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정병헌· 이지영, 돌베개, 2007

.

가. 허난설헌

 허난설헌(1563~1589) 사대부 여류 시인으로 조선조 국문학 사상 여류 한시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류 한문학은 기녀가 담당했지만, 일부 사대부 여성들 가운데서도 한시에 상당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 간혹 있었다. 그 가운데 신사임과 함께 허난설헌은 조선 중엽 사대부 남성 위주의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남성들이 다루지 못하는 여인의 한과 사랑의 정서를 시에 아로새겼다. 그녀는 진취적이고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후대까지 높이 평가되는 독특한 작품의 세계를 이룩하였다.

 

. 허난설헌의 생애

 

 허난설헌의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며, 난설헌은 그녀의 호이다. 본관이 양천(陽川)으로, 부친은 학자요 문장가로 유명한 초당(草堂) 허엽(許曄)이다. 초당공은 첫째 부인 한씨로부터 아들 허성(許筬)과 두 딸을 얻었고, 둘째 부인 김씨로부터 허봉(許篈) 허난설헌 허균을 얻었다. 난설헌은 부친이 강릉부사로 재직할 때 강릉의 초당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8세 때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난설헌이 글에 관심을 보이자 친오빠인 허봉은 누이동생을 직접 가르쳤다. 봉은 누이를 자기의 글 친구인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때 허균도 함께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오빠와 이달을 통한 문장 수업은 그녀의 작품 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첫째 난설헌이 당대의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둘째로 중국의 당시를 익힘으로써 당시풍(唐詩風) 시를 짓게 되었다.

난설헌이 가진 문학적인 자질은 허문(許門)에서 싹트고 닦아졌지만, 남성 문인들처럼 열린 공간에서 발휘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작품을 가다듬고 만들어낸 공간은 규방이었다.

 

14,15세 무렵 한 살 위인 안동 김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다. 김성립의 집안 사람들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으나, 막상 그는 능력이 변변치 못했던 듯하다. 그는 난설헌이 27세로 죽은 해에야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도 정8품인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다.

 

 난설헌은 남편과의 금슬이 좋지 못하였다. 그녀는 결혼 생활 초부터 남편이 글공부에만 매달려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게다가 벼슬이 없던 남편은 똑똑한 부인을 외면하였다.

무엇보다도 난설헌은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컸다. 그녀가 바느질이나 살림보다 독서와 글짓기를 좋아했으니, 이런 며느리를 곱게 봐줄 리 없었다. 그런데 시가(媤家)에서의 고통과 불화는 어쩌면 그녀의 성격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그것은 허씨 가문의 사람들이 대체로 남들과의 관계에서 조화롭게 지내지 못했다는 지적 때문이다. 허엽, 허성, 허봉 등은 직언을 잘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적이 많았고, 허균도 경솔하고 경박하다는 평을 받았다.

 

 허난설헌의 가슴에 맺힌 한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이 넓은 세상에 하필 조선에 태어났는가, 또 하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마지막으로 왜 수많은 남자 가운데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한편, 그녀가 의지할 곳은 자식밖에 없었겠지만 두 아이는 일찍이 차례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잃었다.

 

 난설헌은 가정적인 불행을 겪으면서 독서와 글짓기에 몰두하였다. 그녀가 지어낸 한시는 대부분 이러한 규방의 공간을 통해 배출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갇혀 있는 규방에서 사랑의 그리움과 울분을 시로 읊어갔다. 남편이 아내를 멀리하고 화류계의 여자들과 놀아날 때, 그녀는 한편으로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그리움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미움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이렇게 불행한 결혼 생활뿐만 아니라, 친정집의 불행까지 잇달아 닥쳐왔다. 부친 허엽은 그녀가 18세 때 경상감사 벼슬을 마치고 서울로 오는 도중에 상주 객관(客館)에서 죽었고, 오빠 허봉은 그녀가 21세 때 갑산으로 귀양을 갔다. 허봉은 3년 만에 유성룡과 노수신(盧守愼)의 노력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난설헌이 죽기 1년 전에 객사하고 말았다. 벼슬에 뜻이 없어 백운산에 들어가 글을 읽으며 자연을 즐기다가, 술이 지나쳐 병을 치료하러 산을 나왔다가 금화현의 생창역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허봉은 동인(東人)으로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 선조 16(1583)에 귀양을 갔다.

 

 그나마 동생 허균마저 귀양을 가게 되어 그녀에게는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녀는 27(1589)의 짧은 나이로 그만 꽃다운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그동안 자신이 써두었던 시문을 모두 태워버리라고 유언하였다. 따라서 그녀가 지어 직접 모아두었던 많은 시편들은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나이 27세 되던 해에 홀연히 의관을 정제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 9의 수(27)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눈을 감았다고 한다. 패림(稗林)이순록(二旬錄)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연꽃 스물 일곱 송이는 그녀의 향년 연수와 같으니, 실로 자신의 죽을 나이를 예견한 시참(詩讖)’이라 할 만하다.

 

 난설헌에게 한을 남겼던 남편 김성립은 부인이 죽은 그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곧바로 남양 홍씨와 결혼했으나 요절하 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병을 막다가 31세의 나이로 전사한 것이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의관만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재혼한 탓에 남양 홍씨와 합장되었다. 허난설헌은 죽어서도 혼자 누워 있게 된 셈이다.

 

. 허난설헌의 문학 세계

 

 난설헌의 작품은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그러나 현재 전해오는 작품들은 그녀의 친정에 보관되었던 것을 허균이 문집으로 엮은 것이다. 허균이 난설헌 시집을 처음 엮은 것은 난설헌이 죽은 지 1년 뒤인 1590년으로, 그는 유성룡의 발문(跋文)을 붙여 아는 이들에게 몇 부 필사하려 돌렸다. 그후 1598년 정유재란의 원군(援軍)으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편을 외워주었다. 나중에 오명제는 중국으로 돌아가 조선시선(朝鮮詩選)을 엮었는데, 다시 이를 저본으로 삼아 열조시집(列朝詩集)명시종(明詩綜)등에 차례로 실렸다.

 

 허균은 또한 1606년에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정사(正使) 주지번(朱之蕃)과 부사(副使) 양유년(梁有年)이 들어오자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접대하면서, 누님의 시를 중국에 알리기 위해 난설헌고초고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하여 주지번에게는 소인(小引), 양유년에게는 제사(題辭)를 얻게 되었고, 그는 이것들을 묶어서 16084월에 공주목사로 재직하던 도중 그곳에서 난설헌집을 출간하였다. 중국에서는 난설헌의 문집이 발간되어 대단한 평판을 받았다.

 

 현재 전해오는 대부분의 난설헌 문집의 판본은 1692(숙종 18)에 동래부(東萊府)에서 중간(重刊)된 것이다. 난설헌집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전해져 1711(숙종 37)에 분다이야에 의해 간행되었다. 또한 1913년에는 안왕거가 허경란의 경란집부록으로 붙여 신활자본으로 서울의 신해음사에서 다시 발간하였다.

 

 문집에 전하는 작품을 보면 시가 210, ()1, 그리고 산문이 2편인데, 이 가운데 칠언절구 시가 142편으로 작품 수가 많은 편이다. 이 밖에도 다른 문헌에 그녀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작품들이 몇 편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문집 속에 있는 작품들이 진짜 난설헌의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조선조 문인들이 약간의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들이 중국시의 표절이라는 신흠의 주장과, 일부 중국 시인의 작품이 첨가되었다는 김만중의 주장, 그리고 허균이 위작했을 것이라는 이수광의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들이 중국시의 표절이라면 중국인들이 그녀의 작품을 보고 문집을 간행할 때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들 주장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허난설헌의 남아 있는 한시 작품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들이 발견된다. 첫째,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을 초탈하려는 염원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시에는 신선이라는 낱말이 자주 등장하다. 시속에 등장하는 선계(仙界)는 가정적인 불운을 현실적으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초탈의 염원을 드러낸 이상세계라 할 수 있다.

