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정리

 

1. 갈래 : 단편 소설, 본격 소설

2. 성격 : 사실적 현실 고발적

3. 배경 : 시간 1964년 어느 겨울밤

공간 서울 거리

4.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5. 문체 : 인상주의적(상투어를 쓰지 않고 참신하고 인상적인 언어의 사용), 상징적, 홑문장과 겹문장의 교차(홑문장과 겹문장의 교차는 이 소설의 비판적 어조에 기여함)

6. 주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여 느끼는 삶의 공동성과 파편적 개인성

뚜렷한 가치관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심리적 방황과 인간적 연대감의 상실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1965년 발표되어 동인 문학상을 수상한 단편 소설로 현실에서 소외되고 목표를 잃은 세 사람이 우연히 만나서 무심히 헤어지는 일상을 그리고 있다.

''''이라는 25세 동갑내기의 우연한 만남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그들은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결코 자신의 진심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심각하고 진지한 것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나 가치 지향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실과 내적 연관을 갖지 못한 주관적이고 자의식적인 사소한 대화만 있을 뿐, 두 사내는 철저한 개인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이 두 사람에 비해서 삼십대의 외판원 사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얘기하면서 자신의 고뇌와 비애를 공유(共有)할 것을 간청한다. 이를테면, 고통의 분배를 통한 인간적 연대 의식을 상대방에게 솔직히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힌 ''''에게 그 사내는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이다. 둘은 외판원 사내의 동행 요청에 마지못해 응하고 있고 내심으로 빨리 떠나고 싶어한다. 이러한 기미를 사내가 눈치챘음일까, 화재가 난 곳을 찾아가 아내의 시체를 판 돈을 버리는 행위는, 허위적이고 비인간적인 삶에 대한 분노요, 절망의 표현일 것이다.

이 작품은 사회적 연대감이나 공동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비극적이고 외로운 현대인의 초상(肖像)이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 우리는 당대의 도시적 삶의 황폐성과 파편성(破片性), 그리고 왜곡된 개인주의의 심화된 양상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학원생 안씨와 서적 외판원 아저씨는 60년대 도시에서 소외당한 현대인의 고독과 인간관계의 단절상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7. 작품의 줄거리

 

구청 병사계에서 근무하는 ''는 선술집에서 대학원생인 ''과 만나 대화를 나눈다. 새까맣게 구운 참새를 입에 넣고 씹으면서 날개를 연상했던지, 날지 못하고 잡혀서 죽는 '파리'에 자신들을 비유한다. ''는 이미 삶의 현실에서 좌절을 맛본 후였기 때문에 감각이 다소 둔해진 상태이다. 부잣집 아들인 '' 역시 밤거리에 나온 이유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미소를 짓는 예쁜 여자가 아니면 명멸하는 네온 사인들에 도취해 보기 위해서이다.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섰을 때, 기운 없어 보이는 삼십대 사내가 동행을 간청한다. 중국집에 들어가 음식을 사면서, 자신은 서적 외판원이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으나 오늘 아내가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시체를 병원에 팔았지만 아무래도 그 돈을 오늘 안으로 다 써 버려야 하겠는데 같이 있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셋은 음식점을 나온다.

그때 소방차가 지나간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그 뒤를 따라 불구경을 나선다. 사내는 불길을 보더니 불 속에서 아내가 타고 있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갑자기 아내라고 소리치며 쓰다 남은 돈을 손수건에 싸서 불 속에 던져 버린다. ''''은 돌아가려 했지만 사내는 혼자 있기가 무섭다고 애걸한다.

 

우리는 여관에 들기로 한다. 사내는 같은 방에 들자고 했지만 ''의 주장으로 각기 다른 방에 투숙한다. 다음 날 아침 사내는 죽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도리가 없었노라고, 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혼자 두는 것이라 생각했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스물다섯 살짜리지만 이제 너무 많이 늙었음에 동의하면서 헤어진다. ''''과 헤어져 버스에 오른다.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차창 밖으로 보인다.

 

8. 구성

 

발단 : ''''이라는 대학원생이 포장 마차에서 만나 무의미한 대화를 즐김.

전개 : 낯선 사내가 말을 걸어오며 자신의 불행을 말하고 동행해도 좋으냐고 간청함.

위기 : 화재가 난 곳에서 사내는 아내의 시체를 판 돈을 불 속에 던지고는 불안에 빠 짐.

절정 : 여관에 도착한 셋은 각각 다른 방에 투숙함.

결말 : 다음날 아침, 사내의 자살 밝혀짐. ''''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곳에서 헤 어짐.

 

9. 등장 인물의 성격

 

* -육사(陸士) 시험에 실패하고 구청 병사계에서 근무하는 스물다섯 살난 시골 출신 사 내. 소외감과 고독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현대 젊은이의 표상. 아저씨와 ''의 중간적 존재. 확실한 주관이 없는 인물.

* - ''와 동갑내기로 25세의 서울 부유한 집의 장남이며 대학원생. 삶을 냉소하면서 도 자기 구원을 시도하는 인물이다. 염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자.

* 아저씨(외판원) - 서른 대여섯 살의 가난한 사내. 마누라 시체를 병원에 판 죄책감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여관방에서 자살한다. 도시인의 소외와 고독을 대표하는 인물.

 
 
미래엔 수록 부분
 

 

앞부분 줄거리
 1964년 겨울밤의 어느 선술집. '나'는 대학원생인 '안'을 우연히 선술집에서 만난다. 의미 없는 대화를 주고 받던 두 사람은 자리를 옮기던 중에 자신도 함께 갈 수 없겠냐고 묻는 '사내'와 함께 중국요릿집에 간다. 사내는 장례 비용이 없어 죽은 아내의 시신을 병원에 팔고 괴로워한다. 중국요릿집에서 나온 세 사람은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화재 난 곳을 찾아간다. 불길 속에서 죽은 아내의 환영을 본 사내는 남은 돈을 모두 볼 속에 던져 버린다.

 

 사내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사내는 가끔 여보라고 중얼거리며 오랫동안 울고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열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그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 그가 우리 앞으로 비틀비틀 걸어왔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숙이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서 거리로 나왔다. 적막한 거리에는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몹시 춥군요.”라고 사내는 우리를 염려한다는 음성으로 말했다.

추운데요. 빨리 여관으로 갑시다.” 안이 말했다.

방을 한 사람씩 따로 잡을까요?” 여관에 들어갔을 때 안이 우리에게 말했다.

그게 좋겠지요?”

모두 한방에 드는 게 좋겠어요.”라고 나는 아저씨를 생각해서 말했다.

아저씨는 그저 우리 처분만 바란다는 듯한 태도로, 또는 지금 자기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다는 태도로 멍하니 서 있었다. 여관에 들어서자 우리는 모든 프로가 끝나 버린 극장에서 나오는 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거북스럽기만 했다. 여관에 비한다면 거리가 우리에게 더 좋았던 셈이었다. 벽으로 나누어진 방들, 그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었다.

모두 같은 방에 들기고 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내가 다시 말했다.

난 아주 피곤합니다..” 안이 말했다. “방은 각각 하나씩 차지하고 자기로 하지요.”

혼자 있기가 싫습니다.”라고 아저씨가 중얼거렸다.

혼자 주무시는 게 편하실 거예요.” 안이 말했다.

우리는 복도에서 헤어져 사환이 지적해 준, 나란히 붙은 방 세 개에 각각 한 사람씩 들어갔다.

화투라도 사다가 놉시다.” 헤어지기 전에 내가 말했지만,

난 아주 피곤합니다. 하시고 싶으면 두 분이나 하세요.”하고 안은 말하고 나서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피곤해 죽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나는 아저씨에게 말하고 나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숙박계엔 거짓 이름, 거짓 주소, 거짓 나이, 거짓 직업을 쓰고 나서 사환이 가져다 놓은 자리끼를 마시고 나는 이불을 뒤집어 썼다. 나는 꿈도 안 꾸고 잘 잤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안이 나를 깨웠다.

그 양반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안이 내 귀에 입을 대고 그렇게 속사였다.

?” 나는 잠이 깨끗이 깨어 버렸다.

방금 그 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역시 ……나는 말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까?”

아직까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선 빨리 도망해 버리는 게 시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이지요?”

물론 그렇겠죠.”

나는 급하게 옷을 주워 입었다. 개미 한 마리가 방바닥을 내 발이 있는 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 개미가 내 발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른 자리를 옮겨 디디었다.

밖의 이른 아침에는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빠른 걸음으로 여관에서 멀어져 갔다.

난 그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안이 말했다.

난 짐작도 못했습니다.”라고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코트의 깃을 세우며 말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합니까?”

그렇지요. 할 수 없지요. 난 짐작도 못 했는데…….” 내가 말했다.

짐작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가 내게 물었다.

씨팔것, 어떻게 합니까? 그 양반 우리더러 어떡하라는 건지…….”

그러게 말입니다. 혼자 놓아두면 죽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게 내가 생각해 본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난 그 양반이 죽으리라는 짐작도 못 했으니까요. 씨팔것, 약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모양이군요.”

안은 눈을 맞고 있는 어느 앙상한 가로수 밑에서 멈췄다. 나도 그를 따라가서 멈췄다. 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김 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도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번 기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하여튼……하고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 여기서 헤어집시다. 재미 많이 보세요.” 하고 나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마침 버스가 막 도착한 길 건너편의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버스에 올라서 창으로 내어다 보니 안은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눈을 맞으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고 서 있었다.

 
 

문제로 점검하기 [2014년 EBS수능완성 A형][실전 모의고사 4회]

 

 

(40~4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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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각기 계산하기 위해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그때 한 사내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우리 곁에서 술잔을 받아 놓고 연탄불에 손을 쬐고 있던 사내였는데술을 마시기 위해서 거기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불이 쬐고 싶어서 잠깐 들렀다는 꼴을 하고 있었다제법 깨끗한 코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엔 기름도 얌전하게 발라서 카바이드등의 불꽃이 너풀댈 때마다 머리칼의 하이라이트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어디선지는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가난뱅이 냄새가 나는 서른대여섯 살짜리 사내였다아마 빈약하게 생긴 턱 때문이었을까아니면 유난히 새빨간 눈시울 때문이었을까그 사내가 나나 안 중의 어느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그냥 우리 쪽을 향하여 말을 걸어온 것이다.

“미안하지만 제가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제게 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만 ….”이라고 그 사내는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힘없는 음성으로 봐서는 꼭 끼워 달라는 건 아니라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와 함께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는 것 같기도 했다. 나와 안은 잠깐 얼굴을 마주 보고 나서

“아저씨 술값만 있다면 ….”이라고 내가 말했다.

“함께 가시죠.”라고 안도 내 말을 이었다.

고맙습니다.” 하고 그 사내는 여전히 힘없는 음성으로 말하면서 우리를 따라왔다.

안은 일이 좀 이상하게 되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나 역시 유쾌한 예감이 들지는 않았다. 술좌석에서 알게 된 사람끼리는 의외로 재미있게 놀게 되는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이렇게 힘없는 목소리로 끼어드는 양반은 없었다. 즐거움이 넘치고 넘친다는 얼굴로 요란스럽게 끼어들어야만 일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갑자기 목적지를 잊은 사람들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갔다. 전봇대에 붙은 약 광고판 속에서는 예쁜 여자가 ‘춥지만 할 수 있느냐’는 듯한 쓸쓸한 미소를 띠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떤 빌딩의 옥상에서는 소주 광고의 네온사인이 열심히 명멸하고 있었고, 소주 광고 곁에서는 약 광고의 네온사인이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다는 듯이 황급히 꺼졌다간 다시 켜져서 오랫동안 빛나고 있었고, 이젠 완전히 얼어붙은 길 위에는 거지가 돌덩이처럼 여기저기 엎드려 있었고, 그 돌덩이 앞을 사람들은 힘껏 웅크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중략)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말하기 시작했다.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오늘 낮에 제 아내가 죽었습니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

그는 이젠 슬프지도 않다는 얼굴로 우리를 빤히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네에에.” “그거 안되셨군요.”라고 안과 나는 각각 조의를 표했다. “아내와 나는 참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아내가 어린애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은 몽땅 우리 두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돈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돈이 생기면 우리는 어디든지 같이 다니면서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딸기철엔 수원에도 가고, 포도철엔 안양에도 가고, 여름이면 대천에도 가고, 가을엔 경주에도가 보고, 밤엔 함께 영화 구경, 쇼 구경하러 열심히 극장에 쫓아다니기도 했습니다 ….”

“무슨 병환이셨던가요?” 하고 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급성 뇌막염이라고 의사가 그랬습니다. 아내는 옛날에 급성 맹장염 수술을 받은 적도 있고, 급성 폐렴을 앓은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만 모두 괜찮았었는데 이번의 급성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 죽고 말았습니다.”

사내는 고개를 떨구고 한참 동안 무언지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안이 손가락으로 내 무릎을 찌르며 우리는 꺼지는 게 어떻겠느냐는 눈짓을 보냈다. 나 역시 동감이었지만 그때 사내가 다시 고개를 들고 말을 계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눌러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A][“아내와는 재작년에 결혼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친정이 대구 근처에 있다는 얘기만 했지 한 번도 친정과는 내왕이 없었습니다. 난 처갓집이 어딘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었어요.”]

그는 다시 고개를 떨구고 입을 우물거렸다.

“뭘 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내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한참 후에 다시 고개를 들고 마치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습니다. 할 수 없었습니다.

난 서적 월부 판매 외교원에 지나지 않습니다할 수 없었습니다. 돈 사천 원을 주더군요. 난 두 분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도 세브란스병원 울타리 곁에 서 있었습니다. 아내가 누워 있을 시체실이 있는 건물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만 어딘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울타리 곁에 앉아서 병원의 큰 굴뚝에서 나오는 희끄무레한 연기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될까요? 학생들이 해부 실습하느라고 톱으로 머리를 가르고 칼로 배를 찢고 한다는데 정말 그러겠지요?”

우리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환이 다꾸앙과 파가 담긴 접시를 갖다 놓고 나갔다.

“기분 나쁜 얘길 해서 미안합니다. 다만 누구에게라도 얘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 가지만 의논해 보고 싶은데,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오늘 저녁에 다 써 버리고 싶은데요.”

“쓰십시오.” 안이 얼른 대답했다.

이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 함께 있어 주시겠어요?” 사내가 말했다. 우리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함께 있어 주십시오.” 사내가 말했다. 우리는 승낙했다.

“멋있게 한번 써 봅시다.”라고 사내는 우리와 만난 후 처음으로 웃으면서 그러나 여전히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                                                                                                                                       - 김승옥, ‘서울, 1964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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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윗글의 서술상 특징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빈번한 장면 전환을 통해 사건을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

② 대화를 통해 인물이 살아온 내력을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③ 방언과 토속적 어휘를 사용하여 인물을 생동감 있게 그려 내고 있다.

④ 상반된 가치관을 지닌 인물들을 등장시켜 인물 간의 갈등을 심화하고 있다.

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과장된 묘사를 통해 비극적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있다.

 

41. ‘사내와 관련하여 ~을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감각적 심상을 통해 사내의 외양을 제시하고 있다.

② ㉡: 진술되는 말과 상반된 분위기의 음성을 통해 사내의 위선적 면모를 표출하고 있다.

③ ㉢: 동일한 행동을 반복하는 사내의 모습을 통해 사내의 복잡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④ ㉣: 자신의 결정에 대한 사내의 자조적(自嘲的) 변명이 나타나 있다.

⑤ ㉤: ‘우리’와의 동행을 요청하는 사내의 모습을 통해 사내의 외로움과 불안한 심리가 제시되고 있다.

 

42. 보기를 바탕으로 위 작품을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3)

(보기)

우리 사회의 1960년대는 산업적 발전을 이루었지만 경제적으로 힘든 계층이 존재하는 한편 인간성 상실개인주의의 만연 등의 병폐가 조금씩 표면으로 드러난 시대였다이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의 우울한 풍경 속에서 진실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피상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① 사내가 자신의 아내와 수원, 안양, 대천, 경주 등을 여행한 것은 자신의 경제적 무능을 아내에게 숨기기 위한 진실하지 못한 행동이라 할 수 있어.

② 자신의 아내가 죽자 그 시신을 병원에 파는 사내의 선택에는 ‘서적 월부 판매 외교원’으로 생활하는 경제적 빈곤함이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어.

③ 아내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사내를 두고 가려 하는 ‘안’과 ‘나’의 모습에서 인간성 상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④ 전봇대에 붙은 약 광고판, 소주 광고의 네온사인과 길 위의 거지를 나란히 병치시켜 자본주의 사회의 우울한 풍경을 그려 내고 있어.

⑤ ‘즐거움이 넘치고 넘친다는 얼굴로 요란스럽게 끼어들어야만 일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서 ‘나’가 즐거움을 좇으며 피상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43. [A]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심정과 가장 어울리는 한자 성어는?

① 감탄고토(甘呑苦吐) ② 맥수지탄(麥秀之嘆)

③ 수구초심(首丘初心) ④ 자포자기(自暴自棄)

⑤ 절차탁마(切磋琢磨)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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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2 

41.2

42. 1

4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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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출생 1737

사망 1805

 

북학파의 산실 탑골

서울 탑골 주변에는 불우한 문사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때는 정조 연간이었고 그중에서도 터줏대감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었다. 30대의 박지원은 이들 문사만이 아니라 운종가(雲從街, 지금의 종로 네거리 부근)의 장사치들, 막벌이꾼, 거지들에게까지 명성이 자자해 때로는 그들의 스승으로 때로는 그들의 벗으로 통했다.

