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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봉 국어 과외  (0) 2022.04.10

채(菜) 나물 채. '풀 초(艸)'와 '딸 채(采)'로 이루어졌다. '채(采)' 자는 나무 위의 잎을 손으로 따는 모양이므로 '채(菜)' 자의 자형적 의미는 '풀 중에서 채취하여 먹을 수 있는 것'이 된다. 고대에 채소의 개념은 오늘날과 사뭇 달랐다. 즉 육류와 함께 균형있게 먹어야 하는 음식이 아니라, 흉년이 들었을 때 기아를 해결하는 이른바 '구황(救荒)' 식물로 여겼던 것이다. 

중(重) - 무거울 중. 나무에 꽃과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서 가지들이 힘겨워하는 모양의 글자이다. 그래서 흔히 '무겁다'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여기서는 '중히 여기다'는 동사적 의미로 활용되었다.

 

개(芥) - 겨자 개.

강(薑) - 생강 강.

 

 

 

 

출처 : 욕망하는 천자문, 김근, 삼인, 2007.

과(果) - 과일 과. 나무 위에 실과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모양이므로 자형적 의미는 '열매'가 된다. 

진(珍 ) - 보배 진. '구슬 옥(玉)'과 '빽빽할 진(㐱)' 자는 돈꾸러미를 '보자기 같은 것으로 싼'(勹) 모양으로 이는 '보배 보(寶)' 자의 독음이 '쌀 포(包)'와 같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진(珍)' 자의 독음은 '중(中)' 자와 같은 계열에 속하기 때문에 이 글자의 자형적 의미는 '보배 꾸러미를 꽁꽁 싸서 가운데 깊숙이 간직하다'이다.

 

리(李) - 오얏 리. '나무 목(木)'과 '아들 자(子)'로 이루어졌다. '子' 자는 열매가 많이 열린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리(李)' 자의 자형적 의미는 '열매가 많이 열리는 나무', 즉 '오얏'이 된다. 오늘날 오얏은 '자두'라는 말로 더 많이 불린다. '리(李)' 자는 고서에서 '다스릴 리(理)', 또는 '벼슬아치 리(吏)' 등의 의미로 많이 차용된다.

내(柰) - 벗 내. 흔히 '버찌'로 해석하지만 《본초강목》에서는 "능금과 같은 종류인데 능금보다는 약간 크다. 일명 빈파(頻婆)라고도 부른다"고 기록하였고, 또 《학포여소》에서는 "빈파는 빈과(蘋果), 즉 '사과(沙果)'로 옛날의 이른바 '내(柰)'와 같다. 맛이 달고 북방에서 많이 산출된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사과'로 풀이하는 것이 옳다. 

 

 

출처 : 욕망하는 천자문, 김근, 삼인, 2007.

 

주(珠) - 구슬 주. '구슬 옥(玉)'과 '붉을 주(朱)'로 이루어졌다. '주(朱)'는 '붉은 색'이란 뜻으로 고대 중국에서는 '붉을 단(丹)'과 아울러 흔히 '변치 않음'을 상징하는데 쓰인다. '변치 않음'은 보석의 속성이자 생명이므로 '주(珠)'자의 자형적 의미는 '변치 않는 구슬', 즉 '진주'가 된다.

칭(稱) - 일컬을 칭. '벼 화(禾)'와 '들어올릴 칭(爯)'으로 이루어졌다. '칭(爯' 자는 쌓여진 물건을 손으로 들어올리는 모양이고, '화(禾)' 자는 저울추를 의미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좁쌀 12개의 무게를 1분(分)으로 삼고, 12분을 1수(銖)로 규정하여 중량 단위로 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 칭(爯' 자의 자형적 의미는 '들어올려서 무게를 달다' 또는 '저울'이 된다. 옛날에는 손으로 물건을 들어보는 방법으로 무게를 쟀다. 그래서 '손으로 들어올리다'라는 뜻에서 '높여 칭찬하다', '일컬어 칭찬하다' 등의 의미들이 파생된 것이다.

 

야(夜) - 밤 야.

