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가 - 월명사

2. 연대 - 신라 경덕왕 (8세기 경)

3. 별칭 - 위망매영재가(爲亡妹營齋歌)

4. 갈래 - 향가(10구체), 서정시

5. 성격 - 애상적, 추모적, 불교적

6. 표현 - 비유적, 상징적

7. 주제 - 죽은 누이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함

8. 출천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월명사 도솔가

9. 작품의 구조

 제1 · 2구 - 죽음에 대한 두려움

 제3 · 4구 - 죽은 누이에 대한 정

 제5 ·6구 - 생사의 무상함을 나뭇잎에 비유

 제7 · 8구 - 누이의 요절에 대한 한(恨)

 제9 · 10구 - 극락에서의 재회를 기다림

 

10. 치밀한 구성과 비유의 기교 - 이 작품은 '직설- 비유- 직설'로 교체되면서 시적 정서가 심화되고 있다. 동기간의 죽음을 한 나무 가지에서 떨어져 흩어지는 낙엽에 비유한 것도 뛰어나지만, 누이의 이른 죽음을 '이른 바람에 떨어진 잎'으로 구상화함으로써 사별(死別)의 슬픔과 허무감까지 표현한 것은 절묘하기 이를 데 없다.

 

11. 차원 높은 서정성과 죽음의 의미

- 이 노래의 지배적 정서는 누이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애절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화자는 '생사의 길이 여기에 있음'을 말하고, 무상한 죽음을 가을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에 비유하였다. 세속적 인간들은 죽음을 현세와 다른 곳의 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죽고 사는 가림길이 바로 내가 지금 디디고 있는 이곳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자연의 섭리 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 한계를 자각한 것이며, 죽음을 공간적 이미지로 표현한 탁월한 시상(詩想)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전반을 지배하는 두려움과 슬픔의 정서는 낙구(落句)에 이르러 불교적 신앙심에 의해 돌연히 반전된다. 화자의 시선이 미타찰로 급선회하면서 사별의 슬픔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참고 자료

 

정경섭 엮음, 고전 문학의 이해와 감상1, 문원각, 2003.

월명사의 도솔가 - 삼국유사 권 제5 감통 제7

 

 경덕왕 19년 경자년(760) 4월 초하루에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 열흘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천문을 맡은 관리(日官)가 아뢰었다.

 "인연 있는 승려를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 공덕이란 연기와 윤회를 바탕으로 하는 불교 행위의 하나고, 꽃을 뿌려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산화공덕이다)을 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원전(朝元殿)에다 깨끗이 단을 만들고 청양루(靑陽樓)에 행차하여 인연있는 승려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月明師)가 밭 사이로 난 남쪽 길을 가고 있었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 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햇다. 월명사가 말했다.

 "신승은 국선의 무리에 속하여 단지 향가만을 알 뿐 범성(梵聲-찬불가인 범패(梵唄)로서 범어로 하는 염불이다)은 익숙하지 못합니다."

 왕이 말했다.

 "이미 인연 있는 승려로 지목되었으니, 향가를 지어도 좋소."

 이에 월명사가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불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 여기에 산화가를 부를제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받들어

    미륵좌주(彌勒座主-부처님)를 모셔라.

 

 그 시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용루(龍樓)에서 오늘 산화가를 불러

    푸른 구름에 한 송이 꽃을 날려 보낸다.

    은근하고 곧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니

    도솔천의 대선가(大仙家)를 멀리서 맞이하리.

 

 

 지금 세속에서는 이 시를 가리켜 「산화가」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니 마땅히 「도솔가(兜率歌)라고 해야 한다. 이와 별도로 「산화가」가 있으나, 글이 번잡하여 싣지 않는다.

 얼마 후 해의 괴이함이 곧 사라졌다. 왕은 이것을 기려 좋은 차 한 봉지와 수정염주 108개를 내려 주었다. 이때 갑자가 모습이 말쑥한 동자가 나타나 공손히 꿇어앉아 차와 염주를 받들어 궁전 서쪽의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은 그를 안 대궐(內宮)의 심부름꾼으로 여겼고, 왕은 법사의 시종이라고 여겼는데, 확인해 보니 모두 잘못된 생각이었다. 왕이 매우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뒤쫒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의 탑 안으로 사라졌고, 차와 염주는 남족 벽에 그려진 미륵상 앞에 있었다. 이에 월명의 지극한 덕과 정성이 이처럼 부처님(至聖)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조성에서나 민간에서나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은 월명사를 더욱 존경하여 다시 비단 백 필을 주어 큰 정성을 기렸다.

