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엔 수록 부분]

 

앞부분 줄거리

 조선에서 3·1 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 겨울(제목과 관련). 일본에서 유학 중인 '나'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향한다. 늘 아프던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는데도 '나'는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는다. 기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다는 이유로, 단골 카페에 가 그곳에서 일하는 정자를 만나 술을 마시거나 음악 학교 선생을 만나며 늑장을 부린다. 귀국하는 배에 올라서는 미행하는 일본 형사에게 계속 시달리면서 울분을 삭인다. 그러다가 '나'는 일본 형사를 피해 배 안의 욕실(浴室)로 들어간다. 

 

 “어쨌든 십 년(국권 피탈 후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름.)이라면 한밑천 잡으셨겠구려.” / 이번에는 상인 비슷한 자가 입을 벌렸다.

 “웬걸요, 이젠 조선도 밝아져서 좀처럼 한밑천 잡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어때요?”

 “요보(일본인이 한국인을 낯추어 부르던 호칭) 말씀요?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마는, 촌에 들어가면 대만(臺灣)의 생번(生蕃-대만의 고산족 가운데 야생 생활을 하는 종족을 낮추어 부르던 이름.)보다는 낫다면 나을까. 인제 가서 보슈…… 하하하.”

대만의 생번이란 말에, 그 욕탕 속에 들어앉았던 사람들은 나만 빼놓고는 모두 껄껄 웃었다. 그러나 나는 기가 막혀 입술을 악물고 쳐다보았으나(조선인을 비웃는 행동에 분노를 느끼나 소극적으로 표출함), 더운 김이 서리어서 궐자('그'를 낮잡아 이르는 말)들에게는 분명히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욕객은 차차 꾸역꾸역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말이지,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憂國志士-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사람.)는 아니나 자기가 망국(亡國) 백성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기는 하다. 학교나 하숙에서 지내는 데는 일본 사람과 오히려 서로 통사정을 하느니만치 좀 낫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의 고통은 참을 수 없는 때가 많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망국 백성이 된 지 벌써 근 십 년 동안, 인제는 무관심하도록 주위가 관대하게 내버려두었었다. 도리어 소학교시대에는 일본 교사와 충돌을 하여 퇴학을 하고 조선 역사를 가르치는 사립학교로 전학을 한다는 둥, 솔직한 어린 마음에 애국심이 비교적 열렬하였지마는, 차차 지각이 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는 간혹 심사 틀리는 일을 당하거나 일년에 한 번씩 귀국하는 길에 하관에서나 부산경성에서 조사를 당하고, 성이 가시게 할 때에는 귀찮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지마는, 그때뿐이요, 그리 적개심이나 반항심을 일으킬 기회가 적었었다. 적개심이나 반항심이란 것은 압박과 학대에 정비례하는 것이나, 기실 그것은 민족적으로 활로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칠 년이나 가까이 일본에 있는 동안에, 경찰관 이외에는 나에게 그다지 민족관념을 굳게 의식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래 정치 문제에 흥미가 없는 나는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썩여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하여도 가할 만큼 정신이 마비되었었다. 그러나 요새로 와서 나의 신경은 점점 흥분하여 가지 않을 수가 없다(조금씩 의식의 변화가 나타남). 이것을 보면 적개심이라든지 반항심이라는 것은 보통 경우에 자동적, 이지적이라는 것보다는 피동적, 감정적으로 유발되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일본 사람은 지나치는 말 한마디나 그 태도로 말미암아 조선 사람의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를 구하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원동력이 될 뿐이다.

 

 지금도 목욕탕 속에서 듣는 말마다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지마는, 그것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조선 사람이 듣고, 오랜 몽유병에서 깨어날 기회(조현실을 자각하는 계기)를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자아낼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래 촌에 들어가면 위험하진 않은가요?” / 조선에 처음 간다는 시골자가 또다시 입을 벌렸다.