광(光) - 빛 광. '야광(夜光)'이란 곧 야광주(夜光珠)'를 가리킨다. 이는 전설상의 구슬 이름으로 춘추 때 수(隨)나라 임금이 용의 아들을 구해준 대가로 받았는데, 밤에도 대낮처럼 빛을 발하였다고 한다.

 

 

 

출처 : 욕망하는 천자문, 김근, 삼인, 2007.

검(劍) - 칼 도. '칼 도(刀)'와 '모두 첨(僉)' 으로 이루어졌다. '첨(僉)' 자는 '여러 사람의 입을 한데 모으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검(劍)' 자의 자형적 의미는 '흩어진 상화이나 비상 사태를 추스리는 무기', 즉 '칼'이 된다.

호(號) - 부를 호. '범 호(虎)'와 '부를 호(号)'로 이루어졌으므로 '범처럼 큰 소리로 울부짖다'가 된다. 울부짖는 소리는 범이 가장 크므로 '호(虎)' 자를 쓴 것이다.

 

거(巨) - 클 거.

궐(闕) - 대궐 궐. '거궐(巨闕)'은 중국 고대 명검 중의 하나로 월나라의 명장인 구야자가 만들었다고 전한다 거궐이 얼마나 단단하고 예리한지 이것으로 청동 그릇과 쇠그릇을 찌르거나 베면 잘린 면에 기장쌀만한 구멍이 곳곳에 보였다고 한다. 즉 날이 너무 잘 들어 쇠붙이 속의 기포 부분이 눌리지 않고 그대로 잘려나갔기 때문에 단면체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검의 이름을 '거궐'이라고 부른 것인데, 이때 '궐(闕)' 자는 '속이 비어 구멍이 났다'라는 뜻이다. '궐(闕)' 자의 자형적 의미가 '지붕에 망루대가 설치되어 있는 성문이나 궁궐의 대문'이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대문 가운데의 빈공간'이라는 의미가 드러난 것

 

 

 

출처 : 욕망하는 천자문, 김근, 삼인, 2007.

옥(玉) - 구슬 옥. 갑골문에서 여러 구슬을 꿴 모양의 글자이다. '옥(玉)' 자의 독음은 '굽을 곡(曲)'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데 이는 구슬을 줄에 꿰면 그 모양이 구불구불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출(出) - 날 출. 갑골문에서 발에 신을 신은 모양이므로 자형적 의미는 '발에 신발을 신고 밖에 나가다'가 된다.

 

곤(崑) - 산이름 곤.

강(岡) - 언덕 강.

 * 곤강(崑岡) - 곤륜산(崑崙山)으로 촉강(蜀岡)이라고도 부른다. 오늘날 강소성(江蘇省) 강도현(江都縣) 서북쪽에 있다. 《한비자》 '화씨' 편에 화씨벽(和氏壁)이라는 구슬에 얽힌 고사가 나오는데, 이 화씨벽이 곧 이곳 곤강에서 캐낸 옥으로 만든 구슬이라고 전한다. 

 

*"금은 여수에서 나고 옥은 곤강에서 나온다"라는 구절은 좋은 금과 옥이란 아무데서나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선택된 땅에서 나는 것처럼 훌륭한 인재 역시 좋은 가문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말하려 할 때 흔히 비유로 사용된다. 

 

 

출처 : 욕망하는 천자문, 김근, 삼인, 2007.

금(金) - 쇠 금.

 

생(生) - 날 생.

 

려(麗) - 고울 려. 자형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중국인들은 아름다움을 묘사할 때 가주 사슴(鹿)을 등장시켰는데, 이는 사슴이 먹이를 찾으면 혼자만 먹지 않고 자기 무리를 불러서 함께 나누어 먹는 습성이 있다고 해서 생긴 관용적 표현이다. 

 

수(水) - 물 수. 

 

 

* 여수(麗水)는 형남(荊南)과 더불어 중국 고전에서 사금(沙金) 생산지로 자주 거론되는 지명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금은 이 지역의 주요 조공품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여수는 오늘날 금사강(金沙江)이 운남성(雲南省) 여강납서족(麗江納西族) 자치현으로 유입되는 북쪽 지역을 지칭한다. 

