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어 나타나는 동일한 또는 유사한 낱말, 문구, 내용을 말한다. 한 작품에서 나타날 수도 있고 한 작가 또는 한 시대, 또는 한 장르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 설화에 자주 반복되는 이별한 님, 서양 동화에 주로 나타나는 요술 할멈과 미녀 이야기 등은 민족 설화의 모티프들이며, 두견, 소쩍새는 동양시에 자주 나오는 모티프이다.

 <봄은 여전히 왔는데, 사람은 가고 아니 온다>는 내용의 정서도 동양시에서 약간의 모습을 바꾸면서 자주 반복되는 모티프이다. 한 작품 속에서도 계속 반복되어 그것이 느껴질 정도가 되는 모든 요소는 모티프라고 할 수 있다.

 일부 형식주의자들은 작품에서 쓰인 최소 의미 단이, 즉 문장의 내용을 모티프라 부른다. <그는 즐거워서 웃었다>, <참 좋은 날씨였다.> 등이모두 개체적인 모티프인데, 그중 작품 전체의 주제(테마)를 형성하는 데에 직접 참여하는 모티프는 <매인 모티프>, 주제 자체와 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을 <놓인 모티프>라 하여 그 두 가지의 상호 견제 작용이 전체의 주제를 어떻게 풍부하게 형상화하는가를 밝히려고 하였다. 이러한 형식주의적인 견해를 받아 들이지 않더라도 모티프는 작품의 주제를 구축하고 통일감을 주는 중요 단위로서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신화비평에서 거론하는 원형적 심상도 모티프의 일종이다. 상징주의자들의 반복적인 상징도 마찬가지이다. 모티프는 모든 저자가 공유한 공동의 재산이나,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는 저자의 역량에 달렸다.

 

 참고 문헌

 

이상섭, 「문학비평 용어사전」, 민음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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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 point of view  (0) 2020.07.16

家有頹廡不堪支者, 凡三間, 予不得已悉繕理之. 先是, 其二間爲霖雨所漏寢久, 予知之, 因循莫理, 一間爲一雨所潤, 亟令換瓦. 及是繕理也, 其漏寢久者, 欀桷棟樑皆腐朽不可用, 故其費煩. 其經一雨者, 屋材皆完固可復用, 故其費省. 予於是謂之曰: “其在人身亦爾. 知非而不遽改, 則其敗已不啻若木之朽腐不用. 過勿憚改, 則未害復爲善人, 不啻若屋材可復用. 非特此耳, 國政亦如此. 凡事有蠹民之甚者, 姑息不革, 而及民敗國危, 而後急欲變更, 則其於扶起也難哉, 可不愼耶?”

경험) 집에 허물어진 행랑채가 제대로 버티지 못하게 된 것이 세 칸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것을 모두 수리하였다. 이에 앞서 그중 두 칸이 장맛비에 샌 지가 오래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어물어물하다가 손을 대지 못하였다. 한 칸은 비를 한 번 맞고 새어 들었기 때문에 서둘러서 기와를 갈아 넣게 하였다. 그런데 수리하려고 본즉 비가 샌 지가 오래된 것은 그 서까래, 추녀, 기둥, 들보가 모두 썩어서 못 쓰게 되어 그 경비가 많이 들었고, 그 한 번밖에 비를 맞지 않은 재목들은 모두 환전하여 다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경비가 적게 되었다.

 

깨달음) 나는 여기에서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을 알고서도 바로 고치지 않으면 곧 그가 나쁘게 되는 것이 나무가 썩어서 못 끄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잘못을 하고 곧 고치기를 꺼려하지 않으면 다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가옥의 재목을 다시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될 것이다. 나라의 정치도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일에서 백성에게 심한 해가 될 것을 머뭇거리고 개혁하지 아니하다가, 백성이 못살게 되고 나라가 위태한 뒤에 갑자기 변경하려 하면, 곧 붙잡아 일으키기가 어렵다.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단어 풀이

 

행랑채 문간채. 대문간(대문을 여닫기 위하여 대문의 안쪽에 있는 빈 곳) 곁에 있는 집채

서까래 마룻대에서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 또는 보에 걸쳐 지른 나무. 그 위에 산자(지붕 서까래 위나 고미 위에 흙을 받쳐 기와를 이기 위하여 가는 나무오리나 싸리나무 따위로 역은 것. 또는 그런 재료)를 얹는다.

추녀 네모지고 끝이 번쩍 들린, 처마의 네 기에 있는 큰 서까래. 또는 그 부분의 처마

들보 칸과 칸 사이 두 기둥을 건너질러 도리와는 자 모양, 마룻대와는 자 모양을 이루는 나무

 

핵심 정리

1. 갈래 – 고전 수필, 한문 수필, 설(說)
2. 성격 – 경험적, 교훈적
3. 주제 – 잘못을 미리 알고 고쳐 나가는 자세의 중요성
4. 특징 – 경험한 내용을 먼저 제시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덧붙이는 형식을 취함
- 일상적 체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다른 상황에 적용해 해석하는 유추의 방식을 사용함.
5. 작가 – 이규보(1168~1241)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 문인.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고려 시대의 명문장가로 그의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다. 몽골의 강압적 요구를 「진정표(陳情表)」로써 누그러뜨리기도 하였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이 있으며, 작품으로 「동명왕편」 등이 있다.

