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어와 형태소

 

1. 단어

문장에서 자립적으로 쓰일 수 있는 최소의 단위

 

. 단어의 기준 하나의 단어는 내부에 휴지(休止)를 둘 수 없으며 다른 단어를 넣어 분리할 수 없다.

 

. 자립할 수 없는 단어 조사

자립성은 단어의 중요한 요건이지만, 우리말에는 자립할 수 없는 말을 단어로 인정하고 있는 예외가 한 부류가 있는데, 바로 조사이다.

 

* 조사를 단어로 처리한 이유 국어에서 앞말에 결합하여 문법적인 기능을 실현하는 어미와 조사 중에서 조사만을 단어로 포함하게 된 것은, 자립성의 기준에서 보면 어미 앞에 오는 용언 어간은 자립성이 없지만 조사 앞에 오는 체언은 자립성이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처럼 체언이 자립성이 있으므로 조사도 최소한의 자립성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 조사를 단어로 처리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2. 형태소

 

. 형태소 뜻을 가진 가장 작은 말의 단위를 말한다.

 

. 형태소의 분류

자립성의

유무

자립

형태소

다른 형태소와 결합하지 않고 홀로 쓰일 수 있는 형태소

) 바다, 하늘, , , 매우 등

의존

형태소

다른 형태소와 결합하지 않으면 쓰일 수 없는 형태소

) -, 예쁘-, -, --, -/가 등

의미의

성격

실질

형태소

구체적인 대상이나 상태와 같은 실질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형태소. 하나의 형태소로 이루어진 명사, 대명사, 수사, 관형사, 부사, 동사와 형용사 등. 어휘 형태소라고도 함.

) 바다, 하늘, , , 매우, 빨리, -, 예쁘-

형식

형태소

문법적인 의미만을 나타내는 형태소. 조사, 어미, 접사가 여기에 속함. 문법 형태소라고도 함

) -, --, -/가 등

 

. 어근과 접사

 

어근

 

. 어근 형태소가 결합할 때 실질적인 의미를 나타내며 의미상 중심이 되는 부분

) 밤나무 (어근)+ 나무(어근), 형님 (어근)

* 용언의 단어 구조 용언은 기본형을 ‘-형태로 제시하는데, 이때 ‘-는 어미이다. 용언의 단어 구조를 말할 때에는 어간만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가난하다와 같은 말에서 어근은 가난으로, 접사는 ‘--’로 제시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교육적 편의에 따른 가난‘-하다로 제시한다.

 

* 어근과 어간

어근 실질적인 의미를 지며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단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어간 용언이 활용할 때 고정된 부분으로, 용언 활용 시 어미와의 결합 여부에 초점을 맞춘다.

 

. 접사 어근에 결합하여 특정한 의미를 더하거나 문법적 기능을 부여하는 형태소

 

접사의 종류

접두사 - ‘맨발-’새하얗다-’는 어근의 앞에 위치하는 접두사이다. 접두사는 명사에 결합할 수도 있고, 형용사, 동사에 결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접두사는 접미사와 달리 어근의 품사를 바꾸는 일이 거의 없으며므로, 접두 파생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파생어이 품사는 어근의 품사와 대개 일치한다.

 

* 접두사와 어근의 구분 접두사는 실질 형태소가 아닌 문법 형태소이다. 하지만 접두사는 문법적인 의미뿐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를 상당 부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어근과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을 때가 있다. 어근과의 구별이 어려운 접두사에는 들개, 들쥐, 들국화-’, ‘늦가을, 늦더위, 늦장가-’ 등이 있다.

 

접미사 - ‘지우개‘-향기롭다‘--’ 등 어근의 뒤에 위치하는 접미사이다. 어근과 결합하여 그 뜻을 제한하거나, 새로운 단어를 만들 때 어근의 품사를 바꾸기도 하고 바꾸지 않기도 한다.

 

. 단어 형성

 

단어의 분류 어근의 개수와 접사의 결합 여부에 따라 단일어, 합성어, 파생어로 구분

2. 단일어 하나의 어근만으로 이루어진 단어

) 하늘, 바다, 가다, 밟다

 

3. 복합어 어근과 접사로 이루어진 단어를 복합어라고 한다.

. 합성어 둘 이상의 어근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

) 손목, 꽃병, 밤낮

 

* 합성어와 구의 구별

합성어와 구를 구별하는 방법 중에 구성 요소 사이에 와 같은 요소를 넣어보는 것이 있다.

나는 배를 깎아 먹었다.

나는 배를 깎아서 먹었다.

 

경치가 뛰어나다.

경치가 뛰어서 나다.

 

깎아 먹다는 구이므로 구성 요소 사이에 를 넣은 깎아서 먹다가 가능하다. 그러나 뛰어나다는 합성어이므로 구성 요소 사이에 를 넣은 뛰어서 나다가 성립하지 않는다.

 

* 반복 합성어 반복 합성어는 형태소의 전체 혹은 일부가 반복되어 이루어진 합성어를 말한다. 반복을 이루는 요소는 대체로 명사나 부사가 많으며, 반복의 결과로 생긴 단어도 명사나 부사인 경우가 많다. ) 곳곳, 따로따로, 두둥실

 

합성어의 형성

통사적 합성어와 비통사적 합성어

통사적

합성어

단어의 구성 방식이 꾸며 주는 말이 꾸밈을 받는 말앞에 온다든지, 어간이 어미와 결합한다든지, 명사와 명사가 나란히 쓰일 수 있다든지 국어의 문장 구성 방식과 맞게 만들어진 합성어

) 건널목(용언의 활용형이 명사를 꾸밈), 밤낮(명사+명사의 구성 방식), 돌아가다(어간과 어미의 결합형 뒤에 어간이 오는 것은 일반적인 문장 구성 방식)

비통사적

합성어

단어의 구성 방식이 국어 문장의 구성 방식과 일치하지 않는 합성어

) 접칼(‘-(접다)이 어미와의 결합없이 명사인 칼과과 결합), 부슬비(불규칙 어근 + 명사의 구성방식), 오르내리다(용언 어간과 어간이 바로 연결되지 않음)

 

합성어의 유형

대등

합성어

두 성분이 대등한 관계를 이루는 합성어

) 논밥

종속

합성어

앞의 성분이 뒤의 성분을 수식하는 합성어

) 손가락

융합

합성어

구성 요소의 원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합성어 전체의 의미가 구성 요소들의 의미를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 것.

) 춘추(春秋) - ‘나이’, 쥐꼬리 - ‘매우 작음

 

 

. 파생어 어근과 접사가 결합하여 형성된 단어.

파생어의 종류

접두

파생어

어근 앞에 접두사가 결합하여 파생어가 만들어지는 경우

) 헛고생, 헛걸음, 헛소리(‘-’)

접미

파생어

어근 뒤에 접미사가 결합하여 뜻을 더하거나 어근의 품사를 바꾸는 경우

) 구경꾼, 나무꾼, 살림꾼(‘-’) 걸음, 울음, 웃음(‘-’)

한자어가 결합한 파생어

자립적으로 쓰일 수 있는 단어뿐만 아니라 한자어 어근이나 접사들도 모두 한자어에 속한다. 한자어 접사 중 생산적인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생맥주, 생고기 친()- :친손자, 친아들

()- : 무의미, 무가치 양()- : 양배추, 양과자

()-, ()-, ()-’ 등의 접두사는 친족 명사에 결합하여 주로 쓰인다. ‘()-’를 비롯한 ()-, ()-, ()-’ 등의 접두사는 부정의 의미를 나타낸다.

 

-() : 과학자, 기술자 -() : 심리적, 사회적

-() : 민주화, 전문화 -() : 정확성, 창조성

‘-()’그에 관계된정도의 의미를 띠며 주로 한자어 추상 명사와 결합한다. 특히 ‘-()’이다와 결합하여 접사가 결합한 전체 구가 형용사처럼 쓰인다.

 

접사의 생산성

어떤 접사가 많은 수의 파생어를 만들 때는 생산적이다혹은 생산성이 높다,’라고 한다.

 

죽음, 걸음, 묶음, 웃음

주검, 마중

 

에 쓰인 접사 ‘-()은 비교적 생산성이 높은 접사로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대체로 어근과 접사를 끊어 적는 방식으로 표기한다.

에 쓰인 접사 ‘-이나 ‘-은 현대 국어에서 생산성이 낮은 접사로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대체로 어근과 접사를 이어 적는 방식으로 표기한다.

 

‘--’‘--’에 의한 파생

 

건설하다, 이룩하다.

건설되다. 이룩되다.

 

‘--’는 주로 명사에 결합하여 형용사나 동사를 파생하는데, 앞에 오는 어근이 상태성을 가지고 있으면 형용사, 동작성을 가지고 있으면 동사를 만든다. ‘--’에 의한 파생어와 짝을 이루는 것이 ‘--’에 의한 파생어이다. ‘--’ 역시 ‘--’와 마찬가지로 매우 많은 한자어 명사나 명사성 어근과 결합한다.

 

기출 풀어 보기

 

2020 3월 고3 전국연합학력평가 문제지

 

13. <보기1>을 바탕으로 <보기2>- 에 대한 설명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1>----------------------------------------------------------------------

합성 명사의 구성 요소 중 선행 요소는 다양한 품사의 단어이지만 후행 요소는 일반적으로 명사이다.

----------------------------------------------------------------------------

 

<보기2>----------------------------------------------------------------------

새해를 맞이하여 오랜만에 할머니 댁에 갔다. 할머니께서 점심으로 굵은소금 위에 새우를 올려놓고 구워 주셨고, 저녁에는 산나물을 넣은 비빔밥을 해 주셨다. 내가 할머니께 스마트폰의 여러 기능을 알려 드리자 척척박사로구나.”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

⓵ ㉠은 관형사와 명사가 결합한 합성 명사이다.

⓶ ㉡은 동사의 활용형과 명사가 결합한 합성 명사이다.

⓷ ㉢은 명사와 명사가 결합한 합성 명사이다.

⓸ ㉣은 부사와 명사가 결합한 합성 명사이다.

⓹ ㉤은 형용사의 활용형과 명사가 결합한 합성 명사이다.

 

 

정답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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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변동 : 어떤 음운이 조건에 따라 다른 음운으로 바뀌는 현상

 

가. 교체(대치) : 한 음운이 다른 음운으로 바뀌는 현상

(1) 음절의 끝소리 규칙 : 음절의 끝소리가 ‘ㄱ, ㄴ, ㄷ, ㄹ, ㅁ, ㅂ, ㅇ’의 일곱 개 중의 하나로 발음되는 현상. 이 외의 자음이 음절 끝에 오면 'ㄱ, ㄴ,ㅂ ' 중 하나로 바뀌어 소리가 난다.

* 실현 여부
· 음절 끝에서 실현됨 :  낟, 낫, 낮, 낱 → [낟] / 입, 잎 → [입]

 

· 끝소리가 자음인 형태소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형식 형태소가 올 경우에는 끝소리 규칙이 실현 되지 않음.
: 낫으로 → [나스로] / 꽃에 → [꼬체]

 

* 연음

 연음은 두 형태소가 결합할 때 앞선 형태소의 말음이 뒤 형태소의 초성으로 옮겨 가서 발음되는 것으로, 음운이 바뀌는 현상이 아니므로 음운 변동에 속하지는 않는다. 국어의 연음은 자음으로 끝나는 형태소와 모음으로 시작하는 문법 형태소가 결합할 때 일어난다. 연음은 음절의 끝소리 규칙과 상호 배타적인 관계에 있다. 연음이 일어나는 환경에서는 음절의 끝소리 규칙이 적용될 수 없고, 연음이 일어나지 않는 환경에서는 반드시 음절의 끝소리 규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 끝소리가 자음인 형태소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실질 형태소가 올 경우에는 음절의 끝소리 규칙이 실현됨.
  : 낫 아래[낟 아래 → 나다래] / 꽃 위[꼳 위 → 꼬뒤]

 

 

(2) 비음화 : ‘ㅂ, ㄷ, ㄱ’이 비음(ㅁ, ㄴ) 앞에서 비음(ㅁ, ㄴ, ㅇ)으로 바뀌는 현상으로 비음에는 'ㅁ,ㄴ,ㅇ'이 있지만 'ㅇ'은 종성에만 나타나고 초성에 나타나는 일이 없으므로 'ㅇ'앞에서 비음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없다.


밥물 →[밤물], 앞문 →[압문](음절의 끝소리) → [암문], 받는다 →[반는다]

⦁ 국물 →[궁물]

붙는 →[붇는] → [분는]

 

(3) 유음화 : ‘ㄴ’이 앞이나 뒤에 오는 유음 ‘ㄹ’의 영향으로 ‘ㄹ’로 바뀌는 현상
ㄹ+ㄴ : 칼날 → [칼랄], 설날 →[설랄]
ㄴ+ㄹ : 권력 → [궐력], 천리 →[천리]

 

(4) 된소리되기(경음화) : 예사소리(평음)가 일정한 환경에서 된소리(경음)로 바뀌는 현상.