 

 

출처 : 욕망하는 천자문, 김근, 삼인, 2007.

노(露) - 이슬 로. '비 우(雨)'와 '길 로(路)'로 이루어졌다. 길이란 영역을 나누는 경계이기도 한데, 이슬이란 찬 공기와 더운 공기 사이의 경계에서 발생하므로 자형적 의미는 '찬 공기와 더운 공기 사이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비', 즉 '이슬'이 된다.

결(結) - 맺을 결. '실 사(糸)'와 '길할 길(吉)'로 이루어졌다. '길(吉)'이란 땅에 함정을 파놓고 그 위를 나뭇가지를 엮어서 덮어놓고는 사람들에게 조심하도록 표지를 해둔 모양이다. 그리고 '결(結)' 자의 독음은 '굳을 견(堅)' 자와 같은 계열에 속한다. 따라서 '결(結)' 자의 자형적 의미는 '끈으로 단단히 얽어매다'가 된다.

 

위(爲) - 할 위. '손 수(手)'와 '코끼리 상(象)'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자형적 의미는 '코끼리를 끌고서 일을 부리다'가 된다. 

상(霜) - 서리 상. '비 우(雨)'와 '도울 상(相)'으로 이루어졌다. '상(相)' 자는 소경이 나무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 길을 살펴가는 모양이므로 이미 '눈의 상실'이란 의미가 내포돼 있다. '상(霜)' 자의 독음이 '잃을 상(喪)'과 같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자형적 의미는 '수분이 얼어서 된 차디찬 서리'가 된다. 

 

* 노결위상 - '이슬'과 '서리' 사이를 인과적 변화 관계로 설명해 합리적이고도 과학적인 공간을 인식하도록 해준다. 

 

 

출처 : 욕망하는 천자문, 김근, 삼인, 2007.

운(雲) -  구름 운. '비 우(雨)'와 '운행할 운(云)'으로 이루어졌다. '운(云)' 자의 고문자 자형은 원래 구름이 빙빙 돌아 올라가는 모양으로 돼 있으므로 처음에는 '구름'이란 의미로 쓰였다. 그러다가 이 글자가 '말하다'라는 의미로 빌려 쓰게 되면서 '구름'이란 의미는 오늘날의 '운(雲)' 자로 파생돼 나온 것이다.

등(騰) - 오를 등. 등(騰) 자의 독음은 '말 빨리 달릴 동(駧)'과 같은 계열에 속하므로 '등(騰)' 자 역시 '말이 빨리 달리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치(致) - 부를 치. '두드릴 복(攴)'과 '이를 지(至)'로 이루어졌으므로 자형적 의미는 '두드려서 빨리 오게 하다'가 된다. 

 

우(雨) - 비 우.

 

 

출처 : 욕망하는 천자문, 김근, 삼인, 2007.

 

황진이

 

개성 기녀의 딸로 태어나다

 

우리는 역사적 인물을 바라볼 때 흔히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기 쉽다. 한 사람을 정치가라거나 장군이라거나 충신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평가하게 된다는 것이다.

 

황진이도 기생이라는 선입관으로 평가하고 이야기한다. 동시에 기생이지만 시도 잘 짓고 거문고도 잘 타고 춤도 잘 추고 얼굴도 예쁜데다, 남성들을 농락하는 교태를 지니고 서경덕과의 일화도 남겼다는 정도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들 이야기는 다분히 남성적 흥미로 엮어진 것들이다. 전혀 틀린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녀의 참모습이 이것만은 아니다.

