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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정병헌· 이지영, 돌베개,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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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허난설헌

 허난설헌(1563~1589) 사대부 여류 시인으로 조선조 국문학 사상 여류 한시의 최고봉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여류 한문학은 기녀가 담당했지만, 일부 사대부 여성들 가운데서도 한시에 상당한 경지에 오른 사람이 간혹 있었다. 그 가운데 신사임과 함께 허난설헌은 조선 중엽 사대부 남성 위주의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남성들이 다루지 못하는 여인의 한과 사랑의 정서를 시에 아로새겼다. 그녀는 진취적이고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후대까지 높이 평가되는 독특한 작품의 세계를 이룩하였다.

 

. 허난설헌의 생애

 

 허난설헌의 이름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며, 난설헌은 그녀의 호이다. 본관이 양천(陽川)으로, 부친은 학자요 문장가로 유명한 초당(草堂) 허엽(許曄)이다. 초당공은 첫째 부인 한씨로부터 아들 허성(許筬)과 두 딸을 얻었고, 둘째 부인 김씨로부터 허봉(許篈) 허난설헌 허균을 얻었다. 난설헌은 부친이 강릉부사로 재직할 때 강릉의 초당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8세 때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을 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난설헌이 글에 관심을 보이자 친오빠인 허봉은 누이동생을 직접 가르쳤다. 봉은 누이를 자기의 글 친구인 손곡 이달에게 시를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때 허균도 함께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오빠와 이달을 통한 문장 수업은 그녀의 작품 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첫째 난설헌이 당대의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둘째로 중국의 당시를 익힘으로써 당시풍(唐詩風) 시를 짓게 되었다.

난설헌이 가진 문학적인 자질은 허문(許門)에서 싹트고 닦아졌지만, 남성 문인들처럼 열린 공간에서 발휘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작품을 가다듬고 만들어낸 공간은 규방이었다.

 

14,15세 무렵 한 살 위인 안동 김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다. 김성립의 집안 사람들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으나, 막상 그는 능력이 변변치 못했던 듯하다. 그는 난설헌이 27세로 죽은 해에야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도 정8품인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다.

 

 난설헌은 남편과의 금슬이 좋지 못하였다. 그녀는 결혼 생활 초부터 남편이 글공부에만 매달려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게다가 벼슬이 없던 남편은 똑똑한 부인을 외면하였다.

무엇보다도 난설헌은 시어머니와의 갈등이 컸다. 그녀가 바느질이나 살림보다 독서와 글짓기를 좋아했으니, 이런 며느리를 곱게 봐줄 리 없었다. 그런데 시가(媤家)에서의 고통과 불화는 어쩌면 그녀의 성격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그것은 허씨 가문의 사람들이 대체로 남들과의 관계에서 조화롭게 지내지 못했다는 지적 때문이다. 허엽, 허성, 허봉 등은 직언을 잘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적이 많았고, 허균도 경솔하고 경박하다는 평을 받았다.

 

 허난설헌의 가슴에 맺힌 한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이 넓은 세상에 하필 조선에 태어났는가, 또 하나는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마지막으로 왜 수많은 남자 가운데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한편, 그녀가 의지할 곳은 자식밖에 없었겠지만 두 아이는 일찍이 차례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뱃속에 있는 아이까지 잃었다.

 

 난설헌은 가정적인 불행을 겪으면서 독서와 글짓기에 몰두하였다. 그녀가 지어낸 한시는 대부분 이러한 규방의 공간을 통해 배출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갇혀 있는 규방에서 사랑의 그리움과 울분을 시로 읊어갔다. 남편이 아내를 멀리하고 화류계의 여자들과 놀아날 때, 그녀는 한편으로는 남편에 대한 사랑의 그리움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미움의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이렇게 불행한 결혼 생활뿐만 아니라, 친정집의 불행까지 잇달아 닥쳐왔다. 부친 허엽은 그녀가 18세 때 경상감사 벼슬을 마치고 서울로 오는 도중에 상주 객관(客館)에서 죽었고, 오빠 허봉은 그녀가 21세 때 갑산으로 귀양을 갔다. 허봉은 3년 만에 유성룡과 노수신(盧守愼)의 노력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난설헌이 죽기 1년 전에 객사하고 말았다. 벼슬에 뜻이 없어 백운산에 들어가 글을 읽으며 자연을 즐기다가, 술이 지나쳐 병을 치료하러 산을 나왔다가 금화현의 생창역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허봉은 동인(東人)으로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 선조 16(1583)에 귀양을 갔다.

 

 그나마 동생 허균마저 귀양을 가게 되어 그녀에게는 더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삶의 의욕을 잃은 그녀는 27(1589)의 짧은 나이로 그만 꽃다운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기 전에 그동안 자신이 써두었던 시문을 모두 태워버리라고 유언하였다. 따라서 그녀가 지어 직접 모아두었던 많은 시편들은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나이 27세 되던 해에 홀연히 의관을 정제하고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 9의 수(27)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눈을 감았다고 한다. 패림(稗林)이순록(二旬錄)에 전해오는 이야기다. ‘연꽃 스물 일곱 송이는 그녀의 향년 연수와 같으니, 실로 자신의 죽을 나이를 예견한 시참(詩讖)’이라 할 만하다.

 

 난설헌에게 한을 남겼던 남편 김성립은 부인이 죽은 그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곧바로 남양 홍씨와 결혼했으나 요절하 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병을 막다가 31세의 나이로 전사한 것이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의관만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재혼한 탓에 남양 홍씨와 합장되었다. 허난설헌은 죽어서도 혼자 누워 있게 된 셈이다.

 

. 허난설헌의 문학 세계

 

 난설헌의 작품은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그러나 현재 전해오는 작품들은 그녀의 친정에 보관되었던 것을 허균이 문집으로 엮은 것이다. 허균이 난설헌 시집을 처음 엮은 것은 난설헌이 죽은 지 1년 뒤인 1590년으로, 그는 유성룡의 발문(跋文)을 붙여 아는 이들에게 몇 부 필사하려 돌렸다. 그후 1598년 정유재란의 원군(援軍)으로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의 오명제(吳明濟)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편을 외워주었다. 나중에 오명제는 중국으로 돌아가 조선시선(朝鮮詩選)을 엮었는데, 다시 이를 저본으로 삼아 열조시집(列朝詩集)명시종(明詩綜)등에 차례로 실렸다.

 

 허균은 또한 1606년에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정사(正使) 주지번(朱之蕃)과 부사(副使) 양유년(梁有年)이 들어오자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접대하면서, 누님의 시를 중국에 알리기 위해 난설헌고초고를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하여 주지번에게는 소인(小引), 양유년에게는 제사(題辭)를 얻게 되었고, 그는 이것들을 묶어서 16084월에 공주목사로 재직하던 도중 그곳에서 난설헌집을 출간하였다. 중국에서는 난설헌의 문집이 발간되어 대단한 평판을 받았다.

 

 현재 전해오는 대부분의 난설헌 문집의 판본은 1692(숙종 18)에 동래부(東萊府)에서 중간(重刊)된 것이다. 난설헌집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전해져 1711(숙종 37)에 분다이야에 의해 간행되었다. 또한 1913년에는 안왕거가 허경란의 경란집부록으로 붙여 신활자본으로 서울의 신해음사에서 다시 발간하였다.

 

 문집에 전하는 작품을 보면 시가 210, ()1, 그리고 산문이 2편인데, 이 가운데 칠언절구 시가 142편으로 작품 수가 많은 편이다. 이 밖에도 다른 문헌에 그녀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작품들이 몇 편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문집 속에 있는 작품들이 진짜 난설헌의 작품인지에 대해서는 조선조 문인들이 약간의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이 작품들이 중국시의 표절이라는 신흠의 주장과, 일부 중국 시인의 작품이 첨가되었다는 김만중의 주장, 그리고 허균이 위작했을 것이라는 이수광의 주장 등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들이 중국시의 표절이라면 중국인들이 그녀의 작품을 보고 문집을 간행할 때 쉽게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들 주장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허난설헌의 남아 있는 한시 작품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들이 발견된다. 첫째,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을 초탈하려는 염원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의 시에는 신선이라는 낱말이 자주 등장하다. 시속에 등장하는 선계(仙界)는 가정적인 불운을 현실적으로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초탈의 염원을 드러낸 이상세계라 할 수 있다.

 

 둘째로 난설헌의 시를 보면 여성의 삶의 고뇌와 고민을 드러내며, 또한 다른 미천한 여성의 처지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녀의 시에는 여성 특유의 사랑의 감정이 잘 드러난다. 애정을 다룬 시들은 자식과 형제간의 사랑을 읊은 시들과, 남녀간 사랑의 감정을 읊은 시들로 다시 나누어진다.

