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유형

 

. 문장의 유형[종결표현]

- ‘문장의 유형은 화자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특정의 문장 형식을 가리키는 문법 범주이다.

문법 범주’ - 문법 형태소에 의해 표현된 문법 요소를 가리킨다. 국어의 문법 범주로는 문장의 유형’,‘높임법’, ‘시제’, ‘’, ‘피동’, ‘사동등을 설정할 수 있다.

 

평서문

말하는 이가 듣는 이에게 단순히 자신의 생각만을 전달하는 문장

) 비가 많이 와서, 공원에 가지 못했습니다.

감탄문

말하는 이가 듣는 이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문장.

) 비가 많이 왔구나!

의문문

말하는 이가 듣는 이에게 대답을 요구하며 질문하는 문장.

) 어제 집에서 무엇을 했니?

명령문

말하는 이가 듣는 이에게 어떠한 행동을 요구하는 문장.

) 비 오는데 나가지 말아라.

청유문

말하는 이가 듣는 이에게 어떠한 행동을 함께 하자고 요청하는 문장.

) 나와 함께 노래하자.

 

문장의 유형은 주로 종결어미에 의해 결정되지만, 하나의 종결어미가 다양한 종결 표현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구어에서는 상황 맥락에 따른 억양, 문어에서는 문맥문장 부호가 종결 표현을 결정한다.

 

의문문

. ‘의문문은 상대방에게 대답이나 설명을 요구하는 화자의 의도를 담고 있다. 주로 ‘-/()’, ‘-’, ‘-’, ‘-ㅂ니까/-습니까등의 종결 어미가 사용되고 물음표를 붙인다.

 

판정 의문문 /아니요의 대답을 요구하는 의문문을 판정 의문문이라고 한다. 판정 의문문은 평서형 어미가 쓰였다면 평서문으로 될 만한 문장 끝에 의문형 어미를 결합시켜 의문문으로 만든 것이다.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 나와 함께 가자.)

- 위의 문장은 의문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청유의 의도를 갖고 있는 문장이다. 표현 의도와 표현 형식을 별개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설명 의문문 구체적인 정보나 설명을 요구하는 의문문을 설명 의문문이라 한다. ‘설명 의문문은 의문 대명사, 의문 부사 등의 의문사가 사용되어 그 의문사가 가리키는 부분에 대해 그 내용을 설명해 주기를 요구하는 의문문이다.

 

수사 의문문 굳이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의문문을 수사 의문문이라 한다. 수사 의문문은 문장 형식은 의문문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의문문이 아니다.

) 거 봐, 내 말이 맞지?( 내 말이 맞다)

어서 먹으라고 했지?(어서 먹어라)

저 사람 정말 멋지지 않니?(저 살마 정말 멋지구나!)

 

2. 명령문

 

. ‘명령은 화자가 청자에게 어떠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명령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는 주로 ‘-어라, -아라, -거라, -너라등이 있고 이 밖에도 ‘-, -, -, ()십시오등의 어미가 사용된다.

 

. 높임을 나타내는 종결 어미 ‘-()십시오가 사용되면 명령보다는 권유하거나 제안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 명령 종결 어미 중 ‘-()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사용된다. 매체를 통한 간접적 상황이나 명령의 내용만을 강하게 전달하려는 맥락에서 주로 사용하는 어미로 해라체가 아닌 하라체라고 부르는 종결 어미이다.

)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명령문의 주어

- 명령문은 청자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문장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청자가 주어가 되므로, 주어를 굳이 밝혀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 참고 자료

 

국어 문법의 원리, EB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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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문장의 짜임

 

홑문장과 겹문장

1) 홑문장과 겹문장 – 하나의 문장 내에 ‘주어-서술어’의 관계가 한 번 이루어진 것을 ‘홑문장(단문)’, 두 번 이상 이루어진 것을 ‘겹문장(복문)’이라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몸도 더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 주어 서술어 관계 - ‘(내가) - 일어나다’, ‘세상이- 보이다’, ‘몸이- 가볍다’, ‘느낌이 – 들다’ ⇒ 겹문장

 

2) 겹문장 – 이어진 문장가 안은 문장이 있음

(1) 이어진 문장 – 두 개의 절이 나란히 결합하여 하나로 이어진 문장을 말한다. 앞 절과 뒤 절의 관계에 따라 ‘대등하게 이어진 문장’과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으로 나뉜다.

대등하게 이어진 문장

앞 절과 뒤 절의 의미가 나열, 대조등의 대등한 관계에 있는 문장. ‘-’, ‘-()’, ‘-()’, ‘-지만등의 대등적 연결 어미로 이어짐.

* 나열 : ) 눈이 오고 바람이 분다.

* 대조 : ) 그는 왔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

앞 절의 의미가 뒤 절의 의미에 종속된 문장으로 앞 절이 뒤 절의 원인/이유, 배경, 상황, 조건/가정, 양보, 중단/전환, 정도의 심화등의 의미를 가짐. ‘-아서/ -어서’, ‘-()등의 종속적 연결 어미에 의해 이어짐.

* 원인/이유 : ) 비가 와서 길이 막힌다.

*배경, 상황 : ) 집에 가는데 어머니를 만났다.

* 조건/가정 : ) 눈이 오면 약속은 취소하자.

* 의도/목적 : ) 공부를 하려고 도서관에 갔다.

* 양보 : ) 바쁘시더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

* 중단/ 전환 : ) 책을 읽다가 울고 말았다.

* 정도의 심화 : ) 날이 갈수록 상처가 깊어진다.

 

❀ 대등하게 이어진 문장은 앞 절과 뒤 절의 위치를 바꾸어도 의미상의 차이가 없다.

 

❀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에서 앞 절과 뒤 절 중 의미의 중심을 이루는 절을 ‘주절(主節)’이라 하고 주절의 의미를 제한하는 절을 ‘종속절(從屬節)’이라 한다.

⇒ 바람이 부니(종속절) 기분이 상쾌해진다.(주절)

 

❀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은 주절과 종속절의 관계가 대등하지 않기 때문에 두 절의 위치를 바꾸면 그 의미가 달라지거나 비문이 된다.

⇒ 기분이 상쾌해니 바람이 분다.

 

가. 대등적으로 이어진 문장과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의 구분

① 대등적으로 이어진 문장은 앞뒤의 문장을 바꾸어도 의미 차이가 없지만,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은 앞뒤의 문장을 바꾸면 의미가 바뀌거나 비문이 된다.

* 산은 높고 물은 깊다. = 물은 깊고 산은 높다.(대등적)

* 해가 지면 달이 뜬다. ≠ 달이 뜨면 해가 진다.(종속적)

 

② 대등적으로 이이전 문장에서는 선행절을 후행절 속으로 이동할 수 없지만,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은 앞뒤의 문장을 바꾸면 의미가 바뀌거나 비문이 된다.

 

* 산은 높고 물은 깊다. → 물은 산은 높고 깊다. (대등적)

* 해가 지면 달이 뜬다. → 달이 해가 지면 뜬다.(종속적)

 

③ 대등적으로 이어진 문장에서는 후행절의 요소를 선행절에서 대명사나 재귀대명사로 나타낼 수 없지만,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에서는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

 

* 자기 딸은 밥을 먹었고 영희는 빵을 먹었다.(대등적)

* 자기 딸이 밥을 잘 먹어서 영희는 기분이 좋았다.(종속적)

 

④ 대등적으로 이어진 문장에서는 문장 속에서 어떤 대상이 화제임을 나타내는 보조사 ‘-은/는’이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으나,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에서는 선행절에 ‘은/는’이 결합할 수 없다.

 

* 산은 높고 물은 깊다.(대등적)

* 해는 지면 달이 뜬다.(종속적)

 

⑤ 대등적으로 이어진 문장에서는 후행절에서만 반복되는 요소가 생략될 수 있지만,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에서는 선행절과 후행절 모두에서 반복되는 요소가 생략될 수 있다.

 

* 철수는 똑똑하고 (철수는) 착하다.(대등적)

* (나는) 배가 불러서 나는 더 먹지 못했다.(종속적)

* 나는 배가 불러서 (나는) 더 먹지 못했다.(종속적)

 

나. 연결 어미 - ‘연결 어미’는 두 절이 연결될 때 두 절 사이를 잇는 어미를 말한다. 연결 어미는 연결하는 두 절 중 앞의 절의 끝에 결합하여 나타난다.

대등적 연결어미

두 절을 대등한 자격으로 이어주는 어미.

* 산은 푸르 물은 맑다.

* 그는 돈은 없지 마음은 너그러웠다.

종속적 연결어미

앞의 문장을 뒤의 문장에 종속적으로 이어 주는 어미.

* 비가 그치 소풍 가자.

* 길이 험하 조심히 운전해라.

보조적 연결어미

본용언에 보조 용언을 이어주는 어미

* 철수는 의자에 앉 있었다.

* 좀처럼 기차가 출발하 않았다.

 

다. 종속절과 부사절

 

학교 문법에서는 전통에 따라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을 부사절을 안은 문장과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나, 최근의 국어 문법 학계에서는 종속절과 부사절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대등하게 이어진 문장과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은 통사적으로 구별되나, 종속적으로 이어진 문장과 부사절은 안은 문장은 통사적 특성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ㄱ) 사랑할수록 상대를 더 아껴 주도록 해라.

(ㄴ) 수능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조급해진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ㄹ수록’은 종속적 연결어미로 다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ㄱ)의 밑줄 친 부분을 ‘아껴 주다’를 수식하는 부사절로 볼 수도 있다. 반면, (ㄴ)의 밑줄 친 부분은 ‘마음이 조급해진다.’라는 문장 전체의 조건이 되는 종속절로서의 역할이 더 분명히 느껴지기도 한다.

 

(2) 안은 문장

하나의 절이 다른 문장 속에 들어가서 하나의 문장 성분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이 전체의 문장을 ‘안은 문장’이라고 하고, 이때 다른 문장 안으로 들어간 문장을 ‘안은 문장’이라고 한다.

 

명사절을 안은 문장

주어, 목적어, 보어로 쓰이는 절을 안은 문장. 명사절은 명사형 어미 ‘-()이나 ‘-등으로 실현됨.

* 그가 범인임이 밝혀졌다.

* 농부들이 비가 오기를 기다린다.

 

명사절이 이루어지는 방식

명사절은 ‘-느냐, -는지, -()ㄹ지와 같이 의문형 종결어미가 결합되어 이루어지기도 한다.

)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느냐가 문제다.

우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관형절을 안은 문장

관형어의 역할을 하는 절을 안은 문장. 관형절은 관형사형 어미 ‘-, -(), -(), -등으로 실현됨

* 우리는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 나는 쥐를 잡은 고양이를 보았다.

* 그것은 내가 입을 옷이다.