 

받침  ‘ㄱ, ㄷ, ㅂ’과 뒤의 된소리 되기 : ‘ㄱ, ㄷ, ㅂ’ 뒤에서 뒤 음절의 ‘ㄱ, ㄷ, ㅂ, ㅅ, ㅈ’이 만나면 뒤의 예사소리가 된소리(ㄲ, ㄸ, ㅃ, ㅆ, ㅉ)로 바뀜.
예) 입고 → [입꼬] , 국밥→[국빱], 닫지 →[닫찌], 부엌도 →[부억도 → 부억또], 작다 →[작따]

 

어간 받침 'ㄴ', 'ㅁ' 뒤의 된소리되기 : 'ㄴ', 'ㅁ'으로 끝나는 용언 어간 뒤에 'ㄱ', 'ㄷ', 'ㅅ', 'ㅈ' 음운이 결합될 때 적용된다.

예) 감다 →[감따], 앉다 →[안따]

 

한자어에서 'ㄹ' 받침 뒤 된소리되기 : 'ㄹ'로 끝나는 한자와 'ㄷ', 'ㅅ', 'ㅈ'으로 시작하는 한자가 결합할 때 일어나는 된소리되기 현상

예) 발달[발딸], 질서[질써], 실전[실쩐]

 

관형사형 '-(으)ㄹ' 뒤의 된소리되기 : 용언 어간 뒤에 관형사형 어미 '-을'이 결합할 때 그 뒤의 체언에 적용되는 된소리되기 현상.

예) 할 걸[껄], 갈 데[떼], 살 집[찝]

 

(5) 구개음화 : 끝소리가 ‘ㄷ, ㅌ’인 형태소가 모음 ‘ㅣ’나 반모음 ’ㅣ[j]' 로 시작하는 형식 형태소 앞에서 구개음인 ‘ㅈ, ㅊ’으로 바뀌는 현상
예) 굳이 →[구지], 해돋이 →[해도지], 같이 →[가치], 닫히다→[다치다], 샅샅이→[삳싸치]

 

* 구개음화는 형태소와 형태소가 결합할 때만 나타난다. 한 형태소 내에서는 '마디[마디], 잔디[잔디]'처럼 구개음화가 적용되지 않는다.

예) ① 밭이랑 논을 갈았다.

     ② 밭이랑에 양파를 심었다.

 

①은 '밭'에 접속 조사 '이랑'이 결합하면 구개음화가 일어나서 [바치랑]이 되지만, 는 실질 형태소 '이랑'이 결합하면서 구개음화가 일어나지 않고 [반니랑]이 된다.

 

(6) 'ㅣ'모음 역행 동화 : 뒤에 오는 음절의 ‘ㅣ’나 ‘ㅣ’나  ’j'에 동화되어 앞에 오는 음절의 후설 모음이 전설모음으로 바뀌는 음운 현상

 

예) 아비> 애비, 아기> 애기, 잡히다> 잽히다, 고기>괴기

 

* 일반적으로 'ㅣ' 모음 역행 동화는 표준 발음으로 인정하는 음운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남비> 냄비', '올장이> 올채이' 등은 'ㅣ'모음 역행 동화가 적용된 형태를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다.

 

나. 탈락 : 두 음운이 마주칠 때, 그중 한 음운이 완전히 없어지는 현상

 

(1) 자음군 단순화: 음절의 끝에 두 개의 자음이 올 때, 이 중 한 자음이 탈락하는 현상. ( 국어의 음절 종성에 올 수 있는 자음의 수는 최대 하나이다. 따라서 형태소끼리 결합하거나 한 형태소가 단독으로 쓰이는 과정에서 자음군 단순화가 적용되어 두 자음 중 하나가 없어져야한다.)

 

예)  [] / [] / []/ 앉거나[안꺼나]

 

 

(2) ‘탈락: 모음과 모음 사이에서 혹은 비음/유음과 모음 사이에서 이 탈락하는 현상

예) 좋은 [조은] / 놓으니 [노으니] / 많아서 [마나서]/ 싫은 [시른]

 

(3) 'ㄹ' 탈락 : 'ㄹ' 받침으로 끝나는 어근이 다른 어근이나 접사와 결합할 때, 또 'ㄹ' 받침으로 끝나는 용언의 어간이 어미와 결합할 때 'ㄹ'이 탈락하는 음운 현상.

예) 불+삽 →[부삽], 바늘+질[바느질], 놀-+는[노는], 둥글-+ -냐 [둥그냐]

 

* 'ㄹ' 탈락의 요건

'ㄹ'로 끝나는 용언 어간 뒤에 'ㄴ,ㅅ'과 같이 조음 위치가 비슷하 자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결합하면 'ㄹ'이 규치적으로 탈락한다.

'ㄹ' 탈락은 합성어가 파생어가 만들어질 때에도 적용디지만, 필수적이지는 않다. 이 경우에는 'ㄴ,ㅅ'뿐만 아니라 'ㄷ,ㅈ' 앞에서도 일어난다.

 

(4) ‘탈락: 어간 말의 가 '아/어'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 탈락하는 현상

 예)  크-+-어서 [커서] / 뜨-+어-서 [떠서] / 담그-+아-도 [담가도]

 

(5) 동일 모음 탈락 : 어간 말 모음과 어미 초 모음이 동일할 때 탈락한다.

예) 가- + -아서 →[가서], 서- + -어서 [서서]

 

(6) 'ㅓ'탈락 : 'ㅐ, ㅔ'로 끝나는 어간 뒤에서 어미으 모음 'ㅓ'가 탈락하는데, 어간의 모음이 반드시 장음으로 실현된다.

예) 개-+ -어서 →[개ː서], 세-+ -어도 →[ː도]

 

다. 첨가 : 없던 음운이 새로 생기는 현상

 

(1) ‘첨가: 앞 음절이 자음으로 끝나고 뒤 음절이 모음 나 반모음 [j]’로 시작할 때, ‘이 새로 생기는 현상. 이 때 앞에 오는 말은 어근이든 접두사이든 일반 단어이든 상관없지만 뒤에 오는 말은 주로 실질 형태소이거나 한자 계열의 접미사이어야 한다. 어미나 조사를 포함하여 고유어 계열의 문법 형태소가 후행하면 'ㄴ'첨가는 일어나지 않는다.

 

 합성어에서의 'ㄴ' 첨가 : 색+연필 [생년필], 직행+ 열차 →[지캥녈차]

파생어에서의 'ㄴ' 첨가 : 맨+입 [맨닙], 홑+이불 [혼니불]

단어와 단어의 결합에서 'ㄴ' 첨가 : 못+ 잊어 [몬니저], 옷+입다[온닙따]

 

* '월요일, 목요일, 금요일' 등과 같은 요일의 명칭에서도 'ㄴ' 첨가는 일어나지 않는다. 방언에 따라서는 '월요일'을 '[월뇨일월료일]'이라고 발음하기도 하지만 이를 표준 발음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2) 반모음 첨가: 주로 모음으로 끝나는 용언 어간 뒤에 ‘-/-로 시작하는 어미가 결합하거나 모음으로 끝나는 체언 뒤에 조사 가 결합할 때 반모음 [j]’나 반모음/[w]’가 새로 생기는 현상. 항상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표준발음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 영수+ 아 →[영수야](), 광주+에 →[광주예] (×)

     피+어 [피어/ 피여], 되+어 [되어/ 되여]

 

* 반모음 첨가는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나, ‘피어[피여], 되어[되여]’ 이외에는 표준 발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라. 축약: 어떤 두 소리가 이어질 때, 두 소리의 성질을 모두 가진 소리로 줄어드는 현상

 

(1) 거센소리되기(유기음화): ‘, , , 과 만나 거센소리인 , , , 이 되는 현상

예)  낳고 [나코] / 않던 [안턴] / 법학 [버팍] / 옳지 [올치]

※*거센소리 현상과 구개음화가 일어나는 경우

굳히고 [구티고 구치고]

닫히다 [다티다 다치다]

 

(2) 모음 축약: 모음/가 다른 모음과 결합하여 이중 모음을 이루는 것. 모음 축약이 일어나는 경우, 어느 하나의 모음은 반모음으로 바뀜.

예) 그리+[그려], +[], 맞추+[맞춰]

 

 

* 기출 문제 풀어 보기-  2020학년도 3월 고3 전국연합학력평가 문제지

 

11. <보가>의 학습 과제를 수행한 결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보기>-------------------------------------------------------------------------------------------------------------------------

* 학습 내용 : 음운 변동의 유형에는 교체, 탈락, 첨가, 축약이 있다. 음운 변동은 한 단어를 단독으로 발으하는 경우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둘 이상의 단어를 이어서 한 마디로 발음하는 경우에도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낮'과 '한때'를 각각 단독으로 발음하는 경우에 '낮[낟]'은 교체가 일어나고 '한때[한때]'는 음운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낮'과 '한때'를 이어서 한 마디로 발음하는 경우에는 교체와 축약이 일어나 '낮 한때[나탄때]'로 발음된다.

 

* 학습 과제 : 아래의 ㄱ과 ㄴ에서 두 단어를 이어서 한 마디로 발음하는 경우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음운 변동의 유형을 찾고, 그 유형의 적절한 예를 제시하시오.

 ㄱ. 잘 입다[잘립따]

 ㄴ. 값 매기다[감매기다]

---------------------------------------------------------------------------------------------------------------------------------

         공통적인 음운 변동의 유형               예

①             교체                           책 넣는다[챙넌는다] 

②             교체                            좋은 약[조:은냑]

③             교체                            잘한 일[잘한닐]

④             첨가                           슬픈 얘기[슬픈내기]

⑤             첨가                             먼 옛날[먼:녠날]

 

 

정답 : 1

 

 

2020학년도 6월 고2 전국연합학력평가 문제지

 

13. <보기>의 ㉠에 들어갈 내용으로 적절한 것은?

<보기>------------------------------------------------------------------------------------------------------------------------

 아래의 단어들을 음운 변동 양상에 따라 둘로 분류할 때, 어떤 질문이 적절한지 알아봅시다.

           놓는[논는], 닳아[라라], 막일[망닐], 칼날[칼랄]

 

질문:                                      

대답                              예                                           아니요

                  놓는[논는], 칼날[칼랄]                        닳아[다라], 막일[망닐]

---------------------------------------------------------------------------------------------------------------------------------

① 음운 변동 전후 음운의 수가 동일한가?

② 자음과 모음의 변동이 모두 일어났는가?

③ 음운 변동의 결과가 표기에 반영되었는가?

④ 음운 변동이 앞 음절에서만 발생하였는가?

⑤ 조음 방법이 같아지는 음운 변동이 일어났는가?

 

 

정답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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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ᄂᆞᄅᆞ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ᄒᆞ시니

 

[현대어 풀이]

우리나라의 여섯 용(임금)이 웅비(雄飛)하시어, [하시는] 일마다 하늘이 복을 내리시니, 중국의 옛 성군(聖君)들의 사적(史蹟)과 일치합니다.

(조선 창업의 정당성)

 

[어휘 풀이]

육룡 : 6. 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

동부 : 딱 들어맞음. ()는 부절(符節)인데, 옥ㅇ 글자를 새기고 그것을 돌로 쪼개어 각각 반쪽씩 가지고 있다가 일이 있을 때 서로 맞추어 신표로 삼는 물건을 말한다

 

<2>

 

불휘 기픈 남ᄀᆞᆫ ᄇᆞᄅᆞ매 아니 뮐ᄊᆞㅣ 곶 됴코 여름 하ᄂᆞ니

ᄉᆞㅣ미 기픈 므른 ᄀᆞᄆᆞ래 아니 그칠ᄊᆞㅣ 내히 이러 바ᄅᆞ래 가ᄂᆞ니.

(조선의 굳건한 기초와 영원한 발전)

 

[현대어 풀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습니다.

원천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아니 그치므로 내가 이루어져 바다로 흘러갑니다.

 

[어휘 풀이]

1.뿌리 깊은 나무 기초가 튼튼한 조선

2. 샘이 깊은 물 근원이 오랜 조선

 

 

<제48장>
굴허에 ᄆᆞᄅᆞᆯ 디내샤 도ᄌᆞ기 다 도라가니 반(半) 길 노ᄑᆞᆫㅣᄃᆞᆯ 년기 디나리잇가.
석벽(石壁)에 ᄆᆞᄅᆞᆯ 올이샤 도ᄌᆞᄀᆞᆯ 다 자ᄇᆞ시니 현 번 ㅂ튀운ᄃᆞᆯ ᄂᆞ미오ᄅᆞ리잇가.
(태조의 초인적 용맹)

[현대어 풀이]
(금 태조가) 구렁에 말을 지나게 하시어 도적이 다 돌아가니, 반 길 높이라도 다른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태조가) 바위 절벽 위로 말을 올라가게 하시어 도적을 다 잡으시니, 몇 번 뛰어 오르게 한들 다른 사람이 오를 수 있겠습니까?