 

허균은 황진이는 개성 맹녀(盲女, 눈먼 여자)의 딸이다라고 기록했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제자였다. 허균은 황진이와 서경덕의 관계를 아버지나 아버지의 동문수학 친구들에게서 들었을 것이다. 허균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녀와 관련된 몇 가지 기록을 남겼다. 그러니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의 어머니 진현금은 맹인 악기(樂妓)라 한다. 어릴 적부터 맹인이었는지 중년에 맹인이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녀는 성이 진()이라 했는데 이름은 현금(玄琴)에서 빌려왔을 것이다. 진현금은 비록 맹인이었지만 거문고를 잘 탔다.(이덕형 송도기이참조) 진현금은 젊은 황 진사와 사랑을 나눈 끝에 딸 진이를 낳았으나 이 아이는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았다. 그리하여 진이는 어머니 손에서 자라고 어머니에게서 거문고 다루는 솜씨를 배웠고 또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기적에 올려져 교방(敎坊)에서 기생수업을 받았을 것이다.

 

황진이의 어릴 적 이야기는 전하는 게 거의 없다. 열대여섯 살 때 이웃집 서생이 그녀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 서생의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 다다르자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상여꾼들이 황진이의 저고리를 가져다 상여를 덮어주자 그제야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황진이는 이를 본 뒤 창기가 되었다고 한다.(김택영 송도인물지)

 

그런데 당시 기생은 어떤 신분인가? 기생은 거의 모두가 관기(官妓)였다. 곧 관가에 매여 있으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생의 명부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기생은 백정, 장인, 승려와 함께 가장 낮은 신분에 속했다. 기생이 관가에 매였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종의 신분이나 다름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옛날에는 수령들이 현지에 부임할 때 원칙상 가족을 데려가지 못했다. 가족을 데리고 현지에 부임하면 가족들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기 쉬우므로 이를 예방하는 조치였다. 춘향전에서 남원부사가 이몽룡 등 가족을 거느리고 관아에서 산 이야기는 원칙으로는 틀리지만, 조선 후기에는 이런 원칙이 무너져 지켜지지 않았을 뿐이다.

 

수령들은 현지 관아에서 기생의 수발을 받고 기생과 살았다. 또 중앙에서 고관이나 귀빈이 올 때 기생을 동원해서 접대하게 했다. 이런 연유로 기생제도가 생겼는데 기생의 딸들도 세습적으로 기적에 오르게 되어 있었다. 예전의 우리 사회는 철저한 남존여비여서 모든 것이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한 가지만은 예외였다. 곧 아버지가 양반이더라도 어머니가 천한 신분이면,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이를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이라 한다. 기생도 바로 이런 신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명월이 만공산한데 쉬어 간들 어떠리

 

황진이도 바로 이런 신분이었다. 기생의 자격으로 용모보다 더 중시한 것은 가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위엄을 부리는 벼슬아치나 교양을 뽐내는 선비들의 노리개가 되다 보니 그들과 어울려 대화를 나누고 풍악을 다루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가무에 곁들여 시와 시조를 읊을 줄 알고 여기에 동서고금의 지식이 더해지면 바로 명기로 뽑혔다. 그녀의 노래와 거문고 연주는 녹음이 되어 있지 않으니 어떤 수준인지 알 길이 없지만 이 대목에서 그녀의 시를 감상해보기로 하자. 다음은 반달을 두고 읊은 시이다.

 

곤륜산의 옥 그 뉘가 잘라

誰斷崑崙玉

직녀의 얼레빗을 만들었는고

栽成織女梳

견우는 한번 간 뒤에 안 와

牽牛一去後

수심에 겨워 허공에 던진 거라오

愁擲碧空虛

- 김안서 편 한국여류한시선집

반달을 허공에 떠 있는 얼레빗에 비유해 형상화하지 않았는가? 발상이 기발하다. 여느 사람은 따르기 어려울 것이다. 시어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에 대한 시이다.