동격 관형절과 관계 관형절

* 동격 관형절

) 이몽룡과 성춘향이 곧 결혼한다는 소문이 돈다. 한 문장의 모든 필 수 성분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관형절을 동격 관형절이라고 한다.

 

* 관계 관형절

)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를 대비해 보면 관형절이 수식하는 명사와 동일한 명사(‘거북선’)가 관계절 속에서는 생략.

 

부사절을 안은 문장

부사어의 기능을 하는 절을 안은 문장. 부사절은 ‘-, -, -도록등으로 실현됨.

* 비가 소리도 없이 내린다.

* 사람들이 앉게 어서 일어나자.

종속적 연결어미와 부사형 어미

전통적으로 학교 문법에서는 , -도록, ()‘ 정도만을 부사형 어미로 제시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과거에 종속적 연결 어미로 다루어진 모든 어미들을 부사형 어미로 다루기도 한다. 즉 다음 예문의 밑줄 친 부분을 종속절이 아니라 부사절로 보는 것이다.

) 노래를 들으며 밥을 먹는다.

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

날씨가 화창하면 외출을 하겠다.

부사절을 안은 문장

서술어의 기능을 하는 절을 안은 문장

* 이 집은 마당이 넓다.

* 그녀는 얼굴이 예쁘다.

인용절을 안은 문장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을 인용한 것을 절의 형식으로 안은 문장. 인용절이 될 절에 인용의 부사격 조사 ‘()라고, 를 붙여 실현. 원칙적으로 ‘()라고는 직접 인용에, ‘는 간접 인용에 쓰임

* 동생이 선생님, 어디 가세요?”라고 질문했다.(직접인용)

* 나는 그 사람이 훌륭하다고 믿는다. (간접인용)

 

기출로 확인하기

 

2020학년도 3월 고3 전국연합학력평가 문제지

 

12. <보기>는 문법 수업의 일부이다. 선생님의 설명에 따라 - 을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선생님 : 관형절은 안은문장에서 관형어로 쓰이는데 관형절에는 주어가 생략된 관형절, 목적어가 생략된 관형절, 부사어가 생략된 관형절 등이 있어요. 그리고 명사절은 안은문장에서 조사와 결합하여 주어, 목적어, 부사어 등으로 쓰일 수 있어요. 그럼 다음 문장에 대해 관형절과 명사절에 주목하여 분석해 볼까요?

 

약속 시간에 늦은 친구들이 많다.

마지막 문제를 풀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나는 아버지께서 주신 빵을 형과 함께 먹었다.

그는 지금 사는 집에서 계속 머무르기를 희망했다.

그들은 우리가 어제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이미 알았다.

-----------------------------------------------------------------------------

① ㉠에는 주어가 생략된 관형절이 있고, 명사절은 없습니다.

② ㉡에는 관형절이 없고, 주어로 쓰인 명사절이 있습니다.

③ ㉢에는 목적어가 생략된 관형절이 있고, 명사절은 없습니다.

④ ㉣에는 부사어가 생략된 관형절이 있고, 부사어로 쓰인 명사절이 있습니다.

⑤ ㉤에는 관형절이 없고, 목적어로 쓰인 명사절이 있습니다.

 

정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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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형어 체언을 꾸며 주는 문장성분을 말한다. 관형어에는 문장에서 주어, 서술어, 목적어 등으로 쓰이는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을 꾸며 주는 역할을 한다.

 

(1) 관형어의 형태

기본적으로 관형사는 그대로 관형어가 된다.

* 옷은 따로 모아 재활용 수거함에 넣어라.

* 사람이 바로 내 첫사랑이다.

 

명사(명사구, 명사절)+ 관형격 조사가 관형어가 될 수 있다.

* 나는 오늘 엄마의 옷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 달리던 차가 갑자기 서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기본형 달리다동사)

* 고운 얼굴에 상처가 났다. (기본형 곱다형용사)

용언이 관형어가 될 수 있다. 용언의 어간에 관형사형 어미 ‘-(), --, -()등을 결합하여 나타낸다.

 

명사(체언)는 관형격 조사 가 결합하지 않아도 뒤에 오는 명사(체언)을 꾸며 줄 수 있다.

* 우연히 중학교 친구를 만났다. (명사 중학교가 명사 친구를 꾸며 주고 있다.)

2. 부사어 - 용언(동사, 형용사)을 꾸며 주는 문장 성분으로, 관형어나 다른 부사어, 문장 전체를 꾸며 주기도 한다.

 

(1) 부사의 형태

기본적으로 부사그대로 부사어가 된다.

, 예쁘구나. / 높이 날고 싶어.

 

명사(명사구, 명사절) + 부사격 조사가 부사어가 될 수 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으로(부사격 조사)

 

용언이 부사어가 될 수 있다.

지훈이는 소개팅을 위해 멋지게 차려입었다.

멋지게멋지다를 기본형으로 형용사이다. 이렇듯 용언(동사나 형용사)이 부사형 어미 ‘-를 취하여 문장 내에서 부사어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부사어는 문장 내에서 위치 이동이 비교적 자유롭다.

이몽룡은 성춘향을 무척 사랑했다. / 이몽룡은 무척 성춘향을 사랑했다./ 이몽룡은 성춘향을 사랑했다, 무척.

 

그러나 은 용언 바로 앞에만 쓰이고 다른 자리에 쓰일 수 없다.

 

(2) 필수적 부사어

 

부사어 중에 서술어가 반드시 필요로 하는 부사어들이 있다.

* 나는 아빠랑 닮았다.

* 지금부터 너를 내 부하로 삼겠다.

* 저 아이의 마음이 지금 내 마음과 같다.

 

부사는 기본적으로 수의적인 성분이지만 이렇게 서술어가 반드시 필요로 하는 부사어들은 따라 필수적 부사어라 한다.

 

(3) 보조사가 결합한 부사어

- 조사는 주로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과 결합하지만, 체언에만 붙는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이 보조사는 부사와 결합하기도 한다.

* 정말 빨리도 먹는구나. 빨리(부사) + (보조사)

* 유난히도 맑은 날이었다. 유난히(부사) + (보조사)

 

(4) 부정 부사어

부정을 나타내는 부사 이나 도 부사어이다. 뒤에 나오는 용언을 수식하고 있으므로 부사어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오늘은 몸이 좋아요.

* 다리가 아파서 뛰겠어요.

 

(5) ‘접속 부사부사어이다.

문장을 연결해 주는 접속 부사의 문장 성분은 부사어이다.

* 봄에는 꽃이 핀다. 그리고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진다.

* 그가 일을 망쳐 놓았다. 그러나 아직도 희망은 있다.

 

3. 독립어 - 문장 내의 다른 성분들과 문법적 관련이 없는 문장 성분을 말한다. 독립어는 놓이는 위치가 자유로운 편이며, 단독으로 생각이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1) 독립어의 형태

 

감탄 표현

* ! 손이 정말 크군요.

* 우와, 대박이다.

 

부름말, 대답말

* 선생님,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인가요?

* , 여기까지만 하자.

* 엄마, 얼른 나오세요.

* 오냐, 조금만 기다려.

* 은성아, 조금만 더 힘을 내.

 

제시어

* 대학, 그것은 내 인생에 있어 어떤 의미를 지닐까?

* 사랑,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 참고 자료

 

국어 문법의 원리, EB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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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장 성분의 개념과 종류

 

 1) 문장 성분 - 문장 안에서 문장을 구성하면서 일정한 문법적 기능을 하는 각 부분

 

 2) 문장 성분의 종류

① 주성분 - 문장을 이루는 데 골격이 되는 부분으로 필수적인 성분. 주어, 목적어 보어, 서술어가 있음

② 부속 성분 - 주로 주성분이 내용을 수식하는 부분으로 대개 없어도 무방한 성분임. 관형어, 부사어가 있음

③ 독립성분 - 문장 내에서 다른 성분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 성분. 독립어가 있음.

 

 * 필수 성분과 수의 성분

 주성분은 모두 필수 성분이지만, 부속 성분 중에는 필수 성분도 있고 꼭 쓰지 않아도 되는 수의 성분도 있다.

 

 * 문장 성분의 생략

 - 우리말의 문장은 주어와 서술어를 갖추고 있는 것이 기본이라 하였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이 두 성분 모두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앞뒤 상황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때 주어든 서술어든 생략이 된 채로 문장이 성립되는 경우이다.

 

예) 이 연필 왜 샀어? / 예쁘니까.

 

 3) 품사와 문장 성분

 - 품사는 단어의 부류를 나타내는 것이고, 문장성분은 문장 내에서의 기능을 나타내는 것. 품사는 '단어'를, 문장 성분은 '어절 이상의 단위'를 대상으로 한다.

 

2. 문장 성분별 특성

 

1) 주어 - 한 문장에서 동작이나 상태, 어떤 성질의 주체를 나타내는 문장 성분을 말한다.

무엇이 어찌하다/ 무엇이 어떠하다/ 무엇이 무엇이다

 '무엇이'에 해당하는 부분이 '주어'이다.

 

(1) 주어의 형태

 

① 주격 조사가 결합하여 주어 역할을 한다.

 * 선우가 국수를 먹는다.
 * 선생님께서 우리 집에 오셨다.
⇛ 명사에 주격 조사 '이.가' 또는 높임의 주격 조사 '께서'가 결합하여 주어 역할을 하고 있다.

* 아이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다.
⇛ '혼자, 둘이, 셋이' 등 사람의 수를 나타내는, 받침 없는 체언 뒤에 '서'가 결합하여 주억 역할을 하고 있다.

 * 학교에서 급식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 단체나 기관을 가리키는 명사는 '에서'가 붙어 주어 역할을 한다. 이 경우 '에서'는 '집에서 밥을 먹었다.'에서처럼 처소를 나타내는 부사격 조사와 형태는 같지만 그 기능을 서로 다르다.

⁂ 보조사 '가'

 - '가'가 결합하는 말이 주어가 아닌 예도 있다.

예)  나는 학교가 가고 싶다.

     동생의 그림은 대개가 낙서나 다름 없었다.

     방이 깨끗하지가 않다.

 - 이때 '가'는 주격 조사가 아니라 앞말을 지정하여 강조하는 뜻을 나타내는 보조사이다. 장형 부정문(긴 부정문)에서 연결어미 '-지' 다음에 결합하는 경우가 많다.

 

② 보조사가 결합하여 주어 역할을 한다.

* 젊었을 때 엄마는 날씬했지.
* 젊었을 때 엄마도 날씬했지.
* 젊었을 때 엄마만 날씬했지.

③ 주격 조사와 보조사가 함께 나타날 수도 있다.

* 할아버지께서도 오이 반찬을 제일 좋아하신다.
* 너만이 나를 도와줄 수 있다.

④ 주격 조사나 보조사 없이도 주어 성립이 가능하다.

* 철수 아버지 작년에 외국 나가셨잖아.