[배경 고사]
금 태조가 적에 쫓겨 좁은 구렁으로 들어갔으나, 말을 채찍질하여 높은 언덕을 뛰어넘으니 뒤쫓던 적들은 감히 넘을 엄두를 못 내고 그냥 돌아가 버렸다.
태조가 지리산에서 절벽 위에 대치하고 있는 왜적을 토벌할 때, 장수들이 모두 올라갈 수 없다 하였으나, 태조는 칼등으로 말을 쳐서 한달음으로 올라가니 군사들이 뒤쫓아 적을 섬멸하였다.

<제53장>
사해(四海)ᄅᆞᆯ 평정(平定)ᄒᆞ샤 길 우희 양식(糧食) 니저니 새외북적(塞外北狄)인ᄃᆞᆯ 아니 오리잇가.
사경(四境)을 개척(開拓)ᄒᆞ샤 셤 안해 도ᄌᆞᆨ 니저니 요외남만(徼外南蠻)인ᄃᆞᆯ 아니 오리잇가.
(태조의 선정(善政))

[현대어 풀이]
(당 태종이) 천하를 평정하시어, 길 위에서 (길가는 사람들이) 양식 걱정을 잊으니, 변방 밖의 북쪽 오랑캐인들 (어찌) 아니 오겠습니까?
(태조가) 사방의 국경 지역을 개척하시어, 섬 안에(사는 사람들이) 도적(왜적) 걱정을 잊으니, 변방 밖의 남쪽 오랑캐인들 (어찌) 아니 오겠습니까?

[어휘 풀이]
1. 새외북적 – 여기서는 돌궐족을 의미
2. 요외남만 – 유구국(오키나와), 섬라국(태국). ‘만(蠻)’은 오랑캐라는 뜻

[배경 고사]
당 태종이 중국 전체를 평정하니, 풍년이 들어서 여행하는 사람들이 양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살기 좋아지니 돌궐족이 귀순해 왔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후 교화(敎化)가 멀리까지 미쳐서 북방의 백성들이 편히 살게 되었고, 또 남쪽으로 왜적의 침략도 없어졌다. 뿐만 아니라, 멀리 유구, 섬라 등에서도 사신이 와서 그들의 특산물을 바쳤다.

<제67장>
ᄀᆞᄅᆞᆷㅅ ᄀᆞㅿㅐ 자거늘 밀므리 사ᄋᆞ리로ᄃᆞㅣ 나거ㅿㅏ ᄌᆞᄆᆞ니이다.
셤 안해 자시ㅭ 제 한비 사ᄋᆞ리로ᄃᆞㅣ 뷔어ㅿㅏ ᄌᆞᄆᆞ니이다.
(천우신조)

[현대어 풀이]
(원나라 백안의 군사가) 강가에서 (진을 치고) 잘 때, 밀물이 사흘이나 들어왔지만 (잠기지 않다가). 떠난 뒤에야 물에 잠기었습니다.
(태조가) 위화도에서 (진을 치고) 잘 때, 큰 비가 사흘이나 계속되었지만, (섬이 물에 잠기지 않다가) 회군한 뒤에야 물에 잠기었습니다.

[어휘 풀이]
1. 나거ㅿㅏ- 나가고 나서야
2. 위화도 - 압록강(鴨綠江) 하류에 있는 하중도(河中島)

[배경 고사]
원 세조(世祖)의 승상(丞相) 백안(伯顏)이 송나라를 치려고 군사를 전당강 가에 주둔시키니, 그곳 사람들이 이를 보고, 곧 조수(潮水)가 밀려와 군영이 물에 잠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 일이 없다가 군사가 떠난 뒤에야 그곳이 물에 잠기었다.
태조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주둔시켰을 때, 장맛비가 사흘 동안 계속 내렸는데도 물이 붇지 않더니, 회군한 뒤에야 혼 섬이 물에 잠기었다.

 

<91>

아바님 이받ᄌᆞᄇᆞㅭ 제 어마님 그리신 누ㅨ므를 좌우(左右)ㅣ 하ㅿㆍㅸㅏ 아바님 노()ᄒᆞ시니.

아바님 뵈ㅿㆍㅸㆍ시ㅭ 제 어마님 여희신 누ㅨ므를 좌우(左右)ㅣ 쓸ᄊᆞㅸㅏ 아바님 일ᄏᆞᄅᆞ시니

(태종의 지극한 효성)

 

[현대어 풀이]

(당 태종이) 아버지 고조를 모시고 잔치를 할 때, 죽은 모후(母后)를 그리워하신 눈물을 좌우가 참소(讒訴)하여 아버님이 노하셨습니다.

(태종이) 아버님을 뵈올 때, 어머님 여의신 눈물을 좌우가 슬퍼하여, 아버님이 아들의 효성을 칭찬하시었습니다.

 

[어휘 풀이]

1. 이받ᄌᆞᄇᆞㅭ 제 음식으로 대접할 때

2. 하ㅿㆍㅸㅏ 참소하여, 비방하여

 

[배경 고사]

당 태종이 궁중에서 고조를 모시고 잔치를 할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여 눈물을 흘리니, 고종의 총희(寵姬)들이 저희들을 미워하여 우는 것이라고 참소하여, 고조가 아들에게 화를 냈다.

태종 이방원이 어머니(신의 왕후) ()을 당하여 능()앞에 여막(廬幕)을 짓고 시묘(侍墓)하였는데, 태조를 뵈러 서울을 향할 때면 길에서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 태조의 앞에 이르러서도 통곡하니, 좌우가 다 슬퍼하였고, 태조는 항상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125>

천세(千世) 우희 미리 정()ᄒᆞ샨 한수(漢水) ()에 누인개국(累仁開國)ᄒᆞ샤 복년(卜年)이 ᄀᆞㅿ업스시니,

성신(聖神)이 니ㅿㆍ샤도 경천근민(敬天勤民)ᄒᆞ샤ㅿㅏ 더욱 구드시리이다.

님금하 아ᄅᆞ쇼셔 낙수(落水)예 산행(山行) 가 이셔 하나빌 미드니잇가.

(후왕에게 경천근민할 것을 당부)

 

[현대어 풀이]

천세 전에 미리 (도읍지로) 정하신 한양에, 어진 덕을 쌓아 나라를 여시어, 점지 받은 운명이 끝이 없으시니.

훌륭한 왕손이 이으시어도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부지런히 돌보셔야 더욱 둗으실 것입니다.

임금이시여, 아소서. 낙수에 사냥 가 있으면서 할아버지만 믿었습니까?

 

[어휘 풀이]

성신 : 성자신손(聖子神孫). 거룩한 왕손

낙수 중국 황하의 지류

하나비 할아버지. 우왕을 가리킴. 우왕은 순() 임금에게 제위를 물려 받아 하()나라를 세운 성군(聖君)

 

[배경 고사]

 

신라 말의 승려 도선의 비결(祕訣)서에 의하면, 한수의 북쪽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흥하리라고 하였다. 풍수지리설에서는 물의 북쪽을 양()이라 하니, ‘한수북(漢水北)’한양(漢陽)’을 가리킨다.

()나라 태강(太康)왕이 유흥에 빠져 정사(政事)를 게을리 하면서, 할아버지 우왕(禹王)의 덕만 믿고 잘못을 고치지 못하더니, 마침내 낙수(落水)로 사냥간 지 백 날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예(羿)가 백성을 위하여 참을 수 없다 하여 태강을 폐위시켜 버렸다.

 

 

참고 자료

 

정경섭 엮음, 고전문학의 이해와 감상1, 문원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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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장의 의미

악장이란 말은 궁중에서 나라의 공식적인 행사에 쓰이는 노래가사를 두고 부르는 일반적인 이름

1) 악장(樂章) - 우리 문학에서 악장은 조선왕조 초기(15세기) 특정한 시가 장르에 붙여진 이름.

- 조선 건국 초 예악(禮樂)정비의 일환으로, 나라의 공식적인 행사에 쓰기 위해 새로 지은 노래 가사들을 특별히 따로 묶어서 악장이라 이름함

- 훈민정음 창제로 국문자의 실용이 요청됨에 따라 그 첫 사업으로 조선 왕조의 조상을 신성화하고 왕업의 영원무궁함을 기원하며 군왕의 덕화를 찬송하기 위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 지어졌고, 이어서 부처의 은총을 찬송하기 위하여 석가모니 일대기를 노래로 엮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제작되었다.

 

2.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 편찬 배경

- 세종 24년(1442) 봄에 경상 ⦁ 전라 두 도의 관찰사에게 전지(傳旨)를 내려, 태조가 운봉(雲峰)에서 왜구와 싸우던 사적을 탐문하여 보고하라 하여 『용비어천가』 편찬작업을 착수하였다.

- 세종 28년(1446) 훈민정음이 반포되자 『태종실록』을 상고하여 한역시를 삽입하였고, 동 29년(1447) 2월에는 사실(史實)과 어구(語句)에 대한 주해를 붙여 10권을 만들어 올렸다. 같은 해 5월에는 『용비어천가』를 음악에 맞추어 치화평(致和平), 취풍향(醉豊享), 봉래의(鳳來儀), 여민락(與民樂) 등의 악보를 만들어 공사 연향(宴饗)에 쓰게 하였다.

- 조선 왕조는 신흥 국가로서 밖으로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정책을 확립하고 있었고, 안으로는 새로운 질서와 지배 체제를 다지는 시기 였다. 세종 대왕은 조선 왕조의 창업에 대하여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당위성을 내세우기 위하여 육조(六祖)의 행적을 중국의 고대 주(周)나라의 개국(開國)에 대비시켜 천명(天命)의 소치임을 강조하려 함.

  

2) 『용비어천가』의 내용

 - 세종의 6조(목(穆) ⦁ 익(翼) ⦁ 도(度) ⦁ 환(桓) ⦁ 태조(太祖) ⦁ 태종(太宗) )의 성덕을 찬송하고, 또는 훈계하여 왕손의 영구한 보전을 축원한 125장으로 된 노래이다.

- 제1 장은 조선 왕조의 융성함이 천명의 도움임을 표현한 것이다.

- 제2장은 자연물을 빌어 왕손의 번성함과 왕업의 영원함을 읊음.

- 제10장과 제68장과 제 79장은 앞의 노래들을 이어서 반복하여 읊음.

- 제110장 이하는 다시 앞의 내용들을 반복하면서 규계(規戒)의 뜻을 나타내려고 함.

- 각 장은 대개 6조의 업적을 중국의 역대 제왕의 사적과 견주어 서술하고 있음

 

3) 『용비어천가』의 작가

- 서문에 따르면 권제, 정인지, 안지, 최항,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등을 시켜 지었다고 했는데, 그들은 노래뿐만이 아니라 한시 번역과 역사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하는 주해까지도 집필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4) 『용비어천가』 형식

 

- 모두 125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장별(章別) 행(行)의 수는 제1장 1해, 제2 ~ 124장 2행, 제125장 3행으로 제 125장을 제외한 나머지 123장은 매 장이 전후 2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전행과 후행은 대구(對句로 되어 있어, 주제를 강조하는 효과와 리듬감을 빚어내는 데에 효과가 크다.

 

5) 내용 구조

 

서사(1~2장) - 조선 창업의 당위성을 포괄적으로 제시

본사(3~ 109장) - 창업의 당위성을 구체적 이야기로 실증

결사(110~125장) - 후세 왕에게 경천근민(敬天勤民)할 것을 훈계

 

* 3~124장의 주인공은 4조와 태조, 태종이 순차적으로 순화되는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다. [4조(3~8장) → 태조(9~16장)] →[4조(17~26장 →태조(27~89장) →태종(90~109장)] → [4조(110~111) → 태조(112~122장) → 태종(123~124)]

 

 

 

『용비어천가』 핵심정리

 

① 성격 - 서사적, 송축가(頌祝歌)

② 의의 -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문학

③ 주제 - 조선 창업의 당위성과 후왕 훈계

 

 

참고 문헌

 

정병욱, 「증보판 한국고전시가론」, 신구 문화사, 2003.

 

 

* 기출문제 풀어보기 - 2016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지[A형]

-------------------------------------------------------------------------------------------------------------------------------

(가)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뮐새 꽃 좋고 열매 많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아니 그칠새 내가 이러 바다에 가나니

                                                    <제2장>

 

천세(千世) 전에 미리 정하신 한강 북녘에 누인개국(累仁開國)하시어 복년(卜年)이 가이없으시니

성신(聖神)이 이으셔도 경천근민(敬天勤民) 하셔야 더욱 굳으시리이다

임금아 아소서 낙수(落水)에 사냥 가 있어 조상만 믿겠습니까

                                                             <125장>

------------------------------------------------------------------------------------------------------------------------------

 

40. (가)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제2장>에서는 유사한 자연의 이치가 내포된 두 사례를 나란히 배열하고 있다.