 

열여덟 살의 소년 문사 박제가가 다 쓰러져가는 박지원의 사립문을 두드렸다. 집주인은 가슴을 풀어헤치고 망건도 쓰지 않은 맨상투를 너덜거리며 뛰어나왔다. 그리고 두 손을 마주 잡고 방 안으로 맞아들였다. 두 사람은 나이나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문학과 세상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 먹을 때가 되자 박지원은 밥을 지어 들여왔다. 차 끓이는 주전자에 밥을 해서는 물 담는 옹기에 퍼 담아 들여왔다. 두 사람은 맨바닥에서 밥을 먹고 난 뒤 밤을 새우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박제가는 이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열흘이고 한 달이고 자기 집에 돌아갈 줄을 몰랐다. 이 자리에는 주변에 살고 있는 문사들도 모여들었다. 박지원의 집 바로 길 건너에 있는 이덕무를 비롯해 유득공, 이서구, 서이수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뛰어난 문사들이었으나 서이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서얼 출신이어서 불우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이들과는 달리 5대 문벌가로 치는 노론 집안의 반남 박씨였지만 벼슬길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이들 서류(庶流)나 불우한 문사들과 어울리기만 했다.

 

그는 혼자 살고 있었다. 생활은 뒤죽박죽이었다. 사흘씩 밥을 굶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낮잠만 자기도 하고 책만 읽기도 했다. 그러다가 주변의 문사들이 모여들면 시와 술로 흥을 돋우었다. 그들의 화제는 현실의 모순과 비리를 개혁하는 것으로 옮겨졌다. 이들은 박지원으로부터 글을 익히고 세상을 배우고 돌아가는 인심을 논했다. 이서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 여름날 밤 연암 어른을 찾아갔다. 연암 어른은 사흘을 굶고 있었다.

그때 버선을 벗은 맨발로 탕건도 풀어버리고 문지방에 걸터앉아서 행랑지기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서구는 이때 굶주린 박지원과 함께 밤을 새워 고금의 치란과 당세의 문장에 대해 논했고, 촛불이 다해 꺼지자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시 박지원의 가족은 광주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몸이 뚱뚱해 더위를 견디지 못했고 모기와 개구리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해 여름이면 혼자 서울에 와 있었다. 서울 집은 좁기는 했지만 모기와 개구리가 없어서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한 계집종이 박지원을 수발했다. 그러나 그 여종은 박지원이 눈병이 들자 주인을 버리고 도망했다. 먹을 것도 없고 밤낮이 따로 없는 주인을 더 모실 수 없었으리라. 그는 가버린 종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밥 지을 사람이 없자 행랑아범에게 밥을 붙여 먹었다. 행랑아범은 박지원에게 농지거리를 하면서 거리낌 없이 대했고 박지원도 그와 이야기 나누기를 즐겼다.

 

박지원은 며칠씩 세수를 하지 않고 열흘씩 머리 손질도 않고 지내면서 더러 땔나무꾼이나 참외장사를 불러들여 담소를 즐겼다. 그리고 다리 부러진 어린 까치에게 밥알을 던져주면서 장난 치는 일에나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이서구가 찾아오던 날도 사흘을 굶은 끝에, 행랑아범이 남의 집 기와를 얹어주고 사온 쌀로 지은 밥을 얻어먹던 참이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박지원은 현실 문제에 대해 예리한 비평을 가하고 많은 글들을 썼다. 그는 선배 홍대용이 청나라에 다녀와 많은 과학 지식을 전달해주자 여기에 심취했고, 제자들과 함께 청나라 문화의 좋은 것을 배워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때 박지원에게 하나의 시련이 닥쳤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세도를 부리고 있었다. 홍국영은 박지원과 그 일파가 안하무인으로 세상을 깔보며 자기네를 무시한다고 해 벽파로 몰아붙였다. 다시 말해서 정조를 반대하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에 박지원은 1777년 한양을 버리고 황해도 금천 땅 첩첩산골인 연암 골짜기로 들어갔다.

 

이것은 피난이 아니라 그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시끄러운 한양을 벗어나고 싶었다. 더욱이 놀고먹는 자들을 매도하던 그로서는 직접 생산자가 되는 길을 택해 노력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연암 골짜기에 큰 꿈을 걸었다. 주변에 과일나무를 심고 양어장을 만들고 1백 통의 벌집을 늘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꿈이었다. 연암에서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초가삼간을 짓고 돌밭 몇 뙈기를 일구었을 뿐이었다. 손이 부르트고 발바닥이 갈라지도록 일을 해보았다.

 

그가 농사일을 하다가 연암당(燕巖堂)을 짓고 틈틈이 그 아래 연못에서 낚시를 즐기며 살았다. 어릴 적부터 부모를 잃고 형수의 손에서 자란 박지원은 혼자된 병든 형수를 이곳에 모시고 와 호강시키려 했지만, 형수는 이 골짜기에 와 호강도 못해보고 죽어 뒷산에 묻히는 비극을 겪었다.

 

그가 숯 굽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자 그의 이웃은 서너 집이 되었다. 그들은 누더기 옷에 검정 칠을 하고 숯만 구워 팔 뿐 그가 바라는 농사는 짓지 않았다. 이런 말이 아닌 고생 속에서도 그는 마음은 이것을 즐기며 바꿀 생각이 없다고 쓰고 있다.

 

박지원이 살던 18세기는, 유교적 통치이념이 새로운 도전을 받던 시대였다. 새로운 사상개편을 요구하고 현실개혁론을 주장한 세력들을 흔히 실학파라 부른다. 이 실학파들은 진보적 지식인들로 때로는 현실참여로, 때로는 묵은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때로는 자아각성으로 그들의 근대지향적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은 그들의 중심인물이었다. 특히 박지원은 앞에서 본 대로 현실에 부딪치며 실천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적어도 이론이 아닌 행동인으로서는 정약용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허구적인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다

 

박지원이 살았던 시기는 영 · 정조시대로 일컬어지는 문예부흥기였다. 개혁을 추진하려는 두 왕이 탕평 정책을 펴고 또는 온건한 방법으로 통치했기에 일컬어진 말일 뿐 실제로 봉건사회의 내면은 더욱 곪아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제도가 더욱 문란해지면서 대토지 소유가 점점 확대되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조세와 지대(地代) · 공납은 영세 자작농 또는 소작농에게 가중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제도가 극도로 문란해져, 일부 지배층에서는 노비 소유가 대량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노비들은 신분의 굴레를 벗기 위해 끊임없이 도망했고, 국가와 노주(奴主)들은 도망한 노비를 추쇄(推刷, 찾아서 잡아들이는 일)하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양반의 곁가지인 서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금고(禁錮)를 벗기 위해 여러 형태로 움직이고 있었다.

 

온갖 정치 ·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는 특권 양반지배층에 대해 소외되고 몰락한 향반들의 불평은 늘어가고,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유리걸식하고, 노비들은 추쇄를 피해 산이나 섬으로 들어가서 숨고, 이런 틈을 서학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불안요소들은 다음에 올 민란의 시대를 예고하는 듯 내면으로 세차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살고 있던 박지원은 위기의 현실을 통찰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묵은 봉건적 요소들에 대한 일대 수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박지원은 이 같은 시대상황에서 어떻게 현실에 대처하고 있을까?

 

그는 1799(정조 23) 농정(農政)에 대한 임금의 물음에 그의 견해를 밝힌 글에서 자기의 처지를 이렇게 쓰고 있다.

 

신의 집안은 대대로 청빈해 본디 농사지을 땅이 없었고, 서울에서 자라 눈으로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신의 할아비가 나라의 녹을 먹었는데, 신은 어렸을 적에 썩은 쌀을 뜰에 심고 싹트기를 기다렸습니다. 조금 자라서는 선비들이나 쫓아다녔지 들사람이나 농사꾼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중년에 어려운 신세가 되어 비로소 귀농할 뜻이 있어서 이른바 농사관계의 책들을 구해 초록을 해두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돌아갈 만한 농토가 없어서 다만 벼루 밭에다 붓갈이(문필생활)나 했을 뿐입니다. 더러 들판에서 갈이 하는 법을 보았지만······.

- 연암집(燕巖集)》 〈진과농소초문(進課農小抄文)

 

여기서 우리는 그의 생애의 한 부분을 알 수 있다. 그는 노론의 명문 반남 박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두 살 적에 아버지가 죽었고, 녹봉이 없는 명예직의 벼슬을 하던 할아버지 박필균의 손에서 자랐다. 그가 열여섯 살 적에 할아버지가 죽고 형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남겨진 유산이 없었던 탓에 떠돌이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의 집은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고 중년이 될 무렵 가족은 경기도 광주로 이사를 했지만 그는 탑골 뒷골목의 오두막집에서 혼자 지냈다.

 

앞에서 말한 문사들을 북학파라고 불렸는데 그는 이들과 함께 주자학을 비판하고 청나라의 과학과 문물을 이야기하다가 때가 되어 쌀이 있으면 밥을 지어 격식 없이 함께 먹었고, 게다가 막걸리라도 있으면 더욱 흥이 났다. 이러한 모습은 선비들이나 쫓아다녔다고 말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그는 서른네 살에 초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뒤, 벗들의 강권으로 회시의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일부러 시험지를 내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의 겉모습 또한 가관이었다. 옷은 너덜너덜하고 옷고름은 풀어헤치고 갓은 아무렇게나 뒤집어썼다. 그 자신이 스스로를 평하기를 광달하기는 장자 같고, 불공하기는 유하혜 같고, 술 마시기는 유령 같고, 저술하기는 양웅 같고, 스스로 견주기는 제갈량 같다고 했다(연암집).

 

그의 저서 중에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있다. 이 책은 당시에 풍미하던 존명배청의 풍조, 소중화 의식, 북벌론 등의 허구를 여지없이 깔아뭉개고 풍자했으며, 청나라의 좋은 점을 배우자고 역설했다. 한 대목을 보면 의복이 명나라 것과 닮았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상복이 아니냐? 머리를 깎지 않는다고 자랑하지만 상투는 남쪽 오랑캐의 풍속과 같지 않느냐? 티끌만큼도 그들(청나라)보다 낫지 않으면서 상투 하나 가지고 잘난 체하다니······”라고 당시의 잘못된 생각들을 매도했다.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볼 때 열하일기는 연암 골짜기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에 중국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특히 열하일기에 담긴 호질문(虎叱文)허생전(許生傳)은 풍자문학의 극치를 이룬 작품이다. 호질문에서 그는 북곽 선생이라는 위선에 가득 찬 학자를 풍자했다. 북곽 선생은 과부와 간통을 했는데, 과부의 아들들이 그를 여우가 둔갑한 것이라 해 여우를 잡아 돈을 벌자고 하자 도망치다 똥통에 빠졌다. 겨우 기어 나오니 호랑이가 도사리고 있어 애걸복걸 살려달라고 하자 호랑이는 한참 꾸지람을 늘어놓다가 선비는 속이 썩었으므로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가버린다.

 

허생전에서는 매점매석으로 큰돈을 번 허생이 그에게 벼슬을 권하러 온 어영대장 이완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제갈량 같은 인재를 천거할 테니 임금(효종)에게 여쭈어 삼고초려할 것, 명의 망명 정객에게 국혼(國婚)을 주고 대신들의 집을 징발해줄 것, 명문의 자제들을 뽑아 머리를 깎고 되놈 옷을 입혀 유학생이나 상인으로 청나라에 보내 간첩의 사명을 완수하게 할 것 등이다.

 

당시 조정에서 도무지 인재를 찾으려 하지 않고 불공평하게 등용하는 것을 비꼰 것이다. 그리고 몇몇 세도가에게 계속해서 국혼을 주느니 차라리 대국이라고 섬기는 명나라의 정객에게 국혼을 주라고 빈정거렸으며, 오랑캐라고 멸시하면서도 청나라에 왕실과 조정 신하의 딸들을 징발당하는 모순된 현실을 풍자했다.

 

또한 청나라를 치자고 외치면서도 과감히 그들 속에 뛰어들어 실정을 파악하려 들지 않는 뻔뻔한 북벌론자들을 매도한 것이다. 물론 이완은 세 가지 중 하나도 실천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허생은 그제야 일어서서 그를 크게 꾸짖고 칼을 찾아 찌르려 했다. 이완은 소스라치게 놀라, 들창을 박차고 뛰어나가 한달음에 도망쳤다.

 

열하일기는 청나라 문물을 소개하는 기행문의 형식을 빌렸으나 자신의 창작품을 필요한 대목에 포함시켰다. 그런 탓인지 이 책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모든 선비들이 다투어 읽었다. 그러나 인세 한 푼 들어오지 않을 때였으니 이러한 작품들이 읽히거나 말거나 그의 가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박지원은 선배 홍대용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제가 한 언덕과 한 골짜기를 일군 지 9년이 되었습니다. 풍찬노숙 끝에 헛되이 두 주먹만 쥐었습니다. 마음은 피로하고 재주가 졸렬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생활을 바꾸려는 생각은 없다고 했다.

 

살아 있는 지식인의 역할을 역설하다

 

비록 스스로 생산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 말라고 외쳤지만, 글이나 읽는 선비가 농사를 짓기에는 너무나 조건이 맞지 않았다. 이때 그는 선비는 선비로서의 할 일이 따로 있다고 깨달았다. 이리하여 박지원은 쉰 살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주 하찮은 벼슬을 받았다. 이어 현감 · 부사 같은 원 노릇도 하게 되어 가난을 조금 면했다.

 

그러나 그에게 시련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1792년 그에게 큰 비난이 쏟아졌다. 그가 쓴 열하일기와 소설들이 문체반정운동에 걸린 것이다. 고루한 선비들은 그의 비속한 말, 저속한 표현 그리고 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평을 역겨워했고, 그의 문체가 젊고 기예한 선비들의 문장 표본이 되어가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리하여 임금을 꼬드겨 박지원과 그를 추종하는 일파를 몰아내려 했다.

 

이에 정조는 그의 글을 읽고 무척이나 못마땅해하면서 반성의 글을 쓰라고 했다. 박지원은 굽힐 수밖에 없었다. 늙어서였을까? 정조는 다시 지어 올린 글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만족스러워하지 않았지만 그냥 덮어두게 했다.

 

1799, 면천군수가 된 지 2년 뒤에 올린 농서(農書) 앞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임을 맡은 이래로 농사에 관해 수령이 해야 할 칠사(七事)의 경책(警策)을 섭렵하지 않음은 아니나, 못나고 게을러서 끝내 입으로 지껄이고 귀로 들은 이 되어 서로 맞아떨어지지 못하고, 습속(習俗)이 안이한 탓으로 쉽게 고치지도 못해 옛 습관에 따라 다만 권농했을 뿐입니다. 다음 쓸 이야기 중에 한두 가지는 아직 시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직분을 얻은 지 몇 년이 되었으나 민사(民社, 백성의 생업)의 수무(首務, 농사)가 제대로 성행하지 못했습니다. ······ 이로 인해 밤낮 걱정했으나 진실로 시위소찬(尸位素饌)하여 죄를 벗어날 수 없겠습니다.

- 연암집》 〈진과농소초문

 

이 문맥에서 그가 수령으로서 제일의 임무인 권농에 대해 노심초사했고, 실제로 자기의 방법을 농민들에게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겸손한 표현을 썼으나, 과농소초(課農小抄)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농업 관계에 대한 옛 의견을 기록하고, 자신이 직접 겪고 본 것을 제시했다. 그리고 국가정책으로 밀고나갈 것을 요구했다.

 

파란이 겹친 생애였으나 우리는 그의 삶에서 어떤 시사를 얻게 된다.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몸을 내던지며 광인처럼 살았고, 내면에서 꿈틀대는 고뇌를 삭이며 산, 양심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본다. 어떤 사정으로든 벼슬자리에 나갔으나 수탈하는 수령, 무사안일에 빠진 목민관이 아니라, 평소 그의 꿈의 일부를 펴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국가제도와 묵은 습관 때문에 쉽게 실현되지 못했고,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도 받았다. 이런 삶의 모습과 현실 인식은 그의 많은 저술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1798(정조 22) 정조는 수령들과 선비들에게 농업정책에 대해 각자 의견을 내라고 했다. 토지제도가 문란해 국가재정과 농민의 생활이 극도로 악화되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박지원은 앞에서 든 것처럼 이듬해에 이에 대한 의견(과농소초)을 냈는데, 이것이 얼마만큼 조정에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과농소초에 대한 언급은 당시 자료에는 없으며 정조가 보았다는 기록 역시 없다(김용섭, 조선후기농업사연구 I, 18세기 농촌 지식인의 농업관).

