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5]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4차 산업 혁명으로 인해 디지털 경제의 핵심 자원으로 부상하게 된 데이터는 일종의 재화로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우선 데이터는 정보로서, 특정 용도에 사용되면 더 이상 그 외의 다른 용도에는 사용할 수 없는 대부분의 일반적 재화와는 달리 한번 사용된 후에도 다른 용도로 다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경합적인 성격을 띤다. 또한 최종적으로 소비되는 재화가 아니라,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투입된다는 점에서 자본재로 간주된다. 복제에도 거의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이를 다양한 경제 주체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사회 전체적으로 재화와 서비스 생산 비용이 하락하므로 데이터의 공유는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가시킬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중요한 데이터는 인간의 행동에 관련된 것으로, 최근 빅 데이터의 가치가 부각되는 이유는 결국 이것이 인간 행태에 관한 개인 정보들을 대량 집적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인공 지능을 기반으로 하는 4차 산업 혁명 사회에서 인공 지능 시스템의 훈련을 위해서는 새로운 데이터가 끊임없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데이터의 한계 효용은 감소하지 않는 반면, 데이터 수집을 위해 막대한 투자 비용을 필요로 하는 인프라 구축 단계가 끝나면 추가적인 한계 비용은 점점 낮아져 0에 수렴한다. 따라서 데이터를 수집 · 생성하여 빅 데이터를 구축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빅 데이터는 무제한 생성하는 것이 최적화된 생성이다.

                                                                                                                                          1문단 : 데이터의 개념과 특징

 

 데이터의 재산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다른 지식 재산처럼 데이터에 대해서도 배타적 지배권 및 소유권을 인정하려는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우선 데이터 보유자에게 데이터 소유권을 인정하자는 주장이 있다. 현행법상 저작권법이나 영업 비밀 보호법에 의해서는 데이터 보유자가 포괄적인 보호나 배타적 지배권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데이터를 다량으로 수집하고 축적해 이익의 기반으로 삼는 대기업과 같은 빅 데이터 보유자에게 소유권을 인정한다면, 데이터의 합법적 유통에 기여하고 데이터 생성에 대한 투자 유인이 촉진될 수 있다는 전망이 가능하다. 그러나 빅 데이터가 지닌 막강한 경쟁력으로 인해, 데이터를 유통함으로써 치러야 할 비용이 유통으로 인해 얻는 이익보다 클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데이터가 유통되지 않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 인정된 데이터 소유권이 거래 비용을 일으켜 오히려 데이터 거래의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결국 데이터 소유권은 이미 빅 데이터를 축적한 기업의 승자 독식 현상이 강화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2문단 : 데이터 보유자의 데이터 소유권을 인정하자는 주장과 한계

 

 이와 달리 데이터의 소유권이 빅 데이터의 정보 주체, 즉 빅 데이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개인 정보의 생산자들에게 있다고 보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개인 정보는 현행법상 각 정보 주체에게 자신의 개인 정보를 통제할 권리를 부여하는 개인 정보 보호법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빅 데이터 수집 및 이용과 해당 법 간의 긴장 관계가 생겨나는데, 이 법은 개인의 자기 정보 결정권을 보장할 뿐 개인이 자신의 개인 정보로부터 발생하는 경제적 수익을 통제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빅 데이터가 갖는 경제적 가치를 고려하여, 사람들이 특정 기업의 플랫폼을 사용하면서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데이터 노동으로 규정하고 그 정보의 제공자에게 경제적 가치의 일부를 귀속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는 개인 정보 제공자를 데이터 생산자이자 소유자로 간주하는 것으로, 개인 정보가 지닌 빅 데이터로서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소비자가 적정하지 않은 대가를 받고 개인 정보를 넘김으로써 빅 데이터를 수집, 축적한 기업에 부가 집중되는 현상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깔려 있다.

                                                                                              3문단 : 데이터 생산자의 데이터 소유권을 인정하자는 주장

 

 그러나 소비자가 적정하지 않은 대가를 받는다는 점은 데이터 소유권의 인정과는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정보 주체의 데이터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 데이터 보유자의 그것을 인정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래 비용을 높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소유권이나 배타적 지배권을 인정하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데이터의 생산 유인을 높이기 위해서인데 빅 데이터에 포함된 개인 정보는 일상생활의 기록에 가까운 것으로 소유권의 인정 여부와는 상관없이 데이터의 생성과 양은 유사하게 지속될 것이라는 점에서, 정보 주체의 데이터 소유권을 인정하자는 주장은 한계를 보인다.

                                                                                   4문단 : 데이터 생산자의 데이터 소유권을 인정하자는 주장의 한계

 

 데이터는 그 특성상 여러 경제 주체들에게 공유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효용을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미 빅 데이터 독점 현상이 두드러진 상황에서 데이터를 자발적으로 유통시킬 유인이 부재한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효율적인 데이터 경제 구축을 위해 필요성이 인정될 경우 빅 데이터를 공개하거나, 특정 플랫폼에 집적된 자신의 데이터를 이동시킬 수 있는 권리를 정보 주체에게 보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빅 데이터의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 등이 현재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5문단 : 데이터 소유권과 관련된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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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윗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문제 상황의 원인을 기준으로 다양한 해결책을 유형화하고 있다.

