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진(晉)나라 역사가 진수(陳壽)가 편찬한 위, 촉, 오 삼국의 정사 『삼국지』 중 위나라 부분으로 「위서(魏書)」가 정확한 말이다. 여기에 마한 50여 국의 이름이 있으며 백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 왕 준(準)은 궁중 사람들과 측근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나라 땅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견훤(甄萱)이 태조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가 금마산(金馬山-전북 익산)에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다.(『삼국사기』 「본기(本紀)」에 의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는 그 뒤 갑신년에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왕 준(準)을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왕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마한을 합병했음을 알 수 있고, 이 때문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간혹 금마산을 마한으로 알고 백제라고 한 것은 잘못되고 황당한 일다. 고구려 땅에 본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사이(四夷-중국의 부위에 있는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을 일컫는다)는 구이(九夷-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에 의하면, 구이란 견이()와 어이(於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다)와 구한(九韓), 예(穢), 맥(貊)이 있으니 『주례(周禮)』에서 "직방씨(職方氏-주나라 때 관직명으로 천하의 지도와 토지에 관한 일을 했다)가 사이와 구맥(九貊)을 관장했다."라고 한 것은 동이족 즉 구이를 말한 것이다.

『삼국사(三國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주(溟州-지금의 강릉)는 옛날 예국(穢國)이었는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印章)을 얻어 바쳤다."

 또 이렇게 말한다.

 "춘주(春州)는 옛날 우수주(牛首州)며 옛날의 맥국인데, 어떤 이는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라고 한다."

『회남자(淮南子-한나라 회남왕 유안이 빈객과 방술가를 모아 엮은 책)』의 주에는 이렇게 말했다.

 "동방의 이(夷)는 아홉 종류나 있다."

『논어정의(論語正義)』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구이(九夷)란 첫째 현도, 둘째 낙랑, 셋째 고려, 넷째 만식(滿飾), 다섯재 부유(鳧臾), 여섯째 소가(素家), 일곱째 동도(東屠), 여덟째 왜(倭), 아홉째 천비(天鄙)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신라의 승려 안홍이 지은 책)』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구한(九韓)이란 첫째 일본, 둘째 중화(中華), 셋째 오월(吳越), 넷째 탁라(羅), 다섯째 응유(鷹遊), 여섯째 말갈(靺鞨), 일곱째 단국(丹國), 여덟째 여진(女眞), 아홉째 예맥(濊貊)이다."

 

 

* 참고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북부여 왕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이렇게 말했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터이니, 너는 다른 데로 피해 가라.(동명왕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이다.) 동해 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 왕도로 삼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고 했다.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에 제사를 지내 대를 잇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큰 연못(백두산 천지를 말한다)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내려주신 아들이로구나!"

곧 거두어 기르면서 이름을 금와라고 했다. 그가 성장하자 태자로 삼았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자리를 이어받아 왕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태자 대소(帶素)에게 왕위가 전해졌다. 지황(地皇) 3년 임오년(22년- 고구려 대무신왕 5년이다)에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망했다.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고기(古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년(기원전 59년)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오룡거(五龍車- 천체가 타는 용 다섯 마리가 모는 수레를 말하며, 5라는 숫자는 고구려의 성수(聖數)다)를 타고 홀승골성(訖升骨城-대요 의주 경계에 있다)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하며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했다.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 했는데, 해(解)를 씨로 삼았다. 왕은 이후에 상제의 명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오 졸본부여라 했는데 바로 고구려의 시조다."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형성 지역 장춘, 농안 지역 중심으로 사방 2000리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하고 송화강 상류의 넓은 벌판에서 성장

형성 시기 기원전 5세기 경 맥족이 세운 나라.

부여의 사회

노예제 사회 4조의 법률, 순장.

 

* 부여의 4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물건 값의 12배를 배상한다.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되 그 시체를 서울 남쪽 산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 그 여자의 집에서 시체를 가져 가려고 할 때에는 소와 말을 바쳐야 한다.

 

관료 기구 통해 민중 통제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가 사출도를 지배, 그 밑에 대사, 대사자, 사자 등이 있음.

 

㉢ 영고-제천 행사, 12월

㉣ 소를 죽여 그 굽으로 점을 침

㉤ 형사취수제

 

 

부여의 멸망

기원 후 285년과 346년 두 차례에 걸친 모용 선비의 대규모 침략과 고구려의 공세로 점점 쇠퇴

494고구려 문자명왕 때 고구려에 투항하여 흡수.

 

 

 

 

*참고 문헌

조성오, 「우리 역사 이야기1」, 돌베개, 2008.

 

* 기출문제 풀어보기

 

2019년 44회 고급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지

 

4. 교사의 질문에 대한 학생의 답변으로 알맞은 것은?

 

교사 : 이 유물은 지린성 마오얼산 유적에서 출토된 장신구입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신구로 치장하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12월에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열었던 이 나라에 대해 발표해 볼까요?

 

① 민며느리제라는 혼인 풍습이 있었습니다.

②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과 왜에 수출하였습니다.

③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하였습니다.

④ 단궁, 과하마, 반어피 등이 대표적인 특산물입니다.

⑤ 대가들이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렸습니다.

 

 

정답 : 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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