② <제125장>에서는 행에 따라 종결 어미를 달리하고 있다.

③ <제2장>과 달리, <제125장>은 전언의 수신자를 명시하고 있다.

④ <제125장>가 달리, <제2장>은 한자어를 배제하고 순 우리말의 어감을 살리고 있다.

⑤ <제2장>과 <제125장>은 모두 자연현상과 인간의 삶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정답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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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노동자 및 빈민 계층의 삶과 좌절을 우화적이고 은유적인 기법으로 표현한, 개발 독재 시대 문학의 대표작이다. 작은 제목으로 묶인 연작 소설 12편 중 넷째 작품이다.

 

핵심 정리

 

1. 갈래 : 중편소설, 연작소설

2. 성격 - 사회비판적, 은유적, 우화적

3. 배경 - 시간: 1970년대, 공간 - 서울 재개발 지역

4.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1부는 영수, 2부는 영호, 3부는 영희가 주인공임)

5. 제재 - 도시의 재개발 지역 빈민들

6. 주제 - 삶의 터전을 빼앗긴 도시 빈민의 궁핍한 삶과 좌절된 꿈

7. 출전 - 문학과 지성”(1976)

8. 전체 줄거리

 

1 서술자는 영수. ‘난쟁이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영수, 영호, 영희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낙원구 행복동의 도시 빈민 가족이다. 그들은 꿈을 잃지 않으며 살아가던 중, 재개발 사업으로 집이 철거될 어려움에 처한다.
2 서술자는 영호. 행복동 주민들은 대부분 투기업자에게 입주권을 팔고 동네를 떠난다. ‘난쟁이가족도 끝내 입주권을 팔지만, 제 몫으로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고 집이 철거당한 뒤, 결국 거리로 나앉을 처지가 된다.
3 서술자는 영희. 가족으로부터 입주권을 구입한 투기업자를 따라간 영희는 투기업자에게 순결을 빼앗긴다. 투기업자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금고 안에서 입주권과 돈을 들고 나와 입주 절차를 마치지만 아버지의 자살 소식을 듣고 사회에 대해 절규한다.

 

9. 이해와 감상

 

 '난쟁이' 일가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 재개발 사업의 실상, 도시 노동자 문제, 권력 기관의 횡포, 소외 계층의 재상산 등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생겨나는 불합리한 상황들을 폭로하고 있다.

 이 작품은 기존의 현실 반영적 리얼리즘 소설과는 달리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각 장면의 내부는 다소 상징적이고 환상적으로 처리되어 현실성이 떨어지는 면이 보이나 이는 작품의 미성숙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의도한 것이며 당대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10. 등장 인물

 

*아버지(난쟁이) : 온갖 궂은일을 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지만 현실의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공장 굴뚝에서 떨어져 자살한다.
*어머니 :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가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큰아들(영수) : 공장을 전전하다 노동 운동에 뛰어든다.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한다.
*둘째 아들(영호) :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현실의 모순에 불만을 가진다.
*막내딸(영희) : 순수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집의 철거 과정에서 투기업자에게 험한 일을 당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대결 의지를 다진다.

 

11. 소재의 상징적 의미

소재 상징적 의미
달나라 주인공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적 세계를 가리킨다.
작은 공 이상적인 세계인 달나라고 가고자 하는 절실한 염원의 상장이다. 한편 그러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끝내 벽돌 공장 굴뚝에서 떨어져 죽는 '난쟁이' 아버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팬지꽃 가냘프고 순수한 영희를 상징한다
고기 냄새 난쟁이 가족의 가난함을 부각시키고 애처로움을 강화하는 감각적 소재이다.

 

12.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지명을 사용한 의도

 ‘난쟁이일가가 사는 빈민촌의 이름이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것은 일종의 반어적 표현이다. , 인물들의 현실과 대조되는 동네 명칭을 통해 소외 계층의 빈곤하고 참혹한 삶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13. 난쟁이 가족에게 가난을 제공하는 원인

 

 이 글에는 '나는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할머니, 할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할머니들이 최하층의 천인으로서 무슨 일을 해 왔는지 알고 있었다. 어머니라고 달라진 것은 없었다. 마음 편할 날 없고, 몸으로 치러야 하는 노역은 같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난쟁이 가족이 게으르거나 불성실해서 가난해진 것이 아니라 선조 때에는 피지배 계층으로 자신만의 재산을 가질 수 없었고, 자본주의 시대의 산업화 사회에서는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채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사회의 가난과 불평등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다.

 

 

 

* 괄호 채우기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같은 제목의 연작 소설 중 네 번째 작품으로 (                     )와 경제 성장 과정에서 삶의 기반을 빼앗긴 도시 빈민층의 삶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2. 소외 계층을 상징하는 (                )일가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재개발 사업의 문제, 도시 빈민층의 삶의 실상, 가진 자들의 횡포, (                   )과 악순환을 그리고 있다.

 

3. 소설적 상징을 통해 개발과 성장 신화에 갇혀 있던 (                    )년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일깨우고, 독특한 문 체 및 새로운 모더니즘 기법을 통해 그러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였다.

 

4. , 고도 성장에 가려 있던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시점의 변화, (              )중첩, (                  )이고 환상적인 분위기, (                  )소재의 활용, 짧고 시적인 문체, 빠른 장면 전환 등의 기법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5. 난쟁이가 지향하는 세계인 (                 )는 난쟁이가 가고 싶은 열망과 이상향의 상징이다. 그러나 난쟁이는 사회적으로 소외 계층에 속하고 약자이다 보니 자신의 소망을 이룰 가능성이 희박하다. 결국 벽돌 공장 굴뚝에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여 원하는 세계에서 살아보지 못한다. 이러한 난쟁이의 모습은 왜소하기 때문에 (                       )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6. ‘난쟁이와 그가 살고 있는 낙원구 행복동의 상징적 의미를 서술하시오.

 

 

 

 

 

 

7. 작가가 노비 매매 문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 작품에 나타난 갈등 양상을 파악해보자.

 

 

 

 

8. 지섭이 말한 달나라의 의미와 그것의 현실적 한계를 서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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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운

 단어의 뜻을 구별해주는 소리의 가장 작은 단위를 음운이라고 한디.

 

음운 - 분절음운 (= 음소) - 자음, 모음, 반모음

       - 비분절음운(=운소) - 장단, 고저, 강세 등

 

* 음소와 운소

 

 음소에 속하는 자음, 모음, 반모음은 국어에서 모두 단어의 의미를 변별해 주는 역할을 한다. 반면, 운소에 속하는 것 중 국어의 표준어에서 음운의 자격을 가진 것은 장단으로 국한된다 .

 

* 최소대립쌍

- '최소대립쌍'이란 하나의 말소리만이 달라서 그 의미가 구분되는 단어의 쌍을 말한다. 최소 대립쌍을 성립하게 하는 말소리들은 모두 별개의 음운에 속한다.

 

2. 자음

 

- 자음은 공기의 흐름이 어딘가에 방해를 받으며 만들어지는 소리이다.

 

가. 조음 위치 : 밖으로 나오는 공기가 입 속에서 방해를 받는 위치(두 입술, 윗잇몸과 혀끝, 센입천장과 혀의 앞부분, 여린입천장과 혀의 뒷부분, 목청사이)

 

나. 조음 방법 : 방해가 일어나는 방식

 

파열음
(폐쇄음)
* 나오는 공기를 일단 막았다가 일시에 떠뜰면서 내는 소리
* 폐쇄 → 지속 → 파열의 세 단계를 거쳐 발음된다.
* 음절의 초성에 올 때는 세 단계를 모두 거치며, 종성에 올 때는 폐쇄와 지속 과정만 거치고 파열 단계는 생략된다.
마찰음 * 좁혀진 발음 기관 사이로 공기를 흘려서 내는 소리
* 파열음과의 차이는 기류가 막히지 않고 계속 흐른다는 것이다.
파찰음 * 공기의 흐름을 끊은 후 조금만 열어서 그 사이로 공기를 흘려 내는 소리
* 파열음과 마찰음 두 가지의 성질을 모두 가진다.
비음 * 코로 공기를 내보내면서 내는 소리
유음 * 공기를 혀의 양옆으로 부드럽게 내보내면서 내는 소리
* 자음 중 공기의 흐름이 방해를 가장 적게 받으면서 발음된다.

 

다. 자음 체계도

 

                                 조음위치
조음방법
양순음 치조음 경구개음 연구개음 후음
파열음 예사소리    
된소리    
거센소리    
파찰음 예사소리        
된소리        
거센소리        
마찰음 예사소리      
된소리        
비음    
유음        

* 거센소리는 유기음이라고도 하는데, 유기(有氣)는 기류의 흐름이 많음을 가리킨다. 된소리와 비교하면, 된소리는 발음할 때 양이 극히 적지만 거센소리는 매우 많다는 차이가 난다. 거센소리는 청각적으로 격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격음'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3. 모음

 

 모음은 공기의 흐름에 거의 방해를 받지 않으며 만들어지는 소리이다.

 

* 단모음 체계도

 

                  혀의 위치 전설모음 후설모음
                 입술 모양 평순모음 원순 모음 평순 모음 원순 모음
혀의 높낮이
고모음
중모음
저모음    

 

4. 반모음

 반모음은 자음처럼 기류가 장애를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점에서 모음과 비슷하다. 그러나 쓰임새를 보면 반모음은 단모음과 달리 자립할 수 없기 때무에 자음과 같은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반모음을 반자음이라고도 한다. 국어의 반모음에는 'j와 'w' 두 가지가 있다. 반모음은 단모음과 결합하여 이중 모음을 이룬다.

j w
단모음 중 'ㅣ'와 비슷함 - 반모음 'j'와 단모음 'ㅣ'는 구개음화를 비롯한 몇몇 음ㅇㄴ 현상에서 동일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단모음 중 'ㅗ', 'ㅜ'와 비슷함 - 'w'와 'ㅗ, ㅜ'의 음성적 유사성으로 인해 이 둘이 결합하는 이중 모음은 존재하지 않음.

 

* 이중 모음이란 - ㄱㄱ어의 이중 모음은 반모음 3개와 단모음 10개가 결합하여 만들어진다. 이러한 이중 모음들은 반모음의 종류 및 단모음과 반모음의 결합 순서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반모음의 종류에 따라서는 j - 계 이중 모음과 w- 계 이중모음으로 구분된다. 또한, 단모음과 반모음의 결합 순서에 따라서는 상향 이중 모음과 하향 이중 모음으로 나눌 수 있다. 상향 이중 모음은 반모음이 단모음보다 앞에 오는 것이고, 하향 이중 모음은 반모음이 단모음보다 뒤에 오는 것이다.

 

  상향 이중 모음 하향 이중 모음
 j - 계 이중 모음 ㅑ, ㅐ, ㅕ, ㅖ, ㅛ, ㅠ
w- 계 이중모음 ㅘ, ㅙ, ㅝ, ㅞ  

 

* 하향 이중 모음 'ㅢ' : 현대 국어는 상향 이중 모음이 대부분이고 하향 이중 모음은 단모음 'ㅡ'와 반모음 'j'가 결합된 'ㅢ' 하나밖에 없다. 그러나 'ㅢ'는 이중 모음으로 온전히 발음되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그 지위가 매우 불안정 하다.

 

5. 비분절 음운

- 분절 음운에 얹혀 함께 나타나므로 소리가 나뉘어 나올 수는 없지만 말소리 요소로서 의미를 변별하는 기능을 하는 음운으로, 운소라고도 한다. 국어에서는 '장단(長短)'이 단어의 뜻을 변별하는 데 제한적으로 쓰인다. 국어의 장단이 음소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은 최소 대립쌍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기출 문제로 확인하기

 

2018년 2019 대학수학능력시험

 

 

11. <보기>의 ㉠에 들어갈 말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선생님 : 최소대립쌍이란 하나의 소리로 인해 뜻이 구별되는 단어의 짝을 말해요. 가령 최소 대립쌍 '살'과 '쌀'은 'ㅅ'과 'ㅆ'으로 인해 뜻이 달라지는데, 이때의 'ㅅ'과 'ㅆ'은 음운의 자격을 얻게 되죠. 이처럼 최소 대립쌍을 이용해 음운들을 추출하면 음운 체계를 수립할 수 있어요. 이제 고유어들을 모은 [A]에서 최소 대립쌍들을 찾아 음운들을 추출하고, 그 음운들을 [B]에서 확인해 봅시다.

 

[A] - 쉬리, 마루, 구실, 모래, 소리, 구슬, 머루

 

[B] 국어의 단모음 체계표

 

혀의 위치 전설모음 후설모음
입술 모양 평순모음 원순 모음 평순 모음 원순 모음
혀의 높낮이
고모음
중모음
저모음    

 

[학생의 탐구 내용]

추출된 음운들 중 [          ㉠         ]을 확인할 수 있군.