 

꿈을 꾸어야 서로 사모하고 만나리

相思相見只憑夢

때맞춰 임 찾아가니 임은 날 찾는구랴

儂訪歡時歡訪儂

원컨대 밤마다 서로 다른 꿈

願使遙遙他夜夢

한 시에 떠나 노중서 만날지고

一時同作路中逢

- 김안서 편 한국여류한시선집

 

꿈에서만 임을 만날 수 있는데 꿈이 어긋나 만날 수 없으니 함께 떠나 길가에서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담았다. 기발한 연상이다. 그녀의 시들은 시집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구전으로만 전하고 있다. 이것저것 합해 10여 수에 지나지 않는다. 명문의 난설헌이 시집을 남긴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아무튼 이런 명기와 접촉하려는 남성들이 들끓게 마련이었다. 한번 명기의 명성을 얻으면 기생으로서 재물을 모을 수 있고 당대의 명사들과도 자주 어울릴 수 있었다. 황진이는 바로 이런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황진이가 개성에서 명성을 얻자, 그녀를 만나보기 위해 뭇 남성들이 그녀 집 문전을 기웃거렸다. 그녀는 뛰어난 용모에 재치와 기지가 넘쳤으며, 화제도 그칠 줄 모르는 등 여러모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그 어려운 한시로 화답할 줄 알았다. 어떤 남성이 그녀의 이런 미모와 재능에 반해 그녀를 사모하게 되면, 그녀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그녀의 이부자리 속에서 한번 자고 난 남성은 돌아가서도 애를 태웠다. 이런 것도 그녀가 노리는 바였을 것이다.

 

거기에 얽힌 몇 가지 이야기를 알아보기로 한다.

 

첫 번째 이야기.

 

송공(宋公, 이름은 겸이라 함)이 개성유수로 부임해 와서 명절을 맞이해 간소한 잔치를 베풀었다. 그는 이 자리에 나온 황진이를 한눈에 알아보고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이름이 결코 헛되이 얻은 것이 아니로구나라고 말하고 가까이 앉혔다. 이때 그의 첩이 문틈으로 이 모습을 엿보고 질투가 치솟아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맨발로 안으로 뛰어들었고 당황한 송공은 자리를 피해 후다닥 일어났다고 한다. 얼마 뒤 송공이 그의 어머니 회갑 잔치에 많은 손님을 초대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는 기생을 모조리 불렀다. 이들 기생 속에 황진이가 끼어 있었는데 그녀는 얼굴에 분도 바르지 않고 담장(淡粧, 단순한 화장)한 모습이었으나 단연 돋보였다. 여러 손님들이 그녀를 보고 경국의 색이라고 찬탄해 마지않았다. 송공은 지난날 첩의 질투를 생각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는 술이 거나해지자 잔에 술을 가득 부어 황진이에게 마시게 하고 노래를 시켰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나서야 무릎을 치며 과연 천재로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 송도기이

 

두 번째 이야기.

 

소세양(蘇世讓)은 서울의 유명한 벼슬아치였다. 그는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동료들에게 이렇게 장담하고는 개성으로 왔다.

내가 그녀와 30일의 기한을 정해 동거하되 하루라도 기한을 어기면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녀와 정을 통하고 30일의 기한을 채우고 헤어지는 날 둘이서 남대문의 누각에 올라 술을 마셨다. 이때 황진이가 시 한 편을 써서 바치며 말했다.

공과 이별하면서 어찌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달빛 어린 뜨락에 오동잎 다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네

누각이 높아 하늘이 한 척이고

사람이 취해 술이 천 잔이라

흐르는 물 거문고 가락에 맞춰 서늘하고

매화는 피리소리에 들어 향기롭구나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지고 나면

그리운 정 푸른 물결인 양 길게 뻗치리라

- 임방 수촌만록(水村漫錄)

 

소세양이 이를 받아 읊조리고 나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고 여러 날을 머물렀다 한다. 동료들과의 약속을 집어던져 버린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

 

종실인 벽계수(碧溪守, 여기서 는 왕자의 증손에게 주는 정4이다/벽계수의 본명은 이종숙(李琮淑). 세종대왕의 17번째 아들 영해군의 손자다.)는 황진이를 한번 만나기를 원했으나 황진이가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벽계수를 멀리서 지켜보던 황진이가 따라가며 노래를 부른다.그래서 그녀를 알고 있는 시인 이달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방법을 일러주었다.

