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시습

 

1. 김시습(金時習, 1435-1493)금오신화(金鰲新話)로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려 말기부터 설화에서 기인한 가전체 문학, 그리고 전기(傳奇)의 형태로 이어지던 서사문학이 금오신화로 말미암아 비로소 고전소설의 탄생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체제가 정비되면서 점차 드러나기 시작한 시대적 모순에 저항했던 사람이었고, 기존의 문학과는 다른 방외(方外)인의 문학을 산출해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 김시습의 생애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청한자 등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그는 신라 원성왕의 동생인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인데, 여러 대에 걸쳐 무관직에 종사하던 한미한 집안이었다.

 

김시습은 유년 시절을 대부분 서울에서 보냈다. 그는 서울의 반궁(泮宮), 지금의 성균관 북쪽에서 태어났다. 태어난지 8개월만에 능히 글을 깨우치자, 이웃집에 사는 집현전 학사 최치운은 그의 이름을 시습이라 하였다. 이는 논어학이(學而)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悅乎)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3세 때에는 이미 글을 지을 줄 알아 외할아버지에게 시 짓는 법을 배웠다. 유모가 보리를 맷돌로 갈자 비도 없는데 어디서 천둥 소리 나는가/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에 흩어지네라 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5세 되던 해 김시습은 이웃에 사는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 들어가 중용대학을 배웠다. 하루는 정승 허조가 찾아와 ()’자를 넣어 시를 짓게 하였다. 그랬더니 김시습은 그 자리에서 노목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고 시를 지어 뭇 사람들은 탄복시켰다. 이 소문은 국왕인 세종에까지 들어갔고 세종은 승정원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명을 내려 김시습을 불러다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였다. 박이창은 김시습을 불러온 자리에서 동자의 글재주는 백학이 하늘 끝에서 춤추는도다라는 글귀에 대구를 맞추라고 하였다. 그러자 어린 김시습은 곧바로 성군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에서 번득이는 듯하다라고 시구를 지었다. 그 밖에 몇 번의 시험이 있지만 막힘이 없어 지어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다. 세종은 그에게 비단 50필을 하사하였고, 김시습은 하사받은 50필의 비단 끝을 각각 이어서 한쪽 끝을 허리에 차고 유유히 끌고 대궐문을 나갔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김오세(金五歲)’라고 불리웠다 한다.

 

13세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뒤 후진양성에 힘쓰던 김반의 문하에서 사서(四書)를 배웠고 국초(國初)의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까지 불리던 윤상에서 제자백가를 두루 배웠다.

15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외가의 농장에 내려가 몸을 의탁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 전에 다시 그의 외숙모마저 세상을 떠나 그는 어쩔 수 없이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이 무렵 그의 아버지까지 중병이 들어 집안 일을 거의 돌볼 수 없게 되자 곧 계모를 맞이하게 되었다. 김시습도 훈련원 도정 남효례의 딸과 혼인하였다.

 

21세 되던 해에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계유정난이 일어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대성통곡하며 읽고 있던 책을 모조리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법명을 설잠(雪岑)으로 한 후 그는 전국을 발길 닿는 대로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이때부터 입신출세의 길을 단념하였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했다.

 

24세에 관서지방을 유랑하면서 지은 글을 모아 탕유관서록을 엮었고, 관동지방으로 가 금강산, 강릉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26세에는 탕유관동록을 엮었다.

 

29세에는 삼남을 기행하면서 쓴 글을 모아 탕유호남록을 정리하여 엮었다.

29(세조 9) 되던 해 가을, 책을 사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효령대군을 만났고, 그는 대군의 간청을 못이겨 세조가 벌이고 있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자신이 경멸하던 인사들이 중앙 관직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저주하며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31(1465) 봄에는 경주 남산의 금오산에 들어가 금오산실을 짓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려 하였지만 이 해 3월에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원각사 낙성회에 참가하라는 세종의 명을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치하(致賀)와 찬시(讚詩)를 지어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그에게 원각사에 머무르도록 하였으나, 그는 여러 날을 보내고는 재물을 기울여 책을 사서 서울을 떠났다. 그가 잠시 왕의 명을 받들어 서울로 올라왔던 것은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조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 풀렸고, 그에게 아직 벼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머물렀던 금오산의 금오산실은 용장사터였고 그는 이곳에서 37세까지 약 7년간을 머무르게 되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가 이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37세가 되던 해 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는 그와 친분이 두터운 서거정(徐居正)이 예문관 대제학을, 정창손(鄭昌孫)은 영의정, 김수온(金守溫)은 좌리공신, 노사신은 영돈녕부 등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그는 10여년 동안 성동의 폭처넝사 외에도 양주에 있는 수락산의 수락정사에서도 오래 생활하였다.

 

47세가 되던 해에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해다. 주위 사람의 권유로 안씨 집안의 딸과 혼인하여 환속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 되어 부인이 죽고 말았다. 이듬해 폐비윤씨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럽자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김시습은 관동으로 간 뒤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각 지방으로 전전하며 설악산춘천강릉한계청평 등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는 춘천 청평사의 남쪽 마을인 세향원이나 설악산의 오세암에 거처하기도 하였다.

 

김시습은 충청도 부여의 무량사에서 59세 되던 해 3월에 생애를 마쳤다.

 

3. 한문 단편소설집 금오신화

 

김시습이 31세에서 37세까지 경주의 금오산에 머물면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시습은 이 작품을 지은 뒤 곧바로 세상에 발표하지 않고 석실에 감추두고는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아는 자가 있으리라 하였다. 이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금오신화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약탈하여 일본에서 두 차례나 판각되었다.

⓷ 「금오신화는 국내의 문인들에게도 읽혀졌던 듯하다. 용천담적기에서 김안로는 이를 전등신화와 비교하고 있다. 또한 퇴계 이황도 읽었다 하였으며, 하서 김인후도 이 작품에 대한 시를 쓰고 있고, 우암 송시열도 이를 읽고자 하였으나 구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특히 조선 중기에는 김집이 직접 옮겨 적은 전기소설집에도 만복사저포기이생규장전이 수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소설 문학의 서장을 연 금오신화에 대하여 일찍이 김안로는 명나라 구우(瞿佑)가 쓴 전등신화를 본받아 썼다고 지적한 바 있고, 김시습도 전등신화를 읽고 쓴 제전등신화후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적 이후 이 작품은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모방하여 씌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최근에는 전등신화금오신화의 세계관이 상이하고, 우리 서사문학의 전통 속에서 금오신화가 씌어졌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시되고 있다. 금오신화속의 저항성이나 시대 거부의 의지는 현실세계에서 외면당한 작가가 유자(儒子)적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의 표현이며, 인간성을 옹호하고 긍정하려는 현실 참여의 정신이 이러한 작품으로 구체화된 것으로 본다.

이 작품은 김시습의 내면적인 고민의 소산이다. 곧 유불선을 탐구하던 30대 지식인의 사상과 세계관의 갈등이 뒤섞인 것이며, 그가 입신양명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러한 갈등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

 

4. 이생규장전속의 홍건적의 난

 

* 홍건적과 왜구

머리에 붉은 수건을 썼다는 뜻의 홍건적(紅巾賊)은 본래 원의 지배에 반대해 일어선 농민 봉기군이었으나 점차 변질되어 약탈자가 되었다. 홍건적은 13594만의 병력으로 침입, 서경까지 점령한 적이 있으며, 136110월에는 20만의 병력으로 들어와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점령. 이에 고려군은 13621월 총병관 정세운이 이끄는 20만의 병력으로 총반격을 개시, 10여만 명의 적을 섬멸하는 대전과를 거두면서 홍건적을 물리침

왜구(倭寇)의 문제가 본격 대두된 것은 1350년 이후의 일. 이 때는 관응의 난이라 해서 일본 전역이 내란에 휩싸이고, 일본 봉건 지배층의 수탈이 극에 달한 시기였는데, 굶주린 사람들이 해적 행위에 나선 것이 바로 왜구. 왜구는 공민왕 대에 115, 우왕(1374~1388) 대에 378회에 이를 정도로 끊임없이 고려의 남부 해안 지역, 때로는 내륙 지방까지 침입. 왜구들은 소규모 혹은 대규모로 불시에 나타나 학살과 약탈, 노략질을 하고는 돌아갔기 때문에, 당시 북방에서 원, 홍건적 등과 긴장된 대결을 벌여야 했던 고려로서는 효과적인 대응을 하기 어려움.

고려는 1370년대 이후 왜구에 대한 본격적인 반격에 나섬. 최영의 제의에 따라 수군을 건설(1373)하였으며, 최무선의 제안에 따라 화통도감을 설치(1377)하고 전함에 화포, 화통 등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 무기 장착. 최신형 무기를 장비한 고려 함대는 진포, 박두양 등징의 해전에서 왜구에게 큰 타격 가함.

그 후 1389년에는 박위가 지휘하는 100척의 고려 함대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공격, 300척의 왜선을 불사르고 근거지를 파괴함으로써 왜구의 침입은 어느 정도 진정. 이 당시 외적과의 투쟁에서 명성을 얻은 장군들은 최영, 이성계, 이방실 등임.

 

 

참고 문헌

 

정병헌∙ 이지영 지음, 고전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돌베개, 2007.

 

파수꾼 이강백

 

핵심 정리

 

1. 갈래 희곡

2. 성격 상징적, 우화적, 풍자적

3. 제재 - ‘늑대와 양치기 소년의 우화

4. 주제 진실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의 비극 또는 진실을 향한 열망

5. 출전 - 현대문학(1973)

6. 작가 이강백 (1947 ~ ) 극작가. 전북 전주 출생. 1971동아일보신춘 문예 희곡 부분에 다섯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무학(無學)의 학력으로도 우화와 비유로 충만한 비사실주의 작품을 주로 써서 알레고리의 작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작품 세계는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정교한 논리로 구성한 것이 특색이다. 대표작으로 호모세파라투스, 칠산리, 북어대가리, 느낌, 극락 같은등이 있다.

 

7. ‘파수꾼의 구성 단계

단계

내용

발단

편지를 받고 촌장이 파수꾼 를 찾아옴

전개

이리 떼가 없다는 파수꾼 의 말을 촌장이 인정함

절정

파수꾼 는 마을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을 하루만 연기하기로 함.

하강

파수꾼 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함

대단원

파수꾼 는 거짓말을 한 뒤 망루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됨

 

8. 등장 인물과 소재의 상징적 의미

이리 떼

위선적인 독재 권력이 체제 유지를 위해 도구로 삼은 가공의 적

양철북

가공의 적에 대한 대중의 불안감을 키우기 위한 수단

촌장

1970년대 체제 유지를 위해 거짓 정보를 형성했던 독재 권력

파수꾼 가

독재 권력의 논리에 영합하여 민중을 기만하는 인물

파수꾼 나

독재 권력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우매한 인물

파수꾼 다

체제의 현실은 파악했으나, 잘못된 권력의 논리를 다시 수용하는 나약한 인물

 

9. 우화적 장치 사용의 효과

이 작품이 당시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고발하지 않고 우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당시의 억압적인 시대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우화의 형식은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제약받을 때 그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버이 된다. 그러나 현실의 모순을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의 한계를 지닌다.

