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정병헌· 이지영, 돌베개, 2007.

 

 

. 허균

허균(許筠,1569-1618)은 일반적으로 국문소설의 효시작으로 알려진 홍길동전을 지었다. 그는 당시 엄격한 유교 윤리와 예학에 사로잡힌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양명학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 천주교 등 여러 방면의 지식을 수용했다. 아울러 독창적인 우리 문학을 주장했으며 억압받던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남겼다.

 

. 허균의 생애

 

허균의 자는 단보(端甫)요 호는 교산, 학산, 백월거사 등이고, 본관은 양천이다. 그는 학자요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막내아들이다. 부친 허엽은 청주 한씨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허성(許筬)과 두 딸을 두었는데, 한씨 부인이 죽자 다시 예조참판 김광철의 여식을 후취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강릉 김씨 부인 사이에서 허봉(許篈), 허난설헌(許蘭雪軒), 허균을 낳았다.

 

허균은 서울의 마른내(지금의 오장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강릉을 그의 출생지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허균의 부친이 그가 태어나기 이태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온 뒤 서울에서 내직(內職)으로 벼슬살이해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출생지가 서울일 것으로 짐작된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두 형, 곧 허성, 허봉뿐만 아니라 누이인 허난설헌까지 모두 글재주가 뛰어났던 점을 감안한다면, 어린 시절 허균의 뛰어난 글재주는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허균의 학문은 친형 허봉과 누이로부터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허균은 의금부도사 김대섭의 딸과 혼인한 17세 무렵에, 귀양에서 풀려난 둘째 형에게 고문(古文)과 한유(韓愈)소동파(蘇東坡)의 시를 배웠으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다.

 

허균은 문학수업을 하던 시기에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삼당파 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이었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 당시 원주의 손곡리에 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신분이 천한 탓에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허균이 서류천인(庶類賤人)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모두 이 스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20세 되던 해 허균은 그를 아껴주던 둘째 형 허봉을 잃었다. 더욱이 생원시험에 합격한 이듬해 22세에는 그를 가장 아껴주던 누이 허난설헌마저 죽었다. 막내로서 친형과 친누이를 잃은 허균의 충격을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

24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하여 함경도 단천 땅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부인 김씨와 첫아들을 잃고 만다. 허균은 29세 되던 해 김효원(金孝元)의 딸을 재취로 맞이하였다.

 

26(1954, 선조27)되던 해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사관(史官)으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29세 때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병조좌랑으로 있던 이듬해, 황해도 도서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기생들을 그곳 임지까지 데려와 즐기고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직무를 등한히 한 죄로 부임한 지 여섯 달 만에 파직당하였다. 파직과 복직의 파란만장한 벼슬살이가 시작된 셈이다. 허균의 뛰어난 문학작품은 벼슬길에서 물러난 시련과 고난의 시기에 이루어졌다.

 

33세 때 형조정랑을 거쳐 이듬해는 사예(司藝),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36세 되던 해에는 수안군수(遂安郡守) 재직 시절 불교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두 번째 파직을 당하였다. 그는 이 무렵 불교에 빠져들어 한때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37세에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었는데 그에게 학문과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누이 허난설헌이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누이의 시집을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이듬해에 삼척부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석 달 만에 파직되었다.

 

40에 다시 공주목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서류(庶類)들과 어울렸다. 그는 처삼촌인 심우영, 이경준 등과 사귀었으며, 또한 그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광해군이 보낸 충청지방 암행어사의 감사에 걸려 또 다시 파직되었다.

 

그후 허균은 전라도 부안의 봉산(蓬山)에 내려가 그곳의 산천을 유람하였다. 이때 명기(名妓) 매창(梅窓)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원래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劉希慶)과 깊은 정을 나누고 있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를 보면 그가 매창과 시를 읊으며 즐기다가 밤이 되자 매창이 그녀의 조카딸을 자신의 침소로 들여보낸 일을 기록하고 있다.

 

41(1609) 되던 해 명나라의 책봉사신이 오자 원접사 이상의의 부름을 받아 서장관의 일을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고 이어서 형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성절사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했다가 면직되었다. 그러다가 이 해에 궁중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의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이때 자서제질사돈방(子壻弟姪查頓榜)’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박승종, 이이첨 등이 친인척을 과거에 부정으로 합격시킨 사건인데, 허균도 이때 큰형의 둘째 아들과 여서(女壻) 박홍도를 부정으로 뽑았다. 이 일로 인하여 42일 동안 옥고를 겪은 뒤 전라도 함산으로 유배당했다. 이 사건은 허균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세력이 없던 자기만 유배당했기 때문이다. 그 뒤 허균은 처세를 완전히 바꾸어 당시 대북파(大北派)의 영수로 권력을 휘두르던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며 가까이 지내게 된다. 게다가 2년 뒤 서자 출신의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의 칠서지옥(七庶之獄)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더욱 이이첨과 가까이 지냈다. 이 옥사는 박응서 등이 주동이 되어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된 것인데, 그들과 평소에 어울리던 허균은 여기서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

 

