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가야 - 「가락기(駕洛記)」 찬(贊)에 보면, 하늘에서 자주색 끈 한가닥이 내려와 둥근 알 여섯 개를 내렸는데, 다섯 개는 각기 읍으로 돌아가고 하나가 이 성에 있게 되었다. 성에 남은 하나는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다섯 개는 각기 다섯 가야의 군주가 되었으니, 금관(金官)을 다섯의 숫자에 넣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고려의 『사략(史略)』에는 금관까지 숫자에 넣고 창녕(昌寧)을 더 기록했으니 잘못된 것이다.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阿羅伽倻 - 라(羅)를 야(耶)로 쓰기도 한다. 지금의 함안이다), 고령가야(古寧伽倻-지금의 상주), 대가야(大伽倻-지금의 고령), 성산가야(星山伽倻-지금의 경산으로 벽진이라고도 한다), 소가야(小伽倻-지금의 고성)다.

 또 고려의 『사략』에 이렇게 말했다.

 "태조 천복(天福-후진(後晉) 고조(古祖) 석경당(石敬瑭)의 연호로 936녀에서 942년까지 사용했다) 5년 경자년(940년)에 다섯 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첫째 금관(金官- 金海府가 되었다), 둘째 고령(高寧-加利縣이 되었다), 셋째 비화(非火- 지금의 창녕인데 아마 고령을 잘못 적은 것 같다)며,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앞의 주와 같이 성산은 벽진가야라고도 한다)이다.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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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전(通典)』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의 유민들은 일흔여 나라로 나뉘어졌는데, 이들은 모두 영통가 사방 백 리였다."

『후한서(後漢書- 남송의 범엽이 지은 역사책으로 후한 열두 황제의 196년간의 사적을 기록했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한(西漢)이 조선의 옛 땅에 처음 네 군을 두었고 뒤에 두 외부를 두었다. 법령이 점점 번잡해져 이를 일흔여덟 나라로 나누었는데, 각각 1만 호(戶)였다.(마한은 서쪽에 있었는데 쉰네 개의 작은 읍이 있어 모두 나라라고 불렀고, 전한은 동쪽에 있었는데 열두 개의 작은 읍이 있어 나라라고 불렀다. 또 변한은 남쪽에 있었는데 열두 개의 작은 읍이 있어 각기 나라라고 불렀다."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 고조선 유이민과 한반도 남부 토착 세력의 결합 (마한, 변한, 진한 성립)

 

⓵ 정치 - 마한에 있는 목지국의 지배자가 한한 전체 주도

          - 군정(신지, 읍차)이 부족 지배

          - 천군(제사장)과 소도(신성 지역- 정치적 지배자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신성지역으로,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해

            숨더라도 함부로 잡아갈 수 없었다.) - 제정분리

 

⓶ 풍습 - 계절제(5월, 10월)

⓷ 경제 - 벼농사 발달(두레 조직)

           -변한 지역에서 철 생산(덩이쇠를 낙랑과 왜에 수출)

 

 

 

* 참고 문헌

EBS, 수능특강 한국사영역 한국사, 2020.

 

- 함경도 동해안(옥저), 강원도 동해안(동예)에 위치

 

⓵ 정치 - 고구려의 압력으로 인해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함

          - 고구려에 공납(어물, 소금), 군장(읍군, 삼로)이 부족 지배

 

⓶ 옥저 - 민며느리제(여자가 열 살이 되기 전에 혼인을 허락한다. 남편 될 사람이 여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길러

            서 아내로 삼는다. 성인이 되면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이때 여자 집에서는 돈을 요구하여 돈을 내면 도

            로 사위 집으로 돌려보낸다.)

          - 가족 공동 무덤(가족이 죽으면 시신을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목곽

            에 안치하는 옥저의 장례 풍습) 

 

⓷ 동예 - 특산물(단궁, 과하마- 말을 타고도 과일 나무 아래를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말, 반어피- 바다표범 가죽)

             족외혼, 책화(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나 소, 말로 배상)

            무천(제천행사, 10월)

       

 

 

 

* 참고 문헌

EBS, 수능특강 한국사영역 한국사, 2020.