 

10. 파수꾼 와 촌장 사이의 갈등

파수꾼 는 이리 떼는 없고 흰구름뿐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한다. 촌장은 그 사실은 인정하지만 지금 당장 폭로하게 되면 자신이 마을 주민들에게 변명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살인이 일어날 것이라고 회유한다. 이는 진실을 알리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촌장은 그로 인해 야기될 혼란을 문제삼아 굳이 진실을 알릴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는 데서 오는 갈등이다.

 

11.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748현대 문학에 발표되었고, 19753현대극회에서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우화적인 장치를 상요하여 제도적인 권력의 폭압성을 드러내는 이강백의 초기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 준다.

가상의 어느 마을에 이리 떼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망루에 올라 이리 떼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치는 파수꾼 가와 그 때마다 양철북을 두드리는 늙은 파수꾼 나의 아이러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리 떼로부터 마을 사람들을 지키려고 자원한 소년 파수꾼 다가 이리 떼는 없고 아름다운 흰구름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되지만, 이마저도 마을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가상의 적인 이리 떼를 설정해 놓아야 한다는 촌장의 설득에 파묻히고 만다.

이렇듯 이 작품은 1970년대 박정희 정원의 체제 유지를 위한 안보 논리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우화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러한 우화적인 장치가 두드러진 만큼 극적인 갈등의 축이 미약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어, 연극적 효과는 다소 약화되어 있는 약점을 아울러 지니고 있기도 하다.

 

 

파수꾼 본문

 

등장인물

해설자

파수꾼 가

파수꾼 나 (노인)

파수꾼 다 (소년)

 

해설자

(관객들에게 무대와 등장인물들을 설명한다)

이곳은 황야입니다. 이리 떼의 내습을 알리는 망루가 세워져 있죠. 드높이 솟은 이 망루는 하늘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늘은 연극의 진행에 따라 황혼, 초생달이 뜬 밤, 그리고 아침으로 변할 겁니다. 저기 위를 바라보십시오 파수꾼이 앉아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하늘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시커먼 그림자로만 보입니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파수꾼이었습니다. 나의 늙으신 아버지께서도 어린 시절에 저 유명한 파수꾼의 이야기를 들으셨다 합니다. 물론 할아버지에게서 들으셨던 거죠. 이제 와선 저 망루 위의 파수꾼은 전설적인 인물이 된 것이지요. 또 다른 파수꾼들 우리와 같은 시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망루 아래에서 양철북을 칠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망루 위의 파수꾼이 이리 떼를 발견했다 외치면 그들은 양철북을 두드릴 겁니다. 그 소린 황야에서 울려 퍼져서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에 전달되고 그럼 주민들은 이리 떼의 내습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이리 떼는 무척 교활하죠. 그들의 습격이 탄로난 걸 알아채면 일단 뒤로 물러납니다. 그리고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거죠. 이러한 반복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망루 위의 파수꾼이 갑자기 외친다.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파수꾼 의 손이 번쩍 들려진다 이리 떼가 나타난 방향을 가리킨다. 망루 아래 파수꾼들은 양철북을 두드린다, 외침과 북소리 계속 불안이 점점 고조된다. 해설자는 달아난다. 노인파수꾼 의 북 치는 모습은 늠름하다. 소년 파수꾼 는 두려움에 질려서 헛치기만 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납짝 엎드려버린다.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아직도 겁에 질려서) 이리 떼라구요?

걱정 마라 이젠 물러갔단다.

저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는데요?

너는 낮은 곳에 있다. 그러니까 보지 못하는 거야. 하지만 저 망루 위의 파수꾼은 아주 높은 곳엘 있지 않니? 그는 멀리까지 바라본다. 너하곤 위치가 다르다는 걸 알아야지.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소년 파수꾼 는 당황해서 다시 엎드리고 파수꾼 는 양철북을 두드린다.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정말 물러갔어요?

그렇다 안심하구 일어나렴.

그래도 저어 아직 몇 마리 남아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랬다가 엉겁결에 달려들어 꽉 물 수도 있겠구요.

파수꾼의 눈은 정확하단다. 단 한 마리의 이리도 그 눈을 피해 숨을 순 없지.

, 저는 그걸 생각 못했어요. 죄송해요. 파수꾼의 눈을 의심했던 건 아닙니다. 다만 이리라는 게 그렇죠, 이리를 믿어선 안 된다구 배웠거든요. 이리는 엉큼하고 사납고, 그 날카로운 이빨에 물리면은……

이리가 그렇게도 무섭니?

.

그럼 왜 파수꾼이 될 생각은 했지?

이렇게까지 무서움을 탈 줄은 몰랐거든요 저 자신도 부끄러워요. 파수꾼이 되는 연습을 할 때엔 이렇지 않았습니다. 제법 용감했죠. 특히 칭찬을 받는 건 제 눈이었어요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것도 척척 알아냈거든요. 마을 사람들도 감탄했어요. 최고의 눈이다. 넌 파수꾼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 그래서요, 저는 여기에 오길 지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여기 와 보니 사정이 다르군요. 나는 한 번도 망루 위엘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 여쭙겠는데요. 왜 저 망루 위의 파수꾼은 교대하질 않죠?

저분은 말이다. 지금까지 실수를 하지 않았단다. 단 한번도 이리떼를 놓친 적이 없었어.

굉장하네요.

아무렴 넌 어때 그렇게 할 자신이 있니?

자신 있어요…… 허지만요, 한두 번쯤은 실수도 있을 거예요.

그럼 큰일난다. 이리 떼의 습격을 놓쳐봐라. 마을의 가축과 사람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넌 아예 섣불리 망루 위에 올라갈 생각도 마라. 얘야 저 높은 곳보다 이 아래는 할 일이 많단다. 양철북도 쳐야 하구, 여기저기 놓아둔 이리 덫들도 살펴야 하구…… 방금 전 습격 때, 저쪽에서 탁 치이는 소리가 났었다. , 나하고 덫 보러 가지 않을래?

전 여기 있고 싶어요.

이리가 걸렸으면 좋겠는데……그럼 다녀오마.

 

파수꾼 퇴장 오랜 침묵 는 망루 위를 쳐다보기도 하고 키발을 딛고 사방을 살피기도 한다. 금방 이리가 덤빌 것 같아서 그는 안절부절못한다. 마침내 두 팔로 얼굴을 감싸고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파수꾼 가 들어온다. 무섭게 생긴 강철제 덫을 어깨에 둘러메고 와서 내려놓는다.

, 헛쳤다. 교활한 짐승도 다 있지. 나뭇가지를 대신 끼워놓고 몸은 달아났지 뭐냐. 얘야, 이 덫 좀 함께 벌리자.

 

두 파수꾼은 덫 입을 함께 벌린다. 이빨들이 달린 덫이 벌어지며 파수꾼들에게 위압을 준다.

 

무섭게 생겼어요.

나뭇가지 때문에 이빨이 상했어 날카롭게 쇠줄로 쓸어야겠다.(쇠줄을 꺼내 덫 이빨을 간다. 금속성의 듣기 싫은 소리가 난다) 가끔 가다 이리가 치어줘야 재미있는데 통 그래주질 않는단다. 치었는가 가보면 또 헛치었구, 이리는 정말 교활해. 황야에 수천 개의 덫을 놓았지만 용케도 걸려들질 않어.(덫니에 날이 섰는지 엄지손가락을 대본다), 됐다. 이리야, 이번엔 제발 덜컥 걸려다오. 제자리에 가져다 놓구 오마.

내일 아침에 가세요

내일 아침에?

그래요 지금은 어둡잖아요?

어둡기는…… 아직 훤해

가시면 안 되요 여긴 아직 훤하지만 덫 놓을 덤불 속은 어두울지 몰라요, 그 속에 이리가 숨어 있다 덤벼들면 어떻게 해요? 저 같으면 내일 아침까진 꼼짝도 안 하겠어요.

넌 참 겁두 많다.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소년 파수꾼 는 엎드리고 노인 파수꾼 는 양철북을 두드린다.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넌 또 엎드렸구나.

이리 떼 다 갔어요?

양철북이라도 좀 쳐보질 그랬니? 네가 함께 쳐주면 나 혼자서 이렇게까진 고달프지 않겠는데……

, 저는 쓸모 없는 사람같아요.

 

잠시 침묵. 파수꾼 는 상심하는 소년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진다.

 

그래도 난 네가 좋다.

제가 좋아요?

겁만 내는데두요?

그래도 좋은 걸. , 너 오기 전엔 쓸쓸했었다. 위를 보렴. 저 망루 위의 파수꾼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어 말벗도 안 됐다. 그래 난 하루 종일 홀로 있는 거나 다름없었지. 양철북도 요란하게 두들기고 수천 개의 덫을 둘러보러 다녔다만 혼자인 건 어쩔 수 없더라. 얘야 외롭다는 것 그게 뭔지 아니?

몰라요

젊었을 땐 나도 몰랐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황야에 바람이 분다든가 깊은 밤 달이 떴을 때 외롭더라. 그래서 난 마을 촌장님에게 편지를 내었었지 파수꾼을 한 명 더 보내달라구 말이다. 마침 지원자가 있다더구나. 바로 너였다.

용감한 사람이 오길 바라셨죠?

아니.

저처럼 겁쟁이를 기다리신 거예요?

아니.

그럼……

누구였음 하고 미리 정해 두지 않았단다. 그랬다가 만일 틀린 사람이라도 오게 되면 난 덜 기쁘지 않겠니? 그런데 첫눈에 너를 보자 한껏 기뻤다. 그 순간 나는 정한 거란다. 바로 네가 왔으면 하고. 내 뜻은 이루어졌다. 넌 그때 휘파람을 불며 왔었지?

.

내 귀가 즐겁더라.

고마워요.

오히려 고마운 건 나다.

 

황혼이 점점 짙어진다. 해설자 슬그머니 등장 마분지로 만든 초생달을 하늘에 걸어놓고 퇴장 두 파수꾼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다.

 

, 하늘 곱다. 그지?

.

어제 저녁 네가 올 때도 이랬다. 난 평생 그 광경을 잊지 못할 거다(잠시 침묵)어떠냐, 너 양철북 치는 방법을 배우지 않을래?

배우겠어요

그러면서도 넌 망루 위만 바라보는구나. 그렇게도 올라가고 싶으냐?

 

. 고개를 떨군다.

 

양철북 치는 것두 괜찮은 거란다. 소리가 요란하긴 하지만 귀에 익으면 그 재미를 알게 된다. 자아, 우선 여러 가지 박자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마.(그는 강약을 두어 양철북을 두드린다)재미있지? 이 박자 치기에 맛들이면 어느새 이리 떼 같은 건 다 잊어버린다. 자 너도 쳐보아라.

(를 따라 양철북을 치다가 갑자기 겁에 질려서 의 등 뒤에 숨는다) 저기저기……

왜 그러니?

이리가 오구 있어요.

 

해설자 식량 운반인이 되어 등장. 이리 껍질을 썼다. 유모차 비슷한 작은 손수레를 밀며 들어온다.

 

운반인 안녕하십니까, 파수꾼님? 망루 위의 파수꾼님도 안녕하세요? 제가 왔어요. 저를 좀 보세요. 이렇게 손을 흔들고 있어요?

자네 수다 떨긴 여전하군. 어서 짐이나 내려놓게.

운반인 일주일분 식량입니다요. , 야채, 그리고 마른 생선, 이 속엔 특별요리가 들어 있습니다요. 자 받으십쇼. 이 맛있는 냄새가 나는 상자를(에게 주며)통째로 구운 닭고기죠. 지난번에 부탁하신 걸 가져 왔어요.