 

 둘째로 난설헌의 시를 보면 여성의 삶의 고뇌와 고민을 드러내며, 또한 다른 미천한 여성의 처지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녀의 시에는 여성 특유의 사랑의 감정이 잘 드러난다. 애정을 다룬 시들은 자식과 형제간의 사랑을 읊은 시들과, 남녀간 사랑의 감정을 읊은 시들로 다시 나누어진다.

 

 셋째로 난설헌은 당대의 사회적인 현실 문제를 비판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곧 백성의 다양한 군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장사꾼들의 애환을 그리거나, 유흥가 내지는 유곽가를 노래한다. 더러는 변방에 출정나간 군사들의 사정이나 성을 쌓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대사회적인 관심은 규방에서 지내는 사대부 여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일부 논자들은 난설헌이 이들 시를 과연 지었을까 하는 의심을 눈길을 보내고 있다

 

난설헌은 규원가, 봉선화가를 남긴 작가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을 그녀가 지은 것으로 보는 데에는 아직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규원가의 경우 고금가곡(古今歌曲)에서는 그녀의 작품이라 하였지만, 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에서는 허균의 첩인 무옥(巫玉)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가람 이병기는 난설헌의 한시 소년행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보는 데에 동의한다.

 

그리고 봉선화가정일당잡지(貞一堂雜誌)에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데, 이를처음 소개한 가람 이병기는 내용상 난설헌의 염지봉선화가」 ‧ 「선요(仙謠)」 ‧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의 일부 구절과 같다는 이유를 들어 그녀의 작품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을 정일당 김씨가 지었다는 주장도 많은 편이어서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조선 역사 속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계사 - 작자 미상  (0) 2023.03.21
소대성전 – 작자 미상  (2) 2023.03.15
허균 - 그저 홍길동전 작가로만 알기에는 파란만장한 그  (0) 2022.08.24
이생규장전(전문)  (0) 2020.07.15
김시습  (0) 2020.07.15

출처 :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정병헌· 이지영, 돌베개, 2007.

 

 

. 허균

허균(許筠,1569-1618)은 일반적으로 국문소설의 효시작으로 알려진 홍길동전을 지었다. 그는 당시 엄격한 유교 윤리와 예학에 사로잡힌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양명학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 천주교 등 여러 방면의 지식을 수용했다. 아울러 독창적인 우리 문학을 주장했으며 억압받던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남겼다.

 

. 허균의 생애

 

허균의 자는 단보(端甫)요 호는 교산, 학산, 백월거사 등이고, 본관은 양천이다. 그는 학자요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막내아들이다. 부친 허엽은 청주 한씨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허성(許筬)과 두 딸을 두었는데, 한씨 부인이 죽자 다시 예조참판 김광철의 여식을 후취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강릉 김씨 부인 사이에서 허봉(許篈), 허난설헌(許蘭雪軒), 허균을 낳았다.

 

허균은 서울의 마른내(지금의 오장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강릉을 그의 출생지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허균의 부친이 그가 태어나기 이태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온 뒤 서울에서 내직(內職)으로 벼슬살이해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출생지가 서울일 것으로 짐작된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두 형, 곧 허성, 허봉뿐만 아니라 누이인 허난설헌까지 모두 글재주가 뛰어났던 점을 감안한다면, 어린 시절 허균의 뛰어난 글재주는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허균의 학문은 친형 허봉과 누이로부터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허균은 의금부도사 김대섭의 딸과 혼인한 17세 무렵에, 귀양에서 풀려난 둘째 형에게 고문(古文)과 한유(韓愈)소동파(蘇東坡)의 시를 배웠으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다.

 

허균은 문학수업을 하던 시기에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삼당파 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이었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 당시 원주의 손곡리에 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신분이 천한 탓에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허균이 서류천인(庶類賤人)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모두 이 스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20세 되던 해 허균은 그를 아껴주던 둘째 형 허봉을 잃었다. 더욱이 생원시험에 합격한 이듬해 22세에는 그를 가장 아껴주던 누이 허난설헌마저 죽었다. 막내로서 친형과 친누이를 잃은 허균의 충격을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

24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하여 함경도 단천 땅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부인 김씨와 첫아들을 잃고 만다. 허균은 29세 되던 해 김효원(金孝元)의 딸을 재취로 맞이하였다.

 

26(1954, 선조27)되던 해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사관(史官)으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29세 때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병조좌랑으로 있던 이듬해, 황해도 도서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기생들을 그곳 임지까지 데려와 즐기고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직무를 등한히 한 죄로 부임한 지 여섯 달 만에 파직당하였다. 파직과 복직의 파란만장한 벼슬살이가 시작된 셈이다. 허균의 뛰어난 문학작품은 벼슬길에서 물러난 시련과 고난의 시기에 이루어졌다.

 

33세 때 형조정랑을 거쳐 이듬해는 사예(司藝),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36세 되던 해에는 수안군수(遂安郡守) 재직 시절 불교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두 번째 파직을 당하였다. 그는 이 무렵 불교에 빠져들어 한때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37세에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었는데 그에게 학문과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누이 허난설헌이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누이의 시집을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이듬해에 삼척부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석 달 만에 파직되었다.

 

40에 다시 공주목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서류(庶類)들과 어울렸다. 그는 처삼촌인 심우영, 이경준 등과 사귀었으며, 또한 그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광해군이 보낸 충청지방 암행어사의 감사에 걸려 또 다시 파직되었다.

 

그후 허균은 전라도 부안의 봉산(蓬山)에 내려가 그곳의 산천을 유람하였다. 이때 명기(名妓) 매창(梅窓)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원래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劉希慶)과 깊은 정을 나누고 있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를 보면 그가 매창과 시를 읊으며 즐기다가 밤이 되자 매창이 그녀의 조카딸을 자신의 침소로 들여보낸 일을 기록하고 있다.

 

41(1609) 되던 해 명나라의 책봉사신이 오자 원접사 이상의의 부름을 받아 서장관의 일을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고 이어서 형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성절사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했다가 면직되었다. 그러다가 이 해에 궁중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의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이때 자서제질사돈방(子壻弟姪查頓榜)’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박승종, 이이첨 등이 친인척을 과거에 부정으로 합격시킨 사건인데, 허균도 이때 큰형의 둘째 아들과 여서(女壻) 박홍도를 부정으로 뽑았다. 이 일로 인하여 42일 동안 옥고를 겪은 뒤 전라도 함산으로 유배당했다. 이 사건은 허균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세력이 없던 자기만 유배당했기 때문이다. 그 뒤 허균은 처세를 완전히 바꾸어 당시 대북파(大北派)의 영수로 권력을 휘두르던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며 가까이 지내게 된다. 게다가 2년 뒤 서자 출신의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의 칠서지옥(七庶之獄)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더욱 이이첨과 가까이 지냈다. 이 옥사는 박응서 등이 주동이 되어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된 것인데, 그들과 평소에 어울리던 허균은 여기서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

 

44세 되던 해, 당쟁의 회오리에 의지가 되었던 큰형 허성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허균은 이이첨과 친하게 지내면서 이이첨이 주선한 벼슬 호조참의의 신분으로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을 다녀왔고(46) 다시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사인 민형남(閔馨男)의 부사(副使)가 되어 중국에 갔다. 중국을 왕래하면서 그는 명나라의 학자들과 사귀는 동시에 태평광기뿐만 아니라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 등을 얻어 국내에 가져왔다. 두 번에 걸친 사신 일로 인해 그는 48세에 형조판서가 되어 광해군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 윤선도(尹善道)가 이이첨의 권력 남용을 탄핵하는 상소(1616)를 올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광해군은 이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첨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 폐모론을 들고 나왔다. 이 때 49세로 좌참찬(左參贊)의 직위에 있던 허균은 이이첨의 조종에 따라 폐모론을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고 그 흉계를 꾸미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허균은 유생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폐모론을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의 아들 기준적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그런데 이이첨은 허균이 광해군의 총애를 받는데다가 허균의 딸이 왕의 후궁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보고,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50세가 되던 8, 남대문에 괴서가 붙여진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이 일은 허균의 심복인 서얼 출신 현응민(玄應旻)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이이첨은 허균과 기준격을 대절심문시킨 끝에 역적 모의의 죄목을 뒤집어씌어, 허균을 그의 동료들과 함께 서쪽 저자거리에서 책형(磔刑-능지처참형)으로 죽이고 말았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 허균에 대한 평가

 

허균에 대해서는 총명하고 영민하여 시를 짓고 감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내려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목대비의 폐모를 앞장서서 주장하고 기생이나 무뢰배들과 어울려 지내는 등의 반인륜적이고 경박한 행위를 일삼는다는 이유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허균은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잦은 파직을 당하면서도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서장관으로 활동하는 등 그만큼 글재주가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허균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막내로서 부친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의 편애를 받으면서 자라 자유롭고 무절제한 생활에서 비롯된 탓도 있다. 하지만 기존의 지식 외에도 새롭고 다양한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그의 진보적인 개방성과 천재적인 능력, 개혁성과 진보성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 허균의 사상

 

허균은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불여세합(不與世合)’,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때의 세상은 기존의 완고한 중세적 질서를 말한다. 그는 벼슬살이에서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겪었다. 그는 서얼들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한 죄목으로 죽음을 당할 만큼 기존의 체제와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행위를 보여주었다.

