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어 나타나는 동일한 또는 유사한 낱말, 문구, 내용을 말한다. 한 작품에서 나타날 수도 있고 한 작가 또는 한 시대, 또는 한 장르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 설화에 자주 반복되는 이별한 님, 서양 동화에 주로 나타나는 요술 할멈과 미녀 이야기 등은 민족 설화의 모티프들이며, 두견, 소쩍새는 동양시에 자주 나오는 모티프이다.

 <봄은 여전히 왔는데, 사람은 가고 아니 온다>는 내용의 정서도 동양시에서 약간의 모습을 바꾸면서 자주 반복되는 모티프이다. 한 작품 속에서도 계속 반복되어 그것이 느껴질 정도가 되는 모든 요소는 모티프라고 할 수 있다.

 일부 형식주의자들은 작품에서 쓰인 최소 의미 단이, 즉 문장의 내용을 모티프라 부른다. <그는 즐거워서 웃었다>, <참 좋은 날씨였다.> 등이모두 개체적인 모티프인데, 그중 작품 전체의 주제(테마)를 형성하는 데에 직접 참여하는 모티프는 <매인 모티프>, 주제 자체와 간접적인 관계가 있는 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을 <놓인 모티프>라 하여 그 두 가지의 상호 견제 작용이 전체의 주제를 어떻게 풍부하게 형상화하는가를 밝히려고 하였다. 이러한 형식주의적인 견해를 받아 들이지 않더라도 모티프는 작품의 주제를 구축하고 통일감을 주는 중요 단위로서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신화비평에서 거론하는 원형적 심상도 모티프의 일종이다. 상징주의자들의 반복적인 상징도 마찬가지이다. 모티프는 모든 저자가 공유한 공동의 재산이나,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는가는 저자의 역량에 달렸다.

 

 참고 문헌

 

이상섭, 「문학비평 용어사전」, 민음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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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 point of view  (0) 2020.07.16

家有頹廡不堪支者, 凡三間, 予不得已悉繕理之. 先是, 其二間爲霖雨所漏寢久, 予知之, 因循莫理, 一間爲一雨所潤, 亟令換瓦. 及是繕理也, 其漏寢久者, 欀桷棟樑皆腐朽不可用, 故其費煩. 其經一雨者, 屋材皆完固可復用, 故其費省. 予於是謂之曰: “其在人身亦爾. 知非而不遽改, 則其敗已不啻若木之朽腐不用. 過勿憚改, 則未害復爲善人, 不啻若屋材可復用. 非特此耳, 國政亦如此. 凡事有蠹民之甚者, 姑息不革, 而及民敗國危, 而後急欲變更, 則其於扶起也難哉, 可不愼耶?”

경험) 집에 허물어진 행랑채가 제대로 버티지 못하게 된 것이 세 칸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것을 모두 수리하였다. 이에 앞서 그중 두 칸이 장맛비에 샌 지가 오래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어물어물하다가 손을 대지 못하였다. 한 칸은 비를 한 번 맞고 새어 들었기 때문에 서둘러서 기와를 갈아 넣게 하였다. 그런데 수리하려고 본즉 비가 샌 지가 오래된 것은 그 서까래, 추녀, 기둥, 들보가 모두 썩어서 못 쓰게 되어 그 경비가 많이 들었고, 그 한 번밖에 비를 맞지 않은 재목들은 모두 환전하여 다시 쓸 수 있었기 때문에 경비가 적게 되었다.

 

깨달음) 나는 여기에서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을 알고서도 바로 고치지 않으면 곧 그가 나쁘게 되는 것이 나무가 썩어서 못 끄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잘못을 하고 곧 고치기를 꺼려하지 않으면 다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가옥의 재목을 다시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될 것이다. 나라의 정치도 이와 마찬가지다. 모든 일에서 백성에게 심한 해가 될 것을 머뭇거리고 개혁하지 아니하다가, 백성이 못살게 되고 나라가 위태한 뒤에 갑자기 변경하려 하면, 곧 붙잡아 일으키기가 어렵다.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단어 풀이

 

행랑채 문간채. 대문간(대문을 여닫기 위하여 대문의 안쪽에 있는 빈 곳) 곁에 있는 집채

서까래 마룻대에서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 또는 보에 걸쳐 지른 나무. 그 위에 산자(지붕 서까래 위나 고미 위에 흙을 받쳐 기와를 이기 위하여 가는 나무오리나 싸리나무 따위로 역은 것. 또는 그런 재료)를 얹는다.