 월명사는 또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재를 올리면서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내는데, 문득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종이돈(紙錢-죽은 자가 극락으로 갈 때 노잣돈으로 쓰라는 의미에서 장례식 때 쓰는 가짜 돈으로 지금도 대만에서는 장례식에서 이 풍습을 따르고 있다.)을 날려 서쪽으로 사라지게 했다.

 그 향가는 다음과 같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으니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어찌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彌陀刹-아미타불의 국토라는 뜻이니 극락세계를 말한다)에서 만날 나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월명은 언제나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살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일찍이 달밤에 피를 불며 문 앞의 큰길을 지나가자, 달이 그를 위해서 운행을 멈추었다. 이 때문에 이 길을 월명리(月明里)라 하였으며 월명사 또한 이 일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월명사는 바로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다. 신라 사람들은 향가를 숭상한 지 오래되었는데, 대개 시가와 송가(頌歌)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바람이 종이 돈을 날려 저승 가는 누이의 노자를 삼게 했고,

     피리 소리는 밝은 달을 움직여 항아(姮娥-달에 사는 미인으로 중국 하나라 예(羿)의 부인이었다)를 머무르게 했네.

     도솔천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마라.

     만덕화(萬德花) 한 곡조로 즐겨 맞이하리.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민음사, 2019.

 

 

 

신라본기 제9

 

경덕왕(景德王)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헌영(憲英)이고 효성왕의 친동생이다.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헌영을 태자로 세웠던지라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비는 이찬 순정(順貞)의 딸이다.

 

 원년(742) 겨울 10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2년 봄 3월에 주력공(主力公)의 집 소가 한꺼번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당 현종이 찬선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를 보내와 조상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고, 아울러 왕을 신라 왕으로 책립했으며, 선왕의 관작을 승습하게 하였다.

 현종의 조서에 이르기를 "작고한 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영해군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指節寧海軍使新羅王) 김승경(金承慶)의 아우 헌영(憲英)은 대를 이어 어진 생각을 품고 떳떳한 예의를 마음에 쏟아 대현(大賢)이 베푸신 풍속과 교화는 조리가 더욱 밝아졌으며, 중국 법제의 의관을 성심으로 본받고 있도다. 바닷가 보배를 사신을 보내 나르고, 구름과 짝하는 머나먼 길을 따라 조정에 왕래하며, 대대로 충순한 신하가 되어 거듭 충절을 드러냈도다. 지난번 형이 나라를 계승하더니 세상을 뜨고 뒤이을 아들이 없으매 아우가 이를 받아 그 뒤를 이었으니, 이 또한 떳떳한 법도라. 이에 제후를 품어들이는 예의로 우대해 책명하노니, 마땅히 옛 전통을 지켜 번방(蕃邦)의 어른된 명망을 계승할 일이다. 아울러 특별한 예우를 더해 중국 관작의 칭호를 내려주나니, 형의 관작인 신라왕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충지절영해군사(新羅王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充持節寧海軍使)를 이어받으라"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황제하 주해한 『효경』 한 부를 보내주었다.

 여름 4월 서불한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맞이해 왕비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지진이 있었다. 겨울 12월에 왕의 아우를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했더니, 황제가 좌청도솔부원외장사(左淸道率府員外長史)의 관위를 수여하고 녹색 도포와 은제 디를 내려주어 돌려보냈다.

 

 3년 봄 정월에 이찬 유정(惟正)을 중시로 삼았다. 윤 2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여름 4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말을 바쳤다. 겨울에 요사스러운 별이 중천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닷 말들이 그릇만하였으며 열흘 만에야 없어졌다.

 

 4년 봄 정월에 이찬 김사인(金思仁)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에 수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5월에 가물었다. 중시 유정이 물러나고, 이찬 대정(大正)이 중시가 되었다. 가을 7월에 동궁을 수리하였다. 또 사정부(司正府)와 소년감전(少年監典)과 예궁전(穢宮典)을 설치하였다.

 

 5년 봄 2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여름 4월에 죄수를 크게 사면하고 큰 술잔치를 베풀었으며, 승려 1백 50명에게 도첩(度牒)을 주었다.

 

 6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를 시중(侍中)으로 고쳤다. 국학의 여러 전공 과정에 박사(博士)와 조교를 두었다.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3월에 진평왕릉에 벼락이 쳤다. 가을에 가물더니,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전염병이 돌자, 사신을 열 개 방면으로 내보내 안정시키고 위무하였다.