 

2) 목적어- 서술어의 동작이나 행동의 대상이 되는 문장 성분을 말한다. 목적어는 체언이나 체언 구실을 하는 구나 절에 목적격 조사 '을/를'이 붙어 나타나는데, 목적격 조사는 생략될 수도 있고 '을/를' 대신 보조사가 결합할 수도 있다.

 

(1) 목적어의 형태

① 체언에 목적격 조사가 결합하여 목적어 역할을 한다.

* 엄마는 떡을 썰고, 나는 글을 쓴다.

② 체언에 보조사가 결합하여 목적어 역할을 한다.

* 나는 운동도 잘한다. / 나는 운동만 잘한다./ 나는 운동은 잘한다.

③ 격 조사나 보조사 없이도 목적어 성립이 가능하다.

* 동생이 만두 다 먹었다.

⁂ 동족 목적어

 - 서술어로 쓰인 동사와 같은 어근으로 된 목적어를 '동족 목적어'라 한다.

예) 을 많이 잤더니 오히려 기운이 없네.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위의 예문은 잠을 자다’, ‘꿈을 꾸다와 같이 일반적으로 목적어를 취하지 않는 자다’, ‘꾸다등의 자동사가 각각 같은 어근을 지닌 명사를 목적어로 취하고 있는 예이다.

 

3) 보어 - 용언 '되다. 아니다'가 필요로 하는 성분 중 주어가 아닌 것을 말한다. ('되다'의 품사는 동사이고, '아니다'의 품사는 형용사이다.)

* 네가 벌써 고등학생이 되었구나.      *나는 천재가 아니다.

보어를 나타내는 조사 /는 주격 조사와 그 형태는 같지만 기능을 서로 다르다. 때로는 아무 조사가 붙지 않고 보어가 실현되기도 하고 보조사로 대치되기도 하며, 드물게는 보조사와 함께 쓰이기도 한다.

) 나는 깍쟁이 아니야.(조사가 붙지 않음)

     나는 깍쟁이는 아니야.(보조사 이 붙음)

 

4) 서술어- 문장에서 주어의 행위나 상태, 속성을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문장 성분이다.

* 컴퓨터가 망가졌다.(어찌하다), 컴퓨터가 멋지다.(어떠하다), 컴퓨터가 상품이다.(무엇이다)

- 서술어는 보통 단일한

언이나 '체언+이다'로 이루어지지만 두 개 이상의 용언이 모여 하나의 서술어가 되기도 한다.

 

(1) 서술어의 구성

① 동사나 형용사의 어간에 어미가 결합하여 이루어진다.

* 컴퓨터가 망가졌다.(어찌하다-동사) ⇛ 망가지-(어간) + -었다(어미)

* 컴퓨터가 멋지다.(어떠하다 - 형용사) ⇛ 멋지-(어간) + -다(어미)

② 체언에 '이다'가 결합하여 이루어진다.

* 컴퓨터가 상품이다.(무엇이다-명사+서술격 조사) ⇛ 상품(명사) + 이다(서술격 조사)

(2) 서술어 자릿수 서술어가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문장 성분의 개수

한 자리 서술어 주어를 필수적으로 요구함

) 우리는 학생이다. / 꽃이 예쁘다.

두 자리 서술어 주어 이외에 목적어, 보어, 부사어 중 하나를 필수적으로 요구함.

) 그는 고개를 들었다. / 그가 선생님이 되었다.

세 자리 서술어 주어 이외에 목적어와 부사어를 필수적으로 요구함.

) 그녀는 조카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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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석(1912 -?)은 평북 정주군 갈산면에서 수원 백씨 용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기행이고 백석은 필명이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5조선일보정주성이란 작품을 발표한 이후였다. 1936년에는 시집 사슴을 상재하였고, 이후 교원 생활과 잡지사 편집일 등을 하면서 틈틈이 시작 활동을 하였으며, 1939년에는 만주국 신경으로 건너가 해방 직후까지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해방 이후 고향 정주에 돌아와서 1948년에 이르기까지 적막강산등 다수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이후의 행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2. 백석의 시세계를 특징짓는 것은 평북 지방의 독특한 방언을 구사하여 향토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겨준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그는 시에서 자신의 유년시절 체험, 특히 평북 지방의 고유한 설화와 민속의 세계를 형상화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특히 백석의 시세계는 자아와 세계,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과 귀신이 미분화된 채 원초적인 합일을 누리고 있는 토속적이고 신화적이고 공동체적인 공간과 민중적인 생활세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3. 백석의 시의 성격은 930년대 후반 우리 민족의 상황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토속적이고 신화적인 공간과 민중의 생활세계에 대한 애정 그리고 토속적인 언어 등은 나름대로 민족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백석의 시적 관심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이의 조화와 유대가 깨어져가는 과정에 있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세계, 따라서 끊임없이 현재로 흘러들어와서 현재를 형성해주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는 무관하게 아득한 시간 속에 유폐되어 있는 과거의 세계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석의 시가 더 이상의 발전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과거(공동체적 유대와 합일이 보장된 유년세계)를 현재를 비추어보는 거울로서, 또는 현재를 형성하는 힘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그 자체로 자립화시키고 그것에 신화적인 의미를 부여하려 한 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

 

5. 대표 작품

 

⓵ 「여승(1936)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웠다

 

평안도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리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를 찾아 금점판을 떠다니다가 급기야는 어린 딸마저 잃고 여승이 되어버린 한 여인의 기구한 생애를 통해서 가족공동체조차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의 참혹상을 그림

 

⓶「팔원(1939)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 속같인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 오십리 묘향산 백오십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 주재소장 같은 어른과 어른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내지인 주재소장의 집에서 고생스러운 식모살이를 하다가 다시 어디론가 팔려가는 어린 계집아이이 운명을 통해 가족공동체조차 철저히 파괴되어 버린 식민 현실과 민중들의 고난을 형상화

 

 

참고 문헌

 

김재용· 이상경· 오성호· 하정일 지음, 한국근대민족문학사, 한길사, 2006.

 

'일제 강점기 역사 속 문학 > 1930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의 반 - 정지용  (0) 2023.04.05

 

 

 소설의 이야기를 작가가 어떤 입장에서 독자에게 제시하는가는 흥미 있는 문제이다. 소설의 이야기는 저절로 전개되지 않고 누군가가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저자가 다 지어낸 것이만, 저자는 이야기가 전개되게 하는 틀을 마련하고 그 틀을 맞추어 전개되도록 해둔 것 같기도 하다. 이 이야기 전개의 틀을 '관점'이라고 한다. 관점의 문제는 미국의 소설가 헨리 제임스가 제기한 이래 소설론의 중요한 문제로 인정되고 있다.

 

 궁극적으로 소설 전개의 관점은 소위 1인칭과 3인칭 두 가지이다. 1인칭 이야기는 '나'가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이야기하는 '나'는 단지 자기가 들은 어떤 이야기를 전다랗는 입장에만 있을 수 있다. '내가 우연히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체험을 하였다'는 투이다. 이때 '나'는 그 이야기에 전혀 참여하지 못한다. '나'가 이야기 속에 직접 등장하되 주요 인물이 아니라 부차적인 인물일 경우도 많다. 자기에게 일어난 이야기가 아니라 남에게 일어나는 일을 목격한 증인의 입장이다. '나'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가 물론 1인칭 이야기의 가장 흔한 형태이다.

 

 1인칭 이야기는 '나'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므로 시야가 좁다. '나'가 보지 못하는 다른 인물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짐작밖에 할 도리가 없다. 따라서 본격적인 '나'의 이야기는 남들에 대한 이야기보다 '나'에 관한 것, 나의 마음에 관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독백이 된다. 그리하여 '의식의 흐름' 소설이 된다.

 

 1인칭 이야기 '나'를 교묘히 이용하여, 특수한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첫째로 자기가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자기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즉 소설을 만들고 있다는 의식을 가진 존재임을 표면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지금 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내가 하는 이야기이니 만큼 이 소설은 평론가들이 1인칭 소설, 그 중에서도 빈정대는 1인칭 소설이라 할 것이다'라는 투의 소설 말이다. 둘째로는 '소박한 나'를 등장시키는 1인칭 이야기가 있다. 주요섭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어른들의 애정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천진, 소박한 어린아이가 전하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그런 이야기와 이야기하는 사람 사람의 거리가 아이러니의 묘미를 더한다.

 

 3인칭 이야기는 인물들이 모두 그, 그녀, 그들로 되어 있다. 3인칭 관점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전지적 관점' 즉 '다 아는 관점'이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인물과 사건에 대하여 장소와 시간의 구애됨이 없이 모두 다 알고 있는 입장에 있다. 자기 마음대로 인물들의 언행을 알려주든가 또는 감춰뒀다가 나중에 이야기하든가 할 수 있어 마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신처럼 자유롭다. 외부적 언행뿐만 아니라 깊은 마음 속에, 더더구나 무의식 속에 생기는 심리 작용까지도 다 알아내는 능력이 있다.

 

 대개 모든 것을 다 아는 이야기꾼(궁극적으로는 작가이지만)은 이야기 속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나, 가끔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에 대하여 평을 가하고( '그가 그때 그런 짓을 한 것은 인륜상 지탄받을 만하다' 등등) 나아가 인생 전반에 대한 윤리적 해석을 가하기도 하는데, 독자는 이런 말들을 지당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기로 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역사철학을 길게 설파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다 아는 이야기꾼이 인물의 언행을 그대로 극적으로 제시만 할 뿐 무슨 평을 직접 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경우에는 이야기가 그저 저절로 전개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철저하게 객관적인 사실주의 작품은 이처럼 이야기를 보여주지, 들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제한된 관점'이라는 것이 있다. 저자는 다 아는 이야기꾼을 내세우지 않고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의 관점을 빌린다. 이야기는 그 인물의 시야에 들어오는 만큼, 그 인물의 해석과 평을 곁들여 전개된다. 이야기는 1인칭 관점처럼 제한되지만 저자가 마음대로 조작한다는 느낌이 없고 한 관점에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제한된 관점의 이야기도 그 후 한 인물의 주관을 깊이 파고들어 가는 것이 되어 결국 '의식의 흐름' 소설로 발전하였다. 독자는 어떤 이야기꾼의 중간 역할이 없이 직접 인물의 심리의 움직임을 보는 듯하다. '자기 소멸의 저자', '저자의 소멸'이란 말을 이 경우에 하게 된다.

 

 어떤 현대소설가는 한 작품에서 관점의 통일을 기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 관점을 뒤섞어 놓아 독자들을 당황하게 하는 특별한 효과를 노리기도 하고 또 2인칭 ('너'의 관점) 소설을 쓴 작가도 있다고 하나 예외적이다.