추녀 네모지고 끝이 번쩍 들린, 처마의 네 기에 있는 큰 서까래. 또는 그 부분의 처마

들보 칸과 칸 사이 두 기둥을 건너질러 도리와는 자 모양, 마룻대와는 자 모양을 이루는 나무

 

핵심 정리

1. 갈래 – 고전 수필, 한문 수필, 설(說)
2. 성격 – 경험적, 교훈적
3. 주제 – 잘못을 미리 알고 고쳐 나가는 자세의 중요성
4. 특징 – 경험한 내용을 먼저 제시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덧붙이는 형식을 취함
- 일상적 체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다른 상황에 적용해 해석하는 유추의 방식을 사용함.
5. 작가 – 이규보(1168~1241)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 문인.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고려 시대의 명문장가로 그의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다. 몽골의 강압적 요구를 「진정표(陳情表)」로써 누그러뜨리기도 하였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이 있으며, 작품으로 「동명왕편」 등이 있다.

6. ‘설(說)’과 ‘기(記)’

‘설’과 ‘기’는 모두 한문 문체의 하나이다. ‘설’은 글자 뜻에서 알 수 있듯 해석과 서술을 주로 문체이다. 다시 말해 뜻과 이치를 해설하는 자기의 의사를 가지고 좀 더 상세하게 서술하는 문체이다.
‘기’는 사실을 그대로 적는 글을 말한다. 사물을 객관적인 관찰과 동시에 기록하여 영구히 잊지 않고 기념하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는 글이다. 기의 문체는 ‘부(賦)’와 같으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논(論)’과 같으면서도 단정을 짓지 않고 ‘서(序)’와 같으면서도 드날리지 않고 ‘비(碑)’와 비슷하면서도 칭송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7. 「이옥설」 이해와 감상

「이옥설」은 고려 시대에 이규보가 한문으로 쓴 고전 수필이다. ‘설(說)’은 한문 문체의 하나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생각이나 이치를 풀이하고 의견을 덧붙여 서술은 고전 수필의 한 갈래이다. 이 글은 퇴락한 행랑채를 수리하면서 떠오른 생각과 깨달은 이치를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올바른 자세와 방법, 더 나아가 백성의 안정된 삶을 위한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나’의 경험에서 유추하여 삶의 이치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이를 나라의 정치로 확대적용하여 그 깨달음을 확장하는 등, 짧은 글이지만 그 안에 큰 깨달음과 교훈이 담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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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탤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은 남해왕 때에 (고본(古本)에 임인년에 왔다고 했으나 잘돗된 것이다. 가까운 임인년이면 노례왕이 즉위한 뒤일 것이므로 서로 왕위를 양보하려고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앞의 임인년이라면 혁거세의 시대다. 때문에 임인년이라 한 것은 틀렸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駕洛國) 바다 한가운데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북을 시끄럽게 두드리며 맞이하여 그들을 머물레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배는 나는 듯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지금도 상서지촌과 하서지촌이란 이름이 있다.)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포구 가에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노파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있었다.

 [노파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는 원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일로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가?"

 배를 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 있었고 배 안에는 길이가 스무 자에 너비가 열세 자나 되는 상자가 하나 있었다. 아진의선이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아래 매어 두고는 길흉을 알 수가 없어 하늘을 향해 고했다. 잠시 후에 열어 보니 반듯한 모습의 남자 아이가 있었고, 칠보(七寶-불가의 일곱 가지 보물로서 금, 은, 유리, 마노(瑪瑙), 호박(琥珀), 산호(珊瑚), 차거(거)인 듯하다)와 노비가 가득 차 있었다.