 “뭘요, 어딜 가든지 조금도 염려 없쇠다. 생번이라 하여도 요보는 온순한데다가 가는 곳마다 순사요 헌병인데 손 하나 꼼짝할 수 있나요. 그걸 보면 데라우치(寺內)상이 참 손아귀 힘도 세지만 인물은 인물이야!”

매우 감격한 모양이다.

 “그래 촌에 들어가서 할 게 뭐예요?”

 “할 것이야 많지요. 어딜 가기로 굶어죽을 염려는 없지만, 요새 돈 몰 것이 똑 하나 있지요. 자본 없이 힘 안 들고…… 하하하.”

표독한 위인이 충동이는 수작이다.

 “그런 벌이가 어디 있어요?”

촌뜨기 선생은 그 큰 눈을 더 둥그렇게 뜨고 큰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마주 쳐다보는 모양이다.

 “왜요, 한번 해보시려우?”

그는 이렇게 한마디 충동이며, 무슨 의미나 있는 듯이 그 악독하여 보이는 얼굴에 교활한 웃음을 띠고 한참 마주 보다가,

시골서 죽도록 땅이나 파먹다가 거꾸러지는 것보다는 편하고 재미있습넨다. 게다가 돈은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고.”

여전히 뱅글뱅글 웃으면서 이 순실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그대로 있는 듯한 촌뜨기를 꾄다.

그런 선반에서 떨어지는 떡 같은 장사가 있으면 하다뿐이겠나요.”

촌뜨기는 차차 침이 괴어 오는 수작이다.

그러나 밑천이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지요. 우선 얼마 안 되지만 보증금을 들여놓아야 하고, 양복이나 한 벌 장만하여야 할 터이니까. 그러나 당신이야 형님이 헌병대에 계시다니까 신분은 염려 없을 테니 보증금은 없어도 좋겠지.”

제딴은 누구를 큰 직업이나 얻어 주는 듯싶이, 더구나 보증금은 특별히 면제하여 주겠다는 듯이 오만한 태도로 어깨를 뒤틀며 호기만장이다. 일편 촌뜨기는 양복신사가 돼야 하는 직업이라는 데에 속으로 헤에 하는 기색이다. 그러나 정작 그 직업의 종류가 무엇인가는 좀처럼 가르쳐 주지 않는다. 실상 곁에서 엿듣고 앉았는 나 역시 궁금하지만, 이러한 소리를 듣는 시골 궐자는 더한층 호기의 눈을 번쩍이며 앉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을 토설치(토설하다- 숨겼던 사실을 비로소 밝히며 말하다.) 않는 것은 나와 그 외의 두세 사람이 들을까 꺼리어서 그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그 시골뜨기가 좀 더 몸이 달아 덤비며 자기의 부하가 되겠다는 다짐까지 받고서야 이야기하려는 수단 같기도 하다.

 “그래 그런 훌륭한 직업이 무엇인데, 어디 있단 말요?”

이번에는 그 시골자의 동행인 듯한 사람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욕탕에서 시뻘겋게 단 몸뚱어리를 무거운 듯이 끌어내며 물었다. 그자도 물 속에서 불쑥 일어서서 수건을 등뒤로 넘겨서 가로잡고 문지르며 한번 목욕탕 속을 휘 돌아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의 이야기에는 무심히 이구석 저구석에서 멱을 감는 것을 살펴본 뒤에, 안심한 듯이 비로소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벌린다.

 “실상은 누워 떡먹기지. 나두 이번에 가서 해오면 세 번째나 되오마, 내지(외국이나 식민지에서 본국을 이르는 말. 여기서는 '일본'을 뜻함.)의 각 회사와 연락해 가지고 요보들을 붙들어 오는 것(일본의 회사외 연락해서 조선 노동자를 속여 뽑아 오는 것)인데, 즉 조선 쿨리(苦力- 쿠리: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하층의 중국인, 인도인 노동자. 여기서는 중노동에 종사하는 하층 노동자를 이름.) 말씀요. 농촌 노동자를 빼내 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대개 경상남북도나, 그렇지 않으면 함경, 강원, 그 다음에는 평안도에서 모집을 해오는 것인데, 그 중에도 경상남도가 제일 쉽습넨다, 하하하.”