6. ‘설(說)’과 ‘기(記)’

‘설’과 ‘기’는 모두 한문 문체의 하나이다. ‘설’은 글자 뜻에서 알 수 있듯 해석과 서술을 주로 문체이다. 다시 말해 뜻과 이치를 해설하는 자기의 의사를 가지고 좀 더 상세하게 서술하는 문체이다.
‘기’는 사실을 그대로 적는 글을 말한다. 사물을 객관적인 관찰과 동시에 기록하여 영구히 잊지 않고 기념하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는 글이다. 기의 문체는 ‘부(賦)’와 같으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논(論)’과 같으면서도 단정을 짓지 않고 ‘서(序)’와 같으면서도 드날리지 않고 ‘비(碑)’와 비슷하면서도 칭송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7. 「이옥설」 이해와 감상

「이옥설」은 고려 시대에 이규보가 한문으로 쓴 고전 수필이다. ‘설(說)’은 한문 문체의 하나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생각이나 이치를 풀이하고 의견을 덧붙여 서술은 고전 수필의 한 갈래이다. 이 글은 퇴락한 행랑채를 수리하면서 떠오른 생각과 깨달은 이치를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와 방법, 더 나아가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한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나’의 경험에서 유추하여 삶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이를 나라의 정치로 확대적용하여 그 깨달음을 확장하는 등, 짧은 글이지만 그 안에 큰 깨달음과 교훈이 담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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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탤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은 남해왕 때에 (고본(古本)에 임인년에 왔다고 했으나 잘돗된 것이다. 가까운 임인년이면 노례왕이 즉위한 뒤일 것이므로 서로 왕위를 양보하려고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앞의 임인년이라면 혁거세의 시대다. 때문에 임인년이라 한 것은 틀렸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駕洛國) 바다 한가운데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북을 시끄럽게 두드리며 맞이하여 그들을 머물레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배는 나는 듯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지금도 상서지촌과 하서지촌이란 이름이 있다.)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포구 가에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노파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있었다.

 [노파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는 원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일로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가?"

 배를 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 있었고 배 안에는 길이가 스무 자에 너비가 열세 자나 되는 상자가 하나 있었다. 아진의선이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아래 매어 두고는 길흉을 알 수가 없어 하늘을 향해 고했다. 잠시 후에 열어 보니 반듯한 모습의 남자 아이가 있었고, 칠보(七寶-불가의 일곱 가지 보물로서 금, 은, 유리, 마노(瑪瑙), 호박(琥珀), 산호(珊瑚), 차거(거)인 듯하다)와 노비가 가득 차 있었다.

 

 이레 동안 잘 대접하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또는 정명국(正明國)사람이라고도 하고 완하국(玩夏國)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완하는 화하국(花夏國)이라고도 한다. 용성국은 왜(倭)의 동북쪽 1000리 지점에 있다.)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 일찍이 스물여덟 용왕이 있는데, 사람의 태(胎)에서 출생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온 백성을 가르치고 성명(性命)을 바르게 닦았습니다. 8품의 성골(姓骨)이 있으나 간택을 받지 않고 모두 큰 자리(大位-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자 아들 구하기를 빌어 7년 만에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군신을 모아 묻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으니 길상(吉祥)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고,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고 또한 칠보와 노비까지 배에 싣고 띄워 보내면서, '아무 곳이나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루어라.'라고 축원했습니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말을 끝내자 아이는 지팡이를 짚고 노비 두 명을 데리고 토함산으로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곳에] 이레 동안 머물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을 살펴보니 초승달 보양의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오래도록 살 만했다. 그래서 내려가 살펴보니 바로 호공(瓠公-『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그의 혈족과 성씨가 자세하지 않고 박을 허리에 매고 있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보았다.) 의 집이었다. 이에 곧 계책을 써서 몰래 그 옆에 숫돌과 숯을 묻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그 집에 가서 말했다.

 "여기는 우리 조상이 대대로 살던 집이오."

 호공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이들의 다툼이 결판이 나지 않아 관청에 고발했다. 관청에서 물었다.

 "무슨 근거로 너의 집이라고 하느냐?"

 아이가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깐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가 빼앗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십시오."

 탈해의 말대로 땅을 파 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그는]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고 맏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니, 이 사람이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탈해의 오기로 보아야 함)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인(白衣)에게 마실 물을 떠오게 했다. 그런데 하인이 물을 길어 오면서 도중에 먼저 맛보려 하자 입에 잔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하인이 맹세했다.

 "이후로는 가깝든 멀든 감히 먼저 물을 맛보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입에서 잔이 떨어졌다. 그 뒤로 하인은 두려워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에 세속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 부르는 우물이 바로 그곳이다.