 

 이레 동안 잘 대접하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또는 정명국(正明國)사람이라고도 하고 완하국(玩夏國)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완하는 화하국(花夏國)이라고도 한다. 용성국은 왜(倭)의 동북쪽 1000리 지점에 있다.)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 일찍이 스물여덟 용왕이 있는데, 사람의 태(胎)에서 출생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온 백성을 가르치고 성명(性命)을 바르게 닦았습니다. 8품의 성골(姓骨)이 있으나 간택을 받지 않고 모두 큰 자리(大位-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자 아들 구하기를 빌어 7년 만에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군신을 모아 묻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으니 길상(吉祥)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고,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고 또한 칠보와 노비까지 배에 싣고 띄워 보내면서, '아무 곳이나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루어라.'라고 축원했습니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말을 끝내자 아이는 지팡이를 짚고 노비 두 명을 데리고 토함산으로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곳에] 이레 동안 머물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을 살펴보니 초승달 보양의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오래도록 살 만했다. 그래서 내려가 살펴보니 바로 호공(瓠公-『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그의 혈족과 성씨가 자세하지 않고 박을 허리에 매고 있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보았다.) 의 집이었다. 이에 곧 계책을 써서 몰래 그 옆에 숫돌과 숯을 묻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그 집에 가서 말했다.

 "여기는 우리 조상이 대대로 살던 집이오."

 호공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이들의 다툼이 결판이 나지 않아 관청에 고발했다. 관청에서 물었다.

 "무슨 근거로 너의 집이라고 하느냐?"

 아이가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깐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가 빼앗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십시오."

 탈해의 말대로 땅을 파 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그는]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고 맏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니, 이 사람이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탈해의 오기로 보아야 함)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인(白衣)에게 마실 물을 떠오게 했다. 그런데 하인이 물을 길어 오면서 도중에 먼저 맛보려 하자 입에 잔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하인이 맹세했다.

 "이후로는 가깝든 멀든 감히 먼저 물을 맛보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입에서 잔이 떨어졌다. 그 뒤로 하인은 두려워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에 세속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 부르는 우물이 바로 그곳이다.

 노례왕이 죽자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 정사년(57년) 6월 탈해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옛날 내 집이었다고 하여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에 성을 석씨(昔氏)라 했다.

 어떤 사람은 까치로 인해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작(鵲)자에서 조(鳥)를 버리고 성을 석(昔)씨로 했으며, 상자 속에서 알을 깨고 출생했기 때문에 탈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째인 건초(建初-후한 장제(章帝) 유달(劉炟)의 연호) 4년 기묘년(79년)에 죽은 뒤 소천구(疏川丘)에 장사 지냈다. 그 이후에 신(神)이 말했다.

 "내 뼈를 조심해서 묻으라."

 두개골의 둘레가 세 자 두 치, 몸통뼈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에 치아는 하나로 엉켜 있었으며, 뼈마디는 사슬처럼이어져 있어 이른바 천하에 둘도 없는 장사의 골격이었다.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하니, 신이 또 말했다.

 "내 뼈를 동악에 두라."(탈해왕릉은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의 길가에 큰 소나무를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받을어 모셨다.(이런 말도 있다. [탈해왕이] 죽은 뒤 27대 문무왕대 조로(調露) 2년 경신년(680년) 3월 15일 신유일(辛酉日)밤, 태종(문무왕의 오기)의 꿈에 매우 위엄 있고 사나워 보이는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탈해왕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라고 했다. 왕이 그의 말대로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국사(國祀)가 끊이지 않았으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도 한다.)

 

 

 

 

권 제1 기이 제1 제4대 탈해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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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례이질금(朴弩禮尼叱今-'이사금'이라고도 하며 윗사람, 우두머리라는 뜻. 나중에 임금이라는 의미로 확장)이 처음에 매부 탈해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탈해가 말했다.

 "무릇 덕이 있는 자는 치아가 많다고 하니, 마땅히 잇금으로 시험해 봅시다."