 

 7년 봄 정월에 천구성이 땅에 떨어졌다. 가을 8월에 태후가 새로 지은 영명궁(永明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처음으로 정찰(貞察) 1명을 두어서 백관을 규찰해 바로잡게 하였다. 아찬 정절(貞節) 등을 보내 북쪽 변경을 감찰하게 하였다. 처음으로 대곡성(大哭城)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8년 봄 3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에 천문박사(天文博士) 1명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명을 두었다.

 

 9년 봄 정월에 시중 대정이 면직하고, 이찬 조량(朝良)이 시중이 되었다. 2월에 어룡성(御龍省) 봉어(奉御) 2명을 두었다.

 

 11년 봄 3월에 급찬 원신(原神)과 용방(龍方)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동궁아관(東宮衙官)을 두었다. 겨울 10월에 창부(倉部)에 사(史) 3명을 더 두었다.

 

 12년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접견하지 않자 그냥 돌아갔다. 무진주에서 흰 꿩을 바쳤다.

 

 13년 여름 4월에 수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5월에 성덕왕의 비(碑)를 세웠다. 우두주에서 상서로운 지초(芝草)를 바쳤다. 가을 7월에 왕이 관리에게 명해 영흥사(永興寺)와 원연사(元延寺)를 수리하였다. 8월에 가물고 누리가 있었다. 시중 조량이 물러났다.

 

 14년 봄에 곡식이 귀해 백성들이 굶주렸다. 웅천주의 향덕(向德)은 가난하여 봉양할 것이 없자, 다리의 살을 베어 그의 아버지에게 먹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에게 물자를 자못 후하게 내려주고, 아울러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망덕사으 탑이 흔들렸다[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에는 "그 나라에서 당을 위해 이 절을 세웠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두 탑이 서로 마주하여 높이는 13층이었는데, 갑자기 흔들리면서 붙었다 떨어졌다 하여 며칠 동안이나 마치 쓰러지려는 듯하였다. 이해에 안녹산(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났으니, 아마 그 감응인 듯싶다"라고 하였다.

 여름 4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가을 7월에 죄수를 사면했으며 늙은이, 병자,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늙은이들을 찾아 위문하고 곡식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이찬 김기(金耆)를 시중으로 삼았다.

 

 15년 봄 2월에 상대등 김사인(金思仁)이 근년에 재이(災異)가 자주 나타나는 까닭에 상소하여 시국 정치의 잘잘못을 극론했더니, 왕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왕은 현종이 촉(蜀) 지방에 있다는 마을 듣고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成都)에 이르러서 조공하게 하였다. 이에 현종이 친히 5언 10운시를 써서 왕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신라 왕이 해마다 조공을 닦고 예악과 대의명분을 잃지 아니함을 가상히 여겨 시 한 수를 내려주노라"라고 하였다. 그 시는 이러하다.

 

   천지사방은 명암과 동서로 나뉘어 있어도

   세상 만물은 중심자리를 마음에 머금도다

   조공해오는 구슬과 비단은 천하를 두루 돌아

   산 넘고 물 건너 상도(上都) 향해 찾아든다

   아득한 회포야 머나먼 동방에 막혔어도

   오랜 세월 천자의 교화 부지런히 받들었다

   가없이 드넓은 땅 끝 닿은 그곳은

   깊고 푸른 바다 건너 귀퉁이에 있거니와

   사람마다 명분과 의리의 나라라고 일컫나니

   어찌 산 다르고 물 다른 이방이라 할 것인가

   사신은 다녀가면 풍속 교화 전해 받고

   사람마다 찾아와서 법전 제도 익혀간다

   의관 차림새는 예의범절 받들 줄 알고

   충성과 신의는 유풍(儒風)을 높힐 줄 안다

   성실도 하여라, 하늘이 굽어보리니

   어질기도 하여라, 그 덕행이 외로우랴

   깃발 아래 서로 도와 백성을 다스릴새

   보내준 후한 선물 애틋한 정성 깃들었다.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매운 풍상에도 늘 변하지 말지라

 

 