 

 

 

참고 문헌

 

이상섭, 「문학비평 용어사전」, 민음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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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프(motif)  (0) 2020.07.11

지식인과 민중의 관계 탐구 현진건

 

1. 현진건(1900-1943, 호는 빙허) - 대구에서 우체국장이던 현경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1912년 일본으로 가서 중학을 다녔다. 1918년에는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형 정건을 찾아가서 거기서 호강대학 독일어과에 입학한다. 현정건은 나중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에서 옥사한다. 현진건은 1919년 조선으로 돌아와 이상화, 백기만 등과 동인활동을 하다가 19205개벽희생화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창작생활을 하게 된다. 조선일보기자생활을 하면서 1922년에는 백조동인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소시민 지식인의 빈궁과 예술가로서의 지조를 그린 빈처에서부터 단편소설가로서이 본격적인 면모를 보이게 되고 타락자(1922)조선의 얼굴(1926) 두 권의 단편집을 내었다.

 

2. 1920년대초기 민중의 삶의 단면을 냉정하게 묘사하던 서술시간은 1920년대 후반의 작품에서는 가난한 민중의 삶에 대해 어설픈 동정이나 경멸로 대했던 지식인이 그들의 현실과 진실을 이해하면서 공감이나 자책의 감정을 느끼는 과정 속에서 민중의 생활 논리가 드러나는 성과를 거둠

 

3. 1936년 동아일본의 일장기 말살 사건당시 사회부 기자로 있다가 감옥살이를 한다. 출옥 후 일제의 군국주의가 강화되던 시기에 창작에만 전념하여 낭만주의적 역사소설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무영탑과 백제부흥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한 흑치상지같은 역사소설을 썼는데, 흑치상지는 연재중 검열에 걸려 발표를 중단당하였다.

 

4. 1943320일 서울에서 병사

 

5. 대표 작품

 

⓵ 「빈처(1921) - 주인공인 는 외국유학을 갔다가 집안의 모락으로 더 이상 공부할 수 없어 귀국한 지식인이다. 월급푼이나 받고 살기보다는 참된 예술을 위해 살기로 하고 독서와 창작에 온 힘을 쏟는다. 그 때문에 아내의 마지막 남은 옷가지까지 전당포에 갈 정도로 사림은 궁핍하다. 생활의 어려움에 시달리는 아내는 남편의 예술에 대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물질의 힘 앞에소 동요한다. ‘는 그런 아내를 속으로 속물이라고 경멸하고 신경질적으로 대하지만 정신적 행복만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음을 너그럽게 이해한다.

이 작품은 물질적 풍요가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친구와 남편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값나가는 물건만으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처형의 생활에 대비해 궁핍한 한경 속에서도 양심을 지키고 사랑을 간직하려고 노력하는 예술가 부부의 맑은 삶을 그린 것이지만, 예술적 이상과 일상적 현실 사이의 갈등을 부부애라는 감정의 과장과 물질에 대한 정신적 초월이란 주관적 화해로 해소하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⓶ 「술 권하는 사회(1921) - 남편은 동경유학을 하고 왔으나 오래 기다렸던 남편이 이제는 무엇인가 한 자리를 차지해서 돈을 벌어 올 것이란 아내의 기대는 깨어진다. 돈을 벌기는커녕 남편은 처음에는 집안 돈을 갖다 쓰며 어딘지 분주히 돌아다니고 책을 보고 글을 쓰기도 하더니 나중에는 허구헌 날 수레만 취해서 오는 것이다. 술에 취한 남편과 아내의 문답에서 남편은 명예싸움, 지위다툼질, 파벌싸움으로 지새는 사람들과 사회운동 단체에 실망하여 술꾼이 되었음을 말하나 아내는 사회의 말뜻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하다. 그리고 사회운동을 한다고 한 남편은 그 아내를 이해시킬 능력도 성의도 없다.

무지하고 순박한 구식 아내의 모습은 당시 지식인인 남펴의 눈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모습이기도 하다. 식민지 조국을 바라보는 비애, 하는 일없이 서로의 파벌다툼으로 점철된 사회운도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바라보는 답답함과 절망의 상태를 잘 드러냄

 

⓷ 「할머니의 죽음(1923) - 할머니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모인 자손들이 겉으로는 할머니의 병세를 걱정하고 엄숙하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으로는 빨리 결말이 나서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이중성을 포착한 것으로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현진건의 뛰어난 수법이 잘 발휘된 작품

 

⓸ 「운수 좋은 날(1924) - 아내의 죽음을 앞둔 가난한 인력거꾼의 하루를 통하여 식민지 민중의 비참한 삶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

 

⓹ 「(1925) - 가난 때문에 민며느리로 팔려온 어린 순이가 낮에는 집안일과 들일에 시달리고 밤에는 남편에게 성적으로 시달리다가 끝내 밤마다 자기를 잠못자게 하는 원수의 방에다가 불을 지른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본질에서 빗나간 순이의 행동은 역시 동정의 대상이면서 현실의 모순을 일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⓺ 「동정(1926) - 민중의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그것과 자신의 이해관계의 상충 속에서 느기는 지식인의 자기 모멸감을 그림

 

⓻ 「고향(1926) - (조선일보그의 얼굴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다가 단편집 조선의 얼굴에 수록될 때 고향으로 개재되었다.) ‘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서 이농민 출신의 떠돌이 청년을 만나 처음에는 경멸하다가 그의 경력을 들으면서 조선 민중의 운명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림 1920년대 후반 대중운동의 고양기에 이르러서는 민중의 궁핍한 삶에 대한 지식인의 죄의식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기울면서 한편으로 민중을 주관적으로 미화하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임

 

⓼ 「신문지와 철창(1929) - 손자를 위해 밥동냥을 하다가 신문지 한 장 훔친 죄로 도둑으로 몰린 노인이 철창에 갇혀서도 손자를 위해 밥을 감추는 것을 보며 사상관계로 같은 철창에 있던 작중화자는 가난한 이의 사랑은 종교다, 신앙이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의 위대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냐라는 생각을 하며 그에게서 성자의 모습, 위대한 인생의 햇발을 느낀다.

 

⓽ 「정조와 약가(1929) - 가뭄 끝에 소작마저 떼이고 품팔이로 나섰다가 병이 난 남편을 위해 아내가 의사에게 기꺼이 정조를 제공하는 이야기. 이 소설은 정조라도 약값으로 제공해야 하는 민중의 가난한 삶과 더불어 기성의 윤리나 도덕을 넘어선 이들 가난한 부부애의 노픈 경지를 아름답게 표현

 

⓾ 「서투른 도적(1931) - 작중화자는 안잠자기(남의 집에서 일을 해 주며 먹고 자는 여자)로 들어온 할멈에 대해 그가 훔친 쌀을 흘리고 다니고 품삯으로 받은 돈까지 흘리고 갔다고 서투른 도적이라고 경멸했다가 그가 흘리고 간 동전에서 지식인인 에 대한 질책의 목소리를 듣고 부끄러워한다.

 

 

 

참고 문헌

 

김재용· 이상경· 오성호· 하정일 지음, 한국근대민족문학사, 한길사, 2006.

 

 

핵심 정리

 

1. 갈래 - 단편 소설, 액자 소설

2. 성격 - 사실적, 현실 고발적

3. 배경 - 시간 : 1920년대 일제 강점기

          - 공간 : 서울행 기차 안

3.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부분적으로 서술자의 개입이 드러남)

4. 주제 - 일제 강점기하 우리 농민의 참담한 생활상의 폭로

5. 출전 - 『개벽』(1922)

6. 작가 - 현진건(1900- 1943)

 소설가. 호는 빙허. 우리나라 근대 단편 소설의 틀을 확립하였으며 단편 소설을 통해 사실주의를 개척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빈처」,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이 있다.

 

7. 이해와 감상

 

 1926년 『조선의 얼굴』에 수록된 작품으로, 일제의 수탈로 황폐해진 식민지 농촌의 현실을 생생하면서도 집약적으로 그려 내고 있다. 액자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작품은, 대구에서 상경하는 기차에서 만난 한 유랑민의 처절하고 기구한 삶의 이야기에 서술자인 '나'가 동감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초반부에서 보여졌던 '그'에 대한 '나'의 거리감은 '나'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로간의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제거되고, 이는 독자로 하여금 '그'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실주의 문학의 일반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현실의 폭로'에 주안점을 둔 작품으로, 일제의 수탈로 찌그러진 두 남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사실적인 조선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며, 마지막 부분의 노래에서 민족의 고뇌를 함축하고 있는 풍자성을 볼 수 있다.

 

8. '그'에 대한 '나'의 태도의 변화

 

경멸감 - '그'의 잘난 척하는 태도

  ↓

호기심 - '그'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점을 발견함

  ↓

동정심 - 고난에 찬 '그'의 과거 내력

  ↓ 

동질감 - '그'와 '나'가 같은 조선 민중임을 깨달음

 

9. 인물

 * 나 - '그'와 우연히 기차에 동승하게 되어 그를 관찰하는 서술자. 처음에는 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지만 점차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 그 - 다소 경망스러워 보이지만, 일제 강점하의 우리 민족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 그녀 - '그'와 한때 혼담이 오갔었으나 농촌의 황폐화로 유곽으로 팔려 가게 된 인물. 당대 한국 여성의 비참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이다.

 

10. 이 작품의 액자 구성 방식과 주제

 

 이 소설은 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를 안고 있는 액자 구성 방식을 취하고 있다. 외면적 사건은 '나'가 기차 안에서 만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나 중요한 사건은 '그'의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전체적인 사건의 윤곽은 '기차 안에서 기묘한 차림의 사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눔→ 그가 들려주는 과거의 체험담 → 다시 현실로 돌아와 취흥에 겨워 노래를 부름'으로 요약된다.

 '그'가 들려주는 과거의 체험담은 실상 작가가 본격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담긴 부분으로, 순박한 농사꾼이 유랑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사연, 혼담이 있었던 여인과의 비극적 해후 등을 통해 당시 일제 강점하에서 핍박받는 망국민의 비참한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액자 구성의 전개는 보통 독자에게 신뢰감을 주며,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게 하는 기는을 한다.

 

11. '그'가 부르는 '노래'의 의미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로 가고요 -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

 

 이 노래는 신민요로 '그'가 어릴 적 멋모르고 불렀으나 지금은 그 의미를 알고 부르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당시 사회상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고 있으며 일제의 가혹한 통치에 의해 조선인이 겪었던 비참한 삶, 즉 일제의 농토 강탈과 지식인에 대한 탄압, 망국의 비운을 체험한 노인들의 한 맺힌 죽음과 극심한 가난 때문에 창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조선 여인들의 비극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작품의 주제 의식이 담긴 부분으로 당대의 시대상을 효과적으로 고발하며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12. 이 작품에 나타난 '나'의 심리 변화와 거리감의 변화를 통한 효과

 

 

 '나'는 처음에 단순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를 흥미의 대상으로 보다가 '그'의 어쭙잖은 행동에 반감을 느끼며, '그'에 대한 거리감을 드러낸다. 그러다가 '그'의 신산스런 표정에 마음을 열게 하되고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점차 '그'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게 되고, 마침내 정서적인 합일 상태에 이르게 된다.  별개의 존재이던 '나'와 '그'는 한민족이라는 유대감을 가지게 되면서 심리적 거리가 제거된 것이다.

