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가 : 세종(世宗, 1397~1450)

2. 제작 동기 - 세종 28년에 세종의 정비(正妃) 소헌 왕후가 승하하자, 아들인 수양 대군(뒷날의 세조)이 모후(母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가의 일대기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였다. 이 책이 세종 29년(1447)에 완서오디자 세종이 이를 읽고 그 내용에 맞추어 석가불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로 지은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작품은 194장으로 되어 있는 상권뿐이지만 전체적으로는 580여 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장 중 제1장을 제외한 모든 장은 두 절(행)의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각 절은 3~4구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1·

2장에 해당하는 '其一(기일)' ·'其二(기이)'는 '용비어천가'의 1·2장과 같이 서사(序詞)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두 작품은 형식면에서 유사성이 만하다.

 

3. 악장 문학의로서의 성격

- '월인천강지곡'은 악장체의 찬불가(讚佛歌)라고 할 수 있다. 또, 같은 악장체 문학인 '용비어천가'와 달리 일관된 줄거리를 가지고 있어 최대의 서사시로 평가되기도 한다.

 

4. 제목의 의미

-  '월인석보'에는 '月印千江'을 '부처께 백억세계(百億世界)에 여러 ㄱ지 형태의 몸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심이 달이 여러 강을 비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즉, 부처를 '달'에, 중생을 '강'에 비유하고 있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존(世尊)의 아득한 전생(前生) 이야기에서부터 여러 가지 종교적 의미가 있는 사건들을 통일성 있게 순차적으로 배열하면서, 간결하고도 사실적인 표현의 묘미를 살리고 있다.

 

5. 내용

 

 

을 겁에 어느 다 ᄉᆞᆯ

 

[현대어 풀이]

높고 큰 석가모니 부처의 끝없는 공덕을 이 세상 다하도록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제 석가불의 공덕 찬양

 



 

ㅅ 일 ᄉᆞᆯ리니 먼ㅅ 일이시나 눈에 보논가 너기쇼셔

ㅅ 말 ᄉᆞᆯ리니 쳔載上썅ㅅ 말이시나 귀에 듣논가 너기쇼셔.

* ᄉᆞᆯ리니 아뢰려고 하니

 

[현대어 풀이]

부처님이 하신 일을 사뢰리니, 만 리나 떨어진 곳의 일이지만 눈에 보는 듯이 여기소서.

부처님의 하신 말씀을 사뢰리니, 천 년 전의 말씀이시나 귀에 듣는 듯이 여기소서.

 

주제 시공을 초월한 세존의 언행 찬양

 

 

에 님금 위ㄹ ᄇᆞ리샤 졍애 안잿더시니.

ㅣ나랏쳔 일버ᄅᆞᆯ 디나아가니.

* 아승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

* 정사 수도하는 집

 

[현대어 풀이]

아득하게 먼 전세(前世)[한 보살이]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도를 닦기 위하여] 정사에 앉아 계시었습니다.

[이때] 오백 명의 전세(前世) 원수가 [도둑으로 환생하여] 나라의 재물을 훔쳐 [정사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주제 석가 전세겁에 있었던 일

 

ᄉᆞ

 

님ᄋᆞᆯ 모ᄅᆞᆯ발자쵤 바다 남 여 셩을 ᄆᆞᄎᆞ시니.

ᄌᆞ업스실몸앳 필 뫼화 그르세 담아 남를 내.

 

[현대어 풀이]

[왕은 정사에 앉아 있던 보살이] 형님인 줄 모르고, [도둑의] 발자취를 밟아가서 [보살을 잡아다] 나무에 몸을 꿰어 [보살은] 목숨을 마치셨습니다.

[보살에게] 자식이 없으므로 [대구담이 보살의] 피를 모아 그릇에 담아서 남녀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주제 구담씨(석가의 전세 조상)가 생겨난 전세의 내력

 

[배경고사]

나라에서는 도둑들의 발자취를 밟아 정사에 있던 소구담을 도둑으로 오인하고 잡아다가 나무에 꿰어 두었다. 왕은 소구담이 형인 줄 모르고 신하를 시켜 죽여 버렸다. 이때 보살(소구담)의 스스인 대구담(구담 바라문)이 소구담의 피를 모아 남녀가 태어나게 하고, ()을 구담씨라 하니, 이는 석가모니 전세의 성이다.

