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한 땅에는 예부터 여섯 마을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으로,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며, 촌장은 알평(閼平)이라고 한다.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경주시 동천동의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 그 아래에 석탈해왕릉이 보임)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 조상이 되었다.(노래왕 9년에 部를 설치하고 급량부라 했는데 고려 태조 天福 5년 경자년에 중흥부(中興部)로 고쳤다.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며,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回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

 

 셋째는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으로, 촌장은 구례마(俱禮馬)라고 한다. 처음에 이산(伊山-혹은 개비산(皆比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山珍支村)으로,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라고 한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와서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으며,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터가 있는데 여기가 최치원의 옛 집이라는 설이 거의 확실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지금의 금강산(경주 북쪽에 있는 산) 백률사 북쪽산)으로 촌장은 지타(祗沱)라고 한다. 처음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한기부(韓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활아(活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양촌(明活山高耶村)으로, 촌장은 호진(虎珍)이라고 한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彌村), 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여섯 부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다. 노래왕 9년(132년)에 처음으로 여섯 부의 명칭을 고쳤고, 또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서한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연호) 원년(기원전 69년) 임자년(고본(古本)에는 건무(建武) 원년이라고도 하고 또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남쪽 언덕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군주가 없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덕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고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지금은 신라정이락 하는데 경주의 탑정동 솔밭에 있다.) 옆에 번갯불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을 뒤덮었고 백마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자주색 알(혹은 푸른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려 사내 아이를 얻었는데, 모습과 거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동천(東泉-동천사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아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 이 말은 향언(鄕言)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이라 이름하고 위호(位號)는 거슬한(居瑟邯-또는 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스스로 "알지 거서간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일컬은 것인데, 이후부터 왕의 존칭이 되었다.)이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축하하며 말했다.

 "이제 천자가 이미 내려왔으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짝을 맺어 드려야 한다."

 그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아리영정이라고도 한다.)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혹은 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갈라 얻었다고도 한다.) 여자 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닭은 새로운 태양의 도래를 알리는 새다. 이러한 닭 토템은 신성 관념의 반영이며 신라 전체의 토템으로 확장된다.) 아이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했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남자 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향인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 했기 때문에 성을 박씨로 했다. 여자 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이 열세 살이 되는 오봉(五鳳) 원년 갑자에 남자 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여자 아이를 왕후로 세웠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의 풍속에 경(京)자를 서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후세에 이르러 국호가 신라로 정해졌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후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왕후는경주의 오릉(五陵)에 혁거세와 같이 묻혀 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한곳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쫓아 다니며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五體)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보물 제1991호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출처- 문화재청)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心柱石)의 사리공(舍利孔) 및 기단부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639년(무왕 40)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제 사리외호(金銅製舍利外壺), 금제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를 비롯해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으로 구성되었다.

‘금동제 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서, 이러한 구조는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서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볼륨감과 문양의 생동감이 뛰어나 기형(器形)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

‘금제사리봉영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가 음각되었다.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이 봉영기는 그동안『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구체적으로 나아가 조성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게 된 계기가 되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청동합’은 구리와 주석 성분의 합금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6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동합 중 하나에 새겨진 백제 2품 ‘달솔 목근(達率目近)’이라는 명문을 통해 시주자의 신분이 최상층이고 그가 시주한 공양품의 품목을 알 수 있어 사료적 가치와 백제 최상품 그릇으로서 희귀성이 높다.

이처럼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백제 왕실에서 발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석탑 사리공에서 봉안 당시의 모습 그대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고대 동아시아 사리장엄 연구에 있어서 절대적 사료이자 기준이 된다.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도 최고급 금속재료를 사용하여 완전한 형태와 섬세한 표현을 구현하여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자료로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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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얼어두고

맛둥방을

밤에 몰 안고 가다.