 특히 이러한 거리감의 변화는 '문체'의 변화를 통해서도 감지된다. '나'가 처음에 '그'를 묘사할 때에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문체가 나타나다가 '그'의 행적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된 해설체로 표현된다. 이러한 문체의 변화는 처음에 객관적 관찰의 대상이었던 '그'가 나중에는 '나'와 심정적으로 융합되는 대상으로 변화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이 '그'에 대한 '나'의 심리적 거리가 좁혀짐으로써, 이야기를 전해 듣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이야기에 대해 관심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참고 자료

 

디딤돌 문학 소설, 디딤돌, 2006.

 

 

13. 고향(전문)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생긴 일이다. 나는 나와 마주앉은 그를 매우 흥미있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서 옥양목1) 저고리가 내어 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었다. 그것은 그네들이 흔히 입는 유지2) 모양으로 번질번질한 암갈색 피륙3)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발은 감발4)을 하였는데 짚신을 신었고, 고부가리로 깎은 머리엔 모자도 쓰지 않았다. 우연히 이따금 기묘한 모임을 꾸미는 것이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찻간에는 공교롭게 세 나라 사람이 다 모였으니, 내 옆에는 중국 사람이 기대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동양 삼국 옷을 한 몸에 감은 보람이 있어 일본말도 곧잘 철철 대이거니와 중국말에도 그리 서툴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꼬마데 오이데 데스까? (어디까지 가십니까?)" 하고 첫마디를 걸더니만, 도꾜가 어떠니, 오사까가 어떠니, 조선사람은 고추를 끔찍이 많이 먹는다는 등, 일본 음식은 너무 싱거워서 처음에는 속이 뉘엿거린다5)는 등, 횡설수설 지껄이다가 일본 사람이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짧게 끊은 꼿꼿한 윗수염을 비비면서 마지못해 까땍까땍 하는 고개와 함께 "소데스까(그렇습니까)"란 한 마디로 코대답을 할 따름이요, 잘 받아 주지 않으매, 그는 또 중국인을 붙들고서 실랑이를 하였다. "니상나얼취?(어디 가십니까?)……" "니싱섬마?(이름이 무엇입니까?)"하고 덤벼 보았으나 중국인 또한 그 기름 낀 뚜우한 얼굴에 수수께끼 같은 웃음을 띨 뿐이요 별로 대꾸를 하지 않았건만, 그래도 무에라고 연해 응얼거리면서 나를 보고 웃어 보였다.

그것은 마침 짐승을 놀리는 요술장이가 구경꾼을 바라볼 때처럼 훌륭한 제 재주를 갈채 해 달라는 웃음이었다. 나는 쌀쌀하게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 주적대는 꼴이 어줍지 않고 밉살스러웠다. 그는 잠깐 입을 닫치고 무료한 듯이 머리를 덕억덕억 긁기도 하며, 손톱을 이로 물어뜯기도 하고, 멀거니 창 밖을 내려보기도 하다가, 암만해도 주절대지 않고는 못 참겠던지 문득 나에게로 향하며, "어디꺼정 가는 기오?"라고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붙인다.

"서울까지 가요."

"그런기오. 참 반갑구마, 나도 서울꺼정 가는데, 그러면 우리 동행이 되겠구마."

나는 이 지나치게 반가와하는 말씨에 대하여 무어라고 대답할 말도 없고, 또 굳이 대답하기도 싫기에 덤덤히 입을 닫쳐 버렸다.

"서울에 오래 살았는기오?"

그는 또 물었다.

"육칠 년이나 됩니다." 조금 성가시다 싶었으되, 대꾸 않을 수도 없었다.

"에이구, 오래 살았구마, 나는 처음길인데 우리 같은 막벌이꾼이 차를 내려서 어디로 찾아가야 되겠는기오? 일본으로 말하면 기진야도6) 같은 것이 있는기오?"

하고 그는 답답한 제 신세를 생각했던지 찡그려 보였다. 그때 나는 그의 얼굴이 웃기보다 찡그리기에 가장 적당한 얼굴임을 발견하였다. 군데군데 찢어진 겅성드뭇한7) 눈썹이 울울이 일어서며, 아래로 축 처지는 서슬에 양미간에는 여러가닥 주름이 잡히고, 광대뼈 위로 뺨살이 실룩실룩 보이자 두 볼은 쪽 빨아든다. 입은 소태8)나 먹은 것처럼 왼편으로 삐뚤어지게 찢어 올라가고, 죄던 눈에 눈물이 괸 듯 삼십세 밖에 안 되어 보이는 그 얼굴이 10년 가량은 늙어진 듯하였다. 나는 그 신산스러운 표정에 얼마쯤 감동이 되어서 그에게 대한 반감이 풀려지는 듯하였다.

"글쎄요, 아마 노동 숙박소란 것이 있지요."

노동 숙박소에 대해서 미주알 고주알 묻고 나서,

"시방 가면 무슨 일자리를 구하겠는지요?"

하고 그는 매달리는 듯이 또 채웠다,

"글쎄요, 무슨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는지요."

나는 내 대답이 너무 냉랭하고 불친절한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러나 일자리에 대하여 아무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외에 더 좋은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나는 은근하게 물었다.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 고향에서 오누마" 하고 그는 휘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의 신세타령의 실마리는 풀려 나왔다. 그의 고향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KH란 외따른 동리였다. 한 백 호 남짓한 그곳 주민은 전부가 역둔토9)를 파먹고 살았는데, 역둔토로 말하면 사삿집10) 땅을 부치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후하였다. 그러므로 넉넉지는 못할망정 평화로운 농촌으로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뒤바뀌자 그 땅은 전부가 동양척식회사의 소유에 들어가고 말았다. 직접으로 회사에 소작료를 바치게나 되었으면 그래도 나으련만, 소위 중간 소작인이란 것이 생겨나서 저는 손에 흙 한 번 만져 보지도 않고 동척엔 소작인 노릇을 하며, 실작인11)에게는 지주 행세를 하게 되었다. 동척에 소작료를 물고 나서 또 중간 소작료인에게 긁히고 보니, 실작인의 손에는 소출12)3할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후로 '죽겠다. 못 살겠다'하는 소리는 중이 염불하듯 그들의 입길에서 오르내리게 되었다. 남부여대13)하고 타처로 유리14)하는 사람만 늘고 동리는 점점 쇠진해 갔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그가 열 일곱 살 되던 해 봄에(그의 나이는 실상 스물 여섯이었다. 가난과 고생이 얼마나 사람을 늙히는가) 그의 집안은 살기 좋다는 바람에 서간도로 이사를 갔었다. 쫓겨가는 운명이거든 어디를 간들 신신하랴. 그곳의 비옥한 전야도 그들을 위하여 열려질 리 없었다. 좋은 땅은 먼저 간 이가 모조리 차지하였고 황무지는 비록 많다 하나 그곳 당도하던 날부터 아침거리 저녁거리 걱정이라, 무슨 행세로 적어도 1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먹고 입어 가며 거친 땅을 풀 수가 있으랴, 남의 밑천을 얻어서 농사를 짓고 보니, 가을이 되어 얻는 것은 빈주먹뿐이었다. 이태 동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버티어 갈 제, 그의 아버지는 우연히 병을 얻어 타국의 외로운 혼이 되고 말았다. 열 아홉 살밖에 안된 그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악으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는 중 4년이 못되어 영양 부족한 몸이 심한 노동에 지친 탓으로 그의 어머니 또한 죽고 말았다.

"모친꺼정 돌아갔구마." "돌아가실 때 흰죽 한 모금도 못 자셨구마." 하고 이야기하던 이는 문득 말을 뚝 끊는다. 그의 눈이 번들번들함은 눈물이 쏟아졌음이리라. 나는 무엇이라고 위로할 말을 몰랐다. 한동안 머뭇머뭇이 있다가 나는 차를 탈 때에 친구들이 사준 정종병 마개를 빼었다. 찻잔에 부어서 그도 마시고 나도 마셨다. 악착한 운명이 던져 준 깊은 슬픔을 술로 녹이려는 듯이 연거푸 다섯 잔을 마신 그는 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그 후 그는 부모 잃은 땅에 오래 머물기 싫었다. 신의주로, 안동현으로 품을 팔다가 일본으로 또 벌이를 찾아가게 되었다. 규슈15) 탄광에 있어도 보고, 오사까 철공장에도 몸을 담아 보았다. 벌이는 조금 나았으나 외롭고 젊은 몸은 자연히 방탕해졌다. 돈을 모으려야 모을 수 없고 이따금 울화만 치받치기 때문에 한곳에 주접16)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화도 나고 고국 산천이 그립기도 하여서 훌쩍 뛰어나왔다가 오래간만에 고향을 둘러보고 벌이를 구할 겸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 한다.

"고향에 가시니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습디까?"

"반가워하는 사람이 다 뭔기오. 고향이 통 없어졌더마."

"그렇겠지요. 9년 동안이나 퍽 변했겠지요."

"변하고 뭐고 간에 아무것도 없더마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개 한 마리도 얼씬을 않더마."

"그러면, 아주 폐농17)이 되었단 말씀이오?" ", 그렇구마, 무너지다 만 담만 즐비하게 남았드마, 우리 살던 집도 터야 안 남았는기오. 암만 찾아도 못 찾겠더마. 사람 살던 동리가 그렇게 된 것을 혹 구경했는기오?" 하고 그의 짜는 듯한 목은 높아졌다.

"썩어 넘어진 서까래, 뜰뜰 구르는 주추18)!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놓은 것 같더마.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기오, !" 하고 그는 한숨을 쉬며, 그때의 광경을 눈앞에 그리는 듯이 멀거니 먼산을 보다가 내가 따라 준 술을 꿀꺽 들이켜고, "! 가슴이 터지더마, 가슴이 터져."

하자마자 굵직한 눈물 둬 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나는 눈물 가운데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을 똑똑히 본 듯 싶었다. 이윽고 나는 이런 말을 물렀다.

"그래, 이번 길에 고향 사람은 하나도 못 만났습니까?"

"하나 만났구마, 단지 하나."

"친척되는 분이던가요?"

"아니구마, 한 이웃에 살던 사람이구마"하고 그의 얼굴은 더욱 침울했다.

"여간 반갑지 않으셨겠지요."

"반갑다마다, 죽은 사람을 만난 것 같더마. 더구나 그 사람은 나와 까닭도 좀 있던 사람인데……."

"까닭이라니?"

"나와 혼인 말이 있던 여자구마."