 

홍길동전이 허균이 지었다는 사실은 택당 이식(李植)택당집별집의 기록에 근거할 뿐, 그 밖의 어느 문헌에도 더 이상 자세한 사실은 남아있지 않다.

 

허균의 정치사상은 성소부부고()’의 형식으로 된 각종 글 속에 제시되고 있는데, 대체로 내정의 개혁, 국방정책의 강화, 신분계급의 타파 등으로 정리된다.

 

허균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논설은 호민(豪民)유재(遺財)이다. 호민론에서는 위정자가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백성을 객관적 사회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정도에 따라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나누면서 이들의 저항적 잠재력을 예리하게 파악하였다. 그에 의하면 세 부류의 백성 가운데 호민은 가장 무서운 존재로, 나라의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적당한 때가 오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호민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호민이 나머지 두 부류의 백성을 모아 기존 체제에 반기를 들면 농민저항이 된다. 허균은 한나라 때의 황건적, 당나라 때의 황소, 그리고 우리나라의 견훤과 궁예가 호민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 홍길동전의 주인공 길동은 호민의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유재론에서 그는 불평등한 인재등용을 비판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의 모순된 제도 아래서 인간의 차별 문제를 부각시켰다. 그는 인재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인데, 나라에서 가문과 과거만으로 등용을 제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는 인재로서 서자와 개가한 집 자손을 들고 있다. 적서차별을 부르짖는 홍길동전이야말로 이러한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허균은 당시에 이단시되던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한 때 출가를 생각했을 만큼 불교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으며 불교를 신봉하여 자주 파직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허균은 불교적 지식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학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허균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그의 심리적인 갈등과 관련이 깊다. 그는 문파관작의 첫 번째 시에서 불교를 대하는 것은 마음이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벼슬살이에 대한 좌절과 가정적 불행에 따른 마음의 불안정을 위안받기 위하여 불교에 심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허균은 도교에 대해서는 주로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허균은 노자를 비롯하여 31열선(列仙)에 대한 찬()도 지었으며, 단학 수련에도 상당한 지식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은둔사상을 동경하여 4천 권이 넘는 중국 선가(仙家)의 서적을 발췌하여 한정록(閑情錄)으로 집대성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서학(천주교)에도 관심을 가져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이에 관한 기도문을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 허균의 문학

 

허균은 문학에 대해서 우선 감정의 자유로운 발현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남녀의 장욕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감히 어길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백성의 진솔한 감정이 토로된 국풍(國風), 곧 민용를 시도(詩道)의 정도(正道)로 삼았다.

또한 자연스런 감정을 발현하기 위하여 현실의 체험을 중시하거나 인간의 꾸밈없는 마음의 경지를 포착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문장이 부귀공명의 편안함보다는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야 더욱더 묘경(妙境)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유배생활을 통해 터득한 바이다.

 

허균은 개성을 중시하는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 역대 한시의 대가들의 글을 인용하는 의고주의(擬古主義)’를 비판하고 자기만의 글과 개성을 강조했다. 또한 개성적인 시를 쓰기 위해서는 상어(常語)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어란 당대의 일상어로 한자를 완전히 버린 것이라기보다는 비어(卑語)나 속어(俗語)를 섞어 쓴 우리말식 한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허균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우리 것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과 독창적인 문학에 대한 자각은 고루한 인식에 젖어 있던 당대 사대부의 문학관과는 상당히 달랐다.

 

. 허균의 산문

 

⓵ 『홍길동전은 허균의 친필본이나 그가 생존하던 당시와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진 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19세기나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판본만 있는데, 허균 시대와는 거의 3백 년 가량의 시간적 격차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이 과연 한글로 지어졌는지, 아니면 한문으로 지어진 것인지부터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한문본은 유일하게 서강대 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30장본)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송도(松都:개성) 낙타교 옆에 이생이 살고 있었는데, 나이는 열 여덟이었다. 풍운이 맑고 재주가 뛰어나 일찍부터 국학(國學)에 다녔는데, 길을 가면서도 시를 읽었다.

선죽리(善竹里) 귀족집에서는 최씨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나이는 열대 여섯쯤 되었다. 태도가 아리땁고 수도 잘 놓았으며, 시와 문장도 잘 지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풍류로워라 이총각

아리따워라 최처녀.

그 재주와 그 얼굴을

누군들 찬탄치 않으랴.

 

이생은 일찍부터 책을 옆에 끼고 학교에 다닐 때에 언제나 최씨네 집 북쪽 담 밖으로 지나다녔다. 수양버들 수십 그루가 간들거리며 그 담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느 날 이생이 그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담 안을 엿보았더니,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고 벌과 새들이 다투어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 곁에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꽃떨기 사이로 은은히 보였다. 구슬발이 반쯤 가려 있고 비단 휘장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수를 놓다가 지쳐 잠시 바늘을 멈추며 턱을 괴고 시를 읊었다.

 

사창(紗窓)에 홀로 기대앉아 수놓기도 귀찮구나.

온갖 꽃 떨기 속에 꾀꼬리 소리 다정도 해라.

마음속으로 부질없이 봄바람을 원망하며

말없이 바늘 멈추고는 생각에 잠겼어라.

 

저기 가는 저 총각은 어느 집 도련님일까.

푸른 옷깃 넓은 띠가 늘어진 버들 사이로 비쳐 오네.

이 몸이 죽어 가서 대청 위의 제비 되면

주렴 위를 가볍게 스쳐 담장 위를 날아 넘으리.

 

이생은 그 여인이 읊은 시를 듣고 마음이 근질근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집의 담이 높고도 가파르며 안채가 깊숙한 곳에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마음으로 (학교에)갔다.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흰 종이 한 장에다 시 세 수를 써서 기와 쪽에 매달아 담 안으로 던져 넣었다.

 

무산 열두 봉우리 첩첩이 쌓인 안개 속에

반쯤 드러난 봉우리가 붉고도 푸르구나.

양왕의 외로운 꿈을 수고롭게 하지 마오.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양대에서 만나 보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되어 탁문군(卓文君)을 꾀어내려니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은 이미 다 이루어졌네.

붉은 담머리의 복사꽃과 오얏꽃은

바람에 날려서 어디로 떨어지나.

 

좋은 인연되려는지 나쁜 인연 되려는지

부질없는 이 내 시름 하루가 일 년 같아라.

스물 여덟 자로 황혼의 기약을 맺었으니

남교에서 어느 날 신선을 만나려나.

 

최랑이 몸종 향아(香兒)를 시켜서 그 편지를 주워다 보니, 바로 이생이 지은 시였다. 최랑이 그 시를 펼쳐서 두세 번 읽고는 마음속으로 혼자 기뻐하였다. 종이쪽지에 여덟 자를 써서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님이여. 의심 마세요. 황혼에 만나기로 하세요."

이생이 그 말대로 황혼이 되자 최랑의 집을 찾아갔다. 갑자기 복사꽃 한 가지가 담 위로 넘어오면서 하늘거리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생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넷줄이 대바구니를 매어서 아래로 늘어뜨려 놓았다. 이생을 그 줄을 잡고 담을 넘었다.