----------------------------------------------------------------------------------------------------------------------------------

① 2개의 전설 모음         ② 2개의 중모음      ③ 3개의 평순 모음    ④ 3개의 고모음     ⑤ 4개의 후설모음

 

 

정답 : 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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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조가(黃鳥歌)

 

翩翩黃鳥(편편황조)    훨훨 나는 저 꾀고리

雌雄相依(자웅상의)    암수 서로 정다운데

念我之獨(염아지독)    외로울사 이내 몸은

誰其與歸(수기여귀)    뉘와 함께 돌아갈꼬.

 

 

* 핵심 정리

갈래 - 고대 가요

성격 - 서정적, 애상적

제재 - 꾀꼬리

주제 - 사랑하는 임을 잃은 슬픔과 외로움

시상방식 - 선경후정

 

⓵ 배경 설화

 

 유리왕 3년(기원전 19) 겨울 10월에 왕비 송씨(松氏)가 죽었다. 왕은 다시 두 여인에게 장가들어 계실(繼室-두 번째로 얻은 부인)로 삼았다. 한 여자는 화희(禾姬)라 하는데 골천 사람의 딸이고, 또 한 여자는 치희(雉姬)라 하는데 한인(漢人)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총애를 다투어 서로 화목하지 못하자 왕은 양곡(涼谷)의 동쪽과 서쪽에 두 궁궐을 지어 각각 따로 머물게 하였다. 그 뒤 왕이 기산(箕山)에 사냥 가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싸우게 되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기를 “너는 한인 집안의 종년 주제에 어찌하여 그토록 무례하냐”라고 하니, 치희가 부끄럽고도 한스러워 달아나 돌아가버렸다. 왕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뒤쫓았으나 치희는 노여워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어느 날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날아 모이는 것을 보고 곧 느끼는 바가 있어 노래하기를, “날아드는 저 꾀꼬리도 암수가 서로 의지하거늘, 나의 외로움 생각하니 그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까”라고 하였다.

* 참고 문헌
김부식, 이강래 옮김, 『삼국사기』, 한길사, 2018.

 

⓶ 이면
- 두 정치세력의 팽팽한 권력 다툼, 곧 한인(漢人)으로 대표되는 수렵민 중심의 외래세력과 골천인으로 대표되는 농경민 중심의 토착세력 간의 정치적 알력으로 해석
- 황조가(黃鳥歌)는 이들 정치 세력의 견제와 조정을 통해 아직 채 다져지지 못한 왕권을 굳혀 나가려다가 벽에 부딪힌, 유리왕의 강한 정치적 좌절감을 바탕에 깔고 있는 서정적 사랑의 노래

 

⓷ 기원 전후 1세기 – 우리 역사상 실질적 의미의 자생적 민족국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국면. 한사군의 설치와 철기 문화의 보급으로 출현하기 시작. 이민족의 외압은 토착문화 집단들의 자기 동일성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 소국 단계의 민족국가 형성을 주동한 철기 문화 집단의 유이민 현상을 촉진케 하는 계기.

 

⓸ 서정적 성격 – 특수한 국면
황조가(黃鳥歌)는 단순한 사랑의 노래가 아니므로 개인적 서정시의 전형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정치권력의 암투와 이의 틈바구니에서 안정된 국가기반을 다져야 하는 초기 국왕으로서의 정치적 고뇌가 깔려 있다. 따라서 노래 속에 토로되고 있는 유리왕의 외로움은 개인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라 할 수 있고, 사적인 것 못지않게 사회적 성격이 짙다.

 

⓹ 의의
개인과 사회의 갈등 토로
비애의 정서 주조
세계와의 화합이 불가능함을 인식하는 동일성 상실의 슬픔 노래
현실적으로 회복할 길 없는 동일성의 꿈을 개인의 주관적 내면 속에서 찾으려는 서정적 내면화의 길을 예비
전형적인 개인적 서정의 길로 나아가는 터전 마련

 

 

 

* 참고문헌

성기옥 외, 「한국문학개론」, 새문사, 1995.

 유리명왕(瑠璃明王)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유리(類利), 혹은 유류(儒留)라고도 한다. 주몽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예시(禮氏)이다.

 처음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 여인에게 장가들어 임신이 되었는데, 주몽이 떠나간 뒤에야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가 곧 유리(類利)였다. 유리가 어렸을 때 길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잘못해 물 긷는 부인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기를 "이 아이가 아버지가 없기 때무에 이렇게 못되게 군다"라고 하였다. 유리가 무안을 당하고 집에 도아와 어머니에게 묻기를 "우리 아버지는 어떤 분이시며,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네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자 남쪽으로 달아나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떠날 때 나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거든 내가 남긴 물건이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밑에 감췆 있다고 말해주시오. 그가 만약 이것을 찾게 되면, 그제서야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라고 하였다" 하였다. 유리가 이를 듣고 바로 산골짜기에 가서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왔다.

 하루는 마루 위에 앉아 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나 나는 듯하여 다가가 살펴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가 나 있었다 곧바로 기둥 밑을 들춰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찾아냈다. 드디어 이것을 가지고 옥지(屋智)  구추(九鄒) ⦁ 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나 졸본(卒本)에 이르러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지녀온 칼 조각을 꺼내 붙여보니, 이어져 완전한 한 자루의 칼이 되었다. 왕이 기뻐하고 유리를 태자로 삼았으니, 이때 와서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2년(기원전 18) 가을 7월에 다물후(多勿候) 송양의 딸을 맞이해 왕비로 삼았다. 9월에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힌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에 신령스러운 새들이 왕궁의 뜰에 모여들었다.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3년 가을 7월에 골천(鶻川)에 이궁(離宮- 천자가 출타하기 위해 궁성 밖에 세워 머무는 곳)을 지었다.

 겨울 10월에 왕비 송씨(宋氏)가 죽었다. 왕은 다시 두 여이에게 장가들어 계실(繼室)로 삼았다. 한 여자는 화희(禾姬)라 하는데 골천 사람의 딸이고, 또 한 여자는 치희(稚姬)라 하는데 한인(漢人)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총애를 다투어 서로 화목하지 못하자 왕은 양곡(凉谷)의 동쪽과 서쪽에 두 궁궐을 지어 각각 따로 머물게 하였다. 그 뒤 왕이 기산(箕山)에 사냥 가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자 두 여자가 싸우게 되었다. 화희가 치희를 꾸짖기를 "너는 한인 집안의 종년 주제에 어찌하여 그토록 무례하냐"라고 하니, 치희가 부끄럽고도 한스러워 달아나 돌아가버렸다. 왕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뒤쫓아으나 치희는 노여워하며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어느 날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날아 모이는 것을 보고 곧 느끼는 바가 있어 노래하기를, "날아드는 저 꾀꼬리 암수가 서로 의지하거늘, 나의 외로움 생각하니 그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까"라고 하였다.

 

 11년 여름 4월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선비(鮮卑-선비는 동호의 일족으로 그 나라의 대선비산(大鮮卑山)에서 족명이 유래했다 한다. 흥안령(興安嶺)의 동쪽에서 흥기했는데, 후한 대에 단석괴(檀石槐)가 영토를 개척해 옛날 흉노으 최전성기와 같은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진(晉) 초에 여러 부로 나누어졌는데, 그 가운데 모용씨와 탁발씨가 가장 저명하였다)가 험한 지세를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유리하면 나와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앉아 지키니 나라의 걱정거리이다. 만약 이들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따면 내가 그에게 후한 상을 주리라"라고 하였다. 부분노가 나와 말하기를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하며, 사람들이 용맹하긴 하지만 우둔하니,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하기를 "사람을 시켜 나라를 배반한 척 저들에게로 들어가서 거짓으로 우리 나라는 작고 군사력이 허약해 겁을 내고 움직이지 못한다고 말하게 하면, 선비는 반드시를 우리를 만만하게 여겨 경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틈을 타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가서 산림에 의지해 그들의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때 왕께서 허술한 군사로 하여금 그들의 성 남쪽으로 출동하게 하시면 저들은 반드시 성을 비워두고 멀리 쫓아올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정예병을 이끌어 그 성에 달려들어가고, 왕께서는 친히 용맹한 기병을 거느리시어, 그들을 양쪽에서 협공하게 되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선비는 과연 성문을 열고 군사를 내서 쫓아오매, 부분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달려들어갔다. 선비가 이를 바라보고는 크게 놀라 성으로 되돌아 달려왔다. 부분노가 성문에 막아서서 싸우니 베어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깃발을 들어 올려 북을 울리며 나아오니, 선비는 앞뒤에서 적을 맞아 계책이 막막하고 힘이 다해 항복하고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로를 생각해 상으로 식읍(食邑)을 주었으나, 부분노는 사양하면서 "이는 왕의 덕이오니 저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이에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내려주었다.

 

 13년 봄 정월에 형혹성(熒惑星- 화성(火星)의 다른 이름이다. 심성은 28수의 하나로, 동방 창룡7수(蒼龍七宿) 가운데 속한 별이다. 형혹성이 출현하면 전쟁이 발발하고 사라지면 전쟁시 종식된다.)이 심성(心星) 자리에 머물렀다.

 

 14년 봄 정월에 부여 왕 대소(帶素)가 사신을 보내와 방문하고 볼모를 교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부여가 강대한 것을 꺼려 태자 도절(都切)을 볼모로 보내고자 했으나 도절이 두려워해 가지 않으니 대소가 분노하였다. 겨울 11월에 대소가 군사 5만 명의 규모로 침범해왔다가 폭설이 내리고 사람들이 많이 얼어 죽자 그냥 돌아갔다.

 

 19년 가을 8월에 교사(郊祀-천자가 교외에서 천지신에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왕은 탁리(託利)와 사비(斯卑)를 시켜 쫓아가 잡아오게 했더니, 장옥택(長屋澤)에 이르러 잡아서 칼로 돼지의 다리 힘줄을 잘라버렸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하기를 "하늘에 제사를 지낼 희생(犧牲)에 어찌 상처를 낼 수가 있겠느냐"하고는, 드디어 두 사람을 구덩이에 던져 죽였다. 9월에 왕이 질병에 걸리자 무당이 말하기를 "탁리와 사비의 귀신이 빌미가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무당을 시켜 귀신에게 사과하게 했더니 병이 곧 나았다.

 

 20년 봄 정월에 태자 도절이 죽었다.

 

 21년 봄 3월에 교사에 쓸 돼지가 달아났다. 왕이 희생을 관장하는 설지(薛支)에게 명해 돼지를 쫓게 했던바, 국내(國內)의 위나암(尉那巖)에 이르러 붙잡아서 국내 사람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하였다. 그가 돌아와 왕을 보고 말하기를 "제가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그 산과 물이 깊고도 험한데다 토양은 오곡을 경작하기에 알맞고, 게다가 고라니와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약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신다면 백성들의 복리가 끝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쟁의 환란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여름 4월에 왕이 위중림(尉中林)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 8월에 지진이 있었다.

 9월에 왕이 국내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 사물택(沙勿澤)에 이르렀는데, 한 장부가 못가의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왕을 보고 말하기를 "왕의 신하가 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허락하고, 그에게 사물(沙勿)이라는 이름과 위씨(位氏) 성을 내려주었다.

 

 22년 겨울 10월에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2월에 왕이 질산(質山)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大輔) 협보가 간하여 말하기를 "왕께서 새로이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편안하게 안착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치안 관련의 행정을 돌보는 데 서둘러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하느라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시니, 만약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정치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흩어져 선왕의 업적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그로 하여금 관청의 원림(園林)을 관리하게 하였다. 협보가 분개해 남한(南韓)으로 가버렸다.

 

 23년 봄 2월에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로 삼고, 나라 안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24년 가을 9월에 왕이 기산(箕山)의 들에서 사냥을 하다가 기이한 사람을 만났는데, 양 겨드랑이에 깃이 달려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해 우씨(羽氏) 성을 내려주고, 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27년 봄 정월에 왕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 남아 있었는데, 힘이 세고 용맹한 것을 좋아하였다. 황룡국(黃龍國)의 왕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억센 활을 선물하였다. 해명은 그 사신 면전에서 활을 잡아당겨 부러뜨리고 말하기를,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이 활 자체가 강하지 못한 탓이다"라고 하니, 황룡 왕이 부끄럽게 여겼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황룡 왕에게 이르기를 "해명이 자식이 되어 불효했으니, 청컨대 나를 위해 그를 죽여주십시오"라고 하였다.

 3월에 황룡 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보기를 요청하였다. 태자가 가려 하자 어떤 이가 만류해 말하기를 "지금 이웃 나라에서 까닭없이 만나자 하니 그 의도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야 황룡 왕이 나를 어찌하겠는가"하고 마침내 황룡국으로 갔다. 황룡 왕이 처음에는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그를 만나게 되자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우해 돌려본ㅆ다.

