 – 족함을 알고 그만둘 것을 권함.

 

 

 

출처 : 2024학년도 수능 특강 문학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추모(鄒牟)]라고도 하고, 중해(衆解)라고도 한다]이다.

 이에 앞서 부여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 후사를 구하였다.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해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니, 웬 어린아이가 금빛 개구리[개구리 '와(蛙)'자는 달팽이 '와(蝸)'자로도 쓴다]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야말로 하늘이 내게 주신 아들이로구나!" 하고서, 곧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그 뒤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기를 "요전날 천제께서 제게 내려와 이르시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고자 하니 너희는 이곳을 피해 가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을 기르기에 적당하니 도읍할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왕에게 권해 그곳으로 도읍을 옴기고, 국호를 '동부여(東扶餘-「광개토왕비」와 「모두루묘지」에는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옛 도읍지에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그곳에 와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에게 영문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하백(河伯)의 딸인데 이름은 유화(柳花)라고 합니다. 동생들과 함께 나와 노는데,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나 자기가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저를 웅심산(熊深山) 아래 압록강가에 있는 방으로 유인해 사통하고 가버리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모는 제가 중매 없이 다른 남자를 허락한 것을 꾸짖고 드디어 우발수로 귀양살이를 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와가 이상하게 여겨 방안에 가두었는데 햇빛이 그녀를 비추는지라, 그녀가 몸을 끌어 피하면 햇빛이 다시 쫓아가며 비추었다. 이로 인해 태기가 있더니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 정도 되었다. 왕이 알을 버려 개· 돼지에게 주었더니 짐승들이 먹지 않았고, 다시 길 가운데 버렸더니 소나 말이 피해 밟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들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주었다. 왕이 알을 쪼개려 했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 마친매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머니가 알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아이는 골격과 풍채가 아름답고 기이하여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숙성하게 빼어나 보통 아이와는 달랐다. 제 손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俗語)로 활을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를 아이의 이름으로 했다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 늘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바가 아니고 그 사람됨이 용맹하니, 만약 일찌감치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그를 제거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은 허락하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이 날랜 말을 알아보고 먹이를 적게 주어 야위게 하고, 노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더니, 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뒤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하여 그에게는 화살을 적게 주었는데도 주몽이 잡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다시 그를 죽이려고 계획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은밀히 알아차리고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하니 너의 재능과 지략을 가지고 어딘들 못 가겠느냐? 머뭇거리다가 치욕을 받느니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일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 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 함께 벗을 삼아 엄시수(淹㴲水)[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러 물을 건너려 했으나, 다리가 없었다. 주몽은 뒤쫓아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두려워 물을 향해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이다. 오늘 도망하는 길인데 뒤쫓는 이들이 거의 닥쳐오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더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어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 물고지와 자라가 곧 흩어져버려 쫓아오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모둔곡(毛屯谷) [『위서』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승려 옷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삼베 옷을 입은 이는 "이름이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고, 승려 옷을 입은 이는 "이름이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마름 옷을 입은 이는 "이름이 묵거(默車)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도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克氏)를, 무골에게는 중실씨(仲室氏)를, 묵거에게는 소실씨(少室氏)를 성으로 내려주고, 이어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열고자 하는데, 때마침 이 세 어진 이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각각 일을 맡기고 함께 졸본천(卒本川) [『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곳 토양이 비옥하고 산과 강이 험준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고자 했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엮고 지냈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로 말미암아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한편,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왕이 주몽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 자기 딸을 아래로 삼게 했던바, 그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도 한다]

 이대 주몽의 나이 22세로, 이 해는 전한(前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이요, 신라 시족 혁거세 21년 갑신년(기원전 37)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따르는 이가 많았다. 그 지역이 말갈(靺鞨- 말갈은 중국 사서들의 인식에 따르면 선진시대의 숙신(肅愼), · 위대의 읍루(揖婁), 남북조 시대의 물길(勿吉)의 후신이며, 후대 여진(女眞)의 전신으로, 수·