마침 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꽃 그림자가 땅에 비껴 맑은 향내가 사랑스러웠다. 이생은 자기가 신선 세계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여 마음은 비록 기뻤지만, 자기의 마음이나 지금 하려는 일이 비밀스러워서 머리칼이 모두 곤두섰다.

이생이 좌우를 둘러보았더니, 최랑은 꽃떨기 속에서 향아와 같이 꽃을 꺾어 머리에 꽂고는, 외진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최랑이 이생을 보고 방긋 웃으면서 시 두 구절을 먼저 읊었다.

 

복사와 오얏 가지 속에 꽃송이 탐스럽고

원앙새 베개 위엔 달빛도 고와라.

 

이생이 뒤를 이어 시를 읊었다.

 

다음날 어쩌다가 봄소식이 새나간다면

무정한 비바람에 더욱 가련해지리라.

 

최랑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하였다.

"저는 본디 당신과 함께 부부가 되어 끝까지 남편으로 모시고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어요. 그런데 당신은 어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저는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마음이 태연한데, 장부의 의기를 가지고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다음날 규중의 일이 누설되어 친정에서 꾸지람을 듣게 되더라도, 제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향아야. 방 안에서 술과 안주를 가져오너라."

향아가 시키는 대로 가버리자, 사방이 고요하여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이생이 최랑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최랑이 말하였다.

"이곳은 뒷동산에 있는 작은 누각 아래이지요. 저희 부모님께서는 제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여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연못가에다 이 누각을 따로 지어 주셨지요. 봄이 되어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면 몸종 향아와 함께 즐겁게 놀라고 하신 거지요. 부모님이 계신 곳은 여기서 멀기 때문에 아무리 웃으며 크게 이야기해도 쉽게 들리지는 않는답니다."

최랑이 술 한 잔을 따라 이생에게 권하면서 고풍(古風)으로 한 편을 읊었다.

 

부용못 푸른 물을 난간에서 굽어보다

꽃떨기 속에서 님들이 속삭이네.

향그런 안개 깔린 속에 봄빛이 화창해서

새 가사를 지어내어백저사(白紵詞)를 부르는구나.

꽃그늘에 달빛이 비껴 털방석에 스며들고

긴 가지 함께 잡으니 붉은 꽃비가 떨어지네.

바람이 향내를 끌어와 옷 속에 스며들자

첫봄을 맞은 아가씨가 햇살 속에 춤추네.

비단 적삼 가볍게 해당화를 스쳤다가

꽃 사이에 졸고 있던 앵무새만 깨웠네.

 

이생도 바로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도원에 잘못 들어와 복사꽃이 만발한데

많고 많은 이 내 정회(情懷)를 다 말할 수가 없네.

구름같이 쪽찐 머리에 금비녀 낮게 꽂고

산뜻한 봄 적삼을 모시 베로 지었구나.

나란히 달린 꽃가지를 봄바람에 꺾다니

하많은 꽃가지에 비바람아 부지 마소.

선녀의 소맷자락 나부껴 그림자도 하늘거리고

계수나무 그늘 속에선 시름이 따를 테니

함부로 새 곡조 지어 앵무새에게 가르치지 마오.

 

술자리가 끝나자 최랑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오늘의 일은 반드시 작은 인연이 아니랍니다. 당신은 저를 따라오셔서 정을 나누는 것이 좋겠어요."

말을 마치고 최랑이 북쪽 창문으로 들어가자 이생도 그 뒤를 따라갔다. 누각에 달린 사다리가 있었는데,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과연 그 다락이 나타났다. 문방구와 책상들이 아주 말끔했으며, 한쪽 벽에는연강첩장도(烟江疊 )유황고목도(幽篁古木圖)가 걸려 있었는데, 모두 이름난 그림이었다. 그 그림 위에는 시가 씌어 있었는데, 누가 지은 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첫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어떤 사람의 붓끝에 힘이 넘쳐

이 강 속에다 겹겹이 쌓인 산을 그렸던가?

웅장해라. 삼만 길의 저 방호산(方壺山)

아득한 구름 사이로 반쯤만 드러났네.

저 멀리 산세(山勢)는 몇백 리까지 뻗어 있는데

푸른 소라처럼 쪽진 머리가 가까이 보이네.

끝없이 푸른 물결 공중에 닿았는데

저녁노을 바라보니 고향이 그리워라.

이 그림 구경하며 사람 마음이 쓸쓸해져

소상강 비바람에 배 띄운 듯하여라.

 

둘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쓸쓸한 대숲에선 가을 소리가 들리는 듯

비스듬히 누운 고목은 옛정을 품은 듯해라.

구부러진 늙은 뿌리엔 이끼가 가득 끼었고

굵고 곧은 가지는 바람과 천둥을 이겨 왔네.

가슴속에 간직한 조화가 끝이 없으니

미묘한 이 경지를 누구에게 말할 텐가.

위언(韋偃)과 여가(輿可)도 이미 귀신이 되었으니

천기를 누설할 자가 그 몇이나 되려나.

갠 창가 그윽한 곳에서 말없이 바라보니

삼매경에 든 필법이 못내 사랑스러워라.

 

한쪽 벽에는 사철의 경치를 읊은 시를 각각 네 수씩 붙였는데, 역시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글씨는 송설(松雪)의 서체를 본받아 자체가 아주 곱고도 단정하였다.

그 첫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연꽃 그린 휘장은 따뜻하고 향내는 실같은데

창밖에 붉은 살구꽃이 비 내리듯 하는구나.

다락 머리에서 새벽 종소리에 남은 꿈을 깨고 보니

개나리 무성한 둑에 때까치가 우짖네.

 

제비새끼 커 가는데 안방 깊숙이 들어앉아

귀찮은 듯 말도 없이 금바늘을 멈추었네.

꽃 아래로 쌍쌍이 나비들 짝 지어 날며

그늘진 동산으로 지는 꽃을 따라가네.

 

꽃샘 추위가 초록 치마를 스쳐 가면

무정한 봄바람에 이 내 간장 끊어지네.

말없는 이 심정을 그 누가 안다더냐.

온갖 꽃 만발한 속에 원앙새가 춤추는구나.

 

깊어 가는 봄빛을 뉘 집 동산에 간직했나?

붉은 꽃잎 푸른 나뭇잎 사창에 비치었네

뜨락의 꽃과 풀들은 봄시름에 겨웠는데

주렴을 가볍게 걷고 지는 꽃을 바라보네.

 

그 둘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밀이삭 처음 베고 제비 새끼 날아드는데

남쪽 뜰엔 석류꽃이 두루 피었구나.

푸른 창가에 앉아 길쌈하는 아가씨는

붉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새 치마를 지으려네.

 

매실이 익는 철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홰나무 그늘에 꾀꼬리 울고 제비는 주렴으로 날아드네.

또한 해 봄 풍경이 시들어 가니

고련꽃 떨어지고 죽순이 삐죽 솟았네.

 

푸른 살구 손에 쥐고 꾀꼬리에게 던져 보네.

남쪽 난간에 바람 일고 해그림자 더디어라.

연잎에 향내 가시고 못에는 물이 가득한데

푸른 물결 깊은 곳에서 원앙새가 목욕하네.

 

등 평상 대자리에 무늬가 물결 지고

소상강 그린 병풍에는 구름이 한 자락 있네.

낮꿈을 깨고도 나른해 누웠더니

반창에 비낀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가네.

 

그 셋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가을 바람이 쌀쌀해서 찬이슬이 맺히고

달빛도 고와서 물빛 더욱 푸르구나.

한 소리 또 한소리 기러기 울며 돌아가는데

우물에 오동잎 지는 소리를 다시금 듣고파라.

 

상 밑에서는 온갖 벌레들이 처량하게 울고

상 위에서는 아가씨가 구슬 눈물을 떨어뜨리네.

만리 밖 싸움터에 몸을 바친 님에게도

오늘밤 옥문관(玉門關)에 달빛이 환하겠지.

 

새 옷을 마르려니 가위가 차가워라.

나직이 아이 불러 다리미를 가져오라네.

다리미에 불 꺼진 걸 살피지 못하다가

머리를 긁으며 피리대로 가만히 헤치네.