 이에 떡을 깨물어 시험해 보니, 왕의 잇금이 많았기 때문에 먼저 즉위했다. 이런 연유로 왕을 잇금이라고 했다. 이질금이란 칭호는 노례왕에서 시작되었다. 유성공(劉聖公-후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족형 유현(劉玄)이다.) 경시(更始) 원년 계미년(癸未年-23년)에 즉위하여 (연표에는 갑신년에 즉위했다고 했다) 여섯 부의 호를 고쳐 정하고 여섯 성(姓-李氏, 崔氏, 孫氏, 鄭氏, 裵氏, 薛氏다)을 하사했다.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는데, 차사(嗟辭-슬퍼하는 말이라는 뜻인데 가사에 자주 나오는 '아으'와 유사하며 향가의 기원과 관련된다.)와 사뇌격(詞腦格-향가 중에서 감탄사를 가진 19체를 말한다)이 있었다. 그때 처음 쟁기와 보습과 얼음 저장 창고와 수레를 만들었다. 건무(建武) 18년(42년)에는 이서국을 쳐서 멸망시켰다. 이해에 고구려 군사가 쳐들어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노례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은 차차웅(次次雄-자충(慈充)과 동음어이며 '스승'의 옛말 혹은 존장에 관한 칭호)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을 일컫는 말인데 오직 이 왕만을 차차웅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혁거세고 어머니는 알영부인이다. 비는 운제부인(雲帝夫人- 지금의 영일현(迎日顯) 서쪽에 운제산(雲梯山) 성모(聖母)가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응험이 있다고 한다.)이다.

 전한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년(4년)에 즉위하여 21년 동안 다스리고 지황(地皇-한나라 효원황후의 조카로 평제를 죽이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의 연호이다.) 4년에 갑신년(24년)에 죽으니, 이 왕이 바로 삼황(三皇-혁거세왕, 노례왕, 남해왕)의 첫째라고 한다.

삼국사』를 살펴보면, 신라에서는 왕을 거서간이라 불렀는데, 진한의 말로 왕을 뜻한다. 어떤 이는 귀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도 한다. 또한 차차웅이라고도 하고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시대의 명문장가로 『화랑세기』를 지었다.)

 "차차웅은 무당을 말하는 방언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존장인 자를 자충이라 한 것이다."

 혹은 이사금(尼師今)이라고도 했는데, 잇금(齒理-잇자국)을 말한다. 처음에 남해왕이 승하하자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자 탈해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 성스럽고 지혜가 많은 사람은 치아가 많다고 합니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했다. 옛날부터 이렇게 전해 왔다.

 혹은 왕을 마립간(麻立干- 립(立)을 수(袖)로 쓰기고 한다.)이라고도 하는데, 김대문은 이렇게 말했다.

 "마립이란 궐(橛-서열을 말한다)을 말하는 방언이다. 궐표(標)는 자리에 따라 두었는데, 왕궐(王)이 주가 되고 신궐(臣)은 아래에 두게 되어 있어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삼국사론(三國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에는 거서간과 차차웅이라 부른 임금이 각각 한 명씩 있고, 이사금이라 부른 임금이 열여섯 명이고, 마립간이라 부른 임금이 넷 있다."

 신라 말의 유명한 유학자 최치원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을 지으면서 모두 무슨 왕(某王)이라 칭하고 거서간이나 마립간 등의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 말이 비루하고 거칠어서 일컬을 만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나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하면서 방언을 그대로 두는 것 또한 옳은 일이다. 신라 사람들은 추봉(追封)된 이를 갈문왕(葛文王-신라시대 임금의 존족(尊族)과 임금에 준하는 자에게 주던 칭호)이라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남해왕 시대에 낙랑국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침범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고, 또 천봉(千鳳) 5년 무인년(18년)에 고구려의 속국 일곱 나라가 투항해 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남해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진한 땅에는 예부터 여섯 마을이 있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으로,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며, 촌장은 알평(閼平)이라고 한다.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峰-경주시 동천동의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 그 아래에 석탈해왕릉이 보임)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 조상이 되었다.(노래왕 9년에 部를 설치하고 급량부라 했는데 고려 태조 天福 5년 경자년에 중흥부(中興部)로 고쳤다.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며,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回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

 

