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최인훈

 

[미래엔 수록 부분]

 

앞부분 줄거리

이명준은 아버지가 월북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 친구의 집에서 자란다. 철학과 3학년이 된 명준은 개인적인 밀실(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된 개인적 공간)만을 치장하는 남한 사회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지닌다. 그는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이유 없이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로 인해 남한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그는 애인인 윤애의 집을 방문하여 설움을 달래지만, 불온(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음.) 인물로 낙인찍혔다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윤애를 남겨둔 채 월북한다.

그러나 북한 역시 명준이 원하던 곳은 아니었다. 이상적인 혁명가로 생각했던 아버지는 젊은 여인과 재혼하여 부르주아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 제도의 공식적인 명령과 복종만 있는 공허한 광장같은 곳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노동신문의 기자가 되지만, 부르주아적이라는 비판을 받고는 모든 것에 회의를 느껴 공사장에 인부로 지원한다. 명준은 공사 중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이때 위문을 온 국립 발레단에 속한 은혜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은혜는 병준이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예술제가 열리는 러시아로 떠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명준은 군대에 지원한다. 북한군 장교로 부산까지 내려온 그는 낙동강 전선에서 은혜를 다시 만난다. 명준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간호병으로 참전한 은혜를 보며 명준은 다시금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낙동강 전투의 패배로 은혜는 죽고, 명준은 포로가 된다. 명준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판문점의 포로 송환 위원회에 서게 된다.

 

 방 안 생김새는, 통로보다 조금 높게 설득 자들이 앉아 있고, 포로는 왼편에서 들어와서 바른편으로 빠지게 돼 있다. 네 사람의 공산군 장교와, 인민복(신해혁명 이후 쑨원이 입었던 것과 같은 모양의 중국의 국민복. 웃옷에 주머니가 네 개 있고 깃을 세웠음.)을 입은 중공 대표가 한 사람, 합쳐서 다섯 명. 그들 앞에 가서, 걸음을 멈춘다. 앞에 앉은 장교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한다.

"동무, 앉으시오."

명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이데올로기적 대립과 갈등의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받음)?"

"중립국."

그들은 서로 쳐다본다. 앉으라고 하던 장교가, 윗몸을 테이블 위로 바싹 내밀면서, 말한다.

"동무, 중립국도, 마찬가지 자본주의 나라요. 굶주림과 범죄가 우글대는 낯선 곳에 가서 어쩌자는 거요?"

"중립국."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정이란 말요. 자랑스러운 권리를 왜 포기하는 거요?"

"중립국."

이번에는, 그 옆에 앉은 장교가 나앉는다.

"동무, 지금 인민공화국에서는, 참전 용사들을 위한 연금 법령을 냈소. 동무는 누구보다도 먼저 일터를 가지게 될 것이며, 인민의 영웅으로 존경받을 것이오. 전체 인민은 동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고향의 초목도 동무의 개선을 반길 거요."

"중립국."

그들은 머리를 모으고 소곤소곤 상의를 한다.

처음에 말하던 장교가, 다시 입을 연다.

"동무의 심정도 잘 알겠소. 오랜 포로 생활에서, 제국주의자들의 간사한 꼬임수에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도 용서할 수 있소. 그런 염려는 하지 마시오. 공화국은 동무의 하찮은 잘못을 탓하기보다도, 동무가 조국과 인민에게 바친 충성을 더 높이 평가하오. 일체의 보복 행위는 없을 것을 약속하오. 동무는……"

"중립국."

중공 대표가, 날카롭게 무어라 외쳤다. 설득하던 장교는, 증오에 찬 눈초리로 명준을 노려보면서, 내뱉었다.

"좋아."

눈길을, 방금 도어를 열고 들어서는 다음 포로에게 옮겨 버렸다.

 

 아까부터 그는 설득자들에게 간단한 한마디만을 되풀이 대꾸하면서, 지금 다른 천막(남한과 유엔 측이 설득하는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을 광경을 그려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도 자기를 세워 보고 있었다.

"자넨 어디 출신인가?"

"……"

", 서울이군."