 당시대에 해당하는 명칭이라 한다.)의 부락과 붙어 있으므로, 그들이 침노하고 노략질하여 해가 될까 염려해서 마침내 물리쳐 쫒아내니, 말갈이 두려워 복종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이 비류수 가운데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는 줄을 알았다. 이윽고 사냥하면서 찾아 올라가 비류국(沸流國)에 이르게 되었다. 그 나라의 왕 송양(松讓)이 나와보고 말하기를 "과인이 바다 귀퉁이에서 후미지게 살다보니 일찍이 군자를 만나보지 못했는데, 오늘 뜻밖에도 서로 만나게 되니 역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리오! 그러나 그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某處)에 와서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기에서 여러 대 동안 왕이 되어왔고, 또 땅이 좁아 두 임금을 용납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을 세운 지가 얼마 되지 않으니 우리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왕이 그의 말에 분개한 나머지 그와 더불어 말다툼을 하다가 다시 활로 기예를 겨루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가 없었다.

 

 2년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므로, 그 땅을 다물도(多勿島)라 하고 송양을 그 주인으로 봉하였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일러 '다물'(多勿)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3년 봄 3월에 황룡이 골령(鶻嶺)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이 푸르고 붉었다.

 

 4년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7일 동안이나 빛깔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6년 가을 8월에 신이한 새들이 궁궐 뜰에 모여들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시켜서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치게 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만들었다.

 

 10년 가을 9월에 난(鸞) 새들이 왕궁에 모여들었다.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해 북옥저(北沃沮)를 쳐 없애게 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만들었다.

 

 14년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나라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 제사를 지낸 다음 신묘(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 방물을 바쳐서 그 은덕에 보답하였다.

 

 19년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의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왔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승하하니, 이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고, 왕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참고 문헌

 

김부식 지음, 이강래 옮김, 삼국사기1, 한길사, 2018.

 

 

 

 

 

 

 

 

 

 

 

 

 

 

황조가(黃鳥歌)

 

翩翩黃鳥(편편황조)    훨훨 나는 저 꾀고리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서로 정다운데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울사 이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

 

 

* 핵심 정리

갈래 - 고대 가요

성격 - 서정적, 애상적

제재 - 꾀꼬리

주제 - 사랑하는 임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

시상방식 - 선경후정

 

⓵ 배경 설화

 

 유리왕 3년(기원전 19) 겨울 10월에 왕비 송씨(松氏)가 죽었다. 왕은 다시 두 여인에게 장가들어 계실(繼室-두 번째로 얻은 부인)로 삼았다. 한 여자는 화희(禾姬)라 하는데 골천 사람의 딸이고, 또 한 여자는 치희(雉姬)라 하는데 한인(漢人)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총애를 다투어 서로 화목하지 못하자 왕은 양곡(涼谷)의 동쪽과 서쪽에 두 궁궐을 지어 각각 따로 머물게 하였다. 그 뒤 왕이 기산(箕山)에 사냥 가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싸우게 되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기를 “너는 한인 집안의 종년 주제에 어찌하여 그토록 무례하냐”라고 하니, 치희가 부끄럽고도 한스러워 달아나 돌아가버렸다. 왕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뒤쫓았으나 치희는 노여워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어느 날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날아 모이는 것을 보고 곧 느끼는 바가 있어 노래하기를, “날아드는 저 꾀꼬리도 암수가 서로 의지하거늘, 나의 외로움 생각하니 그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까”라고 하였다.

* 참고 문헌
김부식, 이강래 옮김, 『삼국사기』, 한길사, 2018.

 

⓶ 이면
- 두 정치세력의 팽팽한 권력 다툼, 곧 한인(漢人)으로 대표되는 수렵민 중심의 외래세력과 골천인으로 대표되는 농경민 중심의 토착세력 간의 정치적 알력으로 해석
- 황조가(黃鳥歌)는 이들 정치 세력의 견제와 조정을 통해 아직 채 다져지지 못한 왕권을 굳혀 나가려다가 벽에 부딪힌, 유리왕의 강한 정치적 좌절감을 바탕에 깔고 있는 서정적 사랑의 노래

 

⓷ 기원 전후 1세기 – 우리 역사상 실질적 의미의 자생적 민족국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국면. 한사군의 설치와 철기 문화의 보급으로 출현하기 시작. 이민족의 외압은 토착문화 집단들의 자기 동일성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 소국 단계의 민족국가 형성을 주동한 철기 문화 집단의 유이민 현상을 촉진케 하는 계기.