그자는 여기 와서 말을 끊고 교활한 웃음을 웃어 버렸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불쌍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과 광산으로 몸이 팔리어 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옳지 아니한 방법으로 남을 속임.)부랑배의 술중(術中-남의 꾀 속.)에 빠져서 속아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한번 그자의 상판때기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옳지! 그래서 이자의 형이 헌병 군조라는 것을 듣고 이용할 작정으로 반색을 한 게로군!’

나는 이런 생각도 하여 보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앉았었다.

 궐자는 벙벙히(어리둥절하여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다.) 듣고 앉았는 그 두 사람의 얼굴을 이리저리 바라보고 빙긋 웃으며 또다시 말을 잇는다.

왜 남선 지방에 응모자가 많고 북으로 갈수록 적은고 하니, 이 남쪽은 내지인이 제일 많이 들어가서 모든 세력을 잡았기 때문에, 북으로 쫓겨서 만주로 기어들어가거나 남으로 현해탄(玄海灘) 건너서거나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길밖에 없는데, 누구나 그늘(북쪽)보다는 양지(남쪽)가 좋으니까, 요보들 생각에도 일년 열두 달 죽도록 농사를 지어야 주린 배를 채우기는 고사하고 보릿고麥嶺에는 시래기죽으로 부증이 나서 뒈질 지경인 바에야, 번화한 동경, 대판(오사카)에 가서 흥청망청 살아 보겠다는 요량이거든. 그러니 촌의 젊은 애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계집애들까지 나두 나두 하고 나서거든. 뭐 모집이야 쉽지!”

 “…… 그럴 거야!”

 “아직 북선 지방은 우리 내지인이 덜 들어갔기 때문에 비교적 편안히 사니까 응모자가 적지만, 그것도 미구불원에 쪽박을 차고 나설 거라, 허허허.”

이자는 자기 설명에 만족한 듯이 대단히 득의만면이다.

 “그래 그렇게 모집을 해가면 얼마나 생기나요?”

촌뜨기는 구수하다는 듯이 침을 흘리며 듣는다.

 “얼마가 뭐요. 여비가 있지, 일당이 또 있지, 게다가 한 사람 모집하는 데에 일 원서부터 이 원이니---그건 회사와 일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지만, 가령 방적회사의 여직공 같은 것은 임금도 싼데다가 모집원의 수수료도 헐하고, 광부 같은 것은 지금 시세로도 일 원 오십 전으로 이 원 오십 전까지라우. 가령 천 명만 맡아 가지고 와서 보구려. 이삼 삭 동안 여비나 일당에서 남는 것은 그까짓 건 다 그만두고라도 일천오륙백 원, 근 이천 원은 간데없는 것일 게니, 그런 벌이가 이판에 어디 있소? 하하하. 나도 맨 처음---그건 제주도에서 모집하여 갔지---그때에 오백 명 모아다 주고 실살고로 남긴 것이 천 원이었고, 둘째 번에는 올 가을 팔백 명이나 북해도 족미(足尾)탄광에 보내고 이천 원 돈이 들어왔다우.”

노동자 모집원이라는 자는 입의 침이 없이 천 원, 이천 원을 신이 나서 뇌며 목욕탕 속에서 나왔다.