 현종이 촉(蜀) 지방에 갔을 때 신라가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황제 있는 곳까지 찾아가서 조빙했으므로, 그 지극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시를 준것이다. 그 시 가운데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매운 풍상에도 늘 변하지 말지라"라고 한 것은 아마 옛 시에 "모진 바람이 있은 후에 굳센 풀을 알 수 있고, 난시에야 비로소 곧은 신하를 알게 된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선화(宣和) 연간에 송에 사신으로 갔던 김부의(金富儀-김부식의 아우)가 이 시의 각본(刻本)을 지니고 변경(汴京)에 들어가 관반학사(館伴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였더니, 이병이 황제에게 올렸다. 황제는 양부(兩府) 및 여러 학사들에게 돌려보인 후, 조칙을 전해 이르기를 "진봉시랑(進奉侍郞)이 바친 시는 참으로 명황(明皇)의 글씨로구나"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여름 4월 큰 우박이 내렸다. 대영랑(大永郞)이 흰 여우를 바쳤으므로 남변제일(南邊第一)의 관위를 수여하였다.

 

 16년 봄 정월에 상대등 사인이 병으로 면직하자, 이찬 신충(信忠)이 상대등이 되었다. 3월에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월봉(月俸)을 없애고 다시 녹읍(祿邑)을 내려주었다. 가을 7월에 영창궁(永昌宮)을 중수하였다. 8월에 조부(調府)에 사(史) 2명을 더 두었다. 겨울 12월에 사벌주를 상주(尙州)로 고치고 1주· 10군 · 30현을 소속시켰다. 삽량주는 양주(良州)라 하고 1주· 1소경 · 12군 · 34현을 소속시켰다. 청주는 강주(康州)라 하고 1주· 11군 · 27현을 소속시켰다.  한산주는 한주(漢州)라 하고 1주· 1소경 · 27군 · 46현을 소속시켰다. 수약주는 삭주(朔州)라 하고 1주· 1소경 · 11군 · 27현을 소속시켰다. 웅천주는 웅주(熊州)라 하고 1주· 1소경 · 13군 · 29현을 소속시켰다. 하서주는 명주(溟州) 하고 1주· 9· 25현을 소속시켰다. 완산주는 전주(全州)라 하고 1주· 1소경 · 10군 · 31현을 소속시켰다. 무진주는 무주(武州)라 하고 1주·  14군 · 44현을 소속시켰다.

년 봄 정월에 시중 김기(金耆)가 죽었으므로, 이찬 염상(廉相)이 시중이 되었다. 2월에 왕이 교서를 내려 중앙과 지방 관리들 가운데 유가를 청해 만 60일이 된 이는 해직하도록 결단하였다. 여름 4월에 의술을 정교하게 궁구한 의관을 뽑아 궐내의 공봉의사(供奉醫師)에 충당하였다. 율령박사(律令博士) 2명을 두었다. 가을 7월 23일에 왕자가 태어났다. 우레와 번개가 심하더니 절 열여섯 곳에 벼락이 쳤다. 8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18년 봄 정월에  병부(兵部)와 창부(倉部)의 경(卿)과 감(監)을 시랑(侍郞)으로 고치고, 대사(大舍)는 낭중(郎中)으로 고쳤으며, 집사사지(執事舍知)는 집사원외랑(執事員外郞)으로, 집사사(執事史)는 집사랑(執事郞)으로 고쳤다. 조부(調府) · 예부(禮部)· 승부(乘府) · 선부(船府) · 영객부(領客府)·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 사정부(司正府)· 위화부(位和府)· 예작전(例作典)· 대학감(大學監) · 대도서(大道署) · 영창궁(永昌宮) 등의 대사(大舍)를 주부(主簿)로 고치고, 상사서(賞賜署) · 전사서(典祀署) · 음성서(音聲署) · 공장부(工匠府) · 채전(彩典) 등의 대사는 주서(主書)라 하였다. 2월에 예부의 사지(舍知)를 사례(司禮)로 고치고, 조부의 사지를 사고(司庫), 선부의 사지를 사주(司舟),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司例), 병부의 노사지(弩舍知)를 사병(司兵), 창부의 조사지(租舍知)를 사창(司倉)으로 고쳤다. 3월에 혜성이 나타나더니, 가을이 되어서야 없어졌다.

 

 19년 봄 정월에 도성 동북쪽에서 북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사람들이 귀신의 북소리라고들 하였다. 2월에 궁궐 안에 큰 못을 파고, 또 궁구러 남쪽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를 놓았다. 여름 4월에 시중 염상이 물러나고, 이찬 김옹(金邕)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 7월에 왕자 건운(乾運)을 왕태자로 봉하였다.

 

 20년 봄 정월 초하루에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해에 햇무리가 끼었다. 여름 4월에 혜성이 나타났다.

