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엔 수록 부분]

 

앞부분 줄거리

 

 새해 첫 출근 날, 회사에 다니는 주인공 '남자'는 밤새 내린 눈이 허리를 넘어설 만큼 쌓여 출근할 수 없게 된다. 초조함 속에서 하루를 더 보낸 남자는 결국 눈을 파헤치며 회사로 향하지만 금세 지쳐 버린다. 상사의 압박에 불안감을 느끼던 남자는 우수 사원인 유 대리 역시 출근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유 대리에게 전화해 보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빨리 안 오고 뭐 해. 과장의 문자가 도착했다. 어느새 두 시였다. 남자는 삽을 쥐고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눈을 치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그만큼 빨리 지쳤다. 눈 속에 앉아서 쉬고 있으면 드러누워서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 순간에는 눈이 딱딱하고 차갑게 느껴지지 않고 그저 공원에 있는 나무 벤치 같았다. 심지어 솜이불처럼 포근하게 느껴져서 안으로 한없이 파고 들어가고 싶어지기까지 했다. 남자는 쭈그리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한기 때문에 경기하듯 깨어났다.

 

 남자의 삽 끝에 폐지 묶음이 걸렸다. 얼어붙은 종이 뭉치는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삽으로 떠내는데 그 사이에 들어 있던 중국집 스티커가 남자의 구두 위에 툭 떨어졌다. 손바닥만 한 광고지에는 짜장면과 짬뽕, 볶음밥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하얀 눈 위에서 그 까맣고 빨간 색상은 너무나 선명했다. 남자는 자신이 아침, 점심도 거른 채 삽질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머릿속에서 짜장면과 짬뽕의 냄새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건 아주 먼 옛날에 먹었던 것처럼 아득하고 그리운 맛이었다. 입 안에 따뜻한 침이 고였다. 짜장면 곱빼기 한 그릇만 먹고 나면 회사까지 갈 힘이 생길 것 같았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남자는 홀린 듯 휴대 전화를 ㄲ냈다. 

 

 배달이 될까 의심하면서도 밑져야 본저이라는 심정으로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소리가 길어지자 절대로 전화를 받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가 전화하는 건 짜장면을 먹을 수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래서 "여보세요."라는 굵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을 때 남자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보세요." 상대가 한 번 더 말한 뒤에야 "거기가 중국집 맞습니까?" 하고 물었다. 

 "네, 진성각입니다."

"혹시, 지금 배달이 됩니까?"

 "주소가 어떻게 되세요?"

 중국집 주인은 도시가 눈으로 덮여 버렸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태연하게 물었다. 여기 주소가……. 남자는 주변을 둘러봤다. 

 "가정집이 아니라 대로변인데 가능하겠습니까?" 근처에 ○○ 병원하고 부동산이 있습니다." 

 "아, 거기요. 예, 배달됩니다. 짜장 곱빼기 하나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남자는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배 속에선 나는 꼬르륵 소리가 요란했다. 통화하면서 나눈 말들은 모두 장난이고 배고픔만 진짜인 것 같았다. 배달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흐르지 않고 어깨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이대로라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어깨가 뚝 부러져 버릴 것 같았다. 

 

 남잔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가 사라지고 상가들이 문을 닫은 도시는 고요했다. 어디에서도 짜장면을 싣고 오는 오토바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짜장면이 정말 올까. 휴대 전화를 꺼내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확인했다. 눈 때문에 출근도 못 하는데 배달이 될 리가 없지. 남자는 눈을 한 주먹 떠서 입에 쑤셔 넣었다가 도로 뱉었다. 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는 자신이 이상한 사람 같았다. 

 그때 오른 쪽 골목 끝에서 안전모를 쓴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빠른 속도로 눈을 파내면서 걸어왔다. 그 사람이 삽으로 파내는 것은 언 눈이 아니라 가볍고 보드라운 밀가루인 것 같았다. 노를 젓는 것처럼 몸의 움직임이 유연하고 리듬감이 넘쳤다. 덕분에 남자와의 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안전모에는 '신속 배달'이라고 쓰여 있었다. 안전모를 쓴 배달원이 남자를 보곤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거짓말 같은 상황에 남자는 눈만 깜박거렸다. 안전모에 쓰인 문구 그대로 신속하고 정확한 배달이었다. 