 

⓸ 서정적 성격 – 특수한 국면
황조가(黃鳥歌)는 단순한 사랑의 노래가 아니므로 개인적 서정시의 전형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정치권력의 암투와 이의 틈바구니에서 안정된 국가기반을 다져야 하는 초기 국왕으로서의 정치적 고뇌가 깔려 있다. 따라서 노래 속에 토로되고 있는 유리왕의 외로움은 개인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라 할 수 있고, 사적인 것 못지않게 사회적 성격이 짙다.

 

⓹ 의의
개인과 사회의 갈등 토로
비애의 정서 주조
세계와의 화합이 불가능함을 인식하는 동일성 상실의 슬픔 노래
현실적으로 회복할 길 없는 동일성의 꿈을 개인의 주관적 내면 속에서 찾으려는 서정적 내면화의 길을 예비
전형적인 개인적 서정의 길로 나아가는 터전 마련

 

 

 

* 참고문헌

성기옥 외, 「한국문학개론」, 새문사, 1995.

 유리명왕(瑠璃明王)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유리(類利), 혹은 유류(儒留)라고도 한다. 주몽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예시(禮氏)이다.

 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 여인에게 장가들어 임신이 되었는데, 주몽이 떠나간 뒤에야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가 곧 유리(類利)였다. 유리가 어렸을 때 길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잘못해 물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기를 "이 아이가 아버지가 없기 때무에 이렇게 못되게 군다"라고 하였다. 유리가 무안을 당하고 집에 도아와 어머니에게 묻기를 "우리 아버지는 어떤 분이시며,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네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자 남쪽으로 달아나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떠날 때 나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거든 내가 남긴 물건이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밑에 감췆 있다고 말해주시오. 그가 만약 이것을 찾게 되면, 그제서야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라고 하였다" 하였다. 유리가 이를 듣고 바로 산골짜기에 가서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왔다.

 하루는 마루 위에 앉아 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나 나는 듯하여 다가가 살펴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가 나 있었다 곧바로 기둥 밑을 들춰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찾아냈다. 드디어 이것을 가지고 옥지(屋智)  구추(九鄒) ⦁ 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나 졸본(卒本)에 이르러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지녀온 칼 조각을 꺼내 붙여보니, 이어져 완전한 한 자루의 칼이 되었다. 왕이 기뻐하고 유리를 태자로 삼았으니, 이때 와서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2년(기원전 18) 가을 7월에 다물후(多勿候) 송양의 딸을 맞이해 왕비로 삼았다. 9월에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힌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에 신령스러운 새들이 왕궁의 뜰에 모여들었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3년 가을 7월에 골천(鶻川)에 이궁(離宮- 천자가 출타하기 위해 궁성 밖에 세워 머무는 곳)을 지었다.

 겨울 10월에 왕비 송씨(宋氏)가 죽었다. 왕은 다시 두 여이에게 장가들어 계실(繼室)로 삼았다. 한 여자는 화희(禾姬)라 하는데 골천 사람의 딸이고, 또 한 여자는 치희(稚姬)라 하는데 한인(漢人)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총애를 다투어 서로 화목하지 못하자 왕은 양곡(凉谷)의 동쪽과 서쪽에 두 궁궐을 지어 각각 따로 머물게 하였다. 그 뒤 왕이 기산(箕山)에 사냥 가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싸우게 되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기를 "너는 한인 집안의 종년 주제에 어찌하여 그토록 무례하냐"라고 하니, 치희가 부끄럽고도 한스러워 달아나 돌아가버렸다. 왕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뒤쫓아으나 치희는 노여워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어느 날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날아 모이는 것을 보고 곧 느끼는 바가 있어 노래하기를, "날아드는 저 꾀꼬리 암수가 서로 의지하거늘, 나의 외로움 생각하니 그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까"라고 하였다.

