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정병헌· 이지영, 돌베개, 2007

.

가. 허난설헌

 허난설헌(1563~1589) 사대부 여류 시인으로 조선조 국문학 사상 여류 한시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류 한문학은 기녀가 담당했지만, 일부 사대부 여성들 가운데서도 한시에 상당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 간혹 있었다. 그 가운데 신사임과 함께 허난설헌은 조선 중엽 사대부 남성 위주의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남성들이 다루지 못하는 여인의 한과 사랑의 정서를 시에 아로새겼다. 그녀는 진취적이고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후대까지 높이 평가되는 독특한 작품의 세계를 이룩하였다.

 

. 허난설헌의 생애

 

 허난설헌의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며, 난설헌은 그녀의 호이다. 본관이 양천(陽川)으로, 부친은 학자요 문장가로 유명한 초당(草堂) 허엽(許曄)이다. 초당공은 첫째 부인 한씨로부터 아들 허성(許筬)과 두 딸을 얻었고, 둘째 부인 김씨로부터 허봉(許篈) 허난설헌 허균을 얻었다. 난설헌은 부친이 강릉부사로 재직할 때 강릉의 초당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8세 때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난설헌이 글에 관심을 보이자 친오빠인 허봉은 누이동생을 직접 가르쳤다. 봉은 누이를 자기의 글 친구인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때 허균도 함께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오빠와 이달을 통한 문장 수업은 그녀의 작품 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첫째 난설헌이 당대의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둘째로 중국의 당시를 익힘으로써 당시풍(唐詩風) 시를 짓게 되었다.

난설헌이 가진 문학적인 자질은 허문(許門)에서 싹트고 닦아졌지만, 남성 문인들처럼 열린 공간에서 발휘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작품을 가다듬고 만들어낸 공간은 규방이었다.

 

14,15세 무렵 한 살 위인 안동 김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다. 김성립의 집안 사람들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으나, 막상 그는 능력이 변변치 못했던 듯하다. 그는 난설헌이 27세로 죽은 해에야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도 정8품인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다.

 

 난설헌은 남편과의 금슬이 좋지 못하였다. 그녀는 결혼 생활 초부터 남편이 글공부에만 매달려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게다가 벼슬이 없던 남편은 똑똑한 부인을 외면하였다.

무엇보다도 난설헌은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컸다. 그녀가 바느질이나 살림보다 독서와 글짓기를 좋아했으니, 이런 며느리를 곱게 봐줄 리 없었다. 그런데 시가(媤家)에서의 고통과 불화는 어쩌면 그녀의 성격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그것은 허씨 가문의 사람들이 대체로 남들과의 관계에서 조화롭게 지내지 못했다는 지적 때문이다. 허엽, 허성, 허봉 등은 직언을 잘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적이 많았고, 허균도 경솔하고 경박하다는 평을 받았다.

 

 허난설헌의 가슴에 맺힌 한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이 넓은 세상에 하필 조선에 태어났는가, 또 하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마지막으로 왜 수많은 남자 가운데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한편, 그녀가 의지할 곳은 자식밖에 없었겠지만 두 아이는 일찍이 차례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잃었다.

 

 난설헌은 가정적인 불행을 겪으면서 독서와 글짓기에 몰두하였다. 그녀가 지어낸 한시는 대부분 이러한 규방의 공간을 통해 배출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갇혀 있는 규방에서 사랑의 그리움과 울분을 시로 읊어갔다. 남편이 아내를 멀리하고 화류계의 여자들과 놀아날 때, 그녀는 한편으로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그리움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미움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이렇게 불행한 결혼 생활뿐만 아니라, 친정집의 불행까지 잇달아 닥쳐왔다. 부친 허엽은 그녀가 18세 때 경상감사 벼슬을 마치고 서울로 오는 도중에 상주 객관(客館)에서 죽었고, 오빠 허봉은 그녀가 21세 때 갑산으로 귀양을 갔다. 허봉은 3년 만에 유성룡과 노수신(盧守愼)의 노력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난설헌이 죽기 1년 전에 객사하고 말았다. 벼슬에 뜻이 없어 백운산에 들어가 글을 읽으며 자연을 즐기다가, 술이 지나쳐 병을 치료하러 산을 나왔다가 금화현의 생창역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허봉은 동인(東人)으로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 선조 16(1583)에 귀양을 갔다.

 

 그나마 동생 허균마저 귀양을 가게 되어 그녀에게는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녀는 27(1589)의 짧은 나이로 그만 꽃다운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그동안 자신이 써두었던 시문을 모두 태워버리라고 유언하였다. 따라서 그녀가 지어 직접 모아두었던 많은 시편들은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나이 27세 되던 해에 홀연히 의관을 정제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 9의 수(27)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눈을 감았다고 한다. 패림(稗林)이순록(二旬錄)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연꽃 스물 일곱 송이는 그녀의 향년 연수와 같으니, 실로 자신의 죽을 나이를 예견한 시참(詩讖)’이라 할 만하다.