 

그러나 여기서 박지원은 농업 전반에 대한 정책을 건의하면서 그 개혁의 중심을 토지겸병에 두고 있었다. 과농소초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항목에서 농사꾼들이 하는 말로, 1년 내 부지런히 농사지어도 소금 값도 안 된다는 말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들에게 아무리 농사짓는 법을 잘 일러주고 부지런히 농사지으라고 한들 아무 실효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땅을 가진 자영농이 열에 한둘도 되지 않는데, 그들마저도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야 겨우 먹고살 정도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조세를 바치고 지대를 내고 농비를 부담해야 한다. 그러다가 가정에 큰 일이 있거나 흉년이 들거나 하면 유리걸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박지원은 이런 참담한 농민의 생활은 우선 토지겸병에 원인이 있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저 겸병하는 호부(豪富)들은 가난한 농민의 땅을 강제로 사들인 것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모두 차지하게 된 것이다. 부유하고 강한 자산에 의지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온 동네의 땅을 팔기를 원하는 자들이 스스로 토지 문서를 가지고 부잣집 문 앞으로 몰려온다. 입고 먹는 것 말고도 길흉대사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요, 혹 빚 독촉에 압박을 받거나 혹 모리(牟利)와 미납된 세금에 쪼들리고 쪼들려서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을 적에 땅을 팔 수밖에 없다.······

결국 토지의 겸병이 확대되어 빈부의 격차가 심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의 집안 몇 세대를 보니, 할아버지 · 아버지의 땅을 잘 지켜 팔지 않고 남에게 준 것이 열에 다섯이요, 해마다 땅을 떼어준 것이 역시 일곱 여덟인데도(소작 또는 자식들에게 갈라주는 상속 따위로) 그 땅이 하나도 줄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 이익을 독점해 더욱 점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한번 일정한 대토지를 점유하면 그 이익으로 더 많은 토지를 확대 점유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국가제도를 바꾸어, 토지 점유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구가 일정한 토지 이상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혹 부호들이 숨겨 기록할 적에는 이를 적발해 몰수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토지의 제한이 있은 뒤에야 토지의 겸병이 그치고, 토지의 겸병이 그친 뒤에 산업이 고르게 발달하게 되고, 산업이 고르게 발달한 뒤 농민이 모두 토지에 안착해 땅을 갈 수 있어야 부지런함이 나타나게 되고, 부지런함이 나타난 뒤에야 농사를 권장할 수 있고 농민을 가르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아무리 권농을 한들 농토가 없고 농사를 지어도 살 수 없을 적에는 실효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토지 겸병을 막아 빈부의 격차를 제도로 보장해야 하고, 이외 국가의 조세, 벼슬아치의 수탈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통계를 제시하면서 토지 개혁을 도모했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가 끊이지 않고 도둑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런 개혁책과 경고는 고루한 벼슬아치와 독점적 특권을 누리던 양반 지배층의 완강한 반대로 시행될 수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18세기 초기 민중의 전면적 봉기를 맞게 된다.

 

그러면 특권지배층인 양반을 정점으로 하는 사회 신분제에 대한 그의 견해는 어떠했는가? 실제 봉건 왕조는 토지제도와 신분제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신분제적 특권은 토지 등 경제적 부를 누리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이런 점에서 양반을 여지없이 매도했다. 그는 양반전(兩班傳)에서 양반을 한 마리 좀으로 단정하고 아무 쓸모없는 인물로 묘사했다. 양반을 위선에 가득 찬 인물로 그리면서, 근면한 산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이따위 양반은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도 양반 신분이었으나 선비를 자처하면서 선비의 소임을 말했다. 직접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것보다 실제 경험에 의해 생산계층을 지도하고 이끌 임무가 결국 지식인에게 주어졌음을 알게 된 것이다. 다만 선비의 지식이 산지식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양반전에서 그는 글을 읽으면 선비라 하고, 선비가 벼슬자리에 나가면 대부가 된다고 했다. 글을 읽어서 아랫자리의 농사꾼, 장이, 장사치들을 이끄는 것이 선비의 소임이긴 하지만, 벼슬을 해 나라와 사회의 일에 참여할 수도 있으므로 신분상으로는 양반에 속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우성은 이렇게 지적했다.

 

사는 농 · · 상과 더불어 사민의 하나라고 했지만, 사대부로서의 지위는 농 · · 상과 동렬의 것이 아니다. 기실 사는 농 · · 상에 대한 지배계급이다. 적어도 이조 초기에 있어서는 이것이 하나의 체제로서 보장되었다. 비교적 공평한 과거의 선발시험을 통해서 능력이 있는 대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일반 사대부에게 균등하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 한국의 역사상》 〈실학연구서실

 

박지원은 독서하고 계몽하는 역할의 선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릇 선비는 아래로는 농 · · 상에, 위로는 왕공(王公)에 벗할 수 있으니, 지위로 말하면 등급이 없는 것이요 덕으로 말하면 아름다운 일이다. 한 선비가 글을 읽어 덕택을 온 천하에 미치게 하면, 공적이 만세에 드리우게 된다.

- 연암집》 〈원사

그러고는 당시 선비의 폐습을 이렇게 말했다.

 

선비는 성명(性命)을 고담(高談)하면서 경국제세를 빠뜨리거나 부질없이 문장이나 숭상하면서 바른 정치는 베풀 줄 모른다.

이어 선비의 구체적 소임을 이렇게 밝혔다.

 

사의 학은 실로 농 · · 상의 이치를 포괄한다. 이 세 가지 업은 반드시 사를 기다린 뒤에야 이루어지게 되는데, 무릇 농사를 밝히고 상업을 통하게 하고 공을 베풀게 하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후세에 농 · · 상이 업을 잃게 된 것은 곧 사가 실학이 없었던 잘못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 과농소초》 〈제가총론(諸家總論)

 

문학을 통해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다

 

그가 도덕군자라고 자처하는 허위에 찬 북곽 선생을 여지없이 능멸하고(호질문), 허생 같은 실질의 인물을 높이 쳤던 것(허생전)은 이런 그의 견해의 일단을 나타낸 것이다.

 

성명이나 외쳐대며 공리공담에 빠져 있는 성리학자들을 아무 쓸모없는 인물로, 실질 있는 학문으로 민중의 문제에 파고드는 실학을 삶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는 의 역할을 유형원보다 더욱 구체화시켰다. 그러기에 소설을 통해 농사꾼, 장사치, 장이들을 부각시켰고, 불우하고 찌든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신분제적 질서를 비꼬았던 것이다.

 

마장전(馬駔傳)에서는 비렁뱅이로 떠돌며 저자에서 광인처럼 노래 부르고 다니는 세 사람을 등장시켜 참된 우도(友道)를 논하게 했다. 당시 덕 있는 군자인 척, 교양 있는 양반인 척 거들먹거리며 권세나 낚고, 명예나 움켜쥐고, 이익이나 차지하려는 위선자의 모습을 이들을 통해 마음껏 풍자한 것이다.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에서는 똥을 쳐 서울 근교의 채소밭에 나르는 노동자를 등장시켰다. 엄행수는 비록 똥을 치지만 건실한 생활태도와 성실함은 곧 가장 훌륭한 삶의 구현자임을 찬양하고 참된 친구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덕을 높이 사서 예덕이라 한 것이다. 손 하나 까딱 않고 덕 있는 체하는 양반을 꾸짖은 것이다.

 

민옹전(閔翁傳)에서는 민옹이라는 영특하고 슬기로운 무관 출신의 기인을 등장시키고 있다. 당시 무반을 깔보고 문반을 위주로 하는 관인사회에 대한 풍자, 특히 놀고먹는 양반을 메뚜기로 비유하는 필치를 보이고 있다.

 

광문자전(廣文者傳)에서는 거지 출신의 광문이라는 사람을 등장시켜, 그의 성실과 정직과 능력을 말하면서 이런 표본적 인간이 인간 대접을 못 받는 사회를 꾸짖고 있다.

 

김신선전(金神仙傳)에서는 신선이 되어 세상을 피해 사는 인물을 통해 불우한 인사가 사회를 등지고 사는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에서는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열녀를 강요한 사회 모습을 그리고 있다.

 

새파란 나이에 혼자되어 오래 세상을 살아가자면, 길이 친척들의 가엾이 여기는 바가 되고, 이웃 사람들의 못된 억측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얼른 이 몸이 없어지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성욕에 몸부림치며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가엾은 노력을 하는 늙은 과부의 이야기를 앞에 기록해 수절의 강요를 풍자했다.

 

이렇듯 그의 작품의 소재는 하층민의 문제이다. 곧 신분제도의 철폐를 우회적인 수법으로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양반지배층이 아무 쓸모없는 유식배(遊食輩)임을 강조하고, ‘의 소임이 신분제적 특권이 아닌 민중을 이끌고 계도하는 것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양반의 곁가지인 서얼의 금고에 대해서도 그 부당함을 말하고 있다. 의청소통소(擬請疏通疏)앞에는 하늘이 재주를 내릴 적에 신분에 따라 달리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우리나라에서 서얼을 폐고(廢錮)한 지 3백여 년이 되었는데, 크게 어그러진 정사가 이보다 지나친 것이 없었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기회의 균등을 말한 것이요, 모든 정사 중에 서얼 금고가 가장 잘못된 법임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부계를 중시하는 것이 문벌인데도, 서얼에 있어서만은 모계 위주로 따지고 있는 것은 크나큰 모순이라 했다. 여기서 그는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부당함을 지적했다. 이 밖에도 노비계층을 동정했고 무사계층을 옹호했다.

 

그러나 토지제와 신분제에 있어 그의 견해에 관해 두어 가지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토지제에서 겸병과 독점을 막아야 한다고 했으나, 국가소유의 토지, 곧 궁방전(宮房田, 왕자나 공주에게 딸린 토지)이나 공방전(公房田, 관아에 딸린 토지) 등에 관해서는 지적한 것이 없다. 그리고 대토지 소유의 하나였던 사전(寺田, 절 소유의 토지)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둘째, 신분제에 있어 노비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결여되어 있었다. 노비문제야말로 양반 특권을 배제하고 국가의 재정과 군역에 있어 가장 당면한 중요과제였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농업중심사회였다. 역대로 국가에서 농업을 가장 장려했고 농업 생산품이 바로 국가의 부가 되고 재정의 중심이 되었다. 이 때문에 농업을 권장하는 왕의 윤음(綸音)이 때마다 반포되었고, 수령들이 해야 할 칠사 중에 농상(農桑)이 첫 자리를 차지했다. 그야말로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의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짙게 깔려 있었다. 농사의 수확은 토지에 따라 한정되었던 탓으로, 조정이나 목민관은 언제나 검약을 내세웠다.

 

특히 18세기 중농주의를 제창한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에 속하는 실학자, 그 중에서도 성호 이익은 부국강병과 민생의 윤택을 위해서 검약을 제일의 방법으로 내세웠다. 그는 하루 한 끼를 먹고 견뎌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따라서 농업중심사상은 상공업을 말리(末利)로 보아 천시했다. 이것은 중국에서도 그러했지만 우리나라가 더욱 심했다.

 

그러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에 속하는 실학자, 그 중에서도 박지원, 박제가는 상업과 공업의 발달이 있어야 부국과 민부(民富)가 이룩된다고 주장했다. 곧 명농(明農) · 통상(通商) · 혜공(惠工)으로 균형 있는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주장을 이용후생이라 했는데, 사물을 잘 써서[利用] 삶을 풍요하게[厚生]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농업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농업을 기초로 해 유통과 교역, 기술 개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이우성은 이렇게 쓰고 있다.

 

농업주의 운운해······농민의 생활은 경전이식(耕田而食)하고 직포이의(織布而衣)하면 될 뿐이며, 화폐의 유통조차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에 반해 상인 · 수공업자들은 이윤의 추구와 아울러 더욱 자기 신장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진작 그것을 이해하고 지지한 것이 연암 그룹이었다. 연암 그룹은 평소 그들의 견해도 그러했거니와 중국여행을 통해 당시 중국인의 물질생활, 특히 부유한 생활수준과 조리 있는 생활양식을 목격한 후에 더욱 각성된 바가 많았던 것이다.

- 한국의 역사상》 〈실학파의 문학과 사회관

 

북학파의 대표적 문사

 

상공업세력은 17세기 후반부터 국가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크게 신장했다. 다만 정조의 통공(通共)정책이 실행되어 상인과 장인의 활동을 넓혀 주었을 뿐이다. 그들은 지역 간의 교역, 시장경제의 확대, 가내수공업에서 상품수공업으로의 전환을 도모했다. 이것은 특산물의 교환이나 특정지역에 모자라는 상품을 공급하는 효용성이 있었던 탓이다. 이런 현실 조건을 박지원 일파는 민감하게 파악하고, 도시적 분위기 속에서 사무역(私貿易)과 사공업(私工業)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에 왕래하면서 실질적인 생활태도와 산업규모를 목격하고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존명배청의 정책을 내걸어 의례적으로만 청나라에 굽실거렸고, 내면으로는 오랑캐라고 얕보아 그들의 문물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이에 박지원 일파는 이런 조정의 정책에 반대해 청의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는 이론을 편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주장을 책으로 펴냈다. 홍대용의 담헌설총(湛軒說叢),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북학파라고 불렀다. 부르기는 달리했을지언정 그 뜻에 있어서는 이용후생이나 북학이 같다.

 

박지원의 생에 있어서 후반기는 현실참여를 통해 개혁을 이룩하려는 의지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쉰 살이 넘어 벼슬살이에 나와 마지막으로 양양부사를 지냈다. 양양부사로 1년도 채 복무하지 못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사직했다. 몸은 비대했고 눈은 사물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김씨 문벌정치 아래의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의 개혁사상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바쁜 벼슬살이에서 그의 사상적 체계를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만년에는 붓끝이 흐려져 있어서 개량적 · 타협적 수준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따져 박지원을 북학파의 대표적인 문사 또는 실학사상가로 꼽고 있다.

 

그의 묘소는 장단의 송서면 대세현 언덕바지에 있었으나 현재 북한 땅이어서 그 형편을 제대로 알 길이 없다.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이이화 | 주니어김영사

연암 박지원

 

 

출생 1737

사망 1805

 

북학파의 산실 탑골

서울 탑골 주변에는 불우한 문사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때는 정조 연간이었고 그중에서도 터줏대감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었다. 30대의 박지원은 이들 문사만이 아니라 운종가(雲從街, 지금의 종로 네거리 부근)의 장사치들, 막벌이꾼, 거지들에게까지 명성이 자자해 때로는 그들의 스승으로 때로는 그들의 벗으로 통했다.

 

열여덟 살의 소년 문사 박제가가 다 쓰러져가는 박지원의 사립문을 두드렸다. 집주인은 가슴을 풀어헤치고 망건도 쓰지 않은 맨상투를 너덜거리며 뛰어나왔다. 그리고 두 손을 마주 잡고 방 안으로 맞아들였다. 두 사람은 나이나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문학과 세상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 먹을 때가 되자 박지원은 밥을 지어 들여왔다. 차 끓이는 주전자에 밥을 해서는 물 담는 옹기에 퍼 담아 들여왔다. 두 사람은 맨바닥에서 밥을 먹고 난 뒤 밤을 새우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박제가는 이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열흘이고 한 달이고 자기 집에 돌아갈 줄을 몰랐다. 이 자리에는 주변에 살고 있는 문사들도 모여들었다. 박지원의 집 바로 길 건너에 있는 이덕무를 비롯해 유득공, 이서구, 서이수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뛰어난 문사들이었으나 서이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서얼 출신이어서 불우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지원은 이들과는 달리 5대 문벌가로 치는 노론 집안의 반남 박씨였지만 벼슬길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고 이들 서류(庶流)나 불우한 문사들과 어울리기만 했다.

 

그는 혼자 살고 있었다. 생활은 뒤죽박죽이었다. 사흘씩 밥을 굶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낮잠만 자기도 하고 책만 읽기도 했다. 그러다가 주변의 문사들이 모여들면 시와 술로 흥을 돋우었다. 그들의 화제는 현실의 모순과 비리를 개혁하는 것으로 옮겨졌다. 이들은 박지원으로부터 글을 익히고 세상을 배우고 돌아가는 인심을 논했다. 이서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어느 여름날 밤 연암 어른을 찾아갔다. 연암 어른은 사흘을 굶고 있었다.

그때 버선을 벗은 맨발로 탕건도 풀어버리고 문지방에 걸터앉아서 행랑지기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서구는 이때 굶주린 박지원과 함께 밤을 새워 고금의 치란과 당세의 문장에 대해 논했고, 촛불이 다해 꺼지자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시 박지원의 가족은 광주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몸이 뚱뚱해 더위를 견디지 못했고 모기와 개구리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해 여름이면 혼자 서울에 와 있었다. 서울 집은 좁기는 했지만 모기와 개구리가 없어서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한 계집종이 박지원을 수발했다. 그러나 그 여종은 박지원이 눈병이 들자 주인을 버리고 도망했다. 먹을 것도 없고 밤낮이 따로 없는 주인을 더 모실 수 없었으리라. 그는 가버린 종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밥 지을 사람이 없자 행랑아범에게 밥을 붙여 먹었다. 행랑아범은 박지원에게 농지거리를 하면서 거리낌 없이 대했고 박지원도 그와 이야기 나누기를 즐겼다.

 

박지원은 며칠씩 세수를 하지 않고 열흘씩 머리 손질도 않고 지내면서 더러 땔나무꾼이나 참외장사를 불러들여 담소를 즐겼다. 그리고 다리 부러진 어린 까치에게 밥알을 던져주면서 장난 치는 일에나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이서구가 찾아오던 날도 사흘을 굶은 끝에, 행랑아범이 남의 집 기와를 얹어주고 사온 쌀로 지은 밥을 얻어먹던 참이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박지원은 현실 문제에 대해 예리한 비평을 가하고 많은 글들을 썼다. 그는 선배 홍대용이 청나라에 다녀와 많은 과학 지식을 전달해주자 여기에 심취했고, 제자들과 함께 청나라 문화의 좋은 것을 배워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때 박지원에게 하나의 시련이 닥쳤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세도를 부리고 있었다. 홍국영은 박지원과 그 일파가 안하무인으로 세상을 깔보며 자기네를 무시한다고 해 벽파로 몰아붙였다. 다시 말해서 정조를 반대하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이에 박지원은 1777년 한양을 버리고 황해도 금천 땅 첩첩산골인 연암 골짜기로 들어갔다.