 

 셋째로 난설헌은 당대의 사회적인 현실 문제를 비판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곧 백성의 다양한 군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장사꾼들의 애환을 그리거나, 유흥가 내지는 유곽가를 노래한다. 더러는 변방에 출정나간 군사들의 사정이나 성을 쌓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대사회적인 관심은 규방에서 지내는 사대부 여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일부 논자들은 난설헌이 이들 시를 과연 지었을까 하는 의심을 눈길을 보내고 있다

 

난설헌은 규원가, 봉선화가를 남긴 작가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을 그녀가 지은 것으로 보는 데에는 아직 논란거리로 남아 있다. 규원가의 경우 고금가곡(古今歌曲)에서는 그녀의 작품이라 하였지만, 홍만종의 순오지(旬五志)에서는 허균의 첩인 무옥(巫玉)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가람 이병기는 난설헌의 한시 소년행의 내용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보는 데에 동의한다.

 

그리고 봉선화가정일당잡지(貞一堂雜誌)에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데, 이를처음 소개한 가람 이병기는 내용상 난설헌의 염지봉선화가」 ‧ 「선요(仙謠)」 ‧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의 일부 구절과 같다는 이유를 들어 그녀의 작품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을 정일당 김씨가 지었다는 주장도 많은 편이어서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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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정병헌· 이지영, 돌베개, 2007.

 

 

. 허균

허균(許筠,1569-1618)은 일반적으로 국문소설의 효시작으로 알려진 홍길동전을 지었다. 그는 당시 엄격한 유교 윤리와 예학에 사로잡힌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 양명학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 천주교 등 여러 방면의 지식을 수용했다. 아울러 독창적인 우리 문학을 주장했으며 억압받던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남겼다.

 

. 허균의 생애

 

허균의 자는 단보(端甫)요 호는 교산, 학산, 백월거사 등이고, 본관은 양천이다. 그는 학자요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막내아들이다. 부친 허엽은 청주 한씨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허성(許筬)과 두 딸을 두었는데, 한씨 부인이 죽자 다시 예조참판 김광철의 여식을 후취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강릉 김씨 부인 사이에서 허봉(許篈), 허난설헌(許蘭雪軒), 허균을 낳았다.

 

허균은 서울의 마른내(지금의 오장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강릉을 그의 출생지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허균의 부친이 그가 태어나기 이태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온 뒤 서울에서 내직(內職)으로 벼슬살이해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출생지가 서울일 것으로 짐작된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에는 시를 지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두 형, 곧 허성, 허봉뿐만 아니라 누이인 허난설헌까지 모두 글재주가 뛰어났던 점을 감안한다면, 어린 시절 허균의 뛰어난 글재주는 전혀 놀랄 일은 아니다. 허균의 학문은 친형 허봉과 누이로부터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허균은 의금부도사 김대섭의 딸과 혼인한 17세 무렵에, 귀양에서 풀려난 둘째 형에게 고문(古文)과 한유(韓愈)소동파(蘇東坡)의 시를 배웠으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글을 배웠다.

 

허균은 문학수업을 하던 시기에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삼당파 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이었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 당시 원주의 손곡리에 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신분이 천한 탓에 벼슬길에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글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허균이 서류천인(庶類賤人)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모두 이 스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20세 되던 해 허균은 그를 아껴주던 둘째 형 허봉을 잃었다. 더욱이 생원시험에 합격한 이듬해 22세에는 그를 가장 아껴주던 누이 허난설헌마저 죽었다. 막내로서 친형과 친누이를 잃은 허균의 충격을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

24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하여 함경도 단천 땅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부인 김씨와 첫아들을 잃고 만다. 허균은 29세 되던 해 김효원(金孝元)의 딸을 재취로 맞이하였다.

 

26(1954, 선조27)되던 해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사관(史官)으로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29세 때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병조좌랑으로 있던 이듬해, 황해도 도서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기생들을 그곳 임지까지 데려와 즐기고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직무를 등한히 한 죄로 부임한 지 여섯 달 만에 파직당하였다. 파직과 복직의 파란만장한 벼슬살이가 시작된 셈이다. 허균의 뛰어난 문학작품은 벼슬길에서 물러난 시련과 고난의 시기에 이루어졌다.

 

33세 때 형조정랑을 거쳐 이듬해는 사예(司藝),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36세 되던 해에는 수안군수(遂安郡守) 재직 시절 불교에 심취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두 번째 파직을 당하였다. 그는 이 무렵 불교에 빠져들어 한때 승려가 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37세에 명나라의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었는데 그에게 학문과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누이 허난설헌이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누이의 시집을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이듬해에 삼척부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석 달 만에 파직되었다.

 

40에 다시 공주목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서류(庶類)들과 어울렸다. 그는 처삼촌인 심우영, 이경준 등과 사귀었으며, 또한 그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광해군이 보낸 충청지방 암행어사의 감사에 걸려 또 다시 파직되었다.

 

그후 허균은 전라도 부안의 봉산(蓬山)에 내려가 그곳의 산천을 유람하였다. 이때 명기(名妓) 매창(梅窓)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원래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劉希慶)과 깊은 정을 나누고 있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를 보면 그가 매창과 시를 읊으며 즐기다가 밤이 되자 매창이 그녀의 조카딸을 자신의 침소로 들여보낸 일을 기록하고 있다.

 

41(1609) 되던 해 명나라의 책봉사신이 오자 원접사 이상의의 부름을 받아 서장관의 일을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고 이어서 형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성절사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했다가 면직되었다. 그러다가 이 해에 궁중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의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이때 자서제질사돈방(子壻弟姪查頓榜)’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박승종, 이이첨 등이 친인척을 과거에 부정으로 합격시킨 사건인데, 허균도 이때 큰형의 둘째 아들과 여서(女壻) 박홍도를 부정으로 뽑았다. 이 일로 인하여 42일 동안 옥고를 겪은 뒤 전라도 함산으로 유배당했다. 이 사건은 허균에게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세력이 없던 자기만 유배당했기 때문이다. 그 뒤 허균은 처세를 완전히 바꾸어 당시 대북파(大北派)의 영수로 권력을 휘두르던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며 가까이 지내게 된다. 게다가 2년 뒤 서자 출신의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의 칠서지옥(七庶之獄)이 일어나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더욱 이이첨과 가까이 지냈다. 이 옥사는 박응서 등이 주동이 되어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사전에 발각된 것인데, 그들과 평소에 어울리던 허균은 여기서 용케 빠져나올 수 있었다.

 

44세 되던 해, 당쟁의 회오리에 의지가 되었던 큰형 허성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허균은 이이첨과 친하게 지내면서 이이첨이 주선한 벼슬 호조참의의 신분으로 천추사(千秋使)로 중국을 다녀왔고(46) 다시 이듬해에는 동지겸진주사인 민형남(閔馨男)의 부사(副使)가 되어 중국에 갔다. 중국을 왕래하면서 그는 명나라의 학자들과 사귀는 동시에 태평광기뿐만 아니라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 등을 얻어 국내에 가져왔다. 두 번에 걸친 사신 일로 인해 그는 48세에 형조판서가 되어 광해군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 윤선도(尹善道)가 이이첨의 권력 남용을 탄핵하는 상소(1616)를 올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광해군은 이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첨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 폐모론을 들고 나왔다. 이 때 49세로 좌참찬(左參贊)의 직위에 있던 허균은 이이첨의 조종에 따라 폐모론을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고 그 흉계를 꾸미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허균은 유생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폐모론을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은 그의 아들 기준적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그런데 이이첨은 허균이 광해군의 총애를 받는데다가 허균의 딸이 왕의 후궁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보고,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50세가 되던 8, 남대문에 괴서가 붙여진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이 일은 허균의 심복인 서얼 출신 현응민(玄應旻)이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이이첨은 허균과 기준격을 대절심문시킨 끝에 역적 모의의 죄목을 뒤집어씌어, 허균을 그의 동료들과 함께 서쪽 저자거리에서 책형(磔刑-능지처참형)으로 죽이고 말았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 허균에 대한 평가

 

허균에 대해서는 총명하고 영민하여 시를 짓고 감식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내려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목대비의 폐모를 앞장서서 주장하고 기생이나 무뢰배들과 어울려 지내는 등의 반인륜적이고 경박한 행위를 일삼는다는 이유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허균은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잦은 파직을 당하면서도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서장관으로 활동하는 등 그만큼 글재주가 뛰어났음을 의미한다. 허균의 자유분방한 성격은 막내로서 부친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의 편애를 받으면서 자라 자유롭고 무절제한 생활에서 비롯된 탓도 있다. 하지만 기존의 지식 외에도 새롭고 다양한 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그의 진보적인 개방성과 천재적인 능력, 개혁성과 진보성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 허균의 사상

 

허균은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불여세합(不與世合)’,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때의 세상은 기존의 완고한 중세적 질서를 말한다. 그는 벼슬살이에서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를 겪었다. 그는 서얼들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한 죄목으로 죽음을 당할 만큼 기존의 체제와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행위를 보여주었다.

