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정약용(丁若鏞, 1762 1836)은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사상가자이자 학자이면서 또한 문학가이기도 하다. 그의 학문의 영역은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문학, 철학, 의학, 군사, 자연과학, 교육 등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누적되어 있던 왕조의 질서와 사회제도 및 법률, 그리고 유교 이념의 모순이 폭발하여 국가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아울러 동요하고 있는 조선 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새로운 질서와 제도들이 요청되는 시기였다. 정약용은 젊은 시절에는 정치의 중앙무대에서 정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으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그러나 40세부터 무려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유배 시절의 대부부을 경전 연구와 집필을 통하여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57세 때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와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더 이상 중앙무대에 나아가지 않고 저술 활동에만 몰두하였다. 이로 미루어 벼슬길에 나선 10여 년을 제외하면 그의 전 생애는 집필을 통해 우리 민족사에 커다란 기여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2. 정약용의 생애

 

정약용의 자는 미용(美庸)이요, 호는 사암(俟菴)다산(茶山)자하도인(紫霞道人)이고, 본관은 나주이다. 그의 부친은 진주목사 재원(載遠)이며 모친은 해남 윤씨로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1726년 광주군(廣州郡) 초부방 마재리(지금의 남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소내는 다산이 75세의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10여 년의 벼슬살이와 18년의 귀양살이 기간을 제외한 40여 년 동안을 머물러 살았던 곳으로, 그에게 제1의 정신적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던 강진의 다산초당은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을 만큼 중요한 정신적 고향이었다. 원래 다산의 선조는 조선 초에 서울에 살면서 8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를 내었으나, 그의 고조 도태가 당쟁을 피하여 경기도의 마재로 이사한 후 그곳 소내에 사는 동안 조부까지 3대가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가 부친인 재원에 이르러서야 음사(蔭仕)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한강변에 있는 마재의 소내는 한국 천주교 초창기에 이름을 날렸던 인물들과도 관계가 깊다. 이는 다산의 집안이 당시 천주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맏형 정약현(丁若鉉)은 천주교 보급에 앞장섰던 이벽(李蘗)의 매부이며, 황사영(黃嗣永)의 장인이기도 하다. 황사영은 약현이 사위로서 청나라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부터 신유옥사(辛酉獄事)까지의 교세 및 박해 상황을 북경에 알리려다 발각된 소위 황사영 백서사건의 장본인이다.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은 병조좌랑의 벼슬을 지내다 은퇴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한 학자로 천주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옥사 때에 연좌되어 전라도 신지도(薪智島)로 귀양 갔으며, 다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흑산도에 이배되었는데 끝내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막내 형인 정약종(丁若鍾)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전교회장(傳敎會長)으로 신유옥사 때 참수되었다. 특히 약종의 큰아들 철상은 아버지와 같이 죽었으며, 약종의 부인 유소사와 아들 하상, 그리고 딸 정정혜는 1839년의 기해(己亥)옥사 때 죽임을 당했다. 이 때 순교한 이들 세 가족은 1984년에 천주교의 성인으로 부여된 우리나라 103위 가운데 한 분들이다. 또한 다산의 누이와 결혼한 이승훈(李承薰)은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갔다가 그곳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1783년에 천주교 영세를 받아 다음해에 귀국하였다. 그는 명동에 최초의 교회를 세워 포교활동을 하였는데, 1801년 신유옥사 때 참수당하였다.

 