 셋째는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으로, 촌장은 구례마(俱禮馬)라고 한다. 처음에 이산(伊山-혹은 개비산(皆比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山珍支村)으로,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라고 한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와서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으며,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터가 있는데 여기가 최치원의 옛 집이라는 설이 거의 확실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지금의 금강산(경주 북쪽에 있는 산) 백률사 북쪽산)으로 촌장은 지타(祗沱)라고 한다. 처음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한기부(韓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활아(活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양촌(明活山高耶村)으로, 촌장은 호진(虎珍)이라고 한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彌村), 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여섯 부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다. 노래왕 9년(132년)에 처음으로 여섯 부의 명칭을 고쳤고, 또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서한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연호) 원년(기원전 69년) 임자년(고본(古本)에는 건무(建武) 원년이라고도 하고 또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남쪽 언덕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군주가 없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덕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고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지금은 신라정이락 하는데 경주의 탑정동 솔밭에 있다.) 옆에 번갯불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을 뒤덮었고 백마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자주색 알(혹은 푸른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려 사내 아이를 얻었는데, 모습과 거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동천(東泉-동천사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아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 이 말은 향언(鄕言)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이라 이름하고 위호(位號)는 거슬한(居瑟邯-또는 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스스로 "알지 거서간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일컬은 것인데, 이후부터 왕의 존칭이 되었다.)이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축하하며 말했다.

 "이제 천자가 이미 내려왔으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짝을 맺어 드려야 한다."

 그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아리영정이라고도 한다.)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혹은 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갈라 얻었다고도 한다.) 여자 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닭은 새로운 태양의 도래를 알리는 새다. 이러한 닭 토템은 신성 관념의 반영이며 신라 전체의 토템으로 확장된다.) 아이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했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남자 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향인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 했기 때문에 성을 박씨로 했다. 여자 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이 열세 살이 되는 오봉(五鳳) 원년 갑자에 남자 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여자 아이를 왕후로 세웠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의 풍속에 경(京)자를 서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후세에 이르러 국호가 신라로 정해졌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후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왕후는경주의 오릉(五陵)에 혁거세와 같이 묻혀 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한곳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쫓아 다니며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五體)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보물 제1991호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출처- 문화재청)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心柱石)의 사리공(舍利孔) 및 기단부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639년(무왕 40)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제 사리외호(金銅製舍利外壺), 금제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를 비롯해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으로 구성되었다.

‘금동제 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서, 이러한 구조는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서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볼륨감과 문양의 생동감이 뛰어나 기형(器形)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

‘금제사리봉영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가 음각되었다.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이 봉영기는 그동안『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구체적으로 나아가 조성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게 된 계기가 되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청동합’은 구리와 주석 성분의 합금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6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동합 중 하나에 새겨진 백제 2품 ‘달솔 목근(達率目近)’이라는 명문을 통해 시주자의 신분이 최상층이고 그가 시주한 공양품의 품목을 알 수 있어 사료적 가치와 백제 최상품 그릇으로서 희귀성이 높다.

이처럼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백제 왕실에서 발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석탑 사리공에서 봉안 당시의 모습 그대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고대 동아시아 사리장엄 연구에 있어서 절대적 사료이자 기준이 된다.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도 최고급 금속재료를 사용하여 완전한 형태와 섬세한 표현을 구현하여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자료로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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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花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얼어두고

맛둥방을

밤에 몰 안고 가다.

 

<양주동 해독>

 

핵심 정리

 

1. 작자 - 서동(薯童, 백제 무왕)

2. 연대 - 신라 진평왕

3. 갈래 - 4구체 향가, 서정시

4. 성격 - 동요, 참요

5. 의의 - 현전(現傳)하는 향가 중 가장 오래된 작품

6. 주제 - 선화 공주의 은밀한 사랑, 선화 공주에 대한 연모의 정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홀로 수도 남쪽 못 가[南池]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며, 재주와 도량이 헤아일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라고 쓴다)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수도로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러고는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어 두고

    서동(薯童) 서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동요는 수도에 가득 퍼져 궁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백관들은 힘껏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게 했다. 공주가 떠날 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여비로 주었다. 공주가 유배지에 도착할 즈음, 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몰랐으나, 우연한 만남을 기뻐하며 그를 믿고 따라가 몰래 정을 통했다. 그런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징험을 믿게 되었다. 그러고는 함께 백제에 도착하여, 어머니가 준 금을 꺼내며 앞으로 살아갈 계책을 세우자고 했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인데, 한평생의 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서동이 말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런 것이 흙덩이처럼 쌓여 있소."