 

이것은 피난이 아니라 그의 꿈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시끄러운 한양을 벗어나고 싶었다. 더욱이 놀고먹는 자들을 매도하던 그로서는 직접 생산자가 되는 길을 택해 노력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연암 골짜기에 큰 꿈을 걸었다. 주변에 과일나무를 심고 양어장을 만들고 1백 통의 벌집을 늘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낱 꿈이었다. 연암에서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초가삼간을 짓고 돌밭 몇 뙈기를 일구었을 뿐이었다. 손이 부르트고 발바닥이 갈라지도록 일을 해보았다.

 

그가 농사일을 하다가 연암당(燕巖堂)을 짓고 틈틈이 그 아래 연못에서 낚시를 즐기며 살았다. 어릴 적부터 부모를 잃고 형수의 손에서 자란 박지원은 혼자된 병든 형수를 이곳에 모시고 와 호강시키려 했지만, 형수는 이 골짜기에 와 호강도 못해보고 죽어 뒷산에 묻히는 비극을 겪었다.

 

그가 숯 굽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자 그의 이웃은 서너 집이 되었다. 그들은 누더기 옷에 검정 칠을 하고 숯만 구워 팔 뿐 그가 바라는 농사는 짓지 않았다. 이런 말이 아닌 고생 속에서도 그는 마음은 이것을 즐기며 바꿀 생각이 없다고 쓰고 있다.

 

박지원이 살던 18세기는, 유교적 통치이념이 새로운 도전을 받던 시대였다. 새로운 사상개편을 요구하고 현실개혁론을 주장한 세력들을 흔히 실학파라 부른다. 이 실학파들은 진보적 지식인들로 때로는 현실참여로, 때로는 묵은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때로는 자아각성으로 그들의 근대지향적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은 그들의 중심인물이었다. 특히 박지원은 앞에서 본 대로 현실에 부딪치며 실천의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적어도 이론이 아닌 행동인으로서는 정약용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허구적인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다

 

박지원이 살았던 시기는 영 · 정조시대로 일컬어지는 문예부흥기였다. 개혁을 추진하려는 두 왕이 탕평 정책을 펴고 또는 온건한 방법으로 통치했기에 일컬어진 말일 뿐 실제로 봉건사회의 내면은 더욱 곪아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제도가 더욱 문란해지면서 대토지 소유가 점점 확대되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조세와 지대(地代) · 공납은 영세 자작농 또는 소작농에게 가중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신분제도가 극도로 문란해져, 일부 지배층에서는 노비 소유가 대량으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노비들은 신분의 굴레를 벗기 위해 끊임없이 도망했고, 국가와 노주(奴主)들은 도망한 노비를 추쇄(推刷, 찾아서 잡아들이는 일)하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양반의 곁가지인 서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금고(禁錮)를 벗기 위해 여러 형태로 움직이고 있었다.

 

온갖 정치 ·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는 특권 양반지배층에 대해 소외되고 몰락한 향반들의 불평은 늘어가고, 농민들은 농토를 버리고 유리걸식하고, 노비들은 추쇄를 피해 산이나 섬으로 들어가서 숨고, 이런 틈을 서학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불안요소들은 다음에 올 민란의 시대를 예고하는 듯 내면으로 세차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살고 있던 박지원은 위기의 현실을 통찰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묵은 봉건적 요소들에 대한 일대 수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박지원은 이 같은 시대상황에서 어떻게 현실에 대처하고 있을까?

 

그는 1799(정조 23) 농정(農政)에 대한 임금의 물음에 그의 견해를 밝힌 글에서 자기의 처지를 이렇게 쓰고 있다.

 

신의 집안은 대대로 청빈해 본디 농사지을 땅이 없었고, 서울에서 자라 눈으로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신의 할아비가 나라의 녹을 먹었는데, 신은 어렸을 적에 썩은 쌀을 뜰에 심고 싹트기를 기다렸습니다. 조금 자라서는 선비들이나 쫓아다녔지 들사람이나 농사꾼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중년에 어려운 신세가 되어 비로소 귀농할 뜻이 있어서 이른바 농사관계의 책들을 구해 초록을 해두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돌아갈 만한 농토가 없어서 다만 벼루 밭에다 붓갈이(문필생활)나 했을 뿐입니다. 더러 들판에서 갈이 하는 법을 보았지만······.

- 연암집(燕巖集)》 〈진과농소초문(進課農小抄文)

 

여기서 우리는 그의 생애의 한 부분을 알 수 있다. 그는 노론의 명문 반남 박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두 살 적에 아버지가 죽었고, 녹봉이 없는 명예직의 벼슬을 하던 할아버지 박필균의 손에서 자랐다. 그가 열여섯 살 적에 할아버지가 죽고 형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남겨진 유산이 없었던 탓에 떠돌이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의 집은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고 중년이 될 무렵 가족은 경기도 광주로 이사를 했지만 그는 탑골 뒷골목의 오두막집에서 혼자 지냈다.

 

앞에서 말한 문사들을 북학파라고 불렸는데 그는 이들과 함께 주자학을 비판하고 청나라의 과학과 문물을 이야기하다가 때가 되어 쌀이 있으면 밥을 지어 격식 없이 함께 먹었고, 게다가 막걸리라도 있으면 더욱 흥이 났다. 이러한 모습은 선비들이나 쫓아다녔다고 말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그는 서른네 살에 초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뒤, 벗들의 강권으로 회시의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일부러 시험지를 내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의 겉모습 또한 가관이었다. 옷은 너덜너덜하고 옷고름은 풀어헤치고 갓은 아무렇게나 뒤집어썼다. 그 자신이 스스로를 평하기를 광달하기는 장자 같고, 불공하기는 유하혜 같고, 술 마시기는 유령 같고, 저술하기는 양웅 같고, 스스로 견주기는 제갈량 같다고 했다(연암집).

 

그의 저서 중에 열하일기(熱河日記)가 있다. 이 책은 당시에 풍미하던 존명배청의 풍조, 소중화 의식, 북벌론 등의 허구를 여지없이 깔아뭉개고 풍자했으며, 청나라의 좋은 점을 배우자고 역설했다. 한 대목을 보면 의복이 명나라 것과 닮았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상복이 아니냐? 머리를 깎지 않는다고 자랑하지만 상투는 남쪽 오랑캐의 풍속과 같지 않느냐? 티끌만큼도 그들(청나라)보다 낫지 않으면서 상투 하나 가지고 잘난 체하다니······”라고 당시의 잘못된 생각들을 매도했다.

 

그의 행적을 미루어 볼 때 열하일기는 연암 골짜기에서 쓴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에 중국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특히 열하일기에 담긴 호질문(虎叱文)허생전(許生傳)은 풍자문학의 극치를 이룬 작품이다. 호질문에서 그는 북곽 선생이라는 위선에 가득 찬 학자를 풍자했다. 북곽 선생은 과부와 간통을 했는데, 과부의 아들들이 그를 여우가 둔갑한 것이라 해 여우를 잡아 돈을 벌자고 하자 도망치다 똥통에 빠졌다. 겨우 기어 나오니 호랑이가 도사리고 있어 애걸복걸 살려달라고 하자 호랑이는 한참 꾸지람을 늘어놓다가 선비는 속이 썩었으므로 먹지 않겠다고 하면서 가버린다.

 

허생전에서는 매점매석으로 큰돈을 번 허생이 그에게 벼슬을 권하러 온 어영대장 이완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제갈량 같은 인재를 천거할 테니 임금(효종)에게 여쭈어 삼고초려할 것, 명의 망명 정객에게 국혼(國婚)을 주고 대신들의 집을 징발해줄 것, 명문의 자제들을 뽑아 머리를 깎고 되놈 옷을 입혀 유학생이나 상인으로 청나라에 보내 간첩의 사명을 완수하게 할 것 등이다.

 

당시 조정에서 도무지 인재를 찾으려 하지 않고 불공평하게 등용하는 것을 비꼰 것이다. 그리고 몇몇 세도가에게 계속해서 국혼을 주느니 차라리 대국이라고 섬기는 명나라의 정객에게 국혼을 주라고 빈정거렸으며, 오랑캐라고 멸시하면서도 청나라에 왕실과 조정 신하의 딸들을 징발당하는 모순된 현실을 풍자했다.

 

또한 청나라를 치자고 외치면서도 과감히 그들 속에 뛰어들어 실정을 파악하려 들지 않는 뻔뻔한 북벌론자들을 매도한 것이다. 물론 이완은 세 가지 중 하나도 실천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허생은 그제야 일어서서 그를 크게 꾸짖고 칼을 찾아 찌르려 했다. 이완은 소스라치게 놀라, 들창을 박차고 뛰어나가 한달음에 도망쳤다.

 

열하일기는 청나라 문물을 소개하는 기행문의 형식을 빌렸으나 자신의 창작품을 필요한 대목에 포함시켰다. 그런 탓인지 이 책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모든 선비들이 다투어 읽었다. 그러나 인세 한 푼 들어오지 않을 때였으니 이러한 작품들이 읽히거나 말거나 그의 가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박지원은 선배 홍대용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제가 한 언덕과 한 골짜기를 일군 지 9년이 되었습니다. 풍찬노숙 끝에 헛되이 두 주먹만 쥐었습니다. 마음은 피로하고 재주가 졸렬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생활을 바꾸려는 생각은 없다고 했다.

 

살아 있는 지식인의 역할을 역설하다

 

비록 스스로 생산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 말라고 외쳤지만, 글이나 읽는 선비가 농사를 짓기에는 너무나 조건이 맞지 않았다. 이때 그는 선비는 선비로서의 할 일이 따로 있다고 깨달았다. 이리하여 박지원은 쉰 살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주 하찮은 벼슬을 받았다. 이어 현감 · 부사 같은 원 노릇도 하게 되어 가난을 조금 면했다.

 

그러나 그에게 시련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1792년 그에게 큰 비난이 쏟아졌다. 그가 쓴 열하일기와 소설들이 문체반정운동에 걸린 것이다. 고루한 선비들은 그의 비속한 말, 저속한 표현 그리고 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평을 역겨워했고, 그의 문체가 젊고 기예한 선비들의 문장 표본이 되어가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리하여 임금을 꼬드겨 박지원과 그를 추종하는 일파를 몰아내려 했다.

 

이에 정조는 그의 글을 읽고 무척이나 못마땅해하면서 반성의 글을 쓰라고 했다. 박지원은 굽힐 수밖에 없었다. 늙어서였을까? 정조는 다시 지어 올린 글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만족스러워하지 않았지만 그냥 덮어두게 했다.

 

1799, 면천군수가 된 지 2년 뒤에 올린 농서(農書) 앞머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임을 맡은 이래로 농사에 관해 수령이 해야 할 칠사(七事)의 경책(警策)을 섭렵하지 않음은 아니나, 못나고 게을러서 끝내 입으로 지껄이고 귀로 들은 이 되어 서로 맞아떨어지지 못하고, 습속(習俗)이 안이한 탓으로 쉽게 고치지도 못해 옛 습관에 따라 다만 권농했을 뿐입니다. 다음 쓸 이야기 중에 한두 가지는 아직 시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직분을 얻은 지 몇 년이 되었으나 민사(民社, 백성의 생업)의 수무(首務, 농사)가 제대로 성행하지 못했습니다. ······ 이로 인해 밤낮 걱정했으나 진실로 시위소찬(尸位素饌)하여 죄를 벗어날 수 없겠습니다.

- 연암집》 〈진과농소초문

 

이 문맥에서 그가 수령으로서 제일의 임무인 권농에 대해 노심초사했고, 실제로 자기의 방법을 농민들에게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겸손한 표현을 썼으나, 과농소초(課農小抄)에서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농업 관계에 대한 옛 의견을 기록하고, 자신이 직접 겪고 본 것을 제시했다. 그리고 국가정책으로 밀고나갈 것을 요구했다.

 

파란이 겹친 생애였으나 우리는 그의 삶에서 어떤 시사를 얻게 된다.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에 몸을 내던지며 광인처럼 살았고, 내면에서 꿈틀대는 고뇌를 삭이며 산, 양심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본다. 어떤 사정으로든 벼슬자리에 나갔으나 수탈하는 수령, 무사안일에 빠진 목민관이 아니라, 평소 그의 꿈의 일부를 펴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국가제도와 묵은 습관 때문에 쉽게 실현되지 못했고,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도 받았다. 이런 삶의 모습과 현실 인식은 그의 많은 저술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1798(정조 22) 정조는 수령들과 선비들에게 농업정책에 대해 각자 의견을 내라고 했다. 토지제도가 문란해 국가재정과 농민의 생활이 극도로 악화되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박지원은 앞에서 든 것처럼 이듬해에 이에 대한 의견(과농소초)을 냈는데, 이것이 얼마만큼 조정에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과농소초에 대한 언급은 당시 자료에는 없으며 정조가 보았다는 기록 역시 없다(김용섭, 조선후기농업사연구 I, 18세기 농촌 지식인의 농업관).

 

그러나 여기서 박지원은 농업 전반에 대한 정책을 건의하면서 그 개혁의 중심을 토지겸병에 두고 있었다. 과농소초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항목에서 농사꾼들이 하는 말로, 1년 내 부지런히 농사지어도 소금 값도 안 된다는 말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들에게 아무리 농사짓는 법을 잘 일러주고 부지런히 농사지으라고 한들 아무 실효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땅을 가진 자영농이 열에 한둘도 되지 않는데, 그들마저도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야 겨우 먹고살 정도라 했다. 그런데 이들은 조세를 바치고 지대를 내고 농비를 부담해야 한다. 그러다가 가정에 큰 일이 있거나 흉년이 들거나 하면 유리걸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박지원은 이런 참담한 농민의 생활은 우선 토지겸병에 원인이 있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저 겸병하는 호부(豪富)들은 가난한 농민의 땅을 강제로 사들인 것이 아니라 하루아침에 모두 차지하게 된 것이다. 부유하고 강한 자산에 의지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온 동네의 땅을 팔기를 원하는 자들이 스스로 토지 문서를 가지고 부잣집 문 앞으로 몰려온다. 입고 먹는 것 말고도 길흉대사가 없을 수 없기 때문이요, 혹 빚 독촉에 압박을 받거나 혹 모리(牟利)와 미납된 세금에 쪼들리고 쪼들려서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을 적에 땅을 팔 수밖에 없다.······

결국 토지의 겸병이 확대되어 빈부의 격차가 심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떤 사람의 집안 몇 세대를 보니, 할아버지 · 아버지의 땅을 잘 지켜 팔지 않고 남에게 준 것이 열에 다섯이요, 해마다 땅을 떼어준 것이 역시 일곱 여덟인데도(소작 또는 자식들에게 갈라주는 상속 따위로) 그 땅이 하나도 줄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 이익을 독점해 더욱 점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한번 일정한 대토지를 점유하면 그 이익으로 더 많은 토지를 확대 점유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국가제도를 바꾸어, 토지 점유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구가 일정한 토지 이상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혹 부호들이 숨겨 기록할 적에는 이를 적발해 몰수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토지의 제한이 있은 뒤에야 토지의 겸병이 그치고, 토지의 겸병이 그친 뒤에 산업이 고르게 발달하게 되고, 산업이 고르게 발달한 뒤 농민이 모두 토지에 안착해 땅을 갈 수 있어야 부지런함이 나타나게 되고, 부지런함이 나타난 뒤에야 농사를 권장할 수 있고 농민을 가르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아무리 권농을 한들 농토가 없고 농사를 지어도 살 수 없을 적에는 실효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토지 겸병을 막아 빈부의 격차를 제도로 보장해야 하고, 이외 국가의 조세, 벼슬아치의 수탈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통계를 제시하면서 토지 개혁을 도모했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라를 어지럽히는 무리가 끊이지 않고 도둑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런 개혁책과 경고는 고루한 벼슬아치와 독점적 특권을 누리던 양반 지배층의 완강한 반대로 시행될 수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18세기 초기 민중의 전면적 봉기를 맞게 된다.

 

그러면 특권지배층인 양반을 정점으로 하는 사회 신분제에 대한 그의 견해는 어떠했는가? 실제 봉건 왕조는 토지제도와 신분제도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신분제적 특권은 토지 등 경제적 부를 누리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이런 점에서 양반을 여지없이 매도했다. 그는 양반전(兩班傳)에서 양반을 한 마리 좀으로 단정하고 아무 쓸모없는 인물로 묘사했다. 양반을 위선에 가득 찬 인물로 그리면서, 근면한 산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은 이따위 양반은 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그도 양반 신분이었으나 선비를 자처하면서 선비의 소임을 말했다. 직접 생산 활동에 참여하는 것보다 실제 경험에 의해 생산계층을 지도하고 이끌 임무가 결국 지식인에게 주어졌음을 알게 된 것이다. 다만 선비의 지식이 산지식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양반전에서 그는 글을 읽으면 선비라 하고, 선비가 벼슬자리에 나가면 대부가 된다고 했다. 글을 읽어서 아랫자리의 농사꾼, 장이, 장사치들을 이끄는 것이 선비의 소임이긴 하지만, 벼슬을 해 나라와 사회의 일에 참여할 수도 있으므로 신분상으로는 양반에 속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우성은 이렇게 지적했다.