 

 11년 여름 4월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선비(鮮卑-선비는 동호의 일족으로 그 나라의 대선비산(大鮮卑山)에서 족명이 유래했다 한다. 흥안령(興安嶺)의 동쪽에서 흥기했는데, 후한 대에 단석괴(檀石槐)가 영토를 개척해 옛날 흉노으 최전성기와 같은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진(晉) 초에 여러 부로 나누어졌는데, 그 가운데 모용씨와 탁발씨가 가장 저명하였다)가 험한 지세를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유리하면 나와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앉아 지키니 나라의 걱정거리이다. 만약 이들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따면 내가 그에게 후한 상을 주리라"라고 하였다. 부분노가 나와 말하기를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하며, 사람들이 용맹하긴 하지만 우둔하니,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하기를 "사람을 시켜 나라를 배반한 척 저들에게로 들어가서 거짓으로 우리 나라는 작고 군사력이 허약해 겁을 내고 움직이지 못한다고 말하게 하면, 선비는 반드시를 우리를 만만하게 여겨 경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틈을 타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가서 산림에 의지해 그들의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때 왕께서 허술한 군사로 하여금 그들의 성 남쪽으로 출동하게 하시면 저들은 반드시 성을 비워두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정예병을 이끌어 그 성에 달려들어가고, 왕께서는 친히 용맹한 기병을 거느리시어, 그들을 양쪽에서 협공하게 되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선비는 과연 성문을 열고 군사를 내서 쫓아오매, 부분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달려들어갔다. 선비가 이를 바라보고는 크게 놀라 성으로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가 성문에 막아서서 싸우니 베어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깃발을 들어 올려 북을 울리며 나아오니, 선비는 앞뒤에서 적을 맞아 계책이 막막하고 힘이 다해 항복하고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로를 생각해 상으로 식읍(食邑)을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이는 왕의 덕이오니 저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이에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내려주었다.

 

 13년 봄 정월에 형혹성(熒惑星- 화성(火星)의 다른 이름이다. 심성은 28수의 하나로, 동방 창룡7수(蒼龍七宿) 가운데 속한 별이다. 형혹성이 출현하면 전쟁이 발발하고 사라지면 전쟁시 종식된다.)이 심성(心星) 자리에 머물렀다.

 

 14년 봄 정월에 부여 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와 방문하고 볼모를 교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려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보내고자 했으나 도절이 두려워해 가지 않으니 대소가 분노하였다. 겨울 11월에 대소가 군사 5만 명의 규모로 침범해왔다가 폭설이 내리고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자 그냥 돌아갔다.

 

 19년 가을 8월에 교사(郊祀-천자가 교외에서 천지신에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왕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쫓아가 잡아오게 했더니, 장옥택(長屋澤)에 이르러 잡아서 칼로 돼지의 다리 힘줄을 잘라버렸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를 지낼 희생(犧牲)에 어찌 상처를 낼 수가 있겠느냐"하고는, 드디어 두 사람을 구덩이에 던져 죽였다. 9월에 왕이 질병에 걸리자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의 귀신이 빌미가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무당을 시켜 귀신에게 사과하게 했더니 병이 곧 나았다.

 

 20년 봄 정월에 태자 도절이 죽었다.

 

 21년 봄 3월에 교사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왕이 희생을 관장하는 설지(薛支)에게 명해 돼지를 쫓게 했던바, 국내(國內)의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붙잡아서 국내 사람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하였다. 그가 돌아와 왕을 보고 말하기를 "제가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 산과 물이 깊고도 험한데다 토양은 오곡을 경작하기에 알맞고, 게다가 고라니와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신다면 백성들의 복리가 끝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쟁의 환란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여름 4월에 왕이 위중림(尉中林)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 8월에 지진이 있었다.

 9월에 왕이 국내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 사물택(沙勿澤)에 이르렀는데, 한 장부가 못가의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왕을 보고 말하기를 "왕의 신하가 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허락하고, 그에게 사물(沙勿)이라는 이름과 위씨(位氏) 성을 내려주었다.