 

작은 연못에 연꽃도 지고 파초 잎도 누래지자

원앙 그린 기와 위에 첫서리가 내렸네.

묵은 시름 새 원한을 막을 길이 없는데

귀뚜라미 울음까지 골방에 들리네.

 

그 넷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한 가지 매화 그림자가 창 앞으로 뻗었는데

바람 센 서쪽 행랑에 달빛 더욱 밝아라.

화롯불 꺼졌는지 부저로 헤쳐 보고는

아이를 불러다 차솥을 바꾸라네.

 

밤서리에 놀란 잎이 자주 흔들리고

돌개바람이 눈을 몰아 긴 마루로 들어오네.

님 그리워 밤새도록 꿈속에 뒤척이니

빙하(氷河)가 어디런가, 그 옛날 전쟁터일세.

 

창에 가득한 붉은 해는 봄날처럼 따뜻한데

시름에 잠긴 눈썹에 졸음까지 더하네.

병에 꽂힌 작은 매화는 필 듯 말듯 하는데

수줍어 말도 못하고 원앙새만 수놓는구나.

 

쌀쌀한 서리 바람이 북쪽 숲을 스치는데

처량한 까마귀가 달을 보며 우는구나.

등불 앞에 님 생각 눈물 되어 흐르니

실에도 떨어지고 바늘에도 떨어지네.

 

한쪽에 작은 방 하나가 따로 있었는데, 휘장 . . 이불 .베개들이 또한 아주 깨끗하였다. 휘장밖에는 사향을 태우고 난향의 촛불을 켜놓았는데, 환하게 밝아서 마치 대낮 같았다. 이생은 최랑과 더불어 마음껏 즐거움을 누리면서 여러 날 머물었다.

(어느 날) 이생이 최랑에게 말하였다.

"옛 성인의 말씀에,'어버이가 계시면 나가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제 내가 부모님을 떠난 지가 사흘이나 되었소. 부모님께서 반드시 대문에 기대어 기다리실 테니, 이 어찌 아들의 도리라고 하겠소?"

최랑은 서운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을 넘어 보내 주었다. 이생을 이 뒤부터 저녁마다 최랑을 찾아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에 이생의 아버지가 이생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네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것은 옛 성인의 어질고 의로운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요즘은 저녁에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반드시 경박한 놈들의 행실을 배워 남의 집 담을 넘어서 아가씨나 엿보고 다닐게다.

이런 일이 만일 탄로되면 남들은 모두 내가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지 못했다고 책망할 것이다. 또 그 처녀도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이라면 반드시 네 미친 짓 떄문에 그 집안을 더럽히게 될 것이다. 남의 집에 죄를 지었으니, 이 일이 작지 않다. 너는 빨리 영남으로 내려가서 종들을 데리고 농사나 감독하거라.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그 이튿날 (이생의 아버지가 이생을) 울주로 내려보냈다.

최랑은 저녁마다 화원에서 이생을 기다렸지만, 여러 달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최랑은 이생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여, 향아를 시켜 이생의 이웃들에게 물래 물어 보게 하였다. 이웃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도령은 그 아버지에

 

게 죄를 지어 영남으로 떠난 지가 벌써 여러 달이나 되었다오."

최랑은 이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침상에 누웠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일어나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였다. 말도 앞뒤가 맞지 않았으며, 얼굴이 초췌해졌다.

최랑의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 그 병의 증상을 물었지만, 묵묵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딸의 상자 속을 들추어보았더니, 이생과 지난날에 주고받은 시들이 있었다. 최랑의 부모들이 그제야 놀라서 무릎을 치며 말하였다.

"어이구. 우리 딸자식을 잃어버릴 뻔했구려."

그리고는 딸에게 물었다.

"이생이 누구냐?"

이렇게 되자 최랑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목구멍에서 겨우 나오는 소리로 부모에게 아뢰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길러 주신 은혜가 깊으니, 어찌 사실을 슴기겠습니까? 저 혼자 생각해보니 남녀가 서로 사랑을 느끼는 것은 인정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결혼할 좋은 시기를 놓치지 마라'는 말은"시경(詩經)의 주남(周南)편에도 나타나고, '여자가 정조를 지키지 못하면 흉하다'는 말은주역(周易)에서도 경계하였습니다.

저는 버들처럼 가냘픈 몸으로 얼굴빛이 시드는 것은 생각지 않고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옆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새삼 덩굴이 다른 나무에 의지해서 살듯이 저는 벌써 위당(渭塘)의 처녀 노릇을 가게 되었으니, 죄가 이미 가득 차 집안에까지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 아름다운 도련님과 한 번 정을 통한 뒤부터는 도련님께 대한 원망이 천만 번 생기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몸으로 괴로움을 참으며 홀로 살아가려니, 그리운 정은 나날이 깊어 가고 아픈 상처를 나날이 더해 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원한 맺힌 귀신으로 화()해 버릴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남은 목숨을 보존하게 되고, 이 간절한 청을 거절하신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생과 저승에서 다시 만나 노닐지언정, 맹세코 다른 가문에는 오르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부모도 이미 그의 뜻을 알았으므로 다시는 병의 증세를 묻지 않았다. 타이르고 달래면서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리고는 중매쟁이의 예를 갖추어 이생의 집으로 보냈다.

이생의 아버지가 최씨 집안이 얼마나 번성한지 물은 뒤에 말하였다.

"우리 집 아이가 비록 어린 나이에 바람이 났지만, 학문에 정통하고 사람답게 생겼소. 앞으로 장원급제할 것이며 훗날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니, 서둘러 혼처를 정하고 싶지 않소."

중매장이가 돌아가서 그대로 아뢰자, 최씨가 다시 (중매인을 이씨 집으로) 보내어 말하게 하였다.

"한 시대의 친구들이 모두들 '그 댁의 영식(令息)은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아직은 또아리를 틀고 있지만, 어찌 끝까지 연못 속에 잠겨만 있겠습니까? 빨리 혼삿날을 정해 두 집안의 즐거움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매쟁이가 돌아가서 또 그 말을 이생의 아버지에게 전하였더니, 이생의 아버지가 말하였다.

"나도 젊었을 때부터 책을 잡고 학문을 닦았지만, 나이 늙도록 성공하지 못하였소. 종들도 흩어지고 친척의 도움도 적어, 생업이 신통치 않고 살림도 궁색해졌소. 그러니 문벌 좋고 번성한 집안에서 어찌 한갓 빈한한 선비를 사위로 삼으려 하시겠소? 이는 반드시 일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우리 집안을 지나치게 칭찬해서 귀댁을 속이려는 것일 거요."

중매쟁이가 돌아와서 또 최씨 집안에 전하자. 최씨 집안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물 드리는 모든 절차와 옷차림은 모두 저희 집에서 갖추겠습니다. 좋은 날을

 

가려서 화촉의 시기만 정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중매쟁이가 또 돌아가서 이 말을 전하였다.

이씨 집안에서도 이렇게까지 되자 뜻을 돌려, 곧 사람을 보내어 이생을 불러다 그의 생각을 물었다. 이생을 스스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시 한 수를 지었다.

 

깨어진 거울이 다시 둥글게 되니

만남도 때가 있어

은하의 까마귀와 까치들이

아름다움 기약을 도와주었네.

 

이제야 월하노인(月下老人)

붉은 실을 잡아매었으니

봄바람이 건듯 불더라도

소쩍새를 원망 마소.

 

최랑이 이 시를 듣고는 병도 차츰 나아져, 자기도 시를 지었다.

 

나쁜 인연이 바로

좋은 인연이던가?

그 옛날 맹세가

마침내 이루어졌네.

어느 때나 님과 함께

작은 수레를 끌고 갈까?

아이야, 나를 일으켜 다오

꽃비녀를 손질하련다.

 

이에 좋은 날을 가려 마침내 혼례를 이루니, 끊어졌던 사랑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부부가 된 이후에 서로 사랑하면서도 공경하여 마치 손님처럼 대하니, 비록 양홍 . 맹광이나 포선(鮑宣).환소군(桓少君)이라도 그들의 절개와 의리를 따를 수가 없었다.