대상의 특징을 다각도로 살펴보고 변모의 양상을 설명하고 있다.

상반되는 주장의 한계와 함께 이를 보완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적 배경과 함께 대상에 대한 인식의 변화 과정을 밝히고 있다.

전문가의 이론을 중심으로 대상의 경제적 효용을 구체화하고 있다.

 

 

2. 윗글을 통해 할 수 있는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데이터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반적 재화는 경합적인 성격을 띤다.

자본재는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투입되는 재화를 가리킨다.

현행 저작권법과 영업 비밀 보호법은 데이터 보유자의 데이터 소유권을 보장하지 못한다.

현행법상 개인 정보 보호법은 각 정보 주체에게 개인 정보를 통제할 권리를 부여하고 있다.

한계 비용과는 무관하게 한계 효용이 감소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빅 데이터의 무제한 생성이 기업에 유리하다.

 

 

3. 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은 모두 현행법의 한계를 주장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② ㉠은 모두 실행될 경우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③ ㉠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으로 이어진다.

④ ㉠과 달리 은 거래 비용을 일으켜 궁극적으로 데이터 거래의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다.

⑤ ㉡과 달리 은 정보 주체로서의 개인이 아닌 기업의 이익을 위해 기능할 가능성이 높다.

 

 

4. 윗글을 바탕으로 <보기>를 설명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A라는 회사가 현재의 유통 사업으로 유의미한 수익을 낼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A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A의 주력 사업이 뭐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은 유통보다 A의 실시간 데이터 수집 능력에 더 관심을 둡니다. 데이터는 미래의 자본이라고도 하잖아요. 이 커머스가 가장 발달한 나라의 고객, 쇼핑, 물류 데이터와 그 흐름을 매년 1조 원 비용으로 사들일 수 있다면 오히려 이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대형 포털 사이트 B에 새로이 가입하여 14일간 매일 참여하면 3일차, 10일차, 14일차에 총 16,000원에 달하는 현금성 포인트를 지급하는 이벤트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참여자 수로 인해 이벤트 사흘 차를 기준으로 지급해야 하는 포인트가 90억 포인트에 달하게 되자, B는 이벤트를 사흘 만에 종료해 참여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포인트를 지급받기 위해 BB페이 서비스에도 가입해야 했던 가입자들은, 자신들이 추가적으로 제공한 개인 정보와 관심사 관련 데이터가 해당 포털 사이트의 이윤 추구에 이용되었다는 점을 알고 더욱 분노하였다.

이 커머스(E commerce) : 컴퓨터 통신이나 인터넷을 이용해서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전자 상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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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에서 이 커머스가 가장 발달한 나라의 고객, 쇼핑, 물류 데이터와 그 흐름에 대한 진술은 인간 행태에 관한 개인 정보들을 대량 집적한 것이라는 빅 데이터의 특징과 관련지을 수 있다.

② ㉮에서 데이터의 수집이 실시간으로 수행된다는 것은 새로운 데이터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4차 산업 혁명 사회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③ ㉮에서 매년 1조 원의 비용을 들여도 이득이 된다는 언급은 결과적으로 빅 데이터 축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그 수집과 축적에 필요한 비용을 넘어선다는 인식에 기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④ ㉯에서 대형 포털 사이트 B가 이벤트를 사흘 만에 종료한 것은 데이터의 유통으로 인해 얻게 될 이익을 보장할 정도로 데이터가 수집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⑤ ㉯에서 분노한 가입자들은 자신들이 정보 주체로서 이벤트 참여를 위해 제공한 개인 정보와 관심사 관련 데이터에 대한 생산자이자 소유자라는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5. 문맥상 ~와 바꿔 쓰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 부단히

② ⓑ : 부담해야

③ ⓒ : 보유한

④ ⓓ : 제고하기

⑤ ⓔ : 중시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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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1. 2. 3. 4. 5.

 

 

1. 해제

 이 글은 데이터의 개념과 특징을 소개하면서, 빅 데이터의 경제적 가치가 주목받는 상황에서 제기된 데이터 소유권에 대한 상반된 주장과 그 한계를 설명하고 있다. 데이터의 소유권이 데이터 보유자에게 있다는 주장은 개인의 데이터를 다량으로 수집하고 축적하여 이익의 기반으로 삼는 대기업과 같은 빅 데이터 보유자에게 데이터의 소유권이 있다는 것으로, 이는 부의 축적이 데이터를 보유한 기업에 집중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반면, 데이터의 소유권이 데이터의 정보 주체, 즉 개인 정보의 생산자들에게 있다는 주장은 데이터가 지닌 경제적 가치를 개인에게 돌려주자는 것으로, 이 주장이 실현될 경우 거래 비용이 높아질 수 있으며 소유권의 인정 여부와 생성되는 데이터의 양은 무관하다는 점에서 한계를 보인다.