고마우이, 정말 고마워(다에게) 안심하고 나와, 식량 운반인이야

왜 이리 껍질을 썼죠?

운반인 왜 이걸 썼느냐구? 이리가 덤비지 않도록 쓴 거지. 이리는 사람을 물지만 자기네 종족은 물지 않거든.(나에게) 어때요, 맛있는 냄새가 나죠?

, 흥 근사한데!

운반인 열어보시죠, 어서

아냐 지금 열지 않겠어. 두었다가 멋진 저녁을 차릴려구 그래. 환영할 친구가 왔거든. 자네에게 소개함새, 새로 온 파수꾼이야. 아주 용감하지. 앙철북 치는 솜씨도 나보다 갑절 낫구.

아직은……그렇지 않습니다.

운반인 악수를 청해도 되겠지? 왜 머뭇거리나? 아 내가 쓴 이리 껍질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인데(머리 부분만 벗어 젖히고)이젠 됐지?

(운반인이 내민 손을 잡는다) 안녕하세요?

운반인 반갑수

이리 떼다, 이리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소년 파수꾼 는 엎드리고 는 양철북을 두드린다.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운반인 하마터면요 이리에게 죽을 뻔했습니다. 껍질을 다시 써서 물리지 않았죠.

마을은 어떤가? 난 양철북을 치면서도 걱정이 돼. 주민들은 잘 방비하고 있을까? 별일은 없겠지?

운반인 이리 막는 거야 잘 하고 있죠. 뭐 하지만 약방 영감 왜 그 말라깽이네 약방 영감 말이에요, 그 영감이 지붕 위에서 떨어져 두 다리를 몽땅 부러뜨렸지 뭐요. 그 영감, 재수 옴 붙었지. 글쎄, 새벽녘에 잠이 깰까말까 하는데 양철북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더래요. 그러자 거리에서 사람들이 외치기를 으악 이리 떼가 몰려온다영감 넋 나갔죠. 지붕 위로 피신 가는데요, 몸은 떨리구, 뒤에서 금방 이리가 물 것 같겠다. 엉금엉금 기어올라가다 뚝 떨어진 거죠.

그렇게 말하는 게 아냐

운반인 그렇죠, . 지붕 위에서 떨어진 영감이 한둘이어야지요. 양철 북소리 들려오구이리 떼다하니까 우물 속에 빠져 죽은 아이 이야길 제가 했던가요?

그만두게

운반인 그렇죠, 뭐 우물 속에 빠져 죽은 아이가 어디 한둘이여야죠. 수두룩하니까 별로 우습지도 않아요. 자기 집에 불을 지른 남자 이야기는 어때요? 담배를 피우려구 성냥을 그었는데 들려오는 양철북소리 그 남자 엽총 들고 뛰어나가 신나게 공포 쏜 것 좋았죠. 허나 집에 돌아와보니 불……

그만두래도!

운반인 그렇죠, . 집 불 태운 남자가 어디 한둘인가요. 북소리 들려오구 이리 떼가 몰려온다!하니까

( 역정을 내며)제발 그만둬!

운반인 왜 그래요? 하긴 그렇죠 뭐

뭐가 그렇다는 거야?

운반인 ( 시무룩하게) 아무것두 아녜요

남의 불행을 재미있어 하면 안 되네

운반인 그게 어디 남의 불행인가요? 나도 그 속에 살고 있으니까 내 불행이죠. 뭐 짐 다 내려놨으니 이만 들어가겠어요.

저녁 식사하고 가세요.

운반인 밤 되기 전에 가봐야겠어.

곧 밤이 돼요. 식사 하시구 자고 가세요.

운반인 여긴 재미없는걸. 양철북 소리 들려올 때 이리 떼가 온다!외치면……

자네가 외치구 다니나?

운반인 그렇죠, .이리 떼다하고 외치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죠. 모두들 외치는데요 지난 주 화요일 밤, 북소리 들려와서 이리 떼다외치구 골목을 막 돌아서는데 웬 여자가 내 어깨에 매달립디다. 열여섯이나 일곱쯤 될까요, 두려워서 바들바들 떠는 게 꽤 예쁘더군요. 말 들어보나마나 어디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달라는 거죠. 마침 골목 끝에 대피용 지하실이 있어서(웃는다)

그래 어떻게 했나?

운반인 처음엔 껴안아 줄려구만 그랬어요. 허지만 나도 사낸데 어디 그래요? 마침 지하실엔 단 둘뿐이었겠다. 그 앨 바닥에 눕히고 재밀 좀 봤죠.

(치미는 분노를 꾹 참으며) 어서 가게.

운반인 안녕히 계십시오, 파수꾼님.

(를 가리키며) 다음에 올 땐 이 애 물건을 가져 와. 밤에 덮고 잘 담요가 없어.

운반인 언제 가져올까요?

내일 아침 당장 가지고 와.

운반인 알았어요 내일 아침 또 오죠(에게) 잘 있우. 랄랄랄 라라라……

 

해설자, 빈 수레를 끌고 퇴장

화나셨어요?

아니

성난 얼굴인데두요?

아까 그 운반인 말이다. 이리 같은 놈이다. 오늘 밤에도 어두운 거리에 숨었다가 몹쓸 재미를 노리겠지. 나의 양철북소릴 그런 놈들이 악용하고 있다니, 마음 상한다. (사이) 그만두자. 이러다가는 오늘 저녁이 쓸쓸해질 것 같구나. , 우리 식탁을 차리지 않겠니?

 

두 파수꾼은 야외용 식탁을 펴놓는다. 접시도 준비된다. 조그맣게 생긴 석유램프도 식탁 한가운데 놓여진다. 가 성냥을 그어 램프에 불을 붙이려는 순간 망루 위의 파수꾼이 소리친다.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는 불을 켜지도 못하고 식탁 밑으로 숨는다. 만 홀로 어둠 속에서 양철북을 두드린다.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불을 켜렴

……이리 다 갔어요?

너 어디에 있니?

식탁 밑에요.

이린 다 갔다. 안심하고 나오너라.

 

가 석유램프에 불을 붙인다. 식탁 주위가 밝아진다. 노인과 소년은 식탁에 마주앉는다.

 

(요리가 든 상자를 내밀며)냄새를 맡아보겠니?

맛있겠는데요.

널 위해 마련했단다. 얘야 용감한 사람이 되마구 약속해줄래?

저는 겁보예요. 잘 아시잖아요?

내 얼굴을 보아라. 아직도 성난 표정인 건 아마 너에 대해선지도 모르겠다. 좀 영리한 자들은 나쁜 짓만 하구 너처럼 착한 애는 겁쟁이니까 말이다. 둘 다 속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얘야 지금 곧 너더러 용감해지라는 건 아냐.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용감한 남자가 될 수 있지 않겠니?

(한숨을 쉬고 나서 )그럴 수 있을까요? 저두?

그럼, 처음부터 용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단다. 수천 번 두려워하다가도 단 한 번 그 두려움과 맞설 때, 그 사람을 용기있다구 부르는 거야 자, 약속해주겠니?

약속해요.

됐다. 상자의 뚜껑을 열으렴. 큼직한 닭이었으면 좋겠구나

굉장히 커요!

반으로 자르거라. 한 몫은 저 망루 위의 파수꾼 거다. 나머지 반절은 너와 내가 나누자.(망루 위를 향하여 외친다)식사하십시오!

 

대답이 없다.

 

망루 위에 올라가서 말씀드릴까요?

아니다. 저 분은 누가 망루 위에 올라오는 걸 싫어해. 음식은 그냥 놔두면 잡수시고 싶을 때 줄을 내려보낸단다. 그럼 그 줄에 매달아 드림 되는 거야. 사실 저녁 식사만이라도 함께 하면 얼마나 좋겠니. 이 석유램프 불빛이 좀 아름다우냐? 그런데 텅 빈 식탁에 홀로 앉아 저녁식사를 할 때엔 이 아름다운 불빛에 비춰볼 얼굴이 그립더라. 애야 어서 먹으렴.

 

두 파수꾼들은 식사를 계속한다. 한동안 말이 없으나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난 네가 좋아.

하루 종일, 그 말씀뿐이었어요.

그래도 부족한 걸 어떻게 하니?

저에겐 너무 과분한걸요.

아니야. 난 네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몰라서 그래. 넌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내 꿈, 나를 애태우는 갈증이란다. 이 황야의 한복판에서 난 너라는 꿈을 꾼다. 현실에선 보이지 않는 고결한 것, 사라진 옛날의 파수꾼들, 넌 바로 그것이 되어야 한다. 예전엔 많은 파수꾼들이 이 망루 아래에서 살다 죽는 걸 자랑으로 여겼지. 일생을 여기 쓸쓸한 땅에서 보내며 그저 말없이 이리 떼와 대항한 그 생애를 기뻐했단다. 그들은 지금 이 황야에 묻혀 있어. 웅장한 대리석 관에 잠들기보다, 한닢 갈대 아래 매장되는 걸 사내답다고 생각했다. 파수꾼이란 그런 거야. 난 여기서 죽을 것이다. 너의 두 손이 내 눈을 감길 때 난 다음을 이어줄 너에게 감사할 거다. 보아라, 저 쪽 갈대 아래 묻힌 옛 파수꾼들이 모두 일어나 침묵 속에 너를 보고 있잖니? 넌 그들의 꿈이야. 이 황야의 크기와 맞먹는 꿈 이젠 네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걸 알겠니?

아 내가 겁보만 아니었더라면……

넌 나에게 약속했다. 벌써 잊었어?

아뇨, 그래도 자꾸만 겁이 나는 걸요.

난 너의 약속을 믿는다. 제발 기대에 어긋나지 말아라

.

난 네가 좋아.

저도……

내가 좋으냐?

모처럼 즐거운 밤이구나. 구운 고기도 맛이 있고. , 좀더 먹지 그러니?

됐는걸요, 이만하면.

(하품을 하며)오랜만에 포식을 했더니 졸립다. 잠시 눈을 붙여야겠다.(자기 담요를 덮으려다가 를 대신 덮어주며)춥지? 조금만 날 지켜주렴. 곧 깨어나 너와 교대하마.

이 담요, 덮고 주무세요.

아냐, 너나 덮어. 난 습관이 돼서 괜찮다

천막에 가서 주무시지 그러세요?

잠시 웅크리고 자면 되는걸.

 

파수꾼 , 식탁에 상반신을 엎드리고 눈을 감는다.

 

이리 떼가 오면 어떻게 하죠?

(잠에 빠져가는 졸리는 목소리로)넌 약속했지?

약속했어요. 허지만요, 제가 용감할 수 없을 때 이리 떼가 오면 어떻게 해요?

(웃으며)네가 용감할 그때를 꼭 맞추어 와 달라구 부탁하렴.

하는 수 없군요.

부탁했니?

못했어요.

왜 하질 않구?

이리가 어디 들어주겠어요?

하긴 그렇구나.

 

묵 파수꾼 는 잠들었다. 사이. 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램프 불빛만 남고 모든 것이 서서히 어둠 속에 묻힌다. 해설자 슬그머니 들어와서 초생달을 떼어 간다. 사이 주위가 희미하게 밝아오면 새벽. 바람 소리가 요란해진다. 파수꾼 가 문득 잠을 깬다. 그는 잠시 멍하니 둘러본다. 차츰 정신이 들자 사태가 심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램프를 들고 일어난다.