 공주가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지극한 보물입니다. 당신이 지금 금이 있는 곳을 아신다면 보물을 부모님의 궁월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말했다.

 "좋소."

 그래서 금을 모았는데, 마치 구릉처럼 쌓였으므로 용화산(龍華山-지금의 익산 미륵산)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있는 곳으로 가서 금을 운반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통력으로 옮겨 줄 수 있으니 금을 가져오시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궁궐에다 금을 날라다 놓았다. 진평왕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하게 여겨 서동을 더욱 존경했고, 항상 글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 일로 인해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 가에 도착했는데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속에서 나와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했다. 왕비가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간곡한 소원입니다."

 왕이 절을 세우는 일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 메우는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미륵법상(彌勒法像) 세 개와 회전(回殿)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고 했다.)라고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 돕게 했는데,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 (삼국사』에 "이는 法王의 아들이다."라고 했는데, 이 전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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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귤자(蟬橘子)에게 벗 한 분이 계시니 그는 예덕 선생(穢德 先生)이라고 하는 분이다. 종본탑(宗本塔) 동쪽에 사는데 마을 안의 똥거름을 져 나르는 것으로써 생계를 삼고 있다. 온 마을에서 그를 엄 행수(嚴行首)라고 불렀다. 행수는 상일을 하는 늙은이를 일컬음이요, 엄은 그의 성이다. 자목(子牧)이 선귤자에게 묻기를,

그 전에 선생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벗은 동거 생활을 하지 않는 아내요, 한 탯줄에서 나오지 않은 형제라고 했습니다. 벗이란 것은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한다 하는 양반님네 중에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자 하는 이가 수두룩한데도 선생님께서는 이런 분들을 상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엄 행수로 말한다면 마을 안의 천한 사람으로서 상일을 하는 하층의 처지요, 마주서기 욕스러운 자리입니다. 선생님께서 그의 인격을 높이어 스승이라고 일컬으면서 장차 교분을 맺어 벗이 되려고 하시니, 저까지 부끄러워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문하를 하직하려고 합니다.”

선귤자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거기 앉게. 속담에도 있거니와 의원이 제 병을 못 고치고 무당이 제 굿 못 한다고 하니 내 자네에게 벗에 대한 것을 이야기 해 줌세. 자기 생각으로는 이거야말로 제 장점이라고 믿고 있는 점도 남들이 몰라준다면 어떤 사람이거나 속이 답답해서 자기 결함을 지적해 달라는 말로 말을 꺼내게 되네. 그러나 이때 칭찬만 하면 아첨에 가까워서 멋대가리가 없고, 타박만 하면 흉보는 것으로 떨어져서 본의와 틀려지네. 그러니까 그의 장점이 아닌 것을 들추어서 어름어름 당치 않은 말을 한단 말일세. 그렇게 적절한 내용이 아닌 만큼 설사 책망이 좀 과하더라도 저 편에서 골을 내지는 않을 것일세. 그러다가 숨겨 놓은 물건을 알아나 맞히는 듯이 슬그머니 그가 장점이라고 믿고 있는 그 점을 언급한단 말일세. 마치 가려운 데나 긁어 준 듯이 속마음으로 감격해 할 것일세. 가려운 데를 긁는 데도 도()가 있네그려. 등에 손을 댈 때에는 겨드랑이에 가까이 가지 말고 가슴을 만질 때에는 목을 건드리지 말아야 하네. 칭찬 같지 않게 하는 칭찬에 그 사람은 왈칵 손을 잡으면서 자기를 알아준다고 할 것일세. 그래, 이렇게 벗을 사귀면 좋겠는가?”