 

 22년 겨울 10월에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2월에 왕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大輔) 협보가 간하여 말하기를 "왕께서 새로이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편안하게 안착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치안 관련의 행정을 돌보는 데 서둘러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하느라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시니, 만약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흩어져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그로 하여금 관청의 원림(園林)을 관리하게 하였다. 협보가 분개해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23년 봄 2월에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로 삼고, 나라 안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24년 가을 9월에 왕이 기산(箕山)의 들에서 사냥을 하다가 기이한 사람을 만났는데, 양 겨드랑이에 깃이 달려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해 우씨(羽氏) 성을 내려주고, 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27년 봄 정월에 왕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 남아 있었는데, 힘이 세고 용맹한 것을 좋아하였다. 황룡국(黃龍國)의 왕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억센 활을 선물하였다. 해명은 그 사신 면전에서 활을 잡아당겨 부러뜨리고 말하기를,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이 활 자체가 강하지 못한 탓이다"라고 하니, 황룡 왕이 부끄럽게 여겼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황룡 왕에게 이르기를 "해명이 자식이 되어 불효했으니, 청컨대 나를 위해 그를 죽여주십시오"라고 하였다.

 3월에 황룡 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보기를 요청하였다. 태자가 가려 하자 어떤 이가 만류해 말하기를 "지금 이웃 나라에서 까닭없이 만나자 하니 그 의도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야 황룡 왕이 나를 어찌하겠는가"하고 마침내 황룡국으로 갔다. 황룡 왕이 처음에는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그를 만나게 되자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우해 돌려본ㅆ다.

 

 28년 봄 3월에 왕이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이르기를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을 안주하게 하여 나라의 위업을 굳게 하고자 함인데,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굳센 힘만 믿고서 이웃 나라에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은가"하고 곧 칼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다. 태자가 즉시 자살하려 하자 어떤 이가 말리면서 말하기를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었으므로 태자께서 바로 후계자가 된 것인데, 이제 사신이 한 번 왔다 하여 자살해버린다면, 혹시 그럿이 속임수가 아닌 줄을 어찌 알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황룡 왕이 억센 활을 보내왔을 때 나는 그가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는 것을 염려해 일부러 활을 잡아당겨 부러뜨려서 되갚아주었던 것인데, 뜻밖에도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당하게 되었다. 지금 부왕께서는 내가 불효했다 하여 칼을 내리면서 자살하라 하시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여진(礪津)의 동원(東原)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아두고 말을 달려 창에 부딪쳐 죽으니, 이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를 갖추어 동원에 장사 지내고 사당을 세우니, 그 땅을 창원(槍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편찬자는 논평하여 말한다.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것은 마땅히 좌우를 떠나지 않는 것으로 효도를 다하는 것이니, 마치 문왕이 세자였을 때와 같이 해야 한다.(『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편에 의하면 문왕이 세자였을 때 아버지 왕계(王季)의 안부를 하루에 세 번 여쭈었다. 또 아버지에게 편안하가 못함 있을 때에는 근심스러운 낯빛으로 걸음을 바로 딛지 못했으며, 음식을 올리 때에는 반드시 직접 그 차고 따뜻한 절도를 살펴보고 무슨 음식을 드셨는지 확인한 다음 같은 음식을 다시 올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해명은 별도(別都)에 있으면서 용맹을 좋아하기로 소문이 났으니, 그가 죄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하다. 또 들으니 『좌전』에 이르기를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서 나쁜 데로 빠져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지금 유리왕은 애초에 한 번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다가 아들이 죄악을 저지르게 되자 지나치게 미워해 죽이고야 말았으니, 아비는 아비노릇을 못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못했다고 할 만하다."