 

2. 주제 데이터의 경제적 가치와 데이터 소유권의 인정 대상에 대한 상반된 주장

 

 

한용운 (1879~1944)

 

 만해(萬海) 한용운 (1879~1944)은 충남 홍성군 결성에서 태어났으며, 소년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896년 설악산 백담사 오세암에 은거하여 수년간 머무르며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인 교양 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이 무렵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과 세계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연해주로 건너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주를 거쳐 돌아왔다. 190114세 때 결혼했던 고향의 처가에 돌아와 약 2년간 은신, 그 후 다시 집을 나와 방황하다 1905년 강원도 백담사에서 수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1908년경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쿄, 교토 등지의 사찰을 순례하고 조동종대학림에서 6개월간 불교와 동양철학을 연구했다. 1911년 교포의 실정을 알아보기 위해 만주를 여행하다가 교포로부터 밀정으로 의심을 받아 총격을 당하기도 했다. 이 무렵 친일 승려 이회광 일파가 원종종무원을 설립하고 1910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동종과 연합 맹약을 체결하자, 이에 분개하여 1911년 박한영 등과 승려 대회를 개최, 친일 불교의 획책을 폭로하여 그 흉계를 분쇄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그는 당시 조선 불교의 침체와 낙후성과 은둔주의를 대담하고 통렬하게 분석·비판한 저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1913)을 발표하여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는 학구적인 입장에서 불교를 해설한 이론서가 아니라 조선 불교의 현상을 타개하여 불교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실천적 의도에서 집필한 것이다. 여기 제시된 그의 사상은 자아의 발견, 평등주의, 불교의 구세주의, 진보주의 등으로서 이후 그의 모든 행동적·사상적 발전은 이 사상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졌다. 1917년경부터 항일 투사로서의 행동을 시작했고,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惟心)》』을 창간·주재했다.

 

 19193·1운동 때는 독립선언 준비 과정에서 최린과 더불어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3년간 옥고를 치르는 동안 검사의 취조에 대한 답변서로서 세칭 조선독립이유서를 집필, 그의 독립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표현된 그의 독립사상은 대체로 자유사상, 평등사상, 민족사상, 민중사상, 진보사상, 평화사상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922년에 출옥한 한용운은 각지로 전전하며 강연을 통해 청년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1924년 불교청년회의 총재에 취임했다. 1926년에는 내설악 백담사에서 1925년에 쓴 시집 님의 침묵을 간행하여 문단에 큰 파문을 던졌다. 그는 이미 1918년에 창조(創造)동인들보다 앞서 유심에 몇 편의 시를 발표한 일이 있고 후일에도 흑풍(1935), 후회(1936), 박명(1938) 등 장편소설과 상당수의 한시, 시조를 남겼으나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님의 침묵한 권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27신간회의 발기인이 되어 경성지부장을 역임했고,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는 민중대회를 열고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성북동 심우장으로 거처를 옮긴 후 조선불교동맹만당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활약했다. 1931년에는 불교(佛敎)를 인수·간행하여 불교청년운동 및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벌이는 한편 여러 편의 소설을 발표하면서 많은 불교 관련 논설을 집필했다. 일제의 강요에 의해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친일 활동에 적극 가담했을 때에도 끝까지 민족의 지조를 지켜 서릿발 같은 절개와 칼날 같은 의기를 보여 주었다. 그 후 1944629일 중풍으로 사망하자, 그 유해를 화장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한용운은 당대 문단과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한국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섰던 승려였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저항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 가운데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으로 남아 있는 부분의 하나가 시작 활동이라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그는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고 많은 한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시정신의 그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만해 한용운의 위대성을 말해 주는 중요한 일면이 되고 있다.

시집 님의 침묵이전에 시인으로서 만해 한용운의 이름은 문단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용운 자신이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내세워 작품을 발표한 적도 별로 없다. 그는 초기 문단 형성기에 서구 문학에 심취해 있던 문인들과 문학적 교류를 가졌던 일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님의 침묵의 시인 한용운의 등장은 당대 문단에서는 의외의 경우에 속하는 일이다. 당시 동아일보님의 침묵을 읽은 소감을 발표했던 주요한도 적막하던 시단에 홀연히 출연한 한용운을 한 사람의 불도(佛徒)라고 소개하고 있을 정도였다. 한용운은 이 시집을 내면서 이렇게 자신의 소감을 피력했다.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을 압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용운이 시 님의 침묵의 후기에서 밝힌 망설임과 부끄러움의 진정한 뜻을 당대의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시집 님의 침묵이 당시 문단에 파문을 던진 것은 사실이지만, 문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시에 대한 논의는 해방 이후 196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화되었다.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만해의 뜻과는 달리, 님의 침묵이 간행된 후 한 세대가 지난 다음에야 새롭게 읽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시대의 독자들에게는 당연히 매서운 서릿발 아래 피어 있는 국화꽃으로 보였어야 할 만해의 시는 오히려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 고결한 정신이 조금씩이나마 이해되고 있다.