설득자는, 앞에 놓인 서류를 뒤적이면서,

"중립국이라지만 막연한 얘기요. 제 나라보다 나은 데가 어디 있겠어요. 외국에 가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지만, 밖에 나가 봐야 조국이 소중하다는 걸 안다구 하잖아요? 당신이 지금 가슴에 품은 울분은 나도 압니다. 대한민국이 과도기적인 여러 가지 모순을 가지고 있는 걸 누가 부인합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엔 자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은 북한 생활과 포로 생활을 통해서 이중으로 그걸 느꼈을 겁니다. 인간은……"

"중립국."

"허허허,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 나라 내 민족의 한 사람이, 타향 만 리 이국땅에 가겠다고 나서서, 동족으로서 어찌 한마디 참고되는 이야길 안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남한 2천만 동포의 부탁을 받고 온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서, 조국의 품으로 데려오라는……"

"중립국."

"당신은 고등교육까지 받은 지식인입니다. 조국은 지금 당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버리고 떠나 버리렵니까?"

"중립국."

"지식인일수록 불만이 많은 법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 몸을 없애 버리겠습니까? 종기가 났다고 말이지요. 당신 한 사람을 잃는 건, 무식한 사람 열을 잃은 것보다 더 큰 민족의 손실입니다. 당신은 아직 젊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할 일이 태산 같습니다. 나는 당신보다 나이를 약간 더 먹었다는 의미에서, 친구로서 충고하고 싶습니다.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서, 조국을 재건하는 일꾼이 돼주십시오. 낯선 땅에 가서 고생하느니, 그쪽이 당신 개인으로서도 행복이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대단히 인상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 어떻게 생각지 마십시오. 나는 동생처럼 여겨졌다는 말입니다. 만일 남한에 오는 경우에, 개인적인 조력을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명준은 고개를 쳐들고, 반듯하게 된 천막 천장을 올려다본다. 한층 가락을 낮춘 목소리로 혼잣말 외듯 나직이 말할 것이다.

"중립국."

설득자는, 손에 들었던 연필 꼭지로, 테이블을 툭 치면서, 곁에 앉은 미군을 돌아볼 것이다. 미군은, 어깨를 추스르며, 눈을 찡긋하고 웃겠지.

 

 나오는 문 앞에서, 서기의 책상 위에 놓인 명부에 이름을 적고 천막을 나서자, 그는 마치 재채기를 참았던 사람처럼 몸을 벌떡 뒤로 젖히면서,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찔끔찔끔 번지고, 침이 걸려서 캑캑거리면서도 그의 웃음은 멎지 않았다.

 준다고 바다(남한과 북한이 주장하는 이상적 이데올로기)를 마실 수는 없는 일. 사람이 마시기는 한 사발의 물.(실제적인 현실) 준다는 것도 허황하고 가지거니 함도 철없는 일. 바다와 한 잔의 물(이상과 현실). 그 사이에 놓인 골짜기와 눈물과 땀과 피(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와 그로 인한 고통). 그것을 셈할 줄 모르는 데 잘못이 있었다. 세상에서 뒤진 가난한 땅에 자란 지식 노동자의 슬픈 환상. 과학(객관적 사실)을 믿은 게 아니라 마술(허황된 이상)을 믿었던 게지. 바다를 한 잔의 영생수로 바꿔 준다는 마술사의 말(이념의 허상만 내세운 남한과 북한의 권력자들의 말). 그들은 뻔히 알면서 권력이라는 약을 팔려고 말로 속인 꾀임을. 어리석게 신비한 술잔을 찾아 나섰다가, 낌새를 차리고(이데올로기의 허상을 깨닫게 됨.) 항구를 돌아보자, 그들은 항구를 차지하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참을 알고 돌아온 바다의 난파자들을 그들은 감옥에 가둘 것이다. 못된 균을 옮기지 않기 위해서. 역사는 소걸음으로 움직인다. 사람의 커다란 모순과 업()에 비기면, 아무 자국도 못 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당대까지 사람이 만들어 낸 물질 생산의 수확을 고르게 나누는 것만이 모든 시대에 두루 맞는 가능한 일이다. 마찬가지 아닌가. 벌써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 동네가 알아낸 슬기, 사람의 조건이 아직도 풀어 나가야 할 어려움의 크기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이 이루어 놓은 것에 눈을 돌리지 않고, 이루어야 할 것에만 눈을 돌리면, 그 자리에서   그는 삶의 힘을 잃는다. 사람이 풀어야 할 일을 한눈에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은혜의 죽음을 당했을 때, 이명준 배에서는 마지막 돛대가 부러진 셈이다.(삶의 희망과 의지를 잃음.) 이제 이루어 놓은 것에 눈을 돌리면서 살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다. 팔자소관으로 빨리 늙는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된 몸의 길, 마음의 길, 무리의 길, 대일 언덕 없는 난파꾼은 항구를 잊어버리기로 하고 물결 따라 나선다.(이념의 갈등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함.) 환상의 술에 취해 보지 못한 섬에 닿기를 바라며. 그리고 그 섬에서 환상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서운 것을 너무 빨리 본 탓으로 지쳐 빠진 몸이, 자연의 수명을 다하기를 기다리면서 쉬기 위해서. 그렇게 해서 결정한, 중립국행이었다.