자목이 한 손으로 귀를 가리고 한 손은 내저으며 말하기를,

이건 선생님이 내게다가 장사치의 하는 일이나 하인놈이 하는 버릇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귤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자네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도 과연 저기 있지 않고 여기 있는 것일세그려. 저 엄 행수란 분이 언제 나와 알고 지내자고 요구한 적이 없었지만, 그저 내가 늘 그분을 찬양하고 싶어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라네. 그이 손가락은 굵직굵직하고, 그의 걸음새는 겁먹은 듯하였으며, 그가 조는 모습은 어리숙하고, 웃음소리는 껄껄대더구먼. 그의 살림살이도 바보 같았네. 흙으로 벽을 쌓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어 구멍 문을 내었으니, 들어갈 때에는 새우등이 되었다가, 잠잘 때에는 개 주둥이가 되더구먼. 아침 해가 뜨면 부석거리고 일어나, 흙 삼태기를 메고 동네에 들어가 뒷간을 쳐 날랐다네.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어도, 뒷간의 남은 찌꺼기와 말똥쇠똥, 또는 횃대 아래에 떨어진 닭거위 따위의 똥이나 돼지똥, 사람똥 따위를 가져오면서 마치 구슬처럼 여겼다네.

왕십리의 배추, 살곶이다리의 무, 석교(石郊)의 가지오이수박호박, 연희궁의 고추마늘부추, 염교 청파의 물미나리, 이태원의 토란 따위를 심는 밭들은 그 중 상()의 상을 골라 심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모두 엄씨의 똥거름을 가져다가 걸찍하게 가꿔야만, 해마다 육천 냥이나 되는 돈을 번다는 거야. 그렇지만 엄 행수는 아침에 밥 한 그릇만 먹고도 기분이 만족해지고, 저녁에도 밥 한 그릇 뿐이지. 누가 고기를 좀 먹으라고 권하면 고기 반찬이나 나물 반찬이나 목구멍 아래로 내려가서 배부르기는 마찬가지인데 입맛에 당기는 것을 찾아 먹어서는 무얼 하느냐고 하네. , 옷과 갓을 차리라고 권하면 넓은 소매를 휘두르기에 익숙지도 못하거니와, 새 옷을 입고서는 짐을 지고 다닐 수가 없다고 대답하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이 되면 비로소 갓을 쓰고 띠를 띠며, 새 옷에다 새 신을 신고, 이웃 동네 어른들에게 두루 돌아다니며 세배를 올린다네. 그리고 돌아와서는 옛 올을 찾아 다시 입고 다시금 흙 삼태기를 메고는 동네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거지. 엄 행수야말로 자기의 모든 덕행을 저 더러운 똥거름 속에다 커다랗게 파묻고, 이 세상에 참된 은사(隱士) 노릇을 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엄 행수는 똥과 거름을 져 날라서 스스로 먹을 것을 장만하기 때문에, 그를 지극히 조촐하지는 않다고 말할는지는 모르겠네. 그러나 그가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웠으며, 그의 몸가짐은 지극히 더러웠지만 그가 정의를 지킨 자세는 지극히 고항(高亢)*했으니, 그의 뜻을 따져 본다면 비록 만종(萬種)의 녹(錄)을 준다고 하더라도 바꾸지 않을 걸세. 이런 것들로 살펴본다면 세상에는 조촐하다면서 조촐하지 못한 자도 있고, 더럽다면서 더럽지 않은 자도 있다네.

누구든지 그 마음에 도둑질할 뜻이 없다면 엄 행수를 갸륵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야. 그리고 그의 마음을 미루어 확대시킨다면 성인의 경지에라도 이를 수 있을 거야. 대체 선비가 좀 궁하다고 궁기(窮氣)를 떨어도 수치스런 노릇이요, 출세한 다음 제 몸만 받들기에 급급해도 수치스러운 노릇일세. 아마 엄 행수를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거의 드물 것이네. 그러니 내가 엄 행수더러 스승이라고 부를지언정 어찌 감히 벗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러기에 내가 엄 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 선생이란 호를 지어 일컫는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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