 

 한용운의 그의 시를 통해 님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시적 관심은 모두 님이라는 존재에 집중되고 있으며, 시를 통해 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형상화시켜 놓고 있다. 그는 기룬 것은 모두 님이며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존재가 바로 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님은 시적 자아와 함께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다. 님은 이미 현실을 떠나가 버렸기 때문에, 시인은 떠나 버린 님, 지금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님을 노래하고 있다. 한용운은 님이 가 버린 상태를 사랑의 이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라는 역설의 표현을 통해 님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강조하기도 하다. 특히 이별은 미()의 창조라고 말함으로써, 사랑의 아름다움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운데에서 더욱 진실하게 드러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용운이 노래하고 있는 이와 같은 님의 존재 방식은 당대의 상황과 연관되어 식민지 시대의 비극적인 역사와 빗대어지기도 하며,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 의미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한용운의 시에서 님의 존재는 침묵이라는 말을 통해 역설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는 님이 떠난 현실을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객관적인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님은 떠나갔고, 그렇기 때문에 님이 부재하는 현실은 비극적인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용운은 대상으로서의 님의 존재를 비극적 공간에서 끌어내고, 오히려 그 존재의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시적 진술에서처럼, 시적 자아는 대상으로서의 님을 떠나지 않고 있다. 님과 시적 자아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시적 주체로서의 나와 시적 대상으로서의 님의 분리와 통합이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한용운의 시는 비탄과 정한의 노래는 아니다. 한용운은 님이 떠나 버린 슬픔은 말하면서도, 그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님에 대한 새로운 기대와 신념을 강조하고 있다. 비극의 현실 속에 빠져 있는 개인의 정서적 파탄을 그리지 않고, 오히려 존재의 본질과 새로운 삶의 전망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용운의 시는 의지적이며 강렬한 어조가 돋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한용운 자신의 혁명적 기질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지만, 역사의식의 투철성을 말해 주는 것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한용운의 시는 가 버린 님을 노래하고 있으나,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초조함을 노래한다. 시적 대상에 대한 간절한 기원이 그 속에 깃들어 있다.

 

 한용운의 시의 정신은 역사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가 삶에 대한 정직성을 지키고, 악에 항거하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투쟁했던 행동적 실천가였음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의지를 시적으로 구현하면서 가장 서정적인 어조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다. 한용운의 시적 언어가 획득하고 이는 일상적 경험의 진실성은 저항적 시정신의 형상을 위해서도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한용운 문학의 위대성이 그의 인간적인 삶과 그 행적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 자체에서 비로소디는 것이라는 점이다. 한용운의 생애를 조심스럽게 검토해 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의 문학 수업이 어느 때쯤에 이루어진 것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 오랫동안 한학 수업을 받았을 뿐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통한 신학문에의 접근이 전혀 불가능했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님의 침묵과 같은 한용운의 업적은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특히 님의 침묵이전에 발표한 한용운의 논설들이 국한문을 혼용한 문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점을 견주어 볼 때, 님의 침묵이 거두고 있는 시적 성과는 한국어의 시적 성취라는 점에서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다.

 

 한용운의 시는 일상적인 생활에 뿌리박고 있는 고유한 우리말의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살려 내고 있다. 그만큼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의미의 단조로움이나 시정신의 소박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감정에 충실함을 의미한다. 생활 감정에 충실하기 때문에, 시적 정서의 공감대를 더욱 확대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 모국어를 순화하는 것이 시인이 맡은 궁극적인 사명 중의 하나라면, 한용운은 초창기의 시단에서 바로 그러한 일을 수행했던 시인임에 틀림없다. 시인으로서 한용운의 업적은 바로 이러한 언어와 문체에서부터 더욱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권영민 교수의 문학 콘서트, 권영민, 해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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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4]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929년 미국 주식 시장의 붕괴를 기점으로 전 세계로 확산된 대공황이 경제학에서 가지는 의미는 빅뱅(Big Bang)이 물리학에서 가지는 의미에 비유되기도 한다. 산업 혁명 이후 서구 경제는 여러 차례의 경기 침체를 경험하였지만, 대공황은 불황 정도가 유례없이 깊고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경기 침체와는 구별된다. 주식 시장의 붕괴는 대공황 이전에도 여러 차례 관찰되던 현상이므로 그 자체가 대공황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점과 대공황의 전개 및 회복 과정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주식 시장 붕괴에 이은 은행 파산과 디플레이션, 보호 무역주의의 대두에 따른 국제 교역 감소 등의 연쇄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통상적인 경기 침체가 대공황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대공황의 원인과 관련해서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 구조의 불안정성과 경제 정책의 실패가 대공황을 초래하였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져 있으나, 불안정한 경제 구조의 주요 원인에 관해서는 통화 가설과 지출 가설로 구분되는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1문단 :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여러 가설의 존재

 