 

 

뒷부분 줄거리

 명준은 석방된 포로 30명과 함께 중립국인 인도로 가게 된다. 인도행 선박인 타고르호에 탄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단순노동을 하며 살리라 마음먹고 새로운 삶을 꿈꾼다. 그러나 따라오던 갈매기 두 마리를 은혜와 자신의 딸이라 생각하다가 결국 마카오 근해에서 투신자살한다.

 

 

 

 

 

핵심 정리

 

1. 갈래 현대 소설, 사회 소설, 분단 소설

2. 성격 관념적, 철학적

3. 배경 시간 :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 직후까지/ 공간 : 남한과 북한, 타고르호 안

4. 주제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진정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인간의 바람직한 모습

5. 구성

           발단 명준은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고초를 겪고 남한 사회에 회의를 느껴 월북함.

           전개 명준은 북한 사회의 부자유와 이념의 허상에 환멸을 느낌.

           위기 명준은 6·25 전쟁에 인민군으로 참전하였다가 포로가 됨.

           절정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는 과정에서 명준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을 선택함.

           결말 명준은 제3국으로 가는 타고르호에서 바다에 투신하여 자살함.

6. 특징

          - 상징적인 소재를 통해 인물의 삶과 지향점을 암시하고 있음.

          - 전체적으로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내용이 전개됨.

          -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용어가 많이 나타나며, 부분적으로 의식의 흐름 수법을 활용함.

7. 해제

 이 작품은 남한과 북한의 이념적 대립 상황에서 진실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주인공 명준이 겪는 갈등을 그린 소설이다. 작가는 남과 북을 상징하는 밀실광장이라는 두 공간을 경험한 이명준을 통해 남과 북의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이 두 공간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중립국을 선택하지만 결국 자살을 하는 이명준은, 이념의 갈등 속에서 좌절하고 마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6·25 전쟁 전후의 혼란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분단으로 인한 이념적 갈등, 개인과 사회의 이상적인 관계, 사랑을 통한 인간 구원의 문제 등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8. 작가

   최인훈(1936~2018)

 소설가이자 극작가.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하였으며 8·15 광복 후 원산으로 이주하였고 6·25 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월남하였다. 1959자유문학에서 단편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라울전>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분단과 전쟁, 독재의 문제와 같은 현대사의 단면을 지적으로 치밀하게 탐구하는 소설을 주로 썼다. 주요 작품으로는 <회색인>, <총독의 소리>, <하늘의 다리> 등의 소설과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등의 희곡이 있다.

 

출처 : 미래엔 문학 교과서 + 미래엔 문학 자습서

 

 

2006학년도 수능 기출로 실력 점검하기

 

[56-60]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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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부분의 줄거리 광복 직후, 이명준은 남한과 북한 사회 모두에 환멸을 느낀다. 6·25 전쟁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된 명준은 석방 과정에서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하고, 배를 타고 제삼국으로 떠난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엇이든지 바라보면서, 자기 안에 있는 빈 데를 메우지 않으면, 금방 쓰러져 버릴 것 같다. 얼마를 그러고 있다가 또 뱃간으로 돌아온다. 방은 아까처럼 비어 있다.

자기 자리로 올라간다. 자려고 해서가 아니다. 그저 찾는 것도 없이, 머리맡을 어물어물 더듬는다. 손에 딱딱한 물건이 잡힌다. 부채다. 문간에서 기척이 난다.