 

바람소리? 아니면 이리 떼가 몰려오는 소리일까? 무서워지는데. 난 어쩌면 좋아!(잠든 파수꾼 에게 다가간다)아니, 깨울 순 없어, 좀더 주무시도록 해야지(의 얼굴을 램프 불빛에 비춰보며) 이 주름진 얼굴, 햇빛과 바람에 거칠어진 피부, 근심 많은 분이 잠드신 것을……그런데 무섭다구 깨운다는 건 염치없는 짓일 겁니다. 황야는 어젯밤보다 수천 배나 넓어졌습니다. 그리고 난 외톨이예요. 지금 내가 얼마나 쓸쓸한지 아시겠지요? 하지만요, 주무십시오 어떻게 난 견뎌보겠어요.(잠든 에게 담요를 벗어주고 물러난다)왜 새벽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울까? 손발이 얼어붙는 걸. 이럴 때 말야, 이리 떼가 와서 덤벼들면 난 꼼짝없이 죽겠지? 반항 한번 못하고 죽는 건 억울해. 여기 계신 파수꾼님도 당하고 말 거야. 그리고 마을의 가축들은? 그 순한 양이며 염소들은 지금 곤한 잠을 잘 텐데? 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리 떼 밥이 되겠다. , 무서워!(식탁으로 뛰어갔다가 멈칫 서서)아니, 주무십시오. 난 견디겠어요(사이, 얼굴표정이 밝아지며)그래 괜한 걱정을 했군. 망루 위에 파수꾼이 계시잖아. 그분은 잠들지 않았을 거야. 그분이 이리 뗴를 감시할 테니까 안심해도 돼(망루 위를 향하여) 망루 위의 파수꾼님, 눈을 뜨고 계셔요? …… 왜 대답이 없으시죠? (침묵) 망루 위의 파수꾼님, 당신마저? 당신까지 잠드셨군요! ……나 혼자다. 눈을 뜨고 있는 건 나 혼자뿐야. 바람소리? 아니면 이리 떼가 몰려오는 소리일까? 아무래도 수상해. 난 어쩌면 좋지? 그래 망루 위에 올라가자. 눈을 뜬 건 나뿐이잖아. 내가 이리 떼를 감시해야지.

 

파수꾼 는 양철북을 메고 망루 위로 올라간다. 는 여느 때와 같은 부동자세. 는 숨어들 듯 의 등뒤에 서서 황야를 바라본다. 사이

 

아름다워라. 새벽의 황야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파수꾼 는 기겁하듯 놀란다. 망루 아래로 급히 내려온다. 그는 양철북을 두드리려고 하지만 겁에 질린 듯이 헛치기만 한다. 그는 땅에 엎드린다.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흐유!(망루 위를 향하여)이리 뗀 정말 다 물러갔나요? 대답해주세요(침묵) 왜 말이 없으시죠? 잠드셨어요? 파수꾼님 당신은 또 잠드셨군요?

 

파수꾼 는 망루 위에 올라간다.

 

이리 떼만 없다면 이곳은 얼마나 평화로운 곳일까? 지평선 저 멀리 하늘가를 좀 봐. 하얀 구름이 흘러가네.

사이.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파수꾼 는 황급히 망루 아래로 내려와 엎드린다. 그러나 어떤 의아로움이 두려움 속에서 생겨난다. 그는 망설이듯 일어나 망루 위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본다.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파수꾼 는 망루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는 와 황야를 번갈아 쳐다본다.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파수꾼 는 망루 아래로 내려온다. 심한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이리 떼라구요? 황야 저쪽에는 흰구름뿐이었어요.

 

긴 침묵, 밝아지는 아침, 식탁 위에 석유램프 불빛은 희미해졌다. 파수꾼 가 잠에서 깨어 일어난다. 너무 잤다는 듯이 흠칫 놀라며 그는 램프불을 끈다. 그리고 뒤돌아서다가 망루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를 발견한다.

 

잘 잤니?

(힘없이)……

너 어디 아픈 게 아니냐?

……아뇨

날 일찍 깨우지 않고(의 이마를 짚어보며)열이 많다. 담요를 덮지 않아서 그래. 난 괜찮데두 날 덮어주었구나.

아뇨. 담요는 밤새껏 제 차지였어요. 새벽 무렵에야 덮어 드린걸요.

아무래도 너 아픈 것 같다(의 몸을 담요로 감싸주며) 몸을 덥혀라.

(방치해 둔 이리 덫을 물끄러미 바라보며)저 덫으로 흰구름을 잡나요?

? 흰구름을?

. 하늘의 흰구름을요

구름을 어떻게 덫으로 잡니?

그래요. 구름은 흘러가는 거예요. 푸른 하늘에 두둥실 떠서 고요히 흘러만 가요. 이리 덫으론 잡을 수 없죠.

헛소릴 하는구나, . 몸을 덥히고 있으면 곧 나을 거야.(덫을 어깨에 짊어지고)아침이 됐으니 덤불 속도 훤해졌겠지. 그럼 덫 놓구 오마.

그 덫으로는 흰구름을 못 잡아요.

 

파수꾼 덫이 무거워 비틀거리며 퇴장한다. 잠시 후, 해설자운반인이 되어 손수레를 끌고 등장

 

운반인 잘 있었나, 어린 파수꾼?

어서 오세요

운반인 담요 가져 왔어. 고참 파수꾼은 어디 가셨나?

덫 놓으러 가셨어요.

운반인 엊저녁 말씀대로 날이 새자마자 가져 왔는데 칭찬을 못 듣게 됐군.

기다리시면 오실 거에요.

운반인 아니, 그냥 가야지. 여긴 잠시라도 있고 싶지 않아. 너무 쓸쓸해. 망루만 솟아 있지 뭐 볼 것두 없구. 난 네 마음을 모르겠어. 여긴 왜 있지? 평생 있어 봐야 그게 그거 아냐? 양철북이나 두들기는 거밖에 더 있느냐 말야. 아까운 인생만 썩혀 보내는 거지. 어젯밤에 난 너를 생각했어. 너는 인생을 즐겨야 해. 어때? 달아나지 않으려나? 이 수레에 타라구. 어디든지, 네가 가구 싶은 데로 태워다 줄게

어제 저녁에 말씀해주지 그랬어요. 이리가 무서워서라도 아마 난 당신의 수레에 탔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안돼요. 타고 싶어도 탈 수 없어요.

운반인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나?

마을에 가시거든 이 편지를 촌장님께 전해주세요. 아주 중대한 거예요.

운반인 내용이 뭔데?

말할 수 없어요.

운반인 괜찮어, 말 안 해두. 도중에 뜯어보면 알게 될 걸 뭐.

보시면 안 돼요.

운반인 걱정 말아. 곧장 촌장님께 전할 테니까. 그럼 잘 있어. 랄랄 라라라……

 

해설자 퇴장. 사이, 파수꾼 가 들어온다.

 

아침식사하겠니?

지금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무얼 좀 먹어야 기운이 나는 거란다. 얘 남은 닭고기 너나 먹으렴(음식 담긴 접시를 에게 가져가 턱밑에 받쳐든다) 네 얼굴이 핼쓱하다. 몹시 아프니?

파수꾼님……

?

이리는 정말 없는 거죠?

오호라, 넌 이리가 무서워서 병 난 거구나. 요 겁쟁이, 우리 양철북을 두드리자, 그걸 힘껏 두드리고 있노라면 이리 떼가 덜 무서워질 거야.

양철북을 쳐요?

그래, 치는 법을 가르쳐 주마.

소용없어요, 그건. 사실을 말씀드리죠. 오늘 새벽 눈을 뜨고 있던 건 저뿐이었어요. 모두들 잠을 잤구요. 그 틈을 노려 이리 떼가 습격해오면 어쩌나 하구 전 두려웠어요. 그래서요, 저는 망루 위에 올라갔던 거예요. 그 높은 곳에서 저는 이 황야의 전부를 바라보았죠. 아무 데도 이리는 없더군요. 보이는 거라고는 저 멀리 하늘가에 흰 구름뿐이었어요. 그걸 향해 망루 위의 파수꾼은이리 떼다!외쳤습니다. 세 번이나요. 세 번, 저는 망루 위에서 그걸 제 눈으로 보았어요. 이리 떼라곤 없었어요. 흰 구름뿐이에요.

얘야, 난 네 맘을 안다. 넌 망루 위엘 올라가고 싶었겠지? 이리가 무서웠구. 더구나 어린 너에겐 이 쓸쓸한 곳이 맞질 않는다. 그래서 넌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저는 정말 망루 위에 올라갔었어요.

그럴 리 없어. 넌 아까부터 제정신이 아니더라. 덫으로 어찌 구름을 잡겠느냐고 횡설수설할 때부터 난 걱정스러웠다. 제발, 이리 떼가 없다는 소린 하지도 말아라.

여기 낮은 곳에 있으니까 모르는 거예요. 하지만 저 높은 곳엘 올라가면 이리 떼가 없다는 걸 알게 돼요.

얘야, 자꾸만 우기지 말아라. 나는 이 황야에서 평생을 지냈단다. , 여기 온 지 겨우 사흘밖엔 안 됐구. 그런데, 사흘밖에 안 된 네가 평생을 보낸 나보다 뭘 잘 안다구 그러니?

 

이리 떼다, 이리 떼! 이리 떼가 몰려온다!

 

파수꾼 는 확신 있게 양철북을 두드린다. ‘는 여느 때와는 달리 침착하게 일어선다. 그리고 담요를 벗어 네모 반듯하게 갠 다음 식탁 위에 놓는다. 그는 북을 두드리는 나를 바라보면서 몹시 안타까운 표정이 된다.

 

: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 정말 이리가 있다구 믿으세요?

: 보렴, 방금도 이리 떼가 오질 않았니? 그렇지 않다면 내가 왜 양철북을 치며 평생을 보냈겠느냐? 서운하다. 아무리 아픈 애라지만 너무 심한 말을 하는구나.

: 죄송해요. 하지만 어쩜 그 많은 나날을 단 한 번도 의심없이 보내셨어요?

: 넌 그렇게도 무섭니, 이리가?

: 오히려 이리가 있다고 믿었던 때가 좋아던 것 같아요. 그땐 숨기라도 했으니까요. 땅에 엎드리며 아늑하게 느껴졌어요. 지금은요, 이리가 없으니 땅에 엎드려야 아무 소용없구요, 양철북도 쓸모가 없게 됐어요. 오직 이제는 제가 본 그 사실만을 말하고 싶어요.

 

해설자, 촌장이 되어 등장. 검은 옷차림. 이해심이 많아 보이는 얼굴과 정중한 태도.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한다.

 

촌장 : 수고하시는군요, 파수꾼님.

: , 촌장님. 여긴 웬일이십니까?

촌장 : 추억을 더듬으러 왔습니다. 이 황야는 내가 어린 시절 야생 딸기를 따러오곤 했던 곳이지요. 그땐 이리가 무섭지도 않았나 봐요. 여기저기 덫이 깔려 있고 망루 위의 파수꾼이 외치는데도 어린 난 딸기 따기에만 열중했었으니까요. 그 즐거웠던 옛 추억, 오늘 아침 나는 그 추억을 상기시켜 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래 이 곳엘 찾아온 거예요.

: 잘 오셨습니다, 촌장님.

촌장 : 오래 뵙지 못했더니 그 동안 흰 머리가 더 많아지셨군요.

: 촌장님두요, 더 늙으셨어요.