 

 

뒷부분 줄거리

 

 배로 부산에 도차갛자마자 또 한 번 이런저런 조사를 받고 거리로 나선 '나'는 조선의 참담한 현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놀란다. '나'는 김천역에 내려 형을 만난다. 형은 전처가 아들을 못 낳아서 새로 아내를 맞이했다고 말하였는데('나'가 조선의 인습으로 여기는 요소 - 아들 지상주의) '나'는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형은 총독부 법에 의해서 지금부터 무덤은 공동묘지밖에 쓸 수 없다고 말하며 산소 걱정을 한다.('나'가 조선의 인습으로 여기는 요소- 공동묘지법을 이해하지 못함) '나'는 집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집안 식구들의 만류로 발이 묶인다. 집안이고 사회고 조선 전체가 구더기 끓는 공동묘지('나'가 당시 조선 사람들의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며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무덤'에 비유) 같다고 생각하는 '나는' 사랑보다 연민이 앞섰던 아내를 가련하게 여기며 탈출하듯 다시 동경으로 떠난다.(현실에서 도피하는 '나' → 소극적이고 무책임한 당시 지식인의 모습)

 

 

 

핵심 정리

 

1. 갈래 - 현대 소설, 사실주의 소설, 여로형 소설

2. 성격 - 사실적, 현실 비판적

3. 배경 - 시간 : 1918년 겨울/ 공간 - 동경에서 서울로 오가는 여정

4. 주제 - 동경 유학생의 눈에 비친 조선의 현실

5. 구성 

         발달 - 동경 유학생인 '나'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귀국 준비를 함.

         전개 - '나'는 신호, 하관 등의 술집을 전전하면서 답답한 심정을 드러냄.

         위기 - '나'는 배 안에서 조선인을 멸시하는 일본인들의 대화를 듣고 분개함.

         절정 - '부산 → 김천 → 서울 → 집'으로 이동하면서 조선이 처한 현실을 관찰하고 울분을 느낌.

         결말 - 결국 아내는 죽고, '나'는 죽은 아내를 위해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다시 동경으로 돌아감. 

6. 특징

               - 원점 회귀의 여로형 구조를 취함.

               -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보여 줌. 

               - 현실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지식인의 한계가 드러남.

 

7. 해제

  이 작품은 1919년 3·1 운동 이전의 일제 강점기 초기에 일제에 의해 고통을 겪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비판적 시각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묘지(墓地)'라는 제목으로 연재되던 이 작품은 잡지가 폐간되면서 잠시 중단되었다가, 1934년 <만세전>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다시 연재되었다.

 

8.  작가

   염상섭(1897~ 1963)

  소설가. 호는 횡보(橫步)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보성 소학교를 거쳐 일본 게이오 대학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3·1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귀국한 후 기자가 되었다. 1920년부터 ≪폐허≫의 동인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1921년 ≪개벽≫에 단편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 <만세전>, <삼대>, <두 파산> 등이 있다.

 

 

 

출처 : 미래엔 문학 교과서 + 미래엔 문학 자습서

 

 

문제로 실력 점검하기

 

 

2022학년도 수능특강 

 

[04~08]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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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소설의 여러 정의 중 하나로 소설은 주인공이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나서는 자기 인식의 여정을 형상호한 이야기라는 것이 있다. 현대 소설에는 여행의 성격과 구조를 사건의 구성으로 활용하여 인물의 자기 이해나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그린 작품이 적지 않다. 이러한 작품을 묶어 여로형 소설이라고 부른다. 

 여로형 소설의 성격은 '여로'라는 용어가 지닌 의미에서도 잘 드러난다. 먼저 '로(路)'는 길을 의미한다. 길은 출발지와 도착지를 잇는 공간이자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이다. 여로형 소설에서도 길은 주인공이 머물거나 이동하는 공간적 배경이면서 동시에, 낯선 인물을 대면하거나 관계를 맺으며 감정을 느끼고 사건을 겪는 특별한 장소이다. 한편 '여(旅)'는 익숙한 곳을 떠나 다른 곳을 향하는 나그네를 뜻한다. 나그네는 길을 걸으면서 출발지를 되돌아보고 도착지를 동경한다. 여로형 소설의 주인공 또한 여정의 과정을 겪으며 과거의 익숙했던 삶을 성찰하고 미래의 더욱 좋은 삶을 열망한다. 