 

 

어엿브신 명에 감샤ᄆᆞᆯ 대이 일우니.

다ᄃᆞᆨᄒᆞᆫ 예 셕ᄃᆞ외ᄃᆞᆯ 포이 니ᄅᆞ시니.

 

* 감자씨 석가모니 전세 조상의 성.

* 보광불 몸에 광명이 등불처럼 빛난다는 부처

 

[현대어 풀이]

 

[소구담]이 불쌍하게 목숨을 마치신 후에 [그 피로 인하여 태어난] 감자씨가 이으심을 대구담이 이룩하시었습니다.

아득한 후세에 석가모니 부처가 되실 것을 보광불이 [그때 미리] 말씀하시었습니다.

 

[배경 고사]

대구담의 정성으로 소구담의 피가 남녀로 태어나, 감자씨(구담씨)의 자손이 이어져서 번창하게 되었다. 감자씨의 자손 중에 부처님께 정성이 지극한 선혜(善慧)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보광불이 그를 보고 먼 후세에 석가모니 부처가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6. 주제 - 세존의 공덕을 기림

 

 

 

참고 자료

 

정경섭 엮음, 고전 문학의 이해와 감상1, 문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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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향가

1. 향가의 명칭과 기원

 

향가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적은 향찰(鄕札)표기에 의해 기록되어 전하는 신라 및 고려시대의 시가를 말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향가는 삼국유사에 실린 14수와 균여전에 실린 11수 등 모두 25수의 시가를 지칭하는 장르 명칭

 

1) 명칭

() -  시골이란 말이 암시하듯 중국에 대한 우리나라 노래의 비칭(卑稱)의 뜻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향은 행정구획상의 명칭으로서 ()’가 아니라 ()’ 곧 서울 안이며 왕성의 좌우에 즐비한 마을의 총칭이며, 나아가 나라를 가리키는 말

 * '향가'란 광의로는 중국시에 대한 우리 나라의 독특한 시가라는 뜻.

 

이 외의 명칭

도솔가, 사뇌가, 사뇌, 시뇌 등

 

2) 향가 기원

현전하는 향가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서동(書童). 이 작품의 성립 시기는 6세기 경이다. 그러나 이 노래 이전에도 가사는 전하지 않고, 작품명만 알려져 오는 노래들이 여러 편 있다. 구전 가요가 아닌 기록가요로써 향가가 최초로 성립된 것은 유리왕 5(28) 도솔가(兜率歌)의 제정에서 비롯되며, 이후 점차 발전을 거듭하여 6세기 전반 융천사의 혜성가(彗星歌)에 이르면서 비로소 10구체의 완성된 시형태를 낳게 됨.

 

3) 삼대목(三代目)

-‘삼국사기진성왕 2(888)에 왕이 각천 김위홍과 대구화상에게 역대의 향가를 모은 삼대목이라는 책의 편찬을 명한 기사가 보임. - 전해지지 않음.

 

4) 1세기 초에 비롯된 향가는 여말여초의 승려인 균여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거쳐 고려에 접어 들어서도 그 잔영을 보여주다가 문학사의 이면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고려의 작품으로서는 예종의 도이장가(悼二將歌)가 있지만 전해오지 않는다.

 

2. 갈래

1) 도솔가(兜率歌)

- 당시 도솔가는 구체적인 한 노래를 지칭하는 것. 그러나 나중에 향가의 하위 장르로서 일군(一群)의 시가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발전.

- 국가적 차원으로 백성들을 위해 지어진 치리가(治理歌)

- 월명사의 도솔가(兜率歌), 융천사의 혜성가(彗星歌), 충담사의 안민가(安民歌)

 

2) 사뇌가

사뇌(詞腦)란 말은 문헌에 따라 사내(思內)’ 혹은 시뇌(詩腦)’라고 표기되기도 하는데 의미는 서로 같다.

사뇌(詞腦)라는 명칭은 어느 특정 가요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도솔가와 마찬가지로 특정 시가군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됨

 

3) 불찬가 균여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에 국한

 

3. 형식

-형식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 최초의 정형시

창작시기를 통해 보면 4구체와 8구체, 10구체 사이에 시간적 계기성은 발견할 수 없다.

4구체에서 10구체로의 발달은 향가가 공동의 노래에 기초한 민요적 성격에서 출발하여 점차 심화된 개인의 서정을 담는 정서의 확장을 이룩해 나갔던데 기인.