촌장 : 오다 보니까 저쪽 덫에 이리가 치어 있습디다.

: 이리요? 어느 쪽이죠?

촌장 : 저쪽요, 저쪽. 찔레 덩쿨 밑이던가요…….

: 드디어 잡는군요!

 

파수꾼 퇴장. 촌장은 편지를 꺼내 에게 보인다.

 

촌장 : 이것, 네가 보낸 거니?

: , 촌장님.

촌장 : 나를 이곳에 오도록 해서 고맙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건, 이 편지를 가져 온 운반인이 도중에서 읽어 본 모양이더라. ‘이리 떼는 없구, 흰구름뿐.’ 그 수다쟁이가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있단다. 조금 후엔 모두들 이 곳으로 몰려올거야. 물론 네 탓은 아니다. 넌 나 혼자만을 와달라구 하지 않았니? 몰려오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불청객이지. 더구나 어떤 사람은 도까까지 들고 온다더라.

: 도끼를 왜 들고 와요?

촌장 : 망루를 분순다고 그런단다. ‘이리 떼는 없구, 흰구름뿐.’ 이것이 구호처럼 외쳐지구 있어. 그 성난 사람들만 오지 않는다면 난 너하구 딸기라도 따러 가고 싶다. 난 어디에 딸기가 많은지 알고 있거든. 이리 떼를 주의하라는 팻말 밑엔 으레히 잘 익은 딸기가 가득하단다.

: 촌장님은 이리가 무섭지 않으세요?

촌장 : 없는 걸 왜 무서워하겠니?

: 촌장님도 아시는군요?

촌장 : 난 알고 있지.

: 아셨으면서 왜 숨기셨죠? 모든 사람들에게, 저 덫을 보러 간 파수꾼에게, 왜 말하지 않는 거예요?

촌장 : 말해 주지 않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 거짓말 마세요, 촌장님! 일생을 이 쓸쓸한 곳에서 보내는 것이 더 좋아요? 사람들도 그렇죠! ‘이리 떼가 몰려 온다.’ 이 헛된 두려움에 시달리는데 그게 더 좋아요?

촌장 : 얘야, 이리 떼는 처음부터 없었다. 없는 걸 좀 두려워한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나쁘다는 거냐?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이리에게 물리지 않았단다. 마을은 늘 안전했어. 그리고 사람들은 이리 떼에 대항하기 위해서 단결했다. 그들은 질서를 만든 거야. 질서, 그게 뭔지 넌 알기나 하니? 모를 거야, 너는. 그건 마을을 지켜 주는 거란다. 물론 저 충직한 파수꾼에겐 미안해. 수천개의 쓸모 없는 덫들을 보살피고 양철북을 요란하게 두들겼다. 허나 말이다. 그의 일생이 그저 헛되다고만 할 순 없어. 그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고귀하게 희생한 거야. 난 네가 이러한 것들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만약 네가 새벽에 보았다는 구름만을 고집한다면, 이런 것들은 모두 허사가 된다. 저 파수꾼은 늙도록 헛북이나 친 것이 되구, 마을의 질서는 무너져 버린다. 얘야, 넌 이렇게 모든 걸 헛되게 하고 싶진 않겠지?

: 왜 제가 헛된 짓을 해요? 제가 본 흰구름은 아름답고 평화로웠어요. 저는 그걸 보여 주려는 겁니다. 이제 곧 마을 사람들이 온다죠? 잘 됐어요. 저는 망루 위에 올라가서 외치겠어요.

촌장 : 뭐라구?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킨 후에 웃으며) 사실 우습기도 해. 이리 떼? 그게 뭐냐? 있지도 않는 그걸 이 황야에 가득 길러 놓구, 마을엔 가시 울타리를 둘렀다. 망루도 세웠구, 양철북도 두들기구, 마을 사람들은 무서워서 떨기도 한다. 아하, 언제부터 네가 이런 거짓놀이에 익숙해졌는지 모른다만, 나도 알고는 있지. 이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 그럼 촌장님, 저와 같이 망루 위에 올라가요. 그리구 함께 외치세요.

촌장 : 그래, 외치마.

: , 이젠 됐어요!

촌장 : (혼자말처럼) …… 그러나 잘 될까? 흰구름, 허공에 뜬 그것만 가지구 마을이 잘 유지될까? 오히려 이리 떼가 더 좋은 건 아닐지 몰라.

: 뭘 망설이시죠?

촌장 : 아냐. 아무 것두……난 아직 안심이 안 돼서 그래. (온화한 얼굴에서 혀가 낼름 나왔다가 들어간다.) 지금 사람들은 도끼까지 들구 온다잖니? 망루를 부순 다음엔 속은 것에 더욱 화를 낼 거야! 아마 날 죽이려구 덤빌지도 몰라. 아니 꼭 그럴 거다. 그럼 뭐냐? 지금까진 이리에게 물려 죽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는데, 흰구름의 첫날 살인이 벌어진다.

: 살인이라구요?

촌장 : 그래, 살인이지. (난폭하게) 생각해 보렴, 도끼에 찍힌 내 모습을. 피가 샘솟듯 흘러내릴 거다. 끔직해. , 너는 그런 꼴이 되길 바라고 있지?

: 아니에요, 그건!

촌장 : 아니라구? 그렇지만 내가 변명할 시간이 어디 있니? 난 마을 사람들에게 왜 이리 떼를 만들었는지, 그걸 알려 줘야 해. 그럼 그들도 날 이해해 줄거야.

: 네 그렇게 말씀하세요.

촌장 : 허나 내가 말할 틈이 없다. 사람들이 오면, 넌 흰구름이라 외칠 거구, 사람들은 분노하여 도끼를 휘두를 테구, 그럼 나는, 나는…… (은밀한 목소리로) , 네가 본 그 흰구름 있잖니, 그건 내일이면 사라지고 없는 거냐?

: 아뇨. 그렇지만 난 오늘 외치구 싶어요.

촌장 : 그것 봐. 넌 내 피를 보고 싶은 거야. 더구나 더 나쁜 건, 넌 흰구름을 믿지도 않아. 내일이면 변할 것 같으니까, 오늘 꼭 외치려구 그러는 거지. 아하, 넌 네가 본 그 아름다운 걸 믿지도 않는구나!

: (창백해지며) 그건, 그건 아니에요!

촌장 : 그래? 그럼 너는 내일까지 기다려야 해. (괴로워하는 파수꾼 다를 껴안으며) 오늘은 나에게 맡겨라. 그러면 나도 내일은 너를 따라 흰구름이라 외칠테니.

: 꼭 약속하시는 거죠?

촌장 : 물론 약속하지.

: 정말이죠. 정말?

촌장 : 그럼. 정말 약속한다니까.

 

파수꾼 나가 들어온다.

 

: 또 헛치었습니다. 이리는 워낙 교활해서요. 친 것 같아도 가 보면 달아나구 없어요.

촌장 : 다음에는 꼭 잡히겠지요.

: 미안합니다. 이번에 잡았더라면 그 껍질을 촌장님께 선사하구 싶었는데…….

촌장 : 받은 거나 다름없이 감사합니다.

: (촌장에게 안겨 있는 다를 가리키며) 그 앤 지금 몹시 아픕니다.

촌장 : , 열이 있는 것 같군요.

: 간밤에 담요를 덮지 않아서 병이 났어요.

촌장 : 이만한 나이 때 누구나 한 번씩은 앓는 병이겠지요.

: 내 잘못이었어요. 담요를 꼭 덮어 줘야 하는 건데.(다에게) 얘야, 난 널 좋아해. 아픈 것 빨리 좀 나아 주렴.

: (힘없이 웃으며)……고마워요.

: (관객석 쪽으로 돌아서다가, 흠칫 놀라며) 웬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오죠?

촌장 : 마을 사람들이지요.

: 마을 사람들요?

촌장 : (관객들을 향해) 어서 오십시시오, 주민 여러분. 이 애가 그 말을 꺼낸 파수군입니다. 저기 방긋 웃고 있는 식량 운반인. 이 애가 틀림없지요? . 그렇다고 확인했습니다. 이리 떼인지 이니면 흰구름인지, 직접 이 아이의 입을 통하여 들어 봅시다.

 

파수꾼 다, 쓰러질 것 같은 걸음으로 망루를 향해 걸어간다. 나가 근심스럽게 쫓아간다.

 

: 얘야, 괜찮겠니?

: …… .

: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구나. 넌 이리 떼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겁쟁인데. 망루 위에 올라가서 엎드리면 안 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널 보러 오지 않았니? 얼마나 큰 영광이냐. 이 기회에 말이다, 넌 너 자신이 파수꾼이라는 걸 힘껏 자랑해야 한다. 알았지, ?

촌장 그만 올라가게 하십시오.

 

파수꾼 다는 망루 위에 올라간다. 긴 침묵. 마침내 부르짖는다.

 

: 이리 떼다! 이리 떼가 몰려온다!

 

파수꾼 가의 손이 번쩍 들려지며 그도 외친다. 파수꾼 나는 신이 나서 양철북을 두드린다. 북소리, 한동안 계속된다.

 

: 북소리 중지! 이리 떼는 물러갔다.

촌장 : 주민 여러분! 이것으로 진상은 밝혀졌습니다. 흰구름은 없으며 이리 떼 뿐입니다. 이 망루는 영구히 유지되어야겠지요. 양철북도 계속 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음 이리의 습격 때까진 잠시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돌아가십시오. 가시거든 마을 광장에 다시 모이시기 바랍니다. 수다쟁이 운반인의 처벌을 논의합시다. 그럼 어서 돌아가십시오. 이리 떼가 여러분을 물어뜯으러 옵니다.

 

망루 위에서 파수꾼 다가 내려온다.

 

: 난 네가 이렇게 용감해질 줄은 몰랐구나.

촌장 : 고맙다. 정말 잘해 주었다.

: 아냐, 난 몰랐던 건 아니었어. 넌 나에게 용감한 사람이 되마구 약속하질 않았니? 난 그 때 이미 알아본거야, 넌 꼭 훌륭한 파수꾼이 될 거라구.

촌장 : , 나 좀 보자. (한갓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너한테는 안됐다만, 넌 이 곳에서 일생을 지내야 한다.

: …… ?

촌장 : 마을엔 오지 말아라.

: (침묵)

 

바람 부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온다.

 

촌장 : 난 저 사람들이 싫어. 내 마음은 너와 함께 딸기 따기에 가 있다. 넌 내 추억이야. 너에게는 내가 늘 그리워하던 것이 있다.

사이.

 

촌장 : …… 하지만, 여긴 너무 쓸쓸해.

사이.

 

촌장 ……미안하다.

 

사이.

촌장 : 그럼 잘 있거라.

: 가시려구요, 촌장님?

촌장 :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 제가 저만큼 바래다 드리지요. 덫도 좀 살펴볼 겸 해서요. (함께 걸어가며) 그런데 말입니다, 양철북을 치던 내 모습이 멋있지 않던가요?

 

촌장과 파수꾼 나, 퇴장한다. 바람소리만이 더욱 거칠어진다. 잠시 후, 망루 위의 파수꾼이 이리 떼다!’ 외친다. 파수꾼 다는 조용히 양철북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

                                                                                                                          <이강백, 희곡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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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

-외래어 표기법은 한국어에 들어온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데 필요한 사항들을 정해 놓은 어문 규범이다.

 

1) 제1 항 - 외래어는 국어의 현용 24자모만으로 적는다.