 [A] 「우리의 현대 소설사에서 여로형 소설은 현실의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현실 인식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형상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1920년대에 발표된 염상섭의 「만세전」은 그 첫 자리에 놓이는 대표적인 여로형 소설이다. 유학지인 동경에서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김천, 대전, 서울까지 이어지는 여정을 통해 주인공 '이인화'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하며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민족의식을 자각한다.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여로형 소설이다. 이 소설은 공사판을 전전하는 '영달'과 '정 씨', 이들과 동행하는 '백화'의 여로를 통해 이 시기의 산업화가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어디까지 훼손하는지를 애잔하게 그리고 있다. 

 

(나) , 우리 형님은 아직 군조(軍曹)예요. 니시무라(西村) 군조, 혹 형공도 아시는지? 그런데 형공은 조선에 오래 계신가요?”

, 난 십여 년래로 그저 내 집같이 드나드니까요.”

하고 궐자시골자를 한참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 대구 헌병대의 그 양반이야 알구말구요. 그 양반은 나를 모르실지 모르지만…….”

어째 그 말눈치가 안다는 것보다도 모른다는 말 같다.

어쨌든 십 년이라면 한밑천 잡으셨겠구려.” / 이번에는 상인 비슷한 자가 입을 벌렸다.

웬걸요, 이젠 조선도 밝아져서 좀처럼 한밑천 잡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어때요?”

요보 말씀요? 젊은 놈들은 그래도 제법들이지마는, 촌에 들어가면 대만(臺灣)의 생번(生蕃)보다는 낫다면 나을까. 인제 가서 보슈…… 하하하.”

대만의 생번이란 말에, 욕탕 속에 들어앉았던 사람들은 나만 빼놓고는 모두 껄껄 웃었다. 그러나 나는 기가 막혀 입술을 악물고 쳐다보았으나, 더운 김이 서리어서 궐자들에게는 분명히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욕객은 차차 꾸역꾸역 쏟아져 들어온다.

사실 말이지,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憂國志士)는 아니나 자기가 망국(亡國) 백성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기는 하다. 학교나 하숙에서 지내는 데는 일본 사람과 오히려 서로 통사정을 하느니만치 좀 낫다. 그러나 그 외의 경우의 고통은 참을 수 없는 때가 많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망국 백성이 된 지 벌써 근 십 년 동안, 인제는 무관심하도록 주위가 관대하게 내버려두었었다. 도리어 소학교시대에는 일본 교사와 충돌을 하여 퇴학을 하고 조선 역사를 가르치는 사립학교로 전학을 한다는 둥, 솔직한 어린 마음에 애국심이 비교적 열렬하였지마는, 차차 지각이 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는 간혹 심사 틀리는 일을 당하거나 일년에 한 번씩 귀국하는 길에 하관에서나 부산경성에서 조사를 당하고, 성이 가시게 할 때에는 귀찮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지마는, 그때뿐이요, 그리 적개심이나 반항심을 일으킬 기회가 적었었다. 적개심이나 반항심이란 것은 압박과 학대에 정비례하는 것이나, 기실 그것은 민족적으로 활로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나 칠 년이나 가까이 일본에 있는 동안에, 경찰관 이외에는 나에게 그다지 민족관념을 굳게 의식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래 정치 문제에 흥미가 없는 나는 그런 문제로 머리를 썩여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하여도 가할 만큼 정신이 마비되었었다. 그러나 요새로 와서 나의 신경은 점점 흥분하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보면 적개심이라든지 반항심이라는 것은 보통 경우에 자동적, 이지적이라는 것보다는 피동적, 감정적으로 유발되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일본 사람은 지나치는 말 한마디나 그 태도로 말미암아 조선 사람의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를 구하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원동력이 될 뿐이다.