얼른 돌아다보았으나, 아무도 나타나지는 않는다. 되도록 천천히 다락에서 내려와, 마루에 내려선다. 무슨 할 일이 없는가 찾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린다. 방 안에 새삼스레 그의 주의를 끌 만한 것은 없다. 발끝으로 살살 밀어서 유리 조각을 한곳에 모으고, 꽉 밟는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더 힘 있게 밟는다. 그만한 힘으로 발바닥을 올려 밀 뿐, 유리는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진 모양인지, 꿈쩍도 않는다. 복도로 나선다. 복도에도 인기척은 없다. 선장실로 올라간다. 선장은 없다. 벽장문을 연다. 총이 제자리에 세워져 있다. 벽장문을 닫는다. 서랍을 열고, 아까 선장이 들어오는 바람에 미처 돌려 놓지 못한 총알을 제자리에 놓는다. 몹시 중요한 일을 마친 사람처럼, 홀가분해진다. 테이블로 가서 해도를 들여다본다. 이 배가 밟아 온 자국이 연필로 그려져 있다. 선장이 하는 것처럼 컴퍼스를 손가락으로 꼬나 잡고, 해도 위를 재 보는 시늉을 한다. 한참 장난을 하다가 컴퍼스를 던져 버린다. 그때 여태까지 한 손에 부채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안다.

아까, 침대에서 손에 잡힌 대로, 들고 온 것이다. 의자에 걸터앉아서 부채를 쭉 편다. 바다가 있고, 갈매기가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다가, 스르르 눈을 감는다. 머릿속으로 허허한 벌판이 끝없이 열리며, 희미한 모습이 해돋이처럼 차츰 떠올라 온다.

…… 펼쳐진 부채가 있다. 부채의 끝 넓은 테두리 쪽을, 철학과 학생 이명준이 걸어간다. 가을이다. 겨드랑이에 낀 대학 신문을 꺼내 들여다본다. 약간 자랑스러운 듯이. 여자를 깔보지는 않아도, 알 수 없는 동물이라고 여기고 있다.

책을 모으고, 미라를 구경하러 다닌다.

정치는 경멸하고 있다. 그 경멸이 실은 강한 관심과 아버지 일 때문에 그런 모양으로 나타난 것인 줄은 알고 있다. 다음에, 부채의 안쪽 좀 더 좁은 너비에, 바다가 보이는 분지가 있다. 거기서 보면 갈매기가 날고 있다. 윤애에게 말하고 있다. 윤애 날 믿어 줘. 알몸으로 날 믿어 줘. 고기 썩는 냄새가 역한 배 안에서 물결에 흔들리다가 깜빡 잠든 사이에, 유토피아의 꿈을 꾸고 있는 그 자신이 있다. 조선인 콜호스(구소려의 집단 농장) 숙소의 창에서 불타는 저녁놀의 힘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는 그도 있다. 구겨진 바바리코트 속에 시래기처럼 바랜 심장을 안고 은혜가 기다리는 하숙으로 돌아가고 있는 9월의 어느 저녁이 있다. 도어에 뒤통수를 부딪히면서 악마도 되지 못한 자기를 언제까지나 웃고 있는 그가 있다.

그의 삶의 터는 부채꼴, 넓은 데서 점점 안으로 오므라들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은혜와 둘이 함께 있던 동굴이 그 부채꼴 위에 있다.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어디선가 그런 소리도 들렸다. 그는 지금, 부채의 사북(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의 아랫머리나 가위다리의 교차된 곳에 박아 돌쩌귀처럼 쓰이는 물건) 자리에 서 있다. 삶의 광장은 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 자 이제는? 모르는 나라, 아무도 자기를 알 리 없는 먼 나라로 가서, 전혀 새 사람이 되기 위해 이 배를 탔다. 사람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성격까지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성격을 골라잡다니! 모든 일이 잘 될 터이었다. 다만 한 가지만 없었다면.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 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돌아서서 마스트(돛대)를 올려다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본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질 친 그는 지금 핑그르르 뒤로 돌아선다.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자기가 무엇에 홀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 넉넉한 뱃길에 여태껏 알아보지 못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피하려 하고 총으로 쏘려고까지 한 일을 생각하면, 무엇에 씌었던 게 틀림없다. 큰일 날 뻔했다. 큰 새 작은 새는 좋아서 미칠 듯이, 물속에 가라앉을 듯, 탁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되돌아오면서, 그렇다고 한다. 무덤을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시들이, 손짓해 부른다. 내 딸아.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옛날, 어느 벌판에서 겪은 신내림이, 문득 떠오른다. 그러자, 언젠가 전에, 이렇게 이 배를 타고 가다가, 그 벌판을 지금처럼 떠올린 일이, 그리고 딸을 부르던 일이, 이렇게 마음이 놓이던 일이 떠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남자는 활짝 웃고 있다.