"하아!" 나는 놀란 듯이 벌린 입이 닫혀지지 않았다.

"그 신세도 내 신세만이나 하구마."

하고 그는 또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 여자는 자기보다 나이 두 살 위였는데, 한 이웃에 사는 탓으로 같이 놀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자라났다. 그가 열 네 살 적부터 그들 부모들 사이에 혼인 말이 있었고, 그도 어린 마음에 매우 탐탁하게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그 처녀가 열 일곱 살된 겨울에 별안간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 아버지 되는 자가 20원을 받고 대구 유곽19)에 팔아먹은 것이었다. 그 소문이 퍼지자 그 처녀 가족은 그 동리에서 못 살고 멀리 이사를 갔는데, 그 후로는 피차에 한 번 만나 보지도 못하였다. 이번에야 빈터만 남은 고향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읍내에서 그 아내 될 뻔한 댁과 마주치게 되었다.

처녀는 어떤 일본 사람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다. 궐녀는 20원 몸값을 10년을 두고 갚았건만 그래도 주인에게 빛이 60원이나 남았었는데, 몸에 몹쓸 병이 들어 나이 늙어져서 산송장이 되니까, 주인되는 자가 특별히 빚을 탕감20)해 주고, 작년 가을에야 놓아 준 것이었다.

궐녀도 자기와 같이 10년 동안이나 그리던 고향에 찾아오니까 거기에는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쓸쓸한 돌무더기만 눈물을 자아낼 뿐이었다. 하루해를 울어 보내고 읍내로 들어와서 돌아다니다가, 10년 동안에 한 마디 두 마디 배워 두었던 일본말 덕택으로 그 일본 집에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암만 사람이 변하기로 어째 그렇게도 변하기오? 그 숱많던 머리가 훌렁 다 벗어졌더마. 눈은 푹 들어가고 그 이들이들하던 얼굴빛도 마치 유산21)을 끼얹은 듯하더마."

"서로 붙잡고 많이 우셨겠지요."

"눈물도 안 나오더마. 일본 우동집에 들어가서 둘이서 정종만 열 병 따라 뉘고 헤어졌구마." 하고 가슴을 짜는 듯한 괴로운 한숨을 쉬더니만 그는 지난 슬픔을 새록새록이 자아내어 마음을 새기기에 지쳤음이더라.

"이야기를 다하면 무얼 하는기오."

하고 쓸쓸하게 입을 다문다.

나 또한 너무도 참혹한 사람살이를 듣기에 쓴물이 났다.

", 우리 술이나 마저 먹읍시다."

하고 우리는 주거니받거니 한 되 병을 다 말리고 말았다. 그는 취흥에 겨워서 우리가 어릴 때 멋 모르고 부르던 노래를 읊조렸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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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씀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년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밤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핵심 정리

 

1. 갈래 - 현대시, 자유시, 서정시

2. 성격 - 회상적, 사색적, 성찰적, 의지적

3. 주제 - 아름다운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 성찰

4. 특징 - '과거(그리움) - 현재(반성) -미래(희망)'로 이어지면서 시상이 전개됨

- 산문적 리듬을 가진 연을 삽입하여 운율의 변화를 줌

- 어머니에게 이야기하는 듯한 담화체 형식을 사용하여 애틋한 서정을 섬세하게 드러냄

5. 작가 - 윤동주(1917~1945)

시인. 중국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 소학교, 은진 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 중학교로 편입하였으나신사 참배 거부로 자퇴하고, 광명 중학교 졸업 후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여다. 이후 일본에 유학했다가 귀향을 준비하던 중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복역하다 28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1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대학 시절 쓴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고자 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이 시집은 1948년에 자필 유작과 함께 엮여 유고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6. 이해와 감상

'별 헤는 밤'은 시인이 연희 전문학교 졸업 직전인 1941년 11월 5일에 지은 시로 알려져 있다. 전체 10연 가운데 7연까지는 타향에서 밤하느의 별을 바라보고 아름다웠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상념에 빠져드는 모습을 형상화하였고, 8,9연에서는 자신의 무기력한 생활에 대한 성찰과 존재에 대한 부끄러움을 객관화하여 표현하였다. 하지만 10연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생적 기원을 다짐하는 모습을 통해 시상이 극적으로 전환되며,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토앻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하였다.

 

7. 작품의 주제 형상화 방법

① 상징적 시어의 사용과 감정이입 - 화자가 지향하는 세계를 상징하는 '별'과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드러내는 '벌레'를 통해 화자의 정서를 드러냄

② 반복과 열거 - 4연에서 동일한 문장 구조의 반복으로 리듬감을 형성하고 화자의 정서를 강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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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松都:개성) 낙타교 옆에 이생이 살고 있었는데, 나이는 열 여덟이었다. 풍운이 맑고 재주가 뛰어나 일찍부터 국학(國學)에 다녔는데, 길을 가면서도 시를 읽었다.

선죽리(善竹里) 귀족집에서는 최씨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나이는 열대 여섯쯤 되었다. 태도가 아리땁고 수도 잘 놓았으며, 시와 문장도 잘 지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풍류로워라 이총각

아리따워라 최처녀.

그 재주와 그 얼굴을

누군들 찬탄치 않으랴.

 

이생은 일찍부터 책을 옆에 끼고 학교에 다닐 때에 언제나 최씨네 집 북쪽 담 밖으로 지나다녔다. 수양버들 수십 그루가 간들거리며 그 담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느 날 이생이 그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담 안을 엿보았더니,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고 벌과 새들이 다투어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 곁에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꽃떨기 사이로 은은히 보였다. 구슬발이 반쯤 가려 있고 비단 휘장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수를 놓다가 지쳐 잠시 바늘을 멈추며 턱을 괴고 시를 읊었다.

 

사창(紗窓)에 홀로 기대앉아 수놓기도 귀찮구나.

온갖 꽃 떨기 속에 꾀꼬리 소리 다정도 해라.

마음속으로 부질없이 봄바람을 원망하며

말없이 바늘 멈추고는 생각에 잠겼어라.

 

저기 가는 저 총각은 어느 집 도련님일까.

푸른 옷깃 넓은 띠가 늘어진 버들 사이로 비쳐 오네.

이 몸이 죽어 가서 대청 위의 제비 되면

주렴 위를 가볍게 스쳐 담장 위를 날아 넘으리.

 

이생은 그 여인이 읊은 시를 듣고 마음이 근질근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집의 담이 높고도 가파르며 안채가 깊숙한 곳에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마음으로 (학교에)갔다.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흰 종이 한 장에다 시 세 수를 써서 기와 쪽에 매달아 담 안으로 던져 넣었다.

 

무산 열두 봉우리 첩첩이 쌓인 안개 속에

반쯤 드러난 봉우리가 붉고도 푸르구나.

양왕의 외로운 꿈을 수고롭게 하지 마오.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양대에서 만나 보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되어 탁문군(卓文君)을 꾀어내려니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은 이미 다 이루어졌네.

붉은 담머리의 복사꽃과 오얏꽃은

바람에 날려서 어디로 떨어지나.

 

좋은 인연되려는지 나쁜 인연 되려는지

부질없는 이 내 시름 하루가 일 년 같아라.

스물 여덟 자로 황혼의 기약을 맺었으니

남교에서 어느 날 신선을 만나려나.

 

최랑이 몸종 향아(香兒)를 시켜서 그 편지를 주워다 보니, 바로 이생이 지은 시였다. 최랑이 그 시를 펼쳐서 두세 번 읽고는 마음속으로 혼자 기뻐하였다. 종이쪽지에 여덟 자를 써서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님이여. 의심 마세요. 황혼에 만나기로 하세요."

이생이 그 말대로 황혼이 되자 최랑의 집을 찾아갔다. 갑자기 복사꽃 한 가지가 담 위로 넘어오면서 하늘거리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생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넷줄이 대바구니를 매어서 아래로 늘어뜨려 놓았다. 이생을 그 줄을 잡고 담을 넘었다.

마침 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꽃 그림자가 땅에 비껴 맑은 향내가 사랑스러웠다. 이생은 자기가 신선 세계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여 마음은 비록 기뻤지만, 자기의 마음이나 지금 하려는 일이 비밀스러워서 머리칼이 모두 곤두섰다.

이생이 좌우를 둘러보았더니, 최랑은 꽃떨기 속에서 향아와 같이 꽃을 꺾어 머리에 꽂고는, 외진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최랑이 이생을 보고 방긋 웃으면서 시 두 구절을 먼저 읊었다.

 

복사와 오얏 가지 속에 꽃송이 탐스럽고

원앙새 베개 위엔 달빛도 고와라.

 

이생이 뒤를 이어 시를 읊었다.

 

다음날 어쩌다가 봄소식이 새나간다면

무정한 비바람에 더욱 가련해지리라.

 

최랑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하였다.

"저는 본디 당신과 함께 부부가 되어 끝까지 남편으로 모시고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어요. 그런데 당신은 어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저는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마음이 태연한데, 장부의 의기를 가지고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다음날 규중의 일이 누설되어 친정에서 꾸지람을 듣게 되더라도, 제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향아야. 방 안에서 술과 안주를 가져오너라."

향아가 시키는 대로 가버리자, 사방이 고요하여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이생이 최랑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최랑이 말하였다.

"이곳은 뒷동산에 있는 작은 누각 아래이지요. 저희 부모님께서는 제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여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연못가에다 이 누각을 따로 지어 주셨지요. 봄이 되어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면 몸종 향아와 함께 즐겁게 놀라고 하신 거지요. 부모님이 계신 곳은 여기서 멀기 때문에 아무리 웃으며 크게 이야기해도 쉽게 들리지는 않는답니다."

최랑이 술 한 잔을 따라 이생에게 권하면서 고풍(古風)으로 한 편을 읊었다.

 

부용못 푸른 물을 난간에서 굽어보다

꽃떨기 속에서 님들이 속삭이네.

향그런 안개 깔린 속에 봄빛이 화창해서

새 가사를 지어내어백저사(白紵詞)를 부르는구나.

꽃그늘에 달빛이 비껴 털방석에 스며들고

긴 가지 함께 잡으니 붉은 꽃비가 떨어지네.

바람이 향내를 끌어와 옷 속에 스며들자

첫봄을 맞은 아가씨가 햇살 속에 춤추네.

비단 적삼 가볍게 해당화를 스쳤다가

꽃 사이에 졸고 있던 앵무새만 깨웠네.

 

이생도 바로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도원에 잘못 들어와 복사꽃이 만발한데

많고 많은 이 내 정회(情懷)를 다 말할 수가 없네.

구름같이 쪽찐 머리에 금비녀 낮게 꽂고

산뜻한 봄 적삼을 모시 베로 지었구나.

나란히 달린 꽃가지를 봄바람에 꺾다니

하많은 꽃가지에 비바람아 부지 마소.