 ㉠통화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대공황의 원인을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의 통화 정책 실패에서 찾고 있다. 연준은 1920년대 중반까지 공개 시장에서 국채 매입을 통해 통화량을 확대함에 따라 주식 시장으로 자금이 유입되었고 전반적인 물가와 더불어 주식과 같은 자산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세계는 국제 통화 제도로 금 보유고가 증가할 경우 통화량도 같이 증가시켜 자국 화폐와 금의 교환 비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금 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수출 증가에 따른 해외로부터의 지속적인 금의 유입으로 금 보유고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식 시장 과열을 진정시키기 위해 연준이 공개 시장을 통해 국채를 매각하는 긴축 통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통화량이 감소하고 이자율은 높아짐에 따라 대공황이 초래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통화량을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연준은 상업 활동에 사용된 어음만을 인수하여 통화량을 증가시키는 진성 어음주의를 통화 정책 기조 삼고 있어 상업 활동이 위축되는 대공황 시기에 통화가 오히려 줄어들게 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진성 어음주의하에서의 통화 정책은 경기 순응적인 정책으로, 불황기에는 통화량을 감소시켜 시장 유동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작동되었던 것이다. 통화 긴축으로 인해 주식 시장이 폭락하고 기업이 파산하면서 일부 은행이 도산되고 있음에도 당시 연준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이후 은행이 연쇄 도산되었고 이는 통화량을 추가적으로 위축시킴으로써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을 야기하고 실물 경제의 악화를 초래하였다. 이 가설에서는 연준이 국채를 매입하는 공개 시장 운영을 통해 통화량을 시장에 적극적으로 공급하였다면 통상적인 경기 침체가 대공황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금융 시장의 작동 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연준의 정책 실패를 대공황의 근본적인 요인으로 인식하고 있다.

                                                                                                                                        2문단 : 통화 가설의 개념과 이해

 

 한편 지출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주식 시장 붕괴에 따른 내구재에 대한 소비 감소가 미국 대공황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럽에 군수 물자를 판매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한편 설비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1920년대 말 미국 경제가 심각한 과잉 설비 상태에 처해 투자 기회가 소진되면서 실물 투자보다는 오히려 주식과 같은 금융 자산에 대한 투자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의 내재적 불안정성에 따른 예기치 못한 요인으로 주식 시장이 붕괴되면서 미래 소득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가함에 따라 내구재 소비가 감소하게 되고 생산된 제품이 재고로 남게 되자 기업 투자 역시 감소하게 되었다. 기업의 투자 감소는 생산에 필요한 노동에 대한 수요 감소에 따른 실업 증가를 야기해 노동자들의 소득이 줄고 소비할 수 있는 구매력을 감소시켜 민간의 소비 수요 감소로 이어졌다. 소비 수요 감소는 디플레이션과 더불어 기업 파산을 유발하고 이는 가계 및 기업 대출의 부실로 은행들의 대출 원리금 회수가 어려워지고 이는 연쇄적인 은행 파산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대공황이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가설에서는 미국에서 발생한 대공황이 전 세례로 확산된 원으로 당시의 국제 통화 제도였던 금 본위제를 들고 있다. 대공황 발생 이후 미국은 보호 무역을 통해 해외로부터 수입을 줄이고 외국에 빌려준 돈을 금으로 환수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의 금 보유고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금 본위제하에서는 금과의 교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들 국가들은 줄어든 금 보유고만큼 자국의 통화량을 줄이게 되었고 이는 결국 국내적으로 디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를 유발하면서 미국의 대공황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대공황의 원인이 결국 민간의 소비 수요의 감소에 따른 것이므로 정부가 적재 재정을 통해 민간 수요를 진작하고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팽창적인 재정 정책을 실시하였다면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더불어 각국 통화 당국의 재량적이고 신축적인 통화량 조절을 위해서는 국제 통화 제도의 개편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3문단 : 지출 가설의 개념과 이해

 

 아직까지도 대공황의 원인에 대해 상이한 가설이 대립하는 이유는 여전히 그 원인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공황의 원인과는 별개로 대공황이 남긴 유산은 명확하다. 대공황의 회복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에 대한 민간의 인식이 변화하였고, 이와 함께 경기 대응과 위기 관리를 위한 정부의 개입과 간섭이 정당화되면서 공공 부분이 확대되었으며, 그동안 신봉되어 왔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 기능을 지지하는 자유방임주의는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금융 위기를 예방하고 수습하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의 적극적인 노력과 대응이 필요하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게 되었다.

                                                                                                                                         4문단 : 대공황의 유산과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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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윗글을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대공황으로 인해 디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이자율이 상승하기 시작하였다.

대공황은 이전 시기의 통상적인 경기 침체에 비해 침체 정도가 크고 지속 시간도 길었다.

연준의 공개 시장을 통한 국채 매입은 통화량을 증가시켜 이자율을 낮추는 요인이 된다.

통화 가설은 통화량 확대를, 지출 가설은 재정 지출 확대를 대공황의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대공황 이전에는 경기 침체에 대응하여 정부가 개입하는 것보다는 시장 자율에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 윗글을 바탕으로 <보기>를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한 것은?