 

 철가방을 내려놓고 안전모를 벗은 배달원은 뜻밖에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이었다. 눈 속을 뚫고 오느라 어깨와 신발이 눈투성이였다. 

 "먹고 그릇은 그냥 버리시면 됩니다."

 "대단하시네요. 이런 날까지 배달을 하시고……"

 "눈이 와도 먹고는 살아야죠." 

 배달원은 그릇을 건네자마자 다시 안전모를 쓰고는 바쁘게 걸어갔다. 짜장면 위에 쿠폰 한 장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손이 얼어서 젓가락은 짝짝이로 쪼개졌다. 짜장의 고소한 냄새와 일회용 용기의 따뜻함은 너무 생생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젓가락을 쥐고 짜장면을 비비면서 남자는 코를 훌쩍거렸다. 엉거주춤하게 서서 자장면을 먹는 동안 남자는 세상이 자신을 상대로 몰래카메라를 찍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자신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다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보여 줄 법한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즐기 위해서. 정말 그런 거라면 남자는 지금 자신이 그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줄줄 흐르는 콧물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젓가락질을 했고 그릇까지 먹어 치울 기세로 허겁지겁하다 젓가락을 한 짝 떨어뜨리기까지 했으니까. 그걸 찾으려고 눈 속을 파헤쳤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남은 짜장면은 젓가락 한 짝으로 긁어 먹었다. 그래도 양념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부끄러움이나 자괴감 같은 걸 느낄 겨를도 없었다. 

 회사까지의 거리는 이제 삼 분의 일쯤 남아 있었다. 남자는 과장의 문자와 부장의 전화를 한 번씩 받지 않았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아내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남자는 그저 파고 걸었다. 쉴 때는 허리를 펴고 목을 좌우로 돌리면서 거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전화는 받지 않았지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맞은편에 불 꺼진 편의점이 있었다. 편의점 간판을 보자 온장고에 든 따뜻한 캔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얼마 전까지 일상이었던 것들이 지금은 손이 닿지 않는 저 눈밑에 파묻혀 버렸다.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 편의점 앞에는 남자의 키만 한 눈사람이 서 있었다. 동그란 눈과 웃는 입 모양을 한 눈사람이었다. 그 웃는 얼굴을 보고 남자는ㄴ 잠시 멈춰 섰다. 눈이 재앙이 되고 눈 대문에 일상이 무너진 곳에 서 있는, 웃는 얼굴의 눈사람은 김새는 농담 같았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입 모양을 흉내냈다. 말라붙어 있던 입술이 툭 터져서 피가 찔끔 새어 나왔다. 

 