 * 현용 24자모

① 자음자 -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총14자)

② 모음자 -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총 10자)

 

 *간혹 '갭(gap), 케이프(cape), 웨스트(west)' 등의 표기에 사용된 'ㅐ,ㅔ, ㅝ, ㅞ'는 24자모의 자모에 초함되어 있지 ㅇ않아서 제1항에 대한 예외라고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 글자들은 'ㅏ+ㅣ(ㅐ), ㅓ+ㅣ(ㅔ), ㅜ+ㅓ(ㅝ), ㅜ+ㅓ+ㅣ(ㅞ)'에서 보듯이 기존 24자모에 속하는 모음자를 합쳐서 만든 것이므로 24자모만 적는다는 원칙을 위배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2) 제2항 - 외래어의 1음운은 원칙적으로 1기호로 적는다.

* 음운과 표기의 관계를 일대일로 한다는 내용이다. 동일한 영어 자음 'f'를 'fashion'에서는 '패션'과 같이 'ㅍ'으로 적고 'fighting'에서는 '화이팅'과 같이 다른 자음으로 적지 않는다.

 

3) 제3항 - 받침에는 'ㄱ,ㄴ,ㄹ,ㅁ,ㅂ,ㅅ,ㅇ'만을 쓴다.

 * 자음으로 끝나는 외래어 뒤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를 붙였을 때, 'ㄱ,ㄴ,ㄹ,ㅁ,ㅂ,ㅅ,ㅇ' 이외의 음으로 실현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racket' 뒤에 '이, 을, 에'를 결합하면, '[라케시], [라케슬], [라케세]'로 발음된다. 그래서 '라켙'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라켓'이라고 표기한다.

 

4)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 영어나 프랑스, 일본어 등에는 유성 파열음과 무성 파열음의 대립 즉, 'g'와 'k' 등의 대립이 존재하지만 국어에는 이러한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국어에는 무성 파열음만이 존재하며, 그 대신 무성 파열음 내에서 예사소리, 거센소리, 된소리가 각각 대립을 보인다.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이러한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국어의 유성 파열음은 국어의 예사소리로, 무성 파열음은 초성의 경우 거센소리, 종성의 경우 예사소리로 표기하도록 하였다.

 

5) 제5항 -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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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자 표기법의 기본 원칙

-로마자 표기법은 우리말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방법을 규정한 어문 규범이다.

 

1) 제1항

- 국어의 로마자 표기는 국어의 표준 발음법에 따라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이 읽을 것을 전제로 하므로, 한글 철자를 반영하는 것보다는 실제 발음대로 적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2) 제2항

- 로마자 이외의 부호는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다.

(발음상의 혼동을 막기 위해 음절 사이에 붙임표(-)를 사용하는 것은 허용한다.)

 

2. 표기 일람

 

1) 모음

 

① 단모음

 

a eo o u eu l i ae oe wi

* 'ㅢ'의 로마자 표기 - 'ㅢ'는 'ㅣ'로 소리가 나더라도 항상 'ui'로 적는다. 예를 들어, '광희문'은 표준 발음이 '[광히문]'이지만 'Gwanghimun'으로 적는다.

 

 

② 이중 모음

 

ya

yeo

yo

yu

yae

ye

wa

wae

wo

we

ui

 

2) 자음

 

파열음

파찰음

마찰음

g,k

kk

k

d,t

tt

t

b,p

pp

p

j

jj

ch

s

ss

h

비음

유음

n

m

ng

r,l

* 'ㄱ,ㄷ,ㅂ'은 모음 앞에서는 'g,d,b', 자음이나 어말에서는 'k,t,p'로 적음.

 단, 'ㄹ'은 모음 앞에서 'r', 자음이나 어마에서는 'ㅣ'로 적되 'ㄹㄹ'은 'ㅣㅣ'로 적음.

 

3. 표기상의 유의점

 

1) 로마자 표기는 '국어의 표준발음법에 따라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음운 변화가 일어날 경우 이를 표기에 반영한다. 한편, 고유명사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적는다.

① 자음과 자음 사이에서 동화 작용이 일어나는 경우 - 백마[뱅마] Baengma

② 'ㄴ,ㄹ'이 덧나는 경우 - 학여울[항녀울] Hangnyeoul

③ 구개음화가 되는 경우 - 해돋이[해도지] haedoji

④ 'ㄱ, ㄷ, ㅂ,ㅈ'과 'ㅎ'이 합하여 거센소리가 나는 경우 - 좋고[조코] joko, 묵호[무코] Mukho

( 다만, 체언에서 일어나는 거센소리는 로마자 표기에 반영하지 않음)

 

2) 인명은 성과 이름의 순서로 띄어 쓴다. 이름은 붙여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음절 사이에 붙임표(-)를 쓰는 것을 허용한다. 또한, 이름에서 일어나는 음운 변화는 표기에 반영하지 않는다.

(한복남 Han Boknam/ Han Bok-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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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추모(鄒牟)]라고도 하고, 중해(衆解)라고도 한다]이다.

 이에 앞서 부여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 후사를 구하였다.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마주 대해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니, 웬 어린아이가 금빛 개구리[개구리 '와(蛙)'자는 달팽이 '와(蝸)'자로도 쓴다] 모양을 하고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야말로 하늘이 내게 주신 아들이로구나!" 하고서, 곧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그 뒤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기를 "요전날 천제께서 제게 내려와 이르시기를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고자 하니 너희는 이곳을 피해 가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토양이 기름져서 오곡을 기르기에 적당하니 도읍할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고는, 드디어 왕에게 권해 그곳으로 도읍을 옴기고, 국호를 '동부여(東扶餘-「광개토왕비」와 「모두루묘지」에는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나왔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옛 도읍지에는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하면서 그곳에 와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때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에게 영문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하백(河伯)의 딸인데 이름은 유화(柳花)라고 합니다. 동생들과 함께 나와 노는데, 그때 한 남자가 나타나 자기가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저를 웅심산(熊深山) 아래 압록강가에 있는 방으로 유인해 사통하고 가버리더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모는 제가 중매 없이 다른 남자를 허락한 것을 꾸짖고 드디어 우발수로 귀양살이를 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와가 이상하게 여겨 방안에 가두었는데 햇빛이 그녀를 비추는지라, 그녀가 몸을 끌어 피하면 햇빛이 다시 쫓아가며 비추었다. 이로 인해 태기가 있더니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닷되 정도 되었다. 왕이 알을 버려 개· 돼지에게 주었더니 짐승들이 먹지 않았고, 다시 길 가운데 버렸더니 소나 말이 피해 밟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들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주었다. 왕이 알을 쪼개려 했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 마친매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머니가 알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아이는 골격과 풍채가 아름답고 기이하여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숙성하게 빼어나 보통 아이와는 달랐다. 제 손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俗語)로 활을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를 아이의 이름으로 했다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어 늘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은 사람이 낳은 바가 아니고 그 사람됨이 용맹하니, 만약 일찌감치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그를 제거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은 허락하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이 날랜 말을 알아보고 먹이를 적게 주어 야위게 하고, 노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했더니, 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야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그 뒤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하여 그에게는 화살을 적게 주었는데도 주몽이 잡은 짐승이 매우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이 다시 그를 죽이려고 계획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이를 은밀히 알아차리고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장차 너를 해치려 하니 너의 재능과 지략을 가지고 어딘들 못 가겠느냐? 머뭇거리다가 치욕을 받느니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일을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 협보(陜父) 등 세 사람과 함께 벗을 삼아 엄시수(淹㴲水)[개사수(蓋斯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에 이르러 물을 건너려 했으나, 다리가 없었다. 주몽은 뒤쫓아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두려워 물을 향해 말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이다. 오늘 도망하는 길인데 뒤쫓는 이들이 거의 닥쳐오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더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어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 물고지와 자라가 곧 흩어져버려 쫓아오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모둔곡(毛屯谷) [『위서』에는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승려 옷을 입었으며, 한 사람은 마름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묻기를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삼베 옷을 입은 이는 "이름이 재사(再思)입니다"라고 하고, 승려 옷을 입은 이는 "이름이 무골(武骨)입니다"라고 하였으며, 마름 옷을 입은 이는 "이름이 묵거(默車)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도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克氏)를, 무골에게는 중실씨(仲室氏)를, 묵거에게는 소실씨(少室氏)를 성으로 내려주고, 이어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를 열고자 하는데, 때마침 이 세 어진 이들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서 각각 일을 맡기고 함께 졸본천(卒本川) [『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에 이르렀다. 그곳 토양이 비옥하고 산과 강이 험준한 것을 보고 마침내 도읍하고자 했으나, 미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단지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엮고 지냈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로 말미암아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한편,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을 때 그곳의 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왕이 주몽을 보고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 자기 딸을 아래로 삼게 했던바, 그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도 한다]

 이대 주몽의 나이 22세로, 이 해는 전한(前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이요, 신라 시족 혁거세 21년 갑신년(기원전 37)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따르는 이가 많았다. 그 지역이 말갈(靺鞨- 말갈은 중국 사서들의 인식에 따르면 선진시대의 숙신(肅愼), · 위대의 읍루(揖婁), 남북조 시대의 물길(勿吉)의 후신이며, 후대 여진(女眞)의 전신으로, 수·

 당시대에 해당하는 명칭이라 한다.)의 부락과 붙어 있으므로, 그들이 침노하고 노략질하여 해가 될까 염려해서 마침내 물리쳐 쫒아내니, 말갈이 두려워 복종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이 비류수 가운데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살고 있는 줄을 알았다. 이윽고 사냥하면서 찾아 올라가 비류국(沸流國)에 이르게 되었다. 그 나라의 왕 송양(松讓)이 나와보고 말하기를 "과인이 바다 귀퉁이에서 후미지게 살다보니 일찍이 군자를 만나보지 못했는데, 오늘 뜻밖에도 서로 만나게 되니 역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리오! 그러나 그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某處)에 와서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송양이 말하기를 "우리는 여기에서 여러 대 동안 왕이 되어왔고, 또 땅이 좁아 두 임금을 용납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대는 도읍을 세운 지가 얼마 되지 않으니 우리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왕이 그의 말에 분개한 나머지 그와 더불어 말다툼을 하다가 다시 활로 기예를 겨루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가 없었다.

 

 2년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므로, 그 땅을 다물도(多勿島)라 하고 송양을 그 주인으로 봉하였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일러 '다물'(多勿)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3년 봄 3월에 황룡이 골령(鶻嶺)에 나타났다.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는데, 그 빛이 푸르고 붉었다.

 

 4년 여름 4월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이 7일 동안이나 빛깔을 분별하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6년 가을 8월에 신이한 새들이 궁궐 뜰에 모여들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시켜서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치게 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만들었다.

 

 10년 가을 9월에 난(鸞) 새들이 왕궁에 모여들었다. 겨울 11월에 왕이 부위염(扶尉猒)에게 명해 북옥저(北沃沮)를 쳐 없애게 하고, 그 땅을 성읍으로 만들었다.

 

 14년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 나라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 제사를 지낸 다음 신묘(神廟)를 세웠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부여에 보내 방물을 바쳐서 그 은덕에 보답하였다.

 

 19년 여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로부터 그의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왔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에 왕이 승하하니, 이때 나이가 40세였다.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고, 왕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참고 문헌

 

김부식 지음, 이강래 옮김, 삼국사기1, 한길사, 2018.