선녀의 소맷자락 나부껴 그림자도 하늘거리고

계수나무 그늘 속에선 시름이 따를 테니

함부로 새 곡조 지어 앵무새에게 가르치지 마오.

 

술자리가 끝나자 최랑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오늘의 일은 반드시 작은 인연이 아니랍니다. 당신은 저를 따라오셔서 정을 나누는 것이 좋겠어요."

말을 마치고 최랑이 북쪽 창문으로 들어가자 이생도 그 뒤를 따라갔다. 누각에 달린 사다리가 있었는데,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과연 그 다락이 나타났다. 문방구와 책상들이 아주 말끔했으며, 한쪽 벽에는연강첩장도(烟江疊 )유황고목도(幽篁古木圖)가 걸려 있었는데, 모두 이름난 그림이었다. 그 그림 위에는 시가 씌어 있었는데, 누가 지은 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첫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어떤 사람의 붓끝에 힘이 넘쳐

이 강 속에다 겹겹이 쌓인 산을 그렸던가?

웅장해라. 삼만 길의 저 방호산(方壺山)

아득한 구름 사이로 반쯤만 드러났네.

저 멀리 산세(山勢)는 몇백 리까지 뻗어 있는데

푸른 소라처럼 쪽진 머리가 가까이 보이네.

끝없이 푸른 물결 공중에 닿았는데

저녁노을 바라보니 고향이 그리워라.

이 그림 구경하며 사람 마음이 쓸쓸해져

소상강 비바람에 배 띄운 듯하여라.

 

둘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쓸쓸한 대숲에선 가을 소리가 들리는 듯

비스듬히 누운 고목은 옛정을 품은 듯해라.

구부러진 늙은 뿌리엔 이끼가 가득 끼었고

굵고 곧은 가지는 바람과 천둥을 이겨 왔네.

가슴속에 간직한 조화가 끝이 없으니

미묘한 이 경지를 누구에게 말할 텐가.

위언(韋偃)과 여가(輿可)도 이미 귀신이 되었으니

천기를 누설할 자가 그 몇이나 되려나.

갠 창가 그윽한 곳에서 말없이 바라보니

삼매경에 든 필법이 못내 사랑스러워라.

 

한쪽 벽에는 사철의 경치를 읊은 시를 각각 네 수씩 붙였는데, 역시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글씨는 송설(松雪)의 서체를 본받아 자체가 아주 곱고도 단정하였다.

그 첫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연꽃 그린 휘장은 따뜻하고 향내는 실같은데

창밖에 붉은 살구꽃이 비 내리듯 하는구나.

다락 머리에서 새벽 종소리에 남은 꿈을 깨고 보니

개나리 무성한 둑에 때까치가 우짖네.

 

제비새끼 커 가는데 안방 깊숙이 들어앉아

귀찮은 듯 말도 없이 금바늘을 멈추었네.

꽃 아래로 쌍쌍이 나비들 짝 지어 날며

그늘진 동산으로 지는 꽃을 따라가네.

 

꽃샘 추위가 초록 치마를 스쳐 가면

무정한 봄바람에 이 내 간장 끊어지네.

말없는 이 심정을 그 누가 안다더냐.

온갖 꽃 만발한 속에 원앙새가 춤추는구나.

 

깊어 가는 봄빛을 뉘 집 동산에 간직했나?

붉은 꽃잎 푸른 나뭇잎 사창에 비치었네

뜨락의 꽃과 풀들은 봄시름에 겨웠는데

주렴을 가볍게 걷고 지는 꽃을 바라보네.

 

그 둘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밀이삭 처음 베고 제비 새끼 날아드는데

남쪽 뜰엔 석류꽃이 두루 피었구나.

푸른 창가에 앉아 길쌈하는 아가씨는

붉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새 치마를 지으려네.

 

매실이 익는 철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홰나무 그늘에 꾀꼬리 울고 제비는 주렴으로 날아드네.

또한 해 봄 풍경이 시들어 가니

고련꽃 떨어지고 죽순이 삐죽 솟았네.

 

푸른 살구 손에 쥐고 꾀꼬리에게 던져 보네.

남쪽 난간에 바람 일고 해그림자 더디어라.

연잎에 향내 가시고 못에는 물이 가득한데

푸른 물결 깊은 곳에서 원앙새가 목욕하네.

 

등 평상 대자리에 무늬가 물결 지고

소상강 그린 병풍에는 구름이 한 자락 있네.

낮꿈을 깨고도 나른해 누웠더니

반창에 비낀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가네.

 

그 셋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가을 바람이 쌀쌀해서 찬이슬이 맺히고

달빛도 고와서 물빛 더욱 푸르구나.

한 소리 또 한소리 기러기 울며 돌아가는데

우물에 오동잎 지는 소리를 다시금 듣고파라.

 

상 밑에서는 온갖 벌레들이 처량하게 울고

상 위에서는 아가씨가 구슬 눈물을 떨어뜨리네.

만리 밖 싸움터에 몸을 바친 님에게도

오늘밤 옥문관(玉門關)에 달빛이 환하겠지.

 

새 옷을 마르려니 가위가 차가워라.

나직이 아이 불러 다리미를 가져오라네.

다리미에 불 꺼진 걸 살피지 못하다가

머리를 긁으며 피리대로 가만히 헤치네.

 

작은 연못에 연꽃도 지고 파초 잎도 누래지자

원앙 그린 기와 위에 첫서리가 내렸네.

묵은 시름 새 원한을 막을 길이 없는데

귀뚜라미 울음까지 골방에 들리네.

 

그 넷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한 가지 매화 그림자가 창 앞으로 뻗었는데

바람 센 서쪽 행랑에 달빛 더욱 밝아라.

화롯불 꺼졌는지 부저로 헤쳐 보고는

아이를 불러다 차솥을 바꾸라네.

 

밤서리에 놀란 잎이 자주 흔들리고

돌개바람이 눈을 몰아 긴 마루로 들어오네.

님 그리워 밤새도록 꿈속에 뒤척이니

빙하(氷河)가 어디런가, 그 옛날 전쟁터일세.

 

창에 가득한 붉은 해는 봄날처럼 따뜻한데

시름에 잠긴 눈썹에 졸음까지 더하네.

병에 꽂힌 작은 매화는 필 듯 말듯 하는데

수줍어 말도 못하고 원앙새만 수놓는구나.

 

쌀쌀한 서리 바람이 북쪽 숲을 스치는데

처량한 까마귀가 달을 보며 우는구나.

등불 앞에 님 생각 눈물 되어 흐르니

실에도 떨어지고 바늘에도 떨어지네.

 

한쪽에 작은 방 하나가 따로 있었는데, 휘장 . . 이불 .베개들이 또한 아주 깨끗하였다. 휘장밖에는 사향을 태우고 난향의 촛불을 켜놓았는데, 환하게 밝아서 마치 대낮 같았다. 이생은 최랑과 더불어 마음껏 즐거움을 누리면서 여러 날 머물었다.

(어느 날) 이생이 최랑에게 말하였다.

"옛 성인의 말씀에,'어버이가 계시면 나가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제 내가 부모님을 떠난 지가 사흘이나 되었소. 부모님께서 반드시 대문에 기대어 기다리실 테니, 이 어찌 아들의 도리라고 하겠소?"

최랑은 서운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을 넘어 보내 주었다. 이생을 이 뒤부터 저녁마다 최랑을 찾아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에 이생의 아버지가 이생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네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것은 옛 성인의 어질고 의로운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요즘은 저녁에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반드시 경박한 놈들의 행실을 배워 남의 집 담을 넘어서 아가씨나 엿보고 다닐게다.

이런 일이 만일 탄로되면 남들은 모두 내가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지 못했다고 책망할 것이다. 또 그 처녀도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이라면 반드시 네 미친 짓 떄문에 그 집안을 더럽히게 될 것이다. 남의 집에 죄를 지었으니, 이 일이 작지 않다. 너는 빨리 영남으로 내려가서 종들을 데리고 농사나 감독하거라.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그 이튿날 (이생의 아버지가 이생을) 울주로 내려보냈다.

최랑은 저녁마다 화원에서 이생을 기다렸지만, 여러 달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최랑은 이생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여, 향아를 시켜 이생의 이웃들에게 물래 물어 보게 하였다. 이웃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도령은 그 아버지에

 

게 죄를 지어 영남으로 떠난 지가 벌써 여러 달이나 되었다오."

최랑은 이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침상에 누웠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일어나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였다. 말도 앞뒤가 맞지 않았으며, 얼굴이 초췌해졌다.

최랑의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 그 병의 증상을 물었지만, 묵묵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딸의 상자 속을 들추어보았더니, 이생과 지난날에 주고받은 시들이 있었다. 최랑의 부모들이 그제야 놀라서 무릎을 치며 말하였다.

"어이구. 우리 딸자식을 잃어버릴 뻔했구려."

그리고는 딸에게 물었다.

"이생이 누구냐?"

이렇게 되자 최랑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목구멍에서 겨우 나오는 소리로 부모에게 아뢰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길러 주신 은혜가 깊으니, 어찌 사실을 슴기겠습니까? 저 혼자 생각해보니 남녀가 서로 사랑을 느끼는 것은 인정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결혼할 좋은 시기를 놓치지 마라'는 말은"시경(詩經)의 주남(周南)편에도 나타나고, '여자가 정조를 지키지 못하면 흉하다'는 말은주역(周易)에서도 경계하였습니다.

저는 버들처럼 가냘픈 몸으로 얼굴빛이 시드는 것은 생각지 않고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옆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새삼 덩굴이 다른 나무에 의지해서 살듯이 저는 벌써 위당(渭塘)의 처녀 노릇을 가게 되었으니, 죄가 이미 가득 차 집안에까지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 아름다운 도련님과 한 번 정을 통한 뒤부터는 도련님께 대한 원망이 천만 번 생기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몸으로 괴로움을 참으며 홀로 살아가려니, 그리운 정은 나날이 깊어 가고 아픈 상처를 나날이 더해 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원한 맺힌 귀신으로 화()해 버릴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남은 목숨을 보존하게 되고, 이 간절한 청을 거절하신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생과 저승에서 다시 만나 노닐지언정, 맹세코 다른 가문에는 오르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부모도 이미 그의 뜻을 알았으므로 다시는 병의 증세를 묻지 않았다. 타이르고 달래면서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리고는 중매쟁이의 예를 갖추어 이생의 집으로 보냈다.

이생의 아버지가 최씨 집안이 얼마나 번성한지 물은 뒤에 말하였다.

"우리 집 아이가 비록 어린 나이에 바람이 났지만, 학문에 정통하고 사람답게 생겼소. 앞으로 장원급제할 것이며 훗날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니, 서둘러 혼처를 정하고 싶지 않소."

중매장이가 돌아가서 그대로 아뢰자, 최씨가 다시 (중매인을 이씨 집으로) 보내어 말하게 하였다.