 노례왕이 죽자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 정사년(57년) 6월 탈해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옛날 내 집이었다고 하여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에 성을 석씨(昔氏)라 했다.

 어떤 사람은 까치로 인해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작(鵲)자에서 조(鳥)를 버리고 성을 석(昔)씨로 했으며, 상자 속에서 알을 깨고 출생했기 때문에 탈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째인 건초(建初-후한 장제(章帝) 유달(劉炟)의 연호) 4년 기묘년(79년)에 죽은 뒤 소천구(疏川丘)에 장사 지냈다. 그 이후에 신(神)이 말했다.

 "내 뼈를 조심해서 묻으라."

 두개골의 둘레가 세 자 두 치, 몸통뼈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에 치아는 하나로 엉켜 있었으며, 뼈마디는 사슬처럼이어져 있어 이른바 천하에 둘도 없는 장사의 골격이었다.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하니, 신이 또 말했다.

 "내 뼈를 동악에 두라."(탈해왕릉은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의 길가에 큰 소나무를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받을어 모셨다.(이런 말도 있다. [탈해왕이] 죽은 뒤 27대 문무왕대 조로(調露) 2년 경신년(680년) 3월 15일 신유일(辛酉日)밤, 태종(문무왕의 오기)의 꿈에 매우 위엄 있고 사나워 보이는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탈해왕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라고 했다. 왕이 그의 말대로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국사(國祀)가 끊이지 않았으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도 한다.)

 

 

 

 

권 제1 기이 제1 제4대 탈해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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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이사금'이라고도 하며 윗사람, 우두머리라는 뜻. 나중에 임금이라는 의미로 확장)이 처음에 매부 탈해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탈해가 말했다.

 "무릇 덕이 있는 자는 치아가 많다고 하니, 마땅히 잇금으로 시험해 봅시다."

 이에 떡을 깨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잇금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즉위했다. 이런 연유로 왕을 잇금이라고 했다. 이질금이란 칭호는 노례왕에서 시작되었다. 유성공(劉聖公-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족형 유현(劉玄)이다.) 경시(更始) 원년 계미년(癸未年-23년)에 즉위하여 (연표에는 갑신년에 즉위했다고 했다) 여섯 부의 호를 고쳐 정하고 여섯 성(姓-李氏, 崔氏, 孫氏, 鄭氏, 裵氏, 薛氏다)을 하사했다.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는데, 차사(嗟辭-슬퍼하는 말이라는 뜻인데 가사에 자주 나오는 '아으'와 유사하며 향가의 기원과 관련된다.)와 사뇌격(詞腦格-향가 중에서 감탄사를 가진 19체를 말한다)이 있었다. 그때 처음 쟁기와 보습과 얼음 저장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무(建武) 18년(42년)에는 이서국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해에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노례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자충(慈充)과 동음어이며 '스승'의 옛말 혹은 존장에 관한 칭호)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을 일컫는 말인데 오직 이 왕만을 차차웅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다.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지금의 영일현(迎日顯)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응험이 있다고 한다.)이다.

 전한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년(4년)에 즉위하여 21년 동안 다스리고 지황(地皇-한나라 효원황후의 조카로 평제를 죽이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의 연호이다.) 4년에 갑신년(24년)에 죽으니, 이 왕이 바로 삼황(三皇-혁거세왕, 노례왕, 남해왕)의 첫째라고 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 불렀는데, 진한의 말로 왕을 뜻한다. 어떤 이는 귀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한다. 또한 차차웅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시대의 명문장가로 『화랑세기』를 지었다.)

 "차차웅은 무당을 말하는 방언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존장인 자를 자충이라 한 것이다."

 혹은 이사금(尼師今)이라고도 했는데, 잇금(齒理-잇자국)을 말한다. 처음에 남해왕이 승하하자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자 탈해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 성스럽고 지혜가 많은 사람은 치아가 많다고 합니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했다. 옛날부터 이렇게 전해 왔다.

 혹은 왕을 마립간(麻立干- 립(立)을 수(袖)로 쓰기고 한다.)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은 이렇게 말했다.

 "마립이란 궐(橛-서열을 말한다)을 말하는 방언이다. 궐표(標)는 자리에 따라 두었는데, 왕궐(王)이 주가 되고 신궐(臣)은 아래에 두게 되어 있어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삼국사론(三國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거서간과 차차웅이라 부른 임금이 각각 한 명씩 있고, 이사금이라 부른 임금이 열여섯 명이고, 마립간이라 부른 임금이 넷 있다."

 신라 말의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을 지으면서 모두 무슨 왕(某王)이라 칭하고 거서간이나 마립간 등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 말이 비루하고 거칠어서 일컬을 만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면서 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 또한 옳은 일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를 갈문왕(葛文王-신라시대 임금의 존족(尊族)과 임금에 준하는 자에게 주던 칭호)이라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 시대에 낙랑국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고, 또 천봉(千鳳) 5년 무인년(18년)에 고구려의 속국 일곱 나라가 투항해 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남해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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