 

사는 농 · · 상과 더불어 사민의 하나라고 했지만, 사대부로서의 지위는 농 · · 상과 동렬의 것이 아니다. 기실 사는 농 · · 상에 대한 지배계급이다. 적어도 이조 초기에 있어서는 이것이 하나의 체제로서 보장되었다. 비교적 공평한 과거의 선발시험을 통해서 능력이 있는 대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일반 사대부에게 균등하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 한국의 역사상》 〈실학연구서실

 

박지원은 독서하고 계몽하는 역할의 선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릇 선비는 아래로는 농 · · 상에, 위로는 왕공(王公)에 벗할 수 있으니, 지위로 말하면 등급이 없는 것이요 덕으로 말하면 아름다운 일이다. 한 선비가 글을 읽어 덕택을 온 천하에 미치게 하면, 공적이 만세에 드리우게 된다.

- 연암집》 〈원사

그러고는 당시 선비의 폐습을 이렇게 말했다.

 

선비는 성명(性命)을 고담(高談)하면서 경국제세를 빠뜨리거나 부질없이 문장이나 숭상하면서 바른 정치는 베풀 줄 모른다.

이어 선비의 구체적 소임을 이렇게 밝혔다.

 

사의 학은 실로 농 · · 상의 이치를 포괄한다. 이 세 가지 업은 반드시 사를 기다린 뒤에야 이루어지게 되는데, 무릇 농사를 밝히고 상업을 통하게 하고 공을 베풀게 하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후세에 농 · · 상이 업을 잃게 된 것은 곧 사가 실학이 없었던 잘못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 과농소초》 〈제가총론(諸家總論)

 

문학을 통해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다

 

그가 도덕군자라고 자처하는 허위에 찬 북곽 선생을 여지없이 능멸하고(호질문), 허생 같은 실질의 인물을 높이 쳤던 것(허생전)은 이런 그의 견해의 일단을 나타낸 것이다.

 

성명이나 외쳐대며 공리공담에 빠져 있는 성리학자들을 아무 쓸모없는 인물로, 실질 있는 학문으로 민중의 문제에 파고드는 실학을 삶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그는 의 역할을 유형원보다 더욱 구체화시켰다. 그러기에 소설을 통해 농사꾼, 장사치, 장이들을 부각시켰고, 불우하고 찌든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신분제적 질서를 비꼬았던 것이다.

 

마장전(馬駔傳)에서는 비렁뱅이로 떠돌며 저자에서 광인처럼 노래 부르고 다니는 세 사람을 등장시켜 참된 우도(友道)를 논하게 했다. 당시 덕 있는 군자인 척, 교양 있는 양반인 척 거들먹거리며 권세나 낚고, 명예나 움켜쥐고, 이익이나 차지하려는 위선자의 모습을 이들을 통해 마음껏 풍자한 것이다.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에서는 똥을 쳐 서울 근교의 채소밭에 나르는 노동자를 등장시켰다. 엄행수는 비록 똥을 치지만 건실한 생활태도와 성실함은 곧 가장 훌륭한 삶의 구현자임을 찬양하고 참된 친구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덕을 높이 사서 예덕이라 한 것이다. 손 하나 까딱 않고 덕 있는 체하는 양반을 꾸짖은 것이다.

 

민옹전(閔翁傳)에서는 민옹이라는 영특하고 슬기로운 무관 출신의 기인을 등장시키고 있다. 당시 무반을 깔보고 문반을 위주로 하는 관인사회에 대한 풍자, 특히 놀고먹는 양반을 메뚜기로 비유하는 필치를 보이고 있다.

 

광문자전(廣文者傳)에서는 거지 출신의 광문이라는 사람을 등장시켜, 그의 성실과 정직과 능력을 말하면서 이런 표본적 인간이 인간 대접을 못 받는 사회를 꾸짖고 있다.

 

김신선전(金神仙傳)에서는 신선이 되어 세상을 피해 사는 인물을 통해 불우한 인사가 사회를 등지고 사는 분위기를 그리고 있다.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에서는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열녀를 강요한 사회 모습을 그리고 있다.

 

새파란 나이에 혼자되어 오래 세상을 살아가자면, 길이 친척들의 가엾이 여기는 바가 되고, 이웃 사람들의 못된 억측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얼른 이 몸이 없어지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성욕에 몸부림치며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가엾은 노력을 하는 늙은 과부의 이야기를 앞에 기록해 수절의 강요를 풍자했다.

 

이렇듯 그의 작품의 소재는 하층민의 문제이다. 곧 신분제도의 철폐를 우회적인 수법으로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양반지배층이 아무 쓸모없는 유식배(遊食輩)임을 강조하고, ‘의 소임이 신분제적 특권이 아닌 민중을 이끌고 계도하는 것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는 양반의 곁가지인 서얼의 금고에 대해서도 그 부당함을 말하고 있다. 의청소통소(擬請疏通疏)앞에는 하늘이 재주를 내릴 적에 신분에 따라 달리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우리나라에서 서얼을 폐고(廢錮)한 지 3백여 년이 되었는데, 크게 어그러진 정사가 이보다 지나친 것이 없었다고 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기회의 균등을 말한 것이요, 모든 정사 중에 서얼 금고가 가장 잘못된 법임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부계를 중시하는 것이 문벌인데도, 서얼에 있어서만은 모계 위주로 따지고 있는 것은 크나큰 모순이라 했다. 여기서 그는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부당함을 지적했다. 이 밖에도 노비계층을 동정했고 무사계층을 옹호했다.

 

그러나 토지제와 신분제에 있어 그의 견해에 관해 두어 가지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토지제에서 겸병과 독점을 막아야 한다고 했으나, 국가소유의 토지, 곧 궁방전(宮房田, 왕자나 공주에게 딸린 토지)이나 공방전(公房田, 관아에 딸린 토지) 등에 관해서는 지적한 것이 없다. 그리고 대토지 소유의 하나였던 사전(寺田, 절 소유의 토지)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

 

둘째, 신분제에 있어 노비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결여되어 있었다. 노비문제야말로 양반 특권을 배제하고 국가의 재정과 군역에 있어 가장 당면한 중요과제였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농업중심사회였다. 역대로 국가에서 농업을 가장 장려했고 농업 생산품이 바로 국가의 부가 되고 재정의 중심이 되었다. 이 때문에 농업을 권장하는 왕의 윤음(綸音)이 때마다 반포되었고, 수령들이 해야 할 칠사 중에 농상(農桑)이 첫 자리를 차지했다. 그야말로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의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짙게 깔려 있었다. 농사의 수확은 토지에 따라 한정되었던 탓으로, 조정이나 목민관은 언제나 검약을 내세웠다.

 

특히 18세기 중농주의를 제창한 경세치용학파(經世致用學派)에 속하는 실학자, 그 중에서도 성호 이익은 부국강병과 민생의 윤택을 위해서 검약을 제일의 방법으로 내세웠다. 그는 하루 한 끼를 먹고 견뎌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따라서 농업중심사상은 상공업을 말리(末利)로 보아 천시했다. 이것은 중국에서도 그러했지만 우리나라가 더욱 심했다.

 

그러나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에 속하는 실학자, 그 중에서도 박지원, 박제가는 상업과 공업의 발달이 있어야 부국과 민부(民富)가 이룩된다고 주장했다. 곧 명농(明農) · 통상(通商) · 혜공(惠工)으로 균형 있는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주장을 이용후생이라 했는데, 사물을 잘 써서[利用] 삶을 풍요하게[厚生]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농업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농업을 기초로 해 유통과 교역, 기술 개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이우성은 이렇게 쓰고 있다.

 

농업주의 운운해······농민의 생활은 경전이식(耕田而食)하고 직포이의(織布而衣)하면 될 뿐이며, 화폐의 유통조차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에 반해 상인 · 수공업자들은 이윤의 추구와 아울러 더욱 자기 신장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진작 그것을 이해하고 지지한 것이 연암 그룹이었다. 연암 그룹은 평소 그들의 견해도 그러했거니와 중국여행을 통해 당시 중국인의 물질생활, 특히 부유한 생활수준과 조리 있는 생활양식을 목격한 후에 더욱 각성된 바가 많았던 것이다.

- 한국의 역사상》 〈실학파의 문학과 사회관

 

북학파의 대표적 문사

 

상공업세력은 17세기 후반부터 국가의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크게 신장했다. 다만 정조의 통공(通共)정책이 실행되어 상인과 장인의 활동을 넓혀 주었을 뿐이다. 그들은 지역 간의 교역, 시장경제의 확대, 가내수공업에서 상품수공업으로의 전환을 도모했다. 이것은 특산물의 교환이나 특정지역에 모자라는 상품을 공급하는 효용성이 있었던 탓이다. 이런 현실 조건을 박지원 일파는 민감하게 파악하고, 도시적 분위기 속에서 사무역(私貿易)과 사공업(私工業)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에 왕래하면서 실질적인 생활태도와 산업규모를 목격하고 그것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존명배청의 정책을 내걸어 의례적으로만 청나라에 굽실거렸고, 내면으로는 오랑캐라고 얕보아 그들의 문물을 배우려 하지 않았다. 이에 박지원 일파는 이런 조정의 정책에 반대해 청의 문물을 도입해야 한다는 이론을 편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주장을 책으로 펴냈다. 홍대용의 담헌설총(湛軒說叢),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등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북학파라고 불렀다. 부르기는 달리했을지언정 그 뜻에 있어서는 이용후생이나 북학이 같다.

 

박지원의 생에 있어서 후반기는 현실참여를 통해 개혁을 이룩하려는 의지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는 쉰 살이 넘어 벼슬살이에 나와 마지막으로 양양부사를 지냈다. 양양부사로 1년도 채 복무하지 못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사직했다. 몸은 비대했고 눈은 사물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김씨 문벌정치 아래의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의 개혁사상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바쁜 벼슬살이에서 그의 사상적 체계를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만년에는 붓끝이 흐려져 있어서 개량적 · 타협적 수준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따져 박지원을 북학파의 대표적인 문사 또는 실학사상가로 꼽고 있다.

 

그의 묘소는 장단의 송서면 대세현 언덕바지에 있었으나 현재 북한 땅이어서 그 형편을 제대로 알 길이 없다.

 

 

출처

이이화의 인물한국사 | 이이화 | 주니어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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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학년도 고3 6월 모의고사 문제로 점검하기

 

[42~45]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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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람마다 이 말삼 드러사라

  이 말삼 아니면 사람이라도 사람 아니니
  이 말삼 잇디 말고 배우고야 마로리이다          <제1수>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부모(父母)곧 아니시면 내 몸이 업실랏다
  이 덕(德)을 갚흐려 하니 하늘 가이 업스샷다    <제2수>

 

  종과 주인과를 뉘라셔 삼기신고
  벌과   개미가 이 뜻을 몬져 아니
  한 마암애 두 뜻 업시 속이지나 마옵사이다      <제3수>

 

  지아비   밭 갈라 간 데 밥고리 이고 가
  반상을 들오되 눈썹에 마초이다
  진실로 고마오시니 손이시나 다르실가 <제4수>

 

  형님 자신 젖을 내 조처 먹나이다

  어와 우리 아우야 어마님 너 사랑이야
  형제(兄弟)가 불화(不和)하면 개돼지라 하리라    <제5수>

 

 

  늙은이는 부모 같고 어른은 형   같으니
  같은데 불공(不恭)하면 어디가 다를고
  나이가 많으시거든 절하고야 마로리이다 <제6수>
                                                                                                                                                 - 주세붕, 「오륜가」-

 

 

(나)
 나는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기 때문에 간혹 남의 말을 빌려 서 탔다. 그런데 노둔하고 야윈  말을 얻었을 경우에는 일 이 아 무리 급해도 감히 채찍을 대지 못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넘어질 것처럼  전전긍긍하기 일쑤요,  개천이나 도랑이라도 만나면 또 말에서 내리곤 한다.  그래서 후회하는 일이 거의 없다.  반면에 발굽이 높고 귀가 쫑긋하며 잘 달리는 준마를 얻었을 경우에는  의기양양하여 방자하게 채찍을 갈기기도 하고 고 삐를 놓기도 하면서 언덕과 골짜기를 모두 평지로 간주한 채 매우 유쾌하게 질주하곤 한다.  그러나 간혹 위험하게 말에서 떨어지는 환란을 면하지 못한다.

 아,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달라지고 뒤 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남의 물건을 빌려서 잠깐 동안 쓸 때 에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진짜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남에게 빌리 지 않은 것이 또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임금은 백성으로부터 힘을 빌려서 존귀하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요, 신하는 임금으로 부터 권세를 빌려서 총애를 받고 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식은 어버이에게서, 지어미는 지아비에게서, 비복(婢僕) 은 주인에게서 각각 빌리는 것이 또한 심하고도 많은데,   대부분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만 할 뿐 끝내 돌이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어찌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다가 혹 잠깐 사이에 그동안 빌렸던 것을 돌려주는 일 이 생기게 되면,  만방(萬邦)의  임금도  독부(獨夫)가 되고 백승 (百乘)의 대부(大夫)도 고신(孤臣)이 되는 법인데, 더군다나 미 천한 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오래도록 차용하고서 반환하지 않았으니,  그들이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접하고서 느껴지는 바가 있기에, 「차마설」을 지어서 그 뜻을 부연해 보노라.
                                                                                                                                                               - 이곡, 「차마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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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가), (나)의 공통점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영탄적 표현을 통해 대상의 속성을 예찬하고 있다.
②  상반된 세계관이 대구의 형식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③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담고 있다.
④  삶의 태도에 대한 경계와 권고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⑤  이상향에 대한 의식을 역설적 표현을 통해 진술하고 있다.

 

 

43. (가), (나)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가)는 관념적 덕목을 열거하여 각각이 지닌 모순점을 밝히고 있다.
② (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는 삶의 모습을 옹호 하며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③ (나)는 개인적 체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사회적 차원으로 일반화 하고 있다.
④ (나)는 인물의 내면 심리를 형상화하여 욕망의 실현을 돕는 자연적 질서에 대한 경이감을 표출하고 있다.
⑤ (가)와  (나)는 모두 자연물이 지닌 덕성을 부각하여 인간적 삶에 대한 긍지를 드러내고 있다.

 

 

45. (나)의 ‘나’에 대한 이해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나’는  ‘노둔하고 야윈 말’을 빌리는 경우  ‘전전긍긍’하다가 위험에 처하기 때문에 후회하게 된다고 여기고 있다.
②‘나’는  ‘준마’를 빌려 탈 때의  ‘의기양양’한 감정이 그것을 소유할 때에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③‘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 천한 사람들을 ‘미혹’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④‘나’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권력이 빌린 것임을 돌아보는 ‘임금’의 모습을 ‘독부’로 표현하고 있다.
⑤‘나’는  ‘맹자’의  ‘이 말’에서, 빌린 것을 소유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떠올리고 있다. 

 

44.     <보기>를 바탕으로  (가)를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3점]
<보  기>---------------------------------------------------------------------------------------------------------------------------------------------------
교훈적 내용의 시조에는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몇 가지 특징적인 표현 전략이 있다.  우선 윤리적 덕목을 실천해야 하는 인물을 화자로 설정하여 대화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비유나 상징,  유추,  다른 인물이나 사물과의 대비 등을 통해 화자가 개인 윤리는 물론 가정과 사회의 윤리를 실천하는 주체로서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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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제3수>에서는  ‘벌과 개미’의 생태로부터 윤리적 실천의 주체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유추하고 있다.
②<제4수>에서는 화자로 내세운  ‘지아비’와 지어미의 문답 방식을 통해 아내가 추구해야 할 윤리적 가치를 정당화하고 있다.
③<제5수>에서 어머니의  ‘젖’은 어머니의 사랑을 상징하는 표현으로서,  ‘형님’과 ‘아우’가 이를 화제로 삼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④<제5수>의  ‘개돼지’는  <제1수>의  ‘사람이라도 사람 아니니’의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화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따르는 윤리적 주체와 대비되고 있다.
⑤<제6수>에서 ‘부모’와 ‘형’은,  <제2수>의 ‘부모’와 <제5수>의 ‘형님’과는 달리,  ‘늙은이’와 ‘어른’에 빗대어져 쓰임으로써 사회 윤리가 가정 윤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45.     (나)의 ‘나’에 대한 이해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나’는  ‘노둔하고 야윈 말’을 빌리는 경우  ‘전전긍긍’하다가 위험에 처하기 때문에 후회하게 된다고 여기고 있다.
② ‘나’는  ‘준마’를 빌려 탈 때의  ‘의기양양’한 감정이 그것을 소유할 때에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③ ‘나’는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 천한 사람들을 ‘미혹’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④ ‘나’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권력이 빌린 것임을 돌아보는 ‘임금’의 모습을 ‘독부’로 표현하고 있다.
⑤ ‘나’는  ‘맹자’의  ‘이 말’에서, 빌린 것을 소유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떠올리고 있다.