- 최인훈,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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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위 글의 서술상 특징을 <보기>에서 골라 바르게 묶인 것은?

<보기>-----------------------------------------------------------------------

. 풍자적 어조를 통해 이야기의 비극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 서술의 초점을 한 인물에 맞추어 사건을 전개하고 있다.

. 작중 인물의 회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있다.

. 현재형 어미를 사용하여 일상적 삶의 모습을 부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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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 ㄹ      , ㄷ      , ㄹ      ,

 

 

57. 위 글의 사북 자리’, ‘삶의 광장’, ‘푸른 광장에 대한 감상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펼쳐진 부채에 비유된 삶의 광장은 점점 좁아지는 양상을 띠고 있군.

사북 자리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로 표현될 만큼 삶의 위기감이 고조된 공간이군.

사북 자리에서, 주인공은 잃어버린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군.

사북 자리에서, 주인공은 삶의 광장에서 푸른 광장으로 생각을 전환하고 있군.

주인공은 무덤 속에서 몸을 푼 여자푸른 광장에 연결짓고 있군.

 

58. <보기>의 밑줄 친 부분을 바탕으로 위 글을 이해하고자 할 때, 필요한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보기>-----------------------------------------------------------------------------------------------------------------------------------------

작품에 반영된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문학 작품 창작 당시와 연관시켜 해석할 때 드러나는 의미를 상황의 구체적 의미라 한다. 이것은 그 작품을 낳게 한 계기이기도 하며, 또 그 작품을 창작할 당시의 핵심적인 고민과 과제이기도 하다.

한편, 구체적 상황의 의미로부터 특정한 시대와 장소를 넘어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사회적·문화적 상황의 보편적 의미라 한다. 몇백 년 전의 작품의 가치를 오늘의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보편적 의미가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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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준이 활동한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을 실제로 답사하여 현장 체험을 한다.

이명준이 은혜와 함께 있던 동굴이 우리 신화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본다.

이명준의 삶과 사랑이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 독자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지 살펴본다.

이명준의 성격과 행동을 분석하고 종합한 후, 그것을 중심으로 이명준의 일대기를 작성해 본다.

이명준이 겪은 사건을 작품이 창작된 시대의 상황 및 그 시기에 작가가 지녔던 가치관과 연결하여 그 의미를 알아본다.

 

59. - 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 인물의 행동을 짧은 문장으로 서술하여 불안한 심리를 드러내고 있다.

② ㉡ : 이어질 내용에서 그림의 소재가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됨을 미리 알려준다.

③ ㉢ : 상념에서 현실 세계로 의식이 돌아오고 있음을 보여 준다.

④ ㉣ :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원했던 자신에 대한 뉘우침이 드러난다.

⑤ ㉤ : 경쾌하게 날고 있는 새의 모습에 주인공의 심리를 투영하고 있다.

 

60. 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았다. <보기>의 밑줄 친 부분과 유사하지 않은 것은?

<보기>--------------------------------------------------------------

타다 1. 불이 붙어서 타다. ¶ 화재로 집이 불타다.

2. (비유적으로) 매우 붉은 빛으로 빛나다 불타는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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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창 물오른 싱싱한 생선이 나왔다.

어린 동생은 자기의 나이를 손꼽아 세었다.

분홍색 메꽃이 군데군데 두렁을 수놓고 있다.

바람 소리도 잠들고 짐승들 울음소리마저 사라졌다.

오월의 신록을 살찌게 하는 비가 부슬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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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56. 3

57. 3

58. 5

59. 4

6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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