ⓐ지금도 목욕탕 속에서 듣는 말마다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 없지마는, 그것은 될 수 있으면 많은 조선 사람이 듣고, 오랜 몽유병에서 깨어날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자아낼 뿐이다.

                                                (중략)
 

 정거장 문 밖으로 나서서 눈을 바삭바삭 밟으며 큰길 거리로 나가니까 칠 년 전에 일본으로 달아날 제, 오정때 대전에 내려서 점심을 사먹던 그 집이 어디인지 방면도 알 수 없이 시가(市街)가 변하였다. 길 맞은편으로 쭉 늘어선 것은 빈지를 들였으나 모두가 신축한 일본 사람 상점이다. 우동을 파는 구루마가 쩔렁쩔렁 흔드는 요령 소리만이 괴괴한 거리에 처량하다. 열네다섯쯤에 말도 모르고 단신 일본으로 공부 간다는 데에 호기심이 있었던지 친절히 대접을 해주던, 그때의 그 주막집 주인 내외가 그립다.

 다시 돌쳐 들어오며 보니, 찻간에서 무슨 대수색을 하는지 승객들은 아직도 아니 들여보내고, 결박을 지은 여자는 업은 아이가 깨어서 보채니까 일어서서 서성거린다.

젖이나 먹이라고 좀 풀어 줄 일이지.’

하는 생각을 하니 곁에 시퍼렇게 얼어서 앉은 수사가 불쌍하다가도 밉살맞다. 목책 안으로 들어오며 건너다보니까 차장실 속에 있던 두 청년과 헌병도 여전히 이야기를 하고 섰다. 나는 까닭 없이 처량한 생각이 가슴에 복받쳐 오르면서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공기에 몸이 떨린다.

 젊은 사람들의 얼굴까지 시든 배춧잎 같고 주눅이 들어서 멀거니 앉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빌붙는 듯한 천한 웃음이나 헤에하고 싱겁게 웃는 그 표정을 보면 가엾기도 하고, 분이 치밀어 올라와서 소리라도 버럭 질렀으면 시원할 것 같다.

이게 산다는 꼴인가? 모두 뒈져 버려라!’

찻간 안으로 들어오며 나는 혼자 속으로 외쳤다.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나는 모자를 벗어서 앉았던 자리 위에 던지고 난로 앞으로 가서 몸을 녹이며 섰었다. 난로는 꽤 달았다. 뱀의 혀 같은 빨간 불길이 난로 문 틈으로 날름날름 내다보인다. 찻간 안의 공기는 담배연기와 석탄재의 먼지로 흐릿하면서도 쌀쌀하다. 우중충한 남폿불은 웅크리고 자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키는 것 같으나 묵직하고도 고요한 압력으로 지그시 내리누르는 것 같다. 나는 한번 휘 돌려다보며,

ⓒ ‘공동묘지다! 공동묘지 속에서 살면서 죽어서 공동묘지에 갈까 봐 애가 말라하는 갸륵한 백성들이다!’

하고 혼자 코웃음을 쳤다.

 

(다) 강물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얼음이 녹았다가 다시 얼곤 해서 우툴두툴한 표면이 그리 미끄럽지는 않았다. 바람이 불어, 깨어진 살얼음 조각들을 날려 그들의 얼굴을 따갑게 때렸다.

차라리, 저쪽 다릿목에서 버스나 기다릴 걸 잘못했나 봐요.”

숨을 헉헉 들이키던 영달이가 투덜대자 정씨가 말했다.

자주 끊겨서 언제 올지도 모르오. 그보다두 현금을 아껴야지. 굶어두 돈 있으면 든든하니까.”

하긴 그래요.”

월출 가면 남행열차를 탈 수는 있소. 거기서 기차 탈려오?”

..... 돼가는대루. 그런데 삼포는 어느 쪽입니까?”

정씨가 막연하게 남쪽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남쪽 끝이오.”

사람이 많이 사나요, 삼포라는 데는?”