각각의 양식은 대체소멸의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니라, 선행양식들과 공존하면서 향가의 폭과 너비를 확장시킴

 

1) 4구체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민요적 시형

서동요, 풍요(風謠), 헌화가(獻花歌), 도솔가(兜率歌) 4편이 전한다.

4구체 향가는 고대 가용의 기본형태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노래 호흡의 단위

4구체 향가는 단형으로 된 짤막한 시형 : 복잡한 개인의 생활 감정이나 사상을 담을 수 없음.

민요나 창작 가요가 대부분

내용 집단노래이거나 짤막한 애정의 사연, 혹은 주술적 내용

 

2) 8구체 4구체를 중첩시킨 시형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처용가(處容歌)

구체적인 시적화자의 감정전달이 이루어지고 있음.

8구체로의 확장은 집단의 노래, 공동의 노래에서 개인의 노래로의 전이를 의미

 

3) 10구체 8구체에 감탄사로 시작되는 낙구(落句) 2구를 보태어 완성형

혜성가(彗星歌), 원왕생가(元王生歌), 원가(怨歌), 제망매가(祭亡媒歌), 안민가(安民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 우적가(遇賊歌) 8편과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 등 모두 19편이 전해짐

 

낙구의 첫부분이 감탄사로 시작되는 것은 8구까지에서 전개되어 온 시상을 비약시켜 전체를 마무리 짓는 기능 10구체 향가 형태를 발견함으로써 그들의 정서와 생각을 충분히 예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됨.

 

4. 작가

 

1) 작가층

화랑이나 승려 뿐만아니라 민요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4구체 작품의 문학 담당층인 하층민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분포.

 

5. 향가의 개관

 

작품명

작가

연대

형식

출전

서동요(薯童謠)

백제 무왕의 소년시대

신라 진평왕

4구체

삼국유사 권2 무왕조

혜성가(彗星歌)

융천사(融天師:승려)

진평왕

579 ~ 631

10구체

동서 권5 융천사 혜성가

풍요(風謠)

민요

신라 선덕왕

632 ~ 647

4구체

동서 권4 양지사석(良志使錫)

원왕생가(願往生歌)

광덕(廣德:승려)

신라 문무왕

661 ~ 681

10구체

동서 권5 광덕 엄장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득오(得烏:화랑)

신라 효소왕

692 ~ 702

8구체

동서 권2 죽지랑(竹旨郞)

헌화가(獻花歌)

견우노인(牽牛老人)

신라 성덕왕

702 ~ 737

4구체

동서 권2 수로부인(水路夫人)

원가(怨歌)

신충(信忠:화랑)

신라 효성왕

원년(737)

10구체

(현존 8)

동서 권5 신충괘관(信忠掛冠)

도솔가(兜率歌)

월명사(月明師:승려)

신라 경덕왕

9(760)

4구체

동서 권5 월명사 도솔가(兜率歌)

제망매가(祭亡媒歌)

월명사(月明師:승려)

신라 경덕왕

742 ~765

10구체

동서 권5 월명사 도솔가(兜率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충담사(忠談師:승려)

신라 경덕왕

742 ~765

10구체

동서 권2 경덕왕 충담사

안민가(安民歌)

충담사(忠談師:승려)

신라 경덕왕

742 ~765

10구체

동서 권2 경덕왕 충담사

천수대비가(千手大悲歌)

희명(希明:부녀자 )

신라 경덕왕

742 ~765

10구체

동서 권3 분황사 천수대비

우적가(偶賊歌)

영재(永才:승려)

신라 원성왕

785 ~ 798

10구체

동서 권5 영재우적(永才愚賊)

처용가(處容歌)

처용랑(處容郞:화랑)

신라 헌강왕

5(879)

8구체

동서 권2 처용랑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참회업장가(懺悔業障歌수희공덕가(隨喜功德歌청전법륜가(請轉法輪歌청불주세가(請佛住世歌항순중생가(恒順衆生歌보개회향가(普皆廻向歌총결무진가(總結無盡歌)

균여대사(均如大師)

신라 신덕왕 6~ 고려광종 24(919~973)

10구체

대화엄수좌원통

양중대사 균여전

(大華嚴首座圓通

兩重大師均如傳)

7 가행화세분

(歌行化世分)

 

 

참고 문헌

 

성기옥 외, 「한국문학개론」, 새문사, 1995.