어린애를 시켜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고 황진이의 집을 지나 누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 한 곡조를 타고 있으시오. 그러면 황진이가 나와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재빨리 말을 타고 달아나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를 지날 때까지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이요. 만약 이를 어기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벽계수가 그 말대로 하자 황진이가 취적교까지 따라오더니 수행한 어린애에게 저분이 벽계수냐고 묻고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한데 쉬어간들 어떠하리

- 서유영 금계필담(錦溪筆談)

노랫소리를 들은 벽계수가 뒤를 돌아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이를 본 황진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돌아갔다.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한낱 풍류랑(風流郞)이로구나.”

 

네 번째 이야기.

 

선전관(조선 시대, 선전관청에 속하여 형명, 계라 및 부신의 출납을 맡았던 무관직)인 이사종은 노래를 잘 불렀다. 한번은 개성에 가서 배 위에 드러누워 노래 한 곡을 뽑았다. 마침 황진이가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서울의 풍류객 이사종이 아니면 이렇게 훌륭하게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확인하게 했다. 황진이는 이사종을 이끌고 자기 집으로 가서 며칠을 머물렀다. 그런 뒤 이사종에게 나는 그대와 함께 6년을 살아야겠소하고는 3년 살림살이할 경비를 이사종 집으로 보내주고 함께 따라갔다. 황진이는 손수 일을 하고 모든 생활비를 대면서 3년을 지냈다. 3년 뒤에는 이사종이 황진이의 집으로 와서 다시 3년 동안 생활경비를 대면서 살았다. 이렇게 6년을 채우고 난 뒤 황진이는 약속한 기한이 다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가버렸다고 한다.

- 유몽인 어우야담

 

그녀는 이처럼 당대의 명사들과 어울리다가 소세양 같은 높은 벼슬아치들도 접했고 풋내기 시인과 가객도 품안에 품었다. 하지만 그녀도 때로는 한 남성에게만 사랑을 쏟으며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사회풍토였다. 설령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첩살이였고, 첩살이로 낳은 자녀들에게는 서얼이라는 굴레가 씌워졌던 것이다.

 

황진이는 이런 사회제도에 어떻게 대처했던가? 그 길은 삐뚤어진 남성 사회에서 남성들을 농락(새장과 고삐라는 뜻으로, 사람을 교묘한 꾀로 속여 제 마음대로 놀림)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황진이는 기생으로서 사회 실정을 터득했고, 찾아드는 남정네와 수작을 벌여왔다. 그러다 중년의 원숙한 여성이 된 황진이는 스스로 새 남성들을 찾아 나섰다.

 

인생의 스승 서경덕을 만나다

 

그녀는 자신의 용모와 재능과 질탕한 짓거리에 흠뻑 빠지는 남성들에게는 진력이 났다. 별로 보잘것없는 남정네들이 양반입네 선비입네 하고 뽐내는 것이 눈꼴 사나운 정도를 넘어 아니꼽기조차 했다. 권태감이 솟았다. 어디 그럴듯한 남성이 없을까? 자기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초탈한 남성이 없을까?

 

그 첫 대상이 지족 선사였다. 지족 선사는 평생 참선으로 마음을 닦아 무아경에 들어 있는 도인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황진이는 이 지족 선사를 유혹했다. 처음에 지족 선사는 황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물러날 황진이가 아니었다. 말이나 용모로 통하지 않자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소위 육탄공격을 한 것이다. 지족 선사는 끝내 무릎을 꿇었다. 따지고 보면 부처의 경지에서 볼 때 영육(靈肉)과 속진(俗塵)의 나뉨이 어디 있는가? 들이닥치면 겪고 물러나면 그만이 아닌가?

 

그러나 황진이는 별로 신선한 맛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송악산 밑의 서경덕을 찾아 나섰다. 서경덕은 모든 현상은 기의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기일원론의 이론을 확립한 사상가였다. 그는 철저한 학문적 사유로 민중사상과의 만남을 모색했다. 그의 제자들은 두 계열로 흘러갔다. 한 계열은 박순, 허엽과 같이 조정에 몸을 담고 벼슬살이를 했으며, 또 한 계열은 이지함, 박지화와 같이 철저히 속세를 외면하고 은둔하며 현실에 저항한 것이다. 서경덕은 이런 제자들의 떠받듦 속에 명망을 얻고 개성 주변에서 학문과 사유로 일생을 마쳤다.