 

 가을 8월에 부여 왕 대소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어 말하기를 "우리 선왕께서는 그대의 선군 동명왕과 서로 우호했는데, 이제 우리 신하들을 유인하여 이곳으로 도망해 오게 하며 백성들을 모아서 나라를 이루려 하고 있다. 무릇 나라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른과 이이가 있는지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의요,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은 순리인 것이다. 이제라도 왕이 만약 예의와 순리로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서 국운이 길이 다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나라를 세운 지가 얼마 안되고 백성들은 취약하고 군사력도 약세이니 형세상 치욕을 참고 굴복해 뒷날의 성공을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해 부여 왕에게 회보하기를 "과인이 바다 귀퉁이에 치우쳐 살다보니 예의에 대해 듣지 못 했는데, 오늘 대왕의 교시를 받고 보니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왕자 무휼(無恤)은 아직 나이가 어렸는데, 왕이 부여에 회답하려는 내용을 듣더니 스스로 부여 사신을 보고 말하기를 "우리 선조께서는 신령의 자손이라 어질고도 재주가 많았던바, 대왕이 질투하고 모해하여 부왕에게 참소하고 말을 치게 해 모욕했기 때문에 불안하여 탈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대왕은 지난날의 허물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군사가 많은 것만을 믿어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고 있다. 사자는 돌아가서 대왕에게 보고하되, '지금 여기에 포개 쌓은 알이 있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들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내가 대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못하겠다'고 전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부여 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더니 한 노파가 대답하기를 "포개 쌓은 알은 위태로운 것이요 그 알들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편안한 것이니, 그 말의 뜻은 왕이 자기의 위태로움은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찾아올 것만을 바라는 것은, 차라리 자기의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바꾸어 스스로 잘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9년 여름 6월에 모천(矛川)가에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들이 떼지어 싸우더니, 검은 개구리 쪽이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를 보고 의견을 내는 이가 말하기를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이니 북부여가 파멸될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가을 7월 두곡(豆谷)에 이궁을 지었다.

 

 31년에 한의 왕망(王莽)이 우리 군사를 징발해 흉노를 치게 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가지 않으려 하는데도 억지로 협박해 보내니, 모두 변경으로 도망해 법을 어기고 도둑떼가 되었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 그들에게 죽게 되자, 주 · 군들이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왕망에게 아뢰기를 "맥인(貊人)들이 법을 어긴데 대해서는 마땅히 주·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무마하고 안도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들씌우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그럴 경우 부여의 무리 가운데 반드시 반란에 동조할 이가 있을 것이니, 흉노를 물리치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濊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듣지 않고 엄우에게 조칙을 내려 그들을 치게 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해 목을 베어 수도로 보냈다.[『양한서』 및 『남북사』에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鄒)를 유인해 목을 베었다"라고 하였다] 왕망이 기뻐하고 우리 왕의 명칭을 고쳐 '하구려후(下句麗侯)라 하고, 천하에 포고해 모두가 알게 하였다. 이에 한의 변경 지역을 침구하는 것이 더욱 심해졌다.

 

 32년 겨울 11월에 부여 사람들이 와서 침범하였다. 왕이 아들 무휼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무휼은 군사가 적어 대적하지 못할까 염려해, 기발한 계책을 세워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매복한 채 기다렸다. 부여의 군사가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아래에 이르자 복병을 출동시켜 불시에 그들을 치내, 부여군은 크게 패해 말을 버려두고 산으로 올라가다. 무휼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33년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고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을 8월에 왕이 오이와 마리에게 명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치게 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군사를 진격하여 한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해 빼앗았다.[고구려현은 현도군에 속한다.]

 

 37년 여름 4월에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애통해하여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게 했으나 얻지 못하였다. 뒤에 비류(沸流) 사람 제수(祭須)가 찾아서 아뢰니, 마침내 예를 갖추어 왕골령(王骨嶺)에 장사 지내고, 제수에게는 금 10근과 밭 10경(頃-토지 면적의 단위로 1경은 밭 1맥 무(畝)를 가리킨다)을 내려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이 두곡(豆谷)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두곡의 이궁에서 죽었따. 두곡의 동원(東原)에 장사 지내고, 왕호를 유리명왕이라 하였다.

 

참고 문헌

김부식, 이강래 옮김, 『삼국사기1』, 한길사, 2018.