한 열 집 살까? 정말 아름다운 섬이오. 비옥한 땅은 남아돌아 가구, 고기두 얼마든지 잡을 수 있구 말이지.”

영달이가 얼음 위로 미끄럼을 지치면서 말했다.

야아 그럼, 거기 가서 아주 말뚝을 박구 살아 버렸으면 좋겠네.”

조오치, 하지만 댁은 안 될걸.”

어째서요.”

타관 사람이니까.”

그들은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중략)
 
 

스피커에서 안내하는 소리가 웅얼대고 있었다. 정씨는 대합실 나무 의자에 피곤하게 기대어 앉은 백화 쪽을 힐끗 보고 나서 말했다.

 “같이 가시지. 내 보기엔 좋은 여자 같군.”

그런 거 같아요.”

㉡ 또 알우? 인연이 닿아서 말뚝 박구 살게 될지. 이런 때 아주 뜨내기 신셀 청산해야지.”

영달이는 시무룩해져서 역사 밖을 멍하니 내다보았다. 백화는 뭔가 쑤군대고 있는 두 사내를 불안한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영달이가 말했다.

어디 능력이 있어야죠.”

삼포엘 같이 가실라우?”

어쨌든.......”

영달이가 뒷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오백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저 여잘 보냅시다.”

영달이는 표를 사고 삼립 두 개와 찐 달걀을 샀다. 백화에게 그는 말했다.

우린 뒤차를 탈 텐데...... 잘 가슈.”

영달이가 내민 것들을 받아 쥔 백화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 여자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무도...... 안 가나요.”

우린 삼포루 갑니다. 거긴 내 고향이오.”

영달이 대신 정씨가 말했다. 사람들이 개찰구로 나가고 있었다. 백화가 보퉁이를 들고 일어섰다.

정말, 잊어버리지...... 않을게요.”

백화는 개찰구로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백화는 눈이 젖은 채 웃고 있었다.

내 이름 백화가 아니예요. 본명은요......이점례예요.”

여자는 개찰구로 뛰어나갔다. 잠시 후에 기차가 떠났다.

그들은 나무 의자에 기대어 한 시간쯤 잤다. 깨어 보니 대합실 바깥에 다시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기차는 연착이었다. 밤차를 타려는 시골 사람들이 의자마다 가득 차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담배를 나눠 피웠다.

㉣ 먼 길을 걷고 나서 잠깐 눈을 붙였더니 더욱 피로해졌던 것이다. 영달이가 혼잣말로

, 며칠이나 견디나.......”

뭐라구?”

아뇨, 백화란 여자 말요. 저런 애들...... 한 사날두 시골 생활 못 배겨나요.”

사람 나름이지만 하긴 그럴 거요. 요즘 세상에 일이 년 안으루 인정이 휙 변해 가는 판인데......”

정씨 옆에 앉았던 노인이 두 사람의 행색과 무릎 위의 배낭을 눈여겨 살피더니 말을 걸어왔다.

어디 일들 가슈?”

아뇨, 고향에 갑니다.”

고향이 어딘데.......”

삼포라구 아십니까?”

어 알지, 우리 아들놈이 거기서 도자를 끄는데......”

삼포에서요? 거 어디 공사 벌릴 데나 됩니까. 고작해야 고기잡이나 하구 감자나 매는데요.”

어허! 몇 년 만에 가는 거요?”

십 년.”

노인은 그렇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두 말우 거긴 지금 육지야. 바다에 방둑을 쌓아 놓구, 추럭이 수십 대씩 돌을 실어 나른다구.”

뭣땜에요?”

낸들 아나, 뭐 관광 호텔을 여러 채 짓는담서 복잡하기가 말할 수 없데.”

동네는 그대루 있을까요?”

그대루가 뭐요. 맨 천지에 공사판 사람들에다 장까지 들어섰는걸.”

그럼 나룻배두 없어졌겠네요.”