 

<양주동 해독>

 

핵심 정리

 

1. 작자 - 서동(薯童, 백제 무왕)

2. 연대 - 신라 진평왕

3. 갈래 - 4구체 향가, 서정시

4. 성격 - 동요, 참요

5. 의의 - 현전(現傳)하는 향가 중 가장 오래된 작품

6. 주제 - 선화 공주의 은밀한 사랑, 선화 공주에 대한 연모의 정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홀로 수도 남쪽 못 가[南池]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며, 재주와 도량이 헤아일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라고 쓴다)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수도로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러고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어 두고

    서동(薯童)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동요는 수도에 가득 퍼져 궁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백관들은 힘껏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게 했다. 공주가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주었다. 공주가 유배지에 도착할 즈음, 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몰랐으나, 우연한 만남을 기뻐하며 그를 믿고 따라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런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그러고는 함께 백제에 도착하여, 어머니가 준 금을 꺼내며 앞으로 살아갈 계책을 세우자고 했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인데, 한평생의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서동이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 것이 흙덩이처럼 쌓여 있소."

 공주가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당신이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보물을 부모님의 궁월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소."

 그래서 금을 모았는데, 마치 구릉처럼 쌓였으므로 용화산(龍華山-지금의 익산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금을 운반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통력으로 옮겨 줄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궁궐에다 금을 날라다 놓았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하게 여겨 서동을 더욱 존경했고,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 일로 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도착했는데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속에서 나와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했다. 왕비가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간곡한 소원입니다."

 왕이 절을 세우는 일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 메우는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미륵법상(彌勒法像) 세 개와 회전(回殿)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했다.)라고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 돕게 했는데,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 (삼국사』에 "이는 法王의 아들이다."라고 했는데, 이 전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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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귤자(蟬橘子)에게 벗 한 분이 계시니 그는 예덕 선생(穢德 先生)이라고 하는 분이다. 종본탑(宗本塔) 동쪽에 사는데 마을 안의 똥거름을 져 나르는 것으로써 생계를 삼고 있다. 온 마을에서 그를 엄 행수(嚴行首)라고 불렀다. 행수는 상일을 하는 늙은이를 일컬음이요, 엄은 그의 성이다. 자목(子牧)이 선귤자에게 묻기를,

그 전에 선생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벗은 동거 생활을 하지 않는 아내요, 한 탯줄에서 나오지 않은 형제라고 했습니다. 벗이란 것은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한다 하는 양반님네 중에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자 하는 이가 수두룩한데도 선생님께서는 이런 분들을 상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엄 행수로 말한다면 마을 안의 천한 사람으로서 상일을 하는 하층의 처지요, 마주서기 욕스러운 자리입니다. 선생님께서 그의 인격을 높이어 스승이라고 일컬으면서 장차 교분을 맺어 벗이 되려고 하시니, 저까지 부끄러워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문하를 하직하려고 합니다.”

선귤자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거기 앉게. 속담에도 있거니와 의원이 제 병을 못 고치고 무당이 제 굿 못 한다고 하니 내 자네에게 벗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해 줌세. 자기 생각으로는 이거야말로 제 장점이라고 믿고 있는 점도 남들이 몰라준다면 어떤 사람이거나 속이 답답해서 자기 결함을 지적해 달라는 말로 말을 꺼내게 되네. 그러나 이때 칭찬만 하면 아첨에 가까워서 멋대가리가 없고, 타박만 하면 흉보는 것으로 떨어져서 본의와 틀려지네. 그러니까 그의 장점이 아닌 것을 들추어서 어름어름 당치 않은 말을 한단 말일세. 그렇게 적절한 내용이 아닌 만큼 설사 책망이 좀 과하더라도 저 편에서 골을 내지는 않을 것일세. 그러다가 숨겨 놓은 물건을 알아나 맞히는 듯이 슬그머니 그가 장점이라고 믿고 있는 그 점을 언급한단 말일세. 마치 가려운 데나 긁어 준 듯이 속마음으로 감격해 할 것일세. 가려운 데를 긁는 데도 도()가 있네그려. 등에 손을 댈 때에는 겨드랑이에 가까이 가지 말고 가슴을 만질 때에는 목을 건드리지 말아야 하네. 칭찬 같지 않게 하는 칭찬에 그 사람은 왈칵 손을 잡으면서 자기를 알아준다고 할 것일세. 그래, 이렇게 벗을 사귀면 좋겠는가?”