이생이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자, 그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다.

신축년(1361)에 홍건적이 서울을 점거하자 임금은 복주(福州)로 피난 갔다. 적들은 집을 불태워 없애버렸으며, 사람을 죽이고 가축을 잡아먹었다. 부부와 친척끼리도 서로 보호하지 못했고 동서로 달아나 숨어서 제각기 살길을 찾았다.

이생은 가족들을 데리고 외진 산골로 숨었는데, 한 도적이 칼을 빼어들고 뒤를 쫓아왔다. 이생은 달아나 목숨을 건졌지만, 최랑은 도적에게 사로잡혔다. 도적이 최랑의 정조를 빼앗으려 하자, 최랑이 크게 꾸짖었다.

"창귀( ) 같은 놈아. 나를 죽여 먹어라. 내 차라리 죽어서 시랑(豺狼)의 밥이 될지언정 어찌 개돼지 같은 놈의 짝이 되겠느냐?"

도적이 노하여 최랑을 죽이고 살을 도려내었다.

이생은 거친 들판에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전하다가, 도적이 이미 다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이 사시던 옛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집은 이미 싸움 통에 불타 없어졌다. 또 최랑의 집에도 가보았더니 행랑채는 황량했으며, 쥐와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이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작은 누각으로 올라가서 눈물을 거두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날이 저물도록 우두커니 홀로 앉아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 보니 완연히 한바탕 꿈만 같았다.

二更(이경)쯤 되자 희미한 달빛이 들보를 비춰 주는데 낭하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이르고 보니 바로 최랑이었다.

 

 

이생은 그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에 의심하지도 않고 물어 보았다.

"당신은 어디로 피난 가서 목숨을 보전하였소?"

여인이 이생의 손을 잡고 한바탕 통곡하더니, 이내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본디 양가의 딸로서 어릴 때부터 가정의 교훈을 받아 수놓기와 바느질에 힘썼고, 시서(詩書)와 예법을 배웠어요. 그래서 규방의 법도만 알뿐이지, 그 밖의 일이야 어찌 알겠어요? 마침 당신이 붉은 살구꽃이 핀 담 안을 엿보았으므로, 제가 푸른 바다의 구슬을 바친 거지요. 꽃 앞에서 한번 웃고 평생의 가약을 맺었고, 휘장 속에서 다시 만날 때에는 정이 백년을 넘쳤었지요.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슬프고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군요. 장차 백년을 함께 하자고 하였는데, 뜻밖에 횡액을 만나 구렁에 넘어질 줄이야 어찌 알았겠어요? 늑대 같은 놈들에게 끝까지 정조를 잃지 않았지만, 제 몸은 진흙탕에서 찢겨졌답니다. 천성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지, 인정으로야 어찌 그럴 수 있었겠어요?

저는 당신과 외딴 산골에서 헤어진 뒤에 짝 잃은 새가 되었었지요. 집도 없어지고 부모님도 돌아가셨으니, 피곤한 혼백을 의지할 곳도 없는 게 한스러웠답니다. 절의(節義)는 중요하고 목숨은 가벼우니, 쇠잔한 몸뚱이일망정 치욕을 면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지요. 그러나 마디마디 끊어진 제 마음을 그 누가 불쌍하게 여겨 주겠어요? 한갓 애끊는 썩은 창자에만 맺혀 있을 뿐이지요.

해골은 들판에 내던져졌고 간과 쓸개는 땅바닥에 널려졌으니, 가만히 옛날의 즐거움을 생각해 보면 오늘의 슬픔을 위해 있었던 것 같군요.

이제 봄바람이 깊은 골짜기에 불어오기에, 저도 이승으로 돌아왔지요. 봉래산 십이년의 약속이 얽혀 있고 삼세(三世)의 향이 향그러우니, 오랫동안 뵙지 못한 정을 이제 되살려서 옛날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겠어요. 당신이 지금도 그 맹세를 잊지 않으셨다면, 저도 끝까지 잘 모시고 싶답니다. 당신도 허락하시겠지요?"

이생이 기쁘고도 고마워하며 말하였다.

"그게 애당초 내 소원이오."

그리고는 서로 정답게 심정을 털어놓았다. 재산을 얼마나 도적들에게 빼앗겼는지 이야기가 나오자, 여인이 말하였다.

"조금도 잃지 않고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 묻어 두었답니다."

이생이 또 물었다.

"두 집 부모님의 해골을 어디에 모셨소?"

여인이 말하였다.

"어느 곳에다 그냥 버려 두었지요."

정겨운 이야기를 끝낸 뒤에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지극한 즐거움이 예전과 같았다.

이튿날 여인이 이생과 함께 자기가 묻혀 있던 곳을 찾아갔는데, 과연 금과 은 몇 덩어리가 있었고, 재물도 약간 있었다. 그들은 두 집 부모님의 해골을 거두고 금과 재물을 팔아 각각 오관산 기슭에 합장하였다. 나무를 세우고 제사를 드려 예절을 모두 다 마쳤다.

그 뒤에 이생도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고 최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목숨을 구하려고 달아났던 종들도 또한 스스로 돌아왔다. 이생은 이때부터 인간세상의 모든 일을 다 잊어버렸으며, 아무리 친척이나 손님들의 길흉사가 있더라도 방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았다. 언제나 최씨와 더불어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금실 좋게 지내었다.

그럭저럭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에 여인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세 번이나 가약을 맺었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즐거움이 다하기도 전에 슬프게 헤어져야만 하겠어요."

여인이 목메어 울자 이생이 놀라면서 물었다.

"어찌 이렇게 되었소?"

 

 

여인이 대답하였다.

"저승길은 피할 수가 없답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당신의 연분이 끊어지지 않았고 또 전생에 아무런 죄도 지지 않았다면서, 이 몸을 환생시켜 당신과 잠시라도 시름을 풀게 해주었었지요. 그러나 제가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머물면서 산 사람을 미혹시킬 수는 없답니다."

그리고는 몸종 향아를 시켜서 술을 올리게 하고는, 옥루춘곡(玉樓春曲)에 맞추어 노래 한 가락을 지어 부르며 이생에게 술을 권하였다.

 

칼과 창이 어우러져 싸움이 가득한 판에

옥 부서지고 꽃 떨어지니 원앙도 짝을 잃었네.

흩어진 해골을 그 누가 묻어 주랴.

피에 젖어 떠도는 혼이 하소연할 곳도 없었네.

무산의 선녀가 고당에 한번 내려온 뒤에

깨어진 종()이 거듭 갈라지니 마음 더욱 쓰라려라.

이제 한번 작별하면 둘이 서로 아득해질 테니

하늘과 인간세상 사이에 소식마저 막히리라.

 

노래를 한마디 부를 때마다 눈물이 자꾸 내려 거의 곡조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생도 또한 슬픔을 걷잡지 못하며 말하였다.

"내 차라리 당신과 함께 황천(荒天)으로 갈지언정 어찌 무료하게 홀로 여생을 보전하겠소? 지난 번 난리를 겪고 난 뒤에 친척과 종들이 저마다 서로 흩어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해골이 들판에 내버려져 있었는데,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장사를 지내 드렸겠소? 옛 사람 말씀에,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는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신 뒤에는 예로써 장사지내라' 하셨는데, 이런 일을 모두 당신이 감당해 주었소. 당신은 정말 천성이 효성스럽고 인정이 두터운 사람이오. 나는 당신에게 고맙기 그지없고,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소. 당신도 인간 세상에 더 오래 머물다가 백년 뒤에 나와 함께 티끌이 되었으면 좋겠구려."

여인이 말하였다.

"당신의 목숨은 아직 남아 있지만, 저는 이미 귀신의 명부(冥府)에 실려 있답니다. 그래서 더 오래 볼 수가 없지요. 제가 굳이 인간세상을 그리워하며 미련을 가진다면 명부의 법도를 어기게 되니, 저에게만 죄가 미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도 또한 누가 미치게 된답니다. 저의 유골이 어느 곳에 흩어져 있으니, 만약 은혜를 베풀어주시려면 (그 유골이나 거두어) 비바람을 맞지 않게 해주세요."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눈물만 줄줄 흘렸다.