바다 위로 신작로가 났는데, 나룻배는 뭐에 쓰오. 허허 사람이 많아지니 변고지,사람이 많아지면 하늘을 잊는 법이거든.”

작정하고 벼르다가 찾아가는 고향이었으나, 정씨에게는 풍문마저 낯설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영달이가 말했다.

잘 됐군. 우리 거기서 공사판 일이나 잡읍시다.”

그때에 기차가 도착했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던 때문이었다.

㉤ 어느 결에 정씨는 영달이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기차는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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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여러 인물을 서술자로 내세워 사건의 의미를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② 한 인물의 내면을 지속하여 드러내면서 그의 현실 인식을 부각하고 있다.

③ 이야기 밖의 서술자가 인물과 거리를 두면서 그들의 행동만을 묘사하고 있다.

④ 상반된 입장을 드러내는 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다.

⑤ 겉 이야기와 속 이야기로 짜인 액자식 구성을 통해 인물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시선을 제시하고 있다.

 

 

5. (나), (다)의 공간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나)의 '욕탕' : '나'가 다른 사람들의 웃음에서 모욕감을 느끼는 공간

② (나)의 '목책 안' : '나'가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연민과 분노를 느끼는 공간

③ (나)의 '찻간 안' : '나'가 남폿불에서 시대적 분위기를 느끼며 답답함을 느끼는 공간

④ (다)의 '얼어붙은 강' : 정 씨와 영달의 사소한 갈등이 대화의 과정에서 심화되는 공간

⑤ (다)의 '대합실' : 백화가 헤어지면서 정 씨와 영달에게 자신의 진심을 표현하는 공간

 

 

6. (가)를 바탕으로, (나), (다)를 이해한 것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나)에서 '궐자'와 '시골자'는 여로의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로, 그들의 대화는 '나'가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

② (나)에서 '일본'은 여로의 출발지로, '나'가 칠 년간 머물면서 익숙해진 공간이다.

③ (나)에서 '시가'는 여로의 과정에서 목격한 장소로, '나'는 현실의 변화를 확인하며 안타까움을 느낀다.

④ (다)에서 '삼포'는 여로의 목적지로, 영달의 여로는 동경하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의 성격을 지닌다.

⑤ (다)에서 '백화'는 영달이 여로의 과정에서 만난 사람으로, '빵'과 '달걀'은 그녀에 대한 영달의 호의를 드러낸다.

 

 

7. [A]를 바탕으로 ⓐ ~ ⓔ를 이해한 것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에서는 여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민족의식을 자각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② ⓑ에서는 반복된 단어를 통해 식민지 조선에 대한 현실 인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③ ⓒ에서는 동족에 대한 연민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현실 문제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④ ⓓ에서는 과거의 풍경을 잃고 관광지로 급변하는 삼포의 산업화된 모습이 엿보인다.

⑤ ⓔ에서는 산업화로 인해 삶의 본질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8. <보기>를 바탕으로 (다)를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삼포 가는 길」의 인물들은 대체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점에서 그들의 말과 행동에는 뜨내기의 고단함과 함께 안정된 삶을 희구하는 정주(定住)의 열망이 드러난다. 정주의 열망은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장소에 정주하려는 것과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은 관계에 정주하려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열망의 좌절과 그 소회가 결말에서 그려지는데, 이는 이 작품의 현실주의적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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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영달은 비옥하고 풍요로운 공간에서 정주하고 싶은 마음을 내보이는군.

㉡에서 정 씨는 영달이 관계에 정주하여 뜨내기의 삶을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군.

㉢에서 백화는 관계에 정주하고자 하였으나 그 관계를 계속 잇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군.

㉣에서는 한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면서 정 씨와 영달이 겪는 뜨내기의 고단함이 엿보이는군.

㉤에서는 정 씨의 좌절에 영달의 공감을 통해 이 작품의 현실주의적 태도를 드러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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