 

 28년 봄 3월에 왕이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이르기를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을 안주하게 하여 나라의 위업을 굳게 하고자 함인데,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굳센 힘만 믿고서 이웃 나라에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은가"하고 곧 칼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다. 태자가 즉시 자살하려 하자 어떤 이가 말리면서 말하기를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었으므로 태자께서 바로 후계자가 된 것인데, 이제 사신이 한 번 왔다 하여 자살해버린다면, 혹시 그럿이 속임수가 아닌 줄을 어찌 알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황룡 왕이 억센 활을 보내왔을 때 나는 그가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는 것을 염려해 일부러 활을 잡아당겨 부러뜨려서 되갚아주었던 것인데, 뜻밖에도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당하게 되었다. 지금 부왕께서는 내가 불효했다 하여 칼을 내리면서 자살하라 하시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여진(礪津)의 동원(東原)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아두고 말을 달려 창에 부딪쳐 죽으니, 이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를 갖추어 동원에 장사 지내고 사당을 세우니, 그 땅을 창원(槍原)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편찬자는 논평하여 말한다.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것은 마땅히 좌우를 떠나지 않는 것으로 효도를 다하는 것이니, 마치 문왕이 세자였을 때와 같이 해야 한다.(『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편에 의하면 문왕이 세자였을 때 아버지 왕계(王季)의 안부를 하루에 세 번 여쭈었다. 또 아버지에게 편안하가 못함 있을 때에는 근심스러운 낯빛으로 걸음을 바로 딛지 못했으며, 음식을 올리 때에는 반드시 직접 그 차고 따뜻한 절도를 살펴보고 무슨 음식을 드셨는지 확인한 다음 같은 음식을 다시 올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해명은 별도(別都)에 있으면서 용맹을 좋아하기로 소문이 났으니, 그가 죄를 얻게 된 것은 당연하다. 또 들으니 『좌전』에 이르기를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서 나쁜 데로 빠져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지금 유리왕은 애초에 한 번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다가 아들이 죄악을 저지르게 되자 지나치게 미워해 죽이고야 말았으니, 아비는 아비노릇을 못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못했다고 할 만하다."

 

 가을 8월에 부여 왕 대소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어 말하기를 "우리 선왕께서는 그대의 선군 동명왕과 서로 우호했는데, 이제 우리 신하들을 유인하여 이곳으로 도망해 오게 하며 백성들을 모아서 나라를 이루려 하고 있다. 무릇 나라에는 크고 작음이 있고 사람에게는 어른과 이이가 있는지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의요,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은 순리인 것이다. 이제라도 왕이 만약 예의와 순리로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서 국운이 길이 다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은 나라를 세운 지가 얼마 안되고 백성들은 취약하고 군사력도 약세이니 형세상 치욕을 참고 굴복해 뒷날의 성공을 도모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해 부여 왕에게 회보하기를 "과인이 바다 귀퉁이에 치우쳐 살다보니 예의에 대해 듣지 못 했는데, 오늘 대왕의 교시를 받고 보니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왕자 무휼(無恤)은 아직 나이가 어렸는데, 왕이 부여에 회답하려는 내용을 듣더니 스스로 부여 사신을 보고 말하기를 "우리 선조께서는 신령의 자손이라 어질고도 재주가 많았던바, 대왕이 질투하고 모해하여 부왕에게 참소하고 말을 치게 해 모욕했기 때문에 불안하여 탈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대왕은 지난날의 허물은 생각하지 않고 다만 군사가 많은 것만을 믿어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고 있다. 사자는 돌아가서 대왕에게 보고하되, '지금 여기에 포개 쌓은 알이 있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들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내가 대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못하겠다'고 전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부여 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물었더니 한 노파가 대답하기를 "포개 쌓은 알은 위태로운 것이요 그 알들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은 편안한 것이니, 그 말의 뜻은 왕이 자기의 위태로움은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찾아올 것만을 바라는 것은, 차라리 자기의 위태로움을 편안함으로 바꾸어 스스로 잘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29년 여름 6월에 모천(矛川)가에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들이 떼지어 싸우더니, 검은 개구리 쪽이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를 보고 의견을 내는 이가 말하기를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이니 북부여가 파멸될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가을 7월 두곡(豆谷)에 이궁을 지었다.

 

 31년에 한의 왕망(王莽)이 우리 군사를 징발해 흉노를 치게 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가지 않으려 하는데도 억지로 협박해 보내니, 모두 변경으로 도망해 법을 어기고 도둑떼가 되었다.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추격하다 그들에게 죽게 되자, 주 · 군들이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嚴尤)가 왕망에게 아뢰기를 "맥인(貊人)들이 법을 어긴데 대해서는 마땅히 주·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무마하고 안도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들씌우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그럴 경우 부여의 무리 가운데 반드시 반란에 동조할 이가 있을 것이니, 흉노를 물리치지 못한 터에 부여와 예맥(濊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듣지 않고 엄우에게 조칙을 내려 그들을 치게 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延丕)를 유인해 목을 베어 수도로 보냈다.[『양한서』 및 『남북사』에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鄒)를 유인해 목을 베었다"라고 하였다] 왕망이 기뻐하고 우리 왕의 명칭을 고쳐 '하구려후(下句麗侯)라 하고, 천하에 포고해 모두가 알게 하였다. 이에 한의 변경 지역을 침구하는 것이 더욱 심해졌다.

 

 32년 겨울 11월에 부여 사람들이 와서 침범하였다. 왕이 아들 무휼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무휼은 군사가 적어 대적하지 못할까 염려해, 기발한 계책을 세워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매복한 채 기다렸다. 부여의 군사가 곧바로 학반령(鶴盤嶺) 아래에 이르자 복병을 출동시켜 불시에 그들을 치내, 부여군은 크게 패해 말을 버려두고 산으로 올라가다. 무휼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였다.

 

 33년 봄 정월에 왕자 무휼을 태자로 삼고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을 8월에 왕이 오이와 마리에게 명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치게 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군사를 진격하여 한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해 빼앗았다.[고구려현은 현도군에 속한다.]

 

 37년 여름 4월에 왕자 여진(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애통해하여 사람을 시켜 시체를 찾게 했으나 얻지 못하였다. 뒤에 비류(沸流) 사람 제수(祭須)가 찾아서 아뢰니, 마침내 예를 갖추어 왕골령(王骨嶺)에 장사 지내고, 제수에게는 금 10근과 밭 10경(頃-토지 면적의 단위로 1경은 밭 1맥 무(畝)를 가리킨다)을 내려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이 두곡(豆谷)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이 두곡의 이궁에서 죽었따. 두곡의 동원(東原)에 장사 지내고, 왕호를 유리명왕이라 하였다.

 

참고 문헌

김부식, 이강래 옮김, 『삼국사기1』, 한길사, 2018.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내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갈래 : 고대 가요, 한역시가, 주술요, 노동요

성격 : 주술적, 집단적

제재 : 거북

주제 : 왕의 강림을 기원함.

특징

'거북'과 '머리'의 사징적 의미

* 거북 : 머리를 내어줄 수 있는 신령스러운 존재

* 머리 : 우두머리, 왕, 새로운 생명

 

 

# 더 알아보기

구지가(龜旨歌) - 생성기 시가의 초기적 단면을 함축적으로 드러내 보임.

 

시기 기원후 42. <삼국유사, 가락국기>

구지가계 노래의 한 실현태

- 호칭+ 명령 가정 + 위협의 주술구(범세계적 분포를 보이는 위압적 주술의 대표적 유형)

구지가계 노래의 특성

일정한 규모의 집단적 제의에서 불리는 주술적 노래

여럿이서 함께 부르는 집단 주술의 형태

본래적 기능이 기우 혹은 풍요 주술에 기반

주술적 위협의 대상이 주술적 해결의 능력을 지닌 신이 아니라 신의 매개자

 

구지가계 노래는 청동기 문화 단계로의 진입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생성된 것.

1-3세기 제천의례 : 부여 영고, 고구려 동맹, 동예 무천

 

 

 

 

* 참고문헌

성기옥 외, 「한국문학개론」, 새문사, 1995.

 (문종-고려 제11대 왕-조 대강(大康-요나라 도종(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의 연호이며 1075년에서 1084년까지 사용하였다.)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이 땅에 아직 나라의 칭호가 없었고,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등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 추장들이 백성을 아울러 다스렸으니, 모두 100호(戶는 하나의 고을과 비슷한 규모로, 마을이나 씨족 집단을 뜻한다)에 7만 5000명이었다. 대부분 저마다 산가 들에 모여 살았고,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년(42년) 3월 계욕일(浴日- 액땜을 하는 날로 물에서 목욕하고 술을 마신다. 대부분 3월 상사일(上巳日)에 한다. 이 시기는 파종기로 풍요를 기원하는 대대적인 행사가 있었다)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구지봉(龜旨峯- 지금의 경남 김해시로, 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마치 十朋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므로 이렇게 부른다)에서 사람들을 부르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래서 무리 이삼백 명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사람의 소리 같았지만 형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렸다.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구간들이 말했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구간들이 다시 대답했다.

 "구지봉입니다."

또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이 나에게 이곳에 내려와 새로운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내가 일부러 온 것이다. 너희들이 모름지기 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내면서 '거북아, 거북아. 네 목을 내밀어라. 만약 내밀지 않으면 구어 먹겠다.'라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 대왕을 맞이하여기뻐 춤추게 되리라."

 구간들은 그 말대로 하면서 모두 기쁘게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 후 하늘을 우러러 보니 자줏빛 새끼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 끝을 살펴보니 붉은색 보자기로 싼 금합(金盒-생산한 곡식을 다음 수확기까지 보관하는 상자다)이 있었다. 그것을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알 6개가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서 허리를 굽혀 백 번 절하고, 얼마 후 다시 금합을 싸안고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와 탑 위에 두고 제각기 흩어졌다.

 12일(12간지를 말한다)이 지나고 이튿날 새벽에 여려 사람들이 다시 모여 합을 열어 보니 6개의 알은 어린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용모가 매우 빼어났다. 그들을 펴앙에 앉혀 절하며 축하하고 지극히 공경했다. 그들은 나날이 자라서 열흘 남짓 되자 키가 아홉 자나 되어 은(殷)나라의 탕왕(湯王) 같았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의 고조(高祖)와 같았고, 눈썹의 여덟 색채가 요(堯)임금 같았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이 순(舜)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에 즉위했는데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 혹은 수릉(首陵- 죽은 후의 시호)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도는 가야국(伽倻國)이라 부르니, 바로 여섯 가야 중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동쪽은 황산강(黃酸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伽倻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그는 임시로 궁궐을 짓게 하고 들어가 다스렸는데, 질박하고 검소하여 지붕의 이엉을 자르지 않았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석 자를 넘지 않았다.

 즉위 2년 계묘년(43년) 봄 정월에 왕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읍을 정하고자 한다."

 이에 임시로 지은 궁궐 남쪽 신답평(新畓坪-이곳은 옛날부터 閑田이었는데 새로 경작한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답(沓)이란 글자는 속자(俗字)다)에 행차하여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다가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곳은 마치 여뀌잎처럼 좁지만, 빼어나게 아르다워 열여섯 나한(羅漢-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소승 불교에서 교법을 수행하는 성문(聲聞) 사위(四位) 가운데 학문과 덕행이 높았던 성자(聖者)를 말한다)이 머물 만하다. 더군다나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 일곱 성(七聖-'성'이란 정지(正智)로써 진리를 조견(照見)한 사람으로, '칠성'이란 수신생(隨身行), 수법행(隨法行), 신해(信解), 견지(見至), 신증(身證), 혜해탈(慧解脫), 구해탈(俱解脫)을 말한다) 이 머물 만하여, 정말로 알맞은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하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1500보 둘레의 외성(外城)과 궁궐, 전당(殿堂) 및 여러 관청의 청사와 무기 창고, 곡식 창고 지을 곳을 두루 정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국내의 장정과 공장(工匠)을 두루 불러 모아 그달 20일[2년 봄 정월]에 튼튼한 성곽을 쌓기 시작하여 3월 10에 역사(役事)를 마쳤다. 궁궐과 옥사(屋舍)는 농한기를 기다려 그해 10월 안에 짓기 시작하여 갑진년(44년) 2월에 이르러 완성했다. 좋은 날을 가려 새 궁궐로 옮겨 가서 모든 정치의 큰 기틀을 살피고 여러 가지 일을 신속히 처리했다.

 

 

  이 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는데,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되니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했다. 탈해는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는데, 키가 석 작고 머리 둘레가 한 자나 되었다. 탈해는 기뻐하며 궁궐로 들어가 수로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위를 빼앗으려고 왔소."

수로왕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에게 왕위에 올라 나라와 백성을 편안하게 하도록 명했으니 감히 하늘의 명령을 어기고 너에게 왕위를 넘겨줄 수 없고, 또 감히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했다.

 "그대는 나와 술법을 겨룰 수가 있겠소?"

수로왕이 말했다.