44세 되던 해, 당쟁의 회오리에 의지가 되었던 큰형 허성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허균은 이이첨과 친하게 지내면서 이이첨이 주선한 벼슬 호조참의의 신분으로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을 다녀왔고(46) 다시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사인 민형남(閔馨男)의 부사(副使)가 되어 중국에 갔다. 중국을 왕래하면서 그는 명나라의 학자들과 사귀는 동시에 태평광기뿐만 아니라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 등을 얻어 국내에 가져왔다. 두 번에 걸친 사신 일로 인해 그는 48세에 형조판서가 되어 광해군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 윤선도(尹善道)가 이이첨의 권력 남용을 탄핵하는 상소(1616)를 올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광해군은 이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첨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 폐모론을 들고 나왔다. 이 때 49세로 좌참찬(左參贊)의 직위에 있던 허균은 이이첨의 조종에 따라 폐모론을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고 그 흉계를 꾸미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허균은 유생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폐모론을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의 아들 기준적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그런데 이이첨은 허균이 광해군의 총애를 받는데다가 허균의 딸이 왕의 후궁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보고,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50세가 되던 8, 남대문에 괴서가 붙여진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이 일은 허균의 심복인 서얼 출신 현응민(玄應旻)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이이첨은 허균과 기준격을 대절심문시킨 끝에 역적 모의의 죄목을 뒤집어씌어, 허균을 그의 동료들과 함께 서쪽 저자거리에서 책형(磔刑-능지처참형)으로 죽이고 말았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 허균에 대한 평가

 

허균에 대해서는 총명하고 영민하여 시를 짓고 감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내려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목대비의 폐모를 앞장서서 주장하고 기생이나 무뢰배들과 어울려 지내는 등의 반인륜적이고 경박한 행위를 일삼는다는 이유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허균은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잦은 파직을 당하면서도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서장관으로 활동하는 등 그만큼 글재주가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허균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막내로서 부친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의 편애를 받으면서 자라 자유롭고 무절제한 생활에서 비롯된 탓도 있다. 하지만 기존의 지식 외에도 새롭고 다양한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그의 진보적인 개방성과 천재적인 능력, 개혁성과 진보성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 허균의 사상

 

허균은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불여세합(不與世合)’,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때의 세상은 기존의 완고한 중세적 질서를 말한다. 그는 벼슬살이에서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겪었다. 그는 서얼들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한 죄목으로 죽음을 당할 만큼 기존의 체제와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행위를 보여주었다.

 

홍길동전이 허균이 지었다는 사실은 택당 이식(李植)택당집별집의 기록에 근거할 뿐, 그 밖의 어느 문헌에도 더 이상 자세한 사실은 남아있지 않다.

 

허균의 정치사상은 성소부부고()’의 형식으로 된 각종 글 속에 제시되고 있는데, 대체로 내정의 개혁, 국방정책의 강화, 신분계급의 타파 등으로 정리된다.

 

허균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논설은 호민(豪民)유재(遺財)이다. 호민론에서는 위정자가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백성을 객관적 사회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정도에 따라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나누면서 이들의 저항적 잠재력을 예리하게 파악하였다. 그에 의하면 세 부류의 백성 가운데 호민은 가장 무서운 존재로, 나라의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적당한 때가 오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호민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호민이 나머지 두 부류의 백성을 모아 기존 체제에 반기를 들면 농민저항이 된다. 허균은 한나라 때의 황건적, 당나라 때의 황소, 그리고 우리나라의 견훤과 궁예가 호민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 홍길동전의 주인공 길동은 호민의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유재론에서 그는 불평등한 인재등용을 비판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의 모순된 제도 아래서 인간의 차별 문제를 부각시켰다. 그는 인재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인데, 나라에서 가문과 과거만으로 등용을 제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는 인재로서 서자와 개가한 집 자손을 들고 있다. 적서차별을 부르짖는 홍길동전이야말로 이러한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허균은 당시에 이단시되던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한 때 출가를 생각했을 만큼 불교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으며 불교를 신봉하여 자주 파직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허균은 불교적 지식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학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허균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그의 심리적인 갈등과 관련이 깊다. 그는 문파관작의 첫 번째 시에서 불교를 대하는 것은 마음이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벼슬살이에 대한 좌절과 가정적 불행에 따른 마음의 불안정을 위안받기 위하여 불교에 심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허균은 도교에 대해서는 주로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허균은 노자를 비롯하여 31열선(列仙)에 대한 찬()도 지었으며, 단학 수련에도 상당한 지식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은둔사상을 동경하여 4천 권이 넘는 중국 선가(仙家)의 서적을 발췌하여 한정록(閑情錄)으로 집대성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서학(천주교)에도 관심을 가져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이에 관한 기도문을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 허균의 문학

 

허균은 문학에 대해서 우선 감정의 자유로운 발현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남녀의 장욕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감히 어길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백성의 진솔한 감정이 토로된 국풍(國風), 곧 민용를 시도(詩道)의 정도(正道)로 삼았다.

또한 자연스런 감정을 발현하기 위하여 현실의 체험을 중시하거나 인간의 꾸밈없는 마음의 경지를 포착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문장이 부귀공명의 편안함보다는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야 더욱더 묘경(妙境)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유배생활을 통해 터득한 바이다.

 

허균은 개성을 중시하는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 역대 한시의 대가들의 글을 인용하는 의고주의(擬古主義)’를 비판하고 자기만의 글과 개성을 강조했다. 또한 개성적인 시를 쓰기 위해서는 상어(常語)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어란 당대의 일상어로 한자를 완전히 버린 것이라기보다는 비어(卑語)나 속어(俗語)를 섞어 쓴 우리말식 한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허균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우리 것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과 독창적인 문학에 대한 자각은 고루한 인식에 젖어 있던 당대 사대부의 문학관과는 상당히 달랐다.

 

. 허균의 산문

 

⓵ 『홍길동전은 허균의 친필본이나 그가 생존하던 당시와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진 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19세기나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판본만 있는데, 허균 시대와는 거의 3백 년 가량의 시간적 격차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이 과연 한글로 지어졌는지, 아니면 한문으로 지어진 것인지부터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한문본은 유일하게 서강대 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30장본)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