 

 

 

 

 

 

 

 

 

 

 

 

 

 

1. 작가 - 월명사

2. 연대 - 신라 경덕왕 (8세기 경)

3. 별칭 - 위망매영재가(爲亡妹營齋歌)

4. 갈래 - 향가(10구체), 서정시

5. 성격 - 애상적, 추모적, 불교적

6. 표현 - 비유적, 상징적

7. 주제 - 죽은 누이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함

8. 출천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월명사 도솔가

9. 작품의 구조

 제1 · 2구 - 죽음에 대한 두려움

 제3 · 4구 - 죽은 누이에 대한 정

 제5 ·6구 - 생사의 무상함을 나뭇잎에 비유

 제7 · 8구 - 누이의 요절에 대한 한(恨)

 제9 · 10구 - 극락에서의 재회를 기다림

 

10. 치밀한 구성과 비유의 기교 - 이 작품은 '직설- 비유- 직설'로 교체되면서 시적 정서가 심화되고 있다. 동기간의 죽음을 한 나무 가지에서 떨어져 흩어지는 낙엽에 비유한 것도 뛰어나지만, 누이의 이른 죽음을 '이른 바람에 떨어진 잎'으로 구상화함으로써 사별(死別)의 슬픔과 허무감까지 표현한 것은 절묘하기 이를 데 없다.

 

11. 차원 높은 서정성과 죽음의 의미

- 이 노래의 지배적 정서는 누이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애절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화자는 '생사의 길이 여기에 있음'을 말하고, 무상한 죽음을 가을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에 비유하였다. 세속적 인간들은 죽음을 현세와 다른 곳의 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 시의 화자는 죽고 사는 가림길이 바로 내가 지금 디디고 있는 이곳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는 자연의 섭리 앞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 한계를 자각한 것이며, 죽음을 공간적 이미지로 표현한 탁월한 시상(詩想)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전반을 지배하는 두려움과 슬픔의 정서는 낙구(落句)에 이르러 불교적 신앙심에 의해 돌연히 반전된다. 화자의 시선이 미타찰로 급선회하면서 사별의 슬픔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참고 자료

 

정경섭 엮음, 고전 문학의 이해와 감상1, 문원각, 2003.

월명사의 도솔가 - 삼국유사 권 제5 감통 제7

 

 경덕왕 19년 경자년(760) 4월 초하루에 두 해가 나란히 나타나 열흘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천문을 맡은 관리(日官)가 아뢰었다.

 "인연 있는 승려를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 공덕이란 연기와 윤회를 바탕으로 하는 불교 행위의 하나고, 꽃을 뿌려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이 산화공덕이다)을 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원전(朝元殿)에다 깨끗이 단을 만들고 청양루(靑陽樓)에 행차하여 인연있는 승려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月明師)가 밭 사이로 난 남쪽 길을 가고 있었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 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햇다. 월명사가 말했다.

 "신승은 국선의 무리에 속하여 단지 향가만을 알 뿐 범성(梵聲-찬불가인 범패(梵唄)로서 범어로 하는 염불이다)은 익숙하지 못합니다."

 왕이 말했다.

 "이미 인연 있는 승려로 지목되었으니, 향가를 지어도 좋소."

 이에 월명사가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불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 여기에 산화가를 부를제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받들어

    미륵좌주(彌勒座主-부처님)를 모셔라.

 

 그 시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용루(龍樓)에서 오늘 산화가를 불러

    푸른 구름에 한 송이 꽃을 날려 보낸다.

    은근하고 곧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니

    도솔천의 대선가(大仙家)를 멀리서 맞이하리.

 

 

 지금 세속에서는 이 시를 가리켜 「산화가」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니 마땅히 「도솔가(兜率歌)라고 해야 한다. 이와 별도로 「산화가」가 있으나, 글이 번잡하여 싣지 않는다.

 얼마 후 해의 괴이함이 곧 사라졌다. 왕은 이것을 기려 좋은 차 한 봉지와 수정염주 108개를 내려 주었다. 이때 갑자가 모습이 말쑥한 동자가 나타나 공손히 꿇어앉아 차와 염주를 받들어 궁전 서쪽의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은 그를 안 대궐(內宮)의 심부름꾼으로 여겼고, 왕은 법사의 시종이라고 여겼는데, 확인해 보니 모두 잘못된 생각이었다. 왕이 매우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뒤쫒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의 탑 안으로 사라졌고, 차와 염주는 남족 벽에 그려진 미륵상 앞에 있었다. 이에 월명의 지극한 덕과 정성이 이처럼 부처님(至聖)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조성에서나 민간에서나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은 월명사를 더욱 존경하여 다시 비단 백 필을 주어 큰 정성을 기렸다.

 월명사는 또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재를 올리면서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내는데, 문득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종이돈(紙錢-죽은 자가 극락으로 갈 때 노잣돈으로 쓰라는 의미에서 장례식 때 쓰는 가짜 돈으로 지금도 대만에서는 장례식에서 이 풍습을 따르고 있다.)을 날려 서쪽으로 사라지게 했다.

 그 향가는 다음과 같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으니 두려워지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어찌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彌陀刹-아미타불의 국토라는 뜻이니 극락세계를 말한다)에서 만날 나

    도를 닦으며 기다리련다.

 

 

 월명은 언제나 사천왕사(四天王寺)에 살면서 피리를 잘 불었다. 일찍이 달밤에 피를 불며 문 앞의 큰길을 지나가자, 달이 그를 위해서 운행을 멈추었다. 이 때문에 이 길을 월명리(月明里)라 하였으며 월명사 또한 이 일로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월명사는 바로 능준대사(能俊大師)의 제자다. 신라 사람들은 향가를 숭상한 지 오래되었는데, 대개 시가와 송가(頌歌)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바람이 종이 돈을 날려 저승 가는 누이의 노자를 삼게 했고,

     피리 소리는 밝은 달을 움직여 항아(姮娥-달에 사는 미인으로 중국 하나라 예(羿)의 부인이었다)를 머무르게 했네.

     도솔천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마라.

     만덕화(萬德花) 한 곡조로 즐겨 맞이하리.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민음사, 2019.

 

 

 

신라본기 제9

 

경덕왕(景德王)이 왕위에 오르니, 이름은 헌영(憲英)이고 효성왕의 친동생이다.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으므로 헌영을 태자로 세웠던지라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비는 이찬 순정(順貞)의 딸이다.

 

 원년(742) 겨울 10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2년 봄 3월에 주력공(主力公)의 집 소가 한꺼번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당 현종이 찬선대부(贊善大夫) 위요(魏曜)를 보내와 조상하는 제사를 지내게 하고, 아울러 왕을 신라 왕으로 책립했으며, 선왕의 관작을 승습하게 하였다.

 현종의 조서에 이르기를 "작고한 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영해군사신라왕(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指節寧海軍使新羅王) 김승경(金承慶)의 아우 헌영(憲英)은 대를 이어 어진 생각을 품고 떳떳한 예의를 마음에 쏟아 대현(大賢)이 베푸신 풍속과 교화는 조리가 더욱 밝아졌으며, 중국 법제의 의관을 성심으로 본받고 있도다. 바닷가 보배를 사신을 보내 나르고, 구름과 짝하는 머나먼 길을 따라 조정에 왕래하며, 대대로 충순한 신하가 되어 거듭 충절을 드러냈도다. 지난번 형이 나라를 계승하더니 세상을 뜨고 뒤이을 아들이 없으매 아우가 이를 받아 그 뒤를 이었으니, 이 또한 떳떳한 법도라. 이에 제후를 품어들이는 예의로 우대해 책명하노니, 마땅히 옛 전통을 지켜 번방(蕃邦)의 어른된 명망을 계승할 일이다. 아울러 특별한 예우를 더해 중국 관작의 칭호를 내려주나니, 형의 관작인 신라왕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충지절영해군사(新羅王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充持節寧海軍使)를 이어받으라"라고 하였다. 이와 함께 황제하 주해한 『효경』 한 부를 보내주었다.

 여름 4월 서불한 김의충(金義忠)의 딸을 맞이해 왕비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지진이 있었다. 겨울 12월에 왕의 아우를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했더니, 황제가 좌청도솔부원외장사(左淸道率府員外長史)의 관위를 수여하고 녹색 도포와 은제 디를 내려주어 돌려보냈다.

 

 3년 봄 정월에 이찬 유정(惟正)을 중시로 삼았다. 윤 2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여름 4월에 왕이 친히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말을 바쳤다. 겨울에 요사스러운 별이 중천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닷 말들이 그릇만하였으며 열흘 만에야 없어졌다.

 

 4년 봄 정월에 이찬 김사인(金思仁)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에 수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5월에 가물었다. 중시 유정이 물러나고, 이찬 대정(大正)이 중시가 되었다. 가을 7월에 동궁을 수리하였다. 또 사정부(司正府)와 소년감전(少年監典)과 예궁전(穢宮典)을 설치하였다.

 

 5년 봄 2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여름 4월에 죄수를 크게 사면하고 큰 술잔치를 베풀었으며, 승려 1백 50명에게 도첩(度牒)을 주었다.

 

 6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를 시중(侍中)으로 고쳤다. 국학의 여러 전공 과정에 박사(博士)와 조교를 두었다.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3월에 진평왕릉에 벼락이 쳤다. 가을에 가물더니,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전염병이 돌자, 사신을 열 개 방면으로 내보내 안정시키고 위무하였다.

 

 7년 봄 정월에 천구성이 땅에 떨어졌다. 가을 8월에 태후가 새로 지은 영명궁(永明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처음으로 정찰(貞察) 1명을 두어서 백관을 규찰해 바로잡게 하였다. 아찬 정절(貞節) 등을 보내 북쪽 변경을 감찰하게 하였다. 처음으로 대곡성(大哭城)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8년 봄 3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에 천문박사(天文博士) 1명과 누각박사(漏刻博士) 6명을 두었다.

 

 9년 봄 정월에 시중 대정이 면직하고, 이찬 조량(朝良)이 시중이 되었다. 2월에 어룡성(御龍省) 봉어(奉御) 2명을 두었다.

 

 11년 봄 3월에 급찬 원신(原神)과 용방(龍方)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동궁아관(東宮衙官)을 두었다. 겨울 10월에 창부(倉部)에 사(史) 3명을 더 두었다.

 

 12년 가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접견하지 않자 그냥 돌아갔다. 무진주에서 흰 꿩을 바쳤다.

 

 13년 여름 4월에 수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5월에 성덕왕의 비(碑)를 세웠다. 우두주에서 상서로운 지초(芝草)를 바쳤다. 가을 7월에 왕이 관리에게 명해 영흥사(永興寺)와 원연사(元延寺)를 수리하였다. 8월에 가물고 누리가 있었다. 시중 조량이 물러났다.

 

 14년 봄에 곡식이 귀해 백성들이 굶주렸다. 웅천주의 향덕(向德)은 가난하여 봉양할 것이 없자, 다리의 살을 베어 그의 아버지에게 먹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에게 물자를 자못 후하게 내려주고, 아울러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였다.

 망덕사으 탑이 흔들렸다[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에는 "그 나라에서 당을 위해 이 절을 세웠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두 탑이 서로 마주하여 높이는 13층이었는데, 갑자기 흔들리면서 붙었다 떨어졌다 하여 며칠 동안이나 마치 쓰러지려는 듯하였다. 이해에 안녹산(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났으니, 아마 그 감응인 듯싶다"라고 하였다.