 

 

 곧 졸본부여(卒本扶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화주(和州)라고도 하고 성주(成州)라고도 하나 모두 잘못된 것이다. 졸본주는 요동 경계에 있는데,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시조 동명(부여 제족의 공동신을 나타내는 보통명사로 이해된다-서대석 설)성제(東明聖帝)는 성이 고씨(高氏)고 이름은 주몽(朱蒙-추모, 추몽, 중모라고도 썼다)이다. 이에 앞서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피해 가 살았는데, 부루가 죽자 금와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금와는 그때 태백산('고조선 조'에서는 묘향산이지만 여기서는 백두산을 말한다)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하백(河伯-물의 신)의 딸 유화(柳花)입니다. 동생들과 놀러 나왔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웅신산(熊神山-백두산으로 추정) 앙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혹하여 사통(私通)하고는 저를 버리고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단군기』에서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가까이 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부루(夫婁)라 했다'라고 했다. 지금 이 기록을 살펴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정을 통하여 낳은 아들의 이름이 주몽이라고 했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했다.'하니 부루와 주몽은 이복 형제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 간 것을 꾸짖어 이곳으로 귀양을 보내 살도록 했습니다.'

 금와는 괴이하게 여겨 유화를 방 안으로 남몰래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었다. 그녀가 피하자 햇빛이 따라와 또 비추었다. 이로 인해 임신하여 알을 하나 낳았는데(태양숭배) 크기가 다덧되쯤 되었다. 왕이 알을 개와 돼지에게 던져 주었지만 모두 먹지 않았고, 길에다 버렸으나 말과 소가 피해 갔으며, 들판에 버리니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후직(后稷)의 탄생설화와 유사) 왕은 알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깨지지 않았으므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유화가 천으로 알을 부드럽게 감싸 따뜻한 곳에 두자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겉모습이 영특하고 기이했다.

 겨우 일곱 살에 용모와 재략이 비범했으며,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 번 쏘아 백 번 맞추었다. (주몽의 활쏘기 실력은 주몽집단의 유목 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 나라의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했으므로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

 금와에게는 아들이 일곱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다. 그러나 그들의 기예가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자 맏아들 대소가 말했다.

 '주몽은 사람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니 일찍이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왕은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도록 했다. 주몽은 준마를 알아보고 먹이를 조금씩 주어 마르게 하고, 늙고 병든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다. 왕은 살찐 말을 타고 주몽에게 마른 말을 주었다. 왕이 아들들과 여러 신하들이 함께 주몽을 해치려하자, 그 사실을 알게 된 주몽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나라 사람들이 곧 너를 해치려고 하는데, 너의 재략(才略)이라면 어디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빨리 떠나거라.'

 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과 벗을 삼아 떠나 엄수(淹水-지금의 어느 곳인지 자세하지 않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제1에서는 '엄호수(掩호수)'라고 하면서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했다)에 이르러 물(水)에게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자 하백의 손자다. 오늘 도망치는데 뒤쫓는 자들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건너게 했다. 그러고는 다리를 풀었으므로 뒤쫓던 기병은 건너지 못했다. 졸본주(卒本州-현도군의 경계)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을 정했으나, 미처 궁궐을 짓지 못하고 비류수(沸流水-『고려사』에 의하면 평양 동북쪽에 있다고 한다)가에 초가집을 지어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고 했다. 이로 인해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본래의 성은 해씨였는데, 지금 스스로 천제의 아들로 햇빛을 받아 출생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고씨를 성으로 삼은 것이다) 주몽의 나이 열두 살(『삼국사기』에는 스물두 살로 나와 있다)이었는데,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년에 즉위하여 왕이라고 일컬었다. 고구려는 전성기에 21만 508호였다."

 『주림전(珠琳傳)-당나라 도제가 지은 불교책』 제21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옛날 영품리왕(寧稟離王)의 계집종이 아이를 가졌는데, 관상쟁이가 점을 쳐 보더니 '휘하므로 왕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말했다. '내 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 계집종이 '기운이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제가 아이를 밴 것입니다.'라고 했다. 계집종이 아들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구간에 버리니 말이 젖을 주어 죽지 않았다.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바로 동명제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한다. 졸본부여 역시 북부여의 다른 도읍이기 때문에 부여 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란 바로 부루왕의 다른 명칭이다.)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