 

 난설헌에게 한을 남겼던 남편 김성립은 부인이 죽은 그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곧바로 남양 홍씨와 결혼했으나 요절하 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병을 막다가 31세의 나이로 전사한 것이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의관만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재혼한 탓에 남양 홍씨와 합장되었다. 허난설헌은 죽어서도 혼자 누워 있게 된 셈이다.

 

. 허난설헌의 문학 세계

 

 난설헌의 작품은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그러나 현재 전해오는 작품들은 그녀의 친정에 보관되었던 것을 허균이 문집으로 엮은 것이다. 허균이 난설헌 시집을 처음 엮은 것은 난설헌이 죽은 지 1년 뒤인 1590년으로, 그는 유성룡의 발문(跋文)을 붙여 아는 이들에게 몇 부 필사하려 돌렸다. 그후 1598년 정유재란의 원군(援軍)으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편을 외워주었다. 나중에 오명제는 중국으로 돌아가 조선시선(朝鮮詩選)을 엮었는데, 다시 이를 저본으로 삼아 열조시집(列朝詩集)명시종(明詩綜)등에 차례로 실렸다.

 

 허균은 또한 1606년에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정사(正使) 주지번(朱之蕃)과 부사(副使) 양유년(梁有年)이 들어오자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접대하면서, 누님의 시를 중국에 알리기 위해 난설헌고초고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하여 주지번에게는 소인(小引), 양유년에게는 제사(題辭)를 얻게 되었고, 그는 이것들을 묶어서 16084월에 공주목사로 재직하던 도중 그곳에서 난설헌집을 출간하였다. 중국에서는 난설헌의 문집이 발간되어 대단한 평판을 받았다.

 

 현재 전해오는 대부분의 난설헌 문집의 판본은 1692(숙종 18)에 동래부(東萊府)에서 중간(重刊)된 것이다. 난설헌집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전해져 1711(숙종 37)에 분다이야에 의해 간행되었다. 또한 1913년에는 안왕거가 허경란의 경란집부록으로 붙여 신활자본으로 서울의 신해음사에서 다시 발간하였다.

 

 문집에 전하는 작품을 보면 시가 210, ()1, 그리고 산문이 2편인데, 이 가운데 칠언절구 시가 142편으로 작품 수가 많은 편이다. 이 밖에도 다른 문헌에 그녀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작품들이 몇 편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문집 속에 있는 작품들이 진짜 난설헌의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조선조 문인들이 약간의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들이 중국시의 표절이라는 신흠의 주장과, 일부 중국 시인의 작품이 첨가되었다는 김만중의 주장, 그리고 허균이 위작했을 것이라는 이수광의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들이 중국시의 표절이라면 중국인들이 그녀의 작품을 보고 문집을 간행할 때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들 주장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허난설헌의 남아 있는 한시 작품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들이 발견된다. 첫째,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을 초탈하려는 염원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시에는 신선이라는 낱말이 자주 등장하다. 시속에 등장하는 선계(仙界)는 가정적인 불운을 현실적으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초탈의 염원을 드러낸 이상세계라 할 수 있다.

 

 둘째로 난설헌의 시를 보면 여성의 삶의 고뇌와 고민을 드러내며, 또한 다른 미천한 여성의 처지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녀의 시에는 여성 특유의 사랑의 감정이 잘 드러난다. 애정을 다룬 시들은 자식과 형제간의 사랑을 읊은 시들과, 남녀간 사랑의 감정을 읊은 시들로 다시 나누어진다.

 

 셋째로 난설헌은 당대의 사회적인 현실 문제를 비판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곧 백성의 다양한 군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장사꾼들의 애환을 그리거나, 유흥가 내지는 유곽가를 노래한다. 더러는 변방에 출정나간 군사들의 사정이나 성을 쌓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대사회적인 관심은 규방에서 지내는 사대부 여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일부 논자들은 난설헌이 이들 시를 과연 지었을까 하는 의심을 눈길을 보내고 있다

 

난설헌은 규원가, 봉선화가를 남긴 작가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을 그녀가 지은 것으로 보는 데에는 아직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규원가의 경우 고금가곡(古今歌曲)에서는 그녀의 작품이라 하였지만, 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에서는 허균의 첩인 무옥(巫玉)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가람 이병기는 난설헌의 한시 소년행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보는 데에 동의한다.

 

그리고 봉선화가정일당잡지(貞一堂雜誌)에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데, 이를처음 소개한 가람 이병기는 내용상 난설헌의 염지봉선화가」 ‧ 「선요(仙謠)」 ‧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의 일부 구절과 같다는 이유를 들어 그녀의 작품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을 정일당 김씨가 지었다는 주장도 많은 편이어서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조선 역사 속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계사 - 작자 미상  (0) 2023.03.21
소대성전 – 작자 미상  (2) 2023.03.15
허균 - 그저 홍길동전 작가로만 알기에는 파란만장한 그  (0) 2022.08.24
이생규장전(전문)  (0) 2020.07.15
김시습  (0) 2020.07.1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