 

홍길동전이 허균이 지었다는 사실은 택당 이식(李植)택당집별집의 기록에 근거할 뿐, 그 밖의 어느 문헌에도 더 이상 자세한 사실은 남아있지 않다.

 

허균의 정치사상은 성소부부고()’의 형식으로 된 각종 글 속에 제시되고 있는데, 대체로 내정의 개혁, 국방정책의 강화, 신분계급의 타파 등으로 정리된다.

 

허균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논설은 호민(豪民)유재(遺財)이다. 호민론에서는 위정자가 백성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백성을 객관적 사회현실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정도에 따라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나누면서 이들의 저항적 잠재력을 예리하게 파악하였다. 그에 의하면 세 부류의 백성 가운데 호민은 가장 무서운 존재로, 나라의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적당한 때가 오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호민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호민이 나머지 두 부류의 백성을 모아 기존 체제에 반기를 들면 농민저항이 된다. 허균은 한나라 때의 황건적, 당나라 때의 황소, 그리고 우리나라의 견훤과 궁예가 호민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 홍길동전의 주인공 길동은 호민의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유재론에서 그는 불평등한 인재등용을 비판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의 모순된 제도 아래서 인간의 차별 문제를 부각시켰다. 그는 인재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인데, 나라에서 가문과 과거만으로 등용을 제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는 인재로서 서자와 개가한 집 자손을 들고 있다. 적서차별을 부르짖는 홍길동전이야말로 이러한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허균은 당시에 이단시되던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한 때 출가를 생각했을 만큼 불교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으며 불교를 신봉하여 자주 파직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허균은 불교적 지식이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학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허균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그의 심리적인 갈등과 관련이 깊다. 그는 문파관작의 첫 번째 시에서 불교를 대하는 것은 마음이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벼슬살이에 대한 좌절과 가정적 불행에 따른 마음의 불안정을 위안받기 위하여 불교에 심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허균은 도교에 대해서는 주로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허균은 노자를 비롯하여 31열선(列仙)에 대한 찬()도 지었으며, 단학 수련에도 상당한 지식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은둔사상을 동경하여 4천 권이 넘는 중국 선가(仙家)의 서적을 발췌하여 한정록(閑情錄)으로 집대성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서학(천주교)에도 관심을 가져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이에 관한 기도문을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 허균의 문학

 

허균은 문학에 대해서 우선 감정의 자유로운 발현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남녀의 장욕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감히 어길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백성의 진솔한 감정이 토로된 국풍(國風), 곧 민용를 시도(詩道)의 정도(正道)로 삼았다.

또한 자연스런 감정을 발현하기 위하여 현실의 체험을 중시하거나 인간의 꾸밈없는 마음의 경지를 포착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문장이 부귀공명의 편안함보다는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야 더욱더 묘경(妙境)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유배생활을 통해 터득한 바이다.

 

허균은 개성을 중시하는 문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 역대 한시의 대가들의 글을 인용하는 의고주의(擬古主義)’를 비판하고 자기만의 글과 개성을 강조했다. 또한 개성적인 시를 쓰기 위해서는 상어(常語)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어란 당대의 일상어로 한자를 완전히 버린 것이라기보다는 비어(卑語)나 속어(俗語)를 섞어 쓴 우리말식 한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허균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우리 것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과 독창적인 문학에 대한 자각은 고루한 인식에 젖어 있던 당대 사대부의 문학관과는 상당히 달랐다.

 

. 허균의 산문

 

⓵ 『홍길동전은 허균의 친필본이나 그가 생존하던 당시와 가까운 시기에 이루어진 판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19세기나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판본만 있는데, 허균 시대와는 거의 3백 년 가량의 시간적 격차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이 과연 한글로 지어졌는지, 아니면 한문으로 지어진 것인지부터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한문본은 유일하게 서강대 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30장본)만 남아 있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정부나 기업이 사업에 투자할 때에는 현재에 투입될 비용과 미래에 발생할 이익을 비교하여 사업의 타당성을 진단한다. 이 경우 물가 상승, 투자 기회, 불확실성을 포함하는 할인의 요인을 고려하여 미래의 가치를 현재의 가치로 환산한 후, 비용과 이익을 공정하게 비교해야 한다. 이러한 환산을 가능하게 해 주는 개념이 할인율이다. 할인율은 이자율과 유사하지만 역으로 적용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현재의 이자율이 연 10%라면 올해의 10억 원은 내년에는 (1+0.1)을 곱한 11억 원이 되듯이, 할인율이 연 10%라면 내년의 11억 원의 현재 가치는 (1+0.1)로 나눈 10억 원이 된다.

 

 공공사업의 타당성을 진단할 때에는 대개 미래 세대까지 고려하는 공적 차원의 할인율을 적용하는데, 이를 사회적 할인율이라고 한다. 사회적 할인율은 사회 구성원이 느끼는 할인의 요인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래서 시장 이자율이나 민간 자본의 수익률을 사회적 할인율로 적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시장 이자율은 저축과 대출을 통한 자본의 공급과 수요에 의해 결정되는 값이다. 저축을 하는 사람들은 원금을 시장 이자율에 의해 미래에 더 큰 금액으로 불릴 수 있고, 대출을 받는 사람들은 시장 이자율만큼 대출금에 대한 비용을 지불한다. 이때의 시장 이자율은 미래의 금액을 현재 가치로 환산할 때의 할인율로도 적용할 수 있으므로, 이를 사회적 할인율로 간주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한편 민간 자본의 수익률을 사회적 할인율로 적용하자는 주장은,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 공공사업에 투입될 자본이 민간 부문에서 이용될 수도 있으므로, 공공사업에 대해서도 민간 부문에서만큼 높은 수익률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 이자율이나 민간 자본의 수익률을 사회적 할인율로 적용하자는 주장은 수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우선 공공 부문의 수익률이 민간 부문만큼 높다면, 민간 투자가 가능한 부문에 굳이 정부가 투자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장 이자율이나 민간 자본의 수익률이, 비교적 단기적으로 실현되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 시작에서 결정된다는 점이다. 반면에 사회적 할인율이 적용되는 공공사업은 일반적으로 그 이익이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공공사업은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이념을 반영한다. 만일 사회적 할인율이 시장 이자율이나 민간 자본의 수익률처럼 높게 적용된다면, 미래 세대의 이익이 저평가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할인율은 미래 세대를 배려하는 공익적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01~0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강원도 명주군 사천리에 있는 애일당(愛日堂) 옛터를 다녀왔습니다. 이곳은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서 그 리고 소설 「홍길동」의 작가로서 널리 알려진 교산(蛟山) 허균이 태어난 곳입니다. 지금은 작은 시비 하나가 그 사람과 그 장소를 증거하고 있을 뿐이지만 시비에 새겨진 「누실명(陋室銘)」의 한 구절처럼 정작 허균 자신은 그곳을 더없이 흡족한 처소로 여기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환로(宦路)에서 기방(妓房)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두량 넓은 학문의 세계로부터 모반의 동굴에 이르기까지 그가 넘나들지 않은 경계는 없었습니다. 당대 사회의 모순을 꿰뚫고 지나간 한 줄기 미련 없는 바람이었습니다. 비극적인 그의 최후에도 불구하고 양지바른 언덕과 시원하게 트인 바다, 그 어디에도 회한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애일당 옛터에서 마음에 고이는 것은 도리어 그의 누님인 허난 설헌(許蘭雪軒)의 정한(情恨)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태어난 것을 한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던 그녀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무덤을 찾을 결심을 한 것은 오죽헌을 돌아 나오면서였습니다. 오죽헌은 당신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율곡(栗谷)과 그 어머니인 사임당(思任堂) 신 씨를 모신 곳입니다. 사임당은 마침 은은한 국 화 향기 속에 앉아 돌층계 위 드높은 문성사(文成祠)에 그 아들인 율곡을 거두어 두고 있었습니다. 율곡 선 생은 조선조 최대의 정치가이자 학자로서 겨레의 사표임에 틀림이 없고 그를 길러 낸 사임당 역시 현모의 귀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봉건적 미덕의 정점을 확인케 하는 성역이었습니다. 극화(極化)된 엘리트주의가 곧 반인간주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곳은 분명 어떤 정점이었습니다.
 나는 교산을 찾아보고 오리라던 강릉행을 서둘러 거두어 서울로 돌아온 다음 오늘 새벽 일찍이 난설헌 허 초희(許楚姬)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자욱한 새벽안개 속을 물어물어 찾아왔습니다. 오죽헌과는 달리 허난설헌의 무덤은 우리의 상투적이고 즉각적인 판단이나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판단에서 한발 물러나 그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당신이 힘들게 얻어 낸 결론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철폐는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일과 직접 맞물려 있다’는 것이라면, 그리고 한 시대의 정점에 오르는 성취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에 얼마만큼 다가서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애를 읽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도 와야 합니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존경했던 스승 이달(李達)의 좌절,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 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사임당의 고아한 화조도(花鳥圖)에서는 단 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봉건적 질곡의 흔적이 난설헌의 차가운 시비(詩碑) 곳곳에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의 진실이 그대로 역사의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연마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대리 현실을 창조하는 문화 속에서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만날 수 있 기는 갈수록 더욱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가 해체되고, 자신은 물론 자식과 남편마저 ‘상품’이라는 교환 가치 형태로 갖도록 강요되는 것이 오늘의 실상이고 보면 아픔과 비극의 화신인 난설헌 이 설 자리를 마련하기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시대를 고뇌했던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가 청산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항상 역사서의 둘째 권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죽헌을 들러 지월리에 이르는 동안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역사의 다음 장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문 득 의심스러워집니다.
 시대의 모순을 비켜 간 사람들이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당신의 실망을 기억합니다. 사임당과 율곡에 열중하는 오늘의 모정에 대한 당신의 절망을 기억합니다. 단단한 모든 것이 휘발되어 사라지고 디즈니랜드에 살고 있는 디오니소스처럼 ‘즐거움을 주는 것’만이 신격의 숭배를 받는 완강한 장벽 앞에서 작은 비극 하나에도 힘겨워하는 당신의 좌절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지월리로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남매의 무덤 앞에 냉수 떠 놓고 소지 올려 넋을 부르며 “밤마다 사이좋게 손잡고 놀아라.”라고 당부하던 허초희의 음성이 시비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가 선포되고 과거와 함께 현재의 모순까지 묻혀져 가는 오늘의 현실에 맞서서 진정한 인간적 고뇌를 형상화하는 작업보다 우리를 힘 있게 지탱해 주는 가치는 없다고 믿습니다.
 중부 고속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이 쉴 새 없이 귓전을 할퀴고 지나가는 가파른 언덕에 지금은 그녀가 그토록 가슴 아파했던 두 아이의 무덤을 옆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정승 아들을 옆에 거두지도 못하고, 남편과 함께 묻히지도 못한 채 자욱한 아침 안개 속에 앉아 있습니다. 열락(悅樂)은 그 기쁨을 타 버린 재로 남기고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준다던 당신의 약속을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서 지켜야 합니다.