 

황진이가 대학을 끼고 서경덕을 찾았을 때 서경덕은 혼자 있었던 모양이다. 서경덕의 아내는 여염에 살면서 가끔 그의 거처를 찾아와 빨래며 먹을거리를 마련해주고 있었다. 서경덕은 황진이가 누구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황진이가 글을 배우러 왔노라라고 해도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고, “한방에서 잠을 자겠다라고 해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황진이는 첫 절을 하고 말했다.

 

예기에 이르기를, 사내는 가죽띠를 두르고 계집은 실띠를 두른다고 했습니다. 첩도 학문에 뜻을 두고 실띠를 두르고 왔습니다.”

그리고 제자 되기를 청했다. 서경덕은 이를 곱게 받아들였다.

 

황진이는 며칠 밤을 서경덕의 이불에서 잤지만 서경덕은 담담했을 뿐이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다고는 하지만 그다지 노인도 아닌데 그 아리땁고 보들보들한 살결에 정말 아무런 동요가 일지 않을 수 있었을까? 풍류를 즐긴 허균이 그런 처지에 있었다면 질탕하게 놀아난 뒤 시를 한 섬이나 토해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말도 범상한 자들의 입놀림일 뿐, 어느 정도 학문적 경지에 이르면 미추와 선악을 초월하게 되는 것 아닌가? 이를 두고 도인(道人)이라 했다. 황진이는 서경덕의 삶과 행동을 보고 그야말로 구원의 남성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서경덕에게서 진정한 학문과 사상을 배우게 되었다. 서경덕이 죽고 난 뒤, 황진이의 행동을 보면 그런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허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진랑은 화담의 사람됨을 사모했다. 늘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의 정자에 가서 한껏 즐기고 돌아갔다. 늘 말하길 지족 선사가 30년을 면벽(面壁)했다지만 내가 품어보았다. 화담 선생만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까지 어지럽지 않았다.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했다.

-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

그녀는 서경덕을 대한 뒤 진정으로 흠모했고, 그 자신 역시 도학자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기생이 아니었고 토정 이지함이나 서기와 같은 도인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편 개성 사람들은 개성의 3(三絶)로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를 꼽는다. 개성에는 서경덕과 황진이에 얽힌 이야기들이 무수히 널려 있다. 황진이는 어느 날 박연 폭포로 나들이를 나갔다. 박연 폭포 아래에는 널찍한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서 서경덕이 독서를 했다고 한다. 황진이는 머리를 감고 나서 먹을 듬뿍 묻혀 바위에 이태백의 시구인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을 휘갈겨 썼다. 이 시를 사람들이 그대로 돌에 새겼다 한다. 이 석각(石刻)이 지금도 전해져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세상 여자들은 나를 거울삼으라

 

학문연구에 몰두하던 서경덕은 때때로 전국의 명산을 찾아 유람을 다닌 적이 있었다. 그는 남쪽 지리산 언저리에 파묻혀 도학을 익히는 조식을 만나기도 했다. 한번은 개성의 서경덕과 지리산의 조식이 속리산에서 만나 도담(道談)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리산으로 자리를 옮겨 며칠씩 함께 지냈다.

 

서경덕이 죽고 난 뒤, 황진이는 서경덕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을 두루 찾아 나섰다고 한다. 금강산, 속리산, 지리산, 묘향산은 물론 서경덕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보았다고 한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이렇게 찾아다닌 뜻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황진이는 죽을 때까지 이런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고 하니, 아마 구원의 남성, 아니면 영원한 스승의 잔영을 이런 데에서 찾아보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황진이는 세상의 모든 명리를 끊고 세상의 이목도 피해가면서 지팡이와 짚신을 벗 삼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던 것이다.

 

또 서경덕의 유문(遺文)들을 모두 읽고 익혔다고 하니, 스승의 사상을 터득하는 것으로 생의 종장을 삼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녀는 어느 날 금강산을 구경하러 가자며 이 생원이란 선비를 유혹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이 전한다.