 "좋다."

 그래서 잠깐 사이에 탈해가 매로 변하자 왕은 독수리가 되고, 또 탈해가 참새로 변하니 왕은 새매로 변했는데, 그사이에 아주 짧은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탈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니 왕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탈해가 이에 항복하여 말했다.

 "술법을 겨루는 마당에서 제가 매가 되자 독수리가 되었고, 참새가 되자 새매가 되었는데도 죽임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인께서 저의 죽음을 원치 않은 인(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왕과 왕위를 다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탈해는 곧 절을 하고 나갔다. 그러고는 서울 변두리의 나루터로 가서 중국 배가 오가는 물길을 따라 떠났다. 왕은 탈해가 머물면서 모반을 꾸밀까 걱정하여 급히 수군 500척을 내어 추격했으나, 탈해가 계림 땅 경계로 도망쳐 들어갔으므로 수군이 모두 돌아왔다. 그러나 이 일에 관한 기록은 신라의 기록과 많은 차이가 있다.

 

 

  건무 24년 무신년(48년) 7월 27일에 구간들이 조회(朝會)때 왕께 아뢰었다.

 "대왕께서 내려오신 이래로 아직도 좋은 짝을 얻지 못했으니, 신들의 딸들 중에서 제일 훌륭한 처자를 뽑아 궁궐로 들여 배필로 삼으십시오."

 왕이 말했다.

 "짐이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왕후를 맞는 것 역시 하늘의 명이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마라."

 그리고 유천간에게 가벼운 배와 날랜 말을 주어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도록 명하고, 또 신귀간에게는 승점(乘岾- 망산도는 서울 남쪽의 섬이며, 승점은 연하(輦下)의 나라다)으로 가도록 명했다.

그때 갑자기 바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북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섬 위에서 횃불을 들자 배는 재빨리 육지 쪽으로 달려왔다. 신귀간 등이 이를 보고는 대궐로 달려들어와 아뢰었다. 수로왕은 이 말을 듣고서 기뻐했다. 얼마 후 구간들을 보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좋은 계수나무로 만든 아름다운 노를 저으며 그들을 맞이하여 대궐 안으로 모셔오게 했다.

 왕후가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평소에 잘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가겠는가?"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아뢰니, 왕은 그녀의 말이 옳다고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행차했다. 그리고 대궐 아래 서남쪽 60보쯤 되는 곳의 산언저리에 장막을 치고 기다렸다. 이에 왕후가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 입구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면서 입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이때 모시던 잉신(臣-왕비를 따론 신하들이다. 시집 갈 때 따라가는 侍臣인데 이들은 중국계 이름으로 보인다) 두 명이 있었는데 이름은 신보(申輔)와 조광(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은 모정(慕貞)과 모량(慕良)이었으며, 노비까지 합치면 모두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수놓은 비단과 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 의상, 필로 된 비단, 금은, 구슬과 옥, 아름다운 옥, 장신구 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왕후가 수로왕이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오자 왕이 나가 맞이하여 장막 궁전으로 함께 들어았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계단 아래서 왕을 뵙고 즉시 물러갔다. 임금은 유사에게 잉신 부부를 데려오도록 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노비들은 각기 한 방에 대여섯 명씩 들게 하라."

 그리고 좋은 음료와 향이 좋은 술을 주고 무늬 있는 자리에서 재웠다. 또 의복과 비단과 보화를 주었고, 많은 수의 군사에게 지키게 했다.

 그래서 왕과 왕후가 함께 침전에 들게 되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阿踰國-중인도에 있던 고대 왕국으로 해석해 왔으나 중국이나 태국이라는 의견도 있다)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許氏)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본국에 있던 금년 5월에 부왕과 오아후가 저를 보고 말하기를 '아비와 어미가 어젯밤 똑같이 꿈속에서 상제(上帝)를 보았다. 상제께서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이 내려 왕이 되게 한 신성한 사람으로,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짝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공주를 가락국으로 보내 수로왕의 짝이 되게 하라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런데 꿈에서 깨고 난 후에도 상제의 말이 귀에 남아 있으니 너는 여기서 빨리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향해 가거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신선이 먹는 대추를 구하고, 하늘로 가서 선계(仙界)의 복숭아(신선들이 먹는 대추와 3000년에 한 번씩  열리다는 선도(仙桃)를 좇았다는 것은 수로왕을 찾아왔다는 의미)를 좇으며 반듯한 이마를 갖추어 이제야 감히 임금의 얼굴을 뵙게 된 것입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 곳에서 올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왕비를 맞이하자는 신하들의 간청을 구태여 따르지 않았소. 그런데 이제 현숙한 당신이 몸소 내게 오셨으니, 못난 나에게는 다행이오."

 드디어 혼인을 하고 이틀 밤을 지낸 뒤 또 하루 낮을 지냈다. 그러고는 마침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냈는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에게 각기 양식으로 쌀 열 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8월 1일에 왕은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부부도 모두 수레를 나란히 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외국의 갖가지 진기한 물건을 모두 싣고 천천히 돌아오니 시간은 정오에 가까웠다. 왕후는 중궁(中宮)에 거처하게 하고, 잉신 부부와 노비에게는 빈 집 두 채를 주어 나누어 살게 했으며, 나머지 따라온 자들은 20여 칸의 빈관(賓館) 한 채에 사람 수를 정하여 나누어 살게 하고 일용품을 넉넉히 주었다. 또한 싣고 온 진기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저장하여 왕후가 사철 쓰도록 했다.

 

 

  어느 날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구간들은 모두 여러 벼슬아치의 우두머리인데, 그 지위와 이름이 모두 소인이나 농부의 호칭이지 결코 고관 직위의 호칭이라고는 할 수 없소. 혹시라도 나라 밖 사람들이 들으면 반드시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마침내 아도(我刀)를 아궁(我躬)으로 고치고, 여도(汝刀)를 여해(汝諧)로, 피도(被刀)를 피장(彼藏)으로, 오도(五刀)를 오상(五常)으로 고쳤으며,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이란 명칭은 윗글자는 고치지 않고 아랫글자만 고쳐 유공(留公)과 유덕(留德)으로 했다. 또 신천(神天)은 신도(神道)로 고치고 오천(五天)은 오능(五能)으로 고쳤으며, 신귀(神鬼)는 음을 고치지 않고 훈만 고쳐 신귀(臣貴)로 했다. 계림의 직위(職位)를 취해 각각(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의 품계를 두고, 그 아래 관료는 주(周) 제도와 한(漢)의 제도를 나누어 정했으니, 이는 옛것을 고쳐 새것을 취하여 관직을 설치하고 직책을 나누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이에 수로왕은 국가를 다스리는 집을 정돈하여, 백성들을 아들처럼 사랑했다. 그 교화는 엄숙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고, 그 정사는 엄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더구나 왕이 왕후와 함께 사는 것은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비유할 수 있었다. 그 공(功)은 도산씨(道山氏)가 하(夏)나라를 보필하고(도산씨의 딸로 하나라 우 임금에게 시집가 도왔다. 도산은 우 임금이 제후들과 맹세한 땅이다), 요 임금의 딸들(요 임금의 딸 아황과 여영으로 순임금에게 시집 가 교씨의 시조가 되었다)이 요씨를 일으킨 것과 같았다. 그해에 곰 얻는 꿈을 꾸어 징조가 있더니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다. 후한 영제(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년(189년) 3월 1일에 왕후가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157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듯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리고 백성을 아들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고자 왕후가 가락국에 처음 와서 닿은 도두촌(渡頭村)을 주포촌(主浦村)이라 부르고, 비단 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綾峴)이라 했으며, 붉은 깃발이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다.

 잉신이던 천부경(泉府卿) 신보와 종정감(宗正監) 조광 등은 가락국에 도착한 지 30년 만에 각자 두 딸을 낳았는데, 그들 부부는 12년 뒤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밖의 하인들은 온 지 칠팔 년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오직 고국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지닌 채 고향을 향하고 죽으니, 살던 빈관이 텅 빙 아무도 없게 되었다.

 왕은 매일 외로운 베개에 의지하여 슬픔에 젖곤 하다가 25년이 지난 [건안] 헌제(獻帝) 입안(立安-후한 말엽 유협의 연호인 건안이 옳다) 4년 기묘년(199년) 3월 23일에 죽었으니, 나이는 158세였다. 나라 사람들은 마치 부모가 죽은 것처럼 비통해했는데, 왕후가 죽던 땝다 더욱 심했다. 마침내 대궐 동북쪽 평지에 빈궁(殯宮)을 세웠는데, 높이는 한 발이고, 둘레는 300보로 하여 장사를 지내고 수릉왕묘(首陵王廟)라고 불렀다. 대를 이은 아들 거등왕으로부터 9대손 구형(仇衡)까지 이 묘에 배향하고, 매년 맹춘정월 3일과 7일, 5월 5일, 8월 5일과 15일에 정결한 제사를 지냈는데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

 

 

 신라 제30대 법민왕(法敏王) 용삭(龍朔- 당나라 고종의 연호로 661년에서 663년까지 사용했다) 원년 신유년(661년) 3월 어느 날 왕은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왕의 9대손 구형왕이 우리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아마도 奴宗인 듯하다)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 아들 잡간 서운(庶云)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가 나를 낳았기 때문에 원군은 나에게 바로 15대 시조다. 그 나라는 이미 망했으나 장례를 지내는 묘는 아직까지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계속 제사를 지내도록 해라."

 이에 사자를 옛터로 보내 사당에 가까운 상전(上田) 30경(頃)을 공양 밑천으로 삼아 왕위전(王位田)이라 불렀으며 본토에 귀속시켰다. 수로왕의 17대손인 급간 갱세(世)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제전(祭田)을 관리하며 해마다 술과 단술을 빚고 떡과 밥, 다과 등 여러 가지 음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제삿날도 거등왕이 정한 연중 다섯 날을 그대로 지켜 정성어린 제사가 지금 우리에게 있게 된 것이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199년)에 편방(便房-임시로 제사 지내는 방)을 설치한 후부터 구형왕 말까지 330년 동안에 종묘의 제사는 항상 변함이 없었는데,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뒤부터 용삭 원년 신유년(661년)까지의 60(구형왕 항복부터 문무왕 즉위년까지는 120년의 차이가 있으니, 아마도 시가가 잘못된 듯하다)년 사이에는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간혹 거르기도 했다. 아! 아름답구나, 문무왕(文武王- 법민왕의 시호)이여! 선조를 받들어 끊어졌던 제사를 효로써 이어 다시 지내게 되다니.......

 

 신라 말년에 잡간 충지(忠至)란 사람이 있었는데, 금관성을 공격하여 빼앗아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또 아간 영규(英規)라는 사람이 장군의 위엄을 빌려 종묘의 제사를 빼앗고 함부로 제사를 지냈다. 그가 단오날을 맞아 제사를 지내는데 사당의 대들보가 까닭없이 무너져 깔려 죽고 말았다.

 이에 성주장군이 혼잣말을 했다.

 "다행이 전세의 인연으로 성왕(聖王)이 계시던 국성(國城)의 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그러니 마땅히 내가 영정(影幀)을 그리고 향과 등을 바쳐 신하 된 은혜를 갚겠다."

 그리고 석 자 크기의 교견(鮫絹-남해에서 생산되는 비단이다)에 진영(眞影)을 그려 벽에 모셔 두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경건하게 받들었다. 이렇게 한 지 사흘도 채 못 되어 영정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땅바닥에 거의 한 말이나 흥건히 괴었다. 이에 장군은 두려워하여 그 진영을 받ㄷㄹ어 사당으로 가서 불태운 다음 즉시 수로왕의 직계 자손 규림(圭林)을 불러 말했다.

 "어제 불상사가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일이 거듭 일어나는가? 이는 정녕 내가 영정을 그려서 공양하는 것이 공손치 못하여 사당의 위령(威靈)이 진노한 것이다. 영규가 이미 죽었고 나도 매우 두려워 영정을 불태웠으니, 반드시 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다. 그대는 왕의 직계 자손이니 옛날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옳겠다."

 이리하여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받들었는데 여든여덟 살이 되어 죽은 뒤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이어서 제사를 지냈다. 사당을 배알하는 단오일 제사에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미친 증세로 인해 사당에 와 간원이 차려 놓은 제수를 치우고 자기의 제수를 차려 제사 지냈다. 준필은 술잔을 세 번 올리는 일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서 죽고 말았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이 말했다.

 "분수 넘게 지내는 제사는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을 낳는다."