 

 

정답

더보기

42. ④  43. ③  44. ②  45. ⑤ 

 

정약용

 

정약용(丁若鏞, 1762 1836)은 조선 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한 사상가자이자 학자이면서 또한 문학가이기도 하다. 그의 학문의 영역은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문학, 철학, 의학, 군사, 자연과학, 교육 등 거의 모든 부분에 걸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누적되어 있던 왕조의 질서와 사회제도 및 법률, 그리고 유교 이념의 모순이 폭발하여 국가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아울러 동요하고 있는 조선 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새로운 질서와 제도들이 요청되는 시기였다. 정약용은 젊은 시절에는 정치의 중앙무대에서 정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으며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그러나 40세부터 무려 18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유배 시절의 대부부을 경전 연구와 집필을 통하여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57세 때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와 75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더 이상 중앙무대에 나아가지 않고 저술 활동에만 몰두하였다. 이로 미루어 벼슬길에 나선 10여 년을 제외하면 그의 전 생애는 집필을 통해 우리 민족사에 커다란 기여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2. 정약용의 생애

 

정약용의 자는 미용(美庸)이요, 호는 사암(俟菴)다산(茶山)자하도인(紫霞道人)이고, 본관은 나주이다. 그의 부친은 진주목사 재원(載遠)이며 모친은 해남 윤씨로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1726년 광주군(廣州郡) 초부방 마재리(지금의 남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소내는 다산이 75세의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10여 년의 벼슬살이와 18년의 귀양살이 기간을 제외한 40여 년 동안을 머물러 살았던 곳으로, 그에게 제1의 정신적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8년간 귀양살이를 했던 강진의 다산초당은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을 만큼 중요한 정신적 고향이었다. 원래 다산의 선조는 조선 초에 서울에 살면서 8대에 걸쳐 과거 급제자를 내었으나, 그의 고조 도태가 당쟁을 피하여 경기도의 마재로 이사한 후 그곳 소내에 사는 동안 조부까지 3대가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가 부친인 재원에 이르러서야 음사(蔭仕)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다.

 

한강변에 있는 마재의 소내는 한국 천주교 초창기에 이름을 날렸던 인물들과도 관계가 깊다. 이는 다산의 집안이 당시 천주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맏형 정약현(丁若鉉)은 천주교 보급에 앞장섰던 이벽(李蘗)의 매부이며, 황사영(黃嗣永)의 장인이기도 하다. 황사영은 약현이 사위로서 청나라인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부터 신유옥사(辛酉獄事)까지의 교세 및 박해 상황을 북경에 알리려다 발각된 소위 황사영 백서사건의 장본인이다.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은 병조좌랑의 벼슬을 지내다 은퇴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한 학자로 천주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옥사 때에 연좌되어 전라도 신지도(薪智島)로 귀양 갔으며, 다시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흑산도에 이배되었는데 끝내 그곳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막내 형인 정약종(丁若鍾)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전교회장(傳敎會長)으로 신유옥사 때 참수되었다. 특히 약종의 큰아들 철상은 아버지와 같이 죽었으며, 약종의 부인 유소사와 아들 하상, 그리고 딸 정정혜는 1839년의 기해(己亥)옥사 때 죽임을 당했다. 이 때 순교한 이들 세 가족은 1984년에 천주교의 성인으로 부여된 우리나라 103위 가운데 한 분들이다. 또한 다산의 누이와 결혼한 이승훈(李承薰)은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갔다가 그곳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1783년에 천주교 영세를 받아 다음해에 귀국하였다. 그는 명동에 최초의 교회를 세워 포교활동을 하였는데, 1801년 신유옥사 때 참수당하였다.

 

다산 역시 이러한 집안의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 중대한 전한점을 제공하였고 아울러 그에게 커다란 시련을 겪게 하였다. 그는 23세 때 큰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서울로 오던 두미협의 배 안에서 이벽(李蘗)을 통하여 둘째 형 약전과 함께 처음으로 서교(西敎)에 대하여 듣고 한 권의 책을 읽어보게 되어다. 정약용이 훗날 쓴 글에 의하면 그는 천주교를 알게 된 뒤 상당히 관심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과거공부에 열중한데다가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는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15(1776) 되던 해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남인계 풍산(豐山) 홍화보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의 결혼은 자신의 일생에 아주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것은 이 해에 영조의 뒤를 이러 정조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정조는 등극하자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옹호했던 남인계의 시파(時派) 인물들을 다시 등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남인계였던 다산의 아버지도 음사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리고 정약용도 21세에는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 근처에 형제들과 함께 머무르면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22세 때 비로소 소과(小科)에 합격하였고, 태학(太學)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28(1789)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은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거나 수원성을 설계하고 기중기를 만들어 성을 쌓는 일에 공을 세웠다. 33세에는 경기도 암행어사의 직책을 맡게 되면서 조선 말기 사회상과 백성의 어려운 삶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정약용을 시기하는 무리들은 그를 천주교 신자라고 몰아붙여 그의 벼슬살이를 마감하게 만든다. 남인의 시파는 다시 천주교에 우호적인 신서파(信西派)와 이를 비판하는 공서파(攻西派)로 나뉜다. 그런데 1795년 청나라 주문모 신부가 체포되고 둘째 형 약전이 연좌되면서, 정약용은 천주교 신자라는 공서파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정조는 이에 다산을 충청도의 호우목의 금정도찰방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 뒤 정조는 정약용을 다시 동부승지로 불러앉혔으나 공서파의 맹렬한 비방에 왕도 어쩔 수 없이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하여 2년 동안 있게 하였다. 곡산에 가기 전 정약용은 천주교와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왕에게 자세히 아뢰었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내직에 있다가 형조참의를 마지막으로 11년 동안의 벼슬살이를 그만두었다.

 

39세인 1800년 봄에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마재의 소내로 돌아왔다. 그러던 중 그를 총애하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 뒤를 이어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벽파(辟派)에 속하던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공서파는 신서파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찾다가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신유옥사이다. 이 옥사로 다산의 셋째 형 약종은 죽임을 당했고, 둘째 형 약전은 신지도로, 그리고 다사은 장기현(지금의 경북 영일군 장기면)으로 유배되었다. 게다가 유배된 그 해 가을에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났다. 황사영이 북경의 주교 구베아에게 신유옥사의 일을 알리기 위하여 비단에 박해의 전말과 그 대책을 기록하여 몰래 전하려다가 관원에게 발각된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는 천주교의 탄압을 더 한층 엄하게 하였다. 결국 다산과 약종은 이 사건 뒤에 서우로 압송되어 다시 천죽 관계를 문초받았다. 그러나 혐의가 없던 다산은 다시 강진으로 귀양 보내졌고, 그의 형 약전은 머나먼 흑산도로 보내졌다. 그리고 약전은 다시는 육지를 밟아보지 못한 채 1816년에 고향과 귀양간 동생을 그리워하다 그곳에서 죽었다.

 

따로 이은 주막집 새벽 등잔불이 어스름해

잠자리 일어나 샛별 바라보니 이별할 일 암담하다.

그리운 정 가슴에 품은 채 묵묵히 두 사람 말이 없네

억지로 말을 꺼내니 목이 메어 눈물나네. -율정별(栗亭別)

 

정약용과 형 약전은 함께 유배지로 가다가 나주 북쪽 5리쯤에 있는 율정 주막에 이르렀다. 율정은 목포와 해남으로 갈리는 삼거리에 있었다. 이제 하룻밤을 묵고 나면 기약없이 헤어져야 했다. 112일 형과 동생은 목인 메인 채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 뒤 형은 불귀의 혼이 되어 다시 그곳을 지나갔고 다산도 형이 죽은 3년 뒤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산이 유배지 강진의 동문 밖 주막에 도착하여 귀양살이를 시작할 때는 사람들이 그를 만나주지도 않고 피했다고 한다. 그는 그 주막을 생각과 용모, 언어와 행동 이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한다는 뜻으로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짓고는 두문불출하였다. 그곳에서 술집 노파의 도움을 받으면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게 되었다.

 

4년 뒤인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뒷산인 보은산방의 고성암으로 거처를 옮겨 주역의 연구에 몰두하였고, 다시 이듬해에는 읍내에 살던 제자인 이청의 집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기를 찾아와 배움을 구한 황상(黃裳), 이청 등을 제자로 삼아 학문을 가르쳤다. 그들은 다산이 어려울 때 몰래 도우면서 학문을 익혀 큰 학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신계의 일원으로 참여하였으며 다산이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해마다 햇차를 스승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다신계는 다산이 귀양에서 풀려나자 18명의 제자와 강진에 있는 여섯 제자를 모아 만든 일종의 학문 토론 모임이다.

 

1808년에는 강진현 남쪽 만덕산 서쪽에 있던 처사(處士) 윤단의 산정(山亭)으로 옮겨 살았다. 그곳이 바로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지금의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 마을 뒷산에 위치한다. 그는 산의 이름을 호로 삼아 다산(茶山)’이라 하였는데, 그곳의 좌우에 동암(東庵)과 서암(西庵)을 지은 뒤 동암에 1천여 권의 책을 두었다. 지금의 다산 초당은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7년에 기와집으로 복원한 것이며, 동암과 서암은 1974년에 복원되었는데 이때 새로이 천일각이 지어졌다.

 

다산초당에 거처하도록 도와준 윤단은 원래 해남 윤씨로 다산의 외가 쪽 사람이었다. 다산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그녀는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공재가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니, 다산에게 귤동 마을의 해남 윤씨들은 외가 친척들인 셈이다. 윤단의 아들들인 윤문거(尹文擧) 삼형제는 정약용을 다산으로 초빙하였고, 그들의 아들과 조카들은 다산으로부터 글을 배웠따. 그와 함께 다산은 초당으로 옮긴 이후로는 해남 연동리에 있는 외가에서 그들의 도움으로 많은 책을 빌려 볼 수 ㅇㅆ었다.

 

다산은 초당의 천일각 옆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근처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종종 찾아가 혜장선사(惠藏禪師, 1772-1811)와 교류하였다. 혜장은 다산이 강진 읍내의 주막집인 사의재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로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다산은 그에게 차()를 배웠다. 다산이 유배 초기에 거처를 사의재에서 보은산방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도 혜장선사의 덕이었다고 한다.

 

다산은 또한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도 교류하였다. 23세나 위인 다산은 그를 제자로 삼아 유학을 가르치며 훈계하였다. 초의선사는 시문과 서화에도 능통한 승려로, 다도(茶道)에 일가견을 이루었다. 다산은 유배지 근처 만덕산의 백련사와 해남 대둔산의 대흥사 승려들과도 교류하였다.

 

57세인 1818년 봄에 목민심서를 완성하였는데 이 해 8월 여름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리고는 92일 강진의 다산을 떠나 914일 처자식이 있는 고향 땅 소내로 돌아왔다.

 

그 후 다산은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여생을 고향 땅 처자식들 곁에서 편안히 보내다가 1836년에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3. 다산의 문학 세계

 

. 자주적 조선시의 선언

 

다산은 시에 대하여 시가 성정(性情)을 도야하는데 중요하다고 보면서 그것이 사람의 깨끗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다산이 말하는 참된 시란 인간의 기본적인 윤리를 옹호하고, 어지러운 사회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가 도에 근본을 둔 인륜시와 날카로운 사회비판의 사회시를 많이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악에 대한 풍자와 고발을 통하여 사회를 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은 젊은 시절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백성들의 현실에 눈을 뜨면서 강해졌다. 그리고 유배지 강진에서 백성들의 참혹한 삶과 함께하면서 이러한 의식들은 시로 형상화되었다.

 

다산의 문학론에서 중요한 것은 자주적 조선시를 선언한 주체적 문학정신이다.

 

노인의 즐거운 일 하나는

붓 가는 대로 마음껏 시를 쓰는 것.

어려운 운자에 신경 안 쓰고

고치고 다듬느라 늦지도 않네.

흥이 나면 뜻을 싣고

뜻이 이루어지면 바로 시를 쓰네.

나는 조선 사람이기에

즐거이 조선시를 쓴다.

그대들은 마땅히 그대의 법을 따르면 되지

시 짓는 법이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가 눈군가.

까다로운 중국시의 격과 율을

먼 곳의 우리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하략)

 

-노인일쾌사6수 효향산체(老人一快事六首效香山體)

 

71세인 다산이 지은 시로, “조선인의 기호와 성정에 일치되는 조선시를 써야만 참다운 시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문학의 주체성과 자아확립을 주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한자로 시를 쓰면 온전한 우리의 감흥을 드러낼 수 없다는 퇴계 이황이나 서포 김만중의 생각과 일치한다. 이러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다산은 일찍부터 시를 지을 때 중국의 고사를 찾아 쓰는 일에서 벗어나 삼국사기나 우리의 고문헌, 그리고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일어난 이야기를 소재로 쓸 것을 강조하였다.

 

우리 풍속과 역사 속에서 시적 소재를 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다산의 선배들인 성호 이익이나 연암 박지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양반 자제들이 조선의 고사를 모르면서 유독 중국의 것만을 선호하는 풍조를 비판하면서, 우리나라 선배들의 문헌을 직접 읽으라고 권장하기까지 하였다. 그가 아들에게 읽기를 권한 필독서를 보면 역사, 지리서, 문집류 외에도 야사(野史), 의학서, 농학서, 상소문 등도 눈에 띈다.

 

실제로 다산의 시 중에서 악부시(樂府詩)는 조선의 역사와 풍속, 현실을 소재로 삼았으며, 조선의 고유한 언어를 한시의 언어로 활용하고 있다. 유배지에서 지어져 서울에까지 널리 알려진 탐진악부는 민요적 취향이 드러나고 우리말이 시어로 잘 활용되고 있다. 특히 그는 현지의 토속적 방언을 그대로 시어로 쓰고 있는데, ‘麥嶺’(보릿고개), ‘兒哥’(아가:새색시), ‘馬兒風’(마파람), ‘絡蹄(락제)’(낙지) 등은 한자어로 되어 있지만 우리말의 음에 따라 바꾸어 놓은 것이다.

 

. 사회 비판의 시들

 

다산은 자신이 살았던 조선 후기 당대의 제반 모순을, 단순히 관념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제 현실 생활 속에서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는 당쟁의 치열함, 인재 선발의 폐해와 부조리, 三政의 문란 등을 비판적으로 고발하고 있다.

 

당쟁의 화는 오래도록 그치지 않으니

이런 일은 참으로 통곡할 만하다. (....)

다투는 기운이 맑은 하늘을 가리고

티끌만한 일로도 살육을 일삼으니,

새끼 양은 죽어도 소리 한 번 못 치는데

승냥이와 호랑이는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뜬다.

높은 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갈고

낮은 자는 화살촉을 갈고 있네.

누가 있어 큰 잔치 베풀어

화려한 집에 휘장을 치고,

천 동이의 술을 담고,

만 마리 소를 잡아 안주 만들어,

옛 감정 풀고 함께 맹세하여

복과 평화 오기를 기약할 건가. -고시27

 

다산이 경상도 장기 유배지에서 쓴 시로 망국적인 당파싸움을 비판하면서 누군가 나서서 묵은 감정을 풀어 태평한 세월이 오기를 갈구하고 있다.

 

가마 메는 너나 타는 나는 본래 한 동포

하느님으로부터 형등함을 받았네.

너희들은 어리석게 이런 일 달게 여기니

내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

가마 메는 중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요,

가마만 메야 하는 백성들은 가련하구나.

큰 깃대 앞세우고 쌍마교 나타나서

촌마을 사람들 모조리 동원하니,

닭처럼 내몰고 개처럼 부리면서

소리치고 꾸중하기 범보다 더 심하네 (.....)

기진하여 논밭에 돌아오면

지친 몸 신음소리 실낱 같네.

가마 메는 그림을 그려서

돌아가 어진 임금에게 바치고 싶네.

- ‘견여탄의 뒷부분

 

이 시는 다산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71세에 쓴 시로 관리들이 명산에 유람 오면 승려들이 그들을 가마에 태우고 험한 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고통을 그리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나은 편이며 백성들은 더욱 더 고통스러워한다고 곱ㄹ하고 있다. 어진 임금에게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알리고자 하는 마음에는, 돌아가신 정조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어진 임금이 없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이다.

 

잘 자라던 내 모를

내 손으로 뽑아야 하다니.

무성하게 자라던 내 모를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다니.

잘 자라던 내모를

잡초처럼 뽑다니.(....)

나에겐 아들 셋이 있어

젖 먹고 밥 먹고 있으니

아들 하나 제물로 바쳐서

이 어린 모를 살렸으며.

- 발묘(拔苗)

 

못자리의 모를 가뭄 때문에 심지 못하고 대신 다른 것을 심기 위하여 모를 뽑는 농부의 심정을 그리고 있다. 어떤 부인은 하도 원통하여 아들 하나를 바쳐서라도 비를 오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다산이 유배지에서 본 가뭄의 참상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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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오재기(守吾齋記)(정약용)

 

수오재(守吾齋), 즉 ‘나를 지키는 집’은 큰형님이 자신의 서재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 그 이름을 보고 의아하게 여기며, “나와 단단히 맺어져 서로 떠날 수 없기로는 ‘나’보다 더한 게 없다. 비록 지키지 않는다 한들 ‘나’가 어디로 갈 것인가. 이상한 이름이다.”라고 생각했다.