다산 역시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중대한 전한점을 제공하였고 아울러 그에게 커다란 시련을 겪게 하였다. 그는 23세 때 큰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오던 두미협의 배 안에서 이벽(李蘗)을 통하여 둘째 형 약전과 함께 처음으로 서교(西敎)에 대하여 듣고 한 권의 책을 읽어보게 되어다. 정약용이 훗날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천주교를 알게 된 뒤 상당히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과거공부에 열중한데다가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는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15(1776) 되던 해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남인계 풍산(豐山) 홍화보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의 결혼은 자신의 일생에 아주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것은 이 해에 영조의 뒤를 이러 정조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정조는 등극하자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옹호했던 남인계의 시파(時派) 인물들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남인계였던 다산의 아버지도 음사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리고 정약용도 21세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 근처에 형제들과 함께 머무르면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22세 때 비로소 소과(小科)에 합격하였고, 태학(太學)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28(1789)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은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거나 수원성을 설계하고 기중기를 만들어 성을 쌓는 일에 공을 세웠다. 33세에는 경기도 암행어사의 직책을 맡게 되면서 조선 말기 사회상과 백성의 어려운 삶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정약용을 시기하는 무리들은 그를 천주교 신자라고 몰아붙여 그의 벼슬살이를 마감하게 만든다. 남인의 시파는 다시 천주교에 우호적인 신서파(信西派)와 이를 비판하는 공서파(攻西派)로 나뉜다. 그런데 1795년 청나라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고 둘째 형 약전이 연좌되면서,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라는 공서파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정조는 이에 다산을 충청도의 호우목의 금정도찰방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 뒤 정조는 정약용을 다시 동부승지로 불러앉혔으나 공서파의 맹렬한 비방에 왕도 어쩔 수 없이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하여 2년 동안 있게 하였다. 곡산에 가기 전 정약용은 천주교와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왕에게 자세히 아뢰었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에 있다가 형조참의를 마지막으로 11년 동안의 벼슬살이를 그만두었다.

 

39세인 1800년 봄에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마재의 소내로 돌아왔다. 그러던 중 그를 총애하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벽파(辟派)에 속하던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공서파는 신서파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찾다가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신유옥사이다. 이 옥사로 다산의 셋째 형 약종은 죽임을 당했고, 둘째 형 약전은 신지도로, 그리고 다사은 장기현(지금의 경북 영일군 장기면)으로 유배되었다. 게다가 유배된 그 해 가을에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났다. 황사영이 북경의 주교 구베아에게 신유옥사의 일을 알리기 위하여 비단에 박해의 전말과 그 대책을 기록하여 몰래 전하려다가 관원에게 발각된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천주교의 탄압을 더 한층 엄하게 하였다. 결국 다산과 약종은 이 사건 뒤에 서우로 압송되어 다시 천죽 관계를 문초받았다. 그러나 혐의가 없던 다산은 다시 강진으로 귀양 보내졌고, 그의 형 약전은 머나먼 흑산도로 보내졌다. 그리고 약전은 다시는 육지를 밟아보지 못한 채 1816년에 고향과 귀양간 동생을 그리워하다 그곳에서 죽었다.

 

따로 이은 주막집 새벽 등잔불이 어스름해

잠자리 일어나 샛별 바라보니 이별할 일 암담하다.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묵묵히 두 사람 말이 없네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눈물나네. -율정별(栗亭別)

 

정약용과 형 약전은 함께 유배지로 가다가 나주 북쪽 5리쯤에 있는 율정 주막에 이르렀다. 율정은 목포와 해남으로 갈리는 삼거리에 있었다. 이제 하룻밤을 묵고 나면 기약없이 헤어져야 했다. 112일 형과 동생은 목인 메인 채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 뒤 형은 불귀의 혼이 되어 다시 그곳을 지나갔고 다산도 형이 죽은 3년 뒤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산이 유배지 강진의 동문 밖 주막에 도착하여 귀양살이를 시작할 때는 사람들이 그를 만나주지도 않고 피했다고 한다. 그는 그 주막을 생각과 용모, 언어와 행동 이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한다는 뜻으로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짓고는 두문불출하였다. 그곳에서 술집 노파의 도움을 받으면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게 되었다.

 

4년 뒤인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뒷산인 보은산방의 고성암으로 거처를 옮겨 주역의 연구에 몰두하였고, 다시 이듬해에는 읍내에 살던 제자인 이청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기를 찾아와 배움을 구한 황상(黃裳), 이청 등을 제자로 삼아 학문을 가르쳤다. 그들은 다산이 어려울 때 몰래 도우면서 학문을 익혀 큰 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신계의 일원으로 참여하였으며 다산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해마다 햇차를 스승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다신계는 다산이 귀양에서 풀려나자 18명의 제자와 강진에 있는 여섯 제자를 모아 만든 일종의 학문 토론 모임이다.