 

 21년 여름 5월에 오곡(五谷)· 휴암(鵂巖) · 한성(漢城) · 장새(獐塞) · 지성(池城) · 덕곡(德谷)의 여섯 성을 쌓고 각각 태수를 두었다. 가을 9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2년 여름 4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수도에 바람이 크게 불어 기와가 날아가고 나무가 뽑혔다. 8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두번째 꽃이 피었다.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이 면직하였다.

 대나마 이순(李純)은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세속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버려 왕이 여러 차례 불러도 나오지 않더니,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어 왕을 위해 단속사(斷俗寺)를 창건해 세우고, 그곳에서 살았다. 그 뒤 왕이 풍악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궁궐 문에 찾아와 왕에게 간하여 아뢰기를, "듣자오니 옛날 걸(桀)과 주(紬)가 주색을 탐닉해 음탕한 쾌락을 그치지 않더니, 이로 말미암아 정치가 문란해지고 국가가 패망했다 합니다. 이처럼 엎어진 수레바퀴 자국이 앞에 있으니, 뒤따르는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거듭나시어 나라의 수명을 길이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감탄하여 곧 풍악을 그치게 하고, 다시 그를 내실로 이끌어 그가 말하는 오묘한 도리를 들었는데, 이야기가 세상을 다스리는 방책에까지 미치니 며칠이 되어서야 그쳤다.

 

 23년 봄 정월에 이찬 만종(萬宗)이 상대등이 되고, 아찬 양상(良相)이 시중이 되었다. 3월에 혜성이 동남방에 나타나고, 용이 양산(楊山) 아래 나타나더니 조금 있다가 날아가버렸다. 겨울 12월 11에 크고 작은 유성들이 나타났는데, 보는 이들이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24년 여름 4월에 지진이 있었따.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황제가 사신에게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를 수여하였다. 6월에 유성이 심성(心星)을 침범하였다.

 이 달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덕이라 하고, 모지사(毛祗寺) 서쪽 산에 장사지냈다.(『고기』에는 이르기를 "영태(永泰) 원년 을사(765)에 죽었다"라고 했는데, 『구당서』 및 『자치통감』에는 모두 "대력(大曆) 2년(767)에 신라 왕 헌영(憲英)이 죽었다"라고 했으니 아마 잘못이 아닐까 한다.)

 

 

 

 

참고 문헌

 

김부식 지음, 이강래 옮김, 삼국사기1, 한길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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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일성왕의 큰아들로 신라 제8대 왕이며 154년에서 183년까지 재위했다.)이 즉위한 지 4년 정유년(157년)에 동해 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혹은 물고기라고도 한다)가 하나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했다.

 "이 사람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記)』3)을 살펴 볼 때, [이때를]전후하여 신라 사람으로서 왕이 된 자가 없었다. 이는 변방 고을 작은 왕이지 진짜 왕은 아니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바닷가에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남편의 신발이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갔더니 바위는 또 이전처럼 그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왕에게 알리고 세오녀를 왕께 바쳤다. 부부는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녀는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일식과 월식의 자연 현상을 뜻한다)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렸었는데, 이제 일보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자 연오랑이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오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짐의 비(妃)가 짜 놓은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

 그러고는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연오랑이 준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했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은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연오랑과 세오녀>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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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평(永平-후한 명제(明帝) 유장(劉莊)의 연호) 3년 경신년(60년) 8월 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지나다 시림(始林-『삼국사기』 「잡지」에 의하면 탈해왕 9년(65년)에 시리에 닭의 신이한 변화가 있어 계림(鷄林)이라 고쳤다 한다. 지금의 경주시 교동 첨성대와 반월성 사이에 있다.) 속에서 커다란 빛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하늘에서 땅까지 자줏빛 구름이 드리워지고 구름 속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 황금 상자가 걸려 있었다. 상자 안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고 나무 밑에는 흰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 했다. 왕(탈해왕)이 숲으로 가 상자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났는데,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기 때문에 알지(閼智)라는 이름을 붙였다. 알지는 향언(鄕言)으로 어린 아이라는 뜻이다. 왕이 알지를 수레에 싣고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이 서로 뒤따르면서 춤을 추었다.

 

왕이 길일을 가려 태자로 책봉했으나 나중에 파사왕(婆娑王)ㅏ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로 했다. 알지가 세한(勢漢-이병도는 '알지'와 동일 인물로 보았다.)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都)를 낳고, 욱부가 구도(俱道)를 낳고, 구도가 미추(未鄒)를 낳았다.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김알지(탈해왕 대)>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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