 

 

01. 윗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특정 장소에 대한 세간의 잘못된 통념을 소개하고 여정의 체험을 근거로 이를 바로잡고 있다.
② 견문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일화들을 나열하고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본 바를 설명하고 있다.
③ 여행 장소들에서 일어난 각각의 역사적 사건을 떠올리고 그 사건들 간의 인과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④ 여정의 순서에 따라 장소들에 대한 감상을 제시하면서 각 장소가 주는 인상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⑤ 여행 장소에 처음 방문했던 경험을 회상하면서 당시의 감상과 다시 그곳을 방문한 감상을 서로 비교하고 있다.

 

 

02. 윗글의 내용에 대한 이해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글쓴이는 ‘애일당 옛터’에서 허난설헌을 떠올리면서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기로 마음먹고 있다.
② 글쓴이는 허균 시비에 새겨진 ‘「누실명」의 한 구절’을 통해 허균이 죽음을 맞이한 장소에 대한 상념을 떠올리고 있다.
③ 글쓴이는 ‘화조도’에 신사임당이 여성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고통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④ 글쓴이는 ‘난설헌의 차가운 시비’에 자녀의 죽음으로 인한 허난설헌의 고뇌가 나타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⑤ 글쓴이는 청자로 설정되어 있는 ‘당신’이 ‘시대의 모순을 비켜 간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는 태도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03. <보기>를 참고하여 윗글을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이 작품에는 역사적 인물들의 삶을 현재화하고 거기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는 글쓴이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드러나 있다. 글쓴이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면서 시대의 한계에 도전했던 허균과, 당대의 지배적 가치를 실현하여 질서의 정점에 오른 신사임당, 이이 모자를 떠올린 뒤, 이들과 허난설헌을 대비하여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허난설헌의 비극적 삶을 부각하면서 경쟁에 의한 성취와 쾌락만을 좇는 현대 사회의 비인간성을 문제 삼고, 인간이 겪는 아픔과 고뇌를 직시함으로써 그 것을 야기한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다가서야 함을 독자들에게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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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그 어디에도 회한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는 서술에서 자유분방한 삶을 살다가 죽은 허균의 생애에 대한 글쓴이의 주관적 평가가 드러나는군.
② ‘돌층계 위 드높은 문성사’는 당대의 지배적 가치를 실현하여 질서의 정점에 오른 이이의 미덕을 현재화하여 절대적 가치로 인식하려는 글쓴이의 가치관이 투영된 표현이겠군.
③ ‘현모의 귀감임에는 틀림없’는 신사임당의 삶은, 글쓴이가 ‘정승 아들을 옆에 거두지도 못’ 한 허난설헌의 인간적 고뇌를 부각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군.
④ ‘완강한 장벽’은 현대 사회에서 경쟁을 통한 성취와 쾌락을 중시하는 풍조가 공고하게 지속되고 있다고 여기는 글쓴이의 관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이겠군.
⑤ ‘우리를 힘 있게 지탱해 주는 가치’는 인간이 겪는 아픔에 주목하려는 태도가 독자들의 삶에 도 필요하다고 여기는 글쓴이의 생각을 보여 주는 표현이겠군.

 

 

 

 

정답 

01. ④

02. ④

03. ②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 줍니다' 핵심 정리

 

1. 갈래 경수필, 기행 수필

2. 성격 성찰적, 사색적, 교훈적

3. 제재 허난설헌의 생애

4. 주제 시대의 모순에 맞서는 삶의 가치

5. 특징

- 공간의 이동에 따른 내용 전개

- 인물의 삶을 대비하여 주제를 강조함(허난설헌 신사임당, 율곡 이이)

- 비유를 통해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냄

- 인물에 대한 글쓴이의 평가를 직접적으로 제시함

- 구체적 지명을 제시하여 사실성을 부여함

6. 구성

· 처음- 애일당 옛터와 오죽헌에서 떠올린 허균, 율곡과 신사임당에 대한 상념

· 중간 허난설헌의 생애와, 시대의 모순에 맞선 인간적 고뇌에 주목하는 일의 중요성

· 허난설헌 무덤의 모습과 비극이 주는 가치

 

7.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글쓴이의 기행 수필집 나무야 나무야에 실려 있으며, 수필집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당신이라는 독자를 설정하여 서간문의 문체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여행지에서의 견문과 역사에 관한 고찰을 통해, 현대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이끌어 내고 있다. 글쓴이는 허균,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허난설헌 등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유적을 탐방하고 이들에 대한 주관적 평가를 드러내는 한편, 오늘날의 시점에서 주목해야 할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성찰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경쟁을 통한 성취와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진정한 인간적 고뇌에 주목함으로써 시대의 모순에 맞서는 일에 동참할 것을 독자들에게 권하고 있다.

[01~0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앞부분 줄거리] 시민들은 공룡에 맞서 싸우기 위해 왕을 뽑기로 한다. ‘시민 마’가 임금으로 선출되자 ‘시민 바’는 박물관장 직 을 요청한다. ‘박물관장’이 된 ‘시민 바’는 석회로 만들어진 알을 들고 나와 알에서 임금이 태어날 것이라는 거짓말로 임금을 죽음으로 내몬다.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되어 알에서 위대한 임금이 아닌 공룡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을 바꾸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시민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군중들: (소리) 위대한 임금님이냐? 두려운 공룡이냐?
시민 라: 무엇이냐구요? 우리의 지혜로써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어느 것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지 그것마                저 의아로워집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불안은 공룡이 아니라, 우리의 지혜와 권리가 쓸모없어졌다는 데                주의하십시오. 우린 허수아비처럼 완전히 무력(無力) 상태 속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박물관장이 우리의 손과                발에 줄을 엮으면 우리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아, 지금 나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혀로써 말하                 고 있질 못합니다. 그러나 시민 여러분, 우리들이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의자               밑의 검붉은 반점들을 가리키며) 시민들 이여, 여기 전왕의 피가 아직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생전에 멋진                 모자를 썼었고, 우리는 그 모자의 아름다운 형태를 수호해 왔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그의 죽음을 용인했던 것은               저 속에 위대 한 임금님의 실재(實在)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공룡알이라고 믿는다면, 전왕의                 고귀한 희생은 무엇으로 보상되어져야 하며, 우리 시민들의 도덕적 타락은 어디에서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시민 다: (감동한다.) 그렇군요. 사기꾼의 헛말에 현혹될 뻔했습니다. (알을 가리키며) 나도 알 속에는 위대한 임금님이 계                  시다고 믿겠습니다.
 시민 가: 나 역시 알 속의 임금님을 믿습니다.
시민 나: 나는 새삼스레 저 알 속의 임금님을 믿겠노라 말하진 않겠어요. 그것은 내가 사람인 것처럼 자명 한 사실이니까.
시민 라: (군중들에게)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태양은 이 알과 우리 모두를 함께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저녁 무렵엔 위                대하신 임금님이 부화되어 나오십니다. 시민들은 사기 도박꾼에 대항하여 이 알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를 맹세합                 니다.
군중들: (환호성) ㉡위대한 임금님 만세!