자목이 한 손으로 귀를 가리고 한 손은 내저으며 말하기를,

이건 선생님이 내게다가 장사치의 하는 일이나 하인놈이 하는 버릇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귤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자네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과연 저기 있지 않고 여기 있는 것일세그려. 저 엄 행수란 분이 언제 나와 알고 지내자고 요구한 적이 없었지만, 그저 내가 늘 그분을 찬양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라네. 그이 손가락은 굵직굵직하고, 그의 걸음새는 겁먹은 듯하였으며, 그가 조는 모습은 어리숙하고, 웃음소리는 껄껄대더구먼. 그의 살림살이도 바보 같았네. 흙으로 벽을 쌓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어 구멍 문을 내었으니, 들어갈 때에는 새우등이 되었다가, 잠잘 때에는 개 주둥이가 되더구먼. 아침 해가 뜨면 부석거리고 일어나, 흙 삼태기를 메고 동네에 들어가 뒷간을 쳐 날랐다네.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어도, 뒷간의 남은 찌꺼기와 말똥쇠똥, 또는 횃대 아래에 떨어진 닭거위 따위의 똥이나 돼지똥, 사람똥 따위를 가져오면서 마치 구슬처럼 여겼다네.

왕십리의 배추, 살곶이다리의 무, 석교(石郊)의 가지오이수박호박, 연희궁의 고추마늘부추, 염교 청파의 물미나리, 이태원의 토란 따위를 심는 밭들은 그 중 상()의 상을 골라 심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모두 엄씨의 똥거름을 가져다가 걸찍하게 가꿔야만, 해마다 육천 냥이나 되는 돈을 번다는 거야. 그렇지만 엄 행수는 아침에 밥 한 그릇만 먹고도 기분이 만족해지고, 저녁에도 밥 한 그릇 뿐이지. 누가 고기를 좀 먹으라고 권하면 고기 반찬이나 나물 반찬이나 목구멍 아래로 내려가서 배부르기는 마찬가지인데 입맛에 당기는 것을 찾아 먹어서는 무얼 하느냐고 하네. , 옷과 갓을 차리라고 권하면 넓은 소매를 휘두르기에 익숙지도 못하거니와, 새 옷을 입고서는 짐을 지고 다닐 수가 없다고 대답하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 되면 비로소 갓을 쓰고 띠를 띠며, 새 옷에다 새 신을 신고, 이웃 동네 어른들에게 두루 돌아다니며 세배를 올린다네. 그리고 돌아와서는 옛 올을 찾아 다시 입고 다시금 흙 삼태기를 메고는 동네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거지. 엄 행수야말로 자기의 모든 덕행을 저 더러운 똥거름 속에다 커다랗게 파묻고, 이 세상에 참된 은사(隱士) 노릇을 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엄 행수는 똥과 거름을 져 날라서 스스로 먹을 것을 장만하기 때문에, 그를 지극히 조촐하지는 않다고 말할는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그가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웠으며, 그의 몸가짐은 지극히 더러웠지만 그가 정의를 지킨 자세는 지극히 고항(高亢)*했으니, 그의 뜻을 따져 본다면 비록 만종(萬種)의 녹(錄)을 준다고 하더라도 바꾸지 않을 걸세. 이런 것들로 살펴본다면 세상에는 조촐하다면서 조촐하지 못한 자도 있고, 더럽다면서 더럽지 않은 자도 있다네.

누구든지 그 마음에 도둑질할 뜻이 없다면 엄 행수를 갸륵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야. 그리고 그의 마음을 미루어 확대시킨다면 성인의 경지에라도 이를 수 있을 거야. 대체 선비가 좀 궁하다고 궁기(窮氣)를 떨어도 수치스런 노릇이요, 출세한 다음 제 몸만 받들기에 급급해도 수치스러운 노릇일세. 아마 엄 행수를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거의 드물 것이네. 그러니 내가 엄 행수더러 스승이라고 부를지언정 어찌 감히 벗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러기에 내가 엄 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 선생이란 호를 지어 일컫는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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