기 - ‘수오재’라는 이름에 대한 의문

 

장기로 귀양 온 이후 나는 홀로 지내며 생각이 깊어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환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 만물 중에 지켜야 할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내 밭을 지고 도망갈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 집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동산의 꽃나무와 과실나무들을 뽑아 갈 수 있겠는가? 나무뿌리는 땅속 깊이 박혀 있다. 내 책을 훔쳐 가서 없애 버릴 수 있겠는가? 성현(聖賢)의 경전은 세상에 널리 퍼져 물과 불처럼 흔한데 누가 능히 없앨 수 있겠는가. 내 옷과 양식을 도둑질하여 나를 궁색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천하의 실이 모두 내 옷이 될 수 있고, 천하의 곡식이 모두 내 양식이 될 수 있다. 도둑이 비록 훔쳐 간다 한들 하나둘에 불과할 터, 천하의 모든 옷과 곡식을 다 없앨 수는 없다. 따라서 천하 만물 중에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유독 이 ‘나’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며 출입이 무상하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지만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유혹하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앙으로 겁을 주면 떠나가며, 질탕한 음악 소리만 들어도 떠나가고, 미인의 예쁜 얼굴과 요염한 자태만 보아도 떠나간다. 그런데 한번 떠나가면 돌아올 줄 몰라 붙잡아 만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천하 만물 중에 잃어버리기 쉬운 것으로는 ‘나’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니 꽁꽁 묶고 자물쇠로 잠가 ‘나’를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승 - ‘나’를 지켜야 하는 까닭

 

나는 ‘나’를 허투루 간수했다가 ‘나’를 잃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는 과거 시험을 좋게 여겨 그 공부에 빠져 있었던 것이 10년이다. 마침내 조정의 벼슬아치가 되어 사모관대에 비단 도포를 입고 백주 도로를 미친 듯 바쁘게 돌아다니며 12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친척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한강을 건너고 문경 새재를 넘어 아득한 바닷가 대나무 숲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야 멈추게 되었다. 이때 ‘나’도 땀을 흘리고 숨을 몰아쉬며 허둥지둥 내 발뒤꿈치를 쫓아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에게 홀려서 왔는가? 바다의 신이 불러서 왔는가? 너의 가족과 이웃이 소내에 있는데, 어째서 그 본고장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멍하니 꼼짝도 않고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안색을 보니 마치 얽매인 게 있어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는 듯했다. 그래서 ‘나’를 붙잡아 함께 머무르게 되었다.

전 - ‘나’를 잃어버렸던 과거에 대한 반성

이 무렵, 내 둘째 형님 또한 그 ‘나’를 잃고 남해의 섬으로 가셨는데, 역시 ‘나’를 붙잡아 함께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유독 내 큰형님만이 ‘나를 잃지 않고 편안하게 수오재에 단정히 앉아 계신다. 본디부터 지키는 바가 있어 ‘나’를 잃지 않으신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큰형님이 자신의 서재 이름을 ‘수오’라고 붙이신 까닭일 것이다. 일찍이 큰형님이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의 자(字)를 태현(太玄)이라고 하셨다. 나는 홀로 나의 태현을 지키려고 서재 이름을 ‘수오’라고 하였다.”

이는 그 이름 지은 뜻을 말씀하신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지키는 것이 큰일인가? 자신을 지키는 것이 큰일이다.”라고 하셨는데, 참되도다, 그 말씀이여!

드디어 내 생각을 써서 큰형님께 보여 드리고 수오재의 기문(記文)으로 삼는다.

결 -<수오재기>를 쓰게 된 내력

 

 

핵심 정리

[이 작품은] 글쓴이가 큰형 정약현이 집에 붙인 당호(堂號) ‘수오재’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쓴 고전 수필로, 의문으로 시작해서 반성과 사색의 결과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갈래 : 한문 수필, 기(記)
*성격 : 반성적, 회고적, 교훈적, 자경적(自警的)
*제재 : ‘수오재’라는 집의 이름
*주제 : 본질적 자아를 지키는 것의 중요함.
*특징
① 자문자답을 통해 사물의 의미를 도출함.
② 의문에서 출발하여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드러냄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유도함.
*출전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어휘 풀이

*장기(長鬐) : 경상북도 포항시 장기면. 정약용은 신유박해로 인해 그해 3월에서 10월까지 장기에서 유배 생활을 했음.
*사모관대(紗帽冠帶) : 예전에, 벼슬아치가 입던 옷과 모자.
*도포(道袍) : 예전에, 통상 예복으로 입던 남자의 겉옷.
*새재 : 문경(聞慶)새재. 경상북도 문경시와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에 있는 고개.

 

이해와 감상

‘수오재기’는 ‘나를 지키는 집’이라는 당호(堂號)에 의문을 제기하여 글쓴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담아낸 글이다.
글쓴이는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나’와 ‘또 하나의 나’를 구분하여 현상적 자아에 대비되는 본질적 자아의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 본질적 자아라고 할 수 있는 ‘나’는 간직하고 지켜 내야 할 자아의 내면이고, 내가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고 미혹에 빠지려고 할 때 중심을 잡아 줄 수 있는 든든한 기둥과 같은 것이다. 글쓴이는 본질적 자아, 즉 내면적 자아를 유지할 때 비로소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거나 유혹당하지 않게 된다는 깨달음을 통해 큰형님이 ‘수오재’라는 이름을 지은 속뜻을 알게 되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글쓴이가 귀양지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고 ‘나’의 모습을 살펴본다는 내용은 반성과 성찰의 행위를 보여 주는 이 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연구실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본 ‘수오재기’의 구성

 

‘수오(守吾)’의 의미

글쓴이는 과거 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른 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미친 듯이’ 다니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본질적인 ‘나’는 사라지고 귀양을 가는 처지에 이르렀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과거는 결국 현상적인 자아에 매몰되어 본질적인 자아를 잃어버린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를 지킨다.’ 라는 말은 나의 본성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함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오재기’의 주제 형상화 방식

‘수오재기’는 ‘나를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러한 주제를 구현하기 위해 글쓴이는 ‘나를 지킨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는 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독자와 자신이 유사한 상황에 있음을 제시하는 공감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의문 제기 뒤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를 지킨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음을 밝히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주제를 드러내어 독자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다.

 

‘수오재기’의 양식적 특징

‘수오재기’는 전통적인 한문 문학 양식의 하나인 ‘기(記)’에 해당한다. 기(記)란 어떤 사건이나 경험을 하게 된 과정을 기록하는 것으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교훈이나 깨달음을 제시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글 역시 ‘수오재’라는 이름에 대한 사연을 적고, 그에 따른 자신의 깨달음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記)’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소개 - 정약용(丁若鏞, 1762 ~ 1836)

조선 후기의 학자로 호는 다산(茶山), 여유당(與猶堂)이다.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여 발전시켰고, 민족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 낸 작품을 남겼다. 한국의 역사 · 지리 등에도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했다. 주요 저서로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이 있다.

 
출처 : 천재교육
 

 (記)

기(記) - 사물을 객관적인 관찰과 동시에 기록하여 영구히 잊지 않고 기념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두는 글이다. 

설(說) - 이치에 따라서 사물을 해석하고 자신의 의견을 서술하는 한문문체. 설체는 ‘설’의 자의(글자의 뜻)가 말하듯이 해석과 서술을 주로 하는 문체이다. 다시 말하여 설체는 의리(뜻과 이치)를 해설하는 자기의 의사를 가지고, 종횡억양(縱橫抑揚: 자유스럽고 분망하게 글을 짓는 것을 이름.)을 가하여 좀더 상세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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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학의 본질

(1) 문학의 미적 기능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문학󰡕 3, 1934.4)

 

* 모란[牡丹] : 미나리아재비과의 낙엽 활엽 관목.(본음은 목단’)

* 하냥 : 한결같이, 줄곧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미적 대상, 화자의 소망-‘, 보람과 의미가 통함)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것임)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1~2 : 모란이 피기를 기다림

모란이 뚝뚝(음성상징어를 통해 절망감, 상실감을 효과적으로 표현)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모란이 떨어진 데 대한 슬픔, 삶의 보람과 의미를 잃음)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봄의 막바지- 봄의 상실 )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피었을 때의 보람을 잃고 화자의 소망도 무너짐)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모란이 화자의 전부임(과장법))

삼백예순 날(서러운 정감의 깊이 )하냥(, 항상) 섭섭해 우옵네다

                                                                                                    3~8 : 모란이 진 후의 슬픔과 절망감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숙명적 기다림) 찬란한 슬픔의 봄을(관념의 시각화, 역설법 )

                                                                                                                        11~12 : 모란이 다시 피기를 기다림

 

핵심 정리

 

1. 갈래 : 자유시, 서정시

2. 성격 : 낭만적, 유미적, 상징적

3. 어조 : 여성적 어조

4. 표현 :

 역설적 표현

 ()의 소월, ()의 영랑으로 일컬어지듯이 북도의 투박한 사투리로 씌어진 소월의 독특한 가락과는 대조적으로 이 시는 나긋나긋하고 감칠맛 나는 남도 방언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 나긋나긋한 전라도 방언이 시어로 쓰인 것은 영랑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으며, 이는 영랑 시의 본령을 이루고 있다.

5. 구성 :  모란이 피기를 기다림(1-2)

 모란을 잃은 슬픔(3-10)

 모란이 피기를 기다림(11-12)

 

<대칭 구조>
상승(1,2)  하강(3-10)  상승(11,12)
기다림 설움, 절망 기다림

6. 제재 : 모란의 개화

7. 주제 :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림

8.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어떠한 대상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에게 모란은 단순히 하나의 꽃이 아니라,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나 내면적 순결성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화자의 삶은 오로지 모란이 피는 순간만을 지향하며, 그것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의 자세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화자가 맞이한 봄은 지나가야 하는 봄이고, 봄이 지나가면 모란이 피어난 것에 대해 느끼는 환희도 사라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의 봄은 찬란하기만 한 봄이 아니라 슬픔의 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된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모순 형용은 이와 같은 환희와 그 소멸로 인한 슬픔이 한데 섞인 화자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 2023년 수능 특강 문제
 
 
 
[01~04]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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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세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          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              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나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

[22001-0070]

 

01. (가)와 (나)의 공통점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떠나간 대상에 대한 화자의 슬픔을 드러내고 있다.
② 공간의 이동에 따른 화자의 심리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③ 과거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화자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④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한 화자의 체념적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 

⑤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여 화자의 현실 극복 의지를 부각하고 있다.

 

 

[22001-0071]
02. 이미지의 활용을 중심으로 (가)를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푸른 산빛’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깨치고’라는 시어를 통해 부정함으로써 화자가 처한 상 황이 달라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② ‘옛 맹세’의 ‘굳고 빛나든’ 이미지가 ‘차디찬’이라는 이미지로 전환됨으로써 화자와 ‘님’의 관계가 부정적으로 변화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③ ‘향기로운’과 ‘꽃다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활용함으로써 ‘님’에 대한 화자의 예찬적 태 도를 드러내고 있다.
④ ‘새 희망’이라는 관념을 ‘들어부었습니다’에서 연상되는 역동적 이미지로 연결함으로써 현 실에 대응하는 화자의 태도를 형상화하고 있다.
⑤ ‘사랑의 노래’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님의 침묵’이라는 상반된 이미지와 병치함으로써 화 자가 느끼고 있는 회한의 정서를 형상화하고 있다.

 

 

[22001-0072]
03. ㉠~㉤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비유적 표현을 통해 화자가 느낀 허망함을 드러내고 있다.
② ㉡: 반어적 표현을 통해 화자가 처한 절망적 상황을 부각하고 있다.

③ ㉢: 접속어를 활용하여 화자의 인식이 전환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④ ㉣: 음성 상징어를 활용하여 화자가 느끼는 슬픔의 정서를 환기하고 있다.

⑤ ㉤: 의도적으로 어순을 도치시켜 주제 의식을 부각하고 있다.



[22001-0073]
04<보기>를 참고하여, (가)와 (나)를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모두 대립적인 시어와 표현을 통해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가)와 (나)의 화자는 모두 시적 대상으로 인해 촉발된 부정적 상 황에 처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상반된 의미의 시어와 표현을 통해 화자가 경험하고 있는 아픔을 형상화하기도 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인식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
① (가)의 화자가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면서도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는 것은 대립적 의미의 표현을 병치하여 상황에 대한 화자의 새로운 인식을 드러낸 것이군.
② (나)의 화자는 ‘모란’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이었던 ‘봄’을 ‘모란’이 지는 슬픔의 계절로 인식 함으로써 화자가 경험하고 있는 부정적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군.
③ (가)의 화자가 ‘염려’하는 행위와 (나)의 화자가 ‘삼백예순 날’ ‘우’는 행위는 모두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려는 화자의 적극적 노력을 형상화한 것이군.
④ (가)의 화자는 ‘슬픔’이 ‘새 희망’으로, (나)의 화자는 ‘내 보람’이 ‘설움’으로 변화하는 경험을 통해 상황에 대한 화자의 인식 전환이 나타나고 있군.
⑤ (가)의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와 (나)의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는 모두 부정적 상황에 대한 화자의 극복 의지가 드러난 것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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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제 : 이 소설은 1930년대에 시도되었던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작으로서, 소설 분야에서 이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형식을 통해 주목을 받았던 작품이다. 소설가 구보는 아무런 목적과 계획 없이 도시를 배회한다. 그의 손에는 노트 한 권이 들려 있는데, 그에게는 자기가 겪은 우연한 일상들을 노트에 적는 것이 유일한 할 일이다. 자신의 생활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그는 눈앞에 펼쳐지는 도시의 일상적 풍경과 군중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고민한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을 통해 일제 강점하에서 돌파구가 없었던 지식인들의 고독과 도시인의 쓸쓸한 내면 풍경을 엿볼 수 있다.

 

2. 갈래중편 소설, 심리 소설, 모더니즘 소설

3. 성격관찰적, 심리적, 묘사적

4. 배경∶① 시간 - 1930년대의 어느 날 공간 - 서울의 거리

5. 시점전지적 작가 시점

6. 주제1930년대 소설가의 눈에 비친 도시의 일상사

 

7.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지식인 소설적 측면

작품의 중심 인물인 소설가 구보 씨는 작가 박태원의 분신으로도 볼 수 있다. 1930년대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져 살아가는 모습을 작가는 소설가 구보 씨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930년대의 시대 상황]

정신적․육체적 질병을 앓고 있는 식민지 시대의 도시인의 모습              황금광 시대 ․ 물질 만능주의 만연

                                                                                                        ↓

                                                                             당시의 세태에 대한 비판적 인식

                                                                                                        ↓

                                                                            1930년대 지식인(구보)의 고뇌

 

 

8. 전체 줄거리

 

 일정한 직업이 없이 글을 쓰며 근근이 살아가는 구보는 정오에 집을 나와 서울 거리를 배회하다가 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불안해 한다. 동대문행 전차 속에서 과거에 선을 본 여자를 발견하고 외면한 것을 후회한다. 고독을 피하기 위해 경성역을 찾아간 구보는 온정을 느낄 수 없는 차가운 사람들만 발견한다. 우연히 중학 시절 열등생이었던 동창이 예쁜 여자와 동행인 것을 보고 물질에 약한 여자의 허영심에 대해 생각한다. 다방에서 사회부 기자인 친구를 만나, 그가 돈 때문에 기사를 써야 한다는 사실에 연민을 느낀다. 친구와 술을 마시며 세상 사람을 정신병자로 규정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새벽 두 시 경,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서 이제는 어머니를 위해 결혼도 하고 창작에 전념할 것을 다짐하며 집으로 향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소설의 일반적인 구성 방식을 따르지 않고 외출에서 귀가까지 서술자의 관찰과 심리 위주로 서술하고 있다.

 

9. 인물

 

구보26세의 미혼인 소설가로 작가의 분신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다. 무능력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갖고 있지만, 지적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속물로 치부하기도 한다.

어머니무능력한 아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구보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기를 갈망한다.

친구구보와 같은 지식인으로 구보의 생각에 동조하는 인물이다.

 

10.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서술상의 특징

이 작품은 소설가 구보가 정오에 집을 나와 새벽 2시경에 귀가하기가지의 하루 동안의 여정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그 경로는 서울 거리전차 안다방경성역 대합실다방서울 거리술집으로 그려지며 작중 화자의 관찰 내용과 심리가 서술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동 경로에 따라 구보의 다양한 사고가 전개되는데 장소와 사고의 필연적 연관성은 발견하기 어렵다. 즉 구보가 떠올리는 생각들은 필연성보다는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기술되고 있는데 이는 모더니즘의 몽타주 기법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눈앞에 벌어진 장면을 노트에 적고 그것을 그대로 소설화하는 작가 특유의 창작 방법을 보여 주고 있다. 작가는 이를 고현학(考現學)’이라고 불렀는데, 이를 통해 소설을 쓰는 과정 자체를 소설의 주요 내용으로 삼게 된다.

 

11. 인물 분석 - ‘구보 씨

지식인 구보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근대적 지식인이다.
인간 관계 형성의 소극성 연인 관계의 발전을 거부하는 등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대한 소극적 태도가 두드러진다.
신경 쇠약증 세속적 삶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정신적 피로를 느끼고 있으며, 이는 육체적 고통으로 발전한다.
현실에 대한 부적응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해 경멸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세속적 삶을 거부한다.
세계와 화해 추구하기 한편으로 의식, 무의식으로 세계에 대한 불편한 심리를 거부하며 화해를 꿈꾸게 된다.

 

12.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기법

의식의 흐름은 소설 속 인물의 의식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로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계속 받아들이고 반응하며 연속되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을 소재로 삼는 작가들은 인간의 실존이 외부로 나타난 것에서보다는, 정신과 정서의 연속적인 전개 과정에서 더 잘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의 내적 실존은 외부로 나타나는 것처럼 논리적조직적이지 않고 비논리적이며 파편들이 섞여 연속되어 있으며 이 파편들은 일상 체험의 연속성과 자유 연상 작용 때문에 연속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을 심리주의적 기준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자연히 인상, 회상, 기억, 반성, 사색과 같은 심적 경험이 소설의 주요 제재가 된다.

 

13. 이 작품도 함께 읽어 보자

박태원, ‘천변 풍경청계천 변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세태 소설로, 사람들의 외면 풍경을 마치 카메라로 찍듯이 묘사해 나간 작품이다.