 

 (박물관장이 왕의 복장으로 들어온다.)

 

박물관장: (답례의 손을 흔들며) 나를 보라! 너희를 무서운 공룡으로부터 구출하실 위대한 임금님이 나오셨다. 군중들: (분                    노의 소리) 우리들은 알을 택한다. 너는 물러가라!
박물관장: 미친 놈들이군. 사람 잡는 공룡을 왕으로 삼으려 하다니. (시민 대표 나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 어 디, 말 좀 해 보                   려무나. 저 알 속에 든 건 공룡이 아니라 임금님이라고 믿는 이유를?
시민 나: (확신에 가득 차서) 내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박물관장: 누가 너더러 사람이 아니래? 알 속에 임금님이 들어 있다는 증거를 대 보란 말이야.

시민 나: (머뭇거리다가 다를 가리키며) 이 옆 사람이 그것을 믿기에 나도 믿습니다.

박물관장: 그래? (다에게) 넌 왜 믿지? 증거가 뭐야?
시민 다: (우물쭈물하다가 가를 가리키며) 이 옆 사람이 증거입니다. 나는 그를 따라 믿습니다.

박물관장: (가에게) 너, 대답해 봐.
시민 가: (라를 가리키고) 이 사람이 믿으라고 해섭니다.
시민 라: (박물관장 앞으로 나서며) 인간의 도덕적 품성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알 속엔 위대한 임금님이 계시다고 믿습니                   다.
박물관장: 허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군. (공룡의 무서운 동작을 흉내 내며) 알 속에는 공룡이 들어 있단 말이야. 그 괴물이 부화되어 나오면 어떻게 되는 줄 알기나 해? 너희들은 잡아먹히거나, 아니면 대문을 닫아 걸고 숨어                     있어야 한다구. (알에 다가가서 위험한 물건에 손을 대듯이 슬쩍 만져 보고) 햇빛을 받아 알이 뜨듯해지기 시작                     했군. 이크! 벌써 꿈틀거린다!
시민 나: ㉢으악! (비명을 지르며 달아난다.) 살기 위해 나는 간다!

 

                                                                                          (중략)
시민 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땅에 엎드리어 신왕(新王)에게 기어 와 그의 발에 입 맞추며) 우리들의 왕이시여,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우리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고 그 알 속에 들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진실 로 말씀해 주십시                   오. 그럼 저희들은 기꺼이 전하를 섬기겠습니다.
박물관장: 임금의 자리란 왕관이나 칭호로써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국민들의 약점을 잡아 그들의 복종으로 유지되는 것                  이다. 넌 알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시민 라: 위대한 임금님이었습니다.

박물관장: 그럼 그것을 믿어라.
시민 라: 그러나 진실을 고백하자면 혹시 공룡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품고 있습니다.

박물관장: 공룡이 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시민 라: 네.
박물관장: 그럼 그것을 믿어라.
시민 가: 전하, 부디 둘 중에 하나만을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박물관장: 알 속엔 무엇이 들었었는지 정말 알고 싶은가?

시민 라: 그렇습니다.
박물관장: (상자 속에서 칼을 꺼내 라의 앞에 던져 주며) 우리 다시 한번 더 노름을 하자. 그 칼은 내가 전왕을 겨누었던 칼                      이다. 이번에는 네가 나를 찔러 보라. 나는 결코 너희들을 사랑하지 않는 임금이다. 너희들에게 이를 데 없는 고                    통을 주고 있지 않느냐? 칼을 쥐고 나를 찌르라. 자, 어서 찔러. 네가 나를 찌르 지 못한다면 내가 너를 찌르게                      된다!
시민 라: (칼을 쥐고 박물관장에게 다가간다. ㉤그의 가슴에 칼을 대었다가 힘없이 툭 떨어뜨린다.) 당신을 죽이면 알 속에                 무엇이 들었었는지 영원히 모르게 됩니다. 그럼 우리들의 고뇌를 해결할 수도 없구요. 나는 당신을 죽이지 못하                   겠 습니다.

 

 

 

01.  윗글의 내용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시민 라’는 박물관장을 통해 알에 관한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② ‘시민 나’는 알 속에 공룡이 있다는 ‘시민 라’의 말에 의심을 품었다.
③ ‘박물관장’은 알 속에 임금님이 들어 있다고 믿는 시민들을 추궁하였다.
④ ‘시민 가’와 ‘시민 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좇아 알 속에 임금님이 있다고 믿었다. 

⑤ ‘박물관장’은 알에서 공룡이 부화하여 시민들을 해칠 것이라고 말하며 겁을 주었다.

 


02 알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시민들의 과거 기억을 환기시키는 소재로, 사건의 전말을 드러낸다.
② 시민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소재로, 등장인물의 심리 변화를 유발한다.
③ 박물관장의 남다른 식견을 드러내는 소재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④ 박물관장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잊게 하는 소재로, 등장인물 간의 갈등을 해소한다. 

⑤ 시민들이 박물관장으로부터 받고 있던 의심을 해소하는 소재로, 긍정적 결말을 암시한다.

 


03<보기>를 바탕으로 ㉠~㉤을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장막극인 「알」은 ‘권력자-군중-개인’의 인물 구도가 선명한 작품이다. 권력자인 ‘박물관장’은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알 속에 임금님이 있다, 공룡이 있다’를 반복하며 군중을 고통에 빠뜨린다. 개인인 ‘시민 라’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질서가 어그러져 있음을 깨닫고 권력자에게 의심을 품으며 그가 은폐해 놓은 세계의 음험함을 폭로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정보의 독점을 통한 권력 형성과, 그로 인한 등장인물 간의 권력관계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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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 자신이 속한 세계의 질서가 어그러져 있음을 깨달은 ‘시민 라’가 군중을 향해 권력의 형성에 따른 문제점을 폭로하고 있다.
② ㉡: ‘알 속의 임금님’을 기대하며 권력자인 ‘박물관장’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다짐하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③ ㉢: ‘박물관장’의 말에 현혹된 군중의 반응으로, 권력자의 말에 의심을 품지 못하고 있다.
④ ㉣: 정보의 독점을 통해 권력을 형성한 ‘시민 라’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하여 스스로 은폐해 놓았던 세계에 관한 정보를 폭로하고 있다.
⑤ ㉤: 권력자인 ‘박물관장’과 개인인 ‘시민 라’의 대립에서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권력자의 우위가 드러나고 있다.

 

 

 

정답

 

01. ②

02. ②

03. ④

 

 

 

'알' 핵심 정리

 

1. 갈래 - 희곡, 장막극

2. 성격 - 우화적, 비판적, 풍자적, 고발적

3. 주제 부당한 권력의 탄생과 유지

4. 특징

- 우화적 기법을 활용하여 비판 의식을 드러냄

- 상징적 의미를 지닌 소재와 인물을 통해 주제 의식을 드러냄

 

5. 작품의 구조

· 발단 - 공룡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 중 한 사람을 왕으로 선출함

· 전개 - 박물관장이 공룡을 물리칠 임금이 태어날 것이라는 알을 들고 나타나자, 왕은 태어날 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살함

· 절정 - 박물관장은 전왕이 죽은 후 알 속에 공룡이 들어 있다고 말을 바꾼 뒤 왕 노릇을 함

· 하강 - '시민 라'를 포함한 시민 대표들이 모여 알 속에는 왕이 들어 있다고 여기고 박물관장에게 대 항함

· 대단원 - '시민 라'는 박물관장과 대립하지만, 박물관장의 계략으로 죽임을 당함

 

6. 인물 및 소재의 의미

· 박물관장 -군중들을 공포로 통치하며 정보를 독점하는 권력자

· 공룡 - 군중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며 공포를 유발하는 존재

· 위대한 임금님 - 군중들이 간절히 바라는 존재, 군중들을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는 대상

 

7. ‘알의 의미’ - 권력자로 하여금 권력 찬탈과 권력 유지를 위한 횡포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

 

8. 전체 줄거리

수시로 공룡의 침입을 받는 나라의 시민 대표들이 모여 그중 한 사람을 왕으로 선출한다. 어느 날 박물관장이 최근에 발견했다는 큰 알을 들고 왕과 시민 대표 앞에 나타난다. 그는 내일 알에서 공룡을 물리칠 강력한 왕이 깨어날 것이라고 전한다. 왕은 고심 끝에 알에서 깨어날 왕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결심을 하고 자결을 한다. 왕이 죽자 박물관장은 알 속에는 왕이 아니라 공룡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죽은 왕을 대신해 왕 노릇을 한다. '시민 라'를 포함한 시민 대표들은 밤새 알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왕인지 아니면 공룡인지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알 속에 위대한 왕이 있을 것이라 하면서 박물관장에게 대항한다. 박물관장과 대립하던 '시민 라'는 박물관장의 계략으로 목숨을 건 노름을 하게 되고 결국 박물관장의 칼에 찔려 죽임을 당한다.