"낭군님,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말이 끝나자 차츰 사라지더니 마침내 자취가 없어졌다.

이생은 (여인의 말대로) 유골을 거두어 부모님의 무덤 곁에다 장사를 지내 주었다. 장사를 지낸 뒤에는 이생도 또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다가 병을 얻어, 몇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마다 가슴 아파 탄식하며 그들의 아름다운 절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김시습

 

1. 김시습(金時習, 1435-1493)금오신화(金鰲新話)로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려 말기부터 설화에서 기인한 가전체 문학, 그리고 전기(傳奇)의 형태로 이어지던 서사문학이 금오신화로 말미암아 비로소 고전소설의 탄생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체제가 정비되면서 점차 드러나기 시작한 시대적 모순에 저항했던 사람이었고, 기존의 문학과는 다른 방외(方外)인의 문학을 산출해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 김시습의 생애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청한자 등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그는 신라 원성왕의 동생인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인데, 여러 대에 걸쳐 무관직에 종사하던 한미한 집안이었다.

 

김시습은 유년 시절을 대부분 서울에서 보냈다. 그는 서울의 반궁(泮宮), 지금의 성균관 북쪽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8개월만에 능히 글을 깨우치자, 이웃집에 사는 집현전 학사 최치운은 그의 이름을 시습이라 하였다. 이는 논어학이(學而)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3세 때에는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아 외할아버지에게 시 짓는 법을 배웠다. 유모가 보리를 맷돌로 갈자 비도 없는데 어디서 천둥 소리 나는가/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에 흩어지네라 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5세 되던 해 김시습은 이웃에 사는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 들어가 중용대학을 배웠다. 하루는 정승 허조가 찾아와 ()’자를 넣어 시를 짓게 하였다. 그랬더니 김시습은 그 자리에서 노목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고 시를 지어 뭇 사람들은 탄복시켰다. 이 소문은 국왕인 세종에까지 들어갔고 세종은 승정원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명을 내려 김시습을 불러다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였다. 박이창은 김시습을 불러온 자리에서 동자의 글재주는 백학이 하늘 끝에서 춤추는도다라는 글귀에 대구를 맞추라고 하였다. 그러자 어린 김시습은 곧바로 성군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에서 번득이는 듯하다라고 시구를 지었다. 그 밖에 몇 번의 시험이 있지만 막힘이 없어 지어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다. 세종은 그에게 비단 50필을 하사하였고, 김시습은 하사받은 50필의 비단 끝을 각각 이어서 한쪽 끝을 허리에 차고 유유히 끌고 대궐문을 나갔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김오세(金五歲)’라고 불리웠다 한다.

 

13세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뒤 후진양성에 힘쓰던 김반의 문하에서 사서(四書)를 배웠고 국초(國初)의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까지 불리던 윤상에서 제자백가를 두루 배웠다.

15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외가의 농장에 내려가 몸을 의탁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 전에 다시 그의 외숙모마저 세상을 떠나 그는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이 무렵 그의 아버지까지 중병이 들어 집안 일을 거의 돌볼 수 없게 되자 곧 계모를 맞이하게 되었다. 김시습도 훈련원 도정 남효례의 딸과 혼인하였다.

 

21세 되던 해에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계유정난이 일어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대성통곡하며 읽고 있던 책을 모조리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법명을 설잠(雪岑)으로 한 후 그는 전국을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이때부터 입신출세의 길을 단념하였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했다.

 

24세에 관서지방을 유랑하면서 지은 글을 모아 탕유관서록을 엮었고, 관동지방으로 가 금강산, 강릉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26세에는 탕유관동록을 엮었다.

 

29세에는 삼남을 기행하면서 쓴 글을 모아 탕유호남록을 정리하여 엮었다.

29(세조 9) 되던 해 가을, 책을 사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효령대군을 만났고, 그는 대군의 간청을 못이겨 세조가 벌이고 있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경멸하던 인사들이 중앙 관직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저주하며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31(1465) 봄에는 경주 남산의 금오산에 들어가 금오산실을 짓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려 하였지만 이 해 3월에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하라는 세종의 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치하(致賀)와 찬시(讚詩)를 지어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그에게 원각사에 머무르도록 하였으나, 그는 여러 날을 보내고는 재물을 기울여 책을 사서 서울을 떠났다. 그가 잠시 왕의 명을 받들어 서울로 올라왔던 것은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조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 풀렸고, 그에게 아직 벼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머물렀던 금오산의 금오산실은 용장사터였고 그는 이곳에서 37세까지 약 7년간을 머무르게 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가 이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37세가 되던 해 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는 그와 친분이 두터운 서거정(徐居正)이 예문관 대제학을, 정창손(鄭昌孫)은 영의정, 김수온(金守溫)은 좌리공신, 노사신은 영돈녕부 등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그는 10여년 동안 성동의 폭처넝사 외에도 양주에 있는 수락산의 수락정사에서도 오래 생활하였다.

 

47세가 되던 해에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해다. 주위 사람의 권유로 안씨 집안의 딸과 혼인하여 환속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 되어 부인이 죽고 말았다. 이듬해 폐비윤씨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럽자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김시습은 관동으로 간 뒤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각 지방으로 전전하며 설악산춘천강릉한계청평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는 춘천 청평사의 남쪽 마을인 세향원이나 설악산의 오세암에 거처하기도 하였다.

 

김시습은 충청도 부여의 무량사에서 59세 되던 해 3월에 생애를 마쳤다.

 

3. 한문 단편소설집 금오신화

 

김시습이 31세에서 37세까지 경주의 금오산에 머물면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시습은 이 작품을 지은 뒤 곧바로 세상에 발표하지 않고 석실에 감추두고는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아는 자가 있으리라 하였다. 이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금오신화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약탈하여 일본에서 두 차례나 판각되었다.

⓷ 「금오신화는 국내의 문인들에게도 읽혀졌던 듯하다. 용천담적기에서 김안로는 이를 전등신화와 비교하고 있다. 또한 퇴계 이황도 읽었다 하였으며, 하서 김인후도 이 작품에 대한 시를 쓰고 있고, 우암 송시열도 이를 읽고자 하였으나 구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특히 조선 중기에는 김집이 직접 옮겨 적은 전기소설집에도 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소설 문학의 서장을 연 금오신화에 대하여 일찍이 김안로는 명나라 구우(瞿佑)가 쓴 전등신화를 본받아 썼다고 지적한 바 있고, 김시습도 전등신화를 읽고 쓴 제전등신화후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적 이후 이 작품은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모방하여 씌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최근에는 전등신화금오신화의 세계관이 상이하고, 우리 서사문학의 전통 속에서 금오신화가 씌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금오신화속의 저항성이나 시대 거부의 의지는 현실세계에서 외면당한 작가가 유자(儒子)적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의 표현이며, 인간성을 옹호하고 긍정하려는 현실 참여의 정신이 이러한 작품으로 구체화된 것으로 본다.

이 작품은 김시습의 내면적인 고민의 소산이다. 곧 유불선을 탐구하던 30대 지식인의 사상과 세계관의 갈등이 뒤섞인 것이며, 그가 입신양명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러한 갈등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4. 이생규장전속의 홍건적의 난

 

* 홍건적과 왜구

머리에 붉은 수건을 썼다는 뜻의 홍건적(紅巾賊)은 본래 원의 지배에 반대해 일어선 농민 봉기군이었으나 점차 변질되어 약탈자가 되었다. 홍건적은 13594만의 병력으로 침입, 서경까지 점령한 적이 있으며, 136110월에는 20만의 병력으로 들어와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점령. 이에 고려군은 13621월 총병관 정세운이 이끄는 20만의 병력으로 총반격을 개시, 10여만 명의 적을 섬멸하는 대전과를 거두면서 홍건적을 물리침

왜구(倭寇)의 문제가 본격 대두된 것은 1350년 이후의 일. 이 때는 관응의 난이라 해서 일본 전역이 내란에 휩싸이고, 일본 봉건 지배층의 수탈이 극에 달한 시기였는데, 굶주린 사람들이 해적 행위에 나선 것이 바로 왜구. 왜구는 공민왕 대에 115, 우왕(1374~1388) 대에 378회에 이를 정도로 끊임없이 고려의 남부 해안 지역, 때로는 내륙 지방까지 침입. 왜구들은 소규모 혹은 대규모로 불시에 나타나 학살과 약탈, 노략질을 하고는 돌아갔기 때문에, 당시 북방에서 원, 홍건적 등과 긴장된 대결을 벌여야 했던 고려로서는 효과적인 대응을 하기 어려움.