 여름 4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가을 7월에 죄수를 사면했으며 늙은이, 병자,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없는 늙은이들을 찾아 위문하고 곡식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이찬 김기(金耆)를 시중으로 삼았다.

 

 15년 봄 2월에 상대등 김사인(金思仁)이 근년에 재이(災異)가 자주 나타나는 까닭에 상소하여 시국 정치의 잘잘못을 극론했더니, 왕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왕은 현종이 촉(蜀) 지방에 있다는 마을 듣고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成都)에 이르러서 조공하게 하였다. 이에 현종이 친히 5언 10운시를 써서 왕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신라 왕이 해마다 조공을 닦고 예악과 대의명분을 잃지 아니함을 가상히 여겨 시 한 수를 내려주노라"라고 하였다. 그 시는 이러하다.

 

   천지사방은 명암과 동서로 나뉘어 있어도

   세상 만물은 중심자리를 마음에 머금도다

   조공해오는 구슬과 비단은 천하를 두루 돌아

   산 넘고 물 건너 상도(上都) 향해 찾아든다

   아득한 회포야 머나먼 동방에 막혔어도

   오랜 세월 천자의 교화 부지런히 받들었다

   가없이 드넓은 땅 끝 닿은 그곳은

   깊고 푸른 바다 건너 귀퉁이에 있거니와

   사람마다 명분과 의리의 나라라고 일컫나니

   어찌 산 다르고 물 다른 이방이라 할 것인가

   사신은 다녀가면 풍속 교화 전해 받고

   사람마다 찾아와서 법전 제도 익혀간다

   의관 차림새는 예의범절 받들 줄 알고

   충성과 신의는 유풍(儒風)을 높힐 줄 안다

   성실도 하여라, 하늘이 굽어보리니

   어질기도 하여라, 그 덕행이 외로우랴

   깃발 아래 서로 도와 백성을 다스릴새

   보내준 후한 선물 애틋한 정성 깃들었다.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매운 풍상에도 늘 변하지 말지라

 

 

 현종이 촉(蜀) 지방에 갔을 때 신라가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황제 있는 곳까지 찾아가서 조빙했으므로, 그 지극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시를 준것이다. 그 시 가운데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매운 풍상에도 늘 변하지 말지라"라고 한 것은 아마 옛 시에 "모진 바람이 있은 후에 굳센 풀을 알 수 있고, 난시에야 비로소 곧은 신하를 알게 된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선화(宣和) 연간에 송에 사신으로 갔던 김부의(金富儀-김부식의 아우)가 이 시의 각본(刻本)을 지니고 변경(汴京)에 들어가 관반학사(館伴學士) 이병(李邴)에게 보였더니, 이병이 황제에게 올렸다. 황제는 양부(兩府) 및 여러 학사들에게 돌려보인 후, 조칙을 전해 이르기를 "진봉시랑(進奉侍郞)이 바친 시는 참으로 명황(明皇)의 글씨로구나"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한다.

 여름 4월 큰 우박이 내렸다. 대영랑(大永郞)이 흰 여우를 바쳤으므로 남변제일(南邊第一)의 관위를 수여하였다.

 

 16년 봄 정월에 상대등 사인이 병으로 면직하자, 이찬 신충(信忠)이 상대등이 되었다. 3월에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월봉(月俸)을 없애고 다시 녹읍(祿邑)을 내려주었다. 가을 7월에 영창궁(永昌宮)을 중수하였다. 8월에 조부(調府)에 사(史) 2명을 더 두었다. 겨울 12월에 사벌주를 상주(尙州)로 고치고 1주· 10군 · 30현을 소속시켰다. 삽량주는 양주(良州)라 하고 1주· 1소경 · 12군 · 34현을 소속시켰다. 청주는 강주(康州)라 하고 1주· 11군 · 27현을 소속시켰다.  한산주는 한주(漢州)라 하고 1주· 1소경 · 27군 · 46현을 소속시켰다. 수약주는 삭주(朔州)라 하고 1주· 1소경 · 11군 · 27현을 소속시켰다. 웅천주는 웅주(熊州)라 하고 1주· 1소경 · 13군 · 29현을 소속시켰다. 하서주는 명주(溟州) 하고 1주· 9· 25현을 소속시켰다. 완산주는 전주(全州)라 하고 1주· 1소경 · 10군 · 31현을 소속시켰다. 무진주는 무주(武州)라 하고 1주·  14군 · 44현을 소속시켰다.

년 봄 정월에 시중 김기(金耆)가 죽었으므로, 이찬 염상(廉相)이 시중이 되었다. 2월에 왕이 교서를 내려 중앙과 지방 관리들 가운데 유가를 청해 만 60일이 된 이는 해직하도록 결단하였다. 여름 4월에 의술을 정교하게 궁구한 의관을 뽑아 궐내의 공봉의사(供奉醫師)에 충당하였다. 율령박사(律令博士) 2명을 두었다. 가을 7월 23일에 왕자가 태어났다. 우레와 번개가 심하더니 절 열여섯 곳에 벼락이 쳤다. 8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18년 봄 정월에  병부(兵部)와 창부(倉部)의 경(卿)과 감(監)을 시랑(侍郞)으로 고치고, 대사(大舍)는 낭중(郎中)으로 고쳤으며, 집사사지(執事舍知)는 집사원외랑(執事員外郞)으로, 집사사(執事史)는 집사랑(執事郞)으로 고쳤다. 조부(調府) · 예부(禮部)· 승부(乘府) · 선부(船府) · 영객부(領客府)·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 사정부(司正府)· 위화부(位和府)· 예작전(例作典)· 대학감(大學監) · 대도서(大道署) · 영창궁(永昌宮) 등의 대사(大舍)를 주부(主簿)로 고치고, 상사서(賞賜署) · 전사서(典祀署) · 음성서(音聲署) · 공장부(工匠府) · 채전(彩典) 등의 대사는 주서(主書)라 하였다. 2월에 예부의 사지(舍知)를 사례(司禮)로 고치고, 조부의 사지를 사고(司庫), 선부의 사지를 사주(司舟),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司例), 병부의 노사지(弩舍知)를 사병(司兵), 창부의 조사지(租舍知)를 사창(司倉)으로 고쳤다. 3월에 혜성이 나타나더니, 가을이 되어서야 없어졌다.

 

 19년 봄 정월에 도성 동북쪽에서 북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사람들이 귀신의 북소리라고들 하였다. 2월에 궁궐 안에 큰 못을 파고, 또 궁구러 남쪽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淨橋)와 춘양교(春陽橋)를 놓았다. 여름 4월에 시중 염상이 물러나고, 이찬 김옹(金邕)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 7월에 왕자 건운(乾運)을 왕태자로 봉하였다.

 

 20년 봄 정월 초하루에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해에 햇무리가 끼었다. 여름 4월에 혜성이 나타났다.

 

 21년 여름 5월에 오곡(五谷)· 휴암(鵂巖) · 한성(漢城) · 장새(獐塞) · 지성(池城) · 덕곡(德谷)의 여섯 성을 쌓고 각각 태수를 두었다. 가을 9월에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22년 여름 4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수도에 바람이 크게 불어 기와가 날아가고 나무가 뽑혔다. 8월에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에 두번째 꽃이 피었다.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이 면직하였다.

 대나마 이순(李純)은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세속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버려 왕이 여러 차례 불러도 나오지 않더니, 머리를 깎아 승려가 되어 왕을 위해 단속사(斷俗寺)를 창건해 세우고, 그곳에서 살았다. 그 뒤 왕이 풍악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궁궐 문에 찾아와 왕에게 간하여 아뢰기를, "듣자오니 옛날 걸(桀)과 주(紬)가 주색을 탐닉해 음탕한 쾌락을 그치지 않더니, 이로 말미암아 정치가 문란해지고 국가가 패망했다 합니다. 이처럼 엎어진 수레바퀴 자국이 앞에 있으니, 뒤따르는 수레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거듭나시어 나라의 수명을 길이 하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감탄하여 곧 풍악을 그치게 하고, 다시 그를 내실로 이끌어 그가 말하는 오묘한 도리를 들었는데, 이야기가 세상을 다스리는 방책에까지 미치니 며칠이 되어서야 그쳤다.

 

 23년 봄 정월에 이찬 만종(萬宗)이 상대등이 되고, 아찬 양상(良相)이 시중이 되었다. 3월에 혜성이 동남방에 나타나고, 용이 양산(楊山) 아래 나타나더니 조금 있다가 날아가버렸다. 겨울 12월 11에 크고 작은 유성들이 나타났는데, 보는 이들이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24년 여름 4월에 지진이 있었따.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황제가 사신에게 검교예부상서(檢校禮部尙書)를 수여하였다. 6월에 유성이 심성(心星)을 침범하였다.

 이 달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덕이라 하고, 모지사(毛祗寺) 서쪽 산에 장사지냈다.(『고기』에는 이르기를 "영태(永泰) 원년 을사(765)에 죽었다"라고 했는데, 『구당서』 및 『자치통감』에는 모두 "대력(大曆) 2년(767)에 신라 왕 헌영(憲英)이 죽었다"라고 했으니 아마 잘못이 아닐까 한다.)

 

 

 

 

참고 문헌

 

김부식 지음, 이강래 옮김, 삼국사기1, 한길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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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일성왕의 큰아들로 신라 제8대 왕이며 154년에서 183년까지 재위했다.)이 즉위한 지 4년 정유년(157년)에 동해 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혹은 물고기라고도 한다)가 하나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했다.

 "이 사람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일본제기(日本帝記)』3)을 살펴 볼 때, [이때를]전후하여 신라 사람으로서 왕이 된 자가 없었다. 이는 변방 고을 작은 왕이지 진짜 왕은 아니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바닷가에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남편의 신발이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갔더니 바위는 또 이전처럼 그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왕에게 알리고 세오녀를 왕께 바쳤다. 부부는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녀는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일식과 월식의 자연 현상을 뜻한다)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렸었는데, 이제 일보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자 연오랑이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오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짐의 비(妃)가 짜 놓은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

 그러고는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연오랑이 준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했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은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연오랑과 세오녀>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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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평(永平-후한 명제(明帝) 유장(劉莊)의 연호) 3년 경신년(60년) 8월 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지나다 시림(始林-『삼국사기』 「잡지」에 의하면 탈해왕 9년(65년)에 시리에 닭의 신이한 변화가 있어 계림(鷄林)이라 고쳤다 한다. 지금의 경주시 교동 첨성대와 반월성 사이에 있다.) 속에서 커다란 빛이 밝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하늘에서 땅까지 자줏빛 구름이 드리워지고 구름 속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 황금 상자가 걸려 있었다. 상자 안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고 나무 밑에는 흰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 했다. 왕(탈해왕)이 숲으로 가 상자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났는데,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기 때문에 알지(閼智)라는 이름을 붙였다. 알지는 향언(鄕言)으로 어린 아이라는 뜻이다. 왕이 알지를 수레에 싣고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이 서로 뒤따르면서 춤을 추었다.

 

왕이 길일을 가려 태자로 책봉했으나 나중에 파사왕(婆娑王)ㅏ에게 양보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金氏)로 했다. 알지가 세한(勢漢-이병도는 '알지'와 동일 인물로 보았다.)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都)를 낳고, 욱부가 구도(俱道)를 낳고, 구도가 미추(未鄒)를 낳았다.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김알지(탈해왕 대)>

 

참고 문헌

 

일연,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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