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태일의 1970년 8월 9일 일기 일부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와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1. 어린 시절
㉮ 1948년 8월 26일 대구 출생 – 아버지 전상수 씨는 봉제 노동자 출신
㉯ 1954년 상경 – 지게꾼들을 상대로 팥죽, 비빔밥 등을 팔았고, 채소 행상을 해서 근근이 가정을 꾸리던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를 눕게 되자 전태일은 남대문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신문팔이, 구두 닦기 등의 일을 함
㉰ 1963년 – 대구로 내려가 대구의 청옥 고등 공민 학교에 입학(고등 공민 학교란 가정 사정 등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 1963년 겨울 –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교를 그만 둠
2. 평화 시장 시절
㉮ 1964년 봄 – 16살, 평화 시장 시다로 취직
㉯ 1965년 – 평화시장, 통일사에 어린아이들 막바지를 만드는 미싱사로 취직
㉰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
작업장은 약 8평 정도, 미싱대와 시다판들이 꽉 들어찬 비좁은 방안의 틈서리에서 창백한 얼굴의 여공들은 끼여앉아 일해야 했다. 여공들은 허리마저 펴고 다닐 수가 없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약 1.5m밖에 안 되는 다락방이기 때문이었다. 아침 8시부터 밤11까지 일해야 했고, 작업 도중에 화장실을 한 번 가려고 해도 ’주인 아저씨‘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일거리가 밀리면 이틀 밤, 사흘 밤을 세워 가며 일해야 했고, 주인 아저씨가 사다 준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억지로 밤을 새어 일해야 했다. 집에서 쉬는 날이라고는 한 달에 이틀 뿐이었을 정도로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일을 했다.
3. 각성
㉮ 재단사가 되기로 한 전태일, 1967년 2월 24일, 재단사가 됨
㉯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 각혈을 하게 됨 →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쫓겨남
㉰ 아버지가 알고 있는 노동 운동에 관한 것을 묻기 시작하고 이때 ’근로 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
㉱ 해고된 전태일 – 여공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업주가 해고
㉲ 다른 곳에서 재단사로 일하면서 재단사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 조직 – 1969년 6월 말 정식으로 창립 총회를 갖고 전태일을 회장으로 선출
㉳ 어머니를 졸라 근로 기준법 해설서를 사서 읽고 또 읽음 – 이 때부터 그는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4. 시련
㉮ 업주들 사이에 ’위험 분자‘로 찍힘
㉯ 1969년 8,9월 경 – 노동 실태 조사용 설문지 300매 인쇄해서 노동자들에게 배포. 이 일로 평화 시장 일대에서 쫓겨남
㉰ 근로 기준법상의 감독권 행사를 요구하기 위하여 시청 근로 감독관실에 찾아갔고, 노동청에 찾아가 진정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식도 없음
5. 다시 평화 시장으로
㉮ 1970년 9월 – 다시 취직한 전태일, 바보회 회원들을 다시 규합하고 바보회를 ’삼동 친목회‘로 이름을 바꾸어 새 조직을 만듦(삼동은 평화시장, 동화 시장, 통일 상가의 세 건물)
㉯ 10월 6일 –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 시장 피복 제품상 종업원 근로 개선 진정서‘ 제출
㉰ 10월 7일 – 각 석간 신문에 평화 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 실림
㉱ 10월 8일 – 전태일, 김영문, 이승철 세 사람은 삼동회를 대표하여 작업 시간 단축, 1주 1일 휴일, 1년 2회의 건강 진단, 시다 임금 100% 인상, 다락방 철폐, 조명 시설 개선, 환풍기 설치, 여성 생리 휴가 보장, 노조 결성 지원 등을 내용으로 하는 건의서를 평화시장 주식회사에 제출
㉲ 1971년- 노동청에서 근로 감독관을 보내 근로 조건을 개선해 주겠다면 삼동회를 회유
㉳ 1971년 10월 20일 – 노동청 정문 앞에서의 시위 제의 → 데모 계획을 눈치 챈 당국은 회근로 조건 개선을 약속하며 데모 중지를 요청 → 노동청, 국정감사가 끝나자 무시
㉴ 10월 24일 – 경찰측과 회사측 11월까지 기다려 보라고 회유
㉵ 11월 7일 – 아무 것도 지켜지지 않음
㉶ 11월 13일 오후 1시 – 불길을 뒤집어 쓴 전태일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짐 → 밤 10시 조금 지나 전태일, 사망
㉷ 전태일 투쟁 이후 청계 피복 노조의 결성 등 민주 노조가 연이어 결성되고 노동자의 투쟁은 끊임없이 지속됨
참고 문헌
조성오, 「우리 역사 이야기3」, 돌베개, 2008.
조정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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