 

9. 이해와 감상

1972년에 초연된 은 장막극으로, 박물관장으로 상징되는 권력자는 공룡을 외부의 적으로 설정하여 시민들을 공포로 통치하며 알에 대한 정보를 독점하여 권력을 유지한다. 박물관장과 대치하는 시민 라는 옳고 그름을 냉철하게 분별할 줄 알고, 자신의 신념과 언행을 일치시키려는 인물인 반면, 나머지 시민들은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 사소한 것에서부터 편법을 찾는 인물들로, 이들의 생리를 파악한 박물관장에게 이용당한다.

 

 

[01~04]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수레는 짐을 싣거나 사람을 태우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투에 쓰는 융차(戎車), 작업에 쓰는 역차(役 車), 물을 실어 나르는 수차(水車), 대포를 싣는 포차(砲車) 등 그 쓰임새에 따라 수천 수백 가지인데, 지금 여기서 창졸간에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다. 사람이 타는 수레와 짐을 싣는 수레는 민생과 관계되어 먼저 힘 써야 할 것이므로, 시급히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전에 담헌 홍대용, 성재 이광려와 함께 수레 제도에 대해 강론한 바 있다. 수레 제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궤(軌), 즉 바퀴와 바퀴 사이의 간격이 같도록 통일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바퀴 간격 을 같게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레의 축과 양쪽 바퀴 사이의 간격을 말하는 것이다. 두 바퀴의 간격이 정 해진 법식을 어기지 않는다면 모든 수레의 바큇자국이 통일될 것이다.
 『중용』에서 말하는 이른바 수레바퀴의 간격이 같다는 뜻의 ‘거동궤(車同軌)’가 바로 이것이다. 두 바퀴의 간격을 제멋대로 넓게 하거나 좁게 한다면 길의 바큇자국이 어떻게 한 가지 틀에 들어갈 수 있으랴!

 지금 길을 따라 천 리 길을 오면서 매일같이 수많은 수레를 보건만, 앞의 수레나 뒤의 수레가 동일하게 하 나의 바큇자국을 따라간다. 그러므로 미리 짜지 않고도 같게 되는 것을 일러 한 수레바퀴의 자국이라는 뜻의 ‘일철(一轍)’이라 말하고, 뒤에 오는 사람이 앞에 가는 사람의 행적을 일러 ‘전철(前轍)’이라고 말하는 것 이다. 도성의 문턱에 바퀴가 닿는 곳에는 옴폭하게 홈통이 생기는데, 『맹자』에서 말하는 ‘성문의 수레바퀴 자국[城門之軌]’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수레가 없었고, 아직 바퀴가 완전히 둥글지 않으며 바큇자국이 하나의 궤에 들지 않으 니, 이는 수레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고을이 험준해서 수레를 사용 할 수 없다.”라고 말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국가에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으니 길이 닦이지 않았을 뿐이다.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절로 뚫리게 마련이니, 어찌 길거리가 좁다거나 고갯마루가 높음을 걱 정하랴? 『중용』에서 말한 ‘수레와 배가 이르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이란 바로, 아무리 멀더라도 수 레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중국에도 검각(劒閣)에는 아홉 굽이나 되는 험한 길이 있고 태항산(太行山)에는 양의 창자처럼 위태한 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수레가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 때문에 섬서, 사천, 강소, 광동, 복건, 광서 지방 같은 먼 곳이라도 큰 장사꾼들과 식솔을 이끌고 부임하는 관리들이 수레바퀴를 서로 부딪쳐 가기를 마치 자 신의 마당을 밟고 가듯 하는데, 수레가 내는 굉음이 마치 구름도 없는 백주 대낮의 뇌성벽력 소리 같다.

 지금 우리가 지나왔던 마천령(磨天嶺)과 청석령(靑石嶺)의 고개, 장항(獐項)과 마전(馬轉)의 비탈길이 어찌 우리나라보다 덜하였던가? 그 바위가 가로막고 험준함은 모두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거늘, 그렇다고 중 국 사람들이 수레를 없애고 통행하지 않던가? 
 중국의 풍부한 재화와 물건이 어느 한곳에 막혀 있지 않고 사방에 흩어져 옮겨 다닐 수 있는 까닭은 모두 수레를 사용하는 이점 때문이다. 지금 당장의 효과를 따져 보더라도, 우리 사신 일행이 모든 폐단을 없애고 우리가 만든 수레에 우리 물건을 싣고 곧바로 북경까지 닿는다면 편리할 터인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 단 말인가?
 영남 지방 아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 사람들은 산사나무 열매를 절여서 간장을 대신하고, 서북 사람들은 감과 귤을 분간 못하고, 바닷가 사람들은 생선 창자를 밭의 거름으로 쓰고 있다. 어쩌다가 한번 이것이 서울에 오면 한 움큼에 한 닢 값이니, 어찌 그리 귀하게 되는 것인가?
 육진(六鎭) 지방의 마포(麻布), 관서 지방의 명주, 삼남 지방의 닥종이, 황해도 해서 지방의 솜과 쇠, 충남 내포의 소금과 생선 등은 모두 민생 일용품에서 뺄 수 없는 물건이다. 충북 청산·보은의 수천 그루의 대추, 황해도 황주·봉산의 수천 그루의 배, 전남 흥양·남해의 수천 그루의 귤·유자, 충남 임천·한산의 수천 그 루의 모시, 관동 지방의 수천 통의 벌꿀 등은 모두 사람들이 날마다 필요한 물건들로서 서로 바꾸어 써서 도 움을 주는 것이니, 누가 싫다 할 것인가?
 그러나 이 지방에서는 천한 것이 저 지방에서는 귀하고, 이름만 들었을 뿐 물건을 볼 수 없는 까닭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이는 곧 가져올 힘이 없는 까닭이다. 사방 수천 리밖에 되지 않는 좁은 강토에서 백성의 살림살이가 이토록 가난한 까닭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수레는 왜 못 다니는가. 한마디로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이다.
 사대부들이 평생 읽는다는 글은 『주례』라는 성인의 저술인데, 거기 나오는 거인(車人)이니 윤인(輪人)이 니 여인(輿人)이니 주인(輈人)이니 하는 용어를 말하고 있지만 그저 입으로만 외울 뿐이요, 정작 수레를 만 드는 법이 어떠한지 수레를 부리는 기술이 어떠한지 하는 연구는 없다. 이는 소위 건성으로 읽는 풍월일 뿐 이니, 학문에야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중략)
 누에고치를 켜는 수레인 소차(繅車)는 더욱 기묘해서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 큰 톱니바퀴로 만드는 것은 맷돌을 돌리는 법과 동일하다. 소차의 양 끝에도 톱니바퀴를 만들어 들쭉날쭉하게 이가 맞물려 쉴 새 없이 돌아가게 한다.
[A ]「소차는 몇 아름 되는 큰 얼레이다. 누에고치를 수십 보 밖에서 삶고, 중간에 수십 층의 시렁을 설치하 여 점차로 높고 낮은 형세가 되게 만든다. 시렁마다 그 끝에는 쇳조각을 세우고 바늘귀 같은 아주 작은 구멍을 뚫는다. 그 구멍에 실을 끼워 기계가 움직이고 바퀴를 돌게 한다. 바퀴가 돌면 얼레가 돌아가게 되어 톱니가 서로 맞물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로 천천히 실을 뽑아내는데, 실끼리 서로 부딪치거나 맞닿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돌아가므로 가는 실과 거친 실이 같이 나올 염려는 없다. 솥에서 삶긴 고치가 나와 얼레에 들어갈 즈음에 두루 쇠 구멍을 지나가게 되므로, 실에 붙었던 털이 나 까끄라기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 얼레에 들어가기 전에 실의 바탕은 이미 건조되어 깨끗하고 투명하여 빛이 나서, 다시 수고스럽게 잿물에 빨 필요 없이 바로 베틀에 올려 실로 사용해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고치를 켜는 법은 오직 손으로 당겨서 훌치는 것만 알지, 수레를 사용할 줄은 모른다. 명주실이 사람의 손을 타므로 이미 실로서 천연적이고 자연스런 품새가 없어지고, 실을 빼는 속도가 일정치 않아 실끼리 부딪치거나 맞닿을 때면 실과 고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제멋대로 날뛰고 함께 나아가 고치 판에 쌓이기도 한다. 실끼리 서로 엉겨 실의 갈피가 없어지고, 엉겨 붙고 말라 덩어리가 져서 실의 광택을 잃으 며, 부스러기가 틀어막고 알맹이가 뚤뚤 감겨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여 실을 잣는 사람이 거친 실을 골라내고 가는 것만 챙기다 보니 입과 손가락이 함께 고생을 한다. 