  『후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한(辰韓)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으로 오자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고 서로 불러 무리를 이루었는데, 진나라 말과 유사하여 간혹 진한(秦韓)이라 했다고 한다. 열두 개의 작은 나라가 있는데 모두 1만 호씩이고 각기 나라라 일컬었다."(진한은 지금의 경북 대구 지방이다.)

 또 최치원은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들이 피신해 온 곳이다. 때문에 탁수(涿水)의 이름을 취해 살고 있는 읍과 마을을 사탁(沙涿), 점탁(漸涿) 등으로 불렀다.(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涿)을 도(道)로 발음하기 때문에 지금은 때때로 사량(沙梁)이라 쓰고, 양(梁) 역시 '도'로 읽는다)"

 신라는 전성기에 서울이 17만 8936호였고, 1360방(坊), 55리(里), 35개의 금입택(金入宅-부유하고 윤택한 집이 있었다. 그것은 남택(南宅), 북택(北宅), 오비소택(오比所宅), 본피택(本彼宅), 양택(梁宅), 지상택(池上宅-본피부에 있다), 재매정택(財買井宅-김유신의 조상집), 북유택(北維宅), 남유택(南維宅- 반향사의 하방), 대택(大宅), 빈지택(賓支宅), 장사택(長沙宅), 상앵택(上櫻宅), 하앵택(下櫻宅), 수망택(水望宅), 천택(泉宅), 양상택(梁上宅- 梁의 남쪽), 한기택(漢宅)- 法流寺 남쪽), 비혈택(鼻穴宅) , 판적택(板積宅-분황사 상방), 별교택(別敎宅-개천 북쪽), 아남택(衙南宅), 금양종택(金楊宗宅-양관사 남쪽), 곡수택(曲水宅- 개천북쪽), 유야택(有也宅), 사하택(寺下宅), 사량택(沙梁宅), 정상택(井上宅), 이남택(里南宅), 사내곡택(思內曲宅), 지택(池宅), 사상택(寺上宅-대숙택), 임상택(林上宅), 청룡사(靑龍寺-동쪽에 못이 있다), 교남택(橋南宅), 항질택(巷叱宅-본피부), 누상택(樓上宅), 이상택(里上宅), 명남택(椧南宅), 정하택(井下宅) 등이다.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신라(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이라고도 했으며, '서울'은 서벌에서 전래되었다)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자리에 오른 지 19년 임오년 변한(卞韓- 여기서 변한은 낙동강 하류 지방에 있는 가야 제국을 뜻하니 투항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 이병도 설) 사람이 나라를 바쳐 투항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

『후한서(後漢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변한은 남쪽에 있는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진한은 동쪽에 있다."

 최치원이 말했다.

 "변한은 백제(百濟)다."

「본기-『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말한다」에 의하면, 온조(溫祚)가 일어난 것은 홍가(鴻嘉-서한 성제(聖帝) 유경(劉驚)의 연호다) 4년 갑진년(기원전 17년)이었으니, 혁거세나 동명왕의 세대보다 40여 년 뒤의 일이 된다.

『당서』에서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라고 말한 까닭은 온조왕의 계통이 동명왕에게서 나왔기 때문일 뿐이다.

 간혹 어떤 사람이 낙랑 땅에서 나와 변한에 나라를 세워 마한 등과 대치한 적이 있었다고 한 것은 온조 이전에 있었던 일로, 도읍이 낙랑의 북쪽에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이는 구룡산(九龍山) 역시 변나산(卞那山)으로 불렸다는 이유로 함부로 고구려를 변한이라 하는데, 이는 아마도 잘못된 것이다. 마땅히 옛 현인[최치원]의 견해가 옳다고 할 수 있다. 백제 땅에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이라 한 것이다. 백제는 전성기에 15만 2300호였다.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진(晉)나라 역사가 진수(陳壽)가 편찬한 위, 촉, 오 삼국의 정사 『삼국지』 중 위나라 부분으로 「위서(魏書)」가 정확한 말이다. 여기에 마한 50여 국의 이름이 있으며 백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 왕 준(準)은 궁중 사람들과 측근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나라 땅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고 했다."