이상, ‘날개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뇌와 자의식 세계를 다룬 소설이며, ‘의식의 흐름기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상당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14. 생각해 볼 문제

이 소설의 주인공은 경성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근대 문명을 경험하고 있다. 주인공의 심리와 의식을 분 석해 보자.

(1) 공간의 이동에 따른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정리해 보자.

  종로 거리 백화점 전차 안
심리 변화 번화한 도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적 피로와 육체적 고통을 느낌. 젊은 부부에 질투를 느끼다가 그들의 행복을 축복해 줌. 과거에 만났던 여자를 발견하고 인사하려고 하다가 결국 하지 못하고 후회함.

 

 

(2) 거리를 배회하는 주인공의 의식이 지닌 특징을 분석해 보고, 이를 그가 처해 있는 현실의 문제적 상황과 연관 지어 해석해 보자.

주인공은 현실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주변부적 존재로 일상적 행복감을 얻지 못한 채 고독감을 느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구보는 작가 자신의 호를 나타낸 것으로, 이를 통해 볼 때, 이른바예술가 주인공 소설또는 사소설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처럼 소설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 웠을 때의 효과는 무엇인지 말해 보자.

 

20세기 초반 일본의 자연주의 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사소설은 작가가 작품 속 주인공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어 서술하는 것이 특징이다. 보통 작가의 내면 깊은 곳에 있던 생각을 일상의 경험 속에서 드러내며 파헤치는 소설 등을 가리킨다.

 

예술가의 내면 의식의 흐름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형식적 새로움에 대해 분석해 보자.

(1) 구성적 측면 :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거리를 배회하는 과정에 우연히 만나는 단편적인 사건과 기억, 의식 등을 파편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2) 시점의 측면 :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인물의 주관적 내면에 의해 제한된 시점이다.

(3) 서술 방식의 측면 :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의식의 흐름과 과거 회상 중심, 현재적 관찰과 판단 유보의 서술로 되어 있다.

 

 

15.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소설가 구보가 하루 동안 서울 거리를 배회하며 느끼는 내면의 식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는데, 서울 거리의 풍물이나 삶들의 모습이 잘 표현되고 있어서 세태 소설적 성격도 갖고 있다.

인물의 내면 의식이 단편적 사실들에 의해 두서없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사건이나 행위, 갈등은 중요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작품에 사용된 의식의 흐름이나 몽타주 기법 등의 모더니즘 소설 기법들은 연관성 없는 내면 의식을 보여 주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인 소설가 구보의 행동이나 의식의 흐름에는 목적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들어있지 않은데, 이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므로, 지식인 소설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출처 : 2023학년도 수능 특강 문학 + 미래엔 문학 자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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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0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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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는 다시 밖으로 나오며, 자기는 어디 가 행복을 찾을까 생각한다. 발 가는 대로, 그는 어느 틈엔가 안 전지대에 가서서, 자기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의 단장과 또 한 손의 공책과 — 물론 구보는 거기에 서 행복을 찾을 수는 없다.
안전지대 위에, 사람들은 서서 전차를 기다린다. 그들에게, 행복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갈 곳만은 가지고 있었다.
 전차가 왔다. 사람들은 내리고 또 탔다. 구보는 잠깐 머엉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기와 더불어 그곳에 있던 온갖 사람들이 모두 저 차에 오른다 보았을 때, 그는 저 혼자 그곳에 남아 있는 것에, 외로움과 애달픔을 맛본다. 구보는, 움직인 전차에 뛰어올랐다.
㉠전차 안에서
구보는, 우선, 제 자리를 찾지 못한다. 하나 남았던 좌석은 그보다 바로 한 걸음 먼저 차에 오른 젊은 여인 에게 점령당했다. 구보는, 차장대(車掌臺) 가까운 한구석에 가 서서, 자기는 대체, 이 동대문행 차를 어디까 지 타고 가야 할 것인가를, 대체 어느 곳에 행복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이제 이 차는 동대문을 돌아 경성운동장 앞으로 해서…… 구보는, 차장대, 운전대로 향한, 안으로 파아란 융을 받쳐 댄 창을 본다. 전차과(電車課)에서는 그곳에 뉴스를 게시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요사이 축구도 야구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장충단으로, 청량리로, 혹은 성북동으로…… 그러나 요사이 구보는 교외를 즐기지 않는다. 그곳에는, 하 여튼 자연이 있었고, 한적이 있었다. 그리고 고독조차 그곳에는, 준비되어 있었다. 요사이, 구보는 고독을 두려워한다.
일찍이 그는 고독을 사랑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고독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심경의 바른 표현이 못 될 게다. 그는 결코 고독을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도리어 그는 그것을 그지없이 무서워하였는지 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고독과 힘을 겨루어, 결코 그것을 이겨 내지 못하였다. 그런 때, 구보는 차라리 고 독에게 몸을 떠맡기어 버리고, 그리고, 스스로 자기는 고독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꾸며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표, 찍읍쇼— 차장이 그의 앞으로 왔다. 구보는 단장을 왼팔에 걸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그가 그 속에서 다섯 닢의 동전을 골라내었을 때, 차는 종묘 앞에 서고, 그리고 차장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구보는 눈을 떨어뜨려, 손바닥 위의 다섯 닢 동전을 본다. 그것들은 공교롭게도 모두가 뒤집혀 있었다. 대 정 12년. 11년. 11년. 8년. 12년. 대정 54년— 구보는 그 숫자에서 어떤 한 개의 의미를 찾아내려 들었다. 그 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일이었고, 그리고 또 설혹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적어 도 ‘행복’은 아니었을 게다.
(중략)
조그만 한 개의 기쁨을 찾아, 구보는 남대문을 안에서 밖으로 나가 보기로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불어드는 바람도 없이, 양옆에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 서너 명의 지게꾼들의 그 모양이 맥없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눈앞의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 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港口)와 친하여야 한다. 그러나 물론 그러한 직업의식은 어떻든 좋 았다. 다만 구보는 고독을 ㉡삼등 대합실 군중 속에 피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오히려 고독은 그곳에 있었다. 구보가 한옆에 끼어 앉을 수도 없게시리 사람들은 그곳에 빽빽하게 모여 있어도, 그들의 누구에게서도 인간 본래의 온정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네들은 거의 옆의 사람에게 한 마디 말을 건네는 일도 없이, 오직 자기네들 사무에 바빴고, 그리고 간혹 말을 건네도, 그것은 자기네가 타 고 갈 열차의 시각이나 그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네들의 동료가 아닌 사람에게 그네들은 변소에 다녀 올 동안의 그네들 짐을 부탁하는 일조차 없었다. 남을 결코 믿지 않는 그네들의 눈은 보기에 딱하고 또 가엾 었다.
구보는 한구석에 가 서서, 그의 앞에 앉아 있는 노파를 본다. 그는 뉘 집에 드난을 살다가 이제 늙고 또 쇠 잔한 몸을 이끌어, 결코 넉넉하지 못한 어느 시골, 딸네 집이라도 찾아가는지 모른다. 이미 굳어 버린 그의 안면 근육은 어떠한 다행한 일에도 펴질 턱 없고, 그리고 그의 몽롱한 두 눈은 비록 그의 딸의 그지없는 효 양(孝養)을 가지고도 감동시킬 수 없을지 모른다. 노파 옆에 앉은 중년의 시골 신사는 그의 시골서 조그만 백화점을 경영하고 있을 게다. 그의 점포에는 마땅히 주단포목도 있고, 일용 잡화도 있고, 또 흔히 쓰이는 약품도 갖추어 있을 게다. 그는 이제 그의 옆에 놓인 물품을 들고 자랑스러이 차에 오를 게다. 구보는 그 시 골 신사가 노파와 사이에 되도록 간격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를 업신여겼다. 만약 그에게 얕은 지혜와 또 약간의 용기를 주면 그는 삼등 승차권을 주머니 속에 간수하고 일, 이등 대합실에 오 만하게 자리 잡고 앉을 게다.
문득 구보는 그의 얼굴에서 부종(浮腫)을 발견하고 그의 앞을 떠났다. 신장염. 그뿐 아니라, 구보는 자기 자신의 만성 위 확장(胃擴張)을 새삼스러이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구보가 매점 옆에까지 갔었을 때, 그는 그곳에서도 역시 병자를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40여 세의 노동자. 전경부(前頸部)의 광범 한 팽륭(澎隆). 돌출한 안구. 또 손의 경미한 진동. 분명한 바세도씨병. 그것은 누구에게든 결코 깨끗한 느 낌을 주지는 못한다. 그의 좌우에는 좌석이 비어 있어도 사람들은 그곳에 앉으려 들지 않는다. 뿐만 아니 라, 그에게서 두 칸통 떨어진 곳에 있던 아이 업은 젊은 아낙네가 그의 바스켓 속에서 꺼내다 잘못하여 시멘 트 바닥에 떨어뜨린 한 개의 복숭아가 굴러 병자의 발 앞에까지 왔을 때, 여인은 그것을 쫓아와 집기를 단념 하기조차 하였다.
구보는 이 조그만 사건에 문득, 흥미를 느끼고, 그리고 그의 ‘대학 노트’를 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문 옆 에 기대어 섰는 캡 쓰고 린네르 쓰메에리 양복 입은 사내의, 그 온갖 사람에게 의혹을 갖는 두 눈을 발견하 였을 때, 구보는 또다시 우울 속에 그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 박태원,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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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윗글의 서술상 특징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공간의 이동에 따라 변화하는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② 장면에 따라 서술자를 달리하여 사건을 다각도로 전달하고 있다. 

③ 이야기 외부의 서술자가 전지적 시점으로 갈등 상황을 부각하고 있다. 

④ 객관적인 관찰을 바탕으로 과거 사건의 비현실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의 초점을 다양한 인물로 옮겨 가며 사건의 원인을 조명하고 있다.


[22001-0149]
02. ㉠과 ㉡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 것은?
① ㉠과 ㉡ 모두 구보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② ㉠과 ㉡ 모두 구보가 고독을 피하기 위하여 찾아든 공간이다. 

③ ㉠과 ㉡ 모두 구보가 목적 없이 방황하는 군중을 확인하는 공간이다.
④ ㉠은 구보가 과거의 잘못을 성찰하게 하는, ㉡은 구보가 미래의 의지를 다지는 공간이다.
⑤ ㉠은 구보가 배회를 시작하게 되는, ㉡은 구보가 배회를 끝마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하는 공 간이다.

 

 

[22001-0150]
03. <보기>를 참고하여 윗글을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근대화되어 가는 도시 속에서 집단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는 개인의 불안 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구보의 거리 산책은 ‘자기는 어디 가 행복을 찾을까?’라 는 생각에서 출발하는데, 구보의 행복 찾기는 외부의 질서와 조화 속으로 편입되려는 노력이자 자 기반성을 통한 자아 찾기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구보는 도시의 근대적 삶에서 인간 적인 온정을 찾을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고, 이로 인한 불안 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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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저 혼자 그곳에 남아 있’게 되자 ‘움직인 전차에 뛰어’오르는 구보의 행동은 집단으로부터 소외되리라는 불안 의식을 해소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군.
② ‘스스로 자기는 고독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꾸며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라는 구보 의 생각은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자아를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군.
③ ‘거의 옆의 사람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는 일도 없이, 오직 자기네들 사무에 바’쁜 군중의 모 습은 근대화되어 가는 도시에서의 삶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겠군.
④ ‘그의 얼굴에서 부종을 발견’한 후 ‘자신의 만성 위 확장’을 떠올리는 구보의 모습은 외부의 질서와 조화 속으로 편입되는 고통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군.
⑤ ‘병자의 발 앞에까지’ 굴러 온 ‘복숭아’를 집기 단념하는 젊은 아낙네의 모습은 인간적인 온 정을 찾을 수 없음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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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노리 방문수업 청주점입니다.

노리노리 방문수업 청주점입니다.

1. 문학의 본질

(1) 문학의 미적 기능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문학󰡕 3, 1934.4)

 

* 모란[牡丹] : 미나리아재비과의 낙엽 활엽 관목.(본음은 목단’)

* 하냥 : 한결같이, 줄곧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미적 대상, 화자의 소망-‘, 보람과 의미가 통함)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포기하지 않고 기다릴 것임)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1~2: 모란이 피기를 기다림

모란이 뚝뚝(음성상징어를 통해 절망감, 상실감을 효과적으로 표현)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모란이 떨어진 데 대한 슬픔, 삶의 보람과 의미를 잃음)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봄의 막바지- 봄의 상실 )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모란이 피었을 때의 보람을 잃고 화자의 소망도 무너짐)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모란이 화자의 전부임(과장법))

삼백예순 날(서러운 정감의 깊이 )하냥(, 항상) 섭섭해 우옵네다

                                                                                                    3~8: 모란이 진 후의 슬픔과 절망감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숙명적 기다림) 찬란한 슬픔의 봄을(관념의 시각화, 역설법 )

                                                                                                                        11~12: 모란이 다시 피기를 기다림

 

핵심 정리

 

1. 갈래 : 자유시, 서정시

2. 성격 : 낭만적, 유미적, 상징적

3. 어조 : 여성적 어조

4. 표현 :

역설적 표현

()의 소월, ()의 영랑으로 일컬어지듯이 북도의 투박한 사투리로 씌어진 소월의 독특한 가락과는 대조적으로 이 시는 나긋나긋하고 감칠맛 나는 남도 방언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 나긋나긋한 전라도 방언이 시어로 쓰인 것은 영랑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으며, 이는 영랑 시의 본령을 이루고 있다.

5. 구성 : 모란이 피기를 기다림(1-2)

모란을 잃은 슬픔(3-10)

모란이 피기를 기다림(11-12)

 

<대칭 구조>
상승(1,2) 하강(3-10) 상승(11,12)
기다림 설움, 절망 기다림

6. 제재 : 모란의 개화

7. 주제 :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림

8.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어떠한 대상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에게 모란은 단순히 하나의 꽃이 아니라,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나 내면적 순결성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화자의 삶은 오로지 모란이 피는 순간만을 지향하며, 그것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의 자세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화자가 맞이한 봄은 지나가야 하는 봄이고, 봄이 지나가면 모란이 피어난 것에 대해 느끼는 환희도 사라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의 봄은 찬란하기만 한 봄이 아니라 슬픔의 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된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모순 형용은 이와 같은 환희와 그 소멸로 인한 슬픔이 한데 섞인 화자의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 2023년 수능 특강 문제
 
 
 
[01~04]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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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세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          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              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나 )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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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1-0070]

 

01. (가)와 (나)의 공통점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떠나간 대상에 대한 화자의 슬픔을 드러내고 있다.
② 공간의 이동에 따른 화자의 심리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③ 과거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화자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④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한 화자의 체념적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 

⑤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여 화자의 현실 극복 의지를 부각하고 있다.

 

 

[22001-0071]
02. 이미지의 활용을 중심으로 (가)를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푸른 산빛’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깨치고’라는 시어를 통해 부정함으로써 화자가 처한 상 황이 달라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② ‘옛 맹세’의 ‘굳고 빛나든’ 이미지가 ‘차디찬’이라는 이미지로 전환됨으로써 화자와 ‘님’의 관계가 부정적으로 변화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③ ‘향기로운’과 ‘꽃다운’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활용함으로써 ‘님’에 대한 화자의 예찬적 태 도를 드러내고 있다.
④ ‘새 희망’이라는 관념을 ‘들어부었습니다’에서 연상되는 역동적 이미지로 연결함으로써 현 실에 대응하는 화자의 태도를 형상화하고 있다.
⑤ ‘사랑의 노래’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님의 침묵’이라는 상반된 이미지와 병치함으로써 화 자가 느끼고 있는 회한의 정서를 형상화하고 있다.

 

 

[22001-0072]
03. ㉠~㉤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비유적 표현을 통해 화자가 느낀 허망함을 드러내고 있다.
② ㉡: 반어적 표현을 통해 화자가 처한 절망적 상황을 부각하고 있다.

③ ㉢: 접속어를 활용하여 화자의 인식이 전환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④ ㉣: 음성 상징어를 활용하여 화자가 느끼는 슬픔의 정서를 환기하고 있다.

⑤ ㉤: 의도적으로 어순을 도치시켜 주제 의식을 부각하고 있다.



[22001-0073]
04<보기>를 참고하여, (가)와 (나)를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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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모두 대립적인 시어와 표현을 통해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가)와 (나)의 화자는 모두 시적 대상으로 인해 촉발된 부정적 상 황에 처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상반된 의미의 시어와 표현을 통해 화자가 경험하고 있는 아픔을 형상화하기도 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인식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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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가)의 화자가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면서도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는 것은 대립적 의미의 표현을 병치하여 상황에 대한 화자의 새로운 인식을 드러낸 것이군.
② (나)의 화자는 ‘모란’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이었던 ‘봄’을 ‘모란’이 지는 슬픔의 계절로 인식 함으로써 화자가 경험하고 있는 부정적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군.
③ (가)의 화자가 ‘염려’하는 행위와 (나)의 화자가 ‘삼백예순 날’ ‘우’는 행위는 모두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려는 화자의 적극적 노력을 형상화한 것이군.
④ (가)의 화자는 ‘슬픔’이 ‘새 희망’으로, (나)의 화자는 ‘내 보람’이 ‘설움’으로 변화하는 경험을 통해 상황에 대한 화자의 인식 전환이 나타나고 있군.
⑤ (가)의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와 (나)의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는 모두 부정적 상황에 대한 화자의 극복 의지가 드러난 것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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