 

1808년에는 강진현 남쪽 만덕산 서쪽에 있던 처사(處士) 윤단의 산정(山亭)으로 옮겨 살았다. 그곳이 바로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지금의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 마을 뒷산에 위치한다. 그는 산의 이름을 호로 삼아 다산(茶山)’이라 하였는데, 그곳의 좌우에 동암(東庵)과 서암(西庵)을 지은 뒤 동암에 1천여 권의 책을 두었다. 지금의 다산 초당은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7년에 기와집으로 복원한 것이며, 동암과 서암은 1974년에 복원되었는데 이때 새로이 천일각이 지어졌다.

 

다산초당에 거처하도록 도와준 윤단은 원래 해남 윤씨로 다산의 외가 쪽 사람이었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그녀는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공재가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니, 다산에게 귤동 마을의 해남 윤씨들은 외가 친척들인 셈이다. 윤단의 아들들인 윤문거(尹文擧) 삼형제는 정약용을 다산으로 초빙하였고, 그들의 아들과 조카들은 다산으로부터 글을 배웠따. 그와 함께 다산은 초당으로 옮긴 이후로는 해남 연동리에 있는 외가에서 그들의 도움으로 많은 책을 빌려 볼 수 ㅇㅆ었다.

 

다산은 초당의 천일각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근처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종종 찾아가 혜장선사(惠藏禪師, 1772-1811)와 교류하였다. 혜장은 다산이 강진 읍내의 주막집인 사의재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로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다산은 그에게 차()를 배웠다. 다산이 유배 초기에 거처를 사의재에서 보은산방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도 혜장선사의 덕이었다고 한다.

 

다산은 또한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도 교류하였다. 23세나 위인 다산은 그를 제자로 삼아 유학을 가르치며 훈계하였다. 초의선사는 시문과 서화에도 능통한 승려로, 다도(茶道)에 일가견을 이루었다. 다산은 유배지 근처 만덕산의 백련사와 해남 대둔산의 대흥사 승려들과도 교류하였다.

 

57세인 1818년 봄에 목민심서를 완성하였는데 이 해 8월 여름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리고는 92일 강진의 다산을 떠나 914일 처자식이 있는 고향 땅 소내로 돌아왔다.

 

그 후 다산은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여생을 고향 땅 처자식들 곁에서 편안히 보내다가 1836년에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3. 다산의 문학 세계

 

. 자주적 조선시의 선언

 

다산은 시에 대하여 시가 성정(性情)을 도야하는데 중요하다고 보면서 그것이 사람의 깨끗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산이 말하는 참된 시란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를 옹호하고, 어지러운 사회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가 도에 근본을 둔 인륜시와 날카로운 사회비판의 사회시를 많이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악에 대한 풍자와 고발을 통하여 사회를 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젊은 시절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백성들의 현실에 눈을 뜨면서 강해졌다. 그리고 유배지 강진에서 백성들의 참혹한 삶과 함께하면서 이러한 의식들은 시로 형상화되었다.

 

다산의 문학론에서 중요한 것은 자주적 조선시를 선언한 주체적 문학정신이다.

 

노인의 즐거운 일 하나는

붓 가는 대로 마음껏 시를 쓰는 것.

어려운 운자에 신경 안 쓰고

고치고 다듬느라 늦지도 않네.

흥이 나면 뜻을 싣고

뜻이 이루어지면 바로 시를 쓰네.

나는 조선 사람이기에

즐거이 조선시를 쓴다.

그대들은 마땅히 그대의 법을 따르면 되지

시 짓는 법이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가 눈군가.

까다로운 중국시의 격과 율을

먼 곳의 우리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하략)

 

-노인일쾌사6수 효향산체(老人一快事六首效香山體)

 

71세인 다산이 지은 시로, “조선인의 기호와 성정에 일치되는 조선시를 써야만 참다운 시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문학의 주체성과 자아확립을 주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한자로 시를 쓰면 온전한 우리의 감흥을 드러낼 수 없다는 퇴계 이황이나 서포 김만중의 생각과 일치한다. 이러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다산은 일찍부터 시를 지을 때 중국의 고사를 찾아 쓰는 일에서 벗어나 삼국사기나 우리의 고문헌, 그리고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일어난 이야기를 소재로 쓸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 풍속과 역사 속에서 시적 소재를 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다산의 선배들인 성호 이익이나 연암 박지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양반 자제들이 조선의 고사를 모르면서 유독 중국의 것만을 선호하는 풍조를 비판하면서, 우리나라 선배들의 문헌을 직접 읽으라고 권장하기까지 하였다. 그가 아들에게 읽기를 권한 필독서를 보면 역사, 지리서, 문집류 외에도 야사(野史), 의학서, 농학서, 상소문 등도 눈에 띈다.