 견훤(甄萱)이 태조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가 금마산(金馬山-전북 익산)에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다.(『삼국사기』 「본기(本紀)」에 의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는 그 뒤 갑신년에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왕 준(準)을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왕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마한을 합병했음을 알 수 있고, 이 때문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간혹 금마산을 마한으로 알고 백제라고 한 것은 잘못되고 황당한 일다. 고구려 땅에 본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사이(四夷-중국의 부위에 있는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을 일컫는다)는 구이(九夷-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에 의하면, 구이란 견이()와 어이(於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다)와 구한(九韓), 예(穢), 맥(貊)이 있으니 『주례(周禮)』에서 "직방씨(職方氏-주나라 때 관직명으로 천하의 지도와 토지에 관한 일을 했다)가 사이와 구맥(九貊)을 관장했다."라고 한 것은 동이족 즉 구이를 말한 것이다.

『삼국사(三國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주(溟州-지금의 강릉)는 옛날 예국(穢國)이었는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印章)을 얻어 바쳤다."

 또 이렇게 말한다.

 "춘주(春州)는 옛날 우수주(牛首州)며 옛날의 맥국인데, 어떤 이는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라고 한다."

『회남자(淮南子-한나라 회남왕 유안이 빈객과 방술가를 모아 엮은 책)』의 주에는 이렇게 말했다.

 "동방의 이(夷)는 아홉 종류나 있다."

『논어정의(論語正義)』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구이(九夷)란 첫째 현도, 둘째 낙랑, 셋째 고려, 넷째 만식(滿飾), 다섯재 부유(鳧臾), 여섯째 소가(素家), 일곱째 동도(東屠), 여덟째 왜(倭), 아홉째 천비(天鄙)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신라의 승려 안홍이 지은 책)』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구한(九韓)이란 첫째 일본, 둘째 중화(中華), 셋째 오월(吳越), 넷째 탁라(羅), 다섯째 응유(鷹遊), 여섯째 말갈(靺鞨), 일곱째 단국(丹國), 여덟째 여진(女眞), 아홉째 예맥(濊貊)이다."

 

 

* 참고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곧 졸본부여(卒本扶餘)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화주(和州)라고도 하고 성주(成州)라고도 하나 모두 잘못된 것이다. 졸본주는 요동 경계에 있는데,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시조 동명(부여 제족의 공동신을 나타내는 보통명사로 이해된다-서대석 설)성제(東明聖帝)는 성이 고씨(高氏)고 이름은 주몽(朱蒙-추모, 추몽, 중모라고도 썼다)이다. 이에 앞서 북부여의 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피해 가 살았는데, 부루가 죽자 금와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금와는 그때 태백산('고조선 조'에서는 묘향산이지만 여기서는 백두산을 말한다)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하백(河伯-물의 신)의 딸 유화(柳花)입니다. 동생들과 놀러 나왔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웅신산(熊神山-백두산으로 추정) 앙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혹하여 사통(私通)하고는 저를 버리고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단군기』에서 '단군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가까이 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부루(夫婁)라 했다'라고 했다. 지금 이 기록을 살펴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정을 통하여 낳은 아들의 이름이 주몽이라고 했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했다.'하니 부루와 주몽은 이복 형제다) 부모는 제가 중매도 없이 다른 사람을 따라 간 것을 꾸짖어 이곳으로 귀양을 보내 살도록 했습니다.'

 금와는 괴이하게 여겨 유화를 방 안으로 남몰래 가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었다. 그녀가 피하자 햇빛이 따라와 또 비추었다. 이로 인해 임신하여 알을 하나 낳았는데(태양숭배) 크기가 다덧되쯤 되었다. 왕이 알을 개와 돼지에게 던져 주었지만 모두 먹지 않았고, 길에다 버렸으나 말과 소가 피해 갔으며, 들판에 버리니 새와 짐승이 덮어 주었다.(후직(后稷)의 탄생설화와 유사) 왕은 알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깨지지 않았으므로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유화가 천으로 알을 부드럽게 감싸 따뜻한 곳에 두자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겉모습이 영특하고 기이했다.