 

 

 

01. 윗글의 글쓴이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수레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지만,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하는 종류의 수레를 우선적으로 언급해야겠다고 생각한다.
② 기행 도중 목격한 바큇자국의 모습이, 『맹자』의 ‘성문의 수레바퀴 자국’이라는 문구가 나타내는 모양과 같다고 생각한다.
③ 우리나라 ‘바닷가 사람들’에게 흔하게 취급되는 수산물이 내륙에 오면 귀해지는 상황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④ 백성들이 곤궁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물자를 ‘가져올 힘이 없’기 때문이므로, 짐을 싣는 수레 를 사용하면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작업을 할 때, ‘명주실이 사람의 손을’ 많이 탈수록 더 좋은 생산품 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02. [A]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대상의 속성에서 인간의 덕목을 유추하여 교훈적 깨달음을 이끌어 내고 있다.
② 대상이 작동하는 원리와 과정을 서술하여 그 대상의 효용적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③ 대상의 쓰임을 다른 종류의 수레와 비교하여 그 대상이 가지는 장점을 부각하고 있다.

④ 대상이 널리 쓰이는 상황을 나열하여 그 대상에 대한 통념이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⑤ 대상이 움직이는 모습을 다른 살아 있는 대상에 빗대어 묘사하여 생동감을 유발하고 있다.

 

 

03. 글쓴이가 ㉠을 반박하는 방식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수레의 높은 이동성을 보여 주는 옛 문헌의 문구를 인용하고 있다.
② 중국에서는 아주 험한 곳에서도 수레가 많이 다닌다는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③ 우리나라에는 법식에 맞는 수레가 없어 길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④ 수레를 잘 몰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험준한 곳에서도 수레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⑤ 국가에서 수레를 사용하면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자연스럽게 닦일 것이라는 예측을  드러내고 있다.

 


04. <보기>를 참고하여 윗글을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수레 제도」는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의 기행 문집 『열하일기』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청나라의 문물에 대한 관심을 담고 있다. 이러한 관심의 밑바탕에는 공허한 학설이나 이론에 치우쳐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식을 도외시하던 양반 사대부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 즉 백성 들의 일상적 생활을 개선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를 중시했던 그의 학문적 지향이 자리하고 있다. 글쓴이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자신이 목격한 수레를 기존의 탐구 경험이나 지식과 관련지어 이 해하는 한편, 그 다양한 쓰임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관습적 사고를 극복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 동시대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선구자적 면모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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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사람이 타는 수레와 짐을 싣는 수레는 민생과 관계되어 먼저 힘써야 할 것’이라고 하는 데에 서, 수레에 대한 관심의 밑바탕에 이용후생에 대한 학문적 지향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군.
② ‘담헌 홍대용, 성재 이광려와 함께 수레 제도에 대해 강론한 바’를 언급하는 데에서, 기존의 탐구 경험과 관련지어 수레를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가 드러나는군.
③ ‘누가 싫다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청나라의 문물에 대해 탐구하는 일을 동시대인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이겠군.
④ ‘소위 건성으로 읽는 풍월’은 수레와 관련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식에는 무관심한 사대부들의 학문적 태도를 문제 삼는 표현이겠군.
⑤ ‘우리나라에서 고치를 켜는 법’을 돌아보는 데에서, 지식 확장을 통해 당대 조선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선구자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군.

 

 

 

 

정답

01. ⑤

02. ②

03. ④

04. ③

 

 

 

'수레 제도' 핵심 정리

 

1. 작자 - 박지원

2. 갈래 - 논설적 수필

3. 성격 : 비평적

4. 주제 : 중국 수레 제도에 대한 관심과 수레 도입의 필요성

5. 내용 연구

 

· 수레가 많은 지 ~ 아님을 알 수 있다 : 수레의 많고 적음이 왕권의 정도, 경제력 등을 평가하는 수단이 었으므로, 단지 교통 수단으로서의 기능만 가진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는 의미

· 문학 두 바퀴 사이에 ~ 어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 수레 이용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는 규격이 통 일되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 잔도 : 험한 벼랑 같은 곳에 선반을 매듯이 하여 만든 길

· 양장 : 고불꼬불하고 험한 산길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 아가위 : 산사나무 열매로 맛이 시며 껍질이 단단함. 약용이나 식용으로 쓰임

· 영남 어린이들은 ~ 분간하지 못한다 : 수레가 다니지 않기 때문에 각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품이 전국에 유통되지 못해 다른 지역의 사람들은 그 물품을 접할 수 없음을 지적

 

6. 구성

· 도입부 태평차, 대차, 독륜차에 대한 소개

· 중심부 수레 제도의 연구와 수레 도입의 필요성

· 종결부 중국 수레의 다양한 쓰임과 원리

 

7. 이해와 감상

조선 후기 연암 박지원의 연행록(燕行錄) 열하일기일신수필에 실린 수필로, 글쓴이는 이 작품에서 중국 여행 중 목격한 수레의 여러 쓰임과 효용을 언급하고 국내에도 적극적으로 수레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다양한 수레들의 외양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수레에 대한 탐구 경험과 배경지식을 중국에서의 견문과 관련지어 서술함으로써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다. 실학파로 분류되는 글쓴이의 이용후생에 대한 관심과 실사구시적 태도, 당대의 지배 계층인 양반 사대부들에 대한 비판 의식 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 01~0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앞부분 줄거리]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엄마의 만두 가게가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망하고 난 후, ‘나’는 언니가 사는 서울 변두 리 반지하 셋방으로 어린 시절부터 쳐 온 피아노를 옮겨 와 살게 된다. ‘나’는 타자 아르바이트를, 언니는 편입 준비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하루하루를 고되게 살아간다.

 

 나는 어서 학교에 가고 싶었다. 얼추 한 학기 등록금을 모았고, 무엇보다도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피로’ 나 ‘긴장’을 느끼고 싶었다. 긴장되는 옷을 입고, 긴장된 표정을 짓고, 평판을 의식하며, 사랑하고, 아첨하고, 농담하고, 험담하고, 계산적이거나 정치적인 인간도 한번 돼 보고 싶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 일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일 수도 있지만, 사실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가전 제품뿐이었다. 나는 냉장고에게 잘 보이거나, 전기밥통을 헐뜯고 싶지 않았다. 첫 월급을 탔을 때 누구를 만나, 어떻게 돈을 써야 할지 몰라 당황했었다. 이대로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는 일만 하다 죽을 수는 없다고, 매일 어깨에 의자를 이고 등교하는 아이처럼 평생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 순 없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손가락이 나뭇가지처럼 기다랗게 자라나는 을 꾸기도 했다. 나는 손가락만 진화한 인간 타자수가 되어 ‘다음 중 맞는 답을 고르시오.’라는 문장을 끊임없이 치고 있었다. 그리고 산더미만 한 문제지를 들고 인쇄소에 찾아가면, 그걸 전부 나더러 풀라는 것이었다. 나는 건포도를 오물거리며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으 니까’ 하고 안도했다. ‘8월에는 동대문에 옷을 사러 가야지. 화장은 언니에게 배우고, 아르바이트는 반드시 집 밖에서 하는 걸로 해야겠다.’ 도 다음엔 레가 오는 것처럼 여름이 끝난 후 반드시 가을이 올 것 같았지만, 계절은 느릿느릿 지나가고, 우리의 청춘은 너무 환해서 창백해져 있었다.