 

이 생원에게 하인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베옷에다가 삿갓을 쓰고 몸소 양식을 짊어지게 했다. 진이는 여승이 쓰는 송라(松蘿)를 쓰고 갈포 저고리와 베치마를 입고 짚신을 질질 끌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뒤를 따랐다. 금강산 곳곳을 돌아보았다. 여러 절에서 빌어먹기도 하고 더러 자신의 몸을 중들에게 팔아 먹을거리를 얻기도 했다.

- 어우야담

 

그녀의 발걸음은 어느 날 나주의 금성관에도 닿았다. 마침 나주 목사와 많은 인사들이 모여 잔치를 질펀하게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해진 옷차림과 얼굴에 땟자국이 자르르한 모습으로 마루로 올라가 앉아 태연하게 이()를 잡았다. 여러 사람들이 자리값을 하라고 으르자 서슴없이 가야금을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그 자리에 앉아 입을 삐죽이고 있던 여러 기생들은 기가 한풀 꺾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좌중은 그제서야 그녀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임종을 앞두고 집안 사람들에게 일렀다.

 

내가 죽어도 곡을 하지 말고 상여가 나갈 적에는 장구를 두드리고 음악을 울려 인도해달라.

- 성옹지소록

또 묘를 길가에 써달라고도 했다.

 

내가 죽거든 비단이나 관을 쓰지 말고 옛 동문 밖 물가 모래밭에 시체를 내버려서 개미와 땅강아지, 여우와 살쾡이가 내 살을 뜯어먹어 세상 여자들로 하여금 나를 거울 삼도록 해달라.

- 김택영 송도인물지(松都人物誌)

 

앞의 이야기는 저항의 기운이 감돌고 뒤의 이야기는 자괴(스스로 부끄러워함)의 분위기가 깔려 있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자괴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걸맞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무덤으로 알려진 묘는 장단군 입우물재의 길가(현재 황해남도에 속함)에 있다. 그녀의 친지들이 유언을 따르지 않고 끝내 무덤을 썼다. 북한에서는 2005년부터 관광객을 위해 박연폭포 언저리와 황진이묘를 새롭게 정비하고 단장했다.

 

조선 5백 년에 가장 뛰어난 명기로 꼽히는 황진이는 말년을 이렇게 보내고 죽었다. 여기에 황진이의 참모습이 있다.

 

그녀는 단순한 명기나 가무 예술인이나 시인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대의 모순과 관습에 저항하여 남성들을 비웃기만 한 저항의 여성만도 아니었다. 뒷날 백호 임제는 그녀의 무덤에 잔을 붓고 통곡했다.(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엇는다/ 홍안(紅顔)은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는니/ ()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 하노라.) 임제가 누구인가? 그는 좁은 조선 땅에서 태어난 것을 한탄하고 좀스러운 인간군상에 구역질을 느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며 호탕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황진이의 무덤에서 통곡한 뜻은 단순히 정인으로 여겨서가 아니었다. 황진이의 후반기 생애와 견주어봄직하다.

 

19세기 말기 개화사상이 밀려올 때 이른바 신여성들은 봉건사회의 남녀 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남녀 평등을 부르짖었다. 그러면서 신여성들은 자유연애를 구가했다. 황진이는 바로 이들 여성의 귀감이었고 또 선각자였다. 조선조의 여인상을 현모양처로만 그리지 말고 좀더 활기에 차고 모순에 저항한 여인상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황진이는 그런 여인 가운데 하나였다.

 

현대에 와서 이태준 · 박종화 등이 그녀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근래에는 김탁환이 여러 서적을 섭렵하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 황진이라는 작품을 써서 주목을 받았으며, 북한의 홍석중도 황진이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홍석중의 황진이는 황진이의 처지를 빌려 신분사회의 갈등을 부각시키려 했다. 이와 달리 김탁환의 , 황진이는 머리에 주석판이라 부제를 붙인 것처럼 소설적 수법을 빌려 황진이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제시하고 하나하나 평을 곁들인 가이드 북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글은 인간 평등의 역사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황진이는 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화제를 뿌리는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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