 이런 일은 이전에는 영규가 있었고 후에는 준필이 있었으니, 이들 부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또 사당 가운데 금옥이 많으니 도적들이 언젠가 와서 훔쳐가려 했다. 도적들이 사당에 처음 왔을 때,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는 한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와 사면으로 비 오듯 활을 쏘아 도적 칠팔 명을 맞히자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 후 도적들이 다시 왔을 때는 길이가 30여자나 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팔구 명을 물어 죽였다. 이때 겨우 죽음을 면한 도적들은 모두 엎어지고 흩어졌다. 때문에 능원(陵園)의 안팎에는 반드시 신물(神物)이 있어 지켜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언 4년 기묘년(199년)에 처음으로 이 사당을 세운 이후로 지금 임금이 즉위한 31년인 대강(大康-요나라 도종(道宗) 야휼홍기의 연호이며 1075년에서 1084년까지 사용하였다) 2년 병진년(1076)까지 모두 878년이 되었으나, 쌓아 올린 깨끗한 흙은 허물어지지 않았고, 심어 놓은 아름다운 나무도 싣ㄹ거나 죽지 않았으며 배열해 놓은 여러 옥 조각도 무너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면, [당나라 사람] 신체부(辛否)가 "예부터 지금까지 어찌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으며, 허물어지지 않은 무덤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는데, 오직 이 가락국이 옛날에 일찍이 망한 것은 신체부의 말이 영험이 있는 것이지만, 수로왕의 사당이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은 것은 신체부의 말이 다 믿을 만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또 수로왕을 사모하여 하는 놀이가 있다. 매년 7월 29일이 되면 향토의 백성과 관리와 병사들이 승점(昇岾)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들은 동서쪽으로 바라보고, 건장한 인부들은 좌우로 나누어 망산도로부터 용맹한 말을 타고 육지로 다투어 달리고, 뱃머리를 둥실 띄워 서로 물에서 밀며 북쪽의 고포(古浦)를 향해 내달린다. 이는 대개 옛날 유천간, 신귀간 등이 허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다가 급히 임금께 알렸던 유적이다.

 가락국이 멸망한 후 대대로 이곳에 대한 칭호가 같지 않았다. 신라 제 31대 정명왕(政明王- 신문왕)이 즉위한 개요(開耀-당나라 고종의 연호로 681년에서 682년까지 사용했다) 원년 신사년(681년)에는 금관경(金官京)이라 부르고 태수를 두었다. 그 후 259년이 지나 우리 태조가 통합한 후로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라 하고 배안사(排岸使)를 설치하여 48년을 지냈다. 다음에는 임해군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김해부(金海府)라고 하여 도호부(都護府)를 두어 27년을 지냈고 또 방어사(防禦使)를 두어 64년을 지냈다.

 순화(淳化-북송 태조의 연호이며 고려 성종 2년이다) 2년(991년)에 김해부의 양전사(量田使-전답의 측량을 조사하는 관리)인 중대부(中大夫) 조문선(趙文善)이 조사하여 보고했다.

 "수로왕릉에 딸려 있는 밭의 면적이 많으니, 마땅히 옛 제도대로 15결로 하고, 그 나머지는 부(府)의 역정(役丁-부역을 맡은 장정)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담당한 관서에게 그 장계를 전하니 조정에서 명을 내렸다.

 "하늘에서 알을 내려 변해 성스러운 임금이 된 후, 수명이 길어 158세에 이르렀으니, 저 삼황(三皇) 이후 비견될 만한 사람이 없다. 죽은 후 선대로부터 능묘에 딸려 있던 전답을 지금 줄여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양전사가 또 아뢰니, 조정엣도 그렇게 여겨 절반은 능묘에 두어 옮기지 않고 절반은 향리의 역정에게 주도록 했다. 절사(節使-양전사의 호칭)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 이에 반은 능원에 소속시키고, 반은 부에서 부역하는 호정(戶丁)에게 주도록 해다. 어느 날 저녁 꿈속에서 갑자기 칠팔 명의 귀신이 나타나 밧줄을 쥐고 칼을 잡고 와서 말했다.

 "네가 큰 죄를 지었으므로 베어 죽이겠다."

 양전사는 형을 받고 몹시 아파하다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깨어났는데 이내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에 도망쳤는데, 병이 조금도 낫지 않아 관문을 지나다가 죽었다. 그래서 양전사는 토지측량대장에 도장을 찍지 못했다.

 이후에 봉사(奉使)하는 사람이 와서 그 전답을 조사해 보니 겨우 11결(結) 12부(負) 9속(束)일 뿐이고 3결 87부 1속이 부족했다. (이것을 결부제라 하며, 신라 이래 토지 면적에 따른 수확량 산출에 독특한 계량법이다. 대체로 농부의 손에 쥔 벼 한 줌이 기준인데, 열 줌을 1파(把), 10파를 1속, 10속을 1부, 100부를 1결로 한다) 그래서 가로챈 것을 추적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서에 보고하고 왕명으로 다시 넉넉히 지급했으니 고금에 탄식할 일이다.

 시조 수로왕(元君)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은 부지런하게 다스리고 정성스럽게 도를 숭상했는데, 시조의 어머니 허 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가(元嘉) 29년 임진년(452)에 원군과 황후가 합혼하던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 했으며, 사신을 보내 그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측량하여 삼보(三寶-불보, 법보, 승보)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했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이 지나자 장유사(長遊寺-김해시 장유면 용지봉 정상에 있었던 절인데 얼마 전에 새로 지어졌다)를 지었는데, 이 절에 바친 전시(田柴)가 모두 300결이었다. 그러자 장유사의 삼강(三剛-三綱이 옳다. 사찰의 세 가지 직책, 즉, 상좌, 사주, 유나를 말한다)은 왕후사가 장유사 시지(柴地)의 동남쪽 지경 안에 있다고 하여 왕후사를 없애 전장(田莊)으로 만듥, 추수한 것을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기르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술픈 일이다. 세조 이하 9대손의 역수(曆數)를 아래에 기록하니, 그 명(銘)은 이렇다.

 

  태초가 열리니 해와 달이 비로소 밝았고,

  인륜은 비록 있었으나 임금의 자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은 여러 대를 거듭했지만, 동방의 나라들은 서울을 나누었다.(신라가 가야를 병합하기 이전의 상황을 말한다)

  신라가 먼저 정해지고 가락국은 뒤에 세워졌다.

  세상을 다스릴 사람이 없으니 누가 백성을 돌보랴.

  드디어 상제께서 저 창생을 돌보아 주셨다.

  이에 부명(命)을 주어 특별히 정령을 보냈다.

  산속에 알을 내려보내고 안개 속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안은 아득한 듯하고 바깥도 컴컴했다.

  바라보면 형상이 없는 것 같은데, 들으니 소리가 났다.

  여러 사람이 노래를 불러 아뢰고 춤을 추어 바쳤다.

  이레가 지난 후에야 한때 고요해졌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푸른 하늘에서 여섯 개의 둥근 알이 내려오며 자색 끈 하나를 드리웠다.

  다른 지방 낯선 땅에 집들은 잇달아 있었다.

  구경꾼이 줄지었고, 바라보는 사람이 우글거렸다.

  다섯 분은 각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만 이 성에 남았다.

  같은 시각 같은 모습은 형제 같았다.

  참으로 하늘이 덕인(德人)을 내어 세상을 위해 질서를 만들었다.

  왕위에 처음 오르니 천하가 맑아지려 했다.

  화려한 제도는 옛 제도를 모방하고, 흙 계단은 오히려 평평했다.

  온갖 정사에 힘쓰니 모든 정치가 시행되고,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으니 오직 정일(精一)했다.

  길가는 사람은 길을 양보하고, 농부는 밭갈이를 서로 양보했다.

  사방에 사건이 없어 베개를 편히 받치고, 만백성이 태평을 맞이했다.

  갑자기 햇볕에 드러난 풀잎 위의 이슬처럼 문득 대춘(大椿-1만 6000년을 사는 나무인데 오래 사는 것을 비유)을

  보전하지 못했다.

  천지의 기운이 변하고 조야(朝野)가 통곡했다.

  금 같은 그 자취 빛나고 옥같은 소리를 울렸다.

  후손이 끊어지지 않으니 제사는 향기롭기만 했다.

  세월은 비록 흘러 갔으나 규범은 기울어지지 않았다.

 

 

* 거등왕(居登王) : 아버지는 수로왕이고 어머니느 허황후다. 건안 4년 기묘년(199년) 3월 3일에 즉위하여 39년을 다스리고, 가평(嘉平-삼국 위(魏)나라 제왕 조방(曺芳)의 연호로 249년에서 254년까지 사용했다)5년 계유년(253년) 9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으로 태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 이렇게 말했다.

 "성은 김씨라고 하니, 아마도 가야국의 세조가 금빛 알에서 나왔기 때문에 김으로 성을 삼았을 뿐이다."

 

* 마품왕(麻品王) :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가평 5년 계유년(253년)에 즉위해 29년을 다스리고 영평(永平) 원년 신해년(291년) 1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로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 거질미왕(居叱彌王) :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다. 영평 원년에 즉위하여 56년을 다스리고, 영화(永和) 2년 병오년(346년) 7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아간 아궁(阿躬)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 이시품(伊尸品)을 낳았다.

 

* 이시품왕(伊尸品王) : 김씨다. 영화 2년에 즉위하여 62년을 다스리고, 의희(義熙-동진(東晉) 안제(安帝) 사마덕종의 연호이며 419년에서 420년까지 사용하였다) 3년 정미년(407년) 4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사농경(司農卿)의 딸인 정신(貞信)이며, 왕자 좌지(座知)를 낳았다.

 

* 좌지왕(坐知王) :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 3년(407년)에 즉위하여 용녀(傭女)와 결혼한 후 외척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여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계림이 꾀를 써서 [가락국을] 정벌하고자 했다. 가락국의 신하 박원도(朴原道)가 좌지왕에게 간했다.

 "유초(遺草)를 깎고 깎아도 또한 털이 나는 법이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어떻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인들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또 복사(卜士)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괘사에 '소인을 없애면 군자인 벗이 와서 도울 것이다.'라고 했으니, 임금께서는 주역의 괘를 살펴보십시오."

 왕이 "옳다."라고 사례하고는 용녀를 내쳐 하산도(荷山島)로 귀양 보내고 정치를 고쳐 오랬동안 백성을 편안하게 했다.  15년 동안 다스리고 영초(永初-송나라 무제(武帝) 유유(劉裕)의 연호로 420년에서 422년까지 사용했다) 2년 신유년(421년) 5월 12일에 죽었다. 왕비는 대아간 도령(道寧)의 딸 복수(福壽)이며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 취희왕(吹希王) : 질가(叱嘉)라고도 하며 김씨다. 영초 2년에 즉위하여 31년동안 다스리고 원가(元嘉-송나라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연호로 424년에서 453년까지 사용했다) 28년 신묘년(451년) 2월 3일에 죽었다. 왕비는 각간 진사(進思)의 딸 인덕(仁德)으로 왕자 질지(知)를 낳았다.

 

* 질지왕(知王) :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 28년에 즉위했으며 이듬해 세조와 허황옥 왕후를 위해 복을 빌고자 처음 세조와 왕후가 결혼하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라 하고, 전답 10결을 내어 보탰다. 42년 동안 다스리고 영명(永明-남조 제(齊)나라 무제 소적의 연호로 483년에서 493년까지 사용했다) 10년 임신년(492년) 10월 4일에 죽었다. 왕비는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딸 방원(邦媛)이며, 왕자 겸지(鎌知)를 낳았다.

 

* 겸지왕(鎌知王) :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 10년에 즉위하여 30년을 다스리고 정광(正光- 북위(北魏) 효명제 원후(元詡)의 연호로 520년에서 525년까지 사용했다) 2년 신축년(521년) 4월 7일에 죽었다. 왕비는 출충(出忠)의 딸 숙(淑)이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 구형왕(仇衡王- 그의 능은 경남 산청군 하서면에 있는데 겉으로 보면 돌무더기 같다) : 김씨다. 정광 2년에 즉위하여 42년을 다스렸다. 보정(保定-북조(北朝) 북주(北周) 무제(武帝) 우문옹(宇文邕)의 연호로 561년에서 534까지 사용했다) 2년 임오년(562년)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자 왕이 직접 군졸을 거느리고 싸웠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대항하여 싸울 수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 (脫知爾叱今)을 보내 국내에 머물게 하고, 왕자 및 상손(上孫) 졸지공(卒知公) 등은 신라에 들어가 항복했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로서 아들 셋을 낳았는데, 첫째는 세종각각(世宗角干)이고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이며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말했다.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 양(梁)나라 무제 소연의 연호로 529년에서 534년까지 사용했다)4년 임자년(532년)에 신라에 항복했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이 글을 쓴 이가 일연인지 아니면 가락국이에 붙여진 글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연이 쓴 것 같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구형왕이 양나라 중대통 4년 임자년에 땅을 신라에 바치고 항복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東漢) 건무 18년 임인년(42년)에서 구형왕말 임자년(532년)까지를 계산하면 490년이 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땅을 바친 것이 위(魏)나라 보정(保定) 2년 임오년(562년)이 되므로 30년이 더 있게 되니 모두 520년이 되는데, 지금 두 가지 설을 다 기록한다."

 

 

*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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