정병욱, 「증보판 한국고전시가론」, 신구 문화사, 2003.

* 전태일의 1970년 8월 9일 일기 일부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와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1. 어린 시절

1948826일 대구 출생 아버지 전상수 씨는 봉제 노동자 출신

1954년 상경 지게꾼들을 상대로 팥죽, 비빔밥 등을 팔았고, 채소 행상을 해서 근근이 가정을 꾸리던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를 눕게 되자 전태일은 남대문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신문팔이, 구두 닦기 등의 일을 함

1963대구로 내려가 대구의 청옥 고등 공민 학교에 입학(고등 공민 학교란 가정 사정 등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1963년 겨울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학교를 그만 둠

 

2. 평화 시장 시절

1964년 봄 16, 평화 시장 시다로 취직

1965평화시장, 통일사에 어린아이들 막바지를 만드는 미싱사로 취직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 조건

작업장은 약 8평 정도, 미싱대와 시다판들이 꽉 들어찬 비좁은 방안의 틈서리에서 창백한 얼굴의 여공들은 끼여앉아 일해야 했다. 여공들은 허리마저 펴고 다닐 수가 없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약 1.5m밖에 안 되는 다락방이기 때문이었다. 아침 8시부터 밤11까지 일해야 했고, 작업 도중에 화장실을 한 번 가려고 해도 주인 아저씨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일거리가 밀리면 이틀 밤, 사흘 밤을 세워 가며 일해야 했고, 주인 아저씨가 사다 준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억지로 밤을 새어 일해야 했다. 집에서 쉬는 날이라고는 한 달에 이틀 뿐이었을 정도로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일을 했다.

 

3. 각성

재단사가 되기로 한 전태일, 1967224, 재단사가 됨

한 미싱사 처녀가 일을 하다 각혈을 하게 됨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쫓겨남

아버지가 알고 있는 노동 운동에 관한 것을 묻기 시작하고 이때 근로 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

해고된 전태일 여공들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업주가 해고

다른 곳에서 재단사로 일하면서 재단사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조직 19696월 말 정식으로 창립 총회를 갖고 전태일을 회장으로 선출

어머니를 졸라 근로 기준법 해설서를 사서 읽고 또 읽음 이 때부터 그는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4. 시련

 

업주들 사이에 위험 분자로 찍힘

19698,9월 경 노동 실태 조사용 설문지 300매 인쇄해서 노동자들에게 배포. 이 일로 평화 시장 일대에서 쫓겨남

근로 기준법상의 감독권 행사를 요구하기 위하여 시청 근로 감독관실에 찾아갔고, 노동청에 찾아가 진정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식도 없음

 

5. 다시 평화 시장으로

 

19709다시 취직한 전태일, 바보회 회원들을 다시 규합하고 바보회를 삼동 친목회로 이름을 바꾸어 새 조직을 만듦(삼동은 평화시장, 동화 시장, 통일 상가의 세 건물)

106노동청장 앞으로 평화 시장 피복 제품상 종업원 근로 개선 진정서제출

107각 석간 신문에 평화 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 실림

108전태일, 김영문, 이승철 세 사람은 삼동회를 대표하여 작업 시간 단축, 11일 휴일, 12회의 건강 진단, 시다 임금 100% 인상, 다락방 철폐, 조명 시설 개선, 환풍기 설치, 여성 생리 휴가 보장, 노조 결성 지원 등을 내용으로 하는 건의서를 평화시장 주식회사에 제출

1971- 노동청에서 근로 감독관을 보내 근로 조건을 개선해 주겠다면 삼동회를 회유

19711020노동청 정문 앞에서의 시위 제의 데모 계획을 눈치 챈 당국은 회근로 조건 개선을 약속하며 데모 중지를 요청 노동청, 국정감사가 끝나자 무시

1024경찰측과 회사측 11월까지 기다려 보라고 회유

117아무 것도 지켜지지 않음

1113일 오후 1불길을 뒤집어 쓴 전태일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짐 10시 조금 지나 전태일, 사망

전태일 투쟁 이후 청계 피복 노조의 결성 등 민주 노조가 연이어 결성되고 노동자의 투쟁은 끊임없이 지속됨

 

 

참고 문헌

조성오, 「우리 역사 이야기3」, 돌베개, 2008.