"한 시대의 친구들이 모두들 '그 댁의 영식(令息)은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아직은 또아리를 틀고 있지만, 어찌 끝까지 연못 속에 잠겨만 있겠습니까? 빨리 혼삿날을 정해 두 집안의 즐거움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매쟁이가 돌아가서 또 그 말을 이생의 아버지에게 전하였더니, 이생의 아버지가 말하였다.

"나도 젊었을 때부터 책을 잡고 학문을 닦았지만, 나이 늙도록 성공하지 못하였소. 종들도 흩어지고 친척의 도움도 적어, 생업이 신통치 않고 살림도 궁색해졌소. 그러니 문벌 좋고 번성한 집안에서 어찌 한갓 빈한한 선비를 사위로 삼으려 하시겠소? 이는 반드시 일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우리 집안을 지나치게 칭찬해서 귀댁을 속이려는 것일 거요."

중매쟁이가 돌아와서 또 최씨 집안에 전하자. 최씨 집안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물 드리는 모든 절차와 옷차림은 모두 저희 집에서 갖추겠습니다. 좋은 날을

 

가려서 화촉의 시기만 정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중매쟁이가 또 돌아가서 이 말을 전하였다.

이씨 집안에서도 이렇게까지 되자 뜻을 돌려, 곧 사람을 보내어 이생을 불러다 그의 생각을 물었다. 이생을 스스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시 한 수를 지었다.

 

깨어진 거울이 다시 둥글게 되니

만남도 때가 있어

은하의 까마귀와 까치들이

아름다움 기약을 도와주었네.

 

이제야 월하노인(月下老人)

붉은 실을 잡아매었으니

봄바람이 건듯 불더라도

소쩍새를 원망 마소.

 

최랑이 이 시를 듣고는 병도 차츰 나아져, 자기도 시를 지었다.

 

나쁜 인연이 바로

좋은 인연이던가?

그 옛날 맹세가

마침내 이루어졌네.

어느 때나 님과 함께

작은 수레를 끌고 갈까?

아이야, 나를 일으켜 다오

꽃비녀를 손질하련다.

 

이에 좋은 날을 가려 마침내 혼례를 이루니, 끊어졌던 사랑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부부가 된 이후에 서로 사랑하면서도 공경하여 마치 손님처럼 대하니, 비록 양홍 . 맹광이나 포선(鮑宣).환소군(桓少君)이라도 그들의 절개와 의리를 따를 수가 없었다.

이생이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자, 그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다.

신축년(1361)에 홍건적이 서울을 점거하자 임금은 복주(福州)로 피난 갔다. 적들은 집을 불태워 없애버렸으며, 사람을 죽이고 가축을 잡아먹었다. 부부와 친척끼리도 서로 보호하지 못했고 동서로 달아나 숨어서 제각기 살길을 찾았다.

이생은 가족들을 데리고 외진 산골로 숨었는데, 한 도적이 칼을 빼어들고 뒤를 쫓아왔다. 이생은 달아나 목숨을 건졌지만, 최랑은 도적에게 사로잡혔다. 도적이 최랑의 정조를 빼앗으려 하자, 최랑이 크게 꾸짖었다.

"창귀( ) 같은 놈아. 나를 죽여 먹어라. 내 차라리 죽어서 시랑(豺狼)의 밥이 될지언정 어찌 개돼지 같은 놈의 짝이 되겠느냐?"

도적이 노하여 최랑을 죽이고 살을 도려내었다.

이생은 거친 들판에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전하다가, 도적이 이미 다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이 사시던 옛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집은 이미 싸움 통에 불타 없어졌다. 또 최랑의 집에도 가보았더니 행랑채는 황량했으며, 쥐와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이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작은 누각으로 올라가서 눈물을 거두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날이 저물도록 우두커니 홀로 앉아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 보니 완연히 한바탕 꿈만 같았다.

二更(이경)쯤 되자 희미한 달빛이 들보를 비춰 주는데 낭하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이르고 보니 바로 최랑이었다.

 

 

이생은 그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에 의심하지도 않고 물어 보았다.

"당신은 어디로 피난 가서 목숨을 보전하였소?"

여인이 이생의 손을 잡고 한바탕 통곡하더니, 이내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본디 양가의 딸로서 어릴 때부터 가정의 교훈을 받아 수놓기와 바느질에 힘썼고, 시서(詩書)와 예법을 배웠어요. 그래서 규방의 법도만 알뿐이지, 그 밖의 일이야 어찌 알겠어요? 마침 당신이 붉은 살구꽃이 핀 담 안을 엿보았으므로, 제가 푸른 바다의 구슬을 바친 거지요. 꽃 앞에서 한번 웃고 평생의 가약을 맺었고, 휘장 속에서 다시 만날 때에는 정이 백년을 넘쳤었지요.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슬프고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군요. 장차 백년을 함께 하자고 하였는데, 뜻밖에 횡액을 만나 구렁에 넘어질 줄이야 어찌 알았겠어요? 늑대 같은 놈들에게 끝까지 정조를 잃지 않았지만, 제 몸은 진흙탕에서 찢겨졌답니다. 천성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지, 인정으로야 어찌 그럴 수 있었겠어요?

저는 당신과 외딴 산골에서 헤어진 뒤에 짝 잃은 새가 되었었지요. 집도 없어지고 부모님도 돌아가셨으니, 피곤한 혼백을 의지할 곳도 없는 게 한스러웠답니다. 절의(節義)는 중요하고 목숨은 가벼우니, 쇠잔한 몸뚱이일망정 치욕을 면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지요. 그러나 마디마디 끊어진 제 마음을 그 누가 불쌍하게 여겨 주겠어요? 한갓 애끊는 썩은 창자에만 맺혀 있을 뿐이지요.

해골은 들판에 내던져졌고 간과 쓸개는 땅바닥에 널려졌으니, 가만히 옛날의 즐거움을 생각해 보면 오늘의 슬픔을 위해 있었던 것 같군요.

이제 봄바람이 깊은 골짜기에 불어오기에, 저도 이승으로 돌아왔지요. 봉래산 십이년의 약속이 얽혀 있고 삼세(三世)의 향이 향그러우니, 오랫동안 뵙지 못한 정을 이제 되살려서 옛날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겠어요. 당신이 지금도 그 맹세를 잊지 않으셨다면, 저도 끝까지 잘 모시고 싶답니다. 당신도 허락하시겠지요?"

이생이 기쁘고도 고마워하며 말하였다.

"그게 애당초 내 소원이오."

그리고는 서로 정답게 심정을 털어놓았다. 재산을 얼마나 도적들에게 빼앗겼는지 이야기가 나오자, 여인이 말하였다.

"조금도 잃지 않고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 묻어 두었답니다."

이생이 또 물었다.

"두 집 부모님의 해골을 어디에 모셨소?"

여인이 말하였다.

"어느 곳에다 그냥 버려 두었지요."

정겨운 이야기를 끝낸 뒤에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지극한 즐거움이 예전과 같았다.

이튿날 여인이 이생과 함께 자기가 묻혀 있던 곳을 찾아갔는데, 과연 금과 은 몇 덩어리가 있었고, 재물도 약간 있었다. 그들은 두 집 부모님의 해골을 거두고 금과 재물을 팔아 각각 오관산 기슭에 합장하였다. 나무를 세우고 제사를 드려 예절을 모두 다 마쳤다.

그 뒤에 이생도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고 최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목숨을 구하려고 달아났던 종들도 또한 스스로 돌아왔다. 이생은 이때부터 인간세상의 모든 일을 다 잊어버렸으며, 아무리 친척이나 손님들의 길흉사가 있더라도 방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았다. 언제나 최씨와 더불어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금실 좋게 지내었다.

그럭저럭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에 여인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세 번이나 가약을 맺었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즐거움이 다하기도 전에 슬프게 헤어져야만 하겠어요."

여인이 목메어 울자 이생이 놀라면서 물었다.

"어찌 이렇게 되었소?"

 

 

여인이 대답하였다.

"저승길은 피할 수가 없답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당신의 연분이 끊어지지 않았고 또 전생에 아무런 죄도 지지 않았다면서, 이 몸을 환생시켜 당신과 잠시라도 시름을 풀게 해주었었지요. 그러나 제가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머물면서 산 사람을 미혹시킬 수는 없답니다."

그리고는 몸종 향아를 시켜서 술을 올리게 하고는, 옥루춘곡(玉樓春曲)에 맞추어 노래 한 가락을 지어 부르며 이생에게 술을 권하였다.

 

칼과 창이 어우러져 싸움이 가득한 판에

옥 부서지고 꽃 떨어지니 원앙도 짝을 잃었네.

흩어진 해골을 그 누가 묻어 주랴.

피에 젖어 떠도는 혼이 하소연할 곳도 없었네.

무산의 선녀가 고당에 한번 내려온 뒤에

깨어진 종()이 거듭 갈라지니 마음 더욱 쓰라려라.

이제 한번 작별하면 둘이 서로 아득해질 테니

하늘과 인간세상 사이에 소식마저 막히리라.

 

노래를 한마디 부를 때마다 눈물이 자꾸 내려 거의 곡조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생도 또한 슬픔을 걷잡지 못하며 말하였다.

"내 차라리 당신과 함께 황천(荒天)으로 갈지언정 어찌 무료하게 홀로 여생을 보전하겠소? 지난 번 난리를 겪고 난 뒤에 친척과 종들이 저마다 서로 흩어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해골이 들판에 내버려져 있었는데,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장사를 지내 드렸겠소? 옛 사람 말씀에,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는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신 뒤에는 예로써 장사지내라' 하셨는데, 이런 일을 모두 당신이 감당해 주었소. 당신은 정말 천성이 효성스럽고 인정이 두터운 사람이오. 나는 당신에게 고맙기 그지없고,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소. 당신도 인간 세상에 더 오래 머물다가 백년 뒤에 나와 함께 티끌이 되었으면 좋겠구려."

여인이 말하였다.

"당신의 목숨은 아직 남아 있지만, 저는 이미 귀신의 명부(冥府)에 실려 있답니다. 그래서 더 오래 볼 수가 없지요. 제가 굳이 인간세상을 그리워하며 미련을 가진다면 명부의 법도를 어기게 되니, 저에게만 죄가 미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도 또한 누가 미치게 된답니다. 저의 유골이 어느 곳에 흩어져 있으니, 만약 은혜를 베풀어주시려면 (그 유골이나 거두어) 비바람을 맞지 않게 해주세요."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눈물만 줄줄 흘렸다.

"낭군님,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말이 끝나자 차츰 사라지더니 마침내 자취가 없어졌다.

이생은 (여인의 말대로) 유골을 거두어 부모님의 무덤 곁에다 장사를 지내 주었다. 장사를 지낸 뒤에는 이생도 또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다가 병을 얻어, 몇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마다 가슴 아파 탄식하며 그들의 아름다운 절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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