<보기1>---------------------------------------------------------------------------------------------------------------------------------------------------

경제학자 A는 통화량이 감소하게 되면 이자율이 상승하였을 것인데 대공황 당시 자료에서는 이자율 상승이 관찰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통화 가설을 부정하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경제 변수를 이해하는 데 있어 명목 변수와 실질 변수를 명확히 구별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화폐 단위로 표시된 명목 통화량이 감소한 것은 분명하나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실제 물가 역사 하락하고 있어 명목 통화량을 실제 물가로 나눈 화폐의 구매력을 나타내는 실질 통화량은 감소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실질 이자율 역시 상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계산된 실질 이자율은 명목에 따라 실제 인플레이션율을 차감한 사후적 실질 이자율로서 실물 경제에서 투자와 소득을 실제로 결정하는 사전적 실질 이자율과는 개념적으로 구분된다.

다른 이자율보다는 사전적 실질 이자율이 실물 경제에 미치는 효과를 중시하는 통화 가설에 따르면 통화량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명목 이자율이 상승하지 않더라도, 사전적 실질 이자율의 인상으로 경기 침체가 발생할 수 있다. 명목 이자율은 사전적 실질 이자율에 미래에 예상되는 기대 인플레이션율을 더한 것이다. 그러므로 통화량 감소로 물가 하락이 예상되어 기대 인플레이션율이 음수(-)인 상황, 즉 디플레이션이 예상되는 경우에는 사전적 실질 이자율은 명목 이자율을 상회하게 된다. 사전적 실질 이자율의 상승은 투자를 줄여 생산 및 소득의 감소를 가져오며 그 결과 경기 침체를 초래한다. 따라서 통화 가설의 성립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실질 통화량이 아니라 기대 인플레이션율의 측정을 통해 사전적 실질 이자율의 움직임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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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가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명목 이자율 상승이 필수적인 요건이다.

통화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대공황 당시에는 기대 인플레이션율이 실제 인플레이션을 상회하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기대 인플레이션율이 영(0)이라면, 명목 이자율의 하락은 투자 및 소득을 증가시키는 요인이다.

디플레이션에 대한 기대가 존재할 경우, 명목 이자율은 사전적 실질 이자율을 상회할 것이다.

경제학자 A의 주장이 타당하려면 대공황 당시 명목 이자율의 상승 폭이 기대 인플레이션율의 상승 폭과 같거나 그보다 더 커야 한다.

 

3. 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 것만을 모두 고른 것은?

<보기>----------------------------------------------------------------------------------------------------------------------------------------------------

() 에서는 디플레이션을 대출 부실에 따른 은행의 연쇄적인 파산을 야기하였다고 주장한다.

() 에서는 금 본위제는 통화 당국의 통화량 조절을 어렵게 함으로써 재량적인 통화 정책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본다.

() 주식 시장 붕괴의 원인에 대해 은 정책의 실패로 보는 반면, 은 시장 내부의 불안정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 과 달리 금 본위제가 미국의 디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요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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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4. 윗글을 읽고 대답할 수 있는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대공황은 이전의 경기 침체와 비교해서 어떤 측면에서 차별성을 가지는가?

통화 가설은 대공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떤 통화 정책이 걸림돌로 작용하였다고 주장하는가?

통화 가설은 미국의 대공황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경로를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가?

지출 가설은 대공황 직전에 주식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진 원인을 무엇이라고 설명하는가?

지출 가설에서는 미국의 대공황이 어떤 경로를 통해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고 설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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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1. 2. 3. 4.

 

 

1. 해제

 이 글은 1929년에 발생한 전대미문의 경기 침체인 대공황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설이 존재함을 설명하고 있다. 통화 가설의 경우에는 대공황의 원인을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의 긴축 정책에 따른 통화량 감소로 보고 있다. 반면 지출 가설의 경우에는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 정책을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대공황이 심화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정부 정책보다는 금 본위제가 내재하고 있는 디플레이션 유발적인 국제 통화 제도가 대공황의 구조적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대고오항은 회복 과정에서 이전까지의 자유방임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정부의 개입과 간섭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겼다.

 

2. 주제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가설과 경제 정책 방향

 

 

[01~0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 나는 이로다

 

박모(薄暮)의 수묵색 거리를 가량이면

슬픔은 멍인 양 목줄기에 맺히어

소리도 소리도 낼 수 없누나

 

저마다 저마다 마음 속 적은 고향을 안고

창창(蒼蒼)한 담채화(淡彩畵) 속으로 흘러가건만

나는 향수할 가나안의 복된 길도 모르고

 

꿈 푸르는 솔바람 소리

아득한 풍랑인 양 머리에 설레노니

 

깃은 남루하여 올빼미처럼 춥고

자랑은 호올로 높으고 슬프기만 하여

내 타고 남은 차라리 욕되도다

어둑한 저잣가에 지향없이 서량이면

우러러 밤 서리와 별빛을 이고

나는 한 오래기 갈대인 양

 

- 마르는 학이로다

                                                                                                               -유치환,

 

 

() 저 산 저 새 돌아와 우네

어둡고 캄캄한 저 빈 산에

저 새 돌아와 우네

가세

우리 그리움

저 산에 갇혔네

저 어두운 들을 지나

저 어두운 강 건너

저 남산 꽃산에

우우우 피러 가세

산아 산아 산아

저 어둠 태우며

타오를 산아

저 꽃산에 눈부시게 깃쳐 오를 새하얀 새

아아, 지금은 저 어두운 빈 산에 갇혀

저 새 밤새워 울고

우리 어둠 속에

꽃같이 아픈 눈 뜨고 있다.