고려는 1370년대 이후 왜구에 대한 본격적인 반격에 나섬. 최영의 제의에 따라 수군을 건설(1373)하였으며, 최무선의 제안에 따라 화통도감을 설치(1377)하고 전함에 화포, 화통 등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 무기 장착. 최신형 무기를 장비한 고려 함대는 진포, 박두양 등징의 해전에서 왜구에게 큰 타격 가함.

그 후 1389년에는 박위가 지휘하는 100척의 고려 함대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공격, 300척의 왜선을 불사르고 근거지를 파괴함으로써 왜구의 침입은 어느 정도 진정. 이 당시 외적과의 투쟁에서 명성을 얻은 장군들은 최영, 이성계, 이방실 등임.

 

 

참고 문헌

 

정병헌∙ 이지영 지음,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돌베개, 2007.

 

선귤자(蟬橘子)에게 벗 한 분이 계시니 그는 예덕 선생(穢德 先生)이라고 하는 분이다. 종본탑(宗本塔) 동쪽에 사는데 마을 안의 똥거름을 져 나르는 것으로써 생계를 삼고 있다. 온 마을에서 그를 엄 행수(嚴行首)라고 불렀다. 행수는 상일을 하는 늙은이를 일컬음이요, 엄은 그의 성이다. 자목(子牧)이 선귤자에게 묻기를,

그 전에 선생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벗은 동거 생활을 하지 않는 아내요, 한 탯줄에서 나오지 않은 형제라고 했습니다. 벗이란 것은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한다 하는 양반님네 중에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자 하는 이가 수두룩한데도 선생님께서는 이런 분들을 상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엄 행수로 말한다면 마을 안의 천한 사람으로서 상일을 하는 하층의 처지요, 마주서기 욕스러운 자리입니다. 선생님께서 그의 인격을 높이어 스승이라고 일컬으면서 장차 교분을 맺어 벗이 되려고 하시니, 저까지 부끄러워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문하를 하직하려고 합니다.”

선귤자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거기 앉게. 속담에도 있거니와 의원이 제 병을 못 고치고 무당이 제 굿 못 한다고 하니 내 자네에게 벗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해 줌세. 자기 생각으로는 이거야말로 제 장점이라고 믿고 있는 점도 남들이 몰라준다면 어떤 사람이거나 속이 답답해서 자기 결함을 지적해 달라는 말로 말을 꺼내게 되네. 그러나 이때 칭찬만 하면 아첨에 가까워서 멋대가리가 없고, 타박만 하면 흉보는 것으로 떨어져서 본의와 틀려지네. 그러니까 그의 장점이 아닌 것을 들추어서 어름어름 당치 않은 말을 한단 말일세. 그렇게 적절한 내용이 아닌 만큼 설사 책망이 좀 과하더라도 저 편에서 골을 내지는 않을 것일세. 그러다가 숨겨 놓은 물건을 알아나 맞히는 듯이 슬그머니 그가 장점이라고 믿고 있는 그 점을 언급한단 말일세. 마치 가려운 데나 긁어 준 듯이 속마음으로 감격해 할 것일세. 가려운 데를 긁는 데도 도()가 있네그려. 등에 손을 댈 때에는 겨드랑이에 가까이 가지 말고 가슴을 만질 때에는 목을 건드리지 말아야 하네. 칭찬 같지 않게 하는 칭찬에 그 사람은 왈칵 손을 잡으면서 자기를 알아준다고 할 것일세. 그래, 이렇게 벗을 사귀면 좋겠는가?”

자목이 한 손으로 귀를 가리고 한 손은 내저으며 말하기를,

이건 선생님이 내게다가 장사치의 하는 일이나 하인놈이 하는 버릇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귤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자네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과연 저기 있지 않고 여기 있는 것일세그려. 저 엄 행수란 분이 언제 나와 알고 지내자고 요구한 적이 없었지만, 그저 내가 늘 그분을 찬양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라네. 그이 손가락은 굵직굵직하고, 그의 걸음새는 겁먹은 듯하였으며, 그가 조는 모습은 어리숙하고, 웃음소리는 껄껄대더구먼. 그의 살림살이도 바보 같았네. 흙으로 벽을 쌓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어 구멍 문을 내었으니, 들어갈 때에는 새우등이 되었다가, 잠잘 때에는 개 주둥이가 되더구먼. 아침 해가 뜨면 부석거리고 일어나, 흙 삼태기를 메고 동네에 들어가 뒷간을 쳐 날랐다네.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어도, 뒷간의 남은 찌꺼기와 말똥쇠똥, 또는 횃대 아래에 떨어진 닭거위 따위의 똥이나 돼지똥, 사람똥 따위를 가져오면서 마치 구슬처럼 여겼다네.

왕십리의 배추, 살곶이다리의 무, 석교(石郊)의 가지오이수박호박, 연희궁의 고추마늘부추, 염교 청파의 물미나리, 이태원의 토란 따위를 심는 밭들은 그 중 상()의 상을 골라 심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모두 엄씨의 똥거름을 가져다가 걸찍하게 가꿔야만, 해마다 육천 냥이나 되는 돈을 번다는 거야. 그렇지만 엄 행수는 아침에 밥 한 그릇만 먹고도 기분이 만족해지고, 저녁에도 밥 한 그릇 뿐이지. 누가 고기를 좀 먹으라고 권하면 고기 반찬이나 나물 반찬이나 목구멍 아래로 내려가서 배부르기는 마찬가지인데 입맛에 당기는 것을 찾아 먹어서는 무얼 하느냐고 하네. , 옷과 갓을 차리라고 권하면 넓은 소매를 휘두르기에 익숙지도 못하거니와, 새 옷을 입고서는 짐을 지고 다닐 수가 없다고 대답하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 되면 비로소 갓을 쓰고 띠를 띠며, 새 옷에다 새 신을 신고, 이웃 동네 어른들에게 두루 돌아다니며 세배를 올린다네. 그리고 돌아와서는 옛 올을 찾아 다시 입고 다시금 흙 삼태기를 메고는 동네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거지. 엄 행수야말로 자기의 모든 덕행을 저 더러운 똥거름 속에다 커다랗게 파묻고, 이 세상에 참된 은사(隱士) 노릇을 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엄 행수는 똥과 거름을 져 날라서 스스로 먹을 것을 장만하기 때문에, 그를 지극히 조촐하지는 않다고 말할는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그가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웠으며, 그의 몸가짐은 지극히 더러웠지만 그가 정의를 지킨 자세는 지극히 고항(高亢)*했으니, 그의 뜻을 따져 본다면 비록 만종(萬種)의 녹(錄)을 준다고 하더라도 바꾸지 않을 걸세. 이런 것들로 살펴본다면 세상에는 조촐하다면서 조촐하지 못한 자도 있고, 더럽다면서 더럽지 않은 자도 있다네.

누구든지 그 마음에 도둑질할 뜻이 없다면 엄 행수를 갸륵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야. 그리고 그의 마음을 미루어 확대시킨다면 성인의 경지에라도 이를 수 있을 거야. 대체 선비가 좀 궁하다고 궁기(窮氣)를 떨어도 수치스런 노릇이요, 출세한 다음 제 몸만 받들기에 급급해도 수치스러운 노릇일세. 아마 엄 행수를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거의 드물 것이네. 그러니 내가 엄 행수더러 스승이라고 부를지언정 어찌 감히 벗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러기에 내가 엄 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 선생이란 호를 지어 일컫는 것이라네.”

 

 

 

 

 

 

'조선 역사 속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생규장전(전문)  (0) 2020.07.15
김시습  (0) 2020.07.15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0) 2020.07.08
용비어천가 내용 정리  (0) 2020.06.26
용비어천가  (0) 2020.06.2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