 한참 속도를 내고 있는데 삽 끝에 딱딱한 게 또 걸렸다. 시간은 촉박하고 마음은 급한데 발로 눌러도 삽날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남자는 일 미터쯤 떨어진 곳에 다시 삽을 찾았다. 한 삽 떠내고 나자 또 한 삽이 들어가지 않았다. 생활 정보지 함이나 자전가가 쓰러진 게 아니라 공룡이라도 묻혀 있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방향을 옆으로 틀어서 팠다. 그때 어디선가 메아리처럼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가느다란 목소리의 여자가 부르는 곡인데 멜로디가 익숙했다. 남자는 잠시 손을 멈축추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비록 벨 소리이긴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듣는 음악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 전화의 진동이 울렸지만 남자는 무시해 버렸다. 음악 소리는 멈추었다가 눈을 파내자 다시 시작되었다. 아까와 같은 멜로디였고 눈을 파낼수록 소리가 점점 커졌다. 남자는 길이 아니라 소리를 찾아서 삽을 움직였다. 손으로 눈을 쓸어 낸 뒤에야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눈 속에 파묻힌 누군가의 휴대 전화였고 공교롭게도 빳빳하게 언 양복바지 안에 들어 있었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삽과 손으로 눈을 파냈다. 판박이 스티커를 천천히 벗겨 낼 때처럼 눈 속에서 검은색 구두와 발, 모직으로 된 양복바지가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코를 훌쩍거리면서 언 손으로 조심스럽게 눈을 파헤쳤다. 입에서는 입김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양복 차림의 사람은 눈의 중간쯤에 화석처럼 묻혀 있었다. 양복 웃옷과 와이셔츠는 주름을 그대로 간칙한 채 얼어붙었고 검붉은색의 실크 넥타이는 오래전에 흘린 피처럼 굳어 있었다. 양손 다 눈을 그러쥐고 있어서 손가락은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모습이지만 상반신 일부는 아직도 눈 속에 묻혀 있었다. 쌓인 눈의 두께로 봐서는 그가 쓰러진 뒤에도 눈이 계속 내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해가 빠르게 기울고 있었다. 몸은 추운데 남자의 얼굴은 땀범벅이 되었다. 흘러 내리는 땀을 닦으며 남자는 조심스럽게 눈을 치웠다. 고대 유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처럼 손이 떨렸다. 눈을 쓸어 내자 어깨와 목, 안경을 쓴 얼굴이 차례로 나타났다. 혹시라도 맥박이 뛰는지 확인하려던 남자가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 속에서 화석이 된 사람은 집에도 없고 전화도 받지 않던 유 대리였다. 이봐. 남자는 유 대리의 몸을 흔들었다. 턱에서 땀이 툭 떨어졌다. 일어나. 휴대 전화에서 다시 익숙한 멜로디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봐!" 유 대리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 대리의 전화기를 주워 귀에 댔지만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기, 눈 속에, 유 대리가 있어요.' 하지만 그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남자의 입안에서 딱딱하게 굳었다.

 해가 기울고 주위는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이대로 한 시간 정도만 파고 가면 회사에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남자는 회사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파고 온 길을 돌아보았다. 앞으로 나아가기에도 다시 돌아가기에도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게다가 남자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는 유 대리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숨을 골랐다. 졸음이 밀려왔지만 졸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다. 눈 더미는 딱딱하거나 차갑게 느껴지지 않고 그저 공원에 있는 나무 벤치 같았다. 시야가 구겨진 종이처럼 뭉개지고 있었다. 

 

 

 

핵심 정리 

 

1. 갈래 - 현대 소설, 단편 소설

2. 성격 - 현실 비판적

3. 배경  -  시간 : 현대

             -  공간 : 대도시의 아파트와 거리

4. 주제 - 인간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기계적인 노동과 경쟁 사회에 대한 비판

5. 구성 

    발단 - 새해 첫 출근 날 눈이 너무 많이 쌓인 것을 발견하고 '남자'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기로 함.

    전개 - '남자'는 출근에 대한 상사의 압박에 불안감을 느끼다 결국 눈을 파헤치며 출근함.

    위기 - 회사를 향해 나아가면서 쌓인 눈을 치우던 '남자'는 배고픔을 느끼게 느끼고 짜장면을 배달시켜 먹음.

    절정 - '남자'는 계속 눈을 파헤치던 중 휴대 전화 벨 소리를 듣게 되고,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삽질을 하다가 사람을 발                  견함.

   결말 - 눈에 파묻힌 사람이 '유 대리'임을 알고 놀란 '남자'는 그 옆에서 서서히 잠이 듦.

 

6. 특징

① 과장된 상황을 설정하여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냄

② 등장인물을 '대리', '과장', '부장' 등 회사의 직급으로 제시하여, 서열 중심의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나타       냄

③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작품의 결말을 제시하여 비판적 인식을 극대화함.

 

 

* 작품 해제

 이 작품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상황을 설정하여 경쟁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비극적인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흔히 눈이 내린 풍경을 환상적이거나 순수하게 생각하지만 이 작품에서 '눈'은 회사로 출근해야만 하는 주인공에게 장애물이자 시련이다. 걸음을 걷기조차 힘든 상황에서 출근을 재촉받는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삽질로 눈을 파내며 나아가는데, 이러한 설정은 맹목적인 목ㅍ를 위해 반복적인 노동을 강요하는 현대인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출처 : 미래엔 교과서 + 문학 자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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