                                                                                                                      - 김용택, 저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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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 화자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의 화자는 ()의 화자와 달리 과거와 현재의 대비를 통해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의 화자는 ()의 화자와 달리 주변에 대한 관찰을 통해 삶의 활력을 회복하고 있다.

()의 화자는 ()의 화자와 달리 부정적 현실을 개선하려는 바람을 드러내고 있다.

()의 화자는 ()의 화자와 달리 성찰을 통해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있다.

()의 화자와 ()의 화자는 모두 평화로웠던 고향의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다.

 

 

2. 에 대한 이해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은 모두 화자가 지향하는 이상향의 모습을 환기하는 역할을 하는 대상이다.

② ㉠은 모두 화자가 겪는 현실의 문제의 원인을 짐작하게 하는 기능을 하는 대상이다.

③ ㉠은 화자의 변화하는 심리를, 은 화자의 일관된 심리를 나타내기 위해 제시한 대상이다.

④ ㉠은 화자가 느끼는 절망감을, 은 화자가 느끼는 삶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대상이다.

⑤ ㉠은 화자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은 화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활용한 대상이다.

 

 

3. <보기>를 바탕으로 (), ()를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시적 대상이란, 시인이 주제의 형상화를 위해 제시하는 모든 소재를 지칭한다. 시적 대상에는 특정한 인물이나 자연물, 사물과 같이 구체적 형태를 지닌 것도 있지만 특정한 관념이나 상황, 정서와 같이 무형의 것들도 있다. 시인은 이러한 시적 대상이 지닌 고유한 속성이나 상징적 의미를 활용하여 화자의 정서나 시적 상황을 드러내기도 하고 주제 의식을 강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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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바람 소리는 청량한 이미지를 환기하는 시적 대상으로,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이 언젠가는 해소될 것이라는 화자의 확신을 드러내는 데 활용되고 있군.

()올빼미는 겨울밤에도 잠들지 않고 추위를 견디어 내는 시적 대상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화자의 처지를 드러내는 데 활용되고 있군.

()갈대는 마르고 연약한 외형을 지닌 시적 대상으로, 부정적 상황 속에서 쇠잔해져 가는 화자를 형상화하는 데 활용되고 있군.

()은 화사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시적 대상으로, 화자가 동경하는 세계를 형상화하는 데 활용되고 있군.

()새하얀 새는 어둠의 시각적 이미지와 대비되는 시적 대상으로, 현실과 상반된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형상화하는 데 활용되고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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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 1. 2. 3.

 

윤동주(1917~1945)

 

 윤동주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 만주 북간도의 용정시 명동촌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북간도는 항일 운동의 거점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해 살던 지역이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도 1900년에 명동촌으로 이주했다. 항일의 근거지라는 간도의 특성은 어린 윤동주의 마음에 조국에 대한 애정이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게 했고, 집안의 독실한 기독교 문화 또한 유년기 내내 그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시에 굴욕적인 시대의 아픔과 기독교적 주제가 많이 다뤄지는 것은 이런 성장 배경과 깊은 연관이 있다.

 

 명동소학교 시절부터 윤동주는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친구들과 등사판으로 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기도 하고, 멀리 서울에서 발행되는 소년 소녀 잡지를 구독해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열여섯 살이 되던 1932년 용정 시내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시절 윤동주는 축구 선수로 뛰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는데, 이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그는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 자신이 시를 쓴 날짜를 일일이 적어 두었는데,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 이때 탄생했다. ‘19341224로 기록된 세 편의 작품, 초한대,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가 윤동주 문학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 후 윤동주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편입하려고 시험을 보았으나, 낙제 통보를 받는 좌절을 겪기도 했다. 학교 측에서는 친구들보다 한 학년 아래인 3학년으로의 편입 자격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옛학교를 다니는 것도, 한 학년 아래로 편입하는 것도 모두 그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당시 윤동주의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증언과 가족들의 기억에 따르면, 이 일로 그는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가까스로 편입한 숭실중학교에서의 생활은 윤동주의 문학 활동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실패를 겪은 십 대 후반의 예민한 감수성과 객지 생활의 외로움이 창작열을 자극했는지, 그는 여러 편의 시를 쓴다. 숭실중학교 학우회지 숭실활천에 실린 시 공상은 그의 최초 발표작이다. 그는 독서량도 상당했는데, 중학생 윤동주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은 정지용 시집, 님의 침묵, 국경의 밤, 윤석중 동요집, 영랑 시집, 사슴등의 시집이었다. 그중 100부 한정판으로 나온 백석의 사슴은 구할 수가 없어서 도서관에서 빌린 뒤 노트에 모조리 베껴서 필사본을 만들어 가졌다.