조정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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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정희 정부

(1) 3선 개헌(1969)

① 과정 - 북한의 도발에 대한 대응과 지속적 경제 성장 추진을 내세워 대통령 3회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안을 편법으로 통과 시킴

② 결과 -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당선(1971)

 

2. 유신 체제의 성립과 붕괴

(1) 유신 체제의 성립(1972)

① 배경 -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냉전 체제 완화, 경제 침체에 따른 국민 불만 고조

           * 닉슨 독트린 - 1969년 7월에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발표한 아시아에 대한 정책. 미국이 아시아 국강 대한

                               군사적 개입을 축소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② 과정 - 비상계엄령 선포와 국회 해산 → 비상 국무회의에서 헌법 개정안(유신 헌법) 의결 · 공고 → 국민 투표로 확정 →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박정희를 대통령 선출

③ 유신 헌법 - 대통령 간선제 :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임기 6년의 대통령 선출

                 - 대통령 중임 제한 조항 삭제(영구 집권 가능)

                 - 대통령에게 긴급 조치권 · 국회의원 3분의 1 추천권 부여

 

(2)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과 탄압

 

① 저항 -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 유신 반대 시위 확산

② 탄압 - 정부는 긴급 조치권을 발동하여 유신 체제에 대한 반대 활동을 금지

 

(3) 유신 체제 붕괴

① 배경 -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의 선전, 제2차 석유 파동으로 경제 이기 고조, YH 무역 사건에 항의하던 김영삼이 국회의원직에서 제명 → 부· 마 민주 항쟁 발생

 

 * YH 무역 사건

 - 1979년 YH 무역 회사의 여성 노동자들이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여고, 이를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1명이 사망하였다.

 

* 부· 마 민주 항쟁 

- YH 무역 사건을 계기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정치 공세를 강화하자, 여당은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시켰다. 이를 계기로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으며,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과 마산 일대로 확대되었다. 부· 마 민주 항쟁이라고 불리는 이 민주화 운동은 박정희 정부의 계엄령 선포 등 강경한 대응으로 인해 진압되었다.

 

② 붕괴 - 박정희 대통령 피살(10· 26사태, 1979)

 

3. 신군부 세력의 등장

(1) 12· 12사태(1979) -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장세동 박준병 등의 신군부와 유신 잔재 세력은 쿠데타로 군사권을 장악

 

 

 

 

참고 자료

 

수능특강 한국사영역 한국사,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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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사(井邑詞)

 

前 腔(전 강)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小 葉(소 엽) 아으 다롱디리

後腔全(후강전)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ᄅᆞᆯ 드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過 篇(과 편) 어느이다 노코시라.

金善調(금선조) 어기야 내 가논 졈그ᄅᆞᆯ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小 葉(소 엽) 아으 다롱디리

 

* 前腔 - 악조(樂調)의 이름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음악에 맞추어 부르는 뜻없는 소리.

* 져재 시장

* - 진 곳. 위험한 곳

* 욜셰라 디딜까 두렵습니다.

* 내 가논 - 남편의 귀갓길/ 아내가 마중 나가는 길/ 부부의 인생길

 

<핵심 내용>

 

출전 - 고려사악지(樂誌)’에 이 노래가 백제 가요로 소개. 그 가사는 악학궤범에 고려가요와 함께 실려 있다.

2. 지은이 어느 행상인의 아내

 

3. 배경 설화

정읍(井邑)은 전주(全州)에 속해 있는 현()이다. 이 고을에 사는 어떤 사람이 행상(行商)을 떠나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 아내가 산꼭대기 바위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며, 남편이 밤길에 오다가 해()나 입지 않을까 염려되어 이를 진흙에 빠지는 것에 비유하여 노래를 불렀다. 세상에 전하기를 산 위에 오르면 망부석(望夫石)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고려사악지(樂誌)’

 

4. 시조 형식의 근원

이 작품은 형태면에서 후렴(여음구)를 제외하고 의미가 있는 부분만 추출하면 다음과 같이 네 토막 석 줄 형식이 된다.(1구 제외)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머리곰/비취오시라.

져재/ 녀러신고요// ᄅᆞᆯ /욜셰라

어느이다 /노코시라.// 내 가논 / 졈그ᄅᆞᆯ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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