 

 방 안은 눅눅했다. 자판을 치다 주위를 둘러보면, 습기 때문에 자글자글 운 공기가 미역처럼 나풀대며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벽지 위론 하나둘 곰팡이 꽃이 피었다. 피아노 뒤에 벽은 상태가 더 심했다. 건반 하나 라도 누르면 꼭 그 음의 파동만큼 날아올라, 곳곳에 포자를 흩날릴 것 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피아노가 썩을 까 봐 걱정이었다. 몇 번 마른걸레로 닦아 봤지만 소용없었다. 우선 달력 몇 장을 찢어 피아노 뒷면에 덧대 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곧 피아노 건반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시골에서부터 이고 온 것인 데, 이대로 망가지면 억울할 것 같았다. 한날 마음을 먹고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았다. 그런 뒤 두 손으로 건반 뚜껑을 들어 올렸다. 손안에 익숙한 무게감이 전해져 왔다. 내가 알고 있는 무게감이었다. 곧 88개의 깨끗 한 건반이 눈에 들어왔다. 악기는 악기답게 고요했다. 나는 건반 위에 손가락을 얹어 보았다. 손목에 힘을 푼 채 뭔가 부드럽게 감아쥐는 모양을 하고. 서늘하고 매끄러운 감촉이 전해졌다. 조금만 힘을 주면 원하는 소리가 날 터였다. 밖에선 공사 음이 들려왔다. 며칠 전부터 주인집을 보수하는 소리였다. 문득 피아노를 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사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일단 그런 마음이 들자, 주체할 수 없는 감정 이 솟구쳤다. 한 음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소리는 금방 사라져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용기 내어 손가락 에 힘을 주었다. / “도─”
 ㉠도는 방 안에 갇힌 나방처럼 긴 선을 그리며 오래오래 날아다녔다. 나는 그 소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가슴속 어떤 것이 엷게 출렁여 사그라지는 기분이었다. 도는 생각보다 오래 도─ 하고 울었다. 나는 한 음이 완전하게 사라지는 느낌을 즐기려 눈을 감았다.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쿵쿵쿵쿵. 주먹으로 네 번이었다. 나는 얼른 피아노 뚜껑을 덮었다. 다시 쿵쿵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열어 보니 주인집 식구들 이었다. 체육복을 입은 남자와 그의 아내, 두 아이가 나란히 서 있었다. 사내아이는 아빠와, 계집아이는 엄마 와 똑 닮아 있었다. 외식이라도 갔다 오는지 그들 모두 입에 이쑤시개를 물고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학생, 혹시 좀 전에 피아노 쳤어?” / 나는 천진하게 말했다. 

 “아닌데요.” / 주인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친 거 같은데……?”
 나는 다시 아니라고 했다. 주인 남자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내가 곰팡이 얘길 꺼내자 “지하는 원 래 그렇다.”라고 말한 뒤,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피아노 옆에 기대어 앉았다. 그런 뒤 무심코 휴대 전화 폴더를 열었다. 휴대 전화는 번호마다 고유한 음이 있어 단순한 연주가 가능했다. 1번 은 도, 2번은 레, 높은 음은 별표나 영을 함께 누르면 되는 식이었다. 더듬더듬 버튼을 눌렀다. 미 솔미 레도 시도 파, 미 솔미 레도시도 레레레 미…… ㉡‘원래 그렇다’는 말 같은 거, 왠지 나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부터 폭우가 내렸다. 언니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늦는다고 했다. 벌써 퇴근했어야 하는 시간인데 정 산을 잘못한 모양이었다. ㉢언니는 계산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본 뒤, 안 맞을 경우 다시 계산기를 두드리고, 같은 일을 반복하며 밤을 새울 터였다. 나는 만두 라면을 먹으며 연속극을 보고 있었다. 볼륨을 한껏 높였는데도 배우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리모컨을 잡으니 뭔가 축축한 게 만져졌다. 한참 손바닥을 들여다본 후에야 그것이 빗물이란 걸 깨달았다. 나는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에서부터 물이 새고 있었다. 이물질이 잔뜩 섞인 새까만 빗물이었다. 그것은 벽지를 더럽히며 창틀 아래로 흘러내렸다. ㉣벽 면은 검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누군가의 얼굴 같았다.

 

                                                                                               (중략)
 빗물은 어느새 무릎까지 차 있었다. 나는 피아노가 물에 잠겨 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대로 두다간 못 쓰게 될 게 분명했다. ㉤순간 ‘쇼바’를 잔뜩 올린 오토바이 한 대가 부르릉— 가슴을 긁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토바이가 일으키는 흙먼지 사이로 수천 개의 만두가 공기 방울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언니의 영어 교재도, 컴퓨터와 활자 디귿도, 아버지의 전화도, 우리의 여름도 모두 하늘 위로 떠올랐다 톡톡 터져 버렸다. 나는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깨끗한 건반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반 위에 가만 손가락을 얹어 보았다. 엄지는 도, 검지는 레, 중지와 약지는 미 파. 아무 힘도 주지 않았는데 어떤 음 하나가 긴소리로 우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도—” / 도는 긴소리를 내며 방 안을 날아다녔다. 나는 레를 짚었다.
 “레—” / 사내가 자세를 틀어 기역 자로 눕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편안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손끝에서 돋아나는 음표들이 눅눅했다.
 “솔 미 도레 미파솔라솔…….”
물에 잠긴 페달에 뭉텅뭉텅 공기 방울이 새어 나왔다. 음은 천천히 날아올라 어우러졌다 사라졌다.

 

 

 

 

01. ㉠~㉤을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청각적인 대상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여 대상에 대한 공허함을 형상화하고 있다. 

② ㉡: 인용의 방식을 활용하여 인물로 하여금 부당함을 느끼도록 만든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③ ㉢: 가정적 진술을 통해 인물이 처해 있을 상황을 추측하여 제시하고 있다.
④ ㉣: 사물을 인격체에 비유하는 방식을 통해 인물이 처한 현실의 비통함을 형상화하고 있다.
⑤ ㉤: 음성 상징어와 촉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02. 에 대해 이해한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나’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후회를 암시하고 있다.
② ‘나’가 벗어나고자 하는 생활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③ ‘나’와 가족들 간의 불화를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④ ‘나’가 자신의 일에 대해 가진 자부심을 반영하고 있다. 

⑤ ‘나’가 유년 시절에 받은 상처의 치유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03. <보기>를 바탕으로 윗글에 대해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도도한 생활」에서 ‘나’는 쉽게 안주할 수 없는 현실과 사회적 억압을 받는 열악한 환경 속에 놓인 채 자신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주변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처한 현실 에 쉽게 함몰되거나 환멸에 빠지지는 않으며,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자존을 지키려 노력한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온 사물인 피아노에 대한 감정과 피아노를 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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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사람들과 관계 맺으며 피로나 긴장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을 통해 ‘나’가 고립된 주변인의 상태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상황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군.
② ‘매일 어깨에 의자를 이고 등교하는 아이처럼 평생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 순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통해 ‘나’가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생활을 평안하게 안주할 수 있는 삶으로 여기지 않음을 알 수 있군.
③ ‘피아노가 썩을까 봐 걱정이었다’는 것을 통해 오랫동안 함께해 온 사물인 피아노에 대한 ‘나’의 애착을 짐작할 수 있군.
④ ‘한 음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소리는 금방 사라져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통해 ‘나’가 자신이 겪는 사회적 억압에 대한 분노를 억압의 주체에게 직접 표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군.
⑤ ‘나’가 방 안이 물에 잠겨 가는 상황에서 ‘피아노 뚜껑을 열’고 ‘손가락에 힘을 주’며 용감하게 피아노를 치는 행위를 통해 암담한 상황에서도 환멸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군.

 

 

 

 

정답 

01. ①

02.  

03. ④

 

 

 

'도도한 생활' 핵심 정리

 

 

1. 갈래 현대 소설

2. 성격 - 사실적, 상징적

3. 재재 - 피아노, 반지하방

4.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5. 주제 청년들이 처한 고단한 삶과 자존을 지키려는 노력

6. 특징

개인적인 공간과 사물에 주목하여 주제를 형상화

도도한 생활이란 중의적 의미를 지닌 제목을 통해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줌.

개인의 일상적인 삶을 그리며 그에 내재된 사회의 문제 표현

참심하고 감각적인 표현 사용

 

7. 구성

 

발단 : 만두집을 하는 엄마는 에게 피아노를 사 주고, ‘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좋아함

전개 : 아빠의 빚보증으로 인해 집이 망하고, 서울권 대학에 합격한 는 피아노와 함께 언니의 서울 반 지하방으로 이사함

위기: 저녁부터 내린 폭우에 방으로 빗물이 차오르고, ‘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늦는 언니를 기다리며 방 에 들어온 빗물을 닦아 냄

절정 : 빗물을 퍼내던 중 돈이 필요하다는 아빠의 전화를 받게 되고, 언니의 예전 애인이 술에 취해 찾아 옴

결말 : 검은 비가 출렁이는 반지하방에서 는 이제 못 쓰게 될 것이 분명한 피아노를 연주하며, 언니의 잠든 예전 애인을 쳐다 봄

 

8.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2000년대를 살아가는 20대 젊은이의 현실을 감각적이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는 살아갈 발판을 마련하기 힘든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로, 소설은 유년기부터 현재까지의 삶을 피아노와 관련된 사건들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가 머물고 있는 지하방과 피아노와 같은 개인적인 공간과 사물에 주목하여 개인의 일상적인 삶과 젊은이들이 겪는 사회적 문제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제목인 도도한 생활은 피아노 음계 의 반복되는 소리와 피아노를 자유롭게 연주하며 살아가는 도도한 생활을 이중적으로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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