 

 하지만 윤동주는 숭실중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못한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바람에 학교는 무기 휴교되었고, 윤동주는 7개월여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광명중학교에 편입했다. 이 무렵 그는 신문 스크랩을 하거나 습작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36년 한 해에 40편에 이를 정도의 작품을 쓰며 카톨릭소년지에 여러 편의 동시를 발표했습니다. 병아리, 오줌싸개 지도, 빗자루, 비행기, 거짓부리등의 동시는 그가 바라본 순수한 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처럼 윤동주는 문학에 대한 열망이 컸고 확실했지만, 부모님의 기대는 조금 달랐다. 의과대학을 원했던 아버지와 진로 문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윤동주가 단식투쟁까지 벌였다고 한다. 결국 할아버지가 윤동주 편에 서서 중재하면서, 그의 뜻대로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마침내 윤동주는 간도의 고향을 떠나, 1938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연희전문학교의 입학은 그에게 자유와 희망을 꿈꾸게 했던 것 같다. 입학하고 처음 쓴 시에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새로운 길)이라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를 들뜬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어둡고 비참해져 갔다. 당시 총독부가 추진한 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학교에서는 조선어 수업이 폐지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시절을 지나면서 윤동주는 거의 일 년 넘게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못한 채 보내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1941년에 자신이 쓴 작품 가운데 19편의 시를 골라서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고 했다. 그때 제목으로 생각해 두었던 것이 우리가 잘 아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윤동주는 서시를 비롯한 19편의 작품을 준비해 놓고 77부 한정판으로 시집을 출간하고자 했다. 그러고는 원고를 직접 베껴서 3부의 똑같은 필사본을 만들었는데, 완성된 시 묶음 가운데 1부는 자신이 갖고 스승과 후배에게 각각 1부씩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이 시를 받아 본 스승은 윤동주에게 시집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했다.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과 같은 작품들이 일본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일본 유학을 계획하는 윤동주의 신변에 위험이 따를까 봐 걱정해서였다. 때를 더 기다리라는 스승의 말에 윤동주는 뜻을 접고 또 다른 시를 쓰며 마음을 달래야 했다. 그래도 정말 다행스러운 일은 그중 후배에게 전한 1부가 남아서 오늘날 우리가 그의 아름다운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엔 출간의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윤동주가 죽은 지 3년 뒤인 1948년에 비로소 원고가 묶여 유고 시집으로나마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윤동주는 19424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표의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식민지의 굴욕을 안고 지배국인 일본에 건너가 학문을 해야 하는 일은 그에게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뼛속까지 안겨주었을 것이다. 윤동주는 3년간을 일본에서 지냈지만 겨우 5편의 시만 남겼다. 3년 중 절반은 감옥에 있기도 했지만, 그의 유학 생활이 그만큼 고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5편의 시도 자책하는 심정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복잡한 마음을 아프게 표현하고 있다.

 

 향수와 고독 속에서 릿쿄대학의 한 학기를 마친 윤동주는 다시 정지용이 다녔던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로 옮겼다. 그곳에서의 생활도 도쿄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독서에 너무 열중해서 얼굴이 파리해질 지경이었고, 추운 다다미방에서 새벽까지 시를 읽고 쓰고 구상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안타까운 것은 이 시기에 쓴 그의 작품이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도 1943년 여름 일본 경찰에게 사상범으로 체포되면서 사라진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윤동주는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이라는 죄목으로 붙잡혔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중심인물은 윤동주의 고종 사촌 송몽규이고, 윤동주는 동조한 것으로 일본 경찰의 취조 문서에 남아 있다고 한다. 윤동주는 그렇게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윤동주가 마지막을 보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는 가족들 간에 소식을 주고받는 것도 한 달에 겨우 한 번, 그것도 일본어로 쓴 엽서만 허락되었다고 한다. 편지 쓸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어느 날, 그의 동생이 귀뚜라미 소리에 가을을 느낀다는 글을 써 보냈다고 한다. 그러자 윤동주는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 준다. 고마운 일이다.”라는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그는 동생이 마음을 담아 보낸 귀뚜라미 소리를 귀담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것을 사랑하겠다던 그의 정신은 고통도 이렇게 맑은 모습으로 견디게 했구나 싶다. 마지막까지 시에서나 삶에서나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순수한 청년. 그러나 윤동주는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을 눈앞에 두고 1945216일 새벽 일제의 형무소 안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 아홉에.

 

 윤동주가 사망하고 난 뒤, 그의 3주기에 맞춰 유고 시집이 윤동주의 첫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가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시집은 윤동주의 친구들이 보관하고있던 유작 31편에 정지용이 쓴 서문을 같이 싣고 있다. 정지용은 서문에서 ()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이라고 말하며 윤동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시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긴 시인이라고.

 

 그의 시는 이제 우리나라뿐 아니라 그를 죽음으로 이끈 일본에서도 읽히고 있다. 일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이 있다. 1995년에 시작된 이 모임은 매월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참혹한 시대 속에서도 깨끗함을 지키고자 했던 그의 마음은 이제 국경을 넘어 사랑받고 있다.

 

 

출처

시인을 만나다, 이운진, 북트리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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