 

실제로 다산의 시 중에서 악부시(樂府詩)는 조선의 역사와 풍속, 현실을 소재로 삼았으며, 조선의 고유한 언어를 한시의 언어로 활용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지어져 서울에까지 널리 알려진 탐진악부는 민요적 취향이 드러나고 우리말이 시어로 잘 활용되고 있다. 특히 그는 현지의 토속적 방언을 그대로 시어로 쓰고 있는데, ‘麥嶺’(보릿고개), ‘兒哥’(아가:새색시), ‘馬兒風’(마파람), ‘絡蹄(락제)’(낙지) 등은 한자어로 되어 있지만 우리말의 음에 따라 바꾸어 놓은 것이다.

 

. 사회 비판의 시들

 

다산은 자신이 살았던 조선 후기 당대의 제반 모순을, 단순히 관념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제 현실 생활 속에서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는 당쟁의 치열함, 인재 선발의 폐해와 부조리, 三政의 문란 등을 비판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당쟁의 화는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이런 일은 참으로 통곡할 만하다. (....)

다투는 기운이 맑은 하늘을 가리고

티끌만한 일로도 살육을 일삼으니,

새끼 양은 죽어도 소리 한 번 못 치는데

승냥이와 호랑이는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뜬다.

높은 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갈고

낮은 자는 화살촉을 갈고 있네.

누가 있어 큰 잔치 베풀어

화려한 집에 휘장을 치고,

천 동이의 술을 담고,

만 마리 소를 잡아 안주 만들어,

옛 감정 풀고 함께 맹세하여

복과 평화 오기를 기약할 건가. -고시27

 

다산이 경상도 장기 유배지에서 쓴 시로 망국적인 당파싸움을 비판하면서 누군가 나서서 묵은 감정을 풀어 태평한 세월이 오기를 갈구하고 있다.

 

가마 메는 너나 타는 나는 본래 한 동포

하느님으로부터 형등함을 받았네.

너희들은 어리석게 이런 일 달게 여기니

내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

가마 메는 중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요,

가마만 메야 하는 백성들은 가련하구나.

큰 깃대 앞세우고 쌍마교 나타나서

촌마을 사람들 모조리 동원하니,

닭처럼 내몰고 개처럼 부리면서

소리치고 꾸중하기 범보다 더 심하네 (.....)

기진하여 논밭에 돌아오면

지친 몸 신음소리 실낱 같네.

가마 메는 그림을 그려서

돌아가 어진 임금에게 바치고 싶네.

- ‘견여탄의 뒷부분

 

이 시는 다산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71세에 쓴 시로 관리들이 명산에 유람 오면 승려들이 그들을 가마에 태우고 험한 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고통을 그리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나은 편이며 백성들은 더욱 더 고통스러워한다고 곱ㄹ하고 있다. 어진 임금에게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알리고자 하는 마음에는, 돌아가신 정조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어진 임금이 없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이다.

 

잘 자라던 내 모를

내 손으로 뽑아야 하다니.

무성하게 자라던 내 모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다니.

잘 자라던 내모를

잡초처럼 뽑다니.(....)

나에겐 아들 셋이 있어

젖 먹고 밥 먹고 있으니

아들 하나 제물로 바쳐서

이 어린 모를 살렸으며.

- 발묘(拔苗)

 

못자리의 모를 가뭄 때문에 심지 못하고 대신 다른 것을 심기 위하여 모를 뽑는 농부의 심정을 그리고 있다. 어떤 부인은 하도 원통하여 아들 하나를 바쳐서라도 비를 오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다산이 유배지에서 본 가뭄의 참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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