 겨우 일곱 살에 용모와 재략이 비범했으며,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백 번 쏘아 백 번 맞추었다. (주몽의 활쏘기 실력은 주몽집단의 유목 생활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 나라의 풍속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했으므로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

 금와에게는 아들이 일곱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다. 그러나 그들의 기예가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자 맏아들 대소가 말했다.

 '주몽은 사람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니 일찍이 도모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왕은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도록 했다. 주몽은 준마를 알아보고 먹이를 조금씩 주어 마르게 하고, 늙고 병든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다. 왕은 살찐 말을 타고 주몽에게 마른 말을 주었다. 왕이 아들들과 여러 신하들이 함께 주몽을 해치려하자, 그 사실을 알게 된 주몽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다.

 '나라 사람들이 곧 너를 해치려고 하는데, 너의 재략(才略)이라면 어디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빨리 떠나거라.'

 그래서 주몽은 오이(烏伊) 등 세 사람과 벗을 삼아 떠나 엄수(淹水-지금의 어느 곳인지 자세하지 않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제1에서는 '엄호수(掩호수)'라고 하면서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했다)에 이르러 물(水)에게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자 하백의 손자다. 오늘 도망치는데 뒤쫓는 자들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건너게 했다. 그러고는 다리를 풀었으므로 뒤쫓던 기병은 건너지 못했다. 졸본주(卒本州-현도군의 경계)에 이르러 마침내 도읍을 정했으나, 미처 궁궐을 짓지 못하고 비류수(沸流水-『고려사』에 의하면 평양 동북쪽에 있다고 한다)가에 초가집을 지어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고 했다. 이로 인해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본래의 성은 해씨였는데, 지금 스스로 천제의 아들로 햇빛을 받아 출생했다고 말했기 때문에 고씨를 성으로 삼은 것이다) 주몽의 나이 열두 살(『삼국사기』에는 스물두 살로 나와 있다)이었는데,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 갑신년에 즉위하여 왕이라고 일컬었다. 고구려는 전성기에 21만 508호였다."

 『주림전(珠琳傳)-당나라 도제가 지은 불교책』 제21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옛날 영품리왕(寧稟離王)의 계집종이 아이를 가졌는데, 관상쟁이가 점을 쳐 보더니 '휘하므로 왕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말했다. '내 아들이 아니니 마땅히 죽여야 한다.' 계집종이 '기운이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제가 아이를 밴 것입니다.'라고 했다. 계집종이 아들을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을 불어주고, 마구간에 버리니 말이 젖을 주어 죽지 않았다. 마침내 부여의 왕이 되었다.(바로 동명제가 졸본부여의 왕이 된 것을 말한다. 졸본부여 역시 북부여의 다른 도읍이기 때문에 부여 왕이라고 한 것이다. 영품리란 바로 부루왕의 다른 명칭이다.)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북부여 왕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 이렇게 말했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터이니, 너는 다른 데로 피해 가라.(동명왕이 장차 일어날 조짐을 말한 것이다.) 동해 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 왕도로 삼기에 적당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고 했다.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산천에 제사를 지내 대를 잇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때 타고 가던 말이 큰 연못(백두산 천지를 말한다)에 이르러 큰 돌을 마주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그 돌을 옮기자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내려주신 아들이로구나!"

곧 거두어 기르면서 이름을 금와라고 했다. 그가 성장하자 태자로 삼았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자리를 이어받아 왕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태자 대소(帶素)에게 왕위가 전해졌다. 지황(地皇) 3년 임오년(22년- 고구려 대무신왕 5년이다)에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정벌하고 왕 대소를 죽이니 나라가 망했다.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고기(古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년(기원전 59년) 4월 8일에 천제(天帝)가 오룡거(五龍車- 천체가 타는 용 다섯 마리가 모는 수레를 말하며, 5라는 숫자는 고구려의 성수(聖數)다)를 타고 홀승골성(訖升骨城-대요 의주 경계에 있다)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하며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고 했다.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夫婁)라 했는데, 해(解)를 씨로 삼았다. 왕은 이후에 상제의 명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오 졸본부